<후회하지 않아>_이송희일
프롤로그
1.
맑은 시골의 하천. 수민이 나체로 부드럽게 수영을 하고 있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과 수민의 몸. 마침내 수민이 물 밖으로 솟구쳐 나오며, 하천 둔덕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둔덕 풀밭에는 수민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 이미 수영을 마쳤는지 팬티 바람으로 앉아서 커다란 그림을 펴보고 있다. 자동차 스케치. 스케치 밑에 서울 주소가 적혀져 있다. 약간 우울한 얼굴. 수민이 물 밖으로 기어 나와 소년 옆에 앉는다.
소년이 서운한 표정으로 수민에게 수화를 한다. 벙어리 소년이다. ‘멋있다. 서울 가면... 공부 열심히 해, 형.’의 뜻. 그러자 수민이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하는 수화를 하며, 소년의 머리칼을 흩어놓는다.
2.
시골길. 소년을 뒤에 태운 채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수민. 수민이 평온한 얼굴로 바람을 느끼며, 주위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열심히 폐달을 밟고 달려간다. 여름의 싱그러운 시골 풍경. 햇빛에 반짝이는 가로수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수민의 얼굴에 반쪽 그림자를 연신 떨어뜨린다. 수민의 어깨엔 길다란 화통이 매어져 있고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뭐가 좋은지 수민의 얼굴엔 맑은 미소가 띄워져 있다. 뒤에 탄 소년은 옆에 스케치북을 끼고 있다. 잠시 후, 소년이 수민의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자신의 귀에 꽂는다. 수민이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자전거가 달려간다.
3.
커다란 짐가방을 짊어진 채 길을 걷고 있는 수민.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일부러 환한 웃음을 짓고 뒤돌아서서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보인다. 뒤에는 ‘희망의 집’ 보육원 정문. 아이들이 죄다 안으로 뛰어가고 있고, 정문에는 예의 그 소년이 울지 않으려고 입을 다문 채 두 손을 바지 포켓에 찔러 넣고 있다. 그리고 손을 빼, 소년이 수화로 ‘나도 곧 갈 거야.’라고 말한다. 손을 흔들던 수민, 다시 뒤돌아서서 발길을 힘있게 재촉한다. 입가에 서서히 떠오르는 각오의 빛.
4.
기차역 플랫홈.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며 플랫홈 의자에 앉아 있는 수민. 발로 박자를 맞추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마저 입 안에 쏙 넣는 순간, 기차가 플랫홈으로 달려온다. 바람이 몰려온다. 흩날리는 머리칼, 입술에 묻어 있는 아이스크림. 고개를 외튼 채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씨익 웃는 열아홉 살 소년 수민. 달리는 기차의 바퀴.
타이틀 야만의 밤
씬1. INT. 냉장고 공장 (오후)
INSERT 원경으로 보이는 공장지대. 굴뚝 연기. 차가운 분위기.
위협적으로 철제물을 자르고 있는 프레스 기계. 냉장고 외곽 철판이 프레스에 잘려진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 기계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수민이다. 땀방울이 흘러나오고, 수민의 입에서 가쁜 숨. 하지만 열심히 일을 하는 수민. 그러다 철제 모서리에 팔뚝이 긁힌다. 아픈지 귀엽게 인상을 쓰며 다른 손으로 문지르는 수민. 뒤 라인에 있던 50대 노동자 광수가 혀를 찬다.
광수
쯔쯧... 밤에 제대로 잠을 안 자니까 그렇지 임마.
그러자 수민이 멋쩍게 씨익 웃는다. 이어 재철 쪽을 보면, 벽에 걸린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퇴근 후에 춤추러 가자는 시늉(몸을 우스꽝스럽게 흔들며)을 한다. 수민이 피식 웃으며 도리질을 한다. 뒤에서 광수, 재철을 가리키며
광수
저 놈, 또 발정 났지?
그러자 재철, 이 씨이, 하며 입을 벌려 이를 드러낸다. 이에 낀 보철기. 우스꽝스럽다.
씬2. EXT. 공장 앞 (저녁)
퇴근하는 노동자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수민이 손목 시계를 바라보며, 공장에서 뛰어나온다. 급한지 헐레벌떡 가방을 매고 뛰는 수민. 퇴근하던 광수 아저씨가 뛰어가는 수민의 엉덩이를 기특하다는 듯 손으로 툭 친다.
광수
이 대리!
수민,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내처 뛰어가기 시작한다.
씬3. INT. 캐드 학원 (밤)
열심히 학원에서 컴퓨터로 캐드에 관해 수업을 듣고 있는 수민. 컴퓨터 화면 속의 자동차 디자인. 졸린지 눈을 깜빡이지만,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곧추세우는 수민. 그때 바지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린다. 수민,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액정의 발신자 번호를 보고 귀에다 댄다.
수민
(잠깐 귀기울다 속삭이듯) 혜화역요? 지금 갈께요.
씬4. INT. 재철의 방 (밤)
재철이 집에 갓 들어왔는지 웃옷을 옷걸이에 걸고 있다. 그때 수민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수민
일찍 왔네.
재철
넌, 또 운전? (수민이 아무 말도 안 하자, 바지 벗으며) 안 피곤하냐? 너도 지독한 놈이다.
수민
(씨익 웃으며) 손님이 토했다고 팁 많이 주던데?
재철
드러운 놈들. 작작 처마시지........ 야, 너 학원도 좋고 알바도 좋은데.... 공장 일도 좀 신경 써라 임마. 안 들었어? 곧 정리해고 있을 거라고, 분위기 싸하더라. 너도 공장 들어온 지 1년 됐지?
수민
(피식 웃으며) 왜, 오늘 물 안 좋았어?
재철이가 뜬금없이 손을 내밀어 수민의 손을 잡는다.
수민
왜?
재철
내 손이 그렇게 거치냐?
수민
왜 그러는데?
재철
아 진짜, 오늘 나이트에서 깔쌈한 딸네미 하나 건졌거든. 근데 걔가 내 손 잡더니 이러는 거야. (목소리 간드러지게) 오빠, 왜 이렇게 손이 이태리 타올 같애?
수민이 웃는다.
재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목소리 깔며) 오빠는 골프를 좀 쳐서 그러는데.... 너는 얼굴로 쳤냐?
수민이 어이없어하며 계속 웃는다.
재철
웃지마 자식아. 쪽팔려 죽겠고만. (그리곤 벽 거울을 보고 보철기 이를 드러내보이며) 시발, 이빨만 고정되면 여자들 질질질 따라다니겠지? 이거 비싼 돈 들였는데...
수민
(일어나 앉으며) 형은 여자가 그렇게 좋아?
재철
(아주 빨리) 응. ........(거울로 수민을 보며) 넌 아직도 남자가 좋아?
수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소 침잠한 얼굴.
재철
보육원 식구들 다 알아 임마. 환선이 형이 입이 싸잖아. 그거 니가 여자 맛을 몰라서 그래 임마. 언제 형이랑 미아리나 한 번 뜨자. ......... 근데 너 남자랑은 자 봤냐?
수민
......
재철
정신차려 새꺄. 시발, 우리 같은 놈들이 언제 가족이 있었냐? .....
수민이 쓸쓸하게 웃으며 재철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때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 전화 받는 수민.
재철
그래. 니가 대리를 언제 해보겠냐. 출동, 이 대리. (밖으로 나가는 수민에게)
씬5. EXT. 자동차, 유흥가 거리(밤)
수민이 핸드폰을 끄면서 두리번거리다 지나가던 행인이 든 담뱃불에 팔을 덴다. 아, 뜨거워 씨이 하며 팔을 손으로 마구 문지르며 행인을 잠시 째려보는가 싶더니 다시 자동차 쪽으로 달려온다.
자동차 안. 뒷좌석 소파에 깊숙이 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민, 전화기를 끊으며 앞 유리창으로 수민을 바라본다. 수민, 팔을 문지르다가 손에 침을 묻혀서 상처에 바르며 뛰어오고 있다. 재민, 피식 웃는다. 입에는 불이 안 붙은 담배가 물려져 있다. 이윽고 수민, 열려진 뒤 유리창 사이로 얼굴을 보이며 밝게 인사한다.
수민
대리 부르셨죠?
재민, 수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땀에 흠뻑 젖은 수민. 손으로 땀을 쓰윽 닦는다. 수민을 빤히 바라보던 재민이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연다.
재민
불 있어요?
씬6. INT. 자동차(밤)
자동차가 밤거리를 달린다.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수민, 뒤에 앉아 있는 재민. 재민은 멀거니 창밖을 보고 있다. 열려진 창문,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헝큰다. 다소 우울하고 지친 듯한 표정. 흐르는 침묵. 이윽고 재민, 고개 돌려서 수민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민, 시선을 느꼈는지 힐끗 고개를 돌려 재민을 바라본다.
재민
CD 좀 틀어주세요.
수민
네.
수민, CD플레이어 버튼을 누른다. 그때 들려오는 재즈. 존 콜트레인의 음반. 재즈를 주의깊게 듣던 수민, 자동차 천장에 달린 백미러를 뒤쪽에 맞춰 조절한다. 백미러에 창밖을 보고 있는 재민의 옆얼굴이 보인다. 호기심 어린 수민의 눈. 그때 재민이 고개를 돌려 (백미러 속의) 수민과 눈이 마주친다. 수민, 얼른 고개를 떨군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바라보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민. 그러자 당황한 수민이 시선을 거두고, 유리창 앞의 휴지를 꺼내 괜히 이리저리 미러를 닦는다. 재민, 그런 수민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재민
정말로....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까요?
수민
(당황해서) 네?
달리는 자동차.
씬7. INT. 재민 오피스텔 현관 앞 (밤)
수민이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 서 있다. 현관문이 조금 열려져 있다. 수민이 이리저리 둘러보는 사이, 문이 열리고 재민이 밖으로 나온다. 손에 들고 있던 돈을 주며,
재민
지갑에 돈 있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번거롭게 해서.
수민
(밝게)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럼...
하고는 수민이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서서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른다.
재민
저....
수민
네?
재민
저 한 잔 더 할 건데, 같이 안 하실래요.
수민
(피식 웃으며) 일해야죠.
순간,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침묵이 흐른다.
재민
처음이에요?
수민
............
수민, 당황하고 떨리는 표정, 그리고 속내가 다 드러나 저항의 빛을 띤 눈으로 재민을 빤히 응시한다. 그때, 띵똥 하고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 수민이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단추를 누르고,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재민을 바라본다. 재민 한 발 다가간다.
재민
이름이 뭐예요?
하지만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수민, 대꾸하지 않고 재민을 빤히 쳐다본다.
CUT TO
1층 엘리베이터. 잠시 후 문이 열린다. 수민이 안에 타고 있다. 수민, 내리지 않고 천장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망설이는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이윽고 수민이 재민 오피스텔 층수 버튼을 눌러놓고,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간다. 닫히는 문.
씬8. INT. 공장 풍경 (아침)
몽타쥬
1. 공장지대. 많은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바삐 출근하는 모습.
2. 사람들 속으로 지각한 수민이 바쁘게 뛰어가고 있는 모습.
3. 공장 안에서 작업복을 막 걸친 수민이 일을 하기 시작한다. 광수 아저씨, 짐을 나르다가 수민에게,
광수
야, 이 대리. 너 이제 대리 안 한다며? 언제 관 뒀어?
수민
(피식) 저번 주요.
광수
잘했다, 임마. 얼굴 좋아진 것 봐라. (가면서) 이제 연애도 좀 하고 그래 임마. (가면서 웅얼웅얼) 젊었을 때.. 응응응도 많이 하고 그래야지.
피식 웃으며, 열심히 일을 하는 수민.
씬9. EXT. 공장 마당(점심)
축구공이 하늘로 솟구친다. 노동자들이 마당에서 족구를 하고 있다. 모두 손에는 아이스 바를 들고 있다. 수민, 재철도 함께 족구를 한다. 즐거운 휴식 시간. 모두 즐거운 표정. 수민이 공을 멋있게 차려다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환하게 웃는 수민. 웃으며 저쪽에서 걸어오는 광수 아저씨를 본다. 광수 아저씨, 표정이 암울하다. 수민, 일어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광수 아저씨를 맞는다.
수민
왜 그래요?
광수 아저씨, 수민을 바라보다 씨익 웃으며 눈물 한 방울 뚝 떨어뜨린다.
씬10. INT. 공장사무실 앞, 복도 (오후)
사무실 문이 열린다. 수민이 문을 세게 닫고 걸어나온다. 분노로 가득찬 얼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철이 수민 뒤를 따라온다.
재철
(근심어린) 어떻게 됐어? ... 너도 짤렸어?
수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빠르게 걷기만 한다. 얼굴은 여전히 분노와 침울.
재철
(그 뒤를 따르며) 시발 놈들, 비정규직이 무슨 지네들 좆밥야. 20명이나 한꺼번에 잘라내게. ..... 개새끼들. .... 존만한 새끼들.
수민, 코너를 돌아 다른 복도로 접어든다. 여전히 재철, 궁시렁거리며 뒤를 따른다. 그때, 맞은편에 걸어오는 세 사람의 양복 입은 일행. 수민은 거친 태도로 그냥 그 일행을 지나친다. 하지만 재철, 공손하게 그들에게 허리 굽혀 꾸벅 인사한다. 재철, 종종걸음으로 다시 수민 뒤따라온다.
재철
(안 들리게) 시발 놈들.
그때, 수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서서히 뒤로 고개를 돌린다. 이미 저쪽 편 양복 입은 일행도 서 있다. 재민이다. 재민도 수민을 알아보고 몸을 돌린 채 수민 쪽을 보고 있다. 깜짝 놀란 표정의 재민. 어안이 벙벙한 재철,
재철
왜?
수민과 재민,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둘 모두 놀란 표정이다. 하지만 수민의 얼굴은 굳어 있다. 이윽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수민. 재철, 그 뒤를 바짝 쫓아오며,
재철
왜? 저 사람 알아? 인사과 낙하산. (슬쩍 뒤 돌아보며) 시발 놈, 부사장 아들이잖아. 쟤, 알아?
수민, 그냥 굳은 얼굴로 걸음을 재촉한다.
씬11. 공장 안, 밖 (오후)
수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광수 아저씨는 일을 하다 말고 동작을 멈춘 채 라인 앞에 멍하니 서 있다. 부품들이 그냥 지나친다. 재철이 뛰어와서 대신 그 일을 해준다. 재철, 안타까운 눈으로 광수 바라본다. 광수, 장갑을 벗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노동자1이 광수 라인 쪽으로 온다. 수민도 일을 하며 안타까운 눈으로 광수를 바라본다.
재철
시발 놈들. 분위기 좆같네. 광수 아저씨 어떻게 하냐? (노동자1에게) 딸네미가 고3이라면서?
노동자1
그러게.... 아, 좆또, 우리 잔업만 늘어나겠네.
재철
그러니까, 시발, 내가 진작에 노조 만들자고 그랬잖아.
노동자1
나이트에서 언니들이랑?
수민, 여전히 무표정이다. 그때, 공장주임이 다가온다. 수민의 등을 치며 밖으로 나오라는 시늉을 한다. 수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씬12. INT. 복도 (오후)
수민과 주임이 복도에 선 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민이 창밖을 보고 있다. 주임이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다.
주임
(이죽거리듯) 어쨌든 복직돼서 좋겠다. 근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너 00라인의 종호 알지? 니 대신 걔, 짤렸거든.
수민, 표정 굳어진다.
주임
(궁금하다는 듯) 하여간 낙하산이 항상 문제야. 이거, 인사과 송 실장이 특별히 부탁해서 된 거야. 근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수민,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이어 화가 난 듯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간다.
씬13. INT. 공장사무실(오후)
문이 벌컥 열린다. 수민이 분노의 눈으로 문을 연 채 안을 노려본다. 안에는 재민이 앉아서 점퍼 차림의 공장 관리자와 회의를 하고 있다. 공장관리자와 재민이 놀란 눈으로 수민을 바라본다.
관리자
무슨 일야?
수민 아무 말 없이 재민을 바라보고 있다.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공장 관리자에게,
재민
잠깐만 자리 좀....
관리자 경계의 눈초리로 수민을 바라보며 사무실 바깥으로 문을 닫고 나간다. 그 동안 수민과 재민은 서로를 계속 응시하고 있다.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 재민이 수줍게 웃는다.
재민
안녕하세요, 이수민 씨. 여기서 일하는지 몰랐어요.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껄...
수민, 표정이 더 일그러진다. 수민 아무 말 없이 장갑을 벗어 저쪽으로 휙 던진다. 그리고는 상의 작업복의 단추를 천천히 푼다. 풀면서 여전히 재민을 똑바로 보고 있는 수민. 마침내 상의를 벗어 한 손에 쥐고는,
수민
고마운데요.... 니들이 한 번 입어봐요.
수민이 재민에게 상의 작업복을 휙 던진다. 재민, 놀란다. 수민,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문이 열리자 복도에 있던 관리자가 상의 벗은 수민을 보고 놀란다. 수민, 굳은 얼굴로 복도를 빠져나간다. 관리자가 몸을 기울여 안을 기웃거린다.
씬14. INT. 치킨집 (밤)
촌스러운 트롯트 가요가 흘러나오는 한적한 치킨집. 통닭 두 마리를 놓고 혼자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수민. 옆에는 사복과 짐가방이 놓여져 있다. 마치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닭고기를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다. 목이 메이는지 생맥주를 한 잔 들이킨다.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핸드폰이 울린다. 수민, 신경질적으로 밧데리를 빼버린다. 그리곤 일어나 통닭집 한켠에 놓인 파란색 공중전화박스 쪽으로 간다. 동전을 밀어 넣고 전화버튼을 누르는 수민. 여전히 입안에 가득 찬 닭고기 때문에 우물우물.
수민
(목 메인 소리) 환선이 형, 난데... 나...... 거기 자리 있어?
씬15. INT. 레스토랑, 주방 (밤)
근사한 레스토랑. 안에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레스토랑 매니저가 빈 접시를 들고 화난 표정으로 주방으로 간다. 주방에서 열심히 식기를 닦고 있는 손. 접시와 거품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식기를 닦는 사람은 수민이다. 땀을 닦아내며 정신없이 식기를 닦고 있는 중이다.
그때 레스토랑 매니저가 접시 하나를 들고 주방으로 버르르 들어온다. 접시를 수민 앞에 치켜든 채,
매니저
이거 니가 닦았지?
수민, 당황한 눈으로 말없이 접시를 바라본다.
매니저
기름기 남아 있잖아! 이렇게 더러워서 손님한테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접시는 손이 아니라 눈으로 닦는 거라니까!
매니저, 접시를 싱크대 위에 휙 던져놓고 쌩하니 나가며 환선을 흘겨본다.
매니저
(싸늘하게) 유환선 씨, 이따 나 좀 봐요.
매니저 사라진다. 동작을 멈춘 채 닦던 접시를 들고 지친 눈으로 씽크대 위의 접시를 바라보는 수민. 보조 주방장 환선이 수민 뒤로 슬그머니 나타나 접시를 집어든다.
환선
깨끗하기만 하고만... (밖을 쏘아보며 밖에 들리지 않게) 하여튼 결벽증 환자들.... 지들은 눈에서 퐁퐁이 나오나 보다. 눈으로 접시 닦게.
수민이 환선의 손에서 접시를 채뜨려 다시 물속에 집어넣는다. 환선이 속상한 눈으로 재민을 바라본다. 수민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후문으로 나간다.
씬16. INT. 레스토랑 (밤)
늦은 밤. 앞치마를 한 수민이 텅 빈 레스토랑에서 밀걸레질을 하고 있다. 손님도 없고 종업원도 없이 혼자 바닥 청소중. 의자가 모두 위로 올라가 있다. 수민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다. 잠시 후 뒤에 환선이 나타난다. 접시에 먹을 게 담겨 있다.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며,
환선
밤에도 찜통이다, 찜통.... 야, 너 가게에선 금연야 임마.
수민이 계속 밀걸레질을 한다. 환선이 의자 하나를 내려, 거기에 앉는다.
환선
언제부터 담배 폈냐?
수민
(무뚝뚝하게) 오늘.
환선
(안쓰럽게 바라보며) 오늘도 여기서 잘 거야?
수민
.......
환선
..... 하여간 그 놈의 똥고집. (속상한 듯) 접시 닦아서 언제 돈을 벌어?
수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환선, 담배연기 짙게 품어낸다. 접시를 내밀며,
환선
이거 먹어. 치킨수플레야.
수민
이따가.
환선
(접시를 다시 놓고) 그러니까 그냥 꾹 참고 재철이네 공장에 눌러 있지 임마. 너, 요새는 학원도 잘 안 가지?
수민
(귀찮은 듯) 밤에 일하잖아.
환선
이그... 아무래도 너 접시닦기 체질이 아닌갑다....
수민
(자조적으로) 매니저가 주말까지 나가래?
환선
(잠시 침묵 후에) 너... 다른 일 해볼래? 돈도 좀 번다던데.....
수민이 밀걸레질을 멈추고 뜨악해하는 표정으로 환선을 바라본다.
수민
무슨 일?
환선
...... 접시 나르는 일.
씬17. INT. 호스트바 (늦은 오후)
INSERT 도시 전경 세 컷
호스트바 밖. 수민이 ‘X-랜드’라는 호스트 바 간판 밑에서 쪽지와 간판을 번갈아 보고 있다. 골목이 으슥하다. 문뜩, 수민이 기분이 이상한지 뒤를 돌아다본다.
호스트바 안. 호스트바 안의 조그만 스탠드 바. 단란주점 같은 룸들이 보인다. 30대 초반의 잘 차려입은 남자 마담이 수민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금반지. 마담 뒤로, 깔끔한 양복으로 잘 차려입은 정태가 테이블을 정돈하고 있다.
마담
생각보다 여기 돈 많이 벌어. (엄지손가락으로 뒤에 있는 정태를 가리키며) 쟤, 저번 달에 한... 천은 벌었을 껄. 그냥, 잠깐 자존심만 버리면 돼.
맞은편에는 수민이 앉아 있다. 수민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져 있다.
수민
이거 환선이 형도 알아요?
마담
몰라. 그냥 단란주점인 줄 알아. 니가 이걸 하면 넌 말 하겠니? 다, 돈 벌려고 이 짓 하는 거지.
수민, 인상이 더 어둡게 구겨진다. 그때 마담 어깨 뒤로, 정태가 삐딱한 눈으로 수민을 유심히 쳐다본다.
마담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계속 접시나 닦든지... 할 사람 많아.
말이 끝나게 무섭게, 수민이 가방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린다. 마담이 수민의 뒷모습을 비웃듯이 바라본다.
정태
쟤 호모 같지 않아? 안 온다에 만 원.
마담
다시 올 걸.... 쟤, 고아래. 쟤네들.... 열 여덟 살 되면 고아원에서 다 나가야 되잖아. 갈 데가 어디 있어?
정태
아, 또 올드한 새끼네...
씬18. EXT. 길거리 (늦은 오후)
수민이 도망치듯 정신없이 길을 걷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분노와 자신에 대한 연민이 뒤섞인 표정. 마치 멈추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무작정 걷던 수민의 얼굴이 점차 슬픈 표정으로 바뀐다. 혼잣말처럼,
수민
개새끼들.
수민의 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씬19. INT. 호스트바 (늦은 오후)
호스트바 문이 벌컥 열린다. 땀에 젖은 수민,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CUT TO
마담
근데.... 우리, 호모들은 일 안 시켜. 이런 데 오는 손님들도 호모 싫어하고..... 난 내가 호모지만..... 애매호모한 거 싫어. 니가 진짜 호모여도 손님들 앞에선 끼 떨지 마. 넌 뭐야?
마담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뒤돌아온 수민을 향해 설교조로 말하고 있는 중이다. 맞은편 수민이 마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 이윽고 입을 연다.
수민
환선이 형한테 말하지 마요.
씬20. INT. 호스트바 (밤)
수민이 객실이 있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간다. 손으로 방 하나씩 열어본다. 마치 자신이 일할 곳을 처음 둘러보듯. 카메라에 객실의 실내 풍경이 계속 보인다. 이윽고 끝 방. 수민이 문을 연다. 그리곤 우두커니 선 채 실내 방을 들여다본다. 수민의 뒷모습, 외로우면서도 비장하다.
씬21. INT. 호스트바 손님 룸 (밤)
하얀 팬티만 입은 수민이 반나체로 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다.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마담. (slow) 술에 약간 취한 수민은 흐느적흐느적 관능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
이어, 수민이 테이블에 있던 양주를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룸 중앙 소파에는 양복 차림의 50대 남자가 박수를 추며 흥겨워하고 있다. 수민이 그 남자의 얼굴에 바짝 대고 자신의 사타구니를 격렬하게 흔들어댄다. 남자가 지폐를 수민의 팬티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자 뒤로 허리를 젖히는 수민.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허무가 가득하다.
씬22. INT. 모텔 (밤)
침대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수민. 중년 사내로 보이는 사람의 머리가 수민의 사타구니께에서 위아래로 움직인다. 오럴 섹스. 이어 사정을 하는지 몸을 조금 뒤틀며 얼굴을 찡그리는 수민.
CUT TO
옷을 다 입은 수민이 돈을 세고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내의 다리가 보인다.
사내 (voice over)
몸이 이쁘네... 아까 무슨 학과라고 그랬지?
수민이 주머니에 돈을 넣으며
수민
시각디자인학과요.
사내 (voice over)
참, 그랬지.... 이런 일.... 오래 했어?
수민, 한참 뜸을 들인다. 이윽고, 밀랍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수민
오늘 처음이에요.
씬23. EXT. 길거리 (밤)
편의점에서 나온 수민. 가그린 병을 따며 걷는다. 가그린. 표정이 건조하다. 다시 한 번 가그린. 수민이 깊은 새벽의 거리를 목을 젖힌 채 가글을 하며 혼자 걷고 있다.
씬24. EXT. 호스트바 앞 (밤)
수민이 막 호스트바 앞에 도착했을 때, 정태가 술 취한 손님을 택시에 막 태워 보내고 있다. 택시가 떠나자, 정태가 인상을 쓰며 자신의 어깨에 마치 더러운 게 묻은 것처럼 손으로 털어낸다. 다른 손에는 훔친 손님의 지갑이 들려져 있다. 정태,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수민이를 본다. 눈이 부딪힌다. 정태, 아무렇지도 않게 휴지통에 지갑을 던진다.
씬25. EXT. 동네 공원 (밤)
수민과 정태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정태는 벤치 위에 올라가 쭈그려 앉아 있다. 둘이 캔맥주를 마시고 있다.
정태
게이들은 이 짓 오래 못해. 가끔 손님이랑 눈 맞아서 도망가니까. 우리야 미친 척 돈 벌려고 그런 거지 뭐. (비웃으며) 시발 놈들, 드러.... 난 죽어도 엉덩이는 안 까인다. (분위기 반전용으로 수민에게) 소감이 어때? 첫 손님 받았는데.
수민이 아무 말 없이 맥주를 홀짝이자,
정태
설마 뒤로?
수민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다.
수민
형은 이거 왜 해요?
정태
왜 하냐고? (갑자기 목소리 간사하게) 저희 엄마가 위암에 걸리셨는데요, 집안에 돈 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제가 어쩔 수 없이...
수민
정말요?
정태
미쳤냐? 그냥 접대용이지....... 우리 엄마 죽은 지가 언젠데.... 너도 원생이라며? 나도 원생야. .... 소년원. (피식) 올드하지?
수민이 놀라면서 코믹한지 피식 웃는다. 그때 정태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메세지 착신 소리가 들린다. 정태, 벤치에서 폴짝 뛰어내려 핸드폰을 본다.
정태
마담 호출. 손님 왔나 보다.
정태가 먼저 공원 바깥쪽으로 향한다. 수민이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간다. 산책하듯 둘이 나란히 걷는다.
정태
난... 졸라 멍청한 늙다리 호모 하나 잡아서 등골까지 죄다 뽑아먹을 거야. 스포츠카도 하나 사고, 우리 선미한테 근사한 선물도 앵기고... 흐흐... 나 몸 판 돈, 우리 여자친구한테 다 갖다 바친다. .... 너는?
수민
여자 친구 없어요.
정태
아니, 왜 하냐고 이짓.
수민,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는 표정. 이윽고,
수민
돈.
정태
그래.... 돈. 시발 것, 돈만 벌 수 있으면.... (심장을 칼로 찌르는 흉내, 이어 두 손으로 받치는 흉내) 심장 한 쪽을 도려내서,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그리고는 정태, 갑자기 수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쥔다.
정태
난 말야, 니가 돈만 준다면 니 껏도 빨 수 있어.
하고는 별안간 수민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이어 씨익 웃는 정태. 당황했던 수민도 어이가 없어 씨익 웃는다. 정태, 수민의 어깨를 두르며,
정태
가자, 돈 벌러.
나란히 공원을 빠져 나가는 두 사람. 카메라가 부드럽게 그 뒤를 밟는다.
씬26. INT. 호빠 생활 (몽타쥬)
경쾌한 음악에 맞춰 수민의 호빠 생활 이미지들이 빠르게 흘러간다.)
1.
팬티만 입은 정태가 룸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평화롭게... 한 편에서는 팬티 차림의 수민이 벽을 향해 돌아서서 정태의 춤사위 리듬에 맞춰 몸과 손을 흔들며 자위를 한다. 마침내 오르가즘으로 몸을 떨며 찡그리는 얼굴. 이어 뒤로 돌아서며, 정액이 담긴 소주를 손님에게 건넨다.
2.
수민
저희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말을 하는 동안 어느 사내가 손을 수민의 바지춤 속에 집어넣고 물건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수민
(당연하다는 듯) 2차 나가실 거죠?
3
모텔방. 어느 중년 남자가 침대 맡에 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반나체의 수민이 반대쪽 침대 위에 걸터앉아 웃옷을 막 입고 있는 중이다.
남자
(울음소리) 나, 너 사랑하나 봐.
수민
(단추를 꿰며 심드렁하게) 내일도 우리가게 놀러 오세요.
4
길거리. 귀여운 새끼 강아지를 안고 한 손에 안고 있는 수민, 발걸음이 다소 가볍다. 비싼 양복에 고급 선글라스. 사랑스러운 듯 강아지를 쓰다듬는 수민.
5
작은 옥탑방. 붉은 저녁 빛이 쏟아진다. 옥상 마당에서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새끼 강아지. 방문을 열어젖힌다. 텅 비어 있는 옥탑방, 아담하다. 생애 처음 갖는 자신의 새집을 돌아보는 수민.
6.
뒷골목에서 왕창 토하고 있는 수민. 토하고 나서 일어나 벽에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수민. 벽을 짚고 있는 손에 돈다발을 꼭 쥐고 있는데, 돈다발 끝에 토사물이 좀 묻어 있다. 유심히 그걸 보고 있는 수민. 이내 돈을 벽에 쳐서 토사물을 털어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그냥 구겨 넣는 수민. 바지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휘파람을 불며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간다.
씬27. EXT. 호스트바 앞 (밤)
바지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선글라스를 쓴 수민이 호스트바 골목 어귀에 들어서다가 딱 그 자리에 멈추고 만다. 호스트바 앞에 보조 주방장인 환선이가 담배를 뻑뻑 피며 서 있고, 그 옆에 마담이 환선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뭔가를 설득하고 있다. 마담의 팔을 잡아서 뿌리치는 환선,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다. 수민이가 조금 다가가자, 환선이가 고개를 돌려 수민이를 본다. 잔뜩 화난 표정. 다짜고짜 서슬 퍼렇게 다가오더니 수민이의 뺨을 후려친다.
환선
나쁜 자식. (울컥) 너 형들이 이러라고 그랬어? 이럴려고 서울 올라왔어!
순식간에 무너지며 눈물이 핑 도는 수민.
수민
형.
씬28. INT. 포장마차 (밤)
파란 테이블. 이미 술에 취한 환선이는 테이블에 머리를 뉘인 채 쓰러져 자고 있다. 소주병들. 환선이 마지막으로 비몽사몽간에 헛소리를 한다.
환선
시발 놈의 고아새끼들... 줄줄이 굴비 새끼들... 나쁜 놈, 내가 똥기저귀 갈아주고... 지 아플 때 닭서리해서 잡아줬으면.... 잘 살아야지, 이 등신 같은 놈.
수민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소주잔을 내려놓고, 취한 듯이 조금 몸을 흔들다가,
수민
(혀 꼬부라진 소리) 나.... 이미 독해... 아주 독해. 악착같이 돈 벌어서... 나 대학에도 갈 거야. 나도.... 그렇게 재수 없는 놈이 될 거야. 잠시만... 비상 깜박이 좀 켤게.
수민의 독한 눈빛.
씬29. EXT. 공원 (낮)
푸른 잔디밭의 공원.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수민이 썬글라스를 끼고 이어폰을 꽂은 채, 시원스럽게 조깅을 하고 있다. 결연한 얼굴 표정.
씬30. INT. 호스트바 대기실 룸 (밤)
소파에 앉아 수민이 지포 라이터로 담배를 피워 문다. 손님 룸을 개조해 만든 선수 대기실 룸. 몇 선수는 고스톱을 치고 있고, 정태는 바지를 입고 있다. 수민이 바닥에 떨어진 신용카드를 주워서 뒷면을 슬쩍 보고는 정태에게 내민다.
수민
고만 좀 해.
정태
(카드를 쥔 채 옷 입으며) 그런 새끼들은 그래도 싸. 시발 꼴뚜기, 2차도 안 갈 거면서 옷 벗기고 지랄이잖아. 확, 파묻어버릴라, 개새끼......
수민
또, 왜?
정태
아니 시발 놈이 셋이 같이 하자고 그러잖아. 너 같으면 하겠냐? 변태새끼들.
수민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정태
(카드를 보고 뒷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몰라. 우리 선미 선물이나 사줄 거야. 다음 주에 생일이거든.
수민이 담배연기 품어내며, 피식 웃는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마담이 들어온다. 요란하게 박수 치며,
마담
야, 야, 손님 오셨다. 준비들 해. 쯔쯧... 재우 너, 똥꼬에 바지 씹혔다. 허리 업!
정태
(마담에게) 어때, 또 꼴뚜기야?
선수들이 부산을 떨며, 옷차림을 정돈하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진다.
마담
몰라.... 어떤 년인지, 내가 맛을 봤냐? 니가 가서 보든지 말든지... 옷은 새끈하더라. 야, 야, 빨리. 이 년들이 오늘 죄다 엉덩이로 호두를 깠나? 자, 자 선수단 입장! 수민이 3번.
정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아, 진짜. 나 3번이 좋다니까!
마담
셧업!
마담이 나간다. 수민이 여전히 앉은 채다. 선수1이 일어나며,
선수1
마담, 오늘 왜 저래?
정태
(일어나며) 생리하는가 보지?
선수2
오늘, 전 부인이 가게 와서 난리쳤잖아. 요즘 애 때문에 법원 다닌다는데.
정태
(비웃듯) 올드하게 무슨 호모가 애는.... (수민에게) 야, 오늘은 내기 2만 원.
수민이 피식 웃으며, 말없이 승낙의 표시로 정태의 손바닥을 친다.
씬31. INT. 호스트바 손님 룸 (밤)
선수들이 차례차례 한 명씩 룸으로 들어온다. 들어오면서 한 명씩 소파에 앉아 있는 손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자기 이름을 말한다. 수민이 3번, 정태가 2번. 모두 여덟 명이 나란히 손님을 향해 선다. 이윽고 살짝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수민이 손님을 똑바로 마주본다. 이상하게 점점 일그러지는 수민의 얼굴. 맞은편 소파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재민. 재민이 애틋한 눈으로 수민을 바라본다. 마담이 재민의 옆에 앉으며,
마담
어때요, 손님. 오늘은 손님이 없어서 순 에이스로만 추렸는데... 몇 번으로 하실래요?
재민과 수민은 서로를 팽팽하게 바라보고 있다. 수민은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얼굴이다. 재민이 아무 말도 없자, 마담 다시 채근한다.
마담
다른 애들 좀 더 부를까요?
재민
.......
마담
고르기 좀 불편하시면 애들 나가라고 해도 되는데?
재민
아뇨.
재민, 서서히 손을 들어 수민을 정확히 가리킨다. 그러자 재민을 바라보던 수민의 눈빛이 독해진다, 곧이어 수민이 그냥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린다. 당황하는 사람들. 마담이 당황하면서 재민의 눈치를 보더니,
마담
죄송합니다, 손님. 너네들도 다 나가 있어. (일어나며) 제가 잘 타이를.... 잠시만....
마담이 후다닥 나간다.
씬32. INT. 호스트바 복도 (밤)
수민이 스탠드 바 쪽에 와서 생수병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 마담이 성질이 나서 수민에게 버르르 다가오고, 그 뒤로 이상한 눈으로 수민을 바라보는 정태와 선수 무리들.
마담
미쳤어?
물을 마신 수민의 얼굴은 분노가 가득하다. 자존심도 상해 있다.
마담
이 자식이, 누구 장사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그러자 수민이 생수병을 느닷없이 벽에 집어던지고는 다시 재민이 있는 손님 룸으로 걸어간다.
씬33. INT. 호스트바 손님 룸 (밤)
텅 빈 룸 안에 마주하고 있는 수민과 재민. 수민은 뻣뻣이 룸 한쪽에 선 채 공손하게 뒷짐을 지고 있다. 눈을 내리깔고 있다. 재민도 눈빛을 내리깔고 있다. 어색한 침묵이 지리하게 흐른 뒤, 이윽고 재민이 수민을 바라본다.
재민
저기...
수민
우린 손님들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비밀이에요.
재민
그게 아니라... 나..... (애틋하게) 기억하죠?
그때서야 수민이 눈을 들어 재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표정한 얼굴.
수민
우린 돈 많이 주는 손님들만 기억해요. ..... (비꼬듯) 제가 마음에 드세요?
수민과 재민은 이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채 침묵을 지킨다.
씬34. INT. 택시 안 (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수민과 재민. 둘 모두 외면한 채 창밖을 보고 있다. 재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민을 바라본다.
재민
나랑 가기 싫죠?
수민
(쳐다보지도 않고) 손님이 절 사셨잖아요.
다시 서먹해지는 두 사람. 수민을 바라보는 재민의 눈이 애틋하다.
씬35. INT. 오피스텔 화장실 (밤)
재민네 오피스텔 화장실. 수민이 벽에 기댄 채 거울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자욱한 연기. 담담하면서도 속이 끓어오르는 눈빛. 그러다 수민이 화장실 안쪽의 거울이 달린 수납장을 힐긋 보고는, 열어본다.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하얀 수건, 그리고 명품 향수와 고급 화장품들. 수납장 안을 노려보던 수민이 문을 확, 닫는다. 수납장 문 거울에 비치는 수민의 얼굴.
씬36. INT. 오피스텔 (밤)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재민이 부엌 쪽 어두운 벽면에 살짝 몸을 걸친 채 옷을 벗고 있는 수민을 엿본다. 성욕이 없는 애틋한 재민의 눈. 수민이 팬티만 입고 침대에 앉는다. 재민이 자신의 침대 쪽으로 간다. 수민이 재민을 힐끔 보고는 팬티 차림으로 침대 위에 올라와 벌러덩 눕는다. 재민은 침대 맡에 비스듬히 앉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던 수민,
수민
빨리 해요. 나 들어가야 돼요.
그제서야 재민이 고개를 돌려 수민을 본다. 그의 아름다운 몸, 밀랍 같은 무표정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본다. 다소 슬픈 눈을 짓는 재민.
재민
남자 좋아해요?
수민
여자 좋아해요.
재민
뭘 걸고 맹세할 건데요?
수민
(잠시 뜸 들였다가) 돈.
재민이 어눌하게 수민을 바라보다가 수민의 손바닥을 어루만진다. 손금을 보는 듯,
재민
돈도 많이 못 벌겠고만.
웃지 않는다. 수민은 계속 뻣뻣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침묵을 지킨다. 이윽고 재민이 수민의 겨드랑이께의 상처를 본다. 손가락으로 수민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만진다.
재민
다쳤나 봐요?
수민
(도전적으로) 궁금해요? ...... 나, 예전에 당신네 공장 다녔잖아요.
재민의 눈이 심하게 흔들린다. 잠시 후,
재민
옷 입어. (수민, 의아해하는 눈으로 재민을 바라본다) 너랑.... 못 잘 것 같아요. 돈은 줄께.
잠시 재민의 뒷등을 보던 수민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망설임도 없이 벌떡 침대 위에서 일어나 바지를 주어 입는다.
CUT TO
옷을 다 입은 수민이 돈을 세어보고는 막 나가려다가 되돌아선 채,
수민
(비웃듯) 그런 죄의식..... 별로예요.
재민
아니, 너 오늘 안 씻었잖아.
수민이 비죽 비웃음을 짓고는 쾅,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재민이 망연히 혼자 앉아 있다. 마침 수민이 깜박 놓고 간 얇은 넥타이가 있다. 재민이 넋을 놓은 채 넥타이를 보며 혼잣말.
재민
나, 오늘 어떤 여자랑 약혼했다. 힘들어... 힘들어 죽겠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문이 벌컥 열리고 수민이 들어온다.
수민
한 번 안아도 돼요?
재민이 말없이 일어나면 수민이 다가와 재민을 살며시 안는다. 그리고는 상술로 단련된 비릿한 미소를 띤 채 귓속말로,
수민
다음에 또 올 거죠? ... 손님.
그 말을 하는 사이 수민은 유혹하듯, 손으로 재민의 성기께를 꽉 움켜쥔다. 재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CUT TO
문이 쾅 닫힌다. 잠시 닫힌 문을 응시하던 재민, 바닥에 떨어진 수민의 넥타이를 집어들고, 베란다 쪽으로 걸어간다. 바깥을 처연하게 응시하며,
재민
오늘 너랑 자면 나 무너질 것 같아... 근데 왜 자꾸 너한테 가는 걸까?
씬37. INT. 수민의 옥탑방 (오후)
오후의 햇살이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온다. 커텐이 하늘거리며 흔들린다. 선풍기가 돌고 있다. 수민의 방은 썰렁하다. 화초 하나, 냉장고 하나, 옷걸이.. 그리고 메트리스 하나가 전부다. 전화가 울린다. 곧이어 수민이 눈을 뜬다. 귀찮은 듯 전화 받는 수민.
수민
(졸린 목소리) 아, 네 김 사장님. 오랜만입니다........어떻게 하죠...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그냥 밤에 가게로 오세요.
전화 끊은 수민. 다시 누운 채 천장을 보며 생각에 골몰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강아지를 찾는다. 문이 열려 있고, 강아지 없다. 수민이 일어난다.
CUT TO
수민이 팬티만 입은 채 한손엔 생수병, 한손엔 담배를 들고 저벅저벅 옥상 끝으로 걸어간다. 뽀득이가 놀고 있다. 수민, 담배를 쥔 채 뽀득이를 안아 올리며,
수민
야, 뽀득이. 이빨 좀 갈지 마.
웃으며 귀엽게 쓰다듬어준다. 그리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본다. 생각에 골몰한다.
씬38. EXT. 공원 (오후)
푸른 잔디가 깔린 평화로운 공원. 수민이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조깅 중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마치 기분을 업 시키려는 듯, 열심히 뛰고 있는 수민. 인상을 쓰며 더욱 속도를 낸다.
씬39. INT. 재민네 회사 회의실 (늦은 오후)
재민
그럼 수고들 해주세요.
회의 탁자에 앉아 있던 서너 명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 중 젊은 직원 한 명이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재민을 힐끔이다가 이윽고 사람들을 뒤따라나간다. 재민이 회의에 지친 몰골로 가장 늦게 일어나 자신의 서류들을 챙긴다. 그때 나갔던 직원 한 명이 들어온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다. 재민에게 다가온다. 재민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재민
무슨 일이에요?
직원, 한참 동안 망설인다.
직원
오랜만입니다, 실장님.
재민
네?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이번 신입사원 아니에요?
직원
(씁쓸하게 웃으며 뜸 들이다가) 아직도 청담동에 사세요? 2년 전에 한 번 갔었는데... 거기 오피스텔. 이 회사에 계신 줄 몰랐어요.
직원, 씁쓸하게 웃는다. 재민이 그제서야 기억해냈다는 듯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재민
기억나요. (자신의 서류를 마저 챙기며 일그러진 웃음) 회사 생활 잘 하세요.
재민, 서류를 들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간다. 몇 걸음 걸어다가 직원을 향해 뒤돌아선다.
재민
(사무적으로) 잘 아시겠지만..... 앞으로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에요. 다음 달에 나, 결혼해요.
재민이 냉랭하게 뒤돌아서서 나간다.
씬40. EXT. 웨딩전문점 (해질녘)
화려하게 불 밝혀진 웨딩드레스 숍. 재민의 자동차가 서서히 정지한다. 재민이 잠시 시동을 끄고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이내 시계를 보고 자동차에서 나와 서둘러 웨딩드레스 숍으로 걸어간다. 유리창으로 재민모와 재민의 약혼녀 심현우가 보인다.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심현우. 하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재민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쇼윈도우 안의 재민모와 심현우를 바라보는 재민의 얼굴이 어둡다. 담배를 피워 물며,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벽에 붙어 허공을 응시하는 재민. 유리창 안의 재민모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자, 바깥에 있는 재민의 호주머니에서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재민, 전화도 받지 않은 채 그렇게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씬41. EXT. 호스트바 밖 (해질녘)
택시가 멈춰 선다. 수민이 택시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호스트바 골목으로 걸어 들어온다. 호스트바 간판 밑에 가람이 서 있다. 큰 배낭을 메고 손에는 얼음과자와 쪽지를 들고 있다. 흐르는 땀, 입안에 우물거리는 얼음. 안경을 벗고 눈 주위 땀을 손으로 훔친다. 다가가는 수민이 표정이 점차 긴장된다. (프롤로그의 소년과 동일함. 1인 2역) 거의 다가갔을 무렵, 가람이 고개를 돌려 수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전히 얼음을 넣고 우물거리는 입.
가람
저기요...
씬42. INT. 호스트바 대기실 룸 (밤)
수민이 깔끔한 양복 한 벌을 들고 호스트바 복도를 걸어간다. 이윽고 당도한 곳은 대기실 룸. 정태를 비롯해서 몇 명의 선수들이 앉아 있고, 한쪽 소파에 촌스러운 옷을 입은 20대 초반의 가람이 벌쭘하게 앉아 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다. 수민이가 가람에게 옷을 건네준다. 정태는 달마시안 산보 인형 풍선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수민
이거 입어봐. 나중에 옷 사면 돌려줘.
가람
(일어나 꾸벅) 고맙습니다.
정태
얌마, 그래서 너 잘 데 있어?
가람
당분간 찜질방에서....
수민, 안쓰럽게 가람을 바라본다.
정태
니 상태 보니까... 넌 계속 찜질방에서 자야되겠다. 마담 눈썰미 요즘 왜 이리 올드해?...
수민
(나무라듯) 형..... (가람에게) 잘 데 없으면 당분간 우리집에 와 있어.
가람
어, 진짜요?
수민
딱 며칠간이다.
가람
(다시 인사하며) 고맙습니다.
정태가 탁, 탁, 박수 치며,
정태
이 눈물겨운 장면. 그래 원생들끼리 서로 도와야지, 암.....
수민이 픽 웃으며, 정태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쿡 찌른다. 그때, 마담이 대기실에 들어서며, 요란하게 박수를 친다.
마담
야, 손님 오셨어. 김 사장님 오셨다. 서둘러.
정태
아, 또 수민이야?
마담
(가람, 가리키며) 그럼 얘니? 넌 무슨 신림동 고시원에서 기어나왔냐? 안경 벗고, 빨리 갈아입어!
마담 사라지고, 선수들이 부산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람
(뜨악해하는 표정) 근데 신림동이 어디예요?
씬43. EXT. 호스트바 앞 (밤)
‘X-랜드’라는 붉은 글씨의 작은 간판이 음습한 골목 한 귀퉁이에 걸려 있다. 잠시 후, 호스트 바 문이 열린다. 수민과 어느 40대 남자, 김 사장. 저쪽 골목에 나타난 재민, 호스트바를 향해 걸어온다. 비틀거리는 김사장.
김사장
(술 취한 목소리) 오늘은 꼭 아침까지야.
수민이 한 손으로 김 사장의 어깨를 감싸 쥔다. 그리고 몇 걸음 걸었을까, 걸음을 멈추는 수민. 앞에 서 있는 재민. 수민을 가만히 응시한다. 수민도 재민을 차분하게 응시한다. 곧이어 차가운 어조로,
수민
또 오셨네요, 손님. ...... (시니컬하게) 안에 선수들 많아요.
하고는 김사장과 함께 재민 곁을 냉랭하게 지나가는 수민. 재민은 그대로 서 있는다. 골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재민의 뒷모습.
씬44. EXT. 모텔 앞 (밤)
수민이 모텔에서 나온다. 모텔 앞에 잠시 우두커니 선 채 하늘을 바라본다. 차도 앞에 선 수민이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든다. 저 멀리서 택시 한 대가 달려온다. 바람이 분다. 수민은 문뜩, 자신이 택시를 잡기 위해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본다. 손가락 끝에 붙어 있는 작은 휴지조각,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정액을 닦다 묻은 휴지조각. 그걸 바라보는 수민의 표정, 참담하다.
씬45. INT. 호스트바 대기실 룸, 화장실 (밤)
수민이 거칠게 세면대에 허리를 숙이고 세수를 하고 있다. 앞에 술 쟁반을 들고 있는 마담이 서서 잔소리.
마담
빨리 와. 저 사람 너 땜에 두 시간이나 기다렸잖아.
하고는 급히 사라진다. 수민, 계속 거칠게 세수를 하다가 마담이 가버리자 그냥 세면대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는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는 수민.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물 젖은 머리칼을 연신 쓸어 올린다. 그리고는 천천히 뒤쪽을 바라본다.
씬46. INT. 호스트바 손님 룸 (밤)
문이 열리고 수민이 객실 안에 들어선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뻣뻣이 선 채로 냉랭한 눈으로 안쪽을 바라본다. 수민의 머리칼은 젖은 채 잔뜩 헝클어져 있다. 코믹하다. 안쪽 소파엔 혼자 술 마시고 있다가 수민을 쏘아보고 있는 재민.
수민
(냉랭하게) 또 2차 가요? 오늘은 모텔로 가요.
재민이 수민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냥 수민을 스쳐 지나 밖으로 사라진다. 수민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잠시 후 재민이 다시 돌아와 수민을 시니컬하게 바라본다.
재민
모텔비 니가 낼래?
씬47. INT. 실내 사격장 (밤)
수민, 대기실 소파에 앉아 유리창을 통해 사격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안에서 재민이 권총을 들고 사격을 하고 있다. 총성 소리. 수민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다리 한쪽을 떨며, 지포 라이터를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잠시 후, 안에서 사격을 마친 재민이 보안경과 헤드폰을 벗으며 대기실로 나와 수민을 모른 척하며 그냥 지나간다. 수민이 쟤, 뭐야 하는 표정으로 째려본다.
씬48. INT.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밤)
엘리베이터가 상승 중이다. 수민이와 재민이가 목석의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다. 수민, 양복 웃옷을 벗어서 옆에 끼고 있다. 수민이 불만인 듯한 표정으로,
수민
이제 활 쏘러 가요? 나 바빠요.
재민, 수민의 옆모습을 힐끗 쏘아본다. 이내 지갑을 꺼내 백 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수민에게 내밀며,
재민
(싸늘하게) 이제 시간 나니?
수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손에 쥔 수표를 바라본다. 수민을 바라보던 재민, 퉁명스럽게 손을 뻗어 수민의 구렛나루와 옆얼굴을 도전적으로 만진다. 수민, 여전히 목석의 표정.
씬49. INT. 재민의 오피스텔 (밤)
재민이 웃옷을 벗어 거칠게 집어던진다. (카메라 앞으로 팔랑거리며 날아오는 재민의 속옷) 이미 침대에는 수민이 벌거벗은 채 누워 있다. 눈을 감고 있다. 재민이 수민의 몸 위로 올라온다. 재민, 한참 동안 떨리는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다가 키스를 하기 위해 천천히 머리를 수그린다. 그러자 수민이 피하듯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약간 화난 듯한 재민. 이윽고 그는 수민의 몸을 돌려버린다. 침대 위에 엎어진 수민, 재민이 다소 격앙된 얼굴로 손에 침을 뱉는 동안 건조하게 벽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수민
뒤도 안 돼요.
재민, 동작을 멈춘 채 침대에 엎어져 있는 수민을 쓸쓸히 바라본다.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연다.
재민
그럼... 발기는 돼니?
CUT TO
재민이 침대 위에 엎드려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수민이 엎드린 채 섹스를 하고 있다. 수민은 그 위에서 마치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거칠게 피스톤 운동을 시작한다. 재민은 고개를 외튼 채 고통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열적은 신음 소리 방 안에 가득 고인다. 벽면을 향하고 있던 재민의 눈이 이내 감긴다. 재민은 고통과 쾌락,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자기 욕망을 표현하듯, 재민은 팔을 뻗어 수민의 팔을 꼭 부여잡는다. 간절하게,
재민
니 물건이 권총이었으면 좋겠어.
수민이 순간 동작을 멈춘다.
재민
내 안에서.... 방아쇠를 당겨버렸으면 좋겠어.
차갑게 굳어버린 수민의 얼굴.
CUT TO
옷을 허겁지겁 차려입는 수민. 재민이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자조의 눈으로 창문의 커텐을 바라보고 있다. 옷을 다 입은 수민,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들어 침대의 재민에게 휙, 집어던진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차에, 그냥 되돌아선 채로 말문을 연다.
수민
너 재수없어. 처음부터, 재수없었어. 대체 나한테 뭘 바래? 너 같이 부자 놈들은 카드 긁듯이 사람 갖고 쉽게 장난치겠지만, 우린 시발.... 이 몸뚱아리 팔 것밖에 없어. 오지 마, 안 팔아. 다시 오면 내가 너 죽여.
말을 끝낸 수민이 쾅, 하고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문이 닫히면서 커텐이 요동친다. 그 춤추는 커텐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재민, 혼자 넋두리하듯.
재민
안 팔아? 너, 소비자보호협회에 신고할 거야.
씬50. INT. 재민의 오피스텔 앞 (밤)
수민이 재민 오피스텔 문을 닫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문이 열리면, 재민의 약혼녀 심현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귀에다 핸드폰을 댄 채 내린다. 수민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뒤돌아보면, 닫히는 문 사이로 심현우가 재민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게 보인다. 수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본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간다. 현우, 초인종 반응이 없자 문을 두드리며,
현우
재민 씨, 재민 씨!
이어 문을 살짝 열어본다. 문이 열려진다. 현우, 의아해하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쪽을 힐끗 바라본다.
씬51. INT. 재민의 오피스텔 (밤)
침대에 현우와 재민이 나란히 누워 잠자고 있다. 재민의 팔에 머리를 뉜 채 자고 있는 현우. 잠시 후, 재민이 눈을 뜬다. 슬며시 자기 팔에서 현우의 머리를 들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히 어둔 허공을 바라보다가 왼팔이 저리는지, 오른팔로 왼팔의 알통을 주무르며, 왼팔을 위아래로 몇 번 움직인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잠들어 있는 현우를 바라본다. 측은한 눈빛.
재민
(나즈막이) 왜 니 머리는.... 팔이 이렇게 아프니? ...... (처연하게) 많이 아프다.
그때 등 돌린 채 누워 있는 현우,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침대보 바깥으로 나와 있는 손으로 이불 시트를 꽉 움켜쥔다.
씬52. EXT. 호스트바 앞 (새벽)
짐가방을 잔뜩 들고 있는 가람과 수민이 나란히 골목을 걸어가고 있다. 잠시 후 정태가 뛰어나오듯 호스트바를 빠져나오고, 뒤이어 마담이 뒤쫓아 온다.
마담
(신경질적으로) 야, 손님 두고 어디 가?
정태
(혼잣말처럼) 맥주 시키는 주제에 무슨 손님야.
마담
야!
정태, 계속 앞으로 걸어가며 미안하다는 뜻으로 뒤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정태 뒤로 달마시안 산보 인형이 허공에서 통통거리며 뒤쫓아 간다. 한손엔 명품 쇼핑백을 들고 있다. 한편, 골목 어귀에 자동차 한 대가 세워져 있고, 보조석 문이 열려져 있다. 보조석에 앉아 있는 선미, 스타킹을 고쳐 신고 있다. 정태, 수민과 가람 곁을 스치며,
수민
왜 그래?
정태
형수님 생일이시다.
정태, 수민과 가람을 지나 골목 어귀에 있는 자동차로 간다. 선물을 받았는지 선미의 웃음소리. 정태,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으로 간다. 선미가 달마시안 산보 인형 풍선을 유리창 밖으로 내놓는다. 이윽고 차가 출발한다.
씬53. EXT. 도심 (새벽)
짐가방을 잔뜩 들고 있는 가람과 수민이 나란히 걷고 있다.
가람
(둘러보며 씩씩하게) 서울은..... 불빛이 너무 좋아요. .... 나중에 싹 돌아다녀야지.
수민
난 이 놈의 서울, 싹 불질러버리고 싶은데........
가람
멋있는데? 멋있지 않아요?
수민
서울에선 아무도 믿으면 안 돼.......
가람
왜요?
수민
(가볍게 웃으며) 넌 왜 올라왔어?
가람
(귀엽게) 돈 벌러 왔죠. 시골에 있으면 뭐해요, 우리 같은 놈들한테 뭐가 있나..... 히히... 실은 시골에서 인터넷 보고 이런 거 알았어요. (조금 부끄러워하며) 근데 형,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요?
수민
(가람을 애틋하며 바라보며) 닮았어.
수민
누구요?
수민, 웃으며 가람의 머리를 헝큰다.
가람
히히... 형? (귀엽게) 우리 배고픈데... 뭐 먹고 가요. 찜질방 값도 굳었는데, 제가 쏠게요.
나란히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
씬54. INT. 수민의 오피스텔 (낮)
수민이 잠에서 깨어난다. 옆에서 자고 있는 가람이가 몸 위에 팔을 얹어놓고 곤히 있다. 수민이 가람의 손을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시 애틋한 눈으로, 잠들어 있는 어린 가람이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침대 맡에서 자고 있던 뽀득이가 따라나온다.
베란다 바깥을 보며 생수통으로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수민. 그때, 전화가 울린다. 수민이 귀찮은 눈으로 전화기 있는 쪽을 흘겨본다.
씬55. INT. 병원 (낮)
다급한 걸음걸이로 병원에 들어서는 수민. 복도를 황급히 걸어간다.
씬56. INT. 입원실 (낮)
입원실. 재철이가 팔과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수민, 조금 걱정스러운 눈.
재철
연락 좀 하고 살지 임마. 독한 놈. 하여튼 환선이 형 호들갑은.... 그냥 일하다 조금 다쳤어. 곧 나갈 거야.
수민
어깨 아파서 이제 골프를 어떻게 쳐?
재철
얌마, 지금 딸딸이도 못 쳐.
수민, 재철의 손을 잡으며,
수민
형, 보철기 빼니까 완전 킹카다.
재철
(좋아서 씨익) 그래?
수민
보기 좋아.
재철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재철
근데, 손에 땀 나거덩. (징그럽다는 듯 수민의 손에서 자기 손을 슬그머니 뺀다)
수민
지랄.
재철
너 예전부터 내 엉덩이 쳐다보고 다녔지?
수민
(피식 웃는다)
재철
근데... 너 요즘 뭐 먹고 사냐? 신수는 훤해졌네.
수민, 표정이 어두워진다.
재철
환선이 형도 얘기 안 하고... 참, 그 사람 너한테 갔었니?
수민
누구?
재철
왜 그 인사과 낙하산 있잖아. 너 해고되던 날....
수민,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수민
근데?
재철
아니, 예전에 니 얘기 자꾸 물어봐서... 환선이 형네 가게 갔다고 얘기했거든. 하도 물어보길래.... 왜 찾냐니까.....
씬57. 회상, 몽타쥬
재민
(수줍게 웃으며) 미안한 일이 있어서..... 사과하려고요.
공장 마당. 재민이가 재철이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리곤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며 뒤돌아가는 재민. 표정이 수줍으면서도 밝다.
CUT TO
레스토랑 뒷골목. 재민이가 또다시 환선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다. 환선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 하지만 재민이가 허탈하게 뒤돌아서자, 환선이 그를 불러세운다. 그에게 내미는 명함 한 장. 명함을 쥐어들고, 뒤돌아서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재민.
CUT TO
호스트바 앞. 재민이가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홀로 빛나는 ‘X-랜드’라는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
CUT TO
호스트바 앞. 수민이 손님과 함께 호스트바에서 나와 모텔로 향한다. 자동차 안에서 그 모습을 훔쳐보는 재민. 수민과 손님의 어깨를 감싸쥔 채 재민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재민, 표정이 어둡다.
CUT TO
호스트바 안. 수민 가게에 재민이가 처음 온 날. 빤히 앞을 보고 있다가 초이스를 위해 천천히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키는 재민.
씬58. INT. 택시 안 (밤)
뒷좌석에 앉아 있는 수민.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깊은 시름에 잠긴 듯 눈빛이 몽롱하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연다.
수민
담배 한 대 펴도 돼요?
CUT TO
뭉게뭉게 담배연기를 피어올리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수민. 도심 속을 달리는 택시.
씬59. INT. 호스트바 (밤)
호스트바에 갓 들어온 수민에게 마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뭔가를 속닥이고 있다.
마담
스타킹 말던 그 후라빠 같은 년 있잖아. 쟤 카드 싹 긁어서 날랐대. 사채 보증까지 서줬나 봐. 쟤, 어떻게 하냐? (가다가 생각난 듯 수민에게) 너도 돈 꿔달라고 하면 없다고 해. (천연덕스럽게) 다 같이 몰살될 순 없잖아.
마담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수민이 무거운 얼굴로 복도를 지나 끝에 있는 객실 쪽으로 걸어간다. 마침 복도 중간쯤에서 가람이가 젊고 핸섬한 손님의 어깨를 부여잡고 나온다. 횡재나 낚은 듯이 가람이 수민을 보며 씨익 웃는다. 그들이 지나간다. 가람, 걸어가며 뒤쪽으로 손을 들어 보인다. 검지와 엄지가 만든 오케이 싸인. 수민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수민 몸을 돌려 조금 더 걸어가, 복도 끝 쪽에 있는 객실 문을 슬며시 연다. 안에는 정태가 혼자 고개를 숙인 채 양주를 마시고 있다. 몰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민,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태를 바라본다.
수민
형....
정태
(여전히 고개 숙인 채) 수민아..... 이렇게 팔다리 다 잘라놓으면... 포복은 어떻게 하냐? ....... 나, 수류탄 사게 돈 좀 꿔주라... (눈물 그렁그렁) 나, 지금 졸라 올드하지?
수민이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정태를 바라본다. 그때, 현관문 쪽에서 어서 오세요! 하는 마담과 선수의 목소리.
씬60. INT. 실내 사격장 (밤)
타켓을 향해 맹렬히 총을 쏘아대는 재민. 허무한 표정. 사격이 끝나고 타켓이 재민에게 다가간다. 재민, 다가오는 타켓을 보며 보안경을 벗는다. 공허하고 슬픈 표정. 이내 고개를 뒤로 돌려, 텅 빈 대기실을 바라본다.
씬61. INT. 게이 찜질방 (밤)
어둠 속. 복도와 방들. 복도 천장에 매달린 붉은 등. 흰 가운을 입은 재민이 천천히, 방들을 둘러보며 지나간다. 뒤에서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가운 입은 남자들. 열적은 섹스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재민이 둘러본 방에는 뒤엉켜있는 남자들.
재민,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어 남자들이 정사를 하고 있는 방안을 훔쳐본다. 그때 반대편에서 귀엽게 생긴 남자가 지나가며 슬쩍 재민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지나갔던 남자가 다가와 재민의 몸을 더듬는다. 재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응시한다. 남자, 과감히 재민의 성기를 만진다. 가만히 있는 재민. 남자가 재민의 손을 잡고 간다. 몇 걸음 따라가던 재민,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선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나온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
씬62. INT. 호스트바 손님 룸 (밤)
수민이와 어떤 손님이 가라오케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 옆에서 선수 한 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고, 소파에는 또 다른 손님 한 명. 수민이는 웃통을 벗고 손님을 끌어안은 채 눈을 꼭 감고 느릿느릿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다. 천천히 빙그르르 두 사람이 몸을 돌린다. 수민, 어떤 기척에 눈을 뜨고, 출입문 쪽을 본다.
열려진 출입문. 그 앞에는 재민이가 우두커니 선 채 질투와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수민은 여전히 손님을 끌어안고, 어깨 너머로 재민을 쏘아본다. 수민, 쏘아보며 손님의 목덜미에 보란 듯이 쪽, 입을 맞춘다. 끄떡도 하지 않은 채 수민을 쏘아보는 재민.
씬63. INT. 호스트바 복도 (밤)
재민이가 거칠게 수민의 손을 잡고 복도를 빠져나오고 있다. 수민이 웃통을 벗은 채로 엉겁결에 손을 붙잡혀 끌려나오고 있다. 한쪽 손엔 러닝셔츠가 들려져 있다. 앞에 양주를 쟁반에 들고 가던 가람을 재민이 밀치는 바람에, 양주병이 바닥에 와장창 깨진다.
수민
놔!
하고는 손을 뿌리친다. 그때 뒤에 모습을 드러낸 마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민과 춤을 추던 손님도 방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마담
뭐야, 왜 그래?
재민, 다시 돌아가려는 수민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다시 복도를 빠져나간다.
씬64. EXT. 호스트바 앞 (밤)
바 문이 열리고 재민이 수민의 손을 잡아끌고 나온다. 수민이 다시 한 번 거세게 손을 뿌리친다.
수민
(노려보며) 왜, 오늘은 천 만원이야?
그러자 재민이 수민의 뺨을 후려친다.
재민
그저... 돈, 돈!
수민
이 개새끼!
화가 난 수민이 러닝셔츠를 집어던지고는 재민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친다. 재민이 힘없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수민
그래, 돈에 미쳤다 자식아. 니들이 그걸 알아?
열 받은 수민이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재민 위로 날쌔게 올라가, 다시 얼굴을 후려치기 위해 주먹을 높이 쳐든다.
수민
내가 너 다시 오지 말랬지!
재민이 피하지 않고 눈을 똑바로 뜬 채 수민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간절한 눈빛. 수민, 치려다가 차마 치지 못하고 주먹만 치켜들고 있다.
재민
한 번만.... 날 돈으로 말고 인간으로 보면 안 돼?
여전히 주먹을 허공에 든 채 재민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는 수민. 눈빛이 동요한다.
씬65. INT. 자동차 안 (밤)
조용히 도심 속을 질주하는 자동차. 운전석엔 재민이, 보조석엔 수민이 타고 있다. 흐르는 침묵. 수민은 무표정하기만 하다. 흙 묻은 러닝셔츠 차림. 재민의 입가의 상처, 핏자국. 자동차가 계속 도심 속을 달리고 있다. 두 사람, 여전히 앞만 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윽고 수민이 먼저 입을 연다.
수민
자꾸.... 왜 나 따라다녀?
재민, 잠시 회한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다가,
재민
우리 제대로 인사도 못했잖아.
수민이 재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연민을 느끼는 듯한 수민의 얼굴. 재민은 앞을 보고 계속 운전 중이다.
재민
(수민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배 안 고파?
수민
들어가 봐야 돼.
재민
니 돈 내고 니가 먹을 거야.
달리는 자동차.
씬66. INT. 포장마차 (밤)
포장마차 테이블. 수민은 국수를 먹고 있고, 재민은 그 옆에 소주병을 깐 채 가만히 앉아서 수민이 먹는 것을 보고 있다. 수민은 국수를 먹다가 재민을 힐끔 보고는, 다시 먹기 시작한다.
재민
정말.... 니 돈 내고 너만 먹는구나.
수민, 웃지 않는다. 수민을 바라보는 재민, 애틋하다.
씬67. EXT. 공원 (밤)
수민과 재민이 나란히 서울 야경을 향해 오줌을 누고 있다. 수민이 먼저 일을 끝내고 길을 걷는다. 뒤이어 재민이 그 뒤를 따른다. 서울의 야경이 밝게 빛난다. 수민은 손에 작은 생수병을 들고 있다. 공원엔 아무도 없다.
재민
넌 내가 왜 그렇게 싫어?
수민이 침묵을 지킨 채 잠자코 병마개를 따서 물을 마신다.
재민
(넋두리처럼) 나 힘들다. 너를 알게 돼서 더 힘들어.
수민
(시니컬하게) 왜 선수를 좋아해서?
재민
........
수민
왜 니가 게이여서?
재민
..... 너 처음 봤을 때....... 니 웃는 모습은 꼭.. 유성 같았어.
수민
전유성?
재민, 잠시 수민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수민의 생수병을 받아든다. 그리곤 한 모금 마시며, 병마개를 천천히 돌린다.
재민
넌 왜 나 무시하는데?
수민
.... 그런 멘트 식상해. 수많은 손님들이 밤마다 내 귀에 대고 그런 말들을 지껄여... 당신은 배운 것도 많고 집도 좋잖아. 더 근사한 멘트 좀 개발해 봐. 지겨워.....
수민이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고, 서울 야경을 쓸쓸히 바라본다. 재민이 수민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수민
내려요.
재민, 팔을 내리지 않는다.
수민
내리라니까!
재민이 아랑곳없이 수민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나란히 걷는다. 수민도 말만 그렇게 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재민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그냥 니가 좋아. 너 아직도 내 이름 모르지?
수민의 얼굴이 눈빛이 흐려진다. 수민, 몸을 돌리며 자신의 어깨에서 재민을 팔을 내린다.
수민
무드 깨서 미안한데, 다시는 나 찾지 마요.
하고는 수민, 돌아서 간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와 재민에게 격렬하게 키스를 한다. 그리곤 손으로 재민의 목덜미를 세게 부여잡고,
수민
이게 내가 손님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공짜야. 돈을 억만금을 가져와도 내 자존심이 당신을 허락 못해. 당신은 부자여서 도망갈 곳이 많겠지만, 난 아무 곳도 없어. 나, 잊어요.
그리곤 수민이 휙 돌아서 혼자 걷기 시작한다. 뒤에 망연자실 서 있는 재민. 금세 눈이 부옇게 흐려진다.
재민
안녕하세요, 수민 씨!
수민, 걷다가 순간 움찔하지만 그냥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씬68. EXT. 도심 (새벽)
수민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도심을 걸어간다. 잠시 걷다가 뒤를 돌아다본다. 아무도 없다. 수민, 다시 고개 돌리고 어두운 얼굴로 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씬69. EXT. 공원 (오후)
평온한 푸른 잔디밭. 수민이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공원에서 조깅 중이다. 옆에 가람이가 따라오는데 많이 지쳐 보인다. 수민은 땀을 뻘뻘 흘리지만 잘 달린다. 결국 뒤따라오던 가람이가 길에 주저앉고 만다.
수민, 고개를 힐끗 돌리고 주저앉은 가람이를 보고는 걸음을 멈춘다. 허리를 숙이고 손으로 무릎을 잡은 채 헉헉거린다.
CUT TO
지친 수민과 가람이 잔디밭에 평화롭게 누워 있다. 뽀득이가 잔디밭 팻말에 줄로 묶여져 있다. 가람이, 귀여운 듯 뽀득이를 갖고 장난친다.
가람
(킥킥 웃으며) 그 경찰청장인가 하는 아저씨... 나한테 푹 빠졌나 봐. 어제밤에 나한테 차 뽑아준다고 그러는 거 있지.
수민
그래?
가람
응. 나 되게 차 갖고 싶었는데... 차 뽑으면... 닥치는 대로 서울 시내 쏘다녀야지.
수민이 피식 웃는다. 하지만 웃음 끝에 씁쓸함이 묻어 있다.
가람
자동차 나오면.... (밝게) 우리 며칠 여행 가자.
수민
너, 돈 좀 모아라.... 맨날 쓰기만 하고. 그래서 어디 야간 대학 들어가겠어?
가람
(웃음) 내가 언제? 우리 원장님이 난, 백과사전을 삶아먹어도 대학 못 들어간다고 그러던데.
수민
(웃는다)
가람
있잖아, 형. ...... 형은 남자랑 그거, (뽀득이를 두 팔로 배 위에 올린 채 장난을 치며) 응응응할 때 어때? 아무 느낌 없어?
수민
...... 왜?
가람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것 같아.
수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누워 있는 가람을 바라보며,
수민
못 들은 걸로 할께. 마담 그런 거 안 좋아해 임마. 너, 그러면 이 장사 못한다.
가람
뭐... 형도 소문 파다하던데... 그 사람이랑 .... (질투 어린 목소리로) 정말로 누구야?
수민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수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약간 얼굴이 상기된 수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한다. 가람이, 일어나 앉으며 뽀득이 양쪽 앞발을 잡고 앞에다 세운다. 뽀득이에게,
가람
진짜 좋아하나보다, 그치?
뽀득이를 안고 수민의 뒤를 따라가는 가람.
씬70. INT. 호스트바 (밤)
수민이가 가람이와 함께 호스트바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수들과 마담이 호스트바를 청소 중이다. 가람이가 능청스럽게,
가람
죄송합니다.
선수1
이것들이 빠져가지고. 가람이 너, 빨리 빨리 안 다녀?
가람
(선수1이 들고 있는 밀걸레 자루를 집어 들며 어리광) 에이, 형....
스탠드 바 쪽에 있던 마담이 손짓으로 수민이를 부른다. 수민이가 다가간다.
마담
야, 그 놈, 니 스토커 아까 다녀갔어. 문 열자마자 들어오더라. 징한 년.
수민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마담
니가 하라는 대로 했어. ..... 너 지방으로 떴다고 하니까... (명함을 찾으며) 아무 말 없이 명함만 주고 그냥 가던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니년들 연애질하지?
마담이 명함을 수민에게 준다. 그때, 씻었는지 물에 젖은 몰골로 뒤쪽에서 다가오던 정태가 명함을 가로챈다. 사람이 많이 달라져 있다.
정태
(명함 들여다보며) 송재민. 이 새끼, 돈 많냐? 등쳐먹기 좋게 생겼던데...
정태 눈빛이 다소 냉정하다. 수민, 아무 말 없이 정태의 손에서 명함을 채뜨리고는 그냥 말없이 복도를 걸어간다.
정태
(테이블의 생수병을 들며, 서늘하게) 내가 말했지. 저 자식, 호모 같다고.
벌컥, 물 마시는 정태.
씬71. INT. 화장실 (밤)
좌변기 안. 물이 소용돌이치며 구멍으로 쓸려 내려간다. 물속에 명함이 섞여 있다. 하지만 명함 크기 때문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다시 올라온다. 물 위에 다시 뜨는 명함. 가만히 그걸 바라보는 수민, 씁쓸하다. 잠시 후, 좌변기에 손을 넣어 그 명함을 집는 수민.
씬72. INT. 레스토랑 (밤)
근사한 레스토랑. 도심이 보이는 창가 테이블. 재민, 심현우가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거의 식사가 다 끝났다. 재민은 밥맛이 없는지 음식을 끄적거리고 있고, 현우가 눈치를 불안하게 살핀다. 심현우, 테이블 밑에서 냅킨을 손으로 꽉 움켜쥐며,
현우
우리 언니가... 우리 결혼 선물로 유럽여행권 알아놨대. 프라하도 있다. 자기도 거기 가고 싶었잖아.
재민, 아무 말이 없다. 그때, 화장실 갔던 재민모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는다. 재민모, 보석 카탈로그를 다시 보며 현우에게,
재민모
그래, 골랐니? 나, 이거 괜찮더라. 가격도 이만하면 적당하고.
현우
(빙그레 웃으며) 예쁘다. (재민의 눈치 다시 살피며) 근데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어머님?
재민모
비싸긴... 내가 아들이 둘이 있냐, 셋이 있냐? 얘 아버지는 더해요. 엄격하긴 해도 얘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어이, 재민군. (카탈로그 재민에게 보여주며) 이거 어떠냐?
재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보석을 유심히 바라본다. 표정이 금새 어두워진다. 테이블 밑, 재민이 손으로 나이프를 꽉 움켜쥐고 있다. 피가 새어나온다.
재민
(싸늘하게) 많이 반짝거리는 걸로 해요. 반짝반짝. .... 나 회사 들어가.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린다. 피가 난 손을 주먹쥔 채 걸어가는 재민. 재민모와 현우가 놀란 눈으로 재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씬73. INT. 레스토랑 화장실 안 (밤)
피 나는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는 재민. 다른 한 손엔 ‘X-랜드’의 명함.
재민
아직도 거기서 일하죠? (표정이 일그러진다) 네..... 그 친구로 보내주세요.
전화 끊는 재민. 변기 쪽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꼬마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냥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 상처 난 손을 씻는다. 씻겨 내려가는 핏물. 손을 씻다가 고개를 돌리면, 꼬마가 조금 겁에 질려 자신을 보고 있다. 손에는 푸른색 투명 물총이 들려져 있다.
씬74. INT. 호텔, 복도 (밤)
붉은 카펫이 깔려진 복도를 차분하게 걸어가는 수민. 이윽고, 손에 쥐고 있던 쪽지로 자신이 찾은 방 호수를 확인한다. 수민, 조심스럽게 노크한다. 아무 소리가 없다. 다시 노크한다.
씬75. INT. 호텔, 방 (밤)
방이 다소 어둡다. 스탠드 불 하나만 켜져 있다. 재민이 창문 쪽에 서 있지만, 실루엣만 있어 알아보기 힘들다. 수민이 방에 들어서서, 그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다.
수민
엑스 랜드에서 왔어요.
수민, 앞에 있던 실루엣의 재민이 아무 말 없자, 문을 닫고 창가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곤 침대 옆에 서서 재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수민
옷 벗을까요?
어둠 속에서 재민의 미간이 움찔 떨린다.
재민
아니요. ........ (잠시 침묵) 어떤 소심한 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게 됐어요. 처음에 보자마자.... 근데 그 사람은 몸을 팔고 있었죠. 소심한 놈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재민이 넋두리처럼 말하는 동안 수민은 점점 그가 재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표정이 어두워진다.
수민
포기해요.
재민이 뒤돌아선다. 손에 (화장실에서 꼬마가 들고 있던 예의 그) 푸른색 투명 물총을 들고 있다. 손은 아까 다친 상처 때문에 붕대로 감겨져 있다. 물총으로 수민을 겨누고 있다.
재민
이래도?
재민의 얼굴 표정은 간절하다. 수민도 뭉클, 가슴이 무너짐을 느낀다.
수민
이게 개발한 멘트야?
재민
응.
재민을 바라보는 수민의 표정도 간절해진다.
수민
난... 날마다 수많은 자지를 빠는데.... 니 자지가 특별한 이유가 뭔데?
재민의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재민
내 껀 하나니까.... (울컥) 니 것도 하나니까.
재민의 눈을 보던 수민이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호텔방을 뛰쳐나간다.
씬76. 몽타쥬 (밤)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1.
수민이 큰 걸음으로 붉은 카펫이 깔린 호텔 복도를 휘적휘적 걸어간다. 슬픈 얼굴로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걷는 수민. 카펫을 밟는 구두발의 리듬.
2.
붕대 감은 손에 여전히 푸른색 투명 물총을 든 채, 복도를 걸어가는 재민. 갈림길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애타게 수민을 찾아 붉은 카펫을 걸어가는 재민. 카펫을 밟는 구두발의 리듬.
3.
엘리베이터 안, 하강 중. 수민이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다. 번뇌의 표정.
4.
자동차 안. 재민이 어디론가로 자동차를 몰고 가고 있다.
5.
도심을 걷는 수민.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6.
호스트바 앞. 자동차를 세운 재민이 바깥으로 나와 가게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씬77. INT. 호스트바 (밤)
문이 열리고 재민이 호스트 바 안으로 들어선다. 마담을 비롯해 안에 있던 일행이 모두 놀란 눈으로 재민을 바라본다. 그 뒤로 선수1이 급하게 뒤쫓아온다.
선수1
손님!
재민
이수민!
마담
(당황해서) 손님, 왜 그러세요?
재민
수민이 어딨어요?
재민, 망설임 없이 손님 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마담
수민이 없다니까요!
재민이 복도를 지나며, 손님 룸을 마구 열어보기 시작한다.
재민
수민아! 이수민!
마담
저 년, 미친 거 아냐! 야, 야, 쟤 잡아!
정태와 다른 선수들이 달려가 재민의 어깨를 붙잡는다.
정태
아, 시발, 왜 이래?
재민
(정태를 밀어내며) 놔!
정태
이 새끼가 미쳤나!
정태, 재민의 목덜미를 뒤에서 팔로 감아 응접실 룸 쪽으로 주욱 잡아끌어다 내동댕이친다. 재민 발버둥치며 일어나면서 큰 화분을 넘어뜨리고, 탁자와 작은 의자 등을 집어던진다.
재민
이수민!
그러자 정태와 다른 선수들이 달려들어 재민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slow)
계속 얻어터지는 재민. 맞으면서도 들고 있는 물총, 맞을 때마다 손에 힘을 주는지 물총에서 물이 찍찍 발사된다. 마담 눈에 물이 날아간다. 마담, 어머! 하고 숨겨져 있던 여성성이 터져 나온다. 다른 선수들도 물총에서 나오는 물을 피한다. 룸 안에 있던 손님과 선수들이 반 벌거벗은 상태로 옷을 추스르며 기어 나와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고 있다. 가람이 씁쓸해하는 눈으로, 재민의 모습을 바라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재민. 길게 뻗어 있다. 여전히 손에는 물총을 들고 있다. 정태가 신경질적으로 재민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찬다.
정태
아이, 좆만한 자식이 신경 돋구네.
마담
(눈 주위를 닦아내며) 저 새끼, 완전히 또라이 새끼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야, 밖으로 끌고 가! 저 물총은 오늘 밤 미친 컨셉이냐?
선수들이 완전히 넉다운이 된 재민을 걷어찬다. 그때, 문쪽에서
수민
놔.
하고 언제 들어왔는지 나타난 수민이 낮게, 그러나 큰 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정태가 보란 듯이 다시 한 번 걷어찬다.
수민
놔!
모두가 수민을 바라본다. 그 기세가 무서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수민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재민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곤 쓰러진 채 자신을 보며 눈을 그렁거리며 미소를 짓는 상처투성이의 재민 얼굴을 내려다본다. 금세 수민의 눈이 뿌옇게 흐려진다.
수민
일어나. 이 병신 새끼야 일어나. (울컥) 일어나!
씬78. EXT. 거리 (밤)
수민이 재민을 업고 거리를 걷고 있다. 등에 업힌 재민은 그제서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터진 입술에 난 핏자국. 수민도 무표정하긴 하지만 재민에 대한 마음이 담겨 있는 표정.
재민
안 아파......
수민
무거워. 아무 말 하지 마.
천천히 느릿느릿 도심 속을 걸어가고 있다.
씬79. INT. 수민의 옥탑방 (밤)
새벽빛만 들어오는 수민의 방. 재민이 웃옷을 벗은 채 눈을 감고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다. 수민이 비스듬히 옆에 앉아 수건으로 재민의 입술 상처를 닦아준다. 이내 다 닦아내고는 애틋한 눈으로 재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잠시의 침묵. 이윽고 수민이 수건을 쥔 채 뒤로 돌아앉는다. 재민이 천천히 손을 들어 수민의 등에 갖다 댄다. 수민, 가만히 앉아 있다. 마치 재민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듯이. 그리고는 잠시 후, 수민이 가만히 재민의 옆에 눕는다. 재민과 수민, 천장을 바라보며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다. 잠시 후 수민이 손을 뻗어 재민의 성기께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다.
CUT TO
재민의 가슴에 살포시 얹어지는 수민의 손. 이윽고 수민이 얼굴을 숙여 재민의 눈에 입맞춤을 한다. 반대편 눈에도 입을 맞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재민의 머리칼 속에 집어넣어, 마치 소중한 것을 소유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휘젓는다. 곧이어 두 사람 섹스를 하기 시작한다. 1. 수민이 밑에 엎드려 있고, 재민이 그 위에서 애널 섹스를 하는 중. 2. 수민이 두 다리를 공중에 든 채 서로 마주보며 섹스를 하는 두 사람. 서로를 애틋하게 마주보고 있다. 수민은 통증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는 표정. 이윽고 손을 뻗어 재민의 얼굴을, 마치 생전 처음 얼굴을 처음 만지듯이 열정적으로 어루만진다.
CUT TO
섹스를 끝낸 두 사람 침대에 누워 있다. 둘 모두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재민이 수민을 뒤에서 껴안고 있다. 바람이 불어 커튼이 나부끼고, 두 사람 모두 커튼을 바라보고 있다.
재민
뒤는 처음이야?
수민
재수 없어, 꼰대 같아.
재민
그래.
잠시 침묵. 재민, 진심을 담은 표정으로,
재민
고마워.....
수민
그것도 재수 없어.
재민
그래.
재민이 웃으며, 수민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더 파묻는다.
재민
나.... 처음에 봤을 때... 그렇게 재수 없었어?
수민
(잠시 뜸 들이다가) 응.
재민
그래....
수민이 혼자 생각에 잠겨 가벼운 미소를 뺨에 올린다.
재민
이제야 알 것 같다.
수민
뭐가?
재민
내가 정말 재수 없는 놈 같아.
수민
그래.
수민과 재민이 함께 웃는다.
재민
나, 내일 회사 안 갈 거야.
씬80. EXT. 국도 (낮)
길. 지평선이 보이는, 시원스럽게 내리 뻗은 길. 재민의 자동차가 경쾌하게 질주한다. 선글라스를 쓴 수민이 바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재민을 바라본다. 운전을 하고 있던 재민이 고개를 돌려 수민을 바라본다. 마냥 기분이 좋은지 씨익 웃는다. 수민이 웃고 있는 재민의 턱을 장난스럽게 가볍게 툭, 친다. 재민도 왼손으로 수민이를 때린다. 이어 두 사람의 요란스런 난타전, 웃음. 자동차가 한적한 시골 국도를 빠르게 질주한다.
씬81. EXT. 바다 (해질녘)
모래사장을 걷는 두 사람. 아직,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수민이 뒤로 팔을 꺾고 있고, 재민의 손이 수민의 등 뒤로 팔을 뻗어 손을 깍지 낀 채 마주 잡고 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모래사장을 걷는다.
이윽고, 모래 언덕 위에 올라서는 두 사람. 바다가 보인다.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고, 파도가 친다. 재민, 뒤로 맞잡은 수민의 손에 힘을 준다.
CUT TO
두 사람이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아 모래사장을 보고 있다. 바다 위에 아름다운 일몰이 지고 있다.
재민
넌 꿈이 뭐야?
수민, 잠시 침묵을 지키다 씨익 웃는다.
수민
안 가르쳐 줄 거야.
재민
(웃으며) 내가 알아낼 거야.
재민과 수민 서로를 보며 웃다가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재민, 수민의 손을 따뜻하게 쥔다.
재민
너... 그 일 그만 둬.
수민
(무뚝뚝하게) 왜?
재민
나 돈 많이 들어.
그러자 수민이 픽, 웃는다. 재민도 따라 웃는다. 손을 들어 수민의 머리칼을 만진다.
재민
너 그 일 계속 하면 나, 또 물총 들고 간다. (웃음) .... 고마워, 수민아.
수민이 미소 띤 재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사랑의 감정이 가득한 눈.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서로 애틋하게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씬82. INT. 호스트바 (밤)
어두운 골목에 홀로 빛나는 ‘X-랜드’ 광고판.
호스트바 안. 복도 쪽에 수민과 정태가 서 있다. 정태, 벌거벗은 상체 위에다 양복 윗저고리만 걸친 채 빈 양주병을 들고 있다. 수민이 뭐라 하며, 돈 봉투를 정태의 양복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정태의 어깨를 툭툭 친다. 이내, 홀로 빠져나오며,
수민
(선수1에게) 나중에 보자. (마담에게 씨익 웃어보이며) 자주 놀러 올께요.
마담
뭘 와, 뭘, 이 나쁜 년아.
하고는 꾸벅 인사하며 미련 없이 호스트바를 나간다. 정태가 복도에서 시무룩한 얼굴로 다가와 스탠드바의 테이블 위에 빈병을 놓는다.
마담
저 년, 진짜 시집가네. ...... 나도 못간 시집을...
정태, 웃옷 속에서 봉투를 꺼내 슬쩍 열어본다.
마담
너 아까 사채업자 다녀갔어. 쯔쯧... 큰일이다. 그렇게 모아서 되겠냐?
정태, 아무 말 없이 시니컬하게 그냥 손님룸 쪽으로 걸어간다.
CUT TO
호스트바 앞. 가람이가 수민을 꼭 안고 있다.
가람
나 우형이네로 짐 다 옮겼어.
수민
미안해.
가람
형....... (섭섭해서) 그렇게 좋아?
수민이가 가람의 품에서 빠져나와 가람을 바라본다. 수줍게 웃으며 뺨을 톡톡 친다. 수민의 얼굴은 여전히 생글생글.
씬83. INT. 재민의 회사 (밤)
아주 활달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오는 수민. 청바지에 회색 셔츠, 간만에 입는 가벼운 옷차림. 얼굴 표정이 무척 밝다.
이윽고, 재민이 일하는 사무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는 수민. 조심스럽게 유리창으로 들여다본다. 안에 재민이 혼자 스탠드 불빛에 의지한 채 일을 하고 있다. 재민이 혼자 일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수민. 핸드폰을 꺼내 재민을 향해 폰카 셔터를 누른다. 플래쉬 불빛. 재민이 수민을 보고는 환하게 웃는다.
CUT TO
수민과 재민이 재민의 책상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키스를 격렬하게 키스를 나눈다. 컴퓨터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수민이 재민의 입에 쪽, 하고 키스를 한다.
재민
우린, 손님하곤 키스 안 하는데요.
수민
(웃으며 쪽, 입맞춤) 그럼 뒤는요?
재민
(쪽, 입맞춤) 손님은.... 마음에 드니까 특별히 할부로 해드리죠.
수민
(키스) 돈 많이 벌어야 되겠네. 너무 일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재민
(키스) 그렇지? 너랑 유럽여행 가려고 하루 종일 인터넷만 했는데? 우리 프라하 꼭 가자.
수민
여행경비는?
재민
(성기를 움켜쥐며) 이걸로 대신 해야지.
수민, 움찔 하며 웃는다. 재민의 귓불에 키스한다.
수민
나 오늘 편의점 면접 봤다.
재민
(수민의 목덜미에 키스하며) 그래서?
수민
야간 타임만 있다고 해서 포기했어.
재민
(계속 키스하며) 왜?
수민
(혀를 길게 내밀어 재민의 목덜미를 핥으며) 밤에는 형이랑 이 추잡한 짓거리 해야지.
재민이 웃는다. 곧이어 재민이 수민이 손을 이끌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재민과 수민이 음악에 맞춰 서로를 안고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두 사람 얼굴에 가득한 웃음. 마침, 청소부 할아버지가 진공청소기를 끌고, 사무실 문 앞을 느릿느릿 지나치지만 안에서 춤추고 있는 그들을 보지 못한 채 지나간다. 도로 건너편 빌딩에서도 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이 보인다. 불 밝혀진 서울 도심.
씬84. INT. 재민 오피스텔 (밤)
문이 열리고 재민과 수민이 장난을 치면서 깔깔거리며 들어온다. 어둡다.
재민
하지 마.
수민
잠깐만.
재민
옷만 갈아입고 빨리 나가자.
재민이 불을 켠다. 불이 켜지는 순간 재민이 화들짝 놀란다. 재민의 혁대를 풀고 있던 수민 역시 혁대를 붙잡은 채 놀라서 안쪽을 바라본다.
오피스텔 안쪽에는 재민모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다. 재민모가 분노에 찬 얼굴로 두 사람을 노려본다.
재민
나가 있어.
수민
(혁띠를 내려놓으며) 형.
재민
나가 있어!
수민이 재민모를 보며 놀란 눈으로 밖으로 나간다. 재민이 넥타이를 푼다. 재민모가 서서히 일어난다.
재민
사생활은 지켜줘요.
그러자 재민모가 느닷없이 재민의 따귀를 후려친다.
재민모
결국 이거였어? 너 다신 안 그런다고 약속해잖아. ..... 또 발작한 거야!
재민
(똑바로 바라보며) 상관하지 마, 내 인생예요. 더 이상 속이고 못 살아.
재민, 넥타이를 집어던지고 옷방으로 가면서 와이셔츠 단추를 한꺼번에 잡아 뜯는다. 우드득, 소리.
재민모
너, 결혼이 보름밖에 안 남았어!
재민
결혼 안 해요. (바지를 벗어 던지고 재민모를 노려보며) 엄만, 같은 여자면서, 어떻게 현우한테 나 같은 남자랑 결혼하라고 해요? 대학에서 애들, 그렇게 가르쳐요?
재민모
뭐! (재민모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너.... 엄마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내가 아들이 한 명이 있어, 두 명이 있어!
재민
요즘 페미니스트 교수들은 다 그렇게 얘기해요?
재민모가 들고 있던 담배에서 담뱃재 떨어진다. 분노 때문에 떨고 있다. 청바지를 대충 입은 재민, 티셔츠 하나를 손에 쥐고서 막 나가려다 등진 채,
재민
엄마.... 저기 밖에 있는 애, 제가 끔찍히 사랑하는 남자예요.
재민모
(떨며) 나도 끔찍히 너 사랑한다. 너, 포기 못해! ....... 니 아버지한테 말할 거야!
나가던 재민이 움찔, 제자리에 선 채 고개를 돌려 원망의 눈빛으로 재민모를 바라본다. 이내 재민 나간다. 쾅, 닫히는 문. 벌벌 떨리는 손으로 다시 새담배 무는 재민모.
씬85. EXT. 수민 옥탑방, 옥상 (밤)
타워팰리스가 보이는 옥탑 옥상. 낡은 안테나가 세워져 있다. 그 옆에 재민이 접이 사다리를 세운 채 올라가서,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때, 수민이 다가온다.
수민
소용없을 거야. 너무 낡아서.
재민
(이리저리 만지며) 넌 어떻게 TV도 없이 살았니?
재민은 계속 만지작거린다. 수민이 그런 재민을 애틋하게 본다.
수민
(걱정스러운 듯이) 괜찮아?
재민
뭐가? 우리 엄마.... 예전부터 내가 게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수민
난 엄마 아빠 없어서.... 그거 하나는 편하네.
수민 타워팰리스를 바라보면, 재민이 일손을 멈추고 수민을 보며 따뜻하게 웃는다.
재민
너랑 있으면 단단해져.
수민이 재민을 마주본다. 재민이 사다리에 올라선 채 팔을 뻗어 수민의 목을 안아서 자기에게로 이끈다. 다정하게 키스하는 두 사람. 배경으로 보이는 타워팰리스.
씬86. INT. 수민의 옥탑방 (아침)
수민의 매트리스 침대에서 수민과 재민이 서로 얼싸안은 채 달콤하게 자고 있다. 잠시 후 핸드폰 울림소리. 수민이 간신히, 전화를 받는다.
수민
응. ....... 아침이잖아...... 응?
수민, 졸린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옥탑 마당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밖에는 가람이가 서 있다. 옆에는 새 자동차가 세워져 있다.
수민
어, 정말야? 좋겠다, 임마.
밖에 있는 가람. 가람이 수민의 옥탑방을 올려다보며,
가람
나, 일주일간 휴가 냈다. 서울 지리도 알 겸, 졸라 쏘다닐 거야. 나, 이 차로 형이랑 여행 가고 싶었는데.... 그 사람 거기 있지? (살짝 미소) 좋겠다, 형. ....... (애틋하게 위를 바라보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작은 옥탑방에 살아.
가람, 전화를 후닥닥 끊고는 멋쩍게 군대 경례를 붙인다. 그리고는 자동차 안으로 들어간다. 수민이 여전히 귀에 전화를 댄 채 떠나는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감상적으로 변하는 수민. 그리곤 옥탑방으로 들어와, 잠들어 있는 재민을 바라본다. 곤히 자고 있는 재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는다. 이어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모은 다음, 재민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잠들어 있던 재민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
재민
(눈을 감은 채 속삭이듯) 나도 니가 나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어.
수민이 다시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웃고 있는 재민.
재민
나도 아침에 그게 설 때마다 널 생각했으면 좋겠어.... 흐흐.
재민,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면서 수민이를 끌어안는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
씬87. INT. 재민의 회사, 복도, 회의실 (아침)
재민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기분이 좋다. 잠시 후, 직원 한 명이 지나가면서 재민의 어깨를 툭 친다.
직원1
축하해, 재민 씨.
재민 직원1를 돌아다보며,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 후, 여직원 두 명이 지나간다.
재민
굿모닝.
여직원1
축하해요, 실장 님.
여직원이 인사하고 지나가면서 둘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여자2(문현정씨)가, 여직원(심현우 팀장)에게 언니, 어떻게 해? 하고 말하는 소리. 재민, 갈피를 못 잡는 표정. 잠시 후, 재민이 자기 사무실에 거의 왔을 때 남자 직원(씬38에 나오는 남자 직원) 한 명이 청첩장 한 묶음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직원2
축하합니다, 실장 님. (표정, 야릇) 이거 회사에 돌리고 있었어요. 어머님... 아니, 사모님 회의실에서 기다리시는데...
재민, 청첩장 하나를 얼른 채뜨린다. 자기 청첩장이다. 얼굴이 하얘지는 재민, 청첩장을 쥐고는 바로 회의실 쪽으로 뛰어간다. 정신없이 허겁지겁 뛰어가는 재민. 다른 직원들이 인사하지만 재민은 그저 뛸 뿐이다. 마침내 당도한 회의실.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의자들이 정갈하게 놓여진 회의실. 안에 재민모가 창문가에 선 채 담배를 태우고 있다.
재민
이게 뭐예요?
재민모가 뒤돌아선다. 차가운 얼굴 표정.
재민모
나, 섹슈얼리티를 모를 만큼 그렇게 무식하지 않아. 니가 남자랑 자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임신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결혼은 해.
재민
(분노) 대체 왜 그래요?
재민모
(빨리 걸으며) 나 이따 수업 있어. 빨리 결론 내자. 지금 부사장실로 가 봐.
재민이 분노에 찬 얼굴로 재민모를 응시한다. 재민모, 담뱃재를 바닥에 털어내며,
재민모
이제 니 아버지도 알아.
재민, 아버지도 안다는 말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재민모
아니, 니 아버지 말고, 딴사람들한테 죄다 알려서라도.... 너, 포기 못해.
재민, 절망의 표정.
씬88. INT. 부사장실로 가는 복도 (아침)
재민이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극도로 긴장한 얼굴이지만 짐짓 침착한 척하며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의 곡조는 콰이강의 다리. 하지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
이윽고 부사장실 앞에서 걸음을 천천히 멈추는 재민. 어느새 휘파람이 멈추어져 있다. 재민, 불안함이 스치는 얼굴. 천천히 뒤를 돌아다본다. 복도, 텅 비어 있다. 이어 재민이 문을 두드린다. 복도에 울리는 노크 소리.
씬89. INT. 부사장실 (아침)
재민이 고개를 숙인 채 중앙에 서 있다. 재민은 죄 지은 표정으로 서 있지만, 눈빛엔 분노가 살짝 어려 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아침 태양 때문에, 아버지 그림자가 부사장 테이블을 가로질러 재민의 뒷벽에까지 뻗쳐 있다. 위압감. 재민부는 전화 중이다. 재민부, 앞에 있는 재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재민부 목소리
(웃으며) 네, 9월 16일에요. 그 날이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장관님이 꼭 해주셔야죠. .......... 아이, 고맙습니다. 결혼식 끝내고, 아들 녀석이랑 함께 필드에서 한 번 뵙겠습니다. 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조만간 전화 한 번 더 드릴께요. 네, 들어가십시오.
전화 끊는 소리.
재민부 목소리
(감정 억눌러) 청진그룹 회장님께 청첩장 보내 드렸니?
재민, 아무 말 없다. 잠시의 침묵. 그때 울리는 전화. 재민부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는다.
재민부 목소리
(격앙된 목소리) 야, 너 짤리고 싶어? 내가 전화 돌리지 말랬지!
쾅, 하고 전화를 끊는 재민부. 재민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간다. 밖을 내다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재민부 목소리
재민아.... 넌, 니 엄마 말고 내가 여자가 없었다고 생각하니? .......... 너 땜에 어제 한숨도 못 잤다. 꼭 너 어렸을 적에 아파서 날 샌 것 같아. 아침에 너 기운 차려서 활짝 웃고 있는 거 보면 이 애비 가슴이 얼마나 뭉클했는데.... 어제 그 얘기 처음 듣고 어땠는지 알아? 그 자식,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리고 싶었어........
재민, 고개를 들어 약간 놀란 눈으로 재민부를 바라본다. 잠시의 침묵.
재민부 목소리
그 친구랑 계속 그렇게 지내도 돼. 앞으로 그거에 대해 묻지 않으마, 상관 안 할께. 근데... 꽃 달자. 니 결혼식에 이 애비, 가슴에 꽃 달고 싶다. 그러니까 너도 티내면서 말하지만 마. 결혼은 그런 거다.
재민부 창문 쪽에서 재민에게 다가온다. 재민의 뺨을 어루만진다. 태도가 누그러져 이제 애원마저 담고 있다. (재민부는 의외의 배우였으면 하는 바램)
재민부
우리 가족, 이 회사, 우리 이름...... 나 한평생 앞만 보고 달렸다.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면 나 어떻게 사니? (눈물을 그렁거린 채 재민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넌 내 아들야.
재민
아빠...
재민부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뒤돌아선다. 재민이 아버지의 등을 바라본다.
재민부
이 아빠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무릎이라도 꿇을까? ...... (울컥) 너 없으면 아빠도 없다.
재민부 눈꼬리에서 미끄러지는 눈물. 무너지는 재민의 얼굴.
씬90. INT. 지하주차장 (정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재민이 격한 얼굴로 서 있다. 다친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손등의 상처, 핏자국. 재민이 나오면 엘리베이터 뒷면 거울이 산산조각 나 있는 게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재민, 성큼성큼 걸어가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을 달린다. 30미터쯤 빠르게 질주하던 자동차, 이내 끼익 하고 급정거한다. 자동차 안의 재민.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 손등으로 쓰윽 눈물을 훔치면, 얼굴에 묻어지는 핏자국. 차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
씬91. EXT. 레스토랑 앞 (정오)
유리창을 통해 앉아 있는 수민이가 보인다. 옆에는 주방장 옷을 입은 환선이가 서 있다. 둘이 뭐라고 하면서 함께 웃고 있다. 신나게 수다를 떠는 수민.
잠시 후 환선이가 가고, 안에서 수민이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인다. 재민의 호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 재민, 받지 않는다.
레스토랑 안. 전화를 끊는 수민.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계를 봤다가, 유리창밖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다.
씬92. INT. 재민의 오피스텔 (늦은 오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급하게 튀어나오는 수민. 수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초인종을 반복해서 계속 누른다. 아무 반응이 없자, 문을 두드린다.
수민
형 ......... 형!
잠시 후, 문이 열린다.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은 약혼녀 심현우. 설거지를 하다 나왔는지 두 손에 젖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둘 다 놀란 눈치.
현우
지금 재민 씨 없는데.... 누구시죠?
순간, 수민이 당황스러워하면서 뜸을 들인다. 점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수민
누, 누구세요?
현우도 다소 당황스러워한다.
현우
저요?
씬93. INT. 재민 오피스텔 (황혼녘)
문을 닫고 들어오는 현우. 잠시 문에 등을 대고 암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거실로 걸어와 리모콘으로 음악을 끈다. 그리곤 창문가로 다가간다. 커텐을 살며시 젖힌다. 마치 걸어가고 있는 수민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깥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씬94. EXT. 길거리 (황혼녘)
노을이 비치는 중앙 버스정류장. 불안한 표정으로, 빠르게 길을 걷고 있는 수민. 분노와 착찹한 심경이 섞여 있는 얼굴빛. 수민의 손에 청첩장이 들려져 있다. 그렇게 걷던 수민, 잠시 후 제자리에 서서 서서히 청첩장을 펴본다. 침울하게 굳어지는 수민의 얼굴.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려 수민을 스쳐 지나간다. 미동도 않는 수민.
씬95. INT. 수민의 옥탑방 (밤)
수민이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 있다. 멍한 표정으로 뽀득이를 쓰다듬어주고 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 요란하게 들린다. 수민아, 하고 외치는 술 취한 소리. 수민이 문쪽을 잠시 노려보다가 일어나 현관으로 간다. 차가운 동작으로 천천히 문을 연다. 술 취한 재민이 문 바로 앞에서 비틀거린다. 재민이 다친 손을 들어 보이며 바보같이 씨익 웃는다.
재민
아프다.
CUT TO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둡다. 재민이 창문가에 서 있다. 수민은 바닥에 앉아 재민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다. 마지막 매듭을 맨다. 그리곤 가위로 붕대 끈을 자르려는 순간, 창문을 바라보며 침울한 표정을 짓던 재민이 입을 연다.
재민
그래.....나, 비겁하지?
수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수민
재수 없어.
재민
그래... 난 처음부터 재수 없었던 놈이니까..... 그래도..... 그래도..... 너 사랑해.
수민, 가위를 든 채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곤 재민을 바라본다. 재민도 수민을 본다.
수민
그럼, 우리 사이는 뭐야?
재민, 고개를 들어 수민을 바라본다. 재민, 수민의 슬픈 눈을 견딜 수 없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수민
내가 무식해서 그래? 공부 열심히 할께.
재민의 침묵.
수민
내가 더러워서 그래? 앞으론 형만 보고 살께. .......... 내가 가난해서 그래? 일 열심히 할께.
재민이 비참한 얼굴로 수민을 바라본다. 수민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간절하게 재민을 보고 있다.
수민
........ 우리 사이는 뭐야?
재민, 수민의 얼굴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수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또다시 묻는다.
수민
그럼, 우리 사이는 뭐예요?
재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냥 방바닥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 버린다. 미처 자르지 못한 붕대가 재민의 손을 따라 주욱 펼쳐진다. 마침내 붕대 끝마저 질질 끌려간다. 2미터 가량의 흰 붕대, 마치 새처럼 날아간다. 수민은 슬픈 눈으로 재민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본다. 침대 위에서 자던 강아지 뽀득이가 고개를 들어 뭐야? 하고 재민이 뒷모습을 바라본다.
씬96. EXT. 공원 (새벽)
수민이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또 뛰기 시작한다. 땀에 흠뻑 젖어 있다. 처음에는 천천히 뛰다가, 마침내 속력을 낸다. 마치 자신을 학대하듯 비명을 속에 삼킨 채 사력을 다해 뛰는 수민.
씬97. EXT. 바닷가 (낮)
바닷가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재민의 자동차. 재민, 붕대 감은 손으로 운전을 하며 깊은 생각에 골몰해 있다. 핸드폰이 울리지만 받지 않는다.
CUT TO
수민과 함께 왔던 모래사장에 혼자 서 있는 재민. 격정에 찬 얼굴로 바다를 응시한다. 바람이 분다. 이어 붕대 감은 손을 조용히 응시한다.
씬98. EXT. 재민의 회사 앞 (늦은 오후)
재민의 회사 앞. 거대한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정중앙에 위치한. (카메라 고층빌딩 사이사이 바라보며 재민의 회사로 근접해온다.)
수민이 회사 앞에 혼자 떡 버티고 서 있다. 양복 입은 사람들이 퇴근 중이다. 수민 옆을 스쳐 지나간다. 수민, 손에 핸드폰을 들고 귀에 붙인 채 통화 중이다.
수민
형, 전화 받아요. 잠깐이면 돼요. 형 볼 때까지 여기 있을께.
수민이 음성메세지를 녹음하고, 버튼을 누른다. 이어 다시 한 번 재민 회사 건물을 올려다본다. 잠시 후 전화가 울린다. 수민, 얼른 전화를 받는다.
수민
여보세요?
하지만 점점 충격을 받은 듯 구겨지는 얼굴.
씬99. EXT. 어느 도로 (해질 무렵)
자동차가 도심 도로 가운데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 자동차 사고의 흔적들. 엔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차체 뒤편으로 견인차가 달려오고 있다.
가람이 차체에 거꾸로 매달려 눈을 뜬 채 죽어 있다. 어딘가를 동경하는 듯한 슬픈 얼굴, 흐르는 피.
씬100. EXT. 화장터 앞 (해질 무렵)
수민이 검정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옆구리에 유골 단지를 안고 걸어온다. 선글라스를 쓴 수민의 표정은 창백하다. 뚜벅뚜벅 걸어오면 앞에 자동차 한 대가 세워져 있고, 검정 옷을 입은 정태가 수민이를 기다리고 있다. 침울한 얼굴. 이마에 밴드와 멍 자국이 나 있다.
정태
시발, 어떻게 고아라고... 상주가 한 놈도 없냐?
수민
(자동차 문을 벌컥 열며 단호하게) 서울로 가.
씬101. EXT. 도심, 자동차 (밤)
자동차가 서울 도심을 달린다. 창밖으로 수민의 손이 나와 있고, 그 손에서 가람의 유골 가루가 허옇게 흩날려진다. 수민이 계속 가루를 바람에 흩날린다.
정태는 운전을 하고 있고, 수민은 뒷좌석에 앉아 유골을 서울 도심에 뿌리고 있는 중이다. 유골 흩날리는 걸 보지 않고, 선글라스를 쓰고 시선을 앞으로 한 채 울고 있다.
정태
저... 개새끼 봐. (창밖으로 얼굴 내밀며 울컥) 야, 시발 새끼들아 운전 똑바로 해!
수민, 흐느낌 소리가 더 짙어진다. 서울 밤도시에 흩날려지는 하얀 유골 가루.
씬102. EXT. 경찰서 앞 (밤)
경찰서 앞. 잠시 후 수민과 정태가 경찰서에서 나온다. 정태가 씩씩거린다. 수민은 여전히 유골함을 들고 있다. 양복 웃옷에 허옇게 가루가 묻어 있다.
정태
시발 놈들, 그럼 어디다 뿌리란 거야. 별 게 다 불법이고 지랄이네. .... (정태, 갑자기 생각난 듯 경찰서 쪽을 노려보며) 야, 가람이한테 차 사준 놈도 경찰 아니었냐?
수민, 아무 말도 없이 걷는다. 정태도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확신한 듯 수민에게 동의를 구하던 얼굴을 앞으로 돌리며 걷는다. 둘 다 표정이 어두워진다.
정태
개새끼들..... 다 쓸어버려야 돼.
수민
형..... 나, 가게 다시 나갈래.
정태
오지 마...... 뭣하러 기어들어와 새꺄. (조금 걸어가다 멈춰서서) 왜!
씬103. EXT. 도로, 자동차 (밤)
자동차가 도심을 달리고 있다.
정태
흡혈귀야 그 새끼들. 너 같은 등신들..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아, 시발 진짜 올드하네.... 나중에 봐, 그 좆만한 새끼, 결혼하고 배 이렇게 쳐나오면 슬슬 기어나올 껄.
수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정태
꼴값하네...... 가람이 저렇게 된 거 안 보여 새꺄? 나는 어떻고? (이마 상처 손으로 가리키며) 이거 안 보여? 어제 그 사채 개새끼들... 요즘 피 말려 돌아버리겠어. ........ 나 같았으면 그 새끼 죽도록 패줬을 거다. 돈도 왕창 뜯어내고....... 내 그 도망간 년이랑 니 그 새끼랑 뭐가 다른데.... 니가 한다고만 하면 내가.....
수민
(나무라듯) 뭘?
정태
(눈빛이 독하다) 너 흡혈귀가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몰라? 너랑 나랑....
수민, 정태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긴다.
수민
여기서 내려 줘.
정태
니가 한다고만 하면....
수민
내려 줘!
CUT TO
자동차 문이 쾅 닫힌다. 수민이 인도로 올라간다.
정태
멍청한 새끼!
정태, 신경질적으로 크락션을 세고 길게 누른다. 자동차 출발한다. 차에서 내린 수민이 유골함을 안은 채 인도를 걷는다. 피곤한 얼굴로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숙여 유골함을 한 번 보고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어 유골함에게 말을 걸듯 혼잣말로,
수민
(슬픈 얼굴) 가람아..... 내가 왜 자꾸 그 형네 집으로 가고 있냐?
조금 걷다가 골목에서 방향을 트는 수민.
수민
가람아..... 그 형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치? .... 그래도... 서울에선 아무도 믿으면 안 돼.
쓸쓸히 걸어가는 수민의 뒷모습.
씬104. 수민의 옥탑방 (오후)
잘 마른 와이셔츠, 빨래줄에 매달려 흔들린다. 수민이 와이셔츠를 걷어서 방으로 들어간다.
CUT TO
수민이 정장으로 잘 차려입고 거울을 보고 있다. 넥타이까지 매고 있다. 머리엔 무스를 발랐다. 손으로 머리를 다시 한 번 매만지면서 거울을 보며, 일부러 밝은 척 미소를 짓는다.
수민
잘 살아야 돼.
씬105. EXT. 재민의 회사 앞 (오후)
잘 차려입은 수민이 회사 앞을 활달하게 걸어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씬106. INT. 재민의 회사 (오후)
엘리베이터 안. 수민을 비롯해 몇 사람이 탔다. 수민이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이 흐뜨러지지 않았는지 살짝 살펴본다. 마침내 재민이 일하는 사무실 층. 수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활달하게 모퉁이를 돌아간다.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수민은 멈칫 그 자리에 선다. 마침 맞은편에서 재민 가족 일행이 다가오고 있다. 재민부, 재민모, 심현우, 그리고 재민. 그리고 뒤에 붙은 비서진 몇 명. 이들이 나란히 수민 쪽을 향해 다가온다. 수민 쪽에서 가던 직원 몇 명이 그들을 향해 인사한다. 재민모가 재민부를 보며 기분좋게 수다를 떨고 있다.
수민은 완전히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서 있는다. 재민이 수민을 알아본다. 깊고 떨리는 눈으로 응시한다. 마침내 네 명이 수민 옆을 지나간다. 수민 옆을 지나면서도 재민, 아는 체하지 않는다.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다. 수민이 스쳐 지나가는 재민을 보며 몸을 돌린다. 가족이 나란히 걸어간다. 심현우만이 고개를 돌리며 수민을 바라본다. 수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수민
형.
하지만 재민 모른 체 그냥 걸어간다. 심현우가 고개를 돌려 재민의 눈치를 살핀다. 수민, 다시 애타게 부른다.
수민
형.
재민, 그냥 걷기만 할 뿐이다. 심현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수민을 바라본다. 차분하면서도 물기가 묻어 있는 눈빛. 수민은 재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연자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다. 얼굴에 점점 어리는 애증의 분노.
씬107. INT. 엘리베이터 안 (오후)
재민, 재민모, 재민부, 심현우 이렇게 네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다.
재민모
정말 민우당 총재님께서 오신대요?
재민부
그럼 와야지. (소근) 내가 한 게 얼만데....
재민모
일찍 알았으면 총재님한테 주례 맡기는 건데....
웃는 재민모. 재민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다. 잠시 후, 무겁게 입을 연다.
재민
현우야......
재민이 현우의 손을 잡는다. 현우가 대꾸하지 않은 채 재민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마치 무슨 말이 나오려는지 아는 듯한 표정.
재민
미안해.
현우
......
재민
방금 지나온 남자....
현우
.......
재민
....... 내가 사랑하는 사람야.
재민모
송재민, 너 왜 이래?
현우,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재민이 촉촉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며,
재민
미안해.
순간, 현우가 재민의 뺨을 때린다.
현우
(울음 섞인 목소리) 너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지 마.
재민, 앞을 보며, 다소 편안해진 얼굴.
재민
고마워.
엘리베이터 안이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뒤틀려지는 사람들의 얼굴.
씬108. INT. 재민네 회사 복도 (오후)
엘리베이터에서 헐레벌떡 나와 복도로 빨리 걸어오는 재민. 복도에 들어서면서 걸음을 멈춘다. 텅 빈 복도. 수민이 없다. 간절한 표정의 재민.
씬109. EXT. 수민의 옥탑방 (오후)
재민이 계단을 올라와 수민 방문을 두드린다.
재민
수민아. 이수민!
방문을 두드리다 손잡이를 돌려보던 재민, 창문 쪽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본다. 그리곤 다시 나가며 전화를 한다.
씬110. INT. 통닭집 (오후)
핸드폰 벨 소리가 들린다. 수민, 전화 받지 않는다. 외려 더욱 얼굴빛이 굳어진다. 전화벨 소리 계속 울린다. 테이블에 수민이 혼자 앉아서 닭 두 마리를 시켜놓고 혼자 우걱지걱 먹고 있다. 닭고기 살점을 손으로 뜯는 수민. 이미 넥타이는 풀어놓았다. 씹을 새도 없이 허겁지겁 닭을 먹어대는 수민. 깊은 시름에 잠긴 눈, 처연하다.
닭고기를 입에 몽땅 쳐넣은 채 우물거리며 통닭집의 파란 공중 전화 쪽으로 다가간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는 수민. 전화 받는 상대방.
수민
(목 맨 소리) 형, 나야.
씬111. INT. 재민 오피스텔 주차장 (저녁)
재민이 주차된 자동차에서 나온다. 리모콘 키를 누르며,
재민
저 어쩔 수 없어요, 지금. 내일도 못 나갑니다, 부장님. 죄송해요.
재민이 전화를 끊고는 피곤한 기색으로 몇 걸음 걸어간다. 그리곤 다시 생각난 듯, 수민에게 전화를 건다. 이윽고,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수민의 핸드폰 벨소리. 재민, 움찔 놀란다. 그리곤 핸드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재민,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워하는 표정. 천천히 그 방향으로 걷던 재민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진다. 핸드폰 소리가 나는 주차장 기둥 가까이 다가간 재민. 서둘러 기둥을 돌아간다. 거기에는 수민이 기둥에 등진 채 다른 곳을 보며 서 있다. 순간, 놀라는 재민, 곧이어 순식간에 머리를 강타하는 야구 배트.
씬112. INT. 자동차 (밤)
달리는 자동차. 재민이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자동차 뒷칸에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 뉘어져 있다. 앞을 보니 운전석에는 수민이 앉아 있고 보조석에는 정태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재민, 공포에 떨지만 수민이라는 것을 알고 끙끙 소리를 낸다. 정태가 슬쩍 고개를 돌려, 재민을 바라본다.
정태
저 새끼, 깨어났네.
하지만 수민이는 쳐다보지 않는다. 정태, 몸을 뒤로 돌려 재민이의 얼굴을 후려친다.
정태
좆만아, 조용히 해. 이 씹새끼야!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재민이 다시 실신한다. 이미 머리는 피범벅이다. 정태, 피 묻은 주먹을 재민의 와이셔츠에 쓱쓱 닦는다. 다시 자동차를 시동 걸어 출발시키며,
정태
저 새끼 트렁크에 넣어야겠다.
하지만, 수민 쳐다보지 않고 운전만 하고 있다.
씬113. EXT. 365앞, 자동차 (밤)
바람이 분다. 흔들리는 나무들과 날아다니는 휴지들.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수민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
라디오 소리
태풍이 서울을 지나고 있다는 디제이의 목소리....
잠시 후, 365 현금출납소 문이 열리고 정태가 나온다.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 손에는 묵직한 봉지가 들려져 있다. 바람 때문에 몸을 숙이고 온다. 정태가 자동차 안으로 들어온다. 돈봉투를 열어보며 눈을 반짝이는 정태.
정태
바람 졸라 부네. 한 군데 빨리 더 돌자.
자동차 출발한다. 돈봉투는 쳐다보지도 않고, 바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수민. 뒷좌석은 텅 비어 있다.
씬114. EXT. 산 (밤)
재민의 자동차가 어두운 산속 길로 들어간다.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전부다. 이윽고 자동차가 으슥한 곳에 선다. 수민이 열쇠를 돌린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꺼진다. 주위 수풀들이 바람에 몹시 흔들리고 있다. 바람 소리. 어둠 속에서 수민이 흔들리는 자동차 키를 보고 있다.
정태
마음 독하게 먹어. 어차피 여기까지 왔어. 쟤네들이 그냥 당할 놈들야? 신고하면 너나 나나 인생 끝장야. 언제까지 저 새끼들 좆 빨고 살아?
트렁크에서 끙끙거리는 소리.
정태
(트렁크 쪽을 향해) 조용히 해, 씹새꺄!
정태가 먼저 바깥으로 나온다. 잠시 후 수민이 따라 나온다. 정태는 손에 후레쉬를 들고 있다. 수민도 마찬가지. 정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후레쉬로 비춘다.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 바람이 계속 분다.
정태
날씨 좆 같네.
이어 정태가 자동차 뒤편으로 와서 트렁크를 연다. 안에는 재민이 실려 있다. 끙끙거리며 발버둥친다. 재민이 큭큭거리며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수민이를 보자, 수민이 차갑게 고개를 돌린다.
정태
(능글맞게) 손님, 그 동안 실컷 즐기셨죠? .... 이제 산악훈련할 시간예요.
하고는 정태, 재민의 목덜미와 어깨를 잡아 트렁크에서 끄집어낸다.
정태
나와, 새끼야.
신음 소리 내는 재민, 이어 트렁크 밖으로 쿵 떨어지며 나동그라진다.
씬115. EXT. 산 (밤)
어둠에 잠긴 숲속. 후레쉬 불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길게 드리워진다. 바람이 분다. 흐느끼는 산.
온몸이 꽁꽁 묶인 재민이 앞에서 걸어가고 있고, 그 뒤를 재민의 몸을 묶은 줄을 잡고 있는 정태, 그리고 맨 마지막에 후레쉬와 삽을 들고 있는 수민이 뒤따라가고 있다. 비틀거리며 맨 앞에서 걸어가던 재민이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몸을 돌려 수민이를 바라본다. 간절한 얼굴.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린다. 수민이 그냥 고개를 외면한다.
정태
빨리 안 가, 새끼야!
재민, 고개를 돌리고 걷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지자 정태가 발로 재민이를 마구 걷어찬다.
정태
생쑈를 해라, 생쑈를. 이 고문관 새끼.
다시 실신해버리는 재민.
수민
그만 해!
발로 차던 정태가 언짢은 듯이 수민을 바라본다.
씬116. EXT. 산 (밤)
수민과 정태가 열심히 삽으로 땅을 파고 있다. 거의 다 팠다. 딱 한 사람 누울 만한 공간. 수민이는 마치 현실과 재민에게 복수하려는 듯 땀을 뻘뻘 흘리며 사정없이 구덩이를 파내려가고 있다.
한쪽에 누워 있는 재민은 기절해 있다. 잠시 후, 의식이 깨어난다. 다리를 움직여보지만 두 다리도 묶여 있다. 앞에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재민의 표정은 절망적이다. 재민이 조금씩 몸을 움직여 벌레처럼 바람에 나부끼는 수풀과 들꽃 사이를 기어가기 시작한다.
수민이 일을 하다 말고 허리를 편다. 기어가고 있는 재민을 본 것이다. 살기 위해 바둥거리며 기어가는 모습이 안쓰럽다. 수민, 삽을 흙더미 속에 푹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이어 정태도 재민의 모습을 본다.
정태
허허.... 저 새끼 분명 지 애비 빽으로 군대 안 갔을 거야. 저거 포복하는 솜씨 봐라.
침을 톡, 쏘아 뱉는 정태. 정태, 구덩이에서 나와 재민의 두 다리를 꽉 잡고 구덩이 쪽으로 잡아끈다.
정태
오빠, 이리와요. 천국 갈 시간이다.
질질 끌려가는 재민, 재갈 물린 입에서 큭큭,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재민이 구덩이 바로 위에까지 끌려온다. 재민, 수민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하지만 재갈 때문에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수민, 그제서야 재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콧물, 눈물, 침으로 범벅된 재민의 얼굴, 간절한 눈. 하지만 수민, 무표정한 얼굴을 짓고 바람이 부는 숲속을 바라본다.
정태
저승가기 전에 담배 한 대 줄까? ........ 됐어, 몸에 해로워.
말을 끝내자마자 정태, 재민의 몸을 발끝으로 구덩이로 밀어 넣는다. 재민의 몸이 데굴 하고 한 바퀴 돌며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관에 딱 누운 모양이다. 재민, 구덩이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울음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정태, 재빠르게 삽으로 흙을 퍼서 재민의 몸 위로 던지기 시작한다.
정태
(흙을 던지며) 이 시발 놈의 돈은... 땅을 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힘 주며) 땅에... 사람을 파묻어야 나오네. (계속 삽질하며) 가서.... 좆 같은 하느님 만나면.... 재수 없다고.... 아니지 졸라 고맙다고 좀 전해주라. 아멘...!
독기로 가득한 정태. 그제서야 수민이 재민을 내려다본다. 바람에 나부끼는 수민의 얼굴. 발버둥치며 흐느껴 우는 재민의 눈이 보인다. 벌써 입께도 흙이 덮어져 큭큭 거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민의 얼굴이 점점 연민과 슬픔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눈물에 젖은 채 큭큭거리는 재민. 수민은 재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침내 흙이 재민 얼굴을 덮는다.
수민
그만해.
정태
(삽질하며) 다 됐어.
수민
그만해!
수민, 정태의 손에서 삽을 붙잡아 집어던진다. 그러자 정태가 수민의 멱살을 움켜쥔다.
정태
미쳤어, 자식아. 왜 그래?
수민
그만해. 나 못해. 그 돈 전부 가지고 가. 나, 필요 없어.
수민, 정태를 뿌리치며 재민에게 다가가려고 한다. 그러자 정태, 수민을 붙잡고 따귀를 한 대 후려친다.
정태
정신 차려 이 새끼야. 그것도 정이냐? 같은 호모라서?
분노가 치밀은 수민, 정태를 주먹으로 후려친다. 정태가 나가떨어진다.
수민
그래, 개새끼야.
수민, 다시 재민에게 가려고 한다. 정태, 일어나 수민에게 달려든다. 바닥에 자빠뜨려놓고 주먹을 날린다.
정태
이 시발 놈, 너 죽을래?
수민
놔!
수민, 정태를 다시 밀어 자빠뜨린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고서 씩씩거리며,
수민
그 돈, 니가 다 가지라고! 나, 필요 없어. (울컥) 내가 돈 때문에 그랬어? 저 자식 신고 안 할 거야, 그냥 가!
수민, 구덩이 쪽으로 다가간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아직도 큭큭거리고 있는 재민의 얼굴에서 떨리는 손으로 흙을 쓸어내린다. 재민이 큭큭거리며 수민을 애틋하게 올려다본다.
그때, 수민 뒤에서 정태가 삽을 들고 나타나 수민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퍽, 소리와 함께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수민, 재민의 몸 위로 엎어지고 만다. 정태, 삽을 들고 씩씩거리며, 다시 한 번 삽으로 찍으려고 하다가 동작을 멈춘다. 이내 삽을 땅에 지르며,
정태
병신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정태가 곧이어 삽을 퍼서 두 사람 몸 위에 던진다.
정태
그렇게 좋으면 너도 묻어줄게.
그렇게 네 번 정도 씩씩거리며 삽질을 하던 정태, 삽질을 멈춘다.
정태
(삽을 땅에 질러 넣으며) 에이, 개새끼! 왜 이렇게 우리 구질구질하냐? 엉? 에이 씨...
정태의 뒷말에 약간 물기가 묻어 있다. 정태, 뒤돌아서서 산을 내려간다. 재민은 재갈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없고 자기 위에 누운 수민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다. 수민은 죽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가 없다. 재민이 수민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재민, 수민 이름을 불러본다. 큭큭큭.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무덤 위로 불던 바람이 잦아든다.
씬117. EXT. 산 아래, 자동차 (밤)
헐레벌떡 뛰어온 정태가 자동차 문을 열고 들어온다. 운전대 밑을 살핀다. 키가 없다. 자동차에 올라타고서 주머니를 뒤진다. 키가 없다. 산 쪽을 노려보며,
정태
아이, 시발.
그리곤 천장에 매달린 백미러를 열었다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닫는다. 정태, 보조석에 놓여진 돈 가방을 허겁지겁 쥐고는 씩씩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뛰쳐나간 정태, 도망가다가 갑자기 멈춰 선다. 바람이 모두 멈춰 서 있다. 고요해진 숲을 두려운 눈으로 보던 정태, 다시 도망가기 시작한다.
씬118. EXT. 산 (밤)
재민, 안도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이 숲속 가지에 동그마니 걸려 있다. 구름이 빨리 흘러간다. 태풍의 눈이다. 아름답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달빛은 뚜렷하다. 그리고 자신의 몸 위에서 따뜻하게 자맥질하는 수민의 고른 숨결을 느낀다.
그 순간 재민은 자신의 삶을 반추했는지도 모른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렇게 아무도 없는 산 속 구덩이 속에서 수민의 몸을 느끼며,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삶의 소중함을 느꼈는지도. 달빛만이 동그마니 비추고 있는 그 구덩이 안에서 재민은 수민의 숨 소리를 들었다.
새 한 마리가 푸득 날아오르고, 달팽이 한 마리가 풀잎 위를 미끄러진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들꽃, 바위 위로 나와 고개를 든 도룡뇽. 평화가 찾아온 숲.
시간이 흐른 뒤, 수민이 신음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뒷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뒷골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다가, 문뜩 재민의 얼굴을 본다. 눈이 부딪힌다. 오래 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이윽고, 수민이 눈빛을 떨군다. 수민이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고 손을 천천히 움직인다. 재민의 팔에서 끈을 풀어낸다. 끈을 다 풀고, 수민 아픈지 구덩이 벽에 몸을 기댄다.
재민, 끈이 풀어지자, 재갈을 풀며 상체를 일으킨다. 그렇게 구덩이 속에서 둘이 다리를 서로 엮은 채 일어나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달이 그 둘을 비추고 있다.
씬119. EXT. 산 (밤)
재민이 상처 입은 수민을 들쳐 업고서 산을 내려오기 시작한다. 달빛이 따라오는, 어둠에 잠긴 숲속 길을 둘이 내려오는 동안 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민의 손에 후레쉬가 들려 있다.
수민이가 훌쩍인다. 울고 있다. 재민이는 몸을 구부려 수민이를 다시 한 번 제대로 업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씬120. EXT. 자동차, 도로 (밤)
자동차가 시골 국도를 달린다. 사방이 어둡다. 자동차가 조용히 달리고 있다. 두 사람은 계속 침묵을 지킨다. 재민은 말없이 운전을 하고 있고, 수민은 뒷좌석에 엉거주춤 누워 위를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수민이 침묵을 깬다.
수민
미안해....
재민, 고개를 돌리지도 대꾸하지도 않는다. 또 이어 수민이가 울음 젖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한다.
수민
안녕하세요.... 재민 씨.
그러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쏟아내는 재민. 그리곤 참지 못해, 고개를 돌려 수민이를 바라본다.
그때 자동차가 길가 전신주를 들이 박아버린다.
씬121. EXT. 자동차, 도로 (밤)
고즈넉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찌그러진 보넷 사이에서 연기가 조용히 흐적거리며 피어오른다. 인적이 없는 조용한 시골 도로의 심야. 반쯤 동강난 전신주의 가로등이 구부정하게 휘어진 채 합선이 되는지 연달아 깜빡거리며 전신주 밑둥을 들이받은 자동차를 굽어보고 있다.
저 멀리서 달려온 교통경찰이 오토바이에서 내려 자동차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축축한 새벽의 공기 탓일까? 깨진 자동차 유리에 달라붙은 미세한 빛들이 아름답다. 교통경찰의 구두가 유리를 밟을 때 나는 사각 소리.
운전석에서 고꾸라져 있는 재민은 달콤한 꿈을 꾸는 듯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 머리엔 피가 나고 있다. 한편, 수민이는 자동차 뒷칸에 널브러진 채 자동차 위를 향해 눈을 뜨고 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흙투성이의 와이셔츠를 입은 채 뒷좌석에 불편한 자세로 누워, 죽었는지 살았는지 호흡을 멈춘 그의 눈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만 같다.
경찰이 유리창 깨진 창문으로 가만히 자동차 안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재민이가 운전석 뒷좌석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수민이의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다리를 더듬다가 마침내 성기께를 꽉 쥔다. 다신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꼭.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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