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1. 경희궁 / 밤.
// 비가 오는 경희궁의 밤. 천둥번개... 그 소리와 빛.
경희궁 궐내 어느 깊고 깊은 곳... 주위 사물의 희미한 윤곽들...
어딘가로 점점 다가가며 깊어지는 화면.
작은 창 너머로... 느닷없는 천둥의 소음과 번개의 섬광이 비치면...
탁하게 내려앉은 바닥의 먼지.. 두 사람의 작은 발자국,.
깊어지는 심도의 중앙... 기괴한 기운을 품고 있는 사각 궤짝의 흔적.
이윽고, 벼락의 광채... 뚜렷하게 드러나는 궤짝의 정체.
뒤주다. 사도세자가 갇혀 죽었던 그 뒤주... 사도세자의, 그 일물(一物)이다.
순간, 소리도 빛도 완전히 멈춰버린, 완벽한 정적, 검은색 배경 인서트.
그 위로, 간격을 두고 떠오르는 자막들.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
- 세손 이산
- 1775년 2월 5일
- 존현각 일기
// 정전 앞뜰, 조정으로 들어가는 숭정문... 비를 맞고 있는 계단의 해태상.
천둥번개... 검은색 배경 인서트. 자막.
정신과 기운이 더욱 피곤하여 한 장의 문서도 보기 어려우니,
국조고사에 따라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자 한다.
- 영조
- 1775년 11월 20일
// 조정의 박석과 품계석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따라..
숭정전으로 다가가는 카메라. 검은색 배경 인서트. 자막.
세손은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와 병조를 알 필요가 없고,
나랏일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 노론 벽파 홍인한
- 1775년 11월 20일
// 비를 맞으며,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崇政殿)이다.
저기 숭정전을 때리는 천둥번개. 검은색 배경 인서트. 자막.
너는 대신들의 말에 동요하지 말라.
할아비는 손자에게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에게 의지하는 때에
무슨 의례적인 사양이 필요하겠는가.
너는 단지 내 하교를 따르고 내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이니, 이것이 너의 효이다.
을수
- 2 -
- 영조
- 1775년 11월 20일
// 카메라, 숭정전 지붕 위로 오르면... 숭정전 지붕의 용마루... 그 위의 잡상들.
세차게 떨어지는 빗줄기의 소음들. 검은색 배경 인서트. 자막.
이때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 놓고 밤낮으로 엿보고 살펴,
나의 동정 하나하나, 언행 하나하나를 모두 탐지해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
- 세손 이산
- 1775년 11월 27일
// 숭정전 너머, 저기 멀리 존현각이 보인다.
지붕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듯... 존현각으로 훌쩍 다가간 카메라.
아아! 장차 내 사업을 내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단 말인가.
- 영조
- 1775년 11월 20일
//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훑어가듯 부감 횡으로 이동하면...
천둥번개 속에 차비문을 지나... 정조의 침전, 존현각의 마당이 보이고...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는 주검들. 미동도 없다... 그 처마위로 빗물이 튀어 오른다.
빗소리가 잦아들고, 낮은 탄식이 들리는가 싶더니...
칠흑 같이 검은 화면 위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조(E)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자막. 단어 하나하나가, 순서대로 또박또박 나타난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
- 1776년 3월 10일, 조선 22대 임금 즉위 당일
// 혼자, 외롭게, 비를 맞고 있는 존현각...
그 입구... 건물의 지게문 밖으로 노랗고 붉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자막> 1777년 음력 7월 28일, 정조 1년
// 수직부감에서 존현각의 지붕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카메라.
<자막> 자시 일각, 11:15 pm
순식간에, 검은 인영 하나가... 기와 사이로 드러난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진다.
비가 때리고 있는 존현각의 지붕....
을수
- 3 -
격렬하고 둔탁한 소음,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 부서지고 무너지는, 온갖 잡소리들...
카메라가 다가갈수록 점점 더 크게 들리고.
마침내 요란한 총성과 함께, 모든 소음의 완벽한 정지!!!
지붕 위 기왓장 하나하나를 때리는 빗줄기와 그 소리뿐... 암전.
그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타이틀
역역린린
2. 존현각 뒤뜰 / 밤.
바닥에 내려놓은 초롱불의 역광을 받고 있는... 한 사내가 바쁘다.
모종삽으로 모래를 파내고.. 그 모래를 작은 종기에 담아 손저울로 무게를 다는 사
내... 환관 ‘갑수(28)’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 얼굴 위로 땀방울이 흐른다.
저울에 따라 모래를 가감하는 갑수, 정성스럽게 운동용 모래주머니를 만들고 있다.
<자막> 20시간 15분 전
갑수의 바짓단 끝자락으로 카메라 깊어지면... 점점이 뿌려져있는 핏자국들...
하늘을 향해 먹먹한 한숨을 내뱉는 갑수, 그 시선... 깊은 피로와 허무를 담고 있다.
마침내 일이 끝나고, 일감들을 챙긴 갑수가 초롱을 들고 자리를 뜬다.
<자막> 인시 정각, 03:00 am
3. 존현각 침전 / 밤.
주기적이고 획일적인, 누군가의 거친 호흡을 배경으로...
왕의 침전, 그 사방 벽을 채운 책장들. 책과 서류더미, 두루마리들이 빽빽하다.
방 중앙... 금침이 하나, 소반이 하나, 소반 옆 호롱불 하나, 그 소반 위 펼쳐져 있는
책 하나. 그 옆으로... 상의를 탈의한 채 운동선수처럼 능숙하게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사내의 등짝. 땀으로 흥건한 등짝은 세밀한 근육으로 완벽하다.
거친 호흡의 주인공.. 보위 1년을 맞는, 젊은 왕, ‘정조 이산(25)’이다.
팔굽혀 펴기를 멈추고, 무명 수건으로 얼굴과 몸을 닦는 정조.
무언가를 중얼중얼... 다시 운동을 시작하려다... 소반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무
릎을 꿇고 책장을 넘기며 서책을 보는 정조.
고시 공부하는 고시생처럼, 연신 눈으로 입으로... 경건하고 집요하게...
소반에서 물러나고... 다시 팔굽혀펴기가 시작되고.
4. 세답방 앞 냇가 / 밤.
을수
- 4 -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물에 젖은 빨래를 다루는 손길들.
수로 앞에 늘어선 무수리의 부산한 움직임... 안개 낀 세답방이 보인다.
5. 세답방 작업실 / 밤.
어마어마한 규모의 복층 공간을 가득 메운 세답방 나인들...
상궁들이 교관처럼 서성이고, 얇은 사로 얼굴을 가린 앳된 견습나인들, 입술에 비단
을 물고 있는 정식나인들이.. 화롯불에 달군 돌을 담은 다리미를 들고, 물뿌리개를
누르며 치익치익... 예복을 다린다.
세답방상궁 (장면 장면들 마다 그 위로) 무명천과 베옷과 비단이 모두 그 온도가 달라
야 한다. 침방에서 옷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세답방 다리미질이 지극하지
못하면 옷은 생기를 잃고 한낱 천 조각이 되느니라. 우리 옷의 생명은 선
이다. 선이 살아있지 않으면 왕후의 옷도 천녀의 옷으로 둔갑하나니... 정성
을 다하고 궁량을 다하여 다듬어야 하느니라.
문이 열리고... 궁궐 모든 궁녀들의 우두머리, 웃음기 하나 없는 제조상궁 ‘고수애(50
대)’가 양손에 무언가를 받쳐 들고 들어선다.
경직되는 공기... 일손이 멎고, 시선이 모인다.
중앙 다리미단 위에 물건이 놓이면... 정식나인들이 그 앞에 서서 예를 표한다.
다리미를 놓고 단 앞에 서는 나인. ‘월혜(24)’다.
반듯하고 정갈한 손으로 비단을 걷어내면, 임금의 정복 곤룡포(袞龍袍)다.
월혜가 곤룡포를 향해 깊이 절하자, 일제히 임금을 대하듯 바닥에 납작 조아린다.
6. 존현각 침전 / 밤.
팔굽혀펴기가 끝나고... 좌선하는 자세로 명상에 잠겨있는 정조.
순간 초롱불을 앞세운 그림자가 순식간에 다가와 문 앞에 엎드린다.
정조의 눈이 날카롭게 떠진다.
뒷벽에 걸린 화려한 검... 임금의 보검..... 운검(雲劒)이 빛을 받아 번뜩인다.
갑수(E) (문 밖에서) 신.. 상책이옵니다.
정조 (무명침복 상의를 입으며) 들라.
초롱과 자루를 든 갑수가 들어와, 문을 닫고, 구부린 자세로 정조 앞으로.
무릎을 꿇고, 늘 그랬다는 듯, 자루 안에서 5개의 모래주머니를 꺼내 펼쳐 놓는다.
보기에도 묵직해 보인다... 상의를 벗고 멜빵처럼 어깨띠를 둘러 배에 모래주머니를
차면... 역시 늘 그랬다는 듯... 갑수가 정조의 뒤로 돌아가 끈을 조여 준다.
을수
- 5 -
무게를 가늠하듯 펄쩍 뛰어도 보고, 스트레칭도 하는 정조. 무거운 갑수의 얼굴.
정조 어찌 그러느냐?
갑수 무관들도 그 무게를 달고 움직이면 반나절을 버티질 못할 것이옵니다. 헌
데 전하께선 파조(罷朝)하실 때까지 달고 다니시니...
정조 드러내놓고 몸을 다듬지 못할 처지니 어찌할 수 있겠느냐?
말을 하며 십자가 옷걸이에 걸어 둔 상복으로 갈아입는 정조.
갑수가 황급히 다가와 상중에 쓰는, 무명천으로 둘러싼 익선관을 준비하여 건넨다.
무슨 전방의 무장 같은 정조의 생활패턴이 잡힌다.
갑수 전하... 시중드는 나인 하나 없다는 것이.... 이제 침소를 보존할 지밀나인을
들이실 때도...
정조 아직 상중이다.
정조가 벗어놓은 무명 침복을 십자가 옷걸이에 걸던 갑수가 침복을 본다.
구멍이 나고 헤지고 수선한 자리가 터지고... 정조가 신고 있는 버선 역시 마찬가지
다. 올이 나가고 뒤축이 닳아 살이 보인다. 그런 갑수를, 정조가 또 읽는다.
정조 그렇게 보기 싫으냐?
갑수 (황망히) 아니옵니다, 전하.
정조 궁중의 모든 허물이 사치할 ‘치(侈)’자 하나로 시작된다고 했다. 다섯 살 아
이에게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나으냐’ 하고 물었더니 ‘무명이 더 낫
사옵니다’ 하며 무명옷을 입었다. 누구 얘긴 줄 아느냐?
갑수 전하께서...
정조 아바마마다.
홍국영(E) (문 밖에서) 전하! 신 금위대장 홍국영이옵니다! 곧 파루이옵니다!
정조 알았다. 대기하라.
나가려는 정조. 뒤따르는 갑수가 소반을 발견하지 못하고 발로 건드린다.
소반 위의 책이, 표지가 바닥으로 엎어진 채 떨어진다. 황급히 책을 주우려는 갑수.
정조가 손을 막는 시늉. 갑수, 손길을 멈춘 채 긴장이 흐른다.
정조 무슨 책이더냐?
갑수 보지... 못하였사옵니다.
정조 하늘이 사람에게 준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하고 도
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무슨 책이더냐?
갑수 예기의... 중용이옵니다.
정조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어야만 본성을 다 발휘할 수 있다. 사람의 본
성을 다 발휘하면 만물의 본성을 다 발휘할 수 있게 되고, 만물의 본성을
다 발휘하면 하늘과 땅의 변화와 생육을 돕게 되고, 하늘과 땅의 생육을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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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게 되면, 하늘과 땅에 대등해진다... 몇 장이더냐?
갑수 스물두 번째 장이옵니다.
정조 그 뒷장... 스물세 번째 장은 어찌 되느냐?
갑수 전하... 혼전으로 납실 시간이옵니다.
정조 어찌 되느냐?
갑수 .......
갑수가 황망히 머리를 조아린다... 장지문을 여는 정조.
정조 무엇이든, 니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정성을 다하라. 그리하면 이루어진다.
조아린 갑수의 얼굴이 한없이 무겁다. 존현각 복도로 나아가는 정조.
높은 천정과 좁은 복도.. 그 사이로 늘어선 거대한 서고의 수많은 책들 사이로..
새벽빛이 닿는다. 정조의 뒷모습이.. 그 빛을 가르며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7. 파루 몽타주 / 밤.
타종하는 관리들. 금닭이 운다. 성문이 열리고, 대기하던 백성들이 들어온다.
<자막> 파루, 인시 반각, 04:00 am
8. 세답방 작업실 / 밤.
밧줄을 당기는 손. 도르레가 돌아간다.
상궁과 나인들이 일제히 부복하고... 다려진 정조의 곤룡포가 올라온다.
십자가에 달린 채 공중에 여기 저기 떠 있는 정조의 곤룡포들이 보인다...
붉고, 푸르고, 검고... 그 가운데..... 정조의 백색 곤룡포가 우뚝하다.
9. 존현각 앞뜰 / 밤.
파루의 종소리와 함께... 존현각 앞뜰... 횃불을 든, 금위영 무관과 수행 내관, 나인들
이 양쪽으로 시립한 가운데, 무명 익선관을 쓴 상복 차림의 정조가 걸어온다.
무복 차림의 도승지 겸 금위영 대장,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자가 정조의 바로 옆에서
수행한다. 그 사내... ‘홍국영(29)’이다.
홍국영 이번 기회에 어영대장 구선복을 제거해야 합니다. 천변 준설 사업을 그리
망쳐놓았으니 타당합니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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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얼굴, 표정이 없다. 호위들이 존현각의 차비문을 열면.. 말없이 문을 지난다.
홍국영 (뭔가 조급한) 구선복은 노론이 잡고 있는 군권의 핵심입니다. 하루속히...
정조 ........
10. 경강 군영 / 밤.
철퍽이는 굉음과 함께 진흙이 튀고, 바닥을 내리치는 군화발들. 날카로운 쇳소리.
끝도 없이 늘어선 방패 사이로, 시퍼런 창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다.
회칠한 군사들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고.. 안광에 살기가 흐른다. 전쟁터다...
뚱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있던 노장군이 벌떡 일어나 군사들에게 고함지른다.
구선복 병신새끼들아! 원앙진이잖아! 원앙진! 장창이 왜 낭선 앞에 나와 설치고 지
랄이냐고!!!
대열을 갖춰 시범을 보이던 수십의 최정예 군사들... 창과 방패를 거두고 시립한다.
경강 군영... 시범을 보이던 군사들 뒤로 천 여 명의 어영청 대부대가 드러난다.
횃불 가득한 장관.. 기단 위 장군석에 앉아있는 3명의 장군들...
가운데 자리, 거만하고 심술궂은 인상의 ‘구선복(59)’.
구선복 잘한다, 이것들아. 꼭두새벽부터 잠도 못 자구 훈련은 왜 하는 거야, 어?
연결이야, 이 새끼들아! 해 뜨고.. 또 질 때까지 쭈욱...
장군 1 (조심스럽게) 저기... 절강병법 살수대 원앙진은 장창이 낭선 앞에 있는 게
맞습니다.
구선복, 멀뚱하다가 빤히 장군 1 본다. 장군 1... 뭔가 섬뜩해지고.
구선복 자리에 앉으면.. 장군 1.. 초조해진다.
장군1이 중군의 눈치를 본다. 중군, 묵묵부답.
구선복 (느물하게) 잘났다... 시캬. (중군에게) 낮에 밥은 잘 멕이구....... 좀 재워라.
중 군 .... (끄덕이는)
11. 궐내, 혼전 가는 길 / 밤.
홍국영 구선복은 임오년의 원흉입니다! 어찌 보면.. 전하께서 사약을 내리신 홍인
한이나 정후겸보다 더한...
정조, 걸음을 멈춘다. 금위영들이 일사불란하게 주위를 경계한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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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지금 구선복을 건드리면 오군영이 다 일어선다. 무리하면 역풍을 맞는다.
홍국영 전하! 우리가 먼저 쳐야 합니다.
정조 선왕을 뵈러... 혼전으로 가는 길이다. 놓아주겠나?
홍국영이 정조의 단호함을 읽는다. 이내 체념하고, 허리숙인 채 뒤로 물러난다.
12. 혼전 태령전 마당 / 밤.
태령전(泰寧殿)앞... 정조가 걸음을 멈추면, 제자리를 찾듯 갈라지는 금위영들.
기도하듯 양팔을 벌리는 정조. 상복 위로 제례복 하의를 둘러 입히는 내관들.
정조가 혼전 앞마당에 무릎을 꿇는다. 내관 두 명이 혼전의 문을 개방하려 한다.
정조의 얼굴이, 알 수 없는 그 표정이 횃불에 일렁인다.
<인서트> 내리쬐는 햇살아래, 창경궁 문정전 뜨락에 놓여있는 뒤주.
분노의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노회한 군주... 영조.
정조가 땅에 이마를 대며 엎드리면...
혼전의 문이 열리며... 영조의 어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13. 존현각 침전 / 밤.
십자가 모양의 옷걸이에 곤룡포를 걸고 있는 세답방 나인들.
일이 끝나고, 하늘같은 제조상궁 고수애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나인들이 물러간다.
고수애 (정조의 침복 냄새를 맡는) ...수거해서, 세답하거라.
월혜 (익선관을 십자가 옷걸이 위에 걸며) 네, 큰방마마님.
고수애 (이부자리 냄새 맡으며) 이것도.
월혜 네.
월혜가 침복과 이부자리를 조심스럽게 개어 챙긴다.
월혜 (지나가는 말투처럼) 아비가 오늘 차비문의 직숙 별감입니다.
고수애 ...!!
월혜 오늘... 입니다.
고수애, 그 무표정한 얼굴에 스치는 일말의 당혹감과 흔들림
월혜가 침복과 이부자리를 들고 곱게 인사하며 나간다.
곤룡포를 돌아보는 고수애... 정조의 곤룡포가 실바람에 흔들린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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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느 방 / 밤.
가녀린 손이 붓을 들어 붉은 종이 위에 글을 써내려간다.
今日 殺主
<자막> 오늘 주인을 죽여라.
붓을 내려놓는 여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15. 경강 나룻배 / 밤.
등불 하나 밝히고, 밤의 경강 위를 흘러가고 있는 나룻배.
곰방대를 물고 느긋하니 배를 이끄는 사공. 갓난아기 젖을 먹이고 있는 아낙.
꾀죄죄하고 덥수룩한 머리칼의 여자아이.. 그 손녀딸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겨주고 있
는 노파. 여자아이가 가지고 놀던, 지푸라기로 만든 공이 한쪽으로 굴러가면...
깊고 큰 흑립에 도포차림, 긴 사각 목함을 들고 앉아있는 사내의 발치께에 닿는다.
노파와 여자아이가 공을 돌려달란 표정으로 사내를 보면...
사내, 귀밑에서 목덜미를 지나 옷 속으로 사라지는, 깊은 칼자국이 섬뜩하다.
공을 달라는 아이의 당돌한 눈빛과 사내의 서늘하고 무심한 시선이 교차한다.
노파, 슬그머니 아이를 당겨 안으면... 끝내 공을 무시하고, 그 시선을 무시하고, 경강
변의 여객들 그 불빛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사내... ‘을수(26)’다.
16. 왕대비전 차비문 / 새벽.
동녘하늘이 푸르게 밝아온다.
거친 소리와 함께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상복 차림의 정조.
홍국영과 금위영들이 따르고 있다...
<자막> 묘시 정각, 05:00 am
왕대비전 입구, 문을 지키는 내관들이 정조를 보며 허리 숙여 인사한다.
금위영들이 그 문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대기한다.
왕대비전 내관들이 문을 열면, 정조 혼자, 왕대비전 마당으로 들어간다.
홍국영이 문밖에서 구십 도로 허리 숙인다.
정조가 안으로 들어가면... 홍국영이 고개 들기도 전에 문을 닫는 내관.
홍국영이 고개를 들며 불쾌한 기색이 보인다.
홍국영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을 처닫아?
왕대비전내관 다시... 열깝쇼?
을수
- 10 -
홍국영 (자리에 가서 서며) 됐어!
금위영들이 주인의 의중을 따라 왕대비전 내관들을 노려본다.
내관들도 지지 않고, 그들을 무시한다. 두 세력의 신경전이 후끈하다.
17. 왕대비전 / 새벽.
정조가 깍듯하게 절을 하고 무릎을 꿇는다.
정조의 앞... 속이 보일 듯 말 듯한 얇은 모시적삼을 입고, 왕의 인사를 받는 자리에
서도 시녀들을 물리지 않고, 손톱 소지를 맡기고, 머리 손질을 맡기고, 어깨와 다리
를 주무르게 하고 있는 여인... 뇌쇄적인 눈빛, 도발적이고 강렬한 기운... 극단의 섹
시미까지 풍기는 궁의 제일어른... 서른두 살의 왕대비 ‘정순왕후(32)’다.
대화 사이사이, 시중드는 시녀들... 정조 보기를 낯선 손님 보듯 한다. 그 사이, 어린
시녀 ‘복빙(10)’ 도 있다. 시녀들의 그 무례하고 조직되고 의도된 시선들...
정조 할마마마. 밤새 강녕하셨사옵니까?
정순왕후 강녕할 리가 있나요.
정조 편찮으신 데가 있사옵니까?
정순왕후 요즘 밤새 존현각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정조 ......
정순왕후 무리하면... 다쳐요. 주상이 다치면... 내가 강녕하지 않습니다.
정조 명심하겠사옵니다.
정순왕후 요즘 유달리 소론과 남인들 상소와 차자가 많다고 합니다. 자기네 세상이
왔다고 노론을 다 죽이자면서요?
정조 탕평은 할바마마의 추상같은 유지입니다.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순왕후, 치마를 걷으며 복빙에게 맨발을 내민다... 발톱을 소지하는 복빙.
고개 들던 정조, 그 모습에 당혹해하며 다시 머리를 숙인다. 왕에게 보이는 맨발...
정순왕후 홍국영이 구선복을 그렇게 죽이고 싶어 어쩝니까?
정조 ....!!!
정순왕후 젊어서 권세를 얻어 그런가... 아주 살기가 등등하다고 합니다. 홍인한이도
죽이고 정후겸이도 죽이고 내 오라비도 귀양 보내고...
정조 ......
정순왕후 노론벽파들이 주상의 생부를 죽였다... 그러니, 그 원수들을 모두 잡아 죽이
자는 게 그 자의 소원이라면서요? 조정의 모든 대소신료들이 도승지 홍국
영이가 떴다하면 오금을 저린 답니다.
정조 ......
정순왕후 게다가 요즘은 금위대장자리까지 겸직해서 궁중에 칼을 차고 다니니... 나
도 그자를 마주칠까 겁이 납니다.
을수
- 11 -
정조 .......
정순왕후 주상은 내 귀한 손자니까... 하는 말이에요. 구선복을 치면 오군영만 들고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산림의 유생들... 이 나라 사대부들도 가만있질 않아
요.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면... 정치.. 어려워요.
정조 명심... 하겠사옵니다.
정순왕후 이리와 보세요.
정조, 고개 들고 흠칫. 두 손을 내밀고 오라는 시늉하는 정순왕후.
잠깐의 고민이 스치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정조.
정조의 두 손을 잡은 정순왕후, 얼굴을 가까이 대려하면..
정조가 경계하듯 물러난다..... 그 미세한 불협화음...
정순왕후 (속삭이듯) 행여라도... 행여라도 하는 말입니다. 주상에게 변고가 생기면 내
가 힘들어져요. 국왕책봉권이다 뭐다 해서 조정의 인물들이 이 왕대비를
가만 놔두겠어요?
정조 !!!
정순왕후 존현각이요. 밤새 책 보신다면서요. 사람이.. 잠은 자야지요.
정조 명심... 하겠사옵니다, 할마마마...
18. 왕대비전 마당 / 새벽.
왕대비전 지게문 밖... 문밖을 나서는 정조의 표정이 먹먹하다.
그 굴욕을 털어버리려는 듯, 깊은숨을 내쉬고, 척척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정조.
밖으로 나가려는 정조와 안으로 들어오는 고수애가 마주친다.
고수애, 정조의 길을 비켜나면서 깊이 인사한다.
19. 왕대비전 / 새벽.
고수애가 정조의 자리에 앉아 정순왕후와 마주하고 있다.
고수애 오늘밤... 실행할 듯하옵니다.
정순왕후 (슬핏 굳는... 이내.. 묘한 웃음) 내가, 엎어라하면... 엎어지는 것이냐?
고수애 (조아리며)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정순왕후, 생각에 잠기듯 손가락을 까닥까닥... 복빙과 시녀들을 본다.
정순왕후 복빙아. 니가 결정할 테냐?
복빙과 시녀들, 움찔하더니 이내 까르르르~ 경박한 웃음들을 터트린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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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뭔가 들뜬 표정으로) 봐서... 여름날이란 게 꽤 길지 않느냐...
20. 기방 복도 + 객실 / 새벽.
겹겹이 깊은 기방 복도.. 흑립에 도포 차림, 목함을 든 사내가 걸어온다.
을수다. 기방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기생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한쪽 자리에 앉는 을수... 만취한 남자가 멀뚱한 얼굴로 을수를 본다.
젓가락을 들어 전을 집어 먹는 을수.
기생을 흘끗 보더니, 을수에게.. “누구....” 하고 말을 건네는 남자.
순식간에 가벼운 충돌음과 함께... 남자가 석상처럼 굳는다.
을수의 주먹이 남자의 목에 닿아있고... 젓가락 두개가 뒷목을 뚫고 있다.
얼어붙는 기생들. 조용하라는 듯 왼손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대는 을수.
터져 나오는 신음을 죽어라 막으며 부들부들 떠는 기생들.
을수, 천천히 주먹을 떼면... 같이 빠져나오는 젓가락. 털썩 쓰러지는 남자.
젓가락에 묻은 피를 남자의 옷으로 깨끗이 닦는 을수.
술 한 잔을 따라 들이킨다. 기생을 바라본다.
이제는 죽나 하는 표정, 죽어라 자신들의 입을 막고 있는 손...
떨어지는 기생의 눈물방울... 을수의 무심한 시선이 교차한다.
<시간 경과>
사내가 엎어진 아래로 핏물이 흥건하다.
팬하면... 누워 있는 기생들... 그 목덜미 아래로... 피가 고이고 있다. 을수는 없다.
21. 존현각 앞뜰 / 일출 전 박명.
동녘에 곧 해가 솟을 듯.. 존현각 지붕 처마마다 새벽이슬이 붉다.
<자막> 평명, 묘시 이각, 05:30 am
22. 존현각 침전 / 일출 전 박명.
곤룡포를 갈아입고 있는 정조. 옆에서 시중드는 갑수.
홍국영도 들어와 있고, 승정원 주서가 보고 중이다.
주서 ... 오정(午正)에 중강이 끝나시면 신임관료들의 사은숙배가 있사옵고... 미정
에는 석강 대신 춘당대에서 식년무과 급제자 격려연이 있사옵니다.
홍국영 (주서의 서류를 보다가) 시강관에 홍문관 부수찬 심환지? 김세중... 윤기호...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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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독관이고 검토관이고 이자들 모두 노론벽파 아니냐?
주서 그렇습니다... 오늘 조강은 공교롭게도... 노론당의 신하들로...
홍국영 그걸 알고도 승정원 주서란 놈이 이제야 보고를 올린단 말이냐?
주서 (벌벌 떨며 납작 엎드리며) 죽여... 주시옵소서!
홍국영 전하! 오늘 조강을 폐하소서. 노론 일당으로 경연장을 채워 어전을 농락하
려는 심보이옵니다!
정조 내가 이 궐 안에서... 물러날 곳이.. 또 어디 있는가... (앞으로 나서며 갑수
에게) 상책, 길을 트라.
갑수, 황급히 앞으로 달려가듯 나아가 장지문을 연다. 갑수의 뒤를 정조가 따른다.
엎드린 채 벌벌 떠는 주서를 노려보던 국영이 휙! 바람을 일으키며 정조를 따른다.
23. 편전 외경 / 일출 전 박명.
편전인 자정전(資政殿)의 외경. 그 위로 선행되는.
심환지(E) 전하. 예로부터 경연은 제왕의 학습을 위해 대소신료들이 경연관이 되어
마련하는 자리이옵니다.
24. 편전 / 일출.
편전에 자리하고 있는 노론문신들. 어좌에 앉아있는 정조.
그 어좌 아래, 책 보따리를 앞에 놓고 대기 중인 갑수.
깐깐해 보이는 홍문관 부수찬 ‘심환지(47)’가 중앙으로 나와 고하고 있다.
심환지 허나,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고부터는 신하들이 경연을 듣는 자리가 되었
으며 동궐에 규장각을 짓고 어린 문신들에게만 매진하시니, 전통이 가벼이
될까 염려되옵니다.
정조 군주는 통치자이면서 또한, 학문의 스승역할을 하여 군사(君師)가 되어라
가르친 건, 그대들 노론의 당수요 나의 세손궁 스승이었던 몽오 김종수가
아니오? 어찌 문제가 된단 말이오?
심환지 낮은 것들을 상대하시며 궂은 말은 듣지 않으시고 귀에 좋은 말만 들으신
다면... 제왕의 도리가 아니옵니다.
벌떡 일어서는 정조. 움찔하며 긴장하는 노론들.
어좌에서 내려와 편전 안을 걷기 시작하는 정조.
정조 앎이 통찰이 되고 통찰이 실천이 되어야 학문의 완성이오. 과인이 노둔하
고 부덕하여 아직 학문의 완성을 논할 단계는 아니지만... 제왕의 경연.. 그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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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체는 실천으로 이어지는 학문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심환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배우셔야 하옵니다.
정조 배워야지요... 헌데.. 가르치는 경연관들이 나태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소?
심환지 무슨 연유로... 저희가 나태하다 하십니까?
정조 조강, 주강, 석강 삼시강 경연 때 마다 앵무새처럼 사서와 오경만을 고집하
고 있소. 실천과 실용으로 이어지는 실제는 경연에 올라오질 않잖소?
심환지 (격앙) 우선은! 기본입니다... 옛 말씀은 듣고 또 듣고 깨우치고 또 깨우쳐
도 모자랍니다.
정조 그 기본... 얼마나 알고 있소?
심환지 !!!
정조 나는 하도 들어서 사서오경을 다 외웠소. 그렇다면 그대들은 그 기본... 머
리에 얼마나 담고 있소? (노론들 앞으로 휙휙 지나치며) 여기! 사서오경을
다 외우고 있는 자는 손을 드시오.
노론들 (이게 무슨 말인가 웅성웅성) !!!!!
정조 그대들이 그리 중히 여기는 옛 말씀을 그대들은 얼마나 듣고 또 듣고 깨우
치고 또 깨우쳤는지! 다 외우고 있는 자는 손을 드시오. (심환지를 보며)
경은 다 외우고 있소?
심환지 (굳어지는) .....!
정조 중용 스물세 번째 장을 아는 이는 손을 드시오.
갑수.. 중용 스물세 번째 장이란 말에 번쩍 고개를 들어 정조를 본다.
노론들, 서로 들고 온 책을 살피고, 머리 굴리는 눈알들이 요란하다.
정조 단 한 명이라도 책을 보지 않고 그 구절을 말할 수 있다면 내일 조강부턴
그대들의 경연을 듣겠소. 아무도 없소?
심환지가 당원들 보는데 그중 하나가 손을 들려고 하면.. 다른 동료들이 반색한다.
입으로 연신 중얼거리다 포기하듯 손을 내리면... 합창으로 쏟아지는 탄식.
정조 상책은? 혹시 상책은 아는가?
느닷없이 지명된 갑수, 움찔!!! 노론들의 따가운 시선도 모두 갑수에게 향한다.
정조가, 용기를 내라는 듯... 갑수를 본다. 갑수, 엉거주춤 일어선다.
갑수 (무력감으로 무너지는 노론들 얼굴 하나하나 그 위로...) 작은 일도 무시하
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점점 더 힘을 더하고 또박또박 거침없어지는) 정성스럽게 되면 이
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이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
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이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이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
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만물을 생육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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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환지, 뚫어져라 갑수를 노려본다. 노론들, 완전히 침울하다.
갑수 (조아리며) 이것이 예기 중용 스물세 번째 장이옵니다.
조용히 물러나 책 보따리 앞에 조심스레 무릎 꿇고 앉는 갑수.
정조가 운동하듯 휘적휘적 편전 안을 휘감듯이 걷는다. 모래주머니...
정조 문자를 넘어 실제를 논하고 그 근거와 대안을 논해야 진정한 경연이고 학
습이오. 그래야 그대들의 높은!! 학식을 배울 수 있지 않겠소?
심환지 어느 실제를 논하실 생각이십니까?
정조 (우뚝 멈춰 서서) 지금부터 사흘간 경연을 폐하겠소. 오늘 이 자리에 참석
한 인원들은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사흘 안으로! 서얼 허통과 노비 면천
에 관한 실제와 근거를 준비해오시오.
심환지 !!!
노론 1 전하! 어찌 서얼과 노비를 신성한 국왕의 경연장에 올린단 말씀입니까? 천
하가 경천동지할 일입니다!
노론들 (자지러지듯 엎드리며)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정조 (편전 문을 열고... 환해지는 밖을 보며) 그대들의 답은... 빈하다.
그런 정조의 뒷모습을 갑수가 본다. 동녘에 해가 떠오른다.
정조가 돌아본다. 그 빛에 정조의 얼굴이 부서지고 있다.
아주 미세하지만, 정조가 미소를 짓는 듯도 하다.
갑수, 감출 수 없는 감격... 순진무구하게 웃다가 이내, 주위를 의식하고 정색한다.
25. 저잣거리 엽초전 / 이른 아침.
복도와 계단, 위로 아래로.. 낮고, 좁고 높고... 벌집처럼 연결된 저잣거리 엽초전.
담배를 썰고 파는 사람들. 장기판, 투전판, 사람들을 모아 놓고 떠드는 전기수.
여자에게 집적거리는 취객, 잡은 동물을 들고 흥정하는 사람.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온갖 종류의 동물들... 인간 군상들로 북적인다.
계단을 올라 좁은 복도 사이를 지나가는 을수.
거지에게 매질을 하던 키 작은 점원이 을수를 보고 굳는다.
무심히 너른 마루를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을수.
창포검을 차고 거칠어 보이는 두 사내가 을수를 빤히 보고 있다.
26. 엽초전 창고 / 이른 아침.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을수.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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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립에 중인 차림... 단단한 인상의 사내... ‘최세복(30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호위청 무관복을 입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에 뚱한 인상에다 거만해 보이는 사내...
‘강용휘(40대)’가 을수를 빤히 보며 자리에 앉아 있다.
최세복 (통나무 의자를 권하듯) 앉으시겠소?
을수, 대답 없이 출구 옆에서 비켜나 팔짱을 끼고 선다.
을수의 시선에, 엽초전 안쪽으로 거적때기 발을 쳐놓은 곳이 들어온다.
최세복과 강용휘의 시선이 교차하고... 휙하니 거적을 들치는 최세복.
보에 묶여 매달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덩치 하나... 자객 전유기다.
전유기 옆으로 창포검을 들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똘마니 왈패 하나.
을수가 전유기를 본다.
최세복 이놈이 막판에 겁을 집어먹고 내빼는 바람에...
강용휘 (불만투성이)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을수, 피투성이 전유기를 본다. 옅은 신음만 내뱉고 있는 전유기.
을수 돈은... 돌려주겠소.
강용휘 (버럭) 지금 돈이 문제가 아냐!
을수의 날카로운 시선이 강용휘를 본다. 강용휘도 지지 않고 을수를 노려본다.
최세복이 긴장한 채 둘을 보다, 을수와 강용휘 사이로 끼어든다.
최세복 자자... 이러지들 마시고... (강용휘 보며) 나으리, 이 자는 광 막주가 소개한
사람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순간 끼이익... 창고 문 열리는 소리.
지팡이 소리, 절룩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
을수의 얼굴이 순간 경직된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는 을수.
지저분하고 늙고 흉포한 괴물... ‘광백(50대)’이 들어선다.
엽초전 창고 안 모두가 긴장한다. 최세복이 긴장한 채 인사한다.
광백 어... 최세복이...
을수, 눈동자가 흔들린다. 광백이 힐긋 을수를 본다.
을수,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그저 우두커니...
광백이 느닷없이 지팡이로 을수의 머리통을 딱 때린다.
가만히 있는 을수... 오히려 최세복의 어깨가 움찔한다.
광백 인사.. 안 하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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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수 (가볍게 목례) 평안하셨습니까.. 막주님...
광백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밥은 잘 묵고 댕기는 모양이디? 허애댓구나야
절룩거리며 강용휘에게로 다가가는 광백. 최세복이 눈치 채고 나선다.
최세복 (강용휘에게) 이 분이 상선 영감마님이 말씀하신 광백 막주십니다.
광백 (강용휘 빤히 보며) 일면식 있디 않아?
강용휘 (뚱하니) 상선 영감 사람이면 뭐.... 봤음.. 봤겠지.
강용휘 빤히 보며 지팡이로 그 자리를 툭툭 치는 광백.
강용휘... 멀거니 두리번거리다 옆 자리로 비켜준다.
제자리인 듯 강용휘의 자리에 털썩 앉아, 호박잎에 싼 주먹밥을 꺼내는 광백.
꾸역꾸역 주먹밥을 먹는 광백. 엽초전 안은 묘한 긴장이 흐른다.
입을 소매로 슥슥 닦던 광백이 그저 지나치다 보는 것처럼, 전유기를 발견한다.
광백 아야야.. 아니 데리케 패주문 인간구실이래 하간 ?
강용휘 오늘이 거사날 아닌가 말이야! 돈 주고 돈 받고 했음 뭐가 착착 돌아가는
맛이 있어야지...
광백 (강용휘 본체만체 무시하고 최세복에게) 어더렇게 하가서?
최세복 한번 겁먹고 내뺀 놈은 다신 못합니다. 보통 일입니까? 이런 일은 전문가
시니까 잘 아시잖습니까?
광백 기리개 내래 메라 기래서? 첨부터 모가지 딸 놈은 막끼라길디 안아서?
최세복 (입맛 쓰고) ...
광백 동네 똥싸개 쇄끼덜 데빌구 뭔놈에 판을 벌리갓따구... 인간 목 따는 거이
동네 개 목 따는 거가? 열 닷냥이래 머이가? 고고래 보통 모가지간?
광백, 스윽 일어서면.. 강용휘 움찔 물러난다.
광백, 못마땅한 표정으로 둘러보다 절뚝절뚝 발 뒤로 간다.
전유기를 지키던 똘마니에게 검을 달라 손을 내밀면... 황망히 광백과 최세복 눈치만
보는 똘마니. 광백이 지팡이로 머리를 딱 때리면, 내버리듯 검을 주며 물러나는 똘마
니. 전유기를 지나치는 광백... 매달아놓은 줄을 끊더니 땅바닥에 널브러진 전유기 앞
에 쪼그려 앉는다. 발 아래로 광백의 엉덩이가 보이는가 싶더니... 둔탁하게 내려치는
소리... 희미한 비명소리... 경련을 일으키는 전유기의 발....
발을 열고 나오는 광백.. “칼 좀 반듯하니 갈디 않구...” 투덜거리며 피 묻은 검을 아
무 데나 버린다. 최세복 긴장.. 강용휘, 완전 긴장!!
을수는 무심함을 찾은 얼굴이다.
털썩 자리에 앉아 피묻은 손을 바짓가랑이에 아무렇게나 슥슥 닦는 광백.
광백 어카간... 수없띠. (을수 빤히 보며) 네래 하라우.
긍정도 부정도.. 대답 없는 을수의 투명한 시선만이...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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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을 어귀, 회상 시퀀스 시작 / 낮.
어린아이의 투명한 눈망울이 가득하다.
화면 열리면... 찌는 듯한 여름햇살 아래... 어느 마을 어귀...
달구지 한 켠에 타고 있는 열한 살 을수.
그가 바라보는 곳에 역광을 받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자막> 15년 전, 1762년 임오년
작은 그림자 하나가 무리에서 떨어져 을수에게 다가오면, 사타구니만 천 조각으로 가
린 차림새.. 을수를 무심히 보더니, 손을 흔든다.
울먹한 얼굴로 마주 손을 드는 을수. 달구지가 떠난다.
28. 산채 가는 길 몽타주 / 낮.
// 들길.. 저기 멀리 공지선 위로... 아이들이 탄 소달구지가 서 있다.
달구지를 끌던 남자가 여자아이 손을 잡고 온다.
참외를 나눠 주고 돌아서는 남자, 광백이다.
야생화가 핀 들길위로 달구지가 간다.
비가 온다. 거적때기를 걸쳐 쓰는 아이들...
달구지 난간 끝에 앉은 을수... 달구지가 흔들리면... 을수도 흔들린다.
그 목적 없는... 무표정...
하늘을 보고 미소 짓는 아이들의 볼 위로...
꽃 봉우리가 터지듯, 톡톡.. 물방울이 터진다.
// 협곡.. 좌우로 끝도 없는 암반의 절벽이 둘러쳐진 협곡 사이로 소달구지가 간다.
29. 광백의 산채 앞 / 일몰 직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농가 앞에 달구지가 선다.
돌아서는 광백과 내려서는 아이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벼락이 친다...
30. 광백의 산채 마당 / 밤.
세찬 빗줄기와 천둥 번개... 요란한 사냥개들의 소리.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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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거리는 땅... 그 위로 비명소리와 함께 머리가 잡힌 채 끌려가는 여자아이.
커다란 갈모를 쓰고 갈대로 엮은 도롱이를 입은 광백이 여자아이를 끌고 간다.
광백 앞에 지름 3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나타나고.
그대로 구덩이 속으로 여자 아이를 던져 버리는 광백. 아이의 긴 비명.
새끼줄로 노예처럼 줄줄이 묶어놓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으르릉거리는 사냥개들을 보
며 벌벌 떨고 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 사이.. 을수도 있다.
을수의 줄을 풀고는 냅다 끌고 가는 광백.
어린을수 (울부짖는)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아랑곳없이 질질 끌고 가 다른 구덩이 속으로 을수를 던져버리는 광백.
을수의 긴 외마디 비명.. 시커먼 구덩이 아래로 퍽 떨어지는 을수의 모습 위로...
카메라 점차 부감으로 오르고... 지옥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십여 개의 구
덩이들이 보인다. 번개가 치면... 어느 시골 농가 같은 초가집 뒤로.. 움푹 패인 거대
한 구덩이 전체가 드러난다. 지옥이다...
31. 갑수 구덩이 / 밤.
진흙탕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을수. 으으으... 신음 소리와 함께 주변을 돌아보는데...
<ㄴ>자 구조의 구덩이 속, 저편 어두운 곳에서 인광 여러 개가 번뜩인다.
겁에 질린 채 울음을 터트리는 을수. 순간 위에서 깨갱 소리와 함께 사냥개 하나가
떨어진다. 화들짝 놀라며 구덩이 벽에 붙는 을수.
사냥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일어나며 요동을 치다가 을수를 발견하고 으르르릉...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
을수, 당황하며 구덩이를 기어오르려고 하는 찰나... 어두운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어린갑수(E) 가만... 있어...
눈물 콧물 진흙탕 물로 범벅된 을수가 돌아보면... 다섯 명의 아이들이 아마존 전사
처럼 얼굴과 온 몸에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죽창을 겨누고 천천히 전진해 나온다.
그 가운데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열세 살 대장아이... 갑수가 선두다.
사냥개와 아이들의 대치... 곧 요란한 함성과 함께 사냥개와 아이들의 맹렬한 전투...
사냥개와 아이들의 비명이 뒤섞이고... 둔탁한 충격음과 그 극도의 공포가 을수의 얼
굴 위에서 펼쳐진다.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을수...
광백이 위에서 횃불을 비추며 내려다본다.
광백 (히죽거리며) 기래 기래.. 배시 때기래 터지게 먹갔꾸나야..
피범벅이 된 아이들... 가쁜 쉼을 내쉬며 광백을 올려다본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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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천천히 어떤 물체로 깊이 들어가면... 고슴도치가 된 듯... 죽창에 꽂힌 채 쓰
러져 있는 사냥개가 마지막 숨을 힘겹게 내뱉고 있다.
대장아이, 사냥개의 목에 단도를 가져다 댄다. 거침없이 그어버릴 듯한 동작에서!!
<시간경과>
< ㄴ > 구조의 안쪽... 비를 피한 채...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사냥개를 구워먹고
있는 아이들... 을수가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다.
대장아이가 고기를 뜯으며 을수를 빤히 보고 있다. 꼬르륵거리는 을수의 배.
단도로 고기를 잘라 내미는 대장아이. 을수, 두려워하며 천천히 손을 뻗는다.
고기를 받자마자 우적우적 삼키듯 먹어대는 을수... 아이들의 웃음소리.
웃음기 없는 대장아이... 자신의 고기를 뜯기 시작한다.
대장아이의 어깨... 인두로 지진 듯한 낙인 < 七七 > 자가 선명하다.
32. 광백의 산채 마당 / 아침.
비가 그쳤다. 을수를 비롯한 새로 데려 온 4명의 아이들이 토굴 앞에 서 있다.
광백이 손가락으로 센다.
광백 한나둘서이너이... 넷밖에 안남안? (입맛 다시고) 개값두 안나오갓꾸나..
33. 광백의 산채 토굴 / 낮.
화롯불에 벌겋게 달궈진 인두. 아이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을수가 양 손이 기둥에 묶인 채 울고 있다. 광백이 인두를 들고 다가온다.
광백 (곰곰이) 기래니까 이백... 열아홉..?. 스물...? 킬티! 이백이십노미!
어린을수 살려.. 주세요...
광백 주기는거 아니니껜 오해말라우. 니 이름이야. 따라해보라우. 이백이십노미...
어린을수 이백.. 이십 노미...
광백 길티! 이백이십노미! 기거이 니 이름이야. 내래 이백이십노미야~ 하고 부르
믄 ‘네! 막주님!’ 하고 냅따 달래오는거야. 알간?
어린을수 (끄덕이고) ...
광백 소리 내지 말라. 소리 지르믄 맞는 수가 이서...
어린을수 (끄덕이고) ....
광백, 일자 드라이버 같은 인두를 들고 을수의 어깨로!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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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갑수 구덩이 / 낮.
얻어맞았는지 코피 터지고 눈이 퉁퉁 부은 을수가 누워있다.
아이들이 을수의 인두 자국을 보며 키득대다, 을수에게 자신들의 어깨를 보여준다.
아이 1 (‘一四二’ 번호) 나는 백사십이노미야.
아이 2 (여자 아이다. ‘一九九’ 번호) 나는 백구십구노미.
아이 3 (말없이 ‘二一一’ 번호 보여주는 인상파) ....!!
아이 4 (역시 아이 3 따라 하며 ‘二一二’ 보여주는, 더 어리고 더 인상파) ....!!!
사냥개 주검 옆에서 사냥개의 송곳니를 다듬고 있는 갑수.
아이 1 우리 대장은 칠십칠노미야! 젤 오래됐어!
아이 2 완전 갑이야, 갑! 쌈 엄청 잘해!
을수가 비스듬히 일어나 앉아 갑수를 본다.
갑수가 을수에게 다가와 송곳니를 내민다. 을수가 송곳니를 받는다.
어린갑수 (그 무표정으로) 죽지 마.
어린을수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리고) ...
35. 존현각 복도 / 이른 아침.
갑수가 앞장서 걸어온다. 그 뒤로, 소반을 든 수라간 나인이 뒤따른다.
<자막> 묘시 반각, 06:00 am
침전 앞에 멈춰서는 갑수와 수라간 나인.
소반위에 놓인 호박죽 한 그릇과 건새우 한 종지.
갑수 (문밖에서 안을 향해) 전하. 초조반 대령했사옵니다...
순간, 요란한 소리.
차비문호위(E) 자궁저하 행차십니다!
36. 존현각 앞뜰 / 이른 아침.
존현각 차비문에서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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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문호위 1 (말을 받듯) 자궁저하 행차십니다!
‘혜경궁 홍씨(42)’가 성큼성큼... 그 뒤로 상궁들과 나인들이 뒤따르고 있다.
혜경궁 일행이 우루루 들어오면... 갑수, 황급히 존현각 뜰로 달리듯 나아가 허리 숙
인다. 소반을 든 나인도 얼떨결에 갑수를 따라 움직이는데.. 호박죽이 쏟아질까 아찔
아찔.. 갑수 꽁무니만 졸졸졸졸......
지게문이 열림과 동시에 정조가 예상 못 했던 행차인 듯 황급히 나와 조아린다.
정조 어마마마!
굳은 얼굴로 정조를 지나 존현각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혜경궁.
37. 존현각 침전 / 이른 아침.
혜경궁에게 절 올리는 정조. 소반위에 놓인 서류더미들... 장식품 하나 없는 방... 혜
경궁이 옹색한 왕의 침전 여기저기를 본다.
정조 중관을 통해 문안 인사를 보내었는데 어찌...
혜경궁 (열린 문사이로 쪽방 같은 침전을 본다.) 저곳이... 왕의 침전입니까?
정조 어마마마...
혜경궁 민가의 종복들 행랑채도 여기보단 낫겠어요.
정조 상중입니다. 제가 원한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혜경궁 (아득한 표정) 오 첩 반상도 모자라 삼 첩으로 줄였다면서요?
정조 가뭄입니다. 게다가 상중입니다. 이럴 때 감선(減膳)은 선왕들께서도 늘 하
셨던 일입니다.
혜경궁 주상. 오늘 하루 어식은 두 번 세 번 살피세요.
정조 어찌... 그러십니까?
혜경궁 꿈이.. 꿈자리가... 흉했습니다.
정조 (빙긋이) 알겠습니다.
혜경궁 살아... 남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정조 (그저 어색한 웃음만) 허허허......
38. 편전 안 / 이른 아침.
홍국영 노론 이 인간들 진짜...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대신들 (민망한 표정들) .....
돌아서는 홍국영... 얼굴이 붉게 타오른다. 휑하니 텅 빈 편전 안...
을수
- 23 -
띄엄띄엄 시립하고 있는 동덕회 대신들...
홍국영 상참이 아무리 약식 조회라지만 엄연히 예궐의 법도가 있는데... 전하를 알
현하는 자리에 모조리 빠져요?
대신 1 아무래도 오늘 동덕회 모임 때문에...
홍국영 자기들은 벼라별 모임을 만들어 파벌 싸움에 난리법석을 떨면서.. 성상의
노고를 풀어드리고자 술 한 잔 하는 자리를... 이런 식으로 반대해요?
채제공 그들이 동덕회라는 작은 모임마저 불편해하고.. 전하의 마음을 어지러이 한
다면... 우리가 회동을 미루는 게 옳을 듯싶소.
홍국영 (발끈) 형판 대감께선 다 잊으셨습니까? 동덕회가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
까? 우리가 목숨 걸고 만든 자립니다! 왜!? 왜 우리가 밀립니까? 저 인간들
이 전하의 세손시절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밀리면! 죽어요!
대신들 (민망한) ...........
내관(E) 주상 전하 납시오.
내관이 문을 열면, 정조가 편전으로 들어온다.
휑하니 텅 빈 편전에 걸음이 늦어지는 정조... 주변을 본다.
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어좌에 앉는 정조.
듬성듬성 앉은 동덕회 대신들... 죄인인 듯 머리를 조아린다.
채제공 전하... 매번 잊지 않고 자리를 만드시어, 좋은 음식과 술로 신들에게 덕을
베풀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만... 이를 바라보는 대소신료들
의 시선에 불편함이 있사옵니다.
홍국영 !! (채제공을 날카롭게 본다.)
채제공 해서 오늘 저녁 동덕회 모임은...
정조 상책.
갑수 (조아리며) 하명하시옵소서.
정조 오늘 저녁 수라는.. 동덕회 회식으로 대신한다.
갑수 (더 깊이 조아리며)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정조 (일어서며) 상참을... 마치겠소.
정조가 저벅저벅 나서고, 갑수가 따라 나간다.
사관이 몇 글자 쓰고... 페이지를 넘겨본다. 적을 게 없다. 그 꼴을 보던 홍국영.
홍국영 (참담한... 긴 한숨) 아흐...
<자막> 진시 일각, 07:15 am
39. 자궁전 / 아침.
을수
- 24 -
자궁전... 혜경궁 홍씨의 처소다. 찻잔을 든 혜경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혜경궁 다시.. 말해 보거라.
혜경궁 앞에 조아리고 있는 어린 나인 하나... 고개를 드는데 복빙이다!!
복빙 변고가 생기면 자신이 힘들어진다고...
<플래시백> 정순왕후가 정조의 손을 잡고 속삭인다. 정순왕후가 말하는 사이 카
메라 돌면... 손톱을 소지하고 있는 시녀... 복빙이다.
정순왕후 행여라도... 행여라도 하는 말입니다. 주상에게 변고가 생기면 내가 힘들어
져요. 국왕책봉권이다 뭐다 해서 조정의 인물들이 나를 가만 놔두겠어요?
혜경궁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진다. 자리를 적시고 혜경궁의 치마가 젖는다.
복빙이 황급히 무명천을 꺼내 닦는다.
혜경궁 임금의 면전에서... 할미가 손자 앞에서... 니가 죽으면 내가 힘들어진다고...
했단 말이냐?
복빙 (납작 조아리고 벌벌) 저는 그저 그렇게만...
혜경궁 이... 새파랗게 어린년이... 기어코... 내 아들을...
분기에 눈물까지 고인 혜경궁, 한동안 먹먹하다가 엎드린 복빙을 본다.
혜경궁 복빙아.
복빙 네, 마마...
혜경궁 지아비를 제물로 바치고 살린 아들이다... 아느냐?
복빙 소녀.. 세상에 나기도 전 일이지만...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혜경궁 니가 나를 위해 언젠가 한 번 죽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고 있느냐?
복빙 자궁마마는 소녀의 아비를 살리셨고 어미를 살리셨습니다. 소녀 열 번 죽
어도 어찌...
혜경궁, 품에서 작은 복주머니를 하나 꺼내 복빙 앞에 놓는다. 복빙, 긴장한다.
혜경궁 하시라도... 내 말을 기다려라.
복빙 (두려움에 찬 눈으로 복주머니 보며) 마마...
혜경궁 검험에도 나오지 않는다 들었다.
복빙 !!!!!
혜경궁 차에 넣어도 탕에 넣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복빙 (그저 덜덜) ....!!!
혜경궁 뭐하느냐? 어서!
을수
- 25 -
복빙 (움찔 놀라며 집어 들고) !!
혜경궁 임자는.. 누군지 알렸다!
복빙 네...
혜경궁 가 보거라.
복빙, 절하고, 복주머니를 품에 넣고 일어선다.
돌아서려는데, 혜경궁이 그 발걸음을 잡는다.
혜경궁 혹여.. 다른 말은 없었더냐?
<플래시백> 고수애와 정순왕후가 마주하고 있다.
고수애 오늘밤... 실행할 듯하옵니다.
정순왕후가 손톱 소지하는 복빙을 본다.
정순왕후 니가 결정할 테냐?
복빙과 시녀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복빙이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혜경궁을 본다.
복빙 (망설이는데....) ..........
혜경궁 알았다. 가 보거라.
다시 인사하고... 장지문을 열고 나가는 복빙. 망연자실한 그 표정.
40. 자궁전 마당 / 아침.
복빙이 황급히 자궁전 뒷마당 쪽으로 빠져나간다.
자궁전으로 들어오던 고수애와 김상궁이 멀찌기서 그 모습을 본다.
불안한 표정과 걸음으로 황급히 떠나는 복빙을 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고수애.
고수애가 눈짓하면... 김상궁이 까닥 절하고 복빙의 뒤를 밟는다.
41. 개장국집 앞 / 아침.
행인들로 붐비는 저잣거리의 개장국집... 광백의 부하들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고...
들어오려던 손님들이 그 기세에 눌려 발걸음을 돌린다.
<자막> 진시 육각, 08:30 am
을수
- 26 -
42. 개장국집 / 아침.
텅텅 비어있는 가게 가운데 자리에 떡하니 광백과 을수 둘만 개장국을 먹고 있다.
광백의 부하 대여섯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경계를 하고 있다.
광백, 요란하게 개고기를 뜯는다. 반면, 을수는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을수 할 생각이 없습니다.
광백 (을수 그릇 가져가며) 하구 안하는 건 네래 상관 할 거이 아니디.
을수 독립... 하겠습니다.
광백 기거야 약속했던 거이 아니가? 언젠가는 해야디. 긴데 지금은 아니다.
후루룩 쩝쩝 을수의 그릇도 먹어대고 있는 광백.
을수, 주변에 보초서고 있는 광백의 부하들을 예민하게 살핀다.
광백이 그 의중을 놓치지 않는다.
광백 니만한 놈들은 아이래두 작정하고 뎀비믄 니도 땀 좀 흘리지 않간?
광백부하들 (싸늘히 을수 보는) ......
을수 (일어서며 인사) 담에 또 뵙겠습니다.
광백 에미나이... 하나 만나고 있디?
을수 (순간의 동요... 천천히 돌아보면) ...
광백 가라우 기래 가는 거래 모르네? 앉으라우.
을수 (앉고) ...
광백 세답방 궁녀 아이간?
을수 (미세하게 목젖이 꿈틀, 미간에 힘줄이 선다) ...
광백 고놈에 에미나이 간뎅이가 크지 않간? 궁궐 에미나이가 외간남자를 만난
다... 사지가 찢겨죽을 일 아니갔어?
순간, 을수... 앞에 놓인 젓가락을 잡으며 식탁 위로 점프... 동시에 광백의 머리칼을
잡고 식탁에 찍어 누른다.
곧장 젓가락이 광백의 목을 관통할 기세.. 모든 것이 순식간이다.
촤촤촤촤... 동시에 검을 겨누며 을수를 에워싸는 광백의 부하들.
아야야.. 가벼운 엄살을 피는 광백... 그 와중에도 큭큭댄다.
광백 아야야... 길케 세게 잡지 말라우. 머리털 다 빠지갔어.
을수, 광백의 부하들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광백의 부하들도 핏기 없는 얼굴... 기계적인 시선을 보낸다.
광백 야. 니래 그 에미나이 데리고 멀리 가서 잘 살아야 되지 않간? 이거 놓고
을수
- 27 -
이바구 하자우.
을수 ......
광백 이번 일 잘만 성공하믄 독립도 하구 고 에미나이도 챙기구... 다 좋지 않갔
어?
을수, 잠시 고민.. 이윽고 젓가락을 식탁에 찍으며 광백을 풀어준다.
젓가락 반이 식탁에 꽂힌다.
광백 (그 젓가락 보며 과장된) 길티! 이거이 와! (을수 보며) 흐흐흐... 내래 물건
하난 잘 만들어 냇꾸나야.
을수 (자리 앉아) 여자는... 건들지 마세요. 그럼 막주님은... 죽습니다.
광백 길티 길티! 내래 아직 죽으문 안되는 거디.
을수 ....
광백 (느물하게 을수 보며) 긴데.. 종간나새끼래 네래 다 들캐서.
을수 ....??
광백 내래 그고 에미나이만 물고 늘어지믄... 네놈은 좆되는거 아니가서 으흐흐
흐....
을수 (역시 투명한... 반응 없는 눈길) ......
43. 염료공방 마당, 회상 시퀀스 시작 / 밤.
겨울 밤하늘...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다.
각양각색으로 물들여진 염색천들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그 위에 쌓이는 눈.
염색 천 하나가 바람에 날렸다 제자리로 돌아오면...
흑립에 도포차림... 을수가 목함을 들고 서 있다.
염료 공방 안에서 노란 불빛이 번져 나오고 있다.
44. 염료공방 / 밤.
을수의 시선인 듯.. 카메라 움직이면... 초롱불 하나... 아무도 없는 공방 안.
공방 안을 이리저리 훑던 시선... 안채로 향한다.
시선의 주인공... 공방 안에 우뚝 서 있는 을수다.
공방 탁자 위에 목함을 올려놓고.. 목함을 열면... 무딘 쇳덩이 같은... 장검.
장검 끝에 송곳니 장식이 달려있다. 어릴 적 갑수가 주었던 그 송곳니다.
장검을 꺼내면... 손잡이에 달려 있는, 끈 같은 무명천.
능숙한 동작으로, 손잡이의 끈으로 장검을 잡은 손목을 연결해 묶는다.
이내 품에서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보면... 어떤 사내의 얼굴.
소리도 없이, 안채로 빠져 들어가는 을수. 그 을수 뒤로, 탁자 위에 놓여있는 목함.
을수
- 28 -
불빛이 새어나오는 안채의 장지문.
실루엣으로... 을수가 들어서면... 어느 사내가 놀라 일어서며 기물을 집어 던지고...
을수의 장검이 허공을 가르고, 쓰러지는 사내... 그 실루엣들.
장지문이 열리고.. 피 묻은 검을 들고 나오던 을수, 그대로 멈춰 선다.
화면 정면을 보며, 일순 주춤하던 을수가 저벅저벅 다가온다.
툭하니 떨어지며 깨지는 염료 종지 하나.
염색한 실꾸리들과 염료 종지들을 들고 있는, 궁녀의 머리를 하고 있는, 월혜다!!!!
월혜, 긴장으로 굳어버린 듯... 떨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고 얼어붙듯 서 있다.
을수, 다가와 월혜 앞에 선다. 장검은 늘어뜨린 채다.
둘 너머, 반쯤 열려있는 공방의 문으로 돌개바람... 눈보라가 휘어져 들어온다.
뚫어져라 월혜만 보고 있는 을수. 월혜의 시선이 을수의 피묻은 장검으로 향한다.
장검의 손잡이에 달린 송곳니 장식이 섬뜩하다. 소름을 느끼는 월혜의 표정.
이를 악다문 채,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고, 글썽거리는 눈물을 부여잡고, 을수를
보고 있는 월혜... 그 얼굴이 곱다.
을수가 목함 옆으로 굴러다니는 염색천 하나를 주워 장검의 피를 닦는다.
그 건조하고 사무적인 손길로 장검 손잡이의 끈을 풀고, 목함에 장검을 넣고, 목함을
봉할 동안... 월혜는 꼼짝도 않고 있다. 목함을 들고 가만히 월혜를 보는 을수.
이윽고 을수가 천천히, 월혜를 지나치고, 문으로 나간다.
45. 염료공방 마당 / 밤.
문밖 마당에 서 있는 을수... 안을 돌아본다... 그 눈이 서늘하다.
자신이 지나쳐온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월혜.....
기절하듯 풀썩 쓰러지며 탁자 위 초롱을 떨어뜨린다.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는 공방 안.
마당으로 두어 걸음 떼던 을수... 다시 발걸음을 멈춘다. 하늘을 울려다 본다.
눈 내리는 하늘..... 구름 사이로 달이 나온다.
46. 현재, 개장국집 / 아침.
을수 하겠습니다.
광백 기래. 기래야 서로 좋은 거이 아니가서.
을수 누구 모가집니까?
개뼈다귀를 뜯는 광백. 슥슥 손가락을 닦다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낸다.
휘리릭! 을수의 눈앞에 펼쳐지는 두루마리. 반듯한 얼굴.. 정조의 얼굴이다.
을수
- 29 -
광백 왕 모가지.
을수 ............
농담인 듯 진심인 듯 광백이 킬킬대기 시작한다. 그 웃음소리.. 개장국 안을 떠돈다.
47. 존현각 복도 + 침전 / 낮.
장지문 밖에 대기하고 서 있는 갑수.
정조(E) 상책 있는가?
갑수 네, 전하.
갑수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조와 홍국영이 독대 중이다.
정조 이 방에 주례가 있던가?
갑수 좌방 상단 삼 열에 있습니다.
홍국영 이 방 서책을 정말 다 외우고 있나?
갑수 신은 전하의 서책을 담당하는 대전섭리 상책이옵니다. 당연히 알 뿐입니다.
갑수가 보조의자를 들고 책장으로 간다. 제일 상단에서 책을 찾고 있는 갑수.
보조의자 위의 갑수 바짓단... 피가 보인다.
정조 피가... 아니더냐?
일순, 황망히 자신의 바짓단을 보는 갑수.
점점이 묻어있는 피. 홍국영의 의아한 시선.
갑수 (책을 들고 황급히 내려와 조아리며) 새벽에 코피를 흘렸사온데.. 미처 확
인하지 못하고 어전으로 망령되이 들어왔으니 죽고도 남을 일입니다!
홍국영 코피...? 코피가 어찌 바짓단에만 묻은 것인가?
갑수 저도 영문을....
정조 다른 데 묻었다면 상책이 몰랐을 리가 있겠나?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도록
너를 부린 내 탓도 크다. 갈아입고 오라.
갑수 네, 전하!
책을 소반위에 올려놓고 황망히 뒷걸음질 치는 갑수.. 얼굴에 배어 나오는 식은땀.
고개 돌린 채 보고 있는 홍국영의 시선이 매섭다.
48. 궐내 내반원 가는 길 / 낮.
을수
- 30 -
바쁜 걸음으로 뛰듯이 걸어가는 갑수.
<플래시백> 살을 뚫고 들어가는 칼날의 소름 돋는 소리가 울린다.
환관 ‘안국래(50대)의 심장을 파고드는 칼날.. 신음 소리...
동공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며.. 충격에 휩싸이는 안국래....
어떤 생각에 몰두한 표정으로... 몇몇 나인들의 인사도 몰라라... 바삐 걸어간다.
<플래시백> 비도로 안국래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차가운 얼굴... 갑수다.
안국래... 푹 고꾸라진다.
천천히 허공을 향하는... 갑수의 눈에.. 광기가 서려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신... 피가 번져 나오고.
내반원 마당에 들어서는 갑수의 얼굴에 당혹감이 가득하다.
<플래시백> 마당... 시체를 옮기는 갑수의 실루엣.
49. 내반원 / 낮.
내반원 숙직방으로 뛰어든 갑수. 바깥을 살피고 문을 닫는다.
농을 열고 예비 옷을 꺼내는 갑수. 옷을 벗는 갑수... 상의를 벗으면..
다부진 몸, 거친 상처들.. 배에 차고 있는, 정조의 것과 똑같은 모래주머니!!
하의를 벗으면... 역시 발목에 차고 있는 모래주머니!!
황급히 바지를 갈아입고...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려는데 옷에서 툭하니 떨어지는 붉은
색 쪽지. 어떤 예감으로 굳어버리는 갑수.
순간, 요란하게 문이 열리며.. 금위영들이 검을 차고 들이닥친다.
천천히 떨어지는 쪽지... 쪽지에 쓰여 있는 네 글자... < 今日 殺主 >
바지만 입고.. 상체에는 모래주머니를 찬 모습으로... 망연히 선 갑수...
갑수가 종이쪽지를 본다. 홍국영의 시선이 쪽지로 향한다. 긴장이 팽팽히 흐른다.
순간, 종이를 집어 입안에 쑤셔 넣는 갑수... 금위영 하나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육모
방망이로 갑수의 머리통을 때린다.
둥~ 소리의 울림... 천천히 주변이 돌고...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지는 갑수.
흐릿해지는 시선으로... 홍국영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쪽지를 주워드는 홍국영의 손.
50. 월혜의 방 / 낮.
을수
- 31 -
월혜가 문을 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다.
복빙이 뒤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월혜 복빙아. 너 또 옷 갈아입어? 도대체 하루에 몇 번씩...
대답 없는 복빙이 수상하고. 월혜가 복빙을 돌려세우면.
눈물로 가득 젖은 복빙.. 월혜가 움찔 놀라는데.
복빙 항아님... (눈물 뚝뚝) 살려.. 주세요...
<시간경과>
문을 열고 주위를 내다보는 월혜. 아무도 없다. 문을 닫고...
복빙과 마주 앉는 월혜.. 그 가운데... 혜경궁이 준 복주머니가 있다.
월혜 언제부터야?
복빙 궁에.. 들어올 때부터요...
<플래시백> 상궁이 방 청소하고 있는 월혜에게 6살 복빙을 인사시킨다.
상궁 오늘부터 같이 살게 될 견습나인이다.
복빙 (깍듯하고 씩씩하게 인사하는) 안녕하세요, 항아님.. 복빙이라고 합니다.
월혜 사 년.. 전부터?
복빙 네...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월혜. 약종이가 들어있다. 복빙이 또 눈물을 터트린다.
월혜 (주위 의식하듯) 조용하래두.
복빙 항아님.. 저.. 이제 어떡해요?
월혜, 긴 한숨 끝에.. 부리나케 옷장을 뒤져 자신의 예전 옷을 꺼낸다.
복빙 앞에 나인 옷을 펼쳐놓는 월혜.
월혜 잘 들어. 여기 있음 너.. 이래두 저래두... 죽어.
51. 금위영 무기고 / 낮.
휑하니 비어 있는 무기고 창고 안... 그 사이로... 매 맞는 소리와 신음소리.
<자막> 오시 이각, 11:30 am
을수
- 32 -
의자에 묶인 갑수...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팬티 같은 속옷만 입은 채, 손발이 묶
여있다. 이미 금위영 무관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꼴이다.
탁자 위에 모래주머니가 놓여있고... 그 너머로 홍국영이 앉아있다.
쪽지를 보며 홍국영이 대충 손짓하면, 호위들이 재갈을 풀어준다.
홍국영 ..누가 보낸 것이냐?
갑수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모릅니다.
<플래시백> 아침 시간의 동선.. 갑수와 인사하고 지나치는 대신들... 승지들..
나인들... 마지막으로 존현각에서, 갑수와 스쳐 가는 월혜...
금일살주라 적힌 쪽지를 갑수에게 내보이는 홍국영.
홍국영 금일 살주... 오늘 주인을 죽여라... 그 주인이 누구냐?
갑수 ......
홍국영 (갑수의 머리를 잡고.. 분노가 치솟는) 니 주인이 누구냔 말이다.. 니 주인...
갑수 ......
홍국영 (갑수의 코를 주먹으로 찍어버리는) 이 역적 새끼야!! (마구 얼굴을 찍어패
는) 전하가 아니더냐!? 니가 감히 전하를!!! 전하를!! 이 새끼야!!!
코피가 터져 나오고... 눈가에 피멍이 든 갑수.. 피를 한 움큼 뱉어낸다.
씩씩대던 홍국영... 무명천으로 주먹을 닦는다.
홍국영 세손궁 때부터... 내관새끼고 나인년들이고 하나같이 전하를 못 잡아먹어
서... 응? 국에다 약을 타고 잠자리에 칼을 품고... 내가 알고, 들은 것만 열
두 번이 넘는다... 보위에 오르시고는 그 년놈들 다 내치시고 그래도 니놈
은! 니놈은.. 믿으셨다. 나도.. 믿었고...
갑수 ......
홍국영 내가 늘 생각했어.. 진짜 위험한 놈은.. 제일 가까이 있는 놈들 중에 있을
거라고... 혹시나 했다. 내가... 혹시나 했어... 니놈.. 정체가 정말 뭐냐?
갑수 전하를... 뵙게 해주시오...
홍국영 (기가 막힌 듯 피식) 허... 이 새끼... 사지를 잘라서...
금위영 무관 하나가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 들어와 홍국영에게 귓속말로 보고한다.
홍국영 (갑수 빤히 보며) 상선 안국래 영감이... 니 양부지?
갑수 ......
홍국영 오늘.. 입궐하지 않았다.. 사람을 보냈는데도 종적이 없어... 뭐냐, 지금?
갑수 내가... 죽였소. 우물에... 버렸소.
홍국영 !!!!!
을수
- 33 -
갑수 전하를.. 뵙게 해주시오...
홍국영 이 새끼 아가리 채워...
금위영들이 갑수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리면...
방망이를 다잡으며 다가오는 홍국영.. 그 둔탁한 일격에서!!!!
52. 편전 / 낮.
당하관 신하들 이십여 명이 대기하듯 앉아있다. 신임관료들의 사은숙배다.
승정원 주서가 호명하는 대로 한 명씩 나와 엎드려 절한다.
<자막> 오시 육각, 12:30 pm
주서 사헌부 집의 이상훈... 한성부 서윤 최낙권... 이조 정랑 이준택...
어좌에 앉아있는 정조.
편전 입구로 다가와 서는 인영... 예사롭지 않은 표정의 홍국영이다.
그런 홍국영을 정조가 본다. 주서의 호명이 계속된다.
53. 상선 안국래의 집 / 낮.
마당 우물가로 다가오는 금위영 무관들.
우물 뚜껑을 열면... 엎어진 채 둥둥 떠 있는 시신 하나.
54. 편전 / 낮.
어좌에 앉아있는 정조와... 편전 중앙에 엎드려있는 홍국영... 둘 만이다.
정조 (어떤 표정도 없이) 상책은 어디에... 있나?
홍국영 일단.. 금위영 무기고에 두었습니다.
정조 오늘 춘당대.. 시연관이 누군가?
홍국영 구선복... 입니다.
정조 춘당대 시연이 끝나고 나서... 보겠다. 그동안.. 살아있길... 바란다.
홍국영이 깊이 조아린다. 정조, 표정에 변화가 없다.
55. 흥화문 앞 금천교 / 낮.
을수
- 34 -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향해 가는 발걸음.
너울을 쓴 월혜가 종복과 함께 금천교로 다가가고 있다.
금천교 너머... 외출 복장에 너울을 쓴 복빙이.. 월혜를 보고 손을 흔들려 하는데...
김상궁이 다른 왕대비전 상궁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들.. 점점 다가온다. 복빙, 굳어버린다. 월혜가 눈치 채고 멈춰 서는 것이 보인다.
김상궁을 보며 뒷걸음질 치는 복빙을 뒤에서 느닷없이 잡아채는 왕대비전 내관들.
김상궁 (싸늘한) 살아나갈 줄 알았더냐...?
복빙 (다리가 풀리는) 아...
복빙이 내관들에게 끌려가며 월혜를 스쳐 간다.
복빙... 월혜와 눈이 마주치면... 틀렸다는 듯... 슬픈 눈으로 살짝 도리질한다.
참담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복빙을 보고만 있는 월혜.
56. 왕대비전 창고 / 낮.
김상궁과 내관들 사이, 끌려온 복빙이 벌벌 떨고 있다.
문이 열리고... 고수애와 정순왕후가 들어선다.
정순왕후가 다가와 다정한 손길로 복빙의 볼을 어루만진다.
복빙 (곧장 눈물 터질 듯) 마마... 살려주시옵소서....
정순왕후 (복빙의 턱을 잡아 올리며) 독을 주더냐?
복빙 (눈물 터지는) 마마....
정순왕후 (빙긋이 미소) 그거... 구경 좀 해도 될까?
57. 춘당대 / 낮.
무과급제 무관들이 사대에 도열해 활을 쏘고 있다.
누각에서.. 어좌에 앉아 활쏘기를 보고 있는 정조의 뒷모습.
카메라 돌면... 융복을 입고 어좌에 앉아 장죽으로 담배를 피고 있는 정조다.
<자막> 미시 삼각, 01:45 pm
58. 춘당대 주변 들판 / 낮.
말을 탄 어영청 무관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구선복이 앞으로 나와 있다.
금위영 기마 무관들 앞으로 홍국영이 서 있다.
을수
- 35 -
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구선복과 홍국영의 팽팽한 기싸움... 부하들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 명령이 떨어지면 서로 살극을 벌일 듯 살기가 가득하다.
구선복 (느물거리는) 거.. 안 하던 사람이 하루 종일 칼 차고 다니면 허리 나가요.
어영청 무관들이 웃는다. 금위영 무관들이 발끈한다.
홍국영 거.. 누가 들으면 어전의 호위를 희롱하는 걸로 착각하겠습니다. 구장군이
아니라 다른 작자였으면 목을 베고도 남을 일 아닙니까?
어영청이 발끈한다. 금위영 무관들이 썩소를 날린다.
천천히 다각다각 다가오는 구선복. 역시 앞으로 나아가는 홍국영.
둘이 말머리를 교차하며 코가 닿을 듯 마주한다.
구선복 칼이 칼집 속에서.. 근질근질하지요?
홍국영 그러게 말입니다. 이놈이 제대로 한번 놀아야 할 텐데요.
구선복 조심하세요... 그러다 손가락도 잘리고 모가지도 잘린 놈들.. 많이 봤어요.
홍국영 (스르릉 칼 빼어들고 보며) 그 전에 한번 휘둘러야죠. 쓸데없이 오래 살아
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흉적들... 나랏님도 지들 마음에 안 맞으면 살
생부를 놓는 역적들... 그런 놈들 쳐 죽이는데 이 한 몸 바쳐야죠.
어영청들이 홍국영이 칼을 빼어드는 걸 보고 검에 손이 간다.
금위영들 역시 검에 손이 간다. 살기가 더욱 팽팽하다.
구선복 (빤히 보다가) 이래서 애들한테 칼 주면 안 되는데...
홍국영 쫄았... 습니까?
구선복 (얼굴 드밀고) 내가 오른손 하나만 들면... 이 나라 군사 팔 할이 움직인다.
니가 자꾸 까불면.. 내 오른손이 자꾸 올라갈라 그래.
홍국영 올리세요. 그 오른 손.
구선복 (울화통 터지는 걸 참는) 이런... 개...
홍국영 뭐하세요, 안올리고?
구선복 (노려보는) ....
홍국영 (같이 노려보는) ....
어영청과 금위영의 눈싸움도 치열해지는데...
구선복, 휙! 왼손을 쳐들면... 홍국영이 움찔한다.
구선복, 천천히 왼손을 뻗어 홍국영의 옷깃에 묻은 지푸라기를 털어 준다.
구선복 (껄껄껄) 날도 더럽게 더운데 활 쏘구 피맛골에 개장국이나 먹으러 갑시다!
홍국영 (정색) 개... 안 먹습니다.
구선복 (급 정색) 그럼 말고.
을수
- 36 -
구선복이 천천히 뒤로 말을 뺀다. 홍국영도 같이 뺀다.
둘이 말머리를 돌려 가면... 어영청과 금위영도 자신들의 대장들을 따라 경계를 늦추
지 않고 뒷걸음치며 프레임에서 빠져나간다.
59. 춘당대 / 낮.
사대에 선 어영청 무장 하나가 장궁을 들어 쏘고 있다. 날아가는 화살.
과녁 중심인 홍심에 꽂히면 과녁 근처에 있던 무관이 붉은 깃발을 든다. “관이요!”
주변의 어영청들이 뿌듯해한다.
또 활을 쏜다. 홍심 옆에 맞는다. 흰 깃발을 든다. “변이요!”
보고 있던 금위영들이 피식거린다.
누각... 정조가 보고 있다. 구선복과 홍국영도 아랫자리에 앉아 보고 있다.
정조 훌륭한 솜씨다.
구선복 (홍국영 의식하며 의기양양) 과찬이십니다, 전하! 어영청 훈련관들입니다.
오늘 아침에 배가 아프다고 골골골하두만 다섯 발이나 놓쳤습니다.. 평소
같으면 모두 홍심을 뚫는 실력입니다.
홍국영 (피식) 아까 보니 목마르다고 탁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더이다.
구선복 낮술에도 저 정도면 신궁 아니겠소?
홍국영 전하께선 세손궁 시절... 열 순에 마흔아홉 발 맞추시고 마지막 한 발은 만
용이라 하시며 끝내 사양하셨습니다. 이런 것은... 또 뭐라 부릅니까?
정조 .......
구선복 어찌... (또박또박) 도승지, 겸, 금위대장, 께서도 일 순 쏘실랍니까?
홍국영 됐습니다.
구선복 (껄껄껄) 금위영 궁술이 유난히 약하다 하더니 소문이 그냥 소문은 아닌가
봅니다.
홍국영 금위영은 조총부대가 오군영 최고지요. 총알 맞으면... 꽤 따끔합니다.
구선복 비 오믄 말짱 꽝이 조총 아니요? 그래서 화살 맞고... 많이들 디집디다.
정조 (어좌에서 일어서며) 구 장군.
구선복 (일어서며) 네, 전하!
정조 열 순에 삼십 발 이상 맞힌 자들 모두 포상하시오.
구선복 명을 받들겠습니다!
정조 금위대장.
홍국영 네, 전하...
정조 환궁.. 하겠다.
누각에서 걸어 내려오는 정조...
구선복과 홍국영, 어영청, 금위영 모두... 정조에게 허리 숙인다.
을수
- 37 -
60. 춘당대 주변 호수길 / 낮.
정조와 홍국영이 나란히 말을 타고 온다. 홍국영.. 시무룩한 표정이다.
정조는 활과 전통을 말안장에 메었다. 그 뒤로 금위영이 따르고 있다.
정조 (지나가는 말처럼) 그대에게 구선복은... 어떤 인간인가?
홍국영 전하...
정조 살기와 포악을 감추지 못하는 자다. 단순하고 거만하고 흉포하고 무례한
자다.
홍국영 그런 자가... 군권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정조 노론의 가장 큰 힘은 혼사다. 궁의 왕족들.. 산림의 유생들.. 오군영의 장수
들 혼사를 종횡으로 연결해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인사권을 쥔 이조와 군
권을 쥔 병조가... 모조리 그들 손에 있다. 누구 하나 목 벤다고 쓰러질 나
무가 아니다.
홍국영 ......
정조 내 아버지가 뙤약볕에서 죽어갈 때 그 옥체에 술을 뿌리며... 술을 주랴 물
을 주랴... 조롱하던 자가.. 구선복이다.
홍국영 전하....
정조 행여 내가 복수할 것이 있다면... 그대를 통해 이루지 않겠다.
홍국영 전하! 전하의 흉적은 소신의 흉적이요 백성의 흉적이요 이 나라 조선의 흉
적입니다!
멀리서 누군가 나무 사이로 정조 일행을 감시하듯 보고 있는 시점..
정조의 시선이 향한다. 저 멀리 나무 숲 사이 반짝하는 기운이 보인다.
정조, 말안장에 매어져 있던 흑각궁과 통아를 꺼내든다.
정조 편전을 아는가?
홍국영 통아에 애깃살을 멕여 쏘는.. 화살 아닙니까?
정조 (통아에 애깃살을 먹이며) 세손시절부터 나는 이 편전이 좋았다. 비록 흑각
궁에 작은 애깃살이지만, 청나라 황실에도 비밀로 한 우리의 신궁이다. 명
쾌하고 신묘하고 강력하길 따를 활이 없다.
나무 사이의 시점... 조금씩 이동하며 정조 일행을 감시하듯 따르고 있다.
정조 (정면을 향해 겨눠보는 듯) 간교하지 않고 허세롭지 않고 장황하지 않다.
(전방 어딘가 과녁을 조준하는 듯한 자세로)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적
의 방심을.. 적의 허영을... 일격에 분쇄한다.
갑자기 뒤로 몸을 틀어 편전을 날리는 정조.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총탄처럼 애깃살이 날아간다.
을수
- 38 -
호수 위를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애깃살! 그 그림자가 물 위를 떠간다...
점점 물과 가까워지는 애깃살... 수면에 닿는 듯, 차차작 소리와 함께 다시 떠올라
맹렬한 속도로 나뭇잎을 뚫고 나무 사이를 지나... 감시하던 시선을 향해 날아간다.
한 사내의 코 옆 나무 기둥에 강렬하게 박히는 애깃살.
그 충격에 뒤로 나가떨어지듯 엉덩방아를 찧는 사내... 어영청의 무관이다.
놀란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사내가 황급히 뒤를 돌아 도망간다.
홍국영 일행은 이 상황을 모른다.
정조 금위대장...
홍국영 네, 전하...
정조 구선복은 내 개인의 숙제다.
홍국영 .......
정조 그자만큼은... 내 손으로 수를 놓겠다.
홍국영 .......
정조 (젖은 눈에 서린 기운...) 내 뜻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61. 금위영 무기고 / 낮.
바닥에 고인 핏물 위로.. 똑똑 떨어지는 핏방울... 갑수의 고개가 한없이 처져 있다.
보초 서는 금위영 무관 둘이 저승사자처럼 검을 들고 그 옆에서 우뚝하다.
<자막> 신시 일각, 03:15 pm
어린을수(E) (어딘가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형! 뭐해?
갑수, 비몽사몽간에 “어?” 하고 고개를 든다. 피투성이 얼굴이다.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돌아보는 갑수. 척하니 갑수의 목에 겨눠지는 검.
금위영 무관 하나가 조용하라는 듯 입에 손가락을 가져댄다.
갑수, 정신을 차리면... 아무도 없는 무기고 안.
눈물과 핏물이 고인 눈으로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는 갑수.
갑수의 목을 겨누던 금위영 무관의 칼이 제자리로 천천히 돌아간다.
느린 동작으로 칼날이 지나가면.. 갑수의 어깨... < 七七 >의 인두자국이 드러난다.
62. 광백의 산채 마당, 회상 시퀀스 시작 / 낮.
공중으로 짖으며 뛰어오르는 사나운 개... 바로 위에 을수가 매달려 있다.
원형의 격투장 구덩이 안, 갑수가 난타전을 벌이는 위로.. 눈이 내린다...
아이들이 격투장 구덩이 위에 빙 둘러앉아 구경 중이다.
<자막> 14년 전, 1763년 계미년
을수
- 39 -
어린을수 (다시 뛰어오르는 개를 보며) 형! 뭐해!? ..돌멩이 잡아!
맞은편 덩치 큰 아이를 노려보는 갑수의 뒤로.. 흙벽에 꽂혀 있는 돌이 보인다.
을수가 매달린 줄이 팽팽하게 갑수의 허리로 연결 돼 있다.
갑수가 돌을 집거나, 물러나면... 을수가 굶주린 개에게 물려 죽는다..
덩치 큰 아이에게 일격을 맞고 쓰러지는 갑수. 을수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바닥을 훓
으며... 뒤로 주욱 밀려나는 갑수. 을수가 밑으로 떨어져 개에게 가까워진다. 바닥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죽을힘을 다해 부여잡는 갑수. 일어나지 못한다...
혼자 두툼한 옷을 입은 광백이 주먹밥을 오물오물 먹으며 시큰둥하게 구경중이다. 덩
치 큰 아이가 광백을 본다. 덩치의 허리에도 팽팽한 줄이 연결돼 있다.
광백, 콧물을 핑 풀고.. 처리하라는 듯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
덩치 큰 아이가 뒤에 있는 돌을 향해 주춤주춤 물러선다.
덩치에게 매달렸던 아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덩치가 칼을 집는 순간, 개 짖는 소리와 아이의 비명이 울린다.
을수에 눈에... 칼을 들고 갑수에게 다가서는 덩치가 보인다.
몸부림치는 을수... 자지러지게 고함지른다.
어린을수 (울면서) 형! 빨랑 인나! 오잖아!
쓰러져있던 갑수가.. 여전히 꼼짝도 않고 있다... 덩치가 돌을 들고 다가온다.....
개들은 미친 듯이 짖어 대고.. 을수가 몸을 비틀어 줄을 끊으려고 물어뜯는다.
덩치 큰 아이가 칼을 치켜들고 거의 다 올 때쯤... 갑수가 덩치 큰 아이의 무릎을 킥
으로 찍어 버린다.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덩치...
순식간에 올라탄 갑수가 마구 주먹으로 때린다.
광백은 그저 뚱하니 보고만 있다. 완전히 넉 아웃 상태가 된 덩치.
헉헉대는 갑수가 광백을 보면.. 광백이 건성으로 목 긋는 시늉을 한다.
돌을 주워... 천천히 치켜드는 갑수.
63. 갑수 구덩이 / 밤.
< ㄴ >자 토굴에서.. 짚더미 바닥... 옹기종기 요를 끌어안고 잠들어있는 아이들.
을수가 눈을 뜨고 보면.. 갑수가 보이지 않는다.
구덩이 위로 뚫린 밤하늘... 눈이 내리고 있다.
거적때기 하나를 어깨에 둘러쓰고 있는 갑수... 구덩이 바닥에 홀로 서서 입을 아 벌
리고 눈을 맞고 있다. 토굴에서 얼굴만 내밀고 보는 을수.
어린을수 뭐해?
어린갑수 눈 먹어.
어린을수 맛있어?
을수
- 40 -
어린갑수 그냥... 물맛이야.
어린을수, 같이 와 서서 입을 벌리고 눈을 먹는다.
어린을수 오늘 형 죽는 줄 알았어.
어린갑수 난... 안 죽어.
어린을수 안 죽는 사람이 어딨어? 이백십일노미도 죽었구 이백십이노미도 죽었어.
어린갑수 내 동생이랑 여기 같이 잡혀 왔었어. 너랑 비슷하게 생겼거등. 겁도 엄청
많구.
어린을수 나 겁 없어! 씨!
어린갑수 여기 오고 두 번째 밤에 개한테 물려갖구 죽었어. 개한테 물려가지구 아프
다구 밤새 울고 소리 지르고 하다가 그 담날 죽었어.
눈이 그치고 하늘에 달과 별이 보인다.
어린갑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저 달 밑에 세 번째 별 보여? 반짝반짝하잖아.
저거 내동생이야.
어린을수 (한참 보다 콧물 훌쩍) 웃기시네.
어린갑수 우리 이름 지을래?
어린을수 이름? 있잖아.
어린갑수 그런 거 말구 우리 이름... 진짜 이름...
어린을수 진짜 이름?
어린갑수 나는 갑수.
어린을수 나는?
어린갑수 내가 갑수니까 너는 을수. 이게 굉장히 깊은 의미가 있어.
어린을수 (반응 없고) ...
어린갑수 안 좋아? 그래도 사람 같잖아. 똥개새끼처럼 이백이십노미 칠십칠노미 그
게 뭐냐?
어린을수 (토굴로 뛰어가며) 어씨 추워!
어린갑수 너 그거 우리끼리만 알아야 돼! 비밀이야! (토굴로 사라지는 을수 보다가)
이 짜식이... 형이 엄청 힘들게 이름 만들었는데...
투덜대며 토굴 안으로 들어가는 갑수. 하늘의 그 별.. 반짝 빛난다.
64. 광백의 산채 마당 / 낮.
봄이다. 흑립에 도포차림.. 양반 복장을 한 사내가 토굴에서 나온다.
광백이 귀한 손님인 듯 싹싹하다.
마당에 남자아이들만 도열해 서 있다. 갑수와 을수도 있다.
냄새가 나는 듯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사내가 아이들을 빤히 본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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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몇몇 아이들을 손짓으로 고른다. 연신 굽실거리는 광백.
손수건을 내리는 사내... 상선 안국래다.
안국래 긴하게... 실수 없이...
광백 (넙죽 인사) 길티요!
사내와 광백이 벽 쪽으로 향하면, 위에서 드르륵... 계단이 내려온다.
65. 광백의 산채 앞 / 낮.
하인이 상선 안국래의 말을 끌고 간다.
돌아서 농가로 들어서는 광백, 마당을 내려다본다.
그 어깨 너머로 아래, 안국래가 골라 놓은 아이들이 광백을 올려본다...
광백 개부랄.. 까듯이.. 까라?
66. 갑수 구덩이 / 밤.
비가 오고 있는 밤... 을수와 아이들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귀를 막고 있다.
아이의 비명소리가 산채를 울리며 갑수의 구덩이까지 온다.
갑수는,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묵묵하다.
아이 1 부랄 까는 거래.
아이 2 고자로 만들어서 내시한테 판대.
어린을수 내시?
아이 1 임금님 사는데 간대. 엄청 밥도 많이 주고 엿도 주고 그런대.
어린을수 (호기심. 눈빛 반짝) 진짜?
어린갑수 병신 새끼들... 저 소리 안 들려? 어제만 둘이나 죽었어. (사타구니 툭툭) 이
거 까면.. 죽는 거야. 열 놈 중에 아홉은 죽어.
어린을수 (겁먹은) 진짜?
비명소리가 피크를 친다. 이내... 조용해진다. 아이들... 그 정적에 짓눌린다.
어린갑수 또... 뒈진 거야.
겁먹는 아이들. 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걷어차는 소리.
그때마다 아이들이 움찔움찔한다.
점점 더 다가오는 욕설. 아이들이 긴장하며 바쁘게 눈빛이 오간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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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1 안 돼...
아이 2 온다..
광백(E) 얼렁들 게나오라우!
을수가 벌써 울 듯한 표정으로 갑수를 본다.
불길만 뚫어져라 보던 갑수, 벌떡 일어선다.
구덩이 아래로 척하니 떨어지는 줄사다리.
광백이 피 묻은 단검을 들고 횃불을 비추며 잔뜩 짜증 나 있다.
광백 한 새끼 올라오라.
을수와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어쩔 줄 모르고 있다.
광백 내래 내래만가문... 너덜 구댕이를 몽주리 도륙을 내주가서!
아이들 울기 시작한다. 갑수가 빤히 광백을 올려다본다.
을수가 광백의 시선을 피하듯 갑수 뒤로 숨는다.
광백 이 똥개새끼덜...
<시간경과>
광백과 부하들이 아이들을 몽둥이로 마구 후려친다.
이리저리 도망가며 울어대는 아이들. 갑수와 을수를 붙잡아 세우는 광백.
광백 (단도를 내보이며) 너덜 둘이 젤루 단단하니 가위바이보 하라우.
을수가 울음을 터트린다. 광백이 찔러버릴 듯 이를 문다. 갑수가 급히 손을 내민다.
어린갑수 빨리해!
어린을수 (광백도 갑수도 무섭다) 형...
광백 (잔뜩 짜증 난) 뭐하네...?
어린갑수 어서! 이 바보 새끼야!
어린을수 (손을 내밀면) ....
어린갑수 (충혈되는 눈) 가위.. 바위..
느린 화면으로... 을수, 눈을 질끈 감고 가위를 내민다.
갑수의 페이크모션... 한발 늦게 나가는 갑수의 보자기.
을수의 가위와 갑수의 보자기... 을수의 승리.
광백... 갑수의 의도를 알아차리며 갑수를 실눈으로...
눈을 뜨는 을수... 순간 안도하는 눈빛으로 광백과 갑수를 본다.
갑수... 충혈된 눈으로 을수를 본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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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하게 갑수와 을수를 보다가... 침을 퉤 뱉고, 느닷없이 와락!
갑수를 채는 광백의 무지막지한 손길.
67. 광백의 산채 토굴 / 밤.
침대에 大자로 누워 묶여있는 갑수. 그 옆에서 광백이 이것저것 칼을 고르고 있다.
갑수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덜덜덜 떨린다. 입에 나무 작대기 재갈이 물린다.
68. 광백의 산채 마당 / 밤.
천둥번개와 함께 맹렬한 비... 갑수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69. 갑수 구덩이 / 밤.
비를 맞으며 을수가 구덩이 바닥에 서서 울부짖는다.
어린을수 형!!!! 갑수 형!!!!!!
70. 현재, 금위영 무기고 / 낮.
갑수가 멍한 시선으로 어딘가를 보며 말하고 있다.
갑수 상선 안국래는 저를 양자로 입적시킨 다음 세손궁 소내시로 들였습니다.
그 목적은 하나... 때를 기다려... 전하를... 암살하는 것이었습니다.
화면 열리면... 금위영 무관들이 살벌하게 호위하고.. 홍국영이 노려보는 그 사이...
의자를 놓고 그 앞에 앉아있는 정조다. 정조... 아무런 표정이 없다.
금위영 무관들이 동요한다. 홍국영이 눈짓으로 제지한다. 정조는 석상이다.
홍국영 상선 영감은 남인의 추천으로 궁에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그가 노론으로
넘어간 것이냐?
갑수 그는 처음부터... 노론의 사람이었습니다.
홍국영 왜 니 양부를 죽였어?
정조 (감정 없이 갑수를 본다) .....
홍국영 (버럭) 왜 죽였어!?
갑수 그 자는 오랫동안... 살막의 엽전줄이었고 설계자였고 거간꾼이었습니다.
을수
- 44 -
홍국영 진실을 말해, 이 새끼야!
갑수 그자는 죽어 마땅한 자일뿐... 진실 같은 건 없습니다.
정조 (표정 없는) .....
홍국영 너는 노론의 살수다. 그 오랫동안 존현각의 사람으로... 니 본심을 숨기고
어전을 능욕하며 살아왔다. 너 같은 인간이야말로 죽어 마땅하다...
갑수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살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정조 보며) 전하... 신
은 전하께 거짓이었습니다. 신은... 위선이었습니다.
정조 ......
갑수 (충혈되는) 신은.......
정조 언제부터냐?
모두 (보면) .....!
정조 날 살리려고 마음먹은 것은?
갑수 (말문이 막히는) !!
홍국영 !!!!!
금위영들 !!!!!!!!!!
정조 언제... 니 마음이 돌아섰던 것이냐?
홍국영 (이건 아니다...) 전하... 이 자는...
정조 무슨 연유로... 너는... 살수를... 버렸느냐?
눈물 젖은 시선으로 정조를 올려다보는 갑수, 격한 감정이 치솟아 오른다.
정조가 무덤덤하게 내려다본다.
71. 왕대비전 후원 / 낮.
왕대비전의 후원... 고즈넉한 가야금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계곡 물위로 지어진 커다란 나무 욕조가 보이고... 꽃잎 항아리를 든 시녀들이 연신
꽃잎을 욕조 안에 뿌리는 가운데... 정순왕후가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저고리와 치마
를 입고 물에 들어가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일종의 간이 풀장... 음식 시중, 부채질
하는 시녀, 가야금과 비파를 연주하는 시녀들까지... 호화롭다.
<자막> 신시 반각, 04:00 pm
입구 쪽 시녀들이 소란스러워지는 듯하더니.
상궁(E) 자궁저하 드십니다.
혜경궁이 고수애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다. 정순왕후, 혜경궁을 본체만체 눈길이 없
다.... 혜경궁, 유난을 떠는 정순왕후의 그 꼴이 고울 리 없다.
혜경궁 급히 찾으신다 하여...
정순왕후 더운 데.. 들어오시지요?
을수
- 45 -
혜경궁 (딱딱한) 괜찮습니다.
정순왕후 왜, 민망합니까?
혜경궁 가히 보기에 좋지는 않습니다. 온 나라가 가뭄이고.. 상중이라 주상도 감선
하고 무명을 입고 지내는 마당에...
정순왕후 (욕조 턱에 기대듯 도발적으로 보며) 그런 마당에, 눈깔 시러운 년이 물 낭
비에 사치를 부려 어전을 욕보이고 있다?
혜경궁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순왕후 혜경궁... 우린 한때 같은 편이었잖아요. 왜 이렇게 서먹서먹해졌을까요?
혜경궁 (보다가) 긴히 하실 말씀이 없다면 물러가겠습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면)
정순왕후 지아비는 파셨잖아요? 그땐 손발이 착착 맞았는데...
혜경궁 (우뚝) !!!
정순왕후 가문을 위해... 우린 한배를 타지 않았나요?
혜경궁 (가려하고) ...
정순왕후 지아비는 팔아도 아들은 못 판다?
혜경궁 (휙 돌아보는.. 그 무시무시한 눈길) !!
정순왕후 (딸기 하나 집어 먹는) 주상은 왜 그렇게 삐딱할까요? 왜 우리말을 그렇게
안 들을까요? 애비를 닮아 그러나...
혜경궁 (떠나갈 듯) 닥치시오!!!
좌중이 모두 얼어붙는다. 불을 뿜는 기운으로... 혜경궁이 정순왕후에게 다가온다.
혜경궁 그 요사한 입으로... 더 이상 주상을 욕보이지 마시오. 참고 또 참고 있는
주상의 노여움이 터진다면...
정순왕후 (배시시) 이 내궁이 모두 피바다가 될 것이다?
혜경궁 .......
정순왕후 아니면 주상이 변고를 당하거나?
혜경궁 !!
정순왕후 그래서 그 전에 나부터 먼저 처리하자?
혜경궁 !!??
정순왕후 뭐하느냐? 자궁저하 기다리신다.. 차 드려라.
김상궁과 함께 나인 하나가 소반을 들고 들어온다. 복빙이다!!
혜경궁이 복빙을 본다. 무너지는 눈빛.
복빙이 벌벌 떨며 찻잔이 든 소반을 혜경궁과 정순왕후 사이에 놓는다.
정순왕후 복빙아. 어서.
혜경궁 (이를 악무는) ...!
복빙 (그저 덜덜덜) ......
정순왕후 (나긋하게) 뭐하니?
순간 복빙, 납작 엎드려 엉엉 운다. 혜경궁, 떨리는 이를 억지로 깨문다.
을수
- 46 -
정순왕후, 자신의 손으로 혜경궁의 찻잔에 차를 따른다.
정순왕후 드세요.
혜경궁 (정순왕후만 뚫어져라... 붉어지는 눈빛) ...
정순왕후 어서.
혜경궁 (울고 있는 복빙을 보는) ...
정순왕후 (미소까지 지으며) 왜, 독이라도, 들었을까봐...?
혜경궁 (숨이 막혀오고) !!!
정순왕후 왕대비의 처소에 독을 보내 독살을 음모했다는 것을... 대소신료들이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니지... 산림과 백성과 유생들 모두 알게
된다면...? 남인과 소론이 그 난리를 막아낼 수 있을까요?
혜경궁 .......!
정순왕후 그 아비에 그 어미... 과연 주상은... 용상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혜경궁 (울분에 눈물 맺히고 입술 바들바들) 무엇을.. 바라십니까?
정순왕후, 찻잔을 혜경궁 앞으로 쭉 민다. 혜경궁, 떨리는 눈으로 찻잔을 본다.
정순왕후 드세요.
혜경궁 .....
정순왕후 죽으세요.
혜경궁 !!!!!
정순왕후 어서요.
혜경궁, 그 붉은 시선으로 정순왕후를 본다. 엎드려 울고 있는 복빙을 본다.
고수애와 김상궁... 주변의 상궁들과 시녀들을 본다. 모두 남이고 벽이다.
다시 찻잔을 본다. 천천히 손을 뻗어 찻잔을 든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입으로 찻잔을 가져가는 혜경궁.
눈을 감고 한입에 마시려는데... 정순왕후가 혜경궁의 뺨을 후려친다.
정순왕후 네 이년!
혜경궁 (얼굴 돌아가고 머리 풀린 채 눈물만) .........
정순왕후 나는 왕대비다! 나는 궁의 제일 어른이자 노론의 지어미다! 지금 이 나라
사대부들이 주상의 신하인줄 아느냐!?
혜경궁 (끅끅 참는 울음소리...) 저는... 죽이셔도 됩니다... 허나...
정순왕후 보자꾸나... 그 잘난 니 아들이 나에게 와서 어떻게 니년을 살려달라고 비
는지...
혜경궁 (결국 터지는 흐느낌) 마마...
정순왕후 (싸늘하게) 뭣들 하느냐? 이년을... 치워라.
72. 홍술해의 집 마당 / 낮.
을수
- 47 -
마당 한 가운데... 최세복이 엎드려 절하고 있다. 그 앞... 양반차림에 짙고 거만한 눈
빛의 사내... ‘홍상범(30대)’이 뒷짐을 지고, 보고 있다.
73. 홍술해의 집 사랑채 / 낮.
최세복이 문을 열고 있고... 문 앞에 홍상범이 서 있다.
최세복 전주에서 올라오신... 홍상범 도련님이십니다.
사랑채 마루... 강용휘가 벌떡 일어나 인사하면, 갓을 쓰고 양반 복장을 한 이십여 명
의 자객조 모두 인사한다.
<시간경과>
궁궐의 지도를 펼쳐놓고 최세복이 홍상범에게 설명하고 있다.
최세복 오늘 밤 존현각 차비문의 직숙 별감은 여기 있는 강 군관 나으리입니다.
차비문 호위청 직숙들을 담당합니다.
강용휘 (짧게 목례하고) ...
최세복 대전 별감들은 강 군관 나으리의 조카... 강 별감 나으리가 담당합니다.
젊은 별감 (목례하고) ....
최세복 이렇게 되면 존현각은 텅.텅. 빕니다.
<인서트> 아무도 없는, 달빛 아래 스산한 존현각 건물.
최세복 김수대 나으리가 저를 배설방 고직으로 붙여 주었습니다. 승정원 사령 나
으리가 신호를 놓아주면 조라치 일을 하는 황가가 여기 아이들 서넛을 데
리고 홍국영이를 처리합니다.
<인서트> 승정원에서 나오는 홍국영. 자객 서넛이 뒤에서 잡으면 최세복과 황가
가 칼로 홍국영을 찔러댄다.
최세복 인경이 지나면... 강 군관이 정해준 담을 통해 넘어갑니다.
<인서트> 강용휘가 궁 담장 아래 서 있고... 양반 옷을 입은 사내들이 우루루 뛰
어 넘어 온다. 주위를 살피고 모두 도포를 벗으면... 자객복이 드러난다.
미이라 같은 섬뜩한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사불란하게 산개한다.
최세복 궁수조는 지붕을 통해 주변을 경계 탐지하고...
을수
- 48 -
<인서트> 지붕 위로 날듯이 뛰어가는, 활을 멘 자객들. 궁궐 여기저기를 살핀다.
최세복 검수조는 존현각으로 침투합니다.
<인서트> 칼을 든 자객들이 존현각 앞에 서면, 을수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다.
최세복 최종암살자는 광백이 붙여준 조선 최고의 살수라는 자입니다. 제 눈으로
확인한 자입니다. 일은 깨끗하게 끝납니다.
<인서트> 존현각에서 잠자던 정조가 놀란 눈을 뜨고 보면, 을수가 검을 휘두른다.
존현각 안... 피가 사방으로 튄다.
최세복 동선은 수도 없이 확인하고 점검했습니다. 대전의 액정서 내관들은 이미
상선 영감이 다른 일로 돌려놓았습니다. 상중이라고 지밀나인들도 없습니
다. 실패할래야 실패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홍상범 왕대비전에서는 기별이 아직 없는가?
강용휘 (밖을 향해) 월혜야.
문이 열리고... 나인 하나가 들어와 곱게 인사하고 고개를 드는데.. 월혜다!
강용휘 제가 양녀로 들인 아이입니다. 세답방 나인으로 있는데 왕대비전과의 연락
을 맡고 있습니다.
홍상범 자네가 고 상궁과 밀통을 하나?
월혜 네.
홍상범 기별이... 없던가?
월혜 아직 없습니다.
홍상범 한 발.. 떨어져 있겠다...?
강용휘 왕대비전에서 말이 안 떨어지면... 어떡하실 겁니까?
홍상범, 주위를 돌아본다. 모두 홍상범만 보고 있다.
차갑고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여는 홍상범... 젊고 거만한 사대부의 화신.. 그 자체다.
홍상범 옥새를 넘길 수 있는 권한은 왕대비전에 있다. 일이 성공하고도 역모로 몰
리는 악수를 피하려면 왕대비전의 허락을 받아야한다. 거사가 성공하면, 내
일 아침.. 은전군 이찬을 옹립할 것이다.
강용휘 은전군도... 이 일을 안단 말씀입니까?
홍상범 (노려보더니... 툭 내뱉는다.)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시선을 돌리며) 우리
노론이 앉히면 된다. 그게..... 우리 왕이다.
강용휘 !!! ....... (마른 침을 삼킨다.)
홍상범 살수조가 들어가고... 구선복 장군이.. 궁을 포위하면...... (이마를 긁는다.) ....
끝이다. (월혜를 본다.) 즉시 입궐하여 고 상궁을 만나거라.
을수
- 49 -
월혜 네.
74. 왕대비전 창고 / 낮.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 손이 뒤로 묶인 채 지친 표정의 복빙이 옆을 본다.
혜경궁이 다른 기둥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복빙 마마...
혜경궁 (아무런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
복빙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혜경궁 ......
복빙 너무 두렵고 무서워...
혜경궁 (담담하니 앞을 보며) 복빙아... 너는.. 죄가 없다.
복빙 (눈물 맺히며) 마마..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사옵니다. 오늘 밤에 흉적들이...
존현각으로...
혜경궁,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면... 복빙,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떨고 있다.
혜경궁,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표정이 된다.
75. 홍술해의 집 사랑채 / 낮.
강용휘와 월혜 둘만 있다. 소지품과 모자 등을 챙기던 강용휘가 눈을 치켜뜬다.
강용휘 이것이... 미쳤나? 뭐, 복빙...? 그런 애를 어떻게 살려?
월혜 아버님. 사 년 동안 한방을 썼습니다. 제 친동생 같은 아이예요. 거사가 성
공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신다 하셨잖아요?
강용휘 이년아! 미친 소리 말어! 왕대비마마야! 까닥하다간 니년은 고사하고 나까
지 가는 거야! (나가다 우뚝 서서 돌아보며) 너... 니가 뭐라고 생각해?
월혜 네?
강용휘 상선 영감이 아니었음 너를 내가 왜 딸로 받아? 어디서 다 죽어가는 거지
년을 받아서, 먹이고 가르치고 궁중나인까지 만들어 줬더니... 이제 와서 이
아비 명줄을 흔들어?
월혜 ......
강용휘 이런 근본도 모르는 잡것이... 빨리 궁에나 들어가
강용휘, 노려보다 휙 나가버린다. 월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서 있다.
을수
- 50 -
76. 경강 강변 / 낮.
저 멀리 강변 염색공방이 보인다. 강물에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그 느티나무 아래... 목함을 안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을수.
<플래시백> 엽초전 이층 너른 마루위에 선 광백. 뒤로 을수가 보인다.
광백 너가 날주게두 소용없어, 우리 아덜 잘 알단네?! 기엠나일 기냥 놔두간? 열
놈이구 스무 놈이구 돌림빵으루다 해치우가띠!! 사지를 잘라개지군··· 우리
토굴 똥가이 새끼덜 잘 알디?! 엄청나게스리 잘 처먹갔디머..
을수 ......
광백 왕 모가지... 해보구 싶띠?
을수 사행(死行)...
광백 ......
을수 실패하면 죽음.. 성공해도 군왕을 죽인 자... 날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광백 (물 후루룩 입가심.. 건성으로) 와 겁나네?
을수 그 여자... 안전해야 합니다.
광백 니래 엽초전에서리 강 군관 봤디?
을수 ...
광백 거기 딸내미야. 그 세답방 에미나이.
을수 !!!!
광백 일만 성공하라우. 기럼 그 에미나이 평생 쇳복은 걱정 없이 살지 않갔어?
을수, 목함을 연다. 장검을 꺼낸다. 소매에서 꺼낸 흰 무명천에 장검을 싼다.
77. 강변 염색공방, 회상 시퀀스 시작 / 낮.
눈발이 날리는 공방 마당... 너울 쓴 월혜를 배웅하는 공방주인... 연신 굽실거린다.
공방 마당을 나서는 월혜... 마당 빨랫줄에 널어놓은 염색천이 바람에 한번 휘날리
면... 그 틈 너머.. 저기 강변 느티나무 아래 누군가가 서 있다.
흑립에 도포... 익숙한 모습의 사내. 월혜가 그 사내를 빤히 본다.
사내가 사라지면, 얼어붙은 강변에 봄이 찾아온다.
78. 강변 느티나무 / 낮.
느티나무 아래로 월혜가 온다. 아무도 없다.
느티나무 뒤를 돌아보는 월혜... 을수가 모른 척 하고 강을 보며 앉아있다.
월혜가 빤히 보면... 을수, 모른 척 돌아보다 짐짓 놀란 척을 한다.
을수
- 51 -
낮에 보는 월혜... 아름답다.
을수 (그 어색한 연기) 앗.. 자네...?
월혜 기억하면... 죽인다면서요?
을수 (외면) ......
월혜 (다가오며) 뭐하는 사람이에요? 화적떼? 검계? 그냥.. 강도?
을수 (움찔 물러나며) ....!
월혜 살수?
을수 (멈칫) !
월혜 청부... 살수?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거... 그런 거...?
을수 (굳은 얼굴로 강물만 보는) ......
월혜 근데 왜 따라다녀요?
을수 (발끈) 내가 언제?
월혜 지난달 광통교 지날 때... 그저께 시전에서도...
을수 (대답 못하고 고개 돌려 나직이 욕설 뱉는) 아 이런 니미 씨파....!
월혜 세답방 염색 경공장이 여기예요. 매달 초닷새랑 그믐날... 와요.
을수 ....
월혜 갈게요.
돌아서 가던 월혜, 돌아와 보따리에서 뭔가 꺼내려 한다.
월혜가 꺼낸... 호박엿 두 개. 멀뚱한 표정으로 엿을 보는 을수.
받으라고 재촉하듯 내밀면... 을수가 그 등쌀에 움찔 받는다.
월혜가 빙긋이 미소 짓는다. 발그레한 얼굴로 돌아서는..
79. 현재, 경강 강변 / 낮.
그 장검을 들고 을수가 자리를 떠난다. 느티나무 아래... 목함이 나무에 기대 있다.
열려있는 목함 안.. 들꽃 하나가 놓여있다.
80. 왕대비전 창고 앞 / 낮.
월혜가 주전자를 들고 온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호위내관이 빤히 본다..
<자막> 유시 일각, 05:15 pm
월혜 큰방마마님이 보내셨습니다.
81. 왕대비전 창고 / 낮.
을수
- 52 -
월혜가 주전자를 들고 들어온다. 내관들이 문을 닫는다.
창고 안 저기... 복빙과 혜경궁이 묶여있다.
복빙 항아님...
말없이 주전자 뚜껑에다 물을 붓는 월혜. 혜경궁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물을 먹일 듯 복빙에게 내미는 월혜.
월혜 (복빙에게 물을 먹이며) 지금 너를 여기에서 꺼낼 방법이 없어. 밤이 되면..
어떻게 해볼게.
복빙 (포기한) 항아님까지 위험해져요. 저는요... 나가두.. 못 살아요. 제가 도망가
면.. 아버지 어머니 다.. 죽일 거예요.
혜경궁 살 방법이... 있다.
복빙, 월혜 (보면) ...
혜경궁 오늘 밤 변고가 있을 거야. 어떻게든 주상에게...
월혜 (복빙 얼굴 닦아주며) 그 변고... 제가 밀통한 일입니다.
혜경궁 !!!
복빙 항아님...!
월혜 고 상궁과 저... 이 궐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준비하고 있지요.
혜경궁 이... 이 년... 어찌 감히 사람의 탈을 쓰고...
월혜 사람의 탈을 쓰시고 열 살 아이한테 왕대비를 독살하라.. 그 길로 보내셨나
요? 그렇게 왕대비가 죽으면.. 이 아이가 무사할 거라 생각하셨어요?
혜경궁 .............!
월혜 우리 같은 것들은... 그냥 불쏘시개로 쓰고 버리면 끝인가요? 저는요.. 이
궐이... 당신들 모두... 너무 싫습니다.
혜경궁 .....
월혜 (복빙 뺨 쓰다듬으며) 울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마. 내... 다시 온다.
복빙 항아님...
혜경궁 (월혜 가려하면) 내가... 잘못했다. (복빙 보며) 복빙아. 날 용서해라.
월혜, 아무런 표정 없이 혜경궁을 본다. 어떤 언질도 없이 뒤돌아서 간다.
혜경궁의 눈물이.. 억지로 삼키는 울음소리가 창고 안을 채운다.
82. 경모궁 / 낮.
사도세자의 신위와 영전이 있는 제단. 그 아래 홀로... 고두배를 하는 정조.
무덤덤하게 향불을 바라보다 다가간다.
비스듬해진 향들을 바르게 꽂고.. 신위에 묻은 먼지도 소매로 털어내는 정조.
다시 제자리로 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을수
- 53 -
정조의 얼굴로 깊이 들어가는...
<플래시백> 창경궁 문정전 뜨락...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너머, 땡볕아래 놓여있는
뒤주 하나. 화면 천천히 다가가면... 갑자기 뒤주를 쿵쿵 때리는 주먹
질과 소리.
사도세자(E) 아바마마! 아바마마! 살려주시옵소서!
정조가 제단으로 다가온다. 신위 아래.. 제단의 보를 들춰내는 정조.
혼자 끙끙.. 보 아래로 반쯤 들어가 뭔가 힘을 주고 있는 정조.
<플래시백> 느린 화면... 어린 세손 정조가 울면서 문정전 입구로 달려온다.
그 뒤로 채제공이 따라오고 있다.
구선복이 돌아보다 주위에 고갯짓하자, 군관들이 정조를 막아선다.
채제공이 정조를 안듯이 잡는다.
저 멀리.. 영조가 문정전 월대에 서서 뒤주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
인다. 문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어린 정조가 자지러지듯이 운다.,,,
채제공이 어린 정조를 안고 같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마른하늘에 여우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뒤주 궤짝의 모서리 경첩을 떼어내는 군관들.
사방에서 당기면.. 뒤주 벽들이 쫙 펼쳐지며 무너지려 하는데!!!
정조가 제단 아래에서 오래된 철상자 하나를 꺼낸다. 금등이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작은 철상자.
상자의 먼지를 입바람으로 후후... 소매로 정성스레 닦아내는 정조.
<플래시백> 직부감으로... 여우비가 떨어지고 있는 뒤주.
뒤주의 벽들이 쫙 사방으로 펼쳐지면...
피묻은 적삼을 입고 앙상하게 마른 꼴로... 새우처럼 웅크린 채 죽어
있는 인영.. 스물일곱 살의... 사도세자다.
그 사도세자에게 카메라 다가가는데... 아련히 들려오는 “아버지...”
순간 음악이 정지된 검은색 배경 인서트. 그 위로.
정조(E) (나직하고 조용한) 아버지... 죄송합니다...
<시간경과>
화면 느닷없이 열리면... 갑수의 얼굴에서 두건이 벗겨진다.
홍국영이 정조 옆에 대기하고 있고... 금위영 무관 둘이 포승줄에 묶인 갑수를 정조
뒤쪽에 꿇려놓고 있다. 정조는 무릎 꿇고 제단만 바라보고 있다.
을수
- 54 -
정조 어릴 적 춘방시절.. 너와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몰래 왔었다.
그날을 기억하느냐?
갑수 갑신년 오월 초아흐레... 소신이 세손궁에 온 지 칠십팔일 째 되던 날이었
습니다.
홍국영 (마땅찮은 표정) ...
정조 그때는.. 살수였느냐?
갑수 그렇습니다...
홍국영 (검에 손이 가고) ....
정조 어마마마를 뵈러 동궐로 갔었다. 부용지에서 몰래 잉어낚시를 했었다. 기억
하느냐?
갑수 팔월 초닷새... 소신이 세손궁에 온 지 일백육십사일 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홍국영 (뭐 이런 놈이...) .........
정조 그때는... 살수였느냐?
갑수 그렇습니다.
정조 니가 몹시 상해서 온 날이 있었다. 너는 맞고 다친 연유를 말하지 않았고...
나도 내가 울고 있던 연유를 말하지 않았다.
갑수 을유년...
정조 오월 스무하루... 비가 세차게 오던 날이었고... 아바마마가 영전하신지 삼
년 째 되던... 날이었다.
갑수 ......
정조 너는 그때... 살수였느냐?
갑수 ......
정조 (그제야 갑수를 돌아보는) 무엇이었느냐?
갑수가 정조를 본다. 흔들리는 그 시선.
83. 궁 여기저기, 회상시퀀스 시작 / 밤.
비가 억수같이 온다. 후원의 숲... 호위군관들과 사령들, 환관들, 나인들까지 총동원돼
횃불을 들고 누군가를 찾고 있다.
<자막> 12년 전, 1765년 을유년
사람들 저하! 저하! 세손저하!
내관들이 횃불을 들고 뛰어다닌다. “저하! 저하!”
그 사이 초롱을 든 어린갑수도 있다. 눈 주위, 목, 팔 등등에 멍이 들어있다.
어린갑수 저하! 저하!
모두들 우루루 다른 쪽으로 뛰어가는데...
을수
- 55 -
거대한 고목 앞에 멈춰 선 갑수... 후원 어딘가로 시선이 향한다.
84. 후원창고 앞 / 밤.
단청 없는 창고 건물 앞으로 달려오는 갑수.
문을 열려하지만, 묵직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두드리며... 세손을 부르는 갑수.
이내, 나무판 사이의 틈을 발견하고는, 비집고 들어간다.
85. 후원창고 / 밤.
타이틀시퀀스 첫 씬의 그 장소다.
작은 창 너머로 천둥번개가 때리면.. 잡물들을 보관한 창고 안의 실내가 드러난다.
뽀얗게 먼지가 앉은 바닥 위로 작은 발자국 하나가 선명하다.
그 위로 갑수의 발자국이 찍힌다. 초롱을 들고 어딘가로 다가가는 갑수.
실내의 제일 끝... 궤짝이.. 사도세자의 그 뒤주가 있다.
점점 더 다가가는 카메라. 또다시 천둥번개.. 확연히 드러나는 뒤주.
살짝 열려있는 뒤주의 뚜껑. 갑수가 그 앞에 서 있다.
천천히 뚜껑을 열면... 열세 살 어린정조가 무릎을 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린갑수 저하...
어린정조 (고개 드는데 눈물 가득한 얼굴) ....
어린갑수 여기... 계셨사옵니까?
<시간경과>
열려있는 창고의 창.. 빗물이 안으로 쏟아진다.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갑수.
어린정조는 뒤주에서 빼곰히 갑수를 내다보고 있다.
어린정조 뭐하느냐?
어린갑수 (여전히 그 자세) 비를... 먹습니다.
어린정조 맛있느냐?
어린갑수 그냥.. 물맛입니다.
뒤주에서 정조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갑수, 알고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 빗물만 먹고 있다.
정조가 다가와 갑수 옆에 선다. 갑수를 따라 같이 입을 쩍 벌리는 정조..
갑수가 정조를 보며 씨익 웃는다. 정조도 약간.. 약간 미소를 머금는다.
어린정조 또 맞은 것이냐?
어린갑수 넘어진 것입니다.
을수
- 56 -
어린정조 ...노미야, 나도 다 안다... 소내시 훈육관들... 내가 혼내줄까?
어린갑수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비가 그친다. 달이 구름 사이로 나온다.
어린정조 어? 비 그쳤다.
어린갑수 (하늘을 본다.) 그러네요.
어린정조 (역시 하늘을 보며...) 노미, 니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었느냐?
어린갑수 ...모르옵니다. 그냥 사람들이.. 노미라... 불렀습니다.
어린정조 네 아버지도... 저기 계시느냐?
어린갑수 ........예. 저하......
하늘의 별이 반짝 빛난다. 갑수의 구덩이 그 별처럼...
어린정조 (갑수를 본다.) .....넌... 왜 내시가 됐느냐?
어린갑수 (순간 어둠.. 다시 밝게) 누군가를... (그 얼굴 가득) 살리고 싶었거든요.
86. 현재, 경모궁 / 낮.
정조가 그때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정조 금위대장.
홍국영 네, 전하.
정조 상책을... 출궁시킨다.
홍국영 !!
갑수 !!!
정조 상책에 대한 어떤 추포령도 허락하지 않는다.
홍국영 전하! 하오나...
정조 풀어주어라.
금위영들이 갑수의 포승을 푼다. 갑수 일어선다...
정조가.. 갑수의 앞으로 다가선다.
금위영들이 물러나지만, 검잡이에 손을 대고 날카롭게 긴장하고 있다.
정조 ............ ......갑수야
갑수 ...!!!!!
정조를 보는 갑수,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이다
그런 갑수를 물끄러미 보는 정조.
피에 젖은 갑수의 황망한 눈망울에... 물이 차오른다.
을수
- 57 -
갑수 ... ........ ............... 전하....
정조 가서 살아라. 죽지 말고... 살아라.
갑수 ......
정조 (휙 바람을 일으키듯 바깥으로 나가며) 상책에게 말을 내주어라!
홍국영이 못마땅한 듯 갑수를 보다가 금위영들에게 고갯짓을 하면.. 금위영들이 양쪽
에서 갑수를 끼듯이 데리고 사당을 나간다. 비틀거리는 갑수의 얼굴과 발걸음.
87. 엽초전 창고 / 늦은 오후.
엽초전 창고... 강용휘의 사랑채에 있던 자객단들이 갓에 도포 차림 그대로 모두 모
여 있다. 계단에서 최세복이 황급히 내려온다.
<자막> 유시 반각, 06:00 pm
최세복 광 막주! 광 막주!
자객단들 너머... 발을 걷으며 광백이 모습을 드러낸다.
최세복 아직도 안 왔소?
광백 (뚫어져라 최세복 보다가 요강에 침 찍) 셀레바리 티긴..
최세복 (속 터지는) 내가 지금 안 보채게 생겼나!?
88. 연화문 밖 / 늦은 오후.
궁문 안으로 들어서는, 소달구지를 끄는 종복... 깊은 삿갓을 쓰고 있다.
궁궐을 지키는 금군에게 패를 내보이는 사내.. 을수다!
을수 경강 염색방에서 왔습니다.
금군이 달구지 위의 포장을 벗긴다. 염료들과 염색천들이 쌓여있다.
89. 연화문 안 / 늦은 오후.
경희궁 흥화문.. 금위영이 경계하는 가운데 말을 끌고 갑수가 온다.
어설프게 인사하는 갑수... 그 상처들을 홍국영이 본다. 홍국영, 서찰을 건네준다.
을수
- 58 -
홍국영 전하의 교지다. 승정원이 인가했으니... 너는 정식으로 자유인이다.
갑수 (받아들고) ...
홍국영 (보다가) 이제 나가면 다시는... 궁으로 돌아오지 마. 그땐...
갑수 (지나쳐 가버리고) ...
연화문을 향해 걸어가는 갑수.. 달구지를 끌고 들어서는 을수... 서로가 교차한다.
90. 연화문 밖 / 늦은 오후.
갑수가 말을 잡고 연화문 앞에 나와 선다. 이제껏 자라온 궁궐을 돌아본다.
갑수, 바닥에 엎드려 임금이 있는 존현각을 향해 절을 한다.
사람들이 그런 갑수를 빙 돌아 비켜 지나간다.
91. 세답방 작업실 / 낮.
멍하니 창밖을 보며 앉아있는 월혜.
문이 열리고 세답방 상궁과 나인들이 정조의 침복과 버선을 들고 들어온다.
월혜가 황급히 일어나 허리 숙인다.
세답방상궁 너는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라 연락이 안 되느냐?
월혜 큰방마마님이 급히 찾으신 일이 있으셔서...
세답방상궁 너는 이 궁의 어른 중에... 제조상궁만 보이더냐?
월혜 아닙니다...
세답방상궁 (나인들이 침복을 내려놓으면) 전하의 침복이시다. 침방에서 수선하면서 안
감을 비단으로 덧댔다. 보이지 않는 안감의 비단도 허물이니 떼어내라는
하명도 모르고... 일을 어떻게 하는 게야?
월혜 저희가 손보겠습니다.
세답방상궁 다리고 살펴서 존현각으로 뫼시어라. 너, 혼자, 하여라.
나인들 (쌤통이다는 표정으로 배시시) ...
월혜 알겠습니다.
세답방상궁, 못마땅한 듯 월혜보다 나인들과 함께 나간다.
월혜가 침복과 버선을 바닥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옷을 들추고.. 침복의 안감을 만져보는 월혜... 손을 멈추고 어떤 생각에 젖는다.
오후의 햇살이 그런 월혜와 침복을 비춘다.
92. 세답방 앞 냇가 / 일몰 직전.
을수
- 59 -
침복을 든 월혜가 담장길을 내려온다. 다리를 건너려다..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놀란 눈으로 보는 월혜... 삿갓의 을수다!!!
월혜 미쳤어... 어떻게 여길...?
을수 (월혜 앞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어...
월혜 그래도 여길 들어오면... (황급히 주위 보며) 빨리 나가요. 들키면 어떻게 되
는지 몰라요?
을수 나.. 멀리 가.
월혜 어딜요?
을수 있어... 멀리.
을수의 눈빛이 멀고 아득하다. 월혜가 그 눈빛을 읽는다.
93. 세답방 창고 / 일몰 직전.
해질녘 노란 빛이 겨우 닿는 어두운 창고 구석.. 웅크린 두 그림자가 보인다.
월혜 다시... 안 와요?
을수 아마도...
월혜 ......... (그제서야 을수를 본다.)
을수 ......
어두운 을수의 얼굴이 월혜를 본다. 조용히... 월혜를 안는다.
월혜 나... 데려가 줄래요?
을수 !
월혜 그래줄 수 있어요? 나두 같이...
을수 ......
월혜 (을수를 안은 손을 떼며) 뭐든 할게요! 데려만 가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
요! 빨래두 잘하구! 바느질도 곧잘 해요. 요리는 젬병이지만 그래두 배우면
잘할 수 있구요. 밭일 같은 것두 잘할게요. 근데 알죠? 정말 위험한 일이란
거... 나 땜에 우리 둘 다 어쩌면...
을수 괜찮아.
월혜 ........
을수 가자... 멀리...
월혜 ....... (젖은 눈으로 끄덕인다.)
을수 지금 같이 가... 나랑...
을수가 간절한 눈빛으로 월혜를 본다. 월혜, 그 눈빛이 뭔지 읽는다.
을수
- 60 -
월혜 나... 할 일이 하나 있어요. 연화문에서 기다리세요.
상기된 얼굴로 을수를 보던 월혜, 살포시 입을 맞춘다.
월혜의 얼굴에 미소가 핀다.
을수의 얼굴에 새로운 희망의 미소가... 살짝 스친다.
94. 존현각 침전 / 일몰 직전.
소반을 앞에 두고 책을 보는 정조 앞에 고수애가 앉아 있다.
정조 오늘 저녁은 동덕회 모임이 있소. 중관을 통해 문안 인사를 하겠소.
고수애 전하. 오늘 저녁문안은 꼭 오셔야 한다고...
정조 제조상궁.
고수애 네, 전하.
정조 그대는 이 궁 안에서.. 도대체 누굴 섬기고 있소?
고수애 (정조 빤히 보며) 당연히... 전하시옵니다.
정조 (책으로 손길 가며) 나가보시오.
고수애가 절하고, 뒷걸음질로 나간다. 책을 탁 덮는 정조.
정조 (뭔가 신경질적으로) 상책! 주례를 가져오라!
아무도 없는 방 안... 빈 방을 둘러보다 책장으로 시선을 돌리는 정조.
책장의 보조의자를 바라보던 정조가 망연히 긴 한숨을 내쉰다.
<플래시백> 겨울밤. 보조의자에 올라가 새로 온 책들을 진열하고 있는 갑수.
세손복 차림의 세손 정조가 화롯불 앞에서 책을 읽고 있다.
지밀나인들 세 명이 눈 맞은 꼴로 책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그 중 하나가 발군의 미모다.
갑수 아래 책을 풀고, 일손을 돕는 지밀나인들.
정조가 책을 보다말고 힐끔힐끔 그 지밀나인을 본다.
지밀나인도 정조를 힐긋힐긋 본다.
둘 사이 묘한 어색함과 묘한 긴장이 흐른다.
책을 정리하다 둘 사이를 눈치 채고 빙긋이 혼자 웃음 짓는 갑수.
시간이 흘렀다. 지밀나인들이 나가고 없다.
갑수가 화롯불에 탄을 더하고 차를 올린다.
갑수 지밀방에 있는 수련이라는 아입니다.
을수
- 61 -
정조 (움찔) 응? .............. 음...........
갑수 일도 성실히 하거니와 품성이 바르고 정갈해 내명부에서도 칭찬이 많은 아
이옵니다.
정조 (괜히 책 페이지 이리저리 넘기며) 그런.. 아이도 있구나.
갑수 들라 하리까?
정조 (완전 경색) !!
갑수 종사의 대계는 멈춤이 없어야하지 않겠사옵니까.
정조 (얼굴 붉어지고) 내가... 좋아하는.. 그런... 유형이 아니다.
갑수 (눙치듯) 전하의 유형이옵니다.
정조 아니래두.
갑수 맞습니다.
정조 (책을 탁 덮고) 상책!
갑수 네.
정조 (우물우물) 빈궁전이... 알면... 안 되는 것이지... 않은가?
갑수 허허허...
정조 왜 웃나?
갑수 어허허허허....
정조 웃지 마.
갑수 죄송하옵니다.... (참으려는 웃음이 터지고) 으흑흑.....
정조 거 참...
갑수 으하하하하하!
서고 앞 보조의자를 바라보는 정조... 멍한 얼굴이다.
월혜(E) 전하. 새로 수선하고 세답한 침복이옵니다.
정조 들이거라.
월혜가 들어와 곱게 절하고, 옷걸이에 침복을 건다.
무언가 떨어지지 않는 발길.... 어떤 긴장감이 잔뜩 흐르는데.....
정조 일이 더 남았느냐?
월혜 (황급히 조아리며) 아니옵니다.
정조에게 깊은 절... 월혜가 밖으로 나간다.
침소 들문을 통해 일순 돌개바람이 휘익.
문살 소리에 정조가 돌아본다. 옷걸이에 걸어 둔 침복이 흔들린다.
정조 얼굴이 굳는다. 침복을 보는 정조의 눈길과 그 침복...
95. 연화문 안 / 일몰.
을수
- 62 -
소달구지를 세워두고... 을수가 기다리고 있다.
멀리 월혜가 황급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을수, 삿갓 아래로 미소가 어린다.
월혜가 다가오려는데... 금위영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월혜를 잡는다.
을수, 얼어붙는다.
금위영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정조가 굳은 얼굴로 월혜 앞으로 저벅저벅 온다.
정조의 굳은 얼굴과 을수의 먹먹한 표정이 교차한다.
잡힌 팔을 빼내려 하며 을수를 돌아보는 월혜.
금위영들이 저항하는 월혜를 더 강압적으로 잡아 무릎을 꿇린다.
주변의 사람들과 궁궐 안의 모든 공기가 정지된 듯 멈춘 상태에서 모두 조아린다.
을수의 주먹이... 부서질 듯 팽팽해진다.
96. 왕대비전 / 일몰.
정순왕후가 상체를 벗고 금침에 드러누워 마사지를 받고 있다.
기름을 바르고 마사지를 하는 시녀들. 고수애가 그 앞에 앉아있다.
정순왕후 그래?
고수애 (조아리고) 네...
정순왕후, 일어나 앉으면... 시녀들이 비단 천으로 상체를 말듯이 가려준다.
시녀 하나가 장죽을 내밀면 입에 무는 정순왕후.
정순왕후 (길게 연기 뽑고) 오랜만에 존현각 구경이나 해볼까?
97. 존현각 앞뜰 / 일몰 후 박명.
늦은 저녁의 해가 존현각 주위를 때리고 있다.
차비문의 호위가 엄청나게 긴장한 얼굴이다.
차비문호위 1 (목청이 터져라) 왕대비마마!!!!! 행차십니다!!!!!!
차비문 안으로 들어서는 정순왕후. 그 뒤로...
고수애와 김상궁... 상궁 십여 명.. 내관과 호위, 나인 수십 명이 따르는 대행차다.
<자막> 술시 일각, 07:15 pm
존현각 앞뜰을 가르는 정순왕후의 행렬.
지게문호위 1 (역시 목청이 터져라) 왕대비마마!!!!!! 행차십니다!!!!!!!
을수
- 63 -
98. 존현각 침전 / 저녁.
정조와 정순왕후.. 둘 만이다.
정순왕후가 상석에 앉아있고 정조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다.
정조의 얼굴... 읽어낼 수가 없다. 파리한 듯 차갑고... 표정이 없다.
정순왕후 어쩌시렵니까...?
정조 (미동 없는 긴 침묵) ............
정순왕후 증좌도 있고 증인도 있어요. 천지개벽할 일이라 먼저 상의를 하러 왔어요.
정조 ......
정순왕후 말을 안 하시겠다...?
정조의 묵묵한 얼굴... 미동 없는 자세...
<인터컷> 뒤주... 새우처럼 죽어있는 아버지 사도세자.
창고.... 기둥에 묶여있는 혜경궁의 처참한 모습.
정순왕후 왜들 이리 나를 미워할까요? 주상... 내가... 무슨 죄가 있나요?
정조의 시선이 정순왕후를 넘어간다.
옷걸이에 걸어둔 침복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침복!!!
정조 뜻대로... 하소서.
정순왕후 !!!!!
정조 사사로이는 생모이나 대궐에는 정도가 있고... 나라에는 국법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국법을 수호하는... 이 나라의 임금입니다.
정순왕후 (이 새끼가 지금...) ..........!
정조 어느 저울 어느 균형 어느 사정을 논하더라도 사사로이 기울지 않아야 하
는 것이 저의 자리이옵니다.
정순왕후 나는 지금.. 혜경궁.. 주상의 어미를.. 그대의 아비에게로.. 보낼 수도 있어요.
정조 (침묵) ......... (그리고 단호한) 뜻대로 하소서.
정순왕후, 뜻하지 않게 떨리는 손... 그 입술... 그 눈빛...
정조 도승지는 들라!
홍국영 (들어와 부복) 하명하시옵소서!
정조 동덕회 모임이 언젠가?
홍국영 벌써 일각이 지난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정조, 가라는 듯, 정순왕후 빤히 보면...
을수
- 64 -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순왕후... 분노로 이글거린다.
정순왕후 주상... 지금 주상의 선택...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정조 도승지는 왕대비마마의 길을 트라.
홍국영이 잽싸게 일어나 존현각 문을 연다.
정순왕후, 뚫어지게 정조 노려보다 휙휙 나간다.
정조, 무릎 꿇은 그 자세.. 시선도 몸짓도 꿈쩍 않는다.
99. 한성 외곽 성문 / 저녁.
북소리와 함께 성문을 향하던 백성들이 바닥에 부복하고..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깃발을 든 선두마 뒤로.. 백마를 탄 정조가 달려 나온다. 갓을 쓰고 평복 차림이다.
홍국영과 금위영 무관들이 말허리에 등을 달고 줄지어 달려 나온다.
정조를 비롯한 이십여 기의 말들이 성문을 빠져 달려간다.
<자막> 술시 삼각, 07:45 pm
100. 왕대비전 창고 / 저녁.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정순왕후와 고상궁 등이 들어온다.
혜경궁과 복빙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 들어 바라본다.
정순왕후 (곧장 혜경궁 앞에 서서) 당신을... 내 뜻대로 하랍니다.
혜경궁 .......
정순왕후 어미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아들이 지금 어딜 가는 줄 아세요? 허... 술
처먹으러 간답니다.
혜경궁 니 세상이... 올 거 같으냐?
정순왕후 뭐라...?
혜경궁 (관조의 헛웃음 길게) 너희들은 내 아들을 모른다.
정순왕후 (분기만) !!!
혜경궁 (넋이 나간 듯) 아하하하하!
갑자기 터지는 혜경궁의 발작적인 웃음에 다들 움찔.
정순왕후 이것들이... 쌍으로... 미쳤구나...
혜경궁 아하하하하!
정순왕후 (빤히 혜경궁 노려보며) 고 상궁...
고수애 하명하시옵소서.
정순왕후 구선복 장군은?
을수
- 65 -
고수애 경강에서 대기중이옵니다.
정순왕후 날도 저무는데... 결정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고수애 ......
혜경궁의 웃음소리가 멈춘다.
정순왕후 엎어라.
싸늘히 돌아서 나가는 정순왕후.
복빙이 슬픈 눈으로 혜경궁을 본다. 웃음 끝에 맺히는 혜경궁의 눈물.
101. 동덕회 정자 / 밤.
달이 떴다. 홍등이 단아한 이층 누각의 정자.
카메라 이층으로 오르면... 5인분의 방석과 개인소반들만 놓여있는, 빈 정자.
<자막> 술시 반각, 08:00 pm
102. 강변 / 밤.
미친 듯이 말을 달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
정조와 홍국영.. 금위영 이십 기의 말들. 정조가 가장 빨리 달리고 있다.
정조, 엄청난 기세로 말을 몬다. 홍국영이 옆으로 달려온다.
정조(E) (단호한 눈빛) 죽을 각오로 달려라! 단 일 각도 지체되어선 안 된다!
박차의 모래먼지... 말을 달리는 정조의 강렬하고 절실한 눈매.
정조(E) 금위대장... 어머니의 사활이... 내 마지막 기회가... 저기... 있다.
정조의 말이 더 앞서 나간다. 홍국영, 이를 악물고 따라 달려간다.
103. 엽초전 / 밤.
최세복과 자객조들이 초조한 표정들로 대기하고 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을수. 최세복, 멈칫하다가 긴 한숨.
최세복 이제 나타나면 어떡하는가?
을수
- 66 -
을수 준비... 됐소.
104. 상선 안국래의 집 마당 / 밤.
아무도 없는 집 마당. 어둡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검은 그림자.. 갑수다.
우물 옆을 지나는 갑수가 보인다. 누군가 지켜보는 시선으로 보인다.
105. 상선 안국래의 방 / 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갑수가 들어선다.
긴 한숨을 내쉬는 갑수... 이윽고 돈궤로 다가간다.
돈궤로 다가가는 길... 핏자국들이 검붉게 흩어져 있다.
돈궤를 밟고 올라서는 갑수... 황망히 뒤를 돌아본다.
<플래시백> 어젯밤이다. 호롱불로 집안이 밝다.
뒤를 돌아보는 갑수... 놀란 얼굴이다.
상선 안국래가 빤히 갑수를 노려보고 있다.
안국래 멕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줬더니... 주인을 물기로 작정했다...? 왤까? 왜 너같
은 놈들은 인간이 되지 못할까?
갑수 .......
안국래, 스윽! 품에서 칼을 꺼낸다.
위협적이라기 보단 모욕적인 행동으로 내려오라는 손짓을 한다.
갑수가 멍하니 내려선다.
안국래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내 사업을 니가 다 이어받아도 좋을 거라 생각
했는데... (도리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갑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구하십시오.
안국래 (피식) 미친... 새끼....
안국래, 느닷없이 갑수의 배를 찔러 온다. 두 사람 그대로 꼼짝없다.
갑수... 칼 든 안국래의 손목을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다.
갑수의 손아귀 힘이 안국래의 칼 든 손을 천천히 비틀어 안국래의 심
장으로 칼이 향하게 한다.
안국래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는 갑수의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표정.
안국래 날.. 죽이겠다는 거냐...?
갑수 당신은... 너무 많이 죽였어...
을수
- 67 -
안국래 ..........
갑수 우리들을....
갑수의 얼굴 위로.... 안국래의 심장을 파고드는 칼날과 그 소리들과
그 근육의 움직임들...
안국래... 동공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며.. 충격에 휩싸이는.
갑수가 멍하니 빈 방을 바라본다.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는 갑수.
천장의 틈을 밀어내고 손을 넣어 더듬는 갑수... 천천히 꺼내면 책이 하나 나온다.
순간, 그 목을 향해 소리 없이 겨눠 들어오는 검 날.
움찔하는 가운데 동작을 멈추는 갑수. 검 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
갑수 주변으로 어느새 나타난 네 명의 검객이 둘러싸고 있다.
순간,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객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하는 갑수.
주춤하는 사이, 양손 바닥으로 검 날을 잡아 돌면서 칼을 뿌리친다.
회전하며 날아가 맞은편 검객에게 꽂히는 검... 난투극이 벌어진다.
짐승 같은 야성이 드러나는 갑수... 검객을 하나씩 쓰러트린다.
또 다시 나타난 여러 검객들.. 미친 듯이 싸워 나가는 갑수...
창문으로 튀어 들어온 검객에게 맞아 그대로 나동그라지는 갑수, 책을 떨어트린다.
책을 향해 기다시피 달려가는 갑수...
동시에 달려든 검객들이 뒷무릎을 후려치고, 바닥에 널 부러지는 갑수.
이어지는 가격들. 퍼퍼퍽.. 바닥에 못이 박히듯 옴짝달싹할 수 없게 갑수를 짓누르는
검객들. 피가 흐르는 얼굴로 시선을 드는 갑수. 서책이 보인다.
그 옆으로 들어서는... 누군가의 발.
광백(E) 길티. 와 안 오나 했어.
광백이 문가에서 사과를 우적우적 먹으며 들어선다.
틱틱! 광백이 호롱에 부싯돌로 불을 밝히고..
광백 칠십칠노미... 잘 살아 있었구만기래.
갑수 ......
광백 (바닥 핏자국 보며) 네래 한 짓이가?
갑수 ......
광백 쯔쯔.. 상선 영감, 지가 키운 개한테 물려서 갓꾸만기래.
갑수 ......
광백 (갑수가 들여다보던 천장 보며) 뭐 찾고 있었네? 패물이라도 잔뜩 있간?
(바닥에 떨어진 책 줍는) 이거이 머이가? 부기 장부 아이간? 이따우 걸루
멀 어카갓따는 거가? (한자로 된 페이지 넘겨본다.)
갑수 ......
광백 너 이거 개지구.. 왕한테 바칠라 길던 거가?
갑수 ......
을수
- 68 -
광백 (쪼그리고 앉아 장부 넘겨본다.) 햐! 노론 아새끼들이래 이거 있으믄 다 죽
갔구나야.
갑수 당신이... 보냈나? 그 붉은 밀지...
광백 (지팡이로 갑수 머리 빡) 그래! 종간나... 내가 보냈다.
갑수 (충격에 머리를 푹 숙인) !!!
광백 말도 더럽게 안 들어 처먹고서리... 여기 안 와봤음 어쩔뻔했니? 종간나..
궁에서 반들반들 좋은 것만 처먹더니 대가리도 반들반들해게지구... 애들한
테 뭔 일을 못 시키갔어.
갑수 누가 있는 거야..? 나 말고 또 누가...
광백 못 봤니? 세답방 에미나이?
갑수 !!!!
<플래시백> 존현각에서... 갑수와 스치는 월혜.
월혜의 손이 번개같이 갑수의 허리께 사이로 들어갔다 나온다.
광백 고년이 이백이십삼노미... 아니.. 이백사십삼... 에이 모르갔다.
<인서트> 월혜의 방... 붉은 종이 위에 今日 殺主 쓴 월혜...
뒤돌아선 월혜가 옷을 벗는데... 어깨의 < 二二三 > 낙인이 선명하다.
갑수 (부들부들) !!
광백 너만 어떻게 믿갔어? (갑수 가리키며) 이 보라! 길티않아?
갑수 을수는? 을수는.. 어떻게 됐어?
광백 을수가 뭐이가?
갑수 이백이십노미...
광백 (부하들과 갑수 번갈아보다 피식 웃는) 아, 이 종간나... (한장 북 찢어 호롱
불로 가져간다.) 너 없어도... 오늘 왕 모가지 딸 놈 많디 않간?
또, 한장 북 찢는데, 장부를 보며 일그러지는 얼굴... 일순 번뜩이는 갑수의 눈빛.
괴물처럼 다시 일어나, 광백의 부하들을 집어던진다.
날아가 장독대로 떨어지는 놈.. 갑수를 향하던 단도에 자신이 찔리는 놈...
갑수의 집요한 완력에 부하들이 밀리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칼을 뺏어든 갑수가 광백
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고... 부하들이 동시에 갑수를 공격하는데...
가까스로 막고 밀치고 악다구니처럼 광백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갑수.
광백 (코를 훌쩍거리며) 아 종간나... 독해빠지갔구서리... (바닥에 가래를 뱉는다.)
그 순간, 뒤 쪽 부하를 공격하며 등을 보이던 갑수가 다시 돌아서는가 싶더니, 그대
로 칼을 뻗어 장부를 쥔 광백의 손목을 잘라버린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장부...
부하의 발길질이 갑수의 가슴에 향하고. 나자빠지며, 미끄러지는 갑수..
바닥의 서책을 잡고 튕기듯이 일어나 담 쪽을 향해 있는 창문으로 몸을 던진다.
을수
- 69 -
창문이 부서지며, 튕겨 나와.. 다시 몸이 담에 부딪히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엉거주춤 일어나 강둑으로 달려가는 갑수.. 부하들이 번개처럼 따라 나간다.
106. 도성 여기저기 몽타주 / 밤.
쿵쿵거리는 역동적인 사운드와 함께... 갑수가 미친 듯이 달린다.
그 뒤로... 지붕을 넘고 담을 타고 뒤따라오는 광백 부하들의 질주.
잡힐 듯 말 듯... 엉기기도 하고... 가까스로 흉기를 피하기도 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갑수. 하나를 따돌리고.. 둘을 따돌리고...
멈추지 않고 달리는 갑수...
107. 경강 군영 / 밤.
경강 근처의 야전 막사촌. 횃불을 밝히고 일 천 여명의 어영군이 대기 중에 있다.
<자막> 술시 오각, 08:15 pm
군영 중앙에선 구선복과 장수들.
그 뒤로 일단의 기병과 어영청 정예부대가 대오를 이루고 있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부하 장수, 중군이 다가온다.
구선복은 말머리에 구부정하게 몸을 숙이고 장고에 들어간 표정이다.
중군 왕대비전의 하명이 떨어졌습니다....
구선복, 멀뚱히 바닥만 쳐다보다 허리를 편다. 길게 한숨 내뱉던 구선복... 이윽고...
구선복 (한숨처럼) 니미..... (출발하며) 가자.
구선복 말에 오르면... 중군이 말에 올라 본영에 소리친다.
“복성!”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며 북소리와 함께 군령이 전달된다.
횃불의 행렬이 움직이려 할 즈음...
저 멀리 등불을 밝힌 일단의 말들이 달려온다. 구선복이 멈춰 선다.
장수들이 칼을 빼어들고 구선복 옆으로 막아서고.
기병과 정예부대가 그 뒤로 결계망을 펼친다.
어영청 대부대가 멈춰선다.. 이내 바다가 갈라지듯 갈라지고... 그 사이로,....
일단의 기마군이 나타난다... 홍국영과 금위영이다. 천천히 구선복 앞으로 온다.
사방에서 긴장감이 흐른다. 구선복 앞으로 다가와 말에서 내리는 홍국영.
구선복 (멀뚱히) 뭐냐?
을수
- 70 -
홍국영과 금위영들..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고 선다.
홍국영 어영대장 구선복은 어명을 받들라!
갑자기 어리둥절해지는 주위... 구선복은 홍국영을 미친놈 보듯 하는데...
정조가 천천히 따각따각 말을 타고 들어선다.
구선복... 황망... 어찌할까 고민하는 표정.
어영청의 실질적인 대장인 중군(中軍)이 말머리를 틀어 앞으로 나선다.
말을 세우는 정조...
중군 (굳은) 전하, 어인 행차오십니까?
정조 (친구를 만난 듯이) 어디 가는 길이냐?
중군 ........
정조 구장군을 만나러 왔다.
중군 (단호한) ....돌아가시지요.
정조 길을 열어라.
중군 전하... 칼만 쓰는 미천한 신을.... 가선대부에 봉하시면서 내린 말씀을 기억
합니다.
정조 뭐라 했더냐....
중군 (마음이 아프다) ....길을 여는 장수는 없다하셨습니다.
정조 내가 누구냐?
중군 주상전하시지요.
정조 (눈이 시리다) 열어라.....
중군, 그리 못하겠다는 듯 천천히 칼을 뽑는데.....
단숨에 칼을 빼, 중군의 목을 베는 정조. 중군의 목에서 피가 터진다...
중군의 눈이 정조를 보고 있다. 젖어 오는 그 눈망울에... 원망을 읽을 수 없다.
...구선복 앞으로 터덕 터덕 나아가는 정조의 말.
구선복 위압감을 느끼고, 칼을 뽑으며 예의 그..... 오른손을 든다.
장수도, 군관도, 군졸도 칼을 들고 걸어오는 정조 앞에, 한발짝도 나서지 못한다.
당황해 뒤를 돌아보는 구선복.
정조 구 장군... 그대를 살려주겠다.
구선복 (실실거리다 대소한다) 으으... 하하하하하!
정조 아직... 늦지 않았다.
구선복 (웃음 뚝) 전하... 간덩이가, 크십니다.
정조 왕대비전과의 밀통을.. 이 역모의 흉계를... 용서하겠다.
구선복 !!!
휘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구선복 앞에 떨어져 꽂히는 정조의 검...
을수
- 71 -
구선복과 장군들... 긴장한다.
정조 임금의 보검이다.
구선복 ....
구선복,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정조를 본다.
정조 나의 검이다.
구선복 ....
정조 그 검에 흐르는 피를 보아라.
검 날을 타고 한줄기 붉을 선혈이 흘러내린다.
정조 이것이.... 너희가 바라는 세상이냐.
구선복 .......
정조 어영대장은 그 검으로 지금 날 벨 텐가?
구선복 .......
정조 아니면... 나의 검이 될 텐가?
구선복 ........
정물같이 굳어 있는 임금과 장수,..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108. 엽초전 창고 앞 / 밤.
불 꺼진 엽초전 창고 문이 끼익 열리면... 최세복이 나온다
그 뒤로...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자객단들.
마지막으로 을수가 나온다. 흰 무명천 검을 쥔 을수의 싸늘한 표정.
<자막> 해시 이각, 09:30 pm
109. 종루 + 도성여기저기 / 밤.
인경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28번의 종소리... 순검들이 출발하고...
가게 문을 닫고... 사람들이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는 모습들...
곧 통행금지 시간이 된다... 도성문이 육중하게 닫히기 시작한다.
<자막> 인경. 해시 반각, 10:00 pm
110. 존현각 침투 몽타주 / 밤.
을수
- 72 -
// 존현각 앞뜰... 차비문 위로 카메라 오르면... 존현각 앞뜰이 나타난다.
텅텅 비어있는 존현각 앞뜰.
// 존현각 안... 곤룡포를 입은 정조가 소반위에 책을 펼쳐놓고 좌정하고 앉아 보고
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책에만 눈길을 주고 있는 정조... 흔들림이 없다.
// 궁궐 내 지붕... 건물 지붕 위로 오르는 미이라 같은 인영.. 자객 궁수조들이다.
// 궁궐 내 담장 길... 궁궐 담장을 따라.. 지칠 대로 지친 갑수가 뛰어오고 있다.
그의 시선에... 지붕을 타고 이동하는 자객들이 멀리 보인다. 다시 뛰는 갑수.
// 궁궐 내 지붕... 지붕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자객들.. 활을 메고 있다.
조장의 지휘에 따라 산개하며 방어태세를 갖추는 궁수조들.
그들이 내려다보는 존현각 주변이 텅텅 비어있다.
// 차비문... 차비문이 천천히 열린다. 을수가 문을 열고 서 있다.
검수조들이 을수를 지나쳐 빠르게 존현각 앞뜰로 대형을 이루며 나아간다.
을수가 장검을 싼 흰 무명천을 와락 벗긴다. 을수의 검이 번뜩인다.
// 존현각 안... 호롱불의 불빛이 갑자기 일렁인다.
흔들리는 광원을 따라 석상처럼 앉아있는 정조의 얼굴이 흔들린다.
// 존현각 근처 지붕...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궁수조 누군가 하늘을 올려다본
다. 달을 가리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다.
111. 존현각 앞뜰 / 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둠속... 존현각 뒷편 지붕에.. 정조의 금위영 조총부대가 몸을 숨기고 있다.
그들의 조총이 지향하고 있는 존현각 마당의 검수조가 보인다.
은신처의 금위영들... 소낙비가 거세지자 당황한다.
<자막> 자시 정각, 11:00 pm
팔과 몸으로 조총을 가려보지만 거센 비가 그들을 덮친다.
금위영 하나가 조총을 가리려.. 전립을 벗다가 떨어뜨린다.
지붕 아래로 굴러가기 시작하는 전립...
금위영들..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몸을 낮추고...
대오를 갖추고 존현각으로 나아가던 을수와 검수조들 발걸음을 멈춘다.
존현각 앞뜰로 떨어진 전립이....... 빙그르르 돌다 멈춰 선다.
을수
- 73 -
을수의 시선이.. 그 전립을 보고... 지붕을 본다.
처처척! 조총을 겨누며 지붕 위로 나타나는 금위영들.
그 소리와 함께 천둥번개... 폭포수가 쏟아진다.
112. 존현각 침전 / 밤.
밖에서 들려오는.. “투항하라!”
정조... 가만히 고개를 든다. 장지문을 바라본다. 뒷벽에 걸린 활과 검이 번뜩인다.
113. 궁내 어느 전각 / 밤.
다시 천둥 번개가 치고.. 내관, 의녀, 나인들 수십 여 명이 대기하고 있다.
치료 도구와 무명천, 약통, 청소도구 등 장비들이 보인다.
내관 1 (밖을 살피다 돌아서.. 딱딱하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상황이 끝나는 대로...
전하의 안전부터 확인한 다음 부상자들을 살핀다...
겁에 질려있던 모두들 끄덕인다.
새 곤룡포를 고이 접어 앞에 둔... 월혜가 보인다....
114. 왕대비전 차비문 / 밤
왕대비전 내관들을 제압하는 금위영들의 억센 손길.
홍국영이 내관들을 노려보며 위협적이다.
115. 왕대비전 창고 / 밤
문이 열리고... 호위내관들이 쓰러진다. 안으로 들어서는 홍국영과 금위영들...
혜경궁과 복빙이 놀라 본다.
116. 존현각 주변 담장 / 밤.
담장 아래로 툭 떨어지는 인영.. 갑수다.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저기 존현각 지붕이 보인다. 지친 듯 비틀거리며 내달리기 시작하는 갑수.
을수
- 74 -
117. 존현각 전투 / 밤.
조총을 겨누고 있는 금위영들. 황망히 보는 검수조들과 을수...
금위영군관 어전이다! 흉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검수조들이 을수를 본다.
을수가 빤히 금위영들을 보다가.. 존현각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당황한 금위영 군관이 마상총을 격발하지만.. 비에 젖어 격발되지 않는다.
금위영군관 격발!
일제히 격발하면... 두어 개의 총탄이 나가지만... 대부분 불발이다.
심지는 타지만 화약이 젖어 있다.
을수와 검수조가.. 곧장 일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금위영군관 발검! 발검하라!
누군가 밧줄을 잡아당기는 손. 돌아가는 도르레..
순간, 존현각 다섯 개의 문이 촤르르 열리고...
존현각 안을 지키는 금위영 조장을 포함한 10명의 금위영 군관이 서 있다.
일제히 마상총을 발사하고.. 검수조 여러 명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위에서는.. 조총을 버리고 칼을 빼든 금위영들이 지붕을 타고 아래로 돌격한다.
존현각 근처 지붕 위, 자객 궁수조의 화살이 날아온다,.
지붕을 내려오는 금위영과 존현각 안에서 화약을 장전하던 군관들이 나동그라진다.
을수가 날아들어 금위영 하나를 베고, 검수조와 금위영의 난전이 시작된다.
화약을 재장전한 금위영 군관들이 검수조를 겨누지만, 난전이라 발사할 수가 없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조장 옆 군관을 관통한다.
금위영 조장이 존현각 밖 지붕의 궁수조를 향해 마상총을 겨냥하고..
궁수조 하나는 금위영 조장을 향해 화살을 발사한다.
총을 발사하자마자 화살을 맞고 나동그라지는 금위영 조장...
마상총을 버리고, 발검하고 존현각을 나와 마당으로 나서는 일부의 금위영 군관들.
쓰러지는 금위영들. 비명과 함성... 숨소리... 천둥번개... 격렬한 난투전들...
을수가 무섭게 그 가운데를 휘젓고, 지붕 위 궁수조의 화살이 쏟아진다..
금위영들이 불리해지는데... 반쯤 닫혔던 존현각 지게문을 뚫고..
을수
- 75 -
애깃살 하나가 총알같이 튀어나온다.
빗속을 뚫고 지붕으로 날아가 궁수조 자객을 맞추는 애깃살.
지붕 위 궁수조들이 놀라서 보면...
존현각 뒤편 서고 사이에서... 정조가 우뚝 활을 겨누고 편전을 쏜다.
다시 애깃살을 메기는 정조..
조준하는 그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휘익 소리와 함께 다시 시위를 떠나는 화살.
또 하나 날아가면.. 또 하나 쓰러지고... 백발백중... 정조의 편전이 날아간다.
정조에게도 위협적으로 화살이 날아오지만..
서고 사이를 움직이며... 눈 하나 꿈쩍 않고.. 재고, 겨누고, 쏜다.
여덟명의 궁수조가 정조의 애깃살에 전멸한다,
화살 하나를 다시 매겨 존현각 내부를 향해 발사하는 정조.
화살이 날아가 팽팽한 밧줄을 끊자, 도르레가 돌아가며 쇳덩이 추가 쿵 떨어지고..
열렸던 존혁각 문들이 타다닥 다시 닫힌다.
을수... 그 모습을 보고 존현각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금위영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을수를 막아낸다. 을수의 검결이 펼쳐지면... 하나하나 쓰러지는 금위영..
금위영의 복부를 관통한 검을 뽑아든 을수가.. 존현각을 향해 달려간다.
118. 존현각 복도 + 정원 / 밤.
문이 부서지며, 을수가 뛰어들고..
검을 들고 시립해 있던 금위영 조장 4명이 복도 사이로 달려든다.
정갈하지만, 광포한 을수의 검. 현란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금위영 군관들.
정조의 마지막 애깃살이 을수를 겨누지만..
금위영들이 을수를 안듯이 둘러치고 있어 힘들다.
복도의 지형을 이용해 360도 사방에서 공격하는 금위영과 이에 대응하는 을수...
이들 사이를 움직이며 지나가는 을수의 칼에...
머리 위에서, 뒤에서, 앞에서, 바닥에서.... 떨어지고 쓰러지는 금위영들.
119. 존현각 앞뜰 / 밤.
몰살한 시신 더미들을 스쳐... 힘들게 뛰어오는 갑수.
120. 존현각 복도 + 정원 / 밤.
을수
- 76 -
을수, 마지막 금위영까지 베고 나서 그 시체를 방패처럼 들고 정조를 본다.
정조의 흑각궁이... 을수를 겨누고 있다.
121. 존현각 입구 / 밤.
존현각으로 들어오는 갑수.
회랑 입구에 기대 마지막 숨을 내쉬며, 화약을 장전하던 금위영 조장..
그에게 갑수는 자객처럼 보인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갑수를 향해 마상총을 발사하는 금위영 조장...
움찔 멈춰서는 갑수.
122. 존현각 복도 + 정원 / 밤.
총포 소리에 뒤를 의식하는 을수.
순간, 정조의 활이 을수의 빈틈을 노려 날아간다.
을수의 어깨를 뚫고 들어가는 애깃살.
123. 존현각 입구 / 밤.
갑수, 멀뚱하니 자기 배를 보면...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돌아보는 갑수의 시선에 총을 내리고 숨을 몰아쉬는 금위영 조장이 보인다.
배를 움켜쥔 손을 들어보는 갑수... 피범벅이다.
허망하고, 황망한... 그 눈길이 존현각 침전을 향한다.
124. 존현각 복도 + 정원 / 밤.
활을 내리고... 을수를 보는 정조..
을수가 인간 방패를 내치더니... 어깨를 관통한 활을 부러트리고 정조를 본다.
정조가 활을 버리고... 운검을 빼어든다.
125. 존현각 입구 / 밤.
시선을 드는 갑수.. 존현각 기둥 사이로... 정조의 모습이 슬핏 보인다.
갑수, 힘겹게 발을 떼는 순간. 발목을 움켜잡는 손. 그대로 나동그라진다.
을수
- 77 -
갑수의 다리를 움켜잡는 금위영 조장.
넘어진 채,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발로 내리치는 갑수..
기어가지만.. 다시 잡아당기는 금위영 조장. 주욱 뒤로 미끌어지는 갑수...
정조가 보이지만, 눈가가 흐려지고 힘이 빠진다.
126. 존현각 지붕 / 밤.
타이틀 시퀀스의 장면... 존현각의 지붕을 비추는 공중 부감...
수직부감에서 존현각의 지붕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카메라.
<자막> 자시 일각, 11:15 pm
순식간에, 검은 인영 하나가... 기와 사이로 드러난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진다.
비가 때리고 있는 존현각의 지붕....
격렬하고 둔탁한 소음,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 부서지고 무너지는, 온갖 잡소리들...
카메라가 다가갈수록 점점 더 크게 들리고.
...곧장 빠르게 지붕을 뚫고 존현각 안으로 들어가는 카메라.
그리고 을수의 고함 소리와 함께 화면으로 쑥 들어오는 정조와 을수.
정원 위에서 두 사람의 칼이 부딪힌다.
127. 존현각 정원 + 침전 / 밤.
을수의 일획이 사선을 그으며 광포하게 허공을 벤다.
정조의 일합이 겨우 버텨내지만 침전 쪽으로 밀린다...
두 번째 을수의 공격이 허공을 베면... 정조의 운검이 맥없이 허공으로 뜬다.
그 반동으로 팔을 베이고 넘어지며 뒤로 쭈욱 밀려나는 정조.
벼락같은 기합과 함께 을수가 곧장 정조를 향해 날아가듯 달려가고...
을수가 공중에 뜬 정조의 보검을 다른 손으로 잡으려는 찰나...
존현각 침전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는 갑수가... 보인다.
마상총을 겨누고 황망히 을수를 향해 달려오는 갑수.....
정조를 향해 달려오며 운검을 내리 찍으려는 을수.
갑수의 마상총에서 발사되는 총알. 을수의 어깨를 스치고...
달려오던 동작 그대로 반원을 그리듯 피하며, 곧장 달려오는 갑수의 배를 관통하는
을수의 검....... 다른 손에 잡은 운검으로 곧장 정조를 내리치려는데...
갑수 안 돼!!
을수, 그 차가운 표정으로 아랑곳없이... 우득! 소리 나게 갑수의 배를 관통한 검을
한 번 더 밀어 넣는다. 애깃살이 박힌 을수의 어깨에서 피가 새 나온다.
을수
- 78 -
갑수의 배를 관통한 을수의 장검... 그 끝에 사냥개 송곳니가 흔들린다.
갑수가 흔들리는 송곳니를 본다. 자신이 주었던 그 송곳니...
찢어진 을수의 옷 사이로... 인두 자국이 선명하다. ‘二二十’
갑수 을수야...
을수 (순간.. 움찔) ....!!!??
갑수 을수... 맞지 너... 이백이십노미...
을수 (초점 없는 눈이.. 갑수를 향한다.) .........
정조 (숨을 몰아쉬며.. 둘을 본다) .................
갑수 (희미한 미소.....)
을수 형.....?
갑수 (핏물이 가득한 입) 그래 임마... 나... 갑수.. 칠십칠노미...
을수 (망연히 장검에서 손아귀 힘이 빠지며) 형......
갑수 (울컥 입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전하는... 하지 마... 안 된다.. 을수야....
을수 (충혈 된 눈으로 갑수를 찌른 자기 칼을 보며) 뭐냐... 이게....
존현각 마당을 달려오는 금위영 군사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을수 (허망하게) 형... 미안해...
갑수 (을수의 어깨를 잡으며) 을수야.. 전하는.... 전하는 제발...
을수 (눈물 맺히는) 형.. 정말.. 미안해...
느린 화면으로... 을수가 정조를 내리찍을 듯 칼을 드는데...
홍국영과 금위영들이 달려오며 마상총을 쏘아대려는 모습이 갑수의 시선에...
쇠덮개가 열리고, 일제히 발사되는 총탄들....
갑수가 을수를 안고 돌아서면.... 갑수의 등에 숱하게 박히는 총탄들...
갑수의 피가 을수의 얼굴에 확! 정조도 그 피를 뒤집어쓰며 고함을 질러대고...
쓰러지는 갑수... 그런 갑수를 안고 소리치는 정조...
느린화면으로... 금위영이 발사하는 총탄.
눈물로 흐려진 을수의 시선이 날아오는 그 총알을 본다.
<인서트> 월혜의... 환한 미소...
을수... 슬픈 그 미소.... 그리고 곧장 터져나가는 을수의 머리통.
정상화면으로 돌아오면... 갑수를 잡은 정조... 그 분노... 짐승처럼 절규한다.
정조 상책!!! 상책!!!!!
정조의 목소리가 존현각을 울린다...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퍼붓는다....
을수
- 79 -
128. 존현각 앞뜰 / 밤.
주변 전각에서 대기하던 내관, 의녀와 나인들이 잔뜩 겁먹은 채 들어온다.
존현각 마당으로 흩어져 시신들을 치우는 금위영을 돕는다.
홍국영이 군관을 데리고 존현각을 나오고, 그 뒤로 시신들이 나온다.
시신을 옮기는 금위영들 사이로.... 새 곤룡포를 든 월혜가 존현각을 향해 걸어간다.
129. 존현각 침전 / 밤.
피가 가득한 현장... 애써 진정한 얼굴로 곤룡포를 들고 안으로 들어서는 월혜.
주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흰 무명천으로 장검과 손을 휘감은 모습 그대로.. 엎어져 있다.
피가 흥건한 바닥을 조심스레 지나던 월혜의 시선에.. 손이 보인다.
월혜가 무의식적으로 흰 무명천을.. 그 손을.... 본다.....
점차 발걸음이 느려진다... 곤룡포가 월혜의 손에서 미끄러진다........
곤룡포가 떨어지고... 월혜가 그 시신을 보고 서 있다.
을수다... 그 을수다... 월혜의 을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히 시신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는 월혜.
월혜,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는다.
월혜 안돼요... 하지 마요... 안돼요... (을수를 잡고 흔들며) 이봐요... 왜 여기 있어
요? 이것 보세요... 왜 여기 있냐구요.... 왜....... 왜.........
월혜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텅 빈 존현각.. 두 그림자가 처량하다.
130. 숭정전 / 밤.
비가 그쳤다. 용마루 위 숭정전 잡상이 비에 젖어있다.
그 아래로... 숭정전 입구가 열려있고 빛이 번져 나온다.
그 안으로... 용상에 양팔을 괴고 지친 기색으로 앉아있는 정조.
정조의 백색 곤룡포가.. 얼굴이... 붉은 피로..... 얼룩져 있다.
용상 아래... 경모궁의 그 철상자.. 금등이 열린 채 놓여 있다.
숭정전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의 발... 혼자 안으로 들어서는 정순왕후다.
금등을 가운데 놓고 정순왕후가 용상의 정조를 올려다본다. 둘 만의 독대.
정순왕후... 떨리는 눈길을 감출 수 없다.
정조 읽어보세요. 할바마마의 혈서입니다.
을수
- 80 -
정순왕후, 금등을 내려다본다.. 피묻은 적삼이 놓여있다.
부들거리며 정순왕후가... 무릎을 꿇고 금등안의 적삼을 든다. 혈서가 쓰여 있다.
읽어 내려가는 정순왕후의 손이 떨린다.
정조 아버지가 뒤주에서 돌아가신 날... 할바마마는 아버지의 적삼에 그 혈서를
쓰셨습니다. 당신의 노론이 어떻게 당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쓰셨습니다. 세상이 다시 세손을 뒤주에 몰아넣을 때.. 그 혈서가 세손을...
나를! 지켜주기 바라시면서... 쓰셨습니다.
정순왕후 ............
정조 우포장 구선복은 죄인을 들여라.
정순왕후가 망연히 뒤를 돌아본다.
포도대장 관복을 입은 구선복과 군관들이 고수애를 포박해서 들어와 무릎 꿇린다.
정조에게 인사하고 나가려는 구선복.
정순왕후가 황망히 구선복을 보면... 모른 척 나가는 구선복.
고수애 (눈물 가득) 마마...
정순왕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이 맺히고) ....
정조 (용상에서 일어나며) 어머니를 용서해 주세요.
정순왕후 (정조 보는) ....
정조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며) 할마마마를 용서하겠습니다.
정순왕후 !!!
정조 (정순왕후 앞에 서서) 할마마마... 할마마마의 흉수들을 존현각으로 불러들
이기 위해... 제 소중한 신하들이.. 제 소중한 벗이 죽어갔습니다.
정순왕후 ..........
정조 (무릎을 꿇고) 다 덮겠습니다. 할마마마를 죽이려던 어머니도... 저를 죽이려
던 할마마마도... 노론을 죽이려던 저 금등도...
정순왕후 ........
정조 저 금등이 세상에 나가고... 오늘 일이 세상에 나가면... 저는 어찌할 수 없
습니다.
정순왕후 모조리... 죽일 작정입니까?
정조 네... 임오년.. 아버지의 흉적들을 모조리 죽일 것입니다. 할마마마의 가문도
모조리 죽일 것입니다.
정순왕후 (부들부들) .......!!!
정조 (점점 격앙되는) 그 위로 조상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하고... 그 아래 구족
을 멸하고! 그 가문이 난 땅을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 것이며! 그
종복과! 개 돼지 잡풀조차도! 사지를 자르고 갈라... 태우고 쓸어버릴 것입
니다.
정순왕후 (충격에 휩싸이는) !!!!!
정조 손을... 줘보세요.
을수
- 81 -
정조, 두 손을 내밀어 정순왕후의 손을 잡는다.
움찔하던 정순왕후.. 손이 잡힌 채 부들부들 떤다.
정조 (속삭이듯) 할마마마... 선택하세요.
정순왕후 (눈물 떨어지는) 주상.....
정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국... 참았던 울음이 터지며 정순왕후가 치마에 얼굴을 묻는다.
131. 숭정전 밖 조정 / 밤.
정순왕후, 비틀거리며 숭정전 정전 문을 잡고 나서면...
숭정전 조정... 횃불을 들고 선 병력들이 가득하다.
금위영과 어영대가 양쪽으로 나눠 서서 일사불란하고...
앞쪽으로 각 군영의 장수들이 우뚝하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 군사를 가로질러 가는 정순왕후.
정순왕후.. 그 어디쯤에서... 뒤를 돌아보는데... 용상에 앉은 정조가 보인다.
정순왕후가 망연히 뒤돌아 숭정문으로 길게 빠져나간다.
132. 후원창고 / 밤.
문이 열리고... 인영 하나가 들어온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눈물 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차가운 단 위에 웃는 듯 우는 듯.... 서글픈 얼굴의 주검이 누워 있다.
갑수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가슴께로 향한다.
옷섶 사이로 반쯤 나와 있는 책을 집는다.
책을 펼쳐 보는 정조.. 피로 물든 종이... 글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갑수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피로 물들어 있다.
장승처럼 서서 오열하는 정조.... 울음이 새나온다.
눈물이 떨어지는 먼지 앉은 바닥 위로...
15년 전 세손과 갑수의 발자국이 보인다.
그 위로, 서서히 말발굽 소리가 덮쳐와.. 지축을 울린다.
133. 토포군 몽타주 / 낮.
// 협곡.. 어두운 암반, 깊은 협곡 사이... 철릭을 입은 정조의 백마가 달려간다.
그 뒤로 수백의 검은 토포군이 뒤따른다.
을수
- 82 -
// 강 건너 멀리 조용하고 깊은 산채.. 비가 올 듯 하늘이 궂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강물 위로 거칠게 토포마가 들이닥친다.
134. 광백의 산채 앞 / 낮,
산채 마당 위 공지선으로 백 여 명 토포군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135. 광백의 산채 마당 / 낮.
홍국영이 지시하고 있고... 토포군이 구덩이에서 아이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구덩이 안으로 손을 뻗어 줄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아이의 손을 잡는 월혜.
어느 순간, 움찔 멈추는 월혜...
아이가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월혜 앞에 앉아 있다.
월혜의 동공이 흔들리며 눈물이 맺힌다.
그 흐린 눈으로.. 어린 을수가 보인다. 월혜를 보고 미소 짓는다.
<플래시백> 15년 전, 1762년 임오년
야생화가 핀 들길위로 광백의 달구지가 간다.
거적때기 하나씩 쓰고 있는 아이들.., 그 위로 비가 내린다.
달구지 난간 끝에 앉은 을수. 그 옆에 여자 아이.. 어린 월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보는 월혜.
..불쑥 내밀고... 내려다보는 을수. ...엿이다...
무심하게 월혜를 보는 을수.
월혜가 웃는다. 을수가 보일 듯 말 듯... 따라 웃는다.
엿을 뚝 잘라 건네는 월혜... 하나씩 입에 무는 아이들.....
달구지가 간다.
하늘을 보고 미소 짓는 아이들의 볼 위로...
꽃 봉우리가 터지듯, 톡톡.. 물방울이 터진다.
웃음을 머금은 그 얼굴들이... 서글프다...
구덩이 속에서 구해낸 아이를.. 끌어안는 월혜...
136. 광백의 산채 앞 / 낮,
말을 탄 정조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기댈 데 없이, 세상의 모든 외로움과 모든 어둠을 목격한 아이들..
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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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투명하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정조를 본다.
정조의 눈빛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점점 더 붉어온다.
<플래시백>
광백 산채 토굴... 문이 와락 열리고.. 검을 든 무복의 토포군이 들어온다.
앙상하게 마른 남자아이가 기둥에 묶여있고..
인두를 든 광백이 막 낙인을 찍으려던 참이다.
금위영 무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토굴 안으로 들어서는 정조.
광백이 갸웃하다가 피식 웃는다.
광백 이거이 먼일이가? 왕이 예까지 완?
정조가 주위를 둘러본다. 온갖 고문도구와 무기들... 무관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여자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간다.
기둥에 묶인 남자아이가 빤히 정조를 본다. 정조의 미간이 갈라진다. 검을 잡는 손..
광백이 누런 이를 드러낸다.
광백 이거이 참 웃기는 일이구나야? 나하나 쥐긴다구 세상이 바뀌가서?
정조가 광백 앞에 선다. 금위영들이 물러서서 보고만 있다.
일순 사선으로 내려 긋는 정조의 단호한 일획.
광백의 검은 피가 정조의 융복과 얼굴에 튄다. 바닥을 구르는 광백의 목.
<인서트> 세답방... 침복 안감 비단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월혜.
존현각... 침복을 들고 안감의 글자를 보는 정조.
존현각... 지게문을 열고 정원을 보고 있는 정조...
그 뒤에서 정조와 침복의 글자를 번갈아 보며 황망한 홍국영.
구덩이를 내려다보던 정조의 모습이 사라진다.
137. 들판 / 낮.
들판 위를 정조의 백마가 달린다.
석양빛의 하늘처럼 이를 데 없이 붉게 타오르는 정조의 회한과 각오...
그 얼굴 위로...
정조(E) 바뀐다. 온 정성을 다해... 하나씩... 베어간다면.... 세상은... 바뀐다.
무언가를 향한 의지의.. 그 눈이.... 화면을 가득 채워나간다.
블랙 아웃.
을수
- 84 -
- 엔드 크레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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