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향기 1
해외 어느 해변 (낮)
청명한 하늘, 작렬하는 태양, 부서지는 파도.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조난당한 한 여자가 엎드린 채 쓰러져 있다.
밀려오는 파도가 얼굴에 와 닿자 살포시 눈을 뜨는 여자... 연재다.
퍼뜩 정신이 든 연재, 벌떡 일어난다. 헉! 여기가 어디지?
겁에 질린 연재, 둘러보면 기암괴석 사이로 펼쳐진 해변, 아무도 없다.
연재 (다급하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텅 빈 바닷가.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다.
숲 (낮)
기진맥진한 연재, 추적추적 걷고 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는 숲길.
연재 (공포에 질려 흐느끼는) 흐어어어엉. 거기, 아무도 없어요?!! ... (정적뿐이다)
바닷가 (밤, 아침)
탈진 상태의 연재, 쓰러질 듯 한발 한발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 의식이 가물가물.
긴 숲길을 빠져나와 언덕에 서자 저 멀리 지나가는 배 한척!
미친 듯이 언덕을 내려가는 연재, 바닷가 쪽으로 달려 나가
연재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살려주세요!!
그러나 수평선 저 멀리 사라져가는 배. 연재, 맥이 탁 풀려 돌아서는데
저만치 물에 둥둥 떠 있는 허연 물체!
연재 악!!!! (비명을 지르며 눈 질끈 감았다 뜨면, 배구공 윌슨-영화 캐스트어웨이 버전이다)
... 윌슨? (윌슨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다. 다가가 천천히 손을 뻗어 윌슨을 집어 든다)
연재, 모래사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윌슨을 끌어안으며
연재 무서워... 무섭고 외로워. (눈물이 또르르, 윌슨의 볼에 톡 떨어진다,
그렇게 윌슨을 안고 잠이 드는)
-시간경과-
잠든 연재의 얼굴에 환하게 비치는 햇살.
연재, 기분 좋게 어딘가로 파고들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뜨면 남자의 가슴팍이다!
헉! 놀라 몸을 일으키는 연재.
연재 누구세요?
남자 (E) 당신의 눈물로 내 저주가 풀렸어요.
연재 !! ...... 윌슨?
남자 (일어나 손을 내민다)
연재 (잡고 일어선다)
연재, 남자의 손에 이끌려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에메랄드 빛 바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광이다.
연재 (감동) 너무나... 아름다워요.
남자 (E) 당연하죠. 여긴, 낙원이니까.
연재 (남자를 올려다본다)
남자 (키스를 할 듯 다가온다)
연재 (눈을 감는다)
병원 건강검진 센터 (낮)
눈을 감은 채 배시시 웃는 연재, 키스를 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움찔.
그 입에 끼워지는 내시경 삽입용 마우스피스, 곧이어 들어가는 위 내시경 호스.
연재 욱! ... 우욱!! ... 웩, 웨에....엑!!!! (하며 눈을 번쩍 떴다가 스르르 다시 감기는)
공원 내 운동장 일각 (다른 날 낮)
“2011 라인투어 춘계 체육대회”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노부장, 봉길 등이 포함된 남자 직원들, 족구를 하고 있다.
어이없게 헛발질하는 봉길, 째려보는 노부장.
일각. 연재와 혜원, 생수병 담긴 아이스박스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음료수 마시다가
연재 (컥, 놀란) 많이 안 좋대?
혜원 (시무룩) 치밀유방이래. 초음파 검사 받아보랜다.
연재 벌써 문제 생기면 어뜩하냐... 제대로 써 본 적도 없는 가슴인데.
혜원 내말이. (가슴에 손을 얹고 내려다보며 한숨 폭, 그러다) 넌, 아무 이상 없대?
연재 (어쩐지 미안한) 어.
혜원 근데 살은 왜 자꾸 빠져?
연재 암만 생각해도... 연애할라고 그러지 싶다. (배시시) 내가 수면내시경 받다 희한한 꿈을
꿨는데.
노부장 (OL. E) 그림 조-옿다!!
연재,혜원 ! (일어선다. 연재는 벌떡, 혜원은 떨떠름)
노부장 (땀범벅인 채로, 비아냥) 부장은 족구 뛰느라 육수로 칠갑을 하는데, 우리 노처녀
두 분은, 아주 놀구들 있으세요?!
혜원 (기분 나쁜) 부장님.
연재 (얼른 나서며) 시원-한 물 한 잔 드리까요? (생수 따서 건네는데)
노부장 (탁 쳐내고) 됐어!
연재 ! ... (고개 숙인 채 굳어진)
노부장 왜, 뭐, 기분 나뻐?
연재 운동화 끈이 풀리셨어요! (털썩 쪼그리고 앉더니 운동화 끈 묶어주며,
배시시 올려다보는) 이러구 다니다 넘어지세요, 부장님!
혜원 (못 말려...)
노부장 비빔밥은, 제대로 준비했어?
연재 그럼요!
동 일각 (낮)
초대형 그릇에 시금치, 콩나물 등을 담고 있는 연재, 봉길, 승아, 태종, 한식,
(*한가운데 고추장, 세로로 나물을 놔서 그릇을 삥 두르는 형태)
봉길, 콩나물 집어먹으면 나리, 봉길의 손 탁 쳐낸다. 움찔하는 봉길.
나리, “시금치가 좀 부족해 보이는데?” 하면
연재, 커다란 박스에서 시금치 꺼내 더 세팅하느라 분주하다.
저만치서 강회장, 김사장을 포함한 중역들, 노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오는
강회장 비빔밥이라구?
노부장 네! 백인분입니다. 한 그릇에 비빈 비빔밥을 회장님부터 말단직원까지 다 함께
나눠먹으면서 ‘우리는 한솥밥 먹는, 한 식구다’ 그런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취집니다.
강회장 음, 괜찮은 아이디어군.
노부장 (입이 귀에 걸리는) 감사합니다. 회장님!
세팅이 끝난 대형 비빔밥 그릇 앞에 다가와 서는 중역들.
연재,나리,승아,태종,한식,봉길, 중역들에게 일제히 삽처럼 거대한 숟가락을 건네는데
봉길, 앗! 한 발 늦었다. 건네줄 사람이 없다.
일동(봉길은 숟가락 들고), 뒤쪽으로 삥 둘러선 직원들 틈으로 물러난다.
중역들, “이거 엄청나구만” “장관이네요 장관” 감탄을 쏟아내며 비빌 태세에 들어가는데
강회장 고추장이 좀 부족해보이지 않나?
노부장 ! (뒤돌아 연재 향해 “고추장, 고추장!” 하며 빨리 가져오라는 제스처)
연재 ! (다급하게 두리번, 커다란 고추장 단지 찾아 들고, 튀어나가려는데)
봉길 (양손으로 삽 숟가락 짚고 서있다 삐끗, 숟가락 놓쳐 바닥에 떨어지는)
연재 (그 숟가락에 발이 걸려 와락 넘어지면서 비빔밥 그릇에 턱 허리가 접히는)
봉길 (헉!)
연재 (몸을 일으키려 버둥대다가 그릇 안으로 쑥 밀려들어가 그대로 고추장에 쳐 박히는)
일동 !!!
노부장 (이런 젠장!!!)
동 일각 (낮)
나리, 승아, “김밥 백줄 최대한 빨리요”, “피자 몇 판까지 가능해요?” 통화중이고
연재, 얼굴과 머리에 묻은 고추장을 닦아내는데
노부장 (버럭) 회장님 앞에서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왜 하필 비빔밥에 넘어지냐고, 왜!!
연재 (억울하다) 부장님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하다가 봉길과 눈이 마주친다)
봉길 (제발)
연재 (말 못하겠다, 후) ... 죄송합니다.
노부장 뭐? 죄송?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죄송? 니가 일당 백이야 뭐야?! 너 땜에 백 명이 굶게
생겼어! 백 명이! 어후! 이거, 이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 이거! 내가 이런 걸
직원이라고! (휙 간다)
연재 ... (눈앞에 물티슈 한 장이 내밀어진다)
봉길 (E) 여기... 물티슈.
연재 (보면, 멋쩍게 웃고 있는 봉길이다) ......
집 앞 동네 거리 (낮)
연재, 옷에 붙은 나물을 떼며 걸어오는데 뒤를 졸졸 따라오는 강아지 한 마리.
연재 (돌아보며 강아지를 향해) 절루 가아.
강아지 (계속 따라오는)
연재 (강아지 향해) 참기름 냄새가 그릏게 고소해? ... (손을 내민다)
너 말고 남자가 따라와야 되는데. (손바닥 쪽쪽 핥는 강아지, 큭큭) 간지러어!
순정 (E, 날카로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연재 ! (집 쪽을 돌아보는)
연재의 집 앞, 마당 (낮)
연재, 황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순정 (상목과 멀찍이 마주선, 언성 높아진) 그냥 걷어가라 그러셔도 되잖아요!
연재 (놀란) 엄마, 왜 그래?!
순정 세상에. 이불 빨아서 널어놨더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불 가리키며) 바닥에
이렇게 패대기를 쳐놨다!?
상목 그러게 누가 남의 집 마당에 빨래를 널으래!?
순정 아니, 빨래 넌다고 이 마당이 닳기라도 한 대요?
상목 전세 사는 주제에 어디 주인집 마당을 함부로 드나들어?! 내 마당이야! 얼씬도 하지 마!
(문 쾅 닫고 들어간다)
순정 저 영감탱이가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집으로 달려 들어갈 기세)
워리(개) (마당에 묶인 채, 멍멍 사납게 짖는)
연재 (OL. 붙잡는) 엄마. 참어 제발!
연재의 거실 (낮)
순정, 씩씩대며 들어오고 연재, 이불을 안고 따라 들어온다.
순정 남편 없다고 깔보는 거야. 늬 아빠만 있었어봐. 저 영감탱이가 저럴 수 있나!
아후, 속상해 증말! (소파에 털썩 쓰러지는)
연재 쫌 만 참어. 내가 꼭!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게 해주께!
순정 쥐꼬리만한 주택부금 부어서 어느 세월에! (벌떡 일어나) 연재야, 젤 빠른 방법은
돈 많은 남자 만나 시집가는 거라니까?
연재 제-일 가능성 없는 방법도 돈 많은 남자 만나 시집가는 거라니까?
그냥 내가 버는 게 빨라.
순정 그런 루저 마인드를 버려 제발! (붙잡고) 넌 누구든 만날 수 있어! 늦지 않았어!
(그러다) 근데 너, 꼴이 왜 이래?
연재 어... 그럴 일이 좀.
순정 니가 이러구 다니니까 생전 남자를 못 만나는 거야! 안 되겠어! (전화기 찾아 드는)
연재 (막으며) 하지마아? 결혼정보회사 등록할 돈 있으면 차라리 옷을 사 입겠다!
순정 ! ... (화색이 도는) 그럼 우리 옷 사러 가까?
연재 ! (우씨)
라인투어 외경 (아침)
연재의 사무실 (아침)
벽면 아래로 가득 쌓인 각종 문서들.
나리 (가리키며) 이것 좀 싹 다 폐기해요.
연재 네. (불끈 문서들 가슴팍에 안아 드는데)
나리 참, 이것두. (하며 들고 있던 종이 한 장 놔주는)
동 일각, 혹은 복도 (아침)
문서 꾸러미 나르고, 또 나르는 연재. 문서세단기 앞에 놓여지는 문서, 문서들...
연재, 파쇄 시작하는데
남직원 이연재씨, 하는 김에 이것도 좀. (두툼한 문서 건네면)
연재 네. (받아들다 잉? 눈 똥그래지는, 씬3의 바다 컬러프린트 된 문서, 이럴 수가!)
여기, 어디에요?
남직원 오키나와 무슨 섬일걸? (하고 간다)
연재 (문서 들여다본다, 믿어지지 않는) 웬일이야... 이게 진짜 있었네?
연재의 사무실 (아침)
연재, 바다 프린트 된 종이 들여다보며 들어오는데
노부장 마린 리조트 어떻게 됐어.
연재 (긴장) 세 블록 밖에 못 준다 그래서 계속 얘기중이요.
노부장 어떻게든 다섯 블록 잡아. 믹키 창 오픈카는.
연재 (난감) 여섯 분 중에 다섯 분이 벌써 거절하셨구요.
이제 딱 한 분밖에 안 남았는데... 부장님 아무래도 그게...
노부장 힘들겠지?
연재 (알아주는구나!) 네!
노부장 그렇게 힘들면, 회사 때려치고 비빔밥 집이나 차리든가!
연재 !
고층 건물 앞 (아침)
덮쳐누를 듯 고압적인 느낌의 고층 건물을 올려보는 연재.
노부장 (E)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차 수배해. 안 그럼 회사 들어올 생각하지 마. 영-원히.
연재, 불끈 주먹을 쥐며 안으로 들어가는
건물 로비 (아침)
안내데스크 앞, 여직원과 마주선 연재.
여직원 사전에 약속이 안 돼 있으면 못 만나신다니까요.
연재 (사정하는) 그럼 전화번호라도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여직원 사장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려드려요.
연재 제가 사장님을 꼭 만나야 되거든요. 부탁 좀 드릴게요. 네?
여직원 (불쌍한 얼굴로 바라보는 연재다, 난감한) 지금은 만나실 수가 없어요.
연재 왜요? 어디 출장이라도 가신 거예요?
여직원 ... 그게 아니라...
병원 입원실 (낮) VIP 병동 일인실
연재, 벙 찐 표정으로 내려다보면 다리와 목에 깁스를 하고 있는 사장(40대,남)이다.
사장 그러니까 홍콩 영화배우 믹키창이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데, 내 차를 타고 싶어 한다?
연재 (멍, 끄덕) 네.
사장 내가 이 지경인데 차는 어떻겠어. 폐차 직전이지... 미안해서 어째?
연재 (낙담하는, 어깨 축 쳐져서) 미안하시긴요... 어쩔 수 없죠. (당근 주스 한 상자 놓고)
몸조리 잘 하시길 바래요. (힘없이 돌아선다)
사장 ... 매장에 가 보는 건 어때?
연재 ? (돌아보는)
사장 한 대가 더 들어와서 매장에 진열돼 있다는 얘길 들었거든.
연재 ! 정말요?
거리, 강남 번화가 정도 (낮)
버스에서 황급히 내려서는 연재,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이다’ 후다닥 급한 발걸음으로.
자동차 매장 건너편 거리 (낮)
급히 오는 연재, 길 건너편에 있는 수입자동차 매장 발견한다. 드디어 찾았다!
그런데 수배해야할 자동차가 매장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헉!!! 마음 급해지지만 빨간불이다. 판매원을 포함한 직원들이 차를 향해 인사를 한다.
어떡하지? 발 동동 구르는데 신호가 바뀐다. 득달같이 뛰기 시작하지만 차는 붕 떠난다.
연재, “잠깐만요!” 부르며 전력질주로 쫓아가지만 멀어지는 차.
안 되겠다! 급히 택시를 잡는 연재.
택시 안, 거리 (낮)
연재 (올라타자마자 저만치 앞에 가는 지욱의 차를 가리키며) 저 차 따라가 주세요! 빨리요!
지욱의 차, 갑자기 속력을 낸다. 지욱의 차와 연재의 택시, 거리가 훌쩍 멀어진다.
택시 안의 연재, “빨리요 빨리, 놓치면 안돼요!” 마음이 급해진다.
지욱의 차와 연재의 택시, 쫓고 쫓기는 추격전.
라인 투어 앞 (낮)
지욱의 차가 건물 앞 정지 바를 통과해 들어간다.
연재가 탄 택시, 거리에 끽하고 멈춰 선다.
연재, 만 원 짜리 한 장을 기사에게 건네고 차 문을 열었다가
연재 (순간 벙) 뭐야, 여긴. 우리 회사잖아!
이때 정문 코앞에 선 차에서 천천히 내려서는 남자, 지욱이다!
슈트 자켓 단추를 잠그며 돌아서던 지욱과 연재의 눈이 마주친다.
흡! 숨이 멎는 연재, 넋을 빼앗겨 버렸다.
지욱,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며 돌아서더니 건물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간다.
멍한 연재의 시선에 지욱의 모든 행동은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릿하다.
기사 (E) 거스름 돈 안 받을 거예요?!
연재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급하게 거스름 돈 받다가 동전 떨어뜨린다, 집으려고 숙이는데)
이때 쿵! 추돌사고! 앞으로 획 고꾸라지는 연재의 비명소리 “악!” 울려 퍼지면서
라인 투어 로비 (낮)
지욱, 들어선다. 일렬로 서서 깍듯이 인사하는 비서1,2, 경비1,2,3.
비서1,2 어서 오십시오.
지욱 (표정 없이 앞장선다)
일동 (뒤따른다)
대 회의실 (낮)
지욱 강지욱입니다.
지욱, 강회장과 김사장, 노부장을 비롯한 임직원 십 수 명이 앉아있는 앞에 서서
지욱 (강회장 보며, 미소로) 저기 계신 강철만 회장님, 낙하산이죠.
일동 (웃는/김사장과 노부장은 떨떠름)
지욱 본부장 직함 달았지만, 일은 안 할 생각입니다.
일동 !
강회장 (저 자식이? 굳어져 보는)
지욱 전 20년 가까이 라인투어를 위해 일해오신 여러분들보다 일을 더 잘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배울 생각입니다. 여기계신 선배님들만큼 실력이 쌓이면, 그때
나서겠습니다.
일동 (흐뭇한 미소로 박수/김사장과 노부장은 억지로)
지욱 (자리에 앉으면)
강회장 어깨너머 암만 천자문 봐도, 한번 써보느니만 못하잖아?
이번 사사분기 영업전략, 강본부장한테 맡겨보면 어떨까 싶은데.
지욱 (미소로) 회장님께서 절 괴롭힐 작정이신가본데요?
강회장 눈치는 제법이군. 그거 하난 맘에 들어.
일동 (웃음)
지욱 (미소로)
강회장 그 친구, 올라왔나?
임원1 네.
임원1, 일어나 문을 열면 상우, 들어와 선다.
상우 오늘부터 본부장님 밑에서 일하게 된 박상웁니다.
지욱 (보는)
본부장실 (낮)
고급원목 탁자와 의자, 통유리로 된 벽 아래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방안.
지욱, 유리벽으로 다가가 내려다보며
지욱 야... 전망 죽인다! 어때? 박상우? (돌아본다)
상우 좋습니다.
지욱 3년 내내 1등만 도맡아 하던 놈이 어쩌다 여길 들어왔어?
상우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지욱 둘이 있을 땐 말 놔도 돼.
상우 아닙니다.
지욱 (피식)
상우 (탁자 위에 자료 놓는다) 사사분기 영업전략 초안입니다.
지욱 난 방금 전에 지시 받았는데?
상우 회장님께서 며칠 전에, 잘 보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지욱 아! (의자에 앉아 자료 넘겨보며) 팀장 다는 데 얼마나 걸렸지?
상우 6년입니다.
지욱 누군 6년 걸려 팀장 다는데, 누군 하루아침에 본부장 달고. (고개 들어 보는)
인생 참 엿 같지 않아?
상우 ...
지욱 (자료 탁 덮어 슥 민다) 하던 사람이 마저 해. (미소로) 그게 보필이야.
응급실 (낮)
얼굴에 피 범벅인 여자(연재처럼 보이는), 베드에 눕혀진 채 쭉 밀려들어온다.
119 (다급) TA환자, 두개골 함몰로 뇌손상 의심됩니다. 의식 없고 바이탈 불안정합니다.
인턴, “빨리 옮겨 빨리!” 하며 간호사와 함께 황급히 베드를 밀고 들어가는데
연재 (E) 저 진짜 멀쩡하다니까요?
베드에 걸터앉은 연재, 운전자(40대 남)와 마주 보고 있는
연재 그냥 안경값이나 빨리 주시면 좋겠는데... (휘어진 안경테 펴서 걸쳐 쓰는,
좌우대칭 안 맞는)
운전자 (OL) 무슨 소리야? CT 결과 확인하고 가야지!
연재 (마음 급한) 저 차 수배해야 돼서 무지 급하거든요.
운전자 하! 그 핑계로 도망갔다, 나중에 여기 저기 아프다고 덤탱이 씌울라고?
연재 안 아프다니까요? 보실래요? (일어나 국민체조 팔운동 따위, 이때)
은석 (E) 이연재씨?
연재 (돌아보는, 다가오는 은석, 잘 생겼다, 얼른 자세 바로 하고) 담당... 의사 세요?
은석 잠깐 진료실로 올라가시죠.
운전자 ! 왜요,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건... 아니죠?
은석 남편분이세요?
연재 (OL) 아니에요! 저, 결혼 안했어요!
운전자 사고 낸 사람인데요. 택시기사는 멀쩡한데 이 아줌마가 정신을 잃어가지고.
연재 (OL) 아줌마라뇨!
은석 운전자분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연재 향해) 따라오세요.
운전자 (아싸아!!)
연재 ? 왜... 저만 부르시는 건데요?
인턴 (E) 채은석 선생님!
은석 (안경을 치켜 올리며 돌아보는)
연재, 그 모습 보면서 갸웃, 이때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
인서트> 초등학교 복도, 20여년 전
엉거주춤한 자세(바지에 똥을 쌌기 때문)로 걸어가는 은석(9살)의 뒷모습
어린연재 (E) 채은석!
은석 (안경 치켜 올리며 돌아본다)
어린연재 너... 똥 쌌어?
은석 (울먹울먹하다가 앙- 울음을 터뜨린다)
연재 ...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은석 (시선 피하며) 글쎄요. (돌아서는)
연재 너... 똥석이 아니니?
은석 ! (멈칫, 굳어지는)
연재 똥석이 맞구나!!!
은석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간다)
연재 (쫓아간다) 똥석아!! 같이 가!!
진료실 앞 복도 (낮)
은석, 걸어오면 연재, 뒤따라오며
연재 야... 진짜 신기하다. 이런데서 초등학교 동창을 다 만나고.
은석 (우뚝 멈춰 선다)
연재 너 키 엄청 컸다. 옛날엔 요만-했는데. 니가 우리 반에서 키 젤 작았잖아.
그러고 보니 똥자루란 별명도 있었네. (큭큭)
은석 (후... 누르며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진료실 안 (낮)
은석,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 연재, 둘러보며
연재 근사하다아. (의자에 앉고) 사람 인생 참 알 수가 없어. 어떻게 바지에 똥 싸던 애가
의사가 됐냐. (큭큭) 하긴 바지에 똥쌌다고 의사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은석 (굳은 얼굴로 보는)
연재 ? 혹시, 나 기억 못하는 건 아니지? (안경 벗어서 얼굴 보여주며) 봐봐.
은석 (냉랭) 이연재씨.
연재 (화색) 기억하는 구나! 그래! 나야! 이연재.
은석 난 지금 의사 자격으로 앉아있는 겁니다. 이연재씨는 제 환자구요.
연재 ? 알어어!
은석 아시면, 반말은 하지 말아주시죠.
연재 의사 됐다고 대접받아야겠다 이거지? 알았어. 존대말 써주께.
(장난이다) 말씀하세요, 선생님~!
은석 사고 내신 분한테 감사드려야겠어요.
연재 ! 왜? (설마...) 우릴 만나게 해줘서?
은석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연재 (쿵!!!)
은석 (모니터의 CT 화면 보여주며) 위치는 여기, 간내 담관, 크기는 2센티미터 정돕니다.
연재 (멍) 이거... 혹시... 암이야?
은석 그건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어요.
연재 (충격으로) 조직검사를 왜 받아? 나... 암이야?
은석 암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받는 검사가 조직검삽니다.
연재 암 아니면 굳이 그런 거 받을 필요 없는 거 아냐?
은석 이연재씨. 암이었으면 좋겠어요?
연재 ! (기막혀서 피식) 야... 그럴 리가 있어?
은석 그럼 왜 자꾸 암이냐고 물어봅니까?
연재 !!
은석 종양이 백퍼센트 암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종양은, 종양이죠.
연재 (아... 그렇지... 민망해서) 하... 갑자기 너무 놀래가지구. (그제야 웃는) 하긴, 암일 리가
없지. 건강검진에서도 아무 이상 없었는데. 그럼... 그냥 종양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수술은, 안 해도 되는 거야?
은석 그것도 조직검살 해보면 알겠죠. 목요일 오전에 보호자랑 같이 오세요.
연재 평일 날은 좀 그런데... 아! 나 여행사 다녀. 요새 성수기라 엄청 바쁘거든.
혹시, 주말은 안 될까?
은석 이연재씨.
연재 어.
은석 암인지 아닌지 빨리 확인하고 싶지 않으세요?
연재 당연히 빨리 확인하고 싶지!
은석 그럼 목요일날 뵙겠습니다.
연재 어... 근데 너 진짜 반갑다아. 난 똥 싼 거 땜에 니가 전학 간 줄.
은석 (벌떡 일어선다)
연재 ? (보면)
은석 회진 때문에 바빠서요. (문을 열어준다, 나가라고)
연재 알았어... (머쓱하게 웃으며 일어서는데)
은석 계속 반말 쓰시는데.
연재 ! 미안.
은석 “해요!”
연재 아! (멋쩍어서 배시시)
은석 한 가지 더. 목요일 날 올 땐 아는 척 하지 말아줬음 좋겠어요.
그쪽은 날 기억할지 몰라도, 난 그쪽이 전혀 기억나지 않으니까.
연재 !!
병원 앞 (낮)
연재, 걸어 나오며
연재 거짓말! ... 기억이 안 나긴. 똥석이 할 때 움찔했으면서... 치. 의사됐다고 사람 쌩까는
거 봐... 누가 저한테 들러붙기라도 한대? (쳇, 그러다 맘 무거워지는,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대며) 아... 찜찜해.
(E) 전화벨
연재 (시무룩 꺼내보면 “부장님 만세” 떠 있는, 헉!!!, 울상으로 받으며) 네 부장님.
노부장 (E) 차 수배 어떻게 됐어!
연재 그게 아직... (빽 소리 질렀는지 전화기 귀에서 떼는)
라인투어 앞 (밤)
연재, ‘미치겠네... 어떡하지?’ 초조한 마음으로 걸어오다 멈칫.
지욱의 차가 서있는 게 아닌가!
연재 (이럴 수가!) 아직 안 갔잖아?! (저만치 쓰레기 줍고 있는 경비 향해) 아저씨!
혹시, 이 차 주인 누군지 아세요?
경비 본부장님 차야. 본부장님.
연재 ? 본부장님이라면... !!
연재의 사무실 (밤)
나리, 승아, 책상에 앉아 일하는 중이고 연재, 노부장 책상 앞에 선
연재 차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노부장 뭐?
연재 6대가 아니라 7대가 있었는데요, 그 차 주인이 바로 오늘 첫 출근한... 본부장님이세요!
나리 (솔깃)
연재 설마 자기 회사에서 쓴다는데 안 빌려 줄 리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올라가서 얘기만
하면 된단 얘기죠.
노부장 (큼) 얼른 올라가 봐.
연재 네. (눈치 보다 용기 내는) 근데요,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노부장 (문서 들여다보는 채로) 드리지 마.
연재 저... 목요일 날 월차 좀 쓰면 안 될까요?
노부장 음... 못 써!
연재 제가 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요.
노부장 (버럭) 제정신이야? 성수기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에?
연재 부장님.
노부장 (OL) 얼른 차나 수배해! 하루 종일 어디서 땡땡이나 치다 들어와서는 뭐? 월차?
월차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연재 ...
화장실 (밤)
연재, 들어와 한숨 폭, 거울을 보면
플래시백> 씬21의 지욱과 눈이 마주치던 순간.
연재, 배시시 웃음 나는데 나리, 들어오는
연재 (얼른 물을 틀어 손을 씻는)
나리 (파우치에서 화장품 꺼내 화장 고치며) 차 수배, 나한테 넘겨요.
연재 (벙) 왜요?
나리 일이 많은 것 같아서.
연재 늘 많았는데요?
나리 그니까 내가 할게요.
연재 제가 해도 되는데요?
나리 내가 하겠다구요.
연재 괜찮다니까요?
나리 혹시 본부장님한테 관심 있어요?
연재 ! (움찔) ... 아뇨. 뭐...
나리 다행이네. 일 핑계로 가서 몇 번 알짱대는 게 무슨 소용 있겠어, 안 그래요?
연재 ...
나리 (향수 칙칙 뿌리고는) 헤리티지에 전화 걸어서 예약상황이나 다시 체크해요.
차는 걱정말구. (나가는데)
연재 ... 남대리님!
나리 왜요?
연재 (최대한 공손하게 반항) 돈은... 언제 갚으실 건가요?
나리 (짜증) 내가 그 돈 떼먹을 사람으로 보여요? 줘요, 준다구! (나가는)
연재 나쁜 지집애... 앵무새야? 세 달 째 똑같은 얘기.
본부장실 (밤)
의자에 앉은 지욱, 고개를 드는
지욱 차를 빌려달라구요?
나리 네... 일단 대여료는 지불이 되구요.
지욱 그건 좀 우습지 않겠어요? 본부장이 회사 일로 차를 빌려주면서 돈을 받는 건.
나리 (하하) 저도 본부장님께서 대여료 같은 걸 받으실 거라곤 생각 안했어요.
차를 빌려주시면, 그 동안 타실 차는 따로 마련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욱 그럴 필요 없어요. 한 대가 더 있으니까.
나리 아!
지욱 수배팀 직원이라고 했죠? 이름이...
나리 (기대감으로) 남나리요.
지욱 남나리씨가 앞으로 내 방에 올라올 일이 자주 있을까요?
나리 (웬일이니!) 그럼요. 많이 있겠죠.
지욱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할게요.
나리 (달뜬)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지욱 내 방에 올라올 때 향수는 뿌리지 말아줘요.
나리 ! (민망) ...
연재의 사무실 (밤)
나리 (들어서며) 차 수배 됐어요, 부장님!
노부장 수고했어. 역시 남대리야!
연재 (씁쓸)
나리 (자리에 가서 앉으면)
승아 (옆자리에서 바짝 다가들며) 어때요, 본부장님?
나리 화보야 화보. (연재의 시선 느끼고) ... 앞으로 자주 올라오라면서 내 향수 냄새가 되게
좋다 그러시더라구.
승아 아, 부럽다!
노부장 (일어서며) 자, 얼른 일어들 나자구!
엘리베이터 앞, 엘리베이터 안 (밤)
퇴근하려는 직원들,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있고
노부장, 봉길, 나리, 승아, 태종, 한식의 뒤를 따라 나오는 연재, 풀이 죽었는데
승아 (E) 본부장님이다!
연재 ! (보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 홀로 선 지욱이다!!)
직원들, 꾸벅 인사만 하고 타지는 않는다.
지욱 타세요.
직원1 먼저 내려가십시오.
지욱 혹시, 새로 온 본부장한테 전염병이 있다고 소문 난 건 아니죠?
일동 (웃음. 직원1 ‘아닙니다’ 웃으면)
연재 (어쩜 유머감각도 있어)
지욱 타세요. 다들. (닫히려는 문 열어준다)
직원들 올라탄다. 연재가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삐- 소리 울린다.
안 내리고 싶은 연재. 나리, 옆구리 쿡 찌른다. 연재,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내린다.
젠장... 아쉬움에 슬쩍 돌아보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이는 지욱이다.
그런 지욱을 보는 연재의 시선에서.
호텔 외경 (밤)
호텔 레스토랑 룸 (밤)
네 사람 자리가 세팅 되어 있고, 강회장과 지욱, 나란히 앉아있다.
지욱 (손목시계 힐긋 보더니 전화 걸려는데)
강회장 세경이한테 하는 거면 관 둬.
지욱 (보면)
강회장 늦을 수도 있다.
지욱 (기막힌) 대단하시네요. 약속시간 안 지키는 거, 제일 싫어하시잖아요?
강회장 ... 따로는, 만나고 있는 거냐?
지욱 아뇨. 찍어다 붙이는 결혼이 뭘 그리 재밌겠어요.
강회장 니가, 재밌는 일이 있긴 하고?
지욱 !... (피식) ... 없죠. 없네요, 재밌는 일이.
이때 문이 열리고 세경 들어선다.
세경 늦었습니다. 일이 좀 많았어요. (앉는)
강회장 괜찮아. 오랜만에 아들 녀석이랑 오붓하게 대화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지욱 (피식)
강회장 그런데 임회장님은?
세경 제가 깜빡 했네요. 오늘 못 나오신다고 전해달라셨는데. 죄송합니다.
강회장 이런! 미리 알았으면 나도 자릴 피해주는 건데.
지욱 (강회장 들으라고, 뼈있는) 헛걸음 하셨네요.
강회장 헛걸음은 무슨. 며느리 될 아이랑 밥 먹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야.
오늘따라 세경이, 아주 예쁘지 않니?
지욱 피곤해 보이는데요?
강회장 피곤해보이긴, 내 눈엔 화사하기만.
세경 (OL) 피곤한 거 맞아요.
강회장 (굳어지는) ...
세경 실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쉬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나왔어요.
앤디 윌슨이 내한을 해요, VVIP 고객 초청 연주회 때문에. 일주일 일정으로
왔는데 하루 동안 한국 관광을 하고 싶어 해요. 그걸, 라인투어에서 맡아주세요.
강회장 이거 두 사람이 만나니까 벌써부터 시너지 효과가 나는구만. 하하하하.
호텔 앞 (밤)
강회장이 탄 차, 떠난다. 보던 지욱과 세경인데
세경 집이 어디예요?
지욱 ? (보는)
지욱의 집 외경 (밤)
지욱의 거실 (밤)
세경, 천천히 둘러본다. 원목으로 된 독특한 느낌의 탁자와 책장, 의자(소파 외에).
세경 나무를 좋아하나 봐요? ... (팔짱 낀 채 벽에 걸린 커다란 나무 사진 바라보는)
이건... 갖고 있어도 가격이 뛸 것 같진 않네.
지욱 (다가와 쥬스잔 정도 건네며) 상관없어요, 팔 생각이 없으니까.
세경 (보는, 비아냥 담은) 돈에 욕심 없는 타입이 나랑 결혼을 왜 하려고 할까?
지욱 돈에 욕심 많은 당신이, 나랑 결혼하려는 이유랑 비슷할 거예요.
세경 (굳어져서) 분명히 해둘 게 있어요. 결혼 전까지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아줬음
좋겠어요. 내가 누굴 만나, 뭘 하든.
지욱 (보는)
세경 대신 나도, 지욱씨가 누굴 만나 뭘 하든 간섭 안 할게요.
지욱 (대수롭잖게) 그 얘기 할려고 집에 오잔 거였어요? (피식) 아까 거기서 했어도 될 텐데.
세경 결혼할 남자, 취향 정돈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지욱 이건 간섭이라고 생각 안하나 봐요? 나한텐, 집도 사생활인데.
세경 (기분 상한, 탁자에 쥬스잔 탁 놓고) 갈게요.
지욱 운전 해줘요? 피곤하다면서.
세경 나한테 점수 딸 생각 있어요? 그럼, 윌슨 일에나 신경 써요. (돌아서서 나가는)
지욱 ... (씁쓸한 미소로)
노부장 (E) 나는 그대를 사랑해.
노래방 (밤)
연재, 봉길, 나리, 승아, 태종, 한식, 일제히 “악!” 환호성을 지른다.
만취한 노부장, 넥타이 머리에 두르고 셔츠 풀어헤친 채로 노래 이어간다.
노부장 그대 곁에 있고 싶어요.
“나도 그대가 좋아”로 시작되는 여자파트, 반주만 나온다. 부르는 사람이 없다.
노부장 (혀 꼬인 채, 발끈) 뭐야. 왜 아무도 안 불러!
안쪽 자리에 앉은 나리,승아, 시선 피하며 딴 짓
가장 자리에 앉은 연재, 지리적으로 불리하다, 침 꿀꺽 긴장하는데 마이크가 코앞에 쑥
연재 (올 것이 왔다! 떨떠름 웃으며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노래한다) “난 그대만 생각 할래요.”
노부장 “그대 반짝이는 두 눈을 보면” (노래 부르면서 봉길을 끌어내며) 부르스 부르스!
봉길 (억지로 끌려나온)
노부장 내 마음 나도 모르게 포근해. (연재를 바라보며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다)
연재 (노부장의 손길 너무 싫다, 슬쩍 피하며) 그대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면
내 마음도 흐뭇해 그대여!
노부장,연재 (듀엣으로)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이여!
나리,승아 (이런 분위기 너무 싫은데)
뻘쭘하게 서있던 봉길, 노부장의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나리에게 손을 내밀면
들고 있던 탬버린으로 손을 탁 쳐내는 나리. 봉길, ‘아!’ 맞은 손 감싸 쥐는데
노부장 (E) 하늘처럼 소중한 그대여!
연재 (울상으로) 그대여! 내 인생에 불을 밝혀 주신 님이여!
복도, 화장실 (밤)
연재, “으”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며 화장실 쪽으로 다가가면
승아 (E) 전 이연재씨가 더 짜증나요.
연재 (멈칫)
나리, 승아, 세면대 앞에 서서
승아 그런 걸 왜 받아주구 있어요? 성희롱인거 모르나?
나리 버릇이 돼서 그럴 거야. 계약직으로 들어와서 정규직 된 케이스잖아. 실권 쥐고 있는
부장님한테 잘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납작 엎드린 거지. 간 쓸개 다 빼놓고.
연재 (굳어진) ...
나리 그 나이 먹구, 참 안됐어. 그만 두면 갈 데 없구, 시집두 못가구.
연재 (기분 몹시 가라앉는) ...
연재의 방 (밤)
창문 아래쪽으로 3단짜리 화분(벤자민 고무나무, 수국, 각종 허브 등) 거치대 놓여있고
시트지 붙여 재활용한 작은 장롱, 오래된 책상과 침대 놓인 단출한 방안.
연재, 침대에 털썩 엎드려 눕는다.
연재 아... 하루가 너무 길다... (뒹굴, 똑바로 눕는다,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대며) 설마...
(불길한 예감, 그러다) 이연재,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불끈 일어난다)
가방에서 씬 13의 바다사진 담긴 종이 꺼내, 책상 앞 벽에 붙인다.
연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1년 안에 가주겠어. 신혼여행으루. (큭큭. 미소로)
종이에 담긴 바다가 실제 화면과 겹쳐지며 물이 찰랑찰랑, 햇살에 반짝반짝 빛난다.
사무실 (다음 날 아침)
책상에 앉은 연재, 놀란 눈으로 돌아보며
연재 윌슨이요?
노부장 (이제 막 들어선 듯 책상 사이에 서서) 본부장이 특별 지시한 고객이야. 플랜 짜서
한 시간 뒤에 회의!
일동 (분주해지는 분위기인데)
연재 배구공... 윌슨? (어쩐지 좋은 예감으로)
회의실 (아침)
연재, 노부장, 봉길, 나리, 승아, 태종, 한식, 둘러앉아 회의 중이다.
나리 까다롭기로 유명한 인물이에요. 성격이 예민하고 괴팍해서 언제 어떻게
돌변할 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평이구요, 제일 난감한 건 식삽니다. 무슬림이거든요.
노부장 무슬림?
연재 입양했던 부모님 종교가 그랬나봐요... 인터뷰 자료 보니까 나와 있던데 (옆에 높게
쌓아둔 자료 밀어주며) 한번 보시겠어요?
노부장 됐어. 이거 일이 복-잡하네. 지방엔 무슬림 식당이 없잖아?
연재 할랄 인증한 한 고기를 미리 확보해고 식당에 보내서 요릴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리 그냥 할랄 했다고 하면 안 되나? 그거 했다고 고기 맛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노부장 본부장 고객인데, 그럴 순 없지. 할랄한 고기 확보하고 요리 가능한 식당 수배해.
인솔자는! (보면)
일동 (고개 숙인 채 딴청, 봉길만 고개 들고 있는)
노부장 (차례로 보다 봉길과 눈 마주치는)
봉길 (기대감으로)
노부장 비호감이라 안 되고...
봉길 ! (실망으로)
노부장 (둘러본다, 다들 시선 외면, 버럭) 아무도 없어?
연재 ... (망설임)
나리 (E) 아시잖아요. 성수기라 다들 바쁜 거.
동 일각 (아침)
노부장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앉으며) 이런 젠장! 이 나이에 내가 나갈 수도 없고!
연재 (다가와) ... 부장님.
노부장 (버럭) 왜, 뭐!?
연재 ... 죄송한데요... 월차 좀...
노부장 (책상 쾅) 또 그놈의 월차 얘기야?!
연재 저 올해 월차 한 번도 안 쓴 거 아시잖아요.
노부장 누가 쓰지 말래? 이 바닥에서 일이년 일한 것도 아니고, 제일 바쁜 시즌에 왜 이래?
성수기 끝나고 한가해지면 그때 써! 그때!
연재 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그래요, 부장님. 몸에 이상이 있어서 검사를 받아봐야 된다
그래서요.
노부장 죽을병이라도 걸렸대?
연재 !
노부장 뭘 그렇게 몸을 챙기나?! 솔직히 여기 몸 멀쩡한 사람이 누가 있어!
나 고혈압에 지방간이야. 병원 갈려면 내가 젤 먼저 가야돼!
연재 ... 월차 주시면... 제가 윌슨 인솔자로 나갈게요.
노부장 (큼) ... 다른 일은 그럼, 어떡하라구.
연재 주말 근무, 하겠습니다.
모란시장 혹은 농장 (낮)
# 닭장 안을 들여다보며 닭을 고르는 연재와 무슬림, 두 마리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킨다.
주인, 닭을 꺼내면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닭들. 연재, 화들짝 놀라는.
# 주방. 무슬림, 닭 앞에서 경전을 외고 있다.
주인 비스밀라!! (외치며 닭을 푹 찌른다)
연재 비스밀라! (외치며 눈 질끈 감았다 뜨면)
할랄 인증서가 붙은 닭고기 턱하니 내밀어진다. 연재, 그걸 받아드는데서.
호텔 로비 (아침)
연재와 세경, 악수를 막 마친
연재 상무님이세요? 되게 어려 보이시는데 벌써 상무 다시고... 대단하시네요.
세경 (나에 대해 모르는구나, 피식) 며칠 후에 연주회 있는 건 알고 있죠? 관광도 관광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절대로 그분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연재 명심하겠습니다.
세경 따라와요. (앞장서면)
연재 (뒤따라가며 세경을 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티가 좌르르,
보석들이 주르륵 박힌 반짝이는 스트랩 슈즈, 부러워지는데)
이때 윌슨 부부(50대, 한국계미국인, 윌슨은 한국말, 부인은 영어 사용) 걸어 나온다.
세경 (영어로) 벌써 내려오셨어요?
윌슨 (영어로, 삐딱, 거만) 방안에서 출발할 순 없잖아? 어차피 내려와야지.
세경 (영어로, 연재 소개하는) 이쪽은 오늘 관광을 안내해줄 가이드에요.
연재 (영어로) 잘 부탁드립니다.
윌슨 손님이 가방을 들고 있으면 가방부터 받는 게 예의지.
연재 ! 한국말 잘 하시네요?
윌슨 (받으라고) 가방!
연재 아, 죄송합니다. 이리 주세요.
윌슨 (턱 안기고, 앞서간다)
연재 (쉽지 않겠군)
호텔 앞 (아침)
거대한 고급 리무진. 연재, 트렁크에 짐가방을 싣고는 세경에게 꾸벅 인사한다.
리무진 안 (아침)
보조석에 오른 연재, 가방에서 윌슨 CD 꺼내 걸며
연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윌슨씨 음반을 준비해왔어요. (버튼 누르면 피아노곡
흘러나오고) 이곡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곡이구요. (돌아보는) 이렇게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윌슨 조용히 가지.
연재 네?
윌슨 음악도 끄고.
부인 (영어로, 미소로) 이 사람은 자기 음악 듣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연재 (당황) 예에... (음악 끈다) ...
삼나무 숲 길, 녹차 밭 (아침)
# 삼나무 숲길 풍광들 보여 진다. 길게 난 숲길을 따라 걸어 올라오는 연재와 윌슨 부부.
연재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길이에요. 50년이 넘는 삼나무들이
삼백미터 넘게 줄지어 서있습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시면
아름다운 삼나무 사이로 핀 각종 야생화가.
윌슨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가봤나?
연재 네?
윌슨 삼나무 숲 사이에 캐필라노 강이 흐르고 있어. 출렁다리로 강을 건너면서 삼나무 숲을
내려다보는 건 그야말로 장관이지.
연재 아아...
윌슨 올라가면 뭐가 있나?
연재 녹차밭이요.
# 녹차밭 풍광 펼쳐진다.
연재 찻잎은 어릴수록 비싸집니다. 4월 20일경 따는 것을 우전이라고 하고 지금 따는 것은
세작이라고 부르죠. 우전을 가장 고급녹차라고 하지만 지금 따는 녹차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아요. 맛이, 진하니까요. 찻잎을 따서,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윌슨 일본 시즈오카현 안 가봤지?
연재 (또 다!) ... 네.
윌슨 녹차밭에 서면 저 멀리 눈 쌓인 후지산이 보여. 거긴 현 전체가 녹차밭이야. 끝두 없어.
거기 비하면 여긴 동네 텃밭 수준이야. 이걸 보자고 여기까지 올라오게 해?
연재 ... 죄송합니다만 제 생각에 아름다움이란 건.
윌슨 니 생각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내려가야겠어.
연재 후... (보는데)
부인 (다가오더니, 영어로) 너무 기분상해 하지 마요. 원래 괴팍한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은
투정부리고 있는 거예요.
연재 (영어) 무슨 말씀이세요?
부인 (영어) 저 사람 입양아인 건 알죠?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한국에 오면 괜히 더
짜증을 내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속으론 좋을 거예요. 늘 그리워했거든요.
연재 ... (설마? 앞서 가는 윌슨의 뒷모습 보는)
리무진 안, 식당 앞-국도변 가에 두 세 개 거대 식당 모여 있는 (낮)
앞좌석의 연재, 뒷좌석의 윌슨 부부를 향해 설명하는
연재 점심은 궁중닭찜을 드실 예정입니다. 조선시대 임금님께서 드셨다는 음식인데, 그때
그 요리법 그대-로.
윌슨 (OL) 닭은, 제대로 준비했겠지?
연재 그럼요. 제가 직접 골라서 할랄 인증 마크가 붙을 때까지 쭉 지켜봤는데요.
(차가 멈추자) 자, 이제 다 왔습니다.
차에서 내린 연재, 뒷좌석 문을 열어준다. 연재, ‘이쪽으로 오세요’ 윌슨부부를 안내하며
앞장서는데 굳게 닫힌 식당 문 앞에 폴리스 라인이 쳐져있는 게 아닌가?!
연재 ! (당황)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윌슨을 향해) 잠시만 차에 돌아가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윌슨 하. (한심하다는 듯, 삐딱한 웃음으로 돌아서면)
연재 (얼른 전화 거는)
(E)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재 (당황스러운데, 이때 지나가는 행인이다, 후다닥 다가가서) 이 식당 어떻게 된 거에요?
행인 주인아저씨 칼에 찔려서 지금 병원에 있어.
연재 (헉!!) 왜요?
행인 어젯밤에 종업원 내연남이 찾아와서 칼부림 나고 난리도 아니었잖아아.
연재 그럼 제 닭고기는요!?
행인 ?
연재 (미치겠는) 얼마나 힘들게 마련한 건데. 그거 없으면 윌슨씨 점심이 날아간단 말이에요!
행인 (뭐야... 하며 가는)
연재, 불끈 “고기는 빼와야겠어.” 폴리스 라인 통과해 정문 열어보지만 잠겼다. 이런!!!
식당 주변을 돌며 창문을 열어보는 연재. 하지만 다 닫혀있다. 젠장!!! 어떡하지?
그 순간 저 높이 열려있는 창문이 보인다. 연재, 저만치 넘어져있는 의자 놓고 올라선다.
주방 안 (낮)
연재, 창틀에 반으로 접혀 대롱대롱 매달렸다. 겁난다. 그래도 내려가기로 한다.
확 고꾸라지면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연재.
옆구리도 아프고 손목이 긁혀 피도 난다. 연재, 불끈 일어나 냉장고를 연다.
저만치 고기들 사이로 보이는 할랄 마크!
연재,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닭고기를 집어 드는데서.
다른 식당 안 (낮)
연재와 주인(남. 50대) 마주 선
연재 갑자기 이런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다른 고긴 절대 안 되구요, 꼭 이걸로만
요리해 주세요. (닭고기 건네면)
주인 (받아들고 저만치 앉은 윌슨부부 보며) 리무진 타고 온 거 보니 꽤 높은 사람들인가봐?
연재 네. 중요한 고객들이세요. 음식은 최대한 빨리 나오게. 아셨죠?
주인 걱정하지 마. 서비스 잘 해주께.
연재 네. (가는 주인 보고 한시름 놓는) 후...
야외 주차장 (낮)
연재와 리무진 기사, 돗자리 깔아놓고 마주 앉아 빵과 우유 먹고 있는 중
연재 어떡해요. 이런 걸 드시게 해서.
기사 괜찮아. 맛만 좋은데 뭘. 근데 거기 약이라도 발라야 하는 거 아냐?
연재 아. (손목의 피 쪽 빨아 먹고는) 괜찮아요. 맛만 좋은데요. 뭐. (웃는)
기사 허허. (웃다가 흠칫) 근데, 왜 벌써들 나오지?
연재 ? (돌아보면 윌슨 부부 식당을 나서는, 벌떡 일어나) 벌써 식사 다 하신 거예요?
윌슨 무슨 일을 왜 이따위로 해!!!
연재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부인 (영어로) 동글동글한 음식을 내왔길래 당연히 닭고기인줄 알고 먹었더니...
그게 돼지고기였어요.
연재 (헉!)
윌슨 무슬림은 돼지고길 안 먹는다는 사실 몰라? 너, 그만한 상식도 없어?
연재 (당황) 전달이 잘 못 됐나 봐요. 전 분명히 제가 직접 할랄 인증 해온 닭고기로만
요릴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윌슨 변명 필요 없어! 내가 이래서 한국관광을 하기 싫었던 거야. 당장 서울로 올라가야겠어!
(차에 오르는)
연재 (낭패다) ... 후...
골프장 (낮)
임회장, 세경, 지욱, 라운딩 중이다.
지욱, 퍼트 하지만 그린에 공이 올라가지 못하고 구른다.
임회장 어째 세경이만두 못해?
지욱 골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습니다.
임회장 세경아, 이 친구 클럽 좀 바꿔줘야겠다.
지욱 괜찮습니다. 제 것도 쓸 만합니다.
임회장 쓸 만 한 건 필요가 없어. 최고가 필요하지. 사위도 마찬가지고.
(E) 세경의 전화벨.
세경 잠시만요. (전화 받으며 저만치 가는)
지욱 전, 누가 봐도 최곤 아닐 텐데요?
임회장 (그린을 향해 걸으며) 자네가 맘에 든 게 뭔 줄 아나? 여자 문제야.
지욱 ...
임회장 세경이 짝 찾으려고 여러 놈 뒷조사를 했지. 어떤 놈은 여배우 스폰서를 하고 있고,
어떤 놈은 텐 프로에 꽂혀서 살림을 차려줬고, 어떤 놈은 제 비서랑 눈이 맞았어.
난 자네가 대단한 경영인이 되는 것 따위 바라지 않아. 그건 세경이가 하면 되거든.
자넨 조용히 외조만 해. 절대 여자 문제로 속 썩이는 일 없이. 알겠나?
지욱 그렇다면, 세경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 시키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닐까요?
임회장 자네가 세경일 사랑하면 되잖아.
지욱 ...
세경 (E) 큰 일 났어요.
임회장 무슨 일인데 그래?
세경 윌슨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같이 갔던 인솔자, 전화번호 좀 알아봐줘요.
임회장 됐어. 이건 회사 대 회사의 일이야. 잘못되면 넌 이쪽 회사에 컴플레인만 하면 돼.
그 일은 지욱이한테 맡기고 넌 버디나 잡아.
세경 ...
임회장 (지욱을 향해) 내 말이 틀렸나?
지욱 아뇨. 맞는 말씀이세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 봐요.
리무진 안, 골프장 (낮)
뒷좌석의 윌슨, 무거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
연재, 그런 윌슨의 눈치를 보며 소리 죽여 통화중
연재 네 부장님... 지금은 자세하게 말씀 못 드려요... 네... (놀란) 본부장님이요? 저한테요?
... 네. (전화 끊고, 긴장으로 휴대폰 들여다보는)
(E) 휴대폰 진동
연재 (쿵! 심장 떨리는, 심호흡하고 긴장으로 소리 죽여 받는) ... 여보세요?
지욱 본부장입니다.
연재 (흡)
지욱 일이 꼬였다면서요.
연재 (인사 꾸벅) 죄송합니다!
지욱 어떡하겠어요.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인데.
연재 !! (화를 내지 않는다?)
지욱 까다로운 분이라 힘들겠지만, 화는 꼭 풀어주길 바래요. 공연에 지장 받지 않도록.
연재 네... 알겠습니다.
지욱 (E) 그럼 수고해요.
연재 !! (어쩜 이럴 수가! 감동인)
호텔 앞 (낮)
윌슨 부부, 리무진에서 내려서면 연재, 후다닥 다가가서
연재 호텔 측에 얘기해서 스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윌슨 됐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가면)
연재, 급히 앞장서서 호텔 문을 열어주려는데 윌슨의 손이 휙 딸려온다.
윌슨의 반지(다이아몬드 알이 커다란)가 연재의 옷에 껴버린 것.
윌슨 하는 짓마다 밉상이야. (버럭) 빨리 어떻게 좀 해봐!
연재 (난감) 잠시 만요. (반지 빼려고 용쓰는)
윌슨 조심해! 내가 가장 아끼는 반지니까!
연재 (반지를 빼내느라 옷의 올이 쭉 나가지만) 됐어요!
윌슨 (반지 무사한지 보더니, 휙 가는)
연재 윌슨씨! (따라가려는데)
부인 (영어) 됐어요. 가 봐요. 지금은 뭘 해도 기분이 풀리지 않을 거예요. (가는)
연재 ... (후... 머리 헝크는, 어떡하지? 심란한데... 이때 떠오르는 생각) 아!
(가방에서 인터뷰 자료 꺼내 뒤지기 시작한다)
광장 시장 (밤)
연재,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다가 수수부꾸미 집을 발견하고는
연재 이거, 수수부꾸미 맞죠.
주인 예.
연재 (눈이 반짝, 수수부꾸미 바라보는)
호텔 방 (밤)
방문이 열린다. 비단 보자기를 든 연재를 맞는 부인이다.
부인 (영어) 무슨 일이죠?
연재 (영어) 어떻게든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이것만 전해드리면 되는데.
부인 (들어가며, 영어)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요.
연재 (따라 들어가는)
부인 (방안으로 들어가는)
연재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는, 이때 탁자 위에 놓여 진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보이는)
윌슨 (E) 뭐야!
연재 (벌떡 일어나 보면, 방에서 나온 윌슨이고)
연재 사과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보자기 내미는) 이거...
윌슨 (비아냥) 허! 돼지고긴가?
연재 (탁자에 놓고 보자기 풀며) 인터뷰 기사에서 봤어요. 퀘사디아처럼 생겼는데 안에 팥이
들어있었다고.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 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거... 혹시 이게 아닐까
싶어서요. (상자를 열면 수수부꾸미 들어있는)
윌슨 !
연재 오늘 일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저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인상이 더 나빠지진 않으셨음 좋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문 쪽으로)
윌슨 ...
문을 열고 나가려던 연재, 살짝 돌아보면 수수부꾸미를 바라보고 있는 윌슨이다.
조용히 문을 닫아주고 나오는 연재. 화가 풀릴 것 같은 예감.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연재의 집 외경 (아침)
순정 (E) 출장을 가?
순정의 방 (아침)
하늘하늘 예쁜 잠옷 입은 순정, 잠자리에서 겨우 눈만 뜬 상태로
순정 어디루?
연재 (문가에 선 채, 당황, 둘러대는) 어. 어... 제주도?
순정 (벌떡 몸을 일으키는) 면세점 들르면, 나 가방 하나만 사다주면 안 돼?
연재 (젠장) 통영이다. 통영. 착각했다.
순정 통영? 좋겠다... 아... 늬 아빠랑 통영 갔을 때 참 좋았는데.
연재 ... 내가 이번 생일에는 통영보다 더 근사한데 꼭 데꾸가께.
순정 그 얘기 십년 째야. 안속아! (다시 눕는)
연재 상 차려놨으니까 아침 꼭 먹구.
순정 (자는)
연재 ...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문 닫는)
연재의 거실 (아침)
문 닫고 돌아서는 연재, 마음이 너무 무겁다.
(E) 전화벨
연재 (후다닥 받는다) 네, 부장님. (놀란) 지금요? (엄마가 들을 새라, 소리 죽여)
부장님, 저 오늘 월찬데. 병원 간다구 말씀드렸. (버럭 휴대폰 귓가에서 뗐다가)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끊고 한숨 폭) 병원 한번 가기 되게 힘드네...
호텔 방 (아침)
연재,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경과 노부장, 굳은 얼굴로 서있다.
연재 (들어서며, 가쁜 숨 몰아쉬는) 무슨 일이세요?
세경 (서늘한) 반지, 어딨어요?
연재 네? 무슨 반지요?
세경 그건 본인이 더 잘 알지 않나?
연재 ... 혹시 윌슨씨 반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경 빨리 돌려줘요. 지금 돌려주면 책임은 묻지 않을 게요.
연재 !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 얘긴... 제가 윌슨씨 반지를 훔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세경 연기할 필요 없어요. 벌써 CCTV 확인했으니까.
연재 (황당한) 뭘 확인하셨다는 건 지.
세경 (연재 어깨에 걸린 가방을 탁 낚아채더니, 탁자에 와르르 쏟아 붓는다)
연재 저기요...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노부장 (낮고 단호하게 말리는) 가만있어!
세경 (소지품 살피고, 가방 뒤진다)
연재 (억울) 그래요. 뒤져보세요. 나올 리가 없을 거니까.
세경 (피식) 그러게. 바보 같은 짓이긴 하네. 벌써 빼돌렸을 게 뻔한데.
연재 !! 말씀이 좀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무슨 근거로 제가 훔쳤다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세경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윌슨씨 방에 들어온 건 당신 딱 하나야.
연재 그래서, 제가 범인이라구요?
세경 그럼 누구겠어? 윌슨씨가 자기 반질 훔쳤을 린 없잖아?
연재 딴 데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잖아요. 윌슨씨 어디계세요? 제가 직접 여쭤봐야겠어요.
윌슨 (E) 됐어!
일동 (돌아보면)
윌슨부부 (나오는)
윌슨 지금 당장 공항으로 가는 차 대기시켜.
세경 이번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반지 가격과 상관없이 윌슨씨가 원하시는 만큼
보상을 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공연은, 하고 가주세요.
윌슨 난 그 반지 없인 절대로 피아노를 치지 않아.
세경 ! (연재 향해) 뭐하고 있어요?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예요?
연재 반지에 관한 거라면... 전,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세경 ! (분노로 보면)
윌슨 어제 가져온 선물 때문에 마음이 좀 풀릴 뻔 했는데... 흠. 결국 반지 때문에 온 거였지?
연재 왜들 이러세요? 저, 아니에요.
윌슨 (싸늘하게 웃고는, 휙 나가는)
노부장 (난감) 윌슨씨! 윌슨씨! (따라 나가는)
연재 (동시에) 저 아니에요! 저 아니라구요!
세경 (연재의 따귀를 올려붙이는)
연재 !! (충격으로 보면)
세경 차라리 돈을 훔치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진 않았을 텐데. (나가는)
연재 (멍하니 서 있다 흐트러진 머리 쓸어 올리는데 탁자위에 쏟아진 물건 사이로 사진
보이는)
연재, 사진을 집어 든다. 초등학교 때 여행가서 찍은 가족사진. 환하게 웃고 있는 아빠.
아빠 앞에서 모욕을 당한 기분. 연재, 비참하고 초라한데.
공항 검색대 (아침)
윌슨, 검색대 통과하는데 삐- 소리 울린다.
검색요원, 검색기 들어서 윌슨의 온몸을 훑는데 엉덩이 쪽에서 삑-
윌슨, 의아해서 가디건 들춰보면 반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윌슨 (낭패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부인 (보는)
윌슨 ...
병원 외경 (아침)
병원 복도 (아침)
은석과 김명준(동료의사), 걸어온다.
명준 희귀케이스 걸렸다며?
은석 조직검사 해봐야 알아.
명준 CT만 봐도 딱 알겠던데 뭐. 어떻게 서른네 살에 담낭암이냐.
은석 ...
명준 부럽다! 임상시험하기도 좋고, 케이스 리포트도 딱이고!
암튼 진짜 운 좋은 놈이야! (어깨 툭 치고 가는)
은석 ... (시계를 본다, 11시가 넘어간다, 스테이션 쪽으로, 양미정(간호사,20대)에게)
이연재 환자 아직 안 왔습니까?
미정 네.
은석 ... (돌아서다 흠칫, 연재가 서있다)
연재 ...
은석 (애써 퉁명)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연재 ... (피식) 야!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그래.
은석 (또 반말이다) ... 보호자는요.
연재 ... 니가 해줘. 너, 친구잖아.
은석 (후...) 보호자, 데려오세요. (휙 돌아서서 간다)
연재 ...
은석 (걸어가다 멈춰 선다, 젠장)
연재 ...
은석 ... (천천히 돌아본다)
연재 (힘없는 미소로)
은석 (시선 외면하는)
판독실 (다른 날 낮)
연재의 CT, 조직검사 결과, PET 화면 등이 차례로 띄워지면
은석과 명준을 포함한 동료의사1,2, 화면 보면서
명준 대박이다 진짜.
동료1 (명준을 찌릿 흘기고, 은석을 향해) 제가 얘기할까요? ... 친구분이시라면서요.
은석 (정색) 누가 그래, 친구라고?
동료1 (당황) 그래서 동의서에 싸인하셨다고.
은석 그런 거 아냐. (벌떡 일어나 나간다)
동료1 어떻게 친구한테 시한부 판정을 내릴라 그러지?
명준 야! 저승사자가! 친구 아니라 엄마라도 안 뺏기지, 희귀 케이슨데!
병실 복도 (낮)
은석, 걸어오다 멈칫. 저만치 환자복 입은 연재, 통화 중이다.
연재 (난감) 굴? ... 통영이 굴이 유명한가? 엄마, 굴 먹고 싶어? 알았어, 꼭 사갖고 갈게.
(웃는다)
은석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 보는)
연재 (웃는 채로, 전화 끊고 고개 돌리다 은석과 눈 마주치는)
진료실 (낮)
연재, 은석과 마주 앉으며
연재 엄마한테 통영으로 출장 간다 그랬거든. 암 아니면, 굳이 말해서 걱정시킬 필요 없잖아.
은석 (보는)
연재 (은석의 얼굴을 보고, 웃음기 사라지는)
은석 보호자한테 얘기할까요?
연재 (충격으로 굳어졌지만 애써 밝게) 이 나이에 보호자는 무슨. 말해. 내가 내 보호자니까.
은석 담낭암이에요.
연재 (멍해진)
은석 (빠르게) 젊은 사람한테 발병하기 쉽지 않은데, 선천성 췌담관합류이상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담관에 침윤됐고, 간까지 전이된 상태라 절제는 불가능하고,
방사선 치료도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워요.
연재 (멍한 채로) ...
은석 (E) 모레부터 항암제를 맞아보는 걸로 합시다. 몸 상태를 체크해야 하니까 입원한
상태로 검사 받는 게 좋겠어요.
연재 ...
은석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죠.
연재 ... 얼마나... 살 수 있어?
은석 장담 못해요.
연재 장담 해봐.
은석 못한다니까요.
연재 해보라니까?
은석 ... 교과서 상으론 6개월이요.
연재 ... 6개월...
은석 ...
연재 ...
은석 (침묵이 불편한데)
(E) 휴대폰 진동
은석 (차라리 반가운) 통화 좀 할게요. (받는) 네, 센터장님. 컨퍼런스 자료는 준비 다
됐습니다. 지금요? 아뇨. 괜찮습니다. 진료 끝났습니다. 네.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전화 끊고) 병실로 돌아가 계세요. 안정제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구요.
연재 ...
진료실 앞 복도 (낮)
연재, 넋이 나간 채 걸어 나오면 빠른 걸음으로 앞장 서가는 은석이다.
그런 은석을 멍하니 보는 연재.
(E) 전화벨
연재 (액정 보면 “부장님 만세” 떠있다)
연재의 사무실 (낮)
노부장, 멍한 얼굴로 책상으로 다가와 서는 연재를 향해
노부장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고 월차를 챙겨 먹어?! 제정신이야? 분위기 파악이 그렇게
안 돼?!
연재 ...
노부장 회장님이 임세경 상무를 호출한 모양이야. 임상무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우리 팀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들어오면 무조건 빌어.
연재 ... 반지... 제가 훔친 게 아닌데요.
노부장 (버럭) 지금 그게 중요해?! 임세경이 누군지 몰라? 서진그룹 임회장 딸이야.
괜히 신경 건드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그런 사람들 특징은 잘못했습니다!
나 죽었어요! 하면 쯔쯔 불쌍한 것들... 이러면서 눈감아 주는 거야.
괜히 알량한 자존심 세우다 화라도 돋구면, 너나 나나 좋을 거 하나 없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연재 ...
라인 투어 로비 (낮)
세경, 들어오면 노부장, 부리나케 달려 나와
노부장 상무님, 회장님 뵙기 전에 저 좀 잠깐.
세경 (보는)
연재의 사무실 (낮)
나리, 승아, 모여앉아
승아 우리한테까지 불똥 튀면 어떡해요?
나리 설마! ...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건지. (하고 연재를 흘기는데)
연재 (그저 멍하니 앉아)
나리 (못마땅, 고개 절레절레, 그러다 갑자기) 악!!! (비명 지르며 내려다보면)
봉길 (나리의 다리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나리 (발작)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봉길 (기어 나와서는) 동전이 떨어져가지구. (백 원짜리 보여주는)
나리,승아 (오우, 짜증으로)
연재 (그 와중에도 멍한)
이때 노부장, “이쪽으로 오시죠” 하며 세경을 에스코트해 들어온다.
노부장 (들어오며) 이연재씨! 커피 두 잔 갖고 얼른 회의실로 들어와!
연재 ... (멍한 눈 들어, 보면 회의실로 들어가는 노부장과 세경이다)
회의실 (낮)
세경과 노부장, 마주 앉은
노부장 이번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20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 해왔지만 이런 일은 저도
처음이에요.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세경 그러게 왜 그런 형편없는 직원을 내보내셨어요?
노부장 !
세경 중요한 업무라고 몇 번씩 강조했을 텐데. 아닌가요?
노부장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무님. 이 문제는
그 친구의 개인적인 잘못인거지 저희 팀 전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세경 (OL)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 적합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
그것도 다 윗사람의 임무죠.
노부장 !! (안되겠다) 상무님! 상무님 말 한마디에 제 생사가 달려있습니다.
제발 회장님께 잘 좀 말씀드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경 그런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연재, 커피 쟁반 들고 들어오는
세경 어쨌든 전 사실만 전달할 거예요. 누구한테 책임을 묻느냐는 회장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죠. 그럼 전 이만. (확 일어서는데)
연재 (동시에 커피잔 놓으려고 내밀다가 세경과 부딪히는 바람에 엎지르는)
세경 (비명) 아! 뜨거!
연재 (당황) 죄송합니다.
세경 (짜증으로 털어내는)
노부장 (버럭) 뭐해! 얼른 닦아드리지 않고!
연재 (각 티슈에서 티슈 꺼내 정신없이 치맛단 따위를 닦는데)
세경 됐어요! 저리 치워요! (툭 쳐내는)
연재 ! ...
세경 (내려다보며, 하) 이런 일이나 딱 어울리는 사람인데.
연재 (모멸감으로 굳어진)
세경 (마뜩찮게 일별하고 나가면)
노부장 상무님! 상무님! (부르며 따라 나가는)
연재 (멍하니 한참을, 서서히 끓어오르는, 내가 여기서 뭐하는 짓인가...
손에 든 티슈 탁 던지는) ...
연재의 사무실 (낮)
굳은 표정의 연재, 회의실을 나서면 노부장, 사무실로 들어서며
노부장 (뒷목 잡고) 어우 혈압이야. 어우 혈압! (그러다) 이연재! 너 나 엿 먹일라고 아주
작정을 한 거지? 사태 수습하라고 불러놨더니, 불 난 집에 기름을 끼얹어?!
너!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당장 짐 싸는 거야! 알어?!
연재 ...
노부장 어후! 내가 저걸 진즉에 짤라버렸어야 하는 건데. 울구불구 통사정 하길래 불쌍해서
정규직 시켜줬더니 은혜를 웬수로 갚어!? 나이 먹었으면 시집이나 갈 것이지 떡하니
눌러 붙어가지구. 너 같은 것들 때문에 새파랗게 어리고 학벌 빵빵한 스물다섯 살짜리가
백수로 놀고 있는 거야!
연재 ... 부장님.
노부장 왜! 뭐!
연재 저... 십년 동안 부장님 모시고 일 해왔어요. (울컥) 십년동안 부장님 커피를 타고
부장님 책상을 닦았어요. 사모님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죽 끓여서 문병도
갔구요. 부장님 승진 탈락해서 죽고 싶다고 우실 때... 같이 울었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저를... 조금만 믿어주고, 존중해주실 수는 없나요?
노부장 얘가 지금 뭐래는 거야!
연재 ...
노부장 뭘 멀뚱히 섰어!? 들어가서 회의실이나 치워!
연재 (눈물 그렁, 고개 떨군다)
노부장 내 말 안 들려? 회의실이나 얼른 치우라고!!
연재 (끓어오른다, 낮게) 부장님께서 치우시죠.
노부장 뭐?
연재 ... (용기 낸다, 고개 든다) 부장님께서 치우시라구요!
일동 (헉!, 고개 들어 보는/봉길은 없는 상황)
노부장 이연재 너 제정신이야?
연재 (자리로 가서 앉는)
노부장 너! 그러다 확 짤리는 수가 있어!?
연재 그러실 수는 없을 걸요?
노부장 뭐?
연재 제가 쫌 전에 이 회사를 그만 뒀거든요.
일동 ?!!!
연재 (서랍을 열어 뒤지며) 월차 한번 쓰는 게 그렇게 빌 일인가? 몸 아파서 병원 좀
가겠다는데?! 내 참 드러워서. 얘가 어딨지? 어. 여깄네. (사표 봉투 들고 일어서서)
이게 5년 전에 써놓은 거거든요. 부장님이 저한테 인격모독, 성희롱... 그런 거
하실 때마다 확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꾹 참았어요.
근데 이제, 안 참을려구요.
노부장 그래서! 사표라도 던지시겠다?!
연재 그래! 사직서 여깄다! 이, 개자식아!!! (얼굴에 휙 던지는)
노부장 !!! 너,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고 싶어?! 내가 너, 영원히 매장시켜 버릴 수도 있어!
연재 하. 영원히...?
노부장 웃어?
연재 저한테는 영원히 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거든요. (휙 돌아서는)
노부장 저거 저거! 저거 왜 저래?
연재 (나가다가, 나리의 책상 위에 올려 진 명품백을 집어든다)
나리 ! 왜 이래요?
연재 너, 나한테 꿔간 돈 2부 이자 쳐서 갚어! 그럼 그때 이 빽 돌려주께. (나가는)
일동 (벙)
복도 (낮)
연재, 입술 악 물고 눈물을 꾹 참으며 걸어 나오는데
화장실에서 나서던 세경과 맞닥뜨린다.
연재, 주춤한다. 세경, 그런 연재를 경멸어린 눈빛으로 슥 보더니 돌아선다.
연재 (그 눈빛이 몹시 기분 나쁘다, 끓어올라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잠시만요!
세경 (멈춰 선다, 하. 불러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우습다, 천천히 돌아보면)
연재 (성큼성큼 다가간다)
세경 (거만한 눈길로 보는데)
연재 윌슨씨가 그렇게 가버린 건 저도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지, 제가 훔치지
않았어요.
세경 안 훔쳤다는 증건, 없잖아?
연재 훔쳤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세경 당신 때문에 얼마나 큰일을 망쳤는지 알기나 해?
연재 계속 절 의심하시나 본데... 자꾸 이러시면 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
세경 (비웃음, 피식) 하.
연재 (모멸감으로 굳어져) 왜 웃으세요?
세경 당신 같은 사람한테... (빈정대는 미소로) 훼손 될 명예 같은 게 있을까?
연재 ! (따귀 날리는)
세경 !!
연재 어때? 뺨 맞으니까 기분 별루지? 나도 기분 되게 별루였어!
세경 (기막혀 보면)
연재 왜, 재벌집 딸만 다른 사람 뺨 때릴 수 있다는 법이라도 있니?
너 같은 애는, 사람 함부로 해도 된다는 자격 같은 거 갖고 태어났어?
명예? 그거 너한테만 있는 거 같애? 왜?! 나, 우리 부모님한테 꿀밤 한 대 안 맞아보고
자란 사람이야. 나도 너만큼 귀한 사람이라고!
너! 부모 잘 만나 재벌집에서 태어난 거, 그런 걸로 너무 뻐기지 마.
니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그런 걸로 잘난 척 하면 좀 웃기지 않니?
세경 (씩씩대며 보다가 따귀 때리려고 팔 휘젓는데)
연재 (삭 피한다) 내가 운동신경이 좀 남달라.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못 피했지만!
세경 (황당해서 쏘아보는)
연재, 그런 세경을 뒤로 한 채 걸어 나오는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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