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춘할망
인사동 모처의 갤러리 (현재)
하얀 벽에 인부들에 의해 그림 한 점이 붙는다.
대범한 드로잉에 유화로 색채를 입힌 성산포 일출봉을 뒤로 한 할머니가 우뚝
서있는 그림.
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20대 중반의 여자
진행요원 작가님, 팸플릿 나왔어요
혜지 아...예 고마워요.
팸플릿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혜지.
유채꽃을 회화 한 겉표지를 바라보면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밭을 지나 드넓게 펼쳐지는
에메랄드 빛 바다로 화면이 넘어간다.
-바닷가
잔잔하게 일렁이며 햇빛에 반짝이는 제주 성산포 바다.
계춘이 먼 바다를 응시하며 짱짱한 고무 잠수모를 단숨에 당겨쓴다.
등 뒤로 새까만 잠수복 차림의 해녀들이 수경을 쓰고 허리에 납을 두른다.
수십 명의 해녀 무리를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바다로 향하는 계춘.
계춘을 필두로 태왁과 망사리를 둘러멘 해녀들이 하나 둘 바다에 몸을 담근다.
-바다
주황색 태왁을 밀며 먼 바다로 나아가는 해녀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어린혜지 NA 우리 계춘이 할망은 용왕 할망이 점지하신 해녀 대장이야.
-바닷속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빠르게 10미터가 넘는 바닥까지 잠수하는 계춘.
전복, 소라 등을 망사리에 담다가 꿈틀거리는 거대한 문어와 맞닥뜨린다.
다리를 꿈틀거리며 저항하는 문어와 악착같은 계춘의 사투.
-석호의 배
배를 깔고 엎드린 6살 어린 혜지가 검은 사인펜으로 스케치북에 전복을 그린다.
그 때 힘찬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숨비소리가 들리자 번쩍 고개를 쳐드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계춘이 할망……!
어린 혜지가 벌떡 일어나 바다를 보면, 계춘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어린혜지 할망~! 계춘이 할망~!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계춘, 거대한 문어를 야무지게 틀어잡고 있다.
어린 혜지가 와- 환호성을 지르며 폴짝폴짝 뛰자 선장실에서 내다보는 석호.
석호 캬- 10키로도 훨씬 넘겠네. 혜지야, 느 할망이 너 만한 문어를 잡았다.
어린혜지 NA 할망이 손을 뻗으면 전복이랑 해삼이랑 문어가 찰싹찰싹 달라붙었어.
-귤 농장
겨울, 계춘과 마을 여자들이 귤을 따고 있다.
혼자 귤나무 한 그루를 물끄러미 보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엄숙하게) 네 이름은 뽀삐.
다음 귤나무로 이동해서 또 다시 면밀히 살피던 어린 혜지.
나무 기둥에 움푹 팬 흔적을 발견하고는 킥 웃는다.
어린혜지 네 이름은 또꼬망.
키들거리던 어린 혜지가 계춘을 발견하고 후다닥 뛰어간다.
어린혜지 할망~ 저기 귤나무에 똥구멍 있어!
그러다 돌에 걸려 와락 앞으로 넘어지는 어린 혜지.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직전인 어린 혜지를 계춘이 번쩍 일으킨다.
계춘 뚝! 요만한 걸로 눈물 짜면 용왕 할망이 이놈 한다!
대수롭지 않게 어린 혜지 옷을 툭툭 털어주는 계춘.
어린 혜지가 훌쩍이면서 계춘의 목을 감싸 안는다.
-하늬복이 오름
이른 봄, 소쿠리를 끼고 잡목이 무성한 산길을 오르는 계춘과 어린 혜지.
계춘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요것들 꼬물꼬물 돋아나는 소리를.
숨죽이고 계춘을 응시하는 어린 혜지, 침을 꼴깍 삼킨다.
계춘 저기다!
계춘이 가리키는 쪽으로 와락 뛰어가서 마른 풀을 걷어내는 어린 혜지.
꼿꼿하게 자라고 있는 고사리들을 보자 어린 혜지의 입이 떡 벌어진다.
산들바람이 불어 고사리들이 파르르 흔들린다.
어린혜지 NA 할망은 식물들이 자라는 쬐끄만 소리도 들을 수 있었어.
능숙하게 고사리를 끊어 소쿠리에 담는 계춘.
혜지가 잡초들 사이에서 피어난 가녀린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반색한다.
어린혜지 할망, 꽃이야!
계춘 곱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공짜가 또 어디 있을꼬.
3월 날씨가 이리 포근한 걸 보니 올해는 유채꽃이 빨리 피겠구나.
-하늬복이 오름 정상
계춘과 어린 혜지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 붉게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본다.
어린혜지 할망, 안쪽으로 와. 위험하잖아.
절벽 가까이 위태롭게 서 있던 계춘을 끌어당기는 어린 혜지.
계춘 (대견한 미소를 지으며)오냐. 너는 어이 바다 용왕님께 인사하거라.
어린 혜지가 입가에 두 손을 모아 크게 외친다.
어린혜지 용왕님! 혜지 왔어요. 할아버지랑 아빠한테 혜지 잘 지낸다고 전해주세요!
혜지가 할망 잘 보살피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계춘이 애틋한 눈으로 어린 혜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어린혜지 NA 우리 계춘이 할망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대장 할망이야!
계춘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발견하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NA (나지막하게) 할망……
어린 혜지가 짐짓 어른스럽게 계춘의 등을 토닥거린다.
타이틀 계춘할망
제주항 여객 터미널 앞
달래와 봄나물들을 늘어놓고 초롱초롱하게 앉아 있는 어린 혜지.
서른 살 혜지 친모가 다가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린 혜지가 벌떡 일어나서 배꼽 인사를 한다.
어린혜지 (배꼽인사) 안녕하세요.
혜지친모 (당황하는) ……안녕.
어린혜지 혹시 한라산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세요?
혜지친모 ……누가 만들었어?
펄쩍펄쩍 뛰며 팔을 크게 휘둘러 보이는 혜지.
어린혜지 이렇게 무지 무지 큰 거인 설문대 할망이 만들었어요.
혜지친모 그래? 그럼 이 나물들은 한라산에서 캤어?
어린혜지 얘들은 새끼 오름에서 자랐어요.
혜지친모 새끼오름?
어린혜지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만들려고 치마폭에 흙을 잔뜩 담았는데요.
그 때 치마 여기저기 찢어진 구멍으로 흙이 떨어져서 오름이 됐어요.
저기 보이는 게 거문 오름이구요. 저건 안세미 오름이에요.
어린 혜지가 먼 산을 가리키는데도, 어린 혜지만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혜지 친모.
혜지친모 할머니는?
그 때 어린 혜지, 멀리서 부랴부랴 뛰어오는 시청 직원을 발견한다.
어린 혜지가 늘어놓은 나물들을 단숨에 챙겨서 허둥지둥 도망을 간다.
하지만 이내 시청 직원에게 나풀거리는 갈래머리를 잡히고 마는 어린 혜지.
시청직원 여기서 장사하면 안 된댔지?
어린혜지 왜 안 돼요? 여기가 아저씨 땅이에요?
시청직원 터미널은 우리 제주도의 얼굴이라고 했잖아!
관광객들 드나드는 데 지저분하게 풀때기나 늘어놓으면 되겠어?
어린혜지 방금 캐 온 나물이 왜 지저분해요? 아저씨보다 훨씬 깨끗한데!
시청직원 요 꼬맹이가 말로는 안 되겠네.
시청 직원이 잡고 있던 혜지의 갈래머리를 세게 잡아당긴다.
아야- 비명을 지르며 앓는 소리를 하는 혜지.
그 때 나타난 계춘, 들고 있던 소쿠리로 시청 직원의 등짝을 후려친다.
계춘 감히 우리 손지를 괴롭혀? ……가만, 너 전파상네 둘째로구나?
시청 직원이 얼른 혜지의 머리카락을 놓으며 꾸벅 인사를 한다.
시청직원 안녕하세요, 어르신.
계춘 넌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고 잘 보살피라 하신 방정환 선생도 모르냐!
시청직원 ……누, 누구요?
계춘 시커먼 콘크리트 바닥보다야 파릇파릇한 봄나물이
육지 사람들 보기에도 훨 좋지! 안 그러냐!
시청직원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어린 혜지가 쩔쩔매는 시청 직원에게 혀를 쏙 내밀며 메롱을 한다.
한편 쭈뼛거리며 서 있던 혜지 친모를 매서운 눈빛으로 보는 계춘.
계춘의 집 안방
입을 앙 다물고 거울 속 자신의 양 갈래 머리를 보는 어린 혜지.
비장하게 가위를 들어 거침없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삐뚤삐뚤하게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카락이 어린 혜지의 얼굴을 덮는다.
밥상을 들여오던 계춘이 어린 혜지의 산발을 보고 기겁한다.
어린혜지 (해맑게) 이제 절대 안 잡히겠지?
계춘 (버럭) 가뜩이나 선머슴 같은 제집아이가 머리까지……
어린혜지 (긴장하는) ……
계춘 요런 천방지축 쉬멩이 같은 것!
계춘이 주위를 둘러보다 등긁개를 집어 들자 후다닥 도망을 치는 어린 혜지.
옆을 쌩 스쳐 방을 나가는 어린 혜지를 잡았다가 놓치고 마는 계춘이다.
어린혜지 E 이제 정말 나 못 잡겠지?
잔뜩 화가 났던 계춘이 픽 웃어버리고 만다.
해변상가
계춘과 똑같은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를 한 어린 혜지. 계춘의 등에서 잠들었다.
(cut to)
계춘, 바다를 보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파도에 떠밀려온
은갈치 몇 마리가 파닥 거리는 모습이 은연중에 보인다.
계춘 오메 저것이 왠 떡 이래~
계춘, 혜지를 조심히 벤치에 잠시 눕히고, 은갈치를 주우러 해안가로 걸어가는 계춘.
손으로 잡으려니 자꾸 미끄러져 이리저리 잘도 빠져 나가는 은갈치.
생선이 계춘을 잡는지 계춘이 생선을 잡는지 모르게 계춘 약을 올리는데....
벤치에 누워있던 혜지가 잠에서 깬다.
혜지 두리번거리는데 할머니가 없다. 덜컥 겁을 먹는 혜지.
드디어 손아귀에 들어온 은갈치
계춘 허따 그놈 실 허다
잠시 후, 들리는 혜지의 울음소리. 깜짝 놀라 일어서는 계춘.
눈물콧물 범벅이 된 혜지. 애타게 계춘을 부른다. 두리번거리며 뛰어다니는 혜지.
해변 저 편에서 걸어 나오는 계춘의 실루엣.
혜지 할망! 할마앙............(엉엉)
계춘 아이고! 내 새끼 놀랬구나.
혜지 (으앙앙)
코알라처럼 계춘에게 엉겨 붙어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는 혜지.
혜지 할......망(끅끅) 없어(끅끅) 진줄(끅끅) 알았(딸꾹)잖아.......
계춘 (혜지를 등에 업고) 할망은 우리 손지 두고 절대 어디 안가!
자, 이제 늦기 전에 아범 만나러 가자
아버지 산소
아버지의 산소를 향해 어설픈 절을 두 번 한다.
어린혜지 (씩씩하게) 아빠, 혜지 왔어! 할망이랑 왔어!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계춘.
철퍼덕 앉는 어린 혜지, 간단하게 펼쳐놓은 음식에서 전 한 점을 집어 든다.
어린혜지 아~
봉분을 향해 잠깐 전을 내밀고 있더니 얼른 제 입에 쏙 넣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할망 손맛이 세상에서 제일이지?
어린 혜지가 오물오물 전을 씹어서 꿀꺽 삼킨다.
어린혜지 혜지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사람들이 자꾸 그려달라고 해.
한 장에 100원씩 받아서 벌써 1200원이나 모았어. 짱이지?
(계춘을 보며) 할망~ 얼마 더 모으면 크레파스 살 수 있어?
서글픈 얼굴로 물끄러미 어린 혜지를 지켜보고 있던 계춘.
계춘 아직 한참 더 모아야 한다. 이만 가자.
무릎을 부여잡고 힘들게 일어서는 계춘.
시무룩한 어린 혜지, 술을 산소 주위에 뿌린 뒤 보자기에 남은 음식을 싼다.
그 때 큰 뱀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주위를 살피는 계춘.
어린혜지 아빠, 담에 봐.
엉성하게 싼 보따리를 챙겨든 어린 혜지가 뱀과 사투를 벌이는 계춘을 발견한다.
양손에 쥔 나뭇가지와 발로 뱀의 목과 몸통을 누르고 있는 계춘.
뱀의 몸통이 격렬하게 꿈틀거리자 어린 혜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린혜지 (다급한) 할망! 계춘이 할망!!!!!
계춘 (태연하게) 니가 보고 있으니 요놈이 부끄러워하네.
어이 못 본 척 해.
어린 혜지가 재빨리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다.
그 틈에 힘을 꽉 줘서 뱀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계춘.
발을 동동 구르던 어린 혜지가 살그머니 손가락 사이로 계춘을 본다.
축 늘어진 뱀의 목을 잡아서 들어 올리는 계춘.
우와- 감탄을 하는 어린 혜지, 폴짝폴짝 뛰며 박수를 친다.
어린혜지 우리 할망이 뱀을 이겼다!
위풍당당하게 뱀을 든 계춘이 흐뭇하게 웃는다.
문방구
구석에서 큼직한 36색 크레파스를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는 어린 혜지.
24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면서도 눈은 자꾸만 36색 쪽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이내 만족한 듯 웃으며 24색 크레파스를 품에 꼭 안는 어린 혜지.
계산대로 나가자 계춘과 함께 있던 주인이 어린 혜지의 파마머리를 쓰다듬는다.
주인 머리까지 볶아 놓으니 어르신 판박이네요.
계춘 내 핏줄인데 당연한 소릴! 얼만가?
주인 5000원이요.
계춘이 들고 있던 묵직한 보따리를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주인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둘러 보자기를 풀어본다.
축 늘어진 뱀이 나오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주인.
주인 이건 배, 뱀 아닙니까?
계춘 푹 고아서 거스름돈만큼 가져오게.
주인 (황당한) ……네?
크레파스를 품에 안은 어린 혜지를 데리고 유유자적 가게를 나가는 계춘.
어린 혜지와 크레파스 <몽타주>
-계춘의 집 마루
날개달린 물고기, 꽃을 단 고사리, 등마루 바닥, 장독대, 담벼락 할 것 없이 그림을 그린 혜지의 흔적들이 베어나고, 6살 어린 아이의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온 천지에 널려있다.
배를 깔고 누워서 <우리 집> 그림을 새로 산 크레파스로 신나게 색칠 중인 어린 혜지.
아담한 집, 화단의 꽃들, 빨랫줄에 걸린 잠수복 등이 빼곡하게 종이를 채우고 있다.
-해녀 판매장
색칠까지 야무지게 한 문어 그림을 빨간 고무대야에 붙이는 어린 혜지.
-석호의 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모델 노릇을 하며 그림을 힐긋거리는 석호.
채색을 거의 마무리한 뒤 석호의 금니를 보며 망설이는 어린 혜지.
유일하게 새것인 금색 크레파스를 집으려다가 슬그머니 노란 크레파스를 꺼낸다.
노란 크레파스로 석호의 금니를 채운 뒤 그림을 건네는 어린 혜지.
석호가 혀끝으로 제 금니를 문지르며 쩝쩝거린다.
석호 (중얼거리는) 황니가 아니라 금닌데……
어린혜지 금색은 할망 꺼에요!
섭섭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며 100원을 내미는 석호.
어린혜지 색칠 그림은 500원이요.
석호 ……인상률이 담뱃값 뺨치네.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500원짜리 동전을 내미는 석호.
어린혜지 (배꼽인사) 감사합니다!
-유채꽃밭
어린 혜지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품에 안고 유채꽃 사이를 뛰어다닌다.
흐뭇하게 지켜보는 계춘, 어린 혜지가 유채꽃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다.
계춘 (불안한) 혜지야. (크게) 혜지야?
방향감각을 잃고 유채꽃들 틈에서 허둥대는 계춘.
그 때 어린 혜지가 불쑥 튀어나와 스케치북을 내민다.
어린혜지 우리 가족 소풍이야.
마구잡이로 칠한 노란 바탕에 손을 잡고 서 있는 계춘과 어린 혜지.
어설픈 그림인데 계춘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계춘의 집 안방
벽에는 어린 혜지가 그린 <우리 집>, <유채꽃밭에서> 등의 그림들이 붙어 있다.
어슴푸레 달빛이 스미는 방,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운 계춘과 어린 혜지.
갑자기 꿈틀거리며 이불 밖으로 나가는 어린 혜지, 크레파스 뚜껑을 연다.
계춘 어이 자자. 결혼식 가려면 새벽같이 비행기를 타야 한다.
어린 혜지가 몽당 크레파스들 틈에서 하나도 안 닳은 금색 크레파스를 꺼낸다.
외출용 작은 분홍색 가방에 금색 크레파스를 잘 챙겨 넣는 어린 혜지.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던 어린 혜지가 계춘을 아랫목으로 밀어 넣는다.
어린혜지 할망이 안쪽으로 와서 자. 할망 찬 거 싫어하잖아.
계춘 (흐뭇한) 손지 덕에 벌써부터 호강이네.
못 이기는 척 아랫목으로 이동하는 계춘과, 그 옆으로 쏙 들어가 눕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할망~ 우리 내일 자장면 먹어?
계춘 ……까짓것 먹지 뭐.
어린혜지 시장 구경도 해?
계춘 그럼. 할망 손 꼭 붙들고 얌전히 따라다니면 예쁜 옷도 사주지.
어린 혜지가 슬그머니 계춘의 손을 잡는다.
웃으며 어린 혜지의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는 계춘.
어린혜지 할망~ 결혼이 뭐야?
계춘 ……남자랑, 여자랑…… 짝지어 사는 거.
혜지 왜 짝지어?
계춘 너처럼 예쁜 새끼 보고, 의지해서 살려고.
벽에 걸려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태윤의 사진을 흘깃 보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그럼 우리 아빠 짝은?
계춘 ……멀리 다른 짝 찾아 떠났지.
어린혜지 (시무룩한) ……
계춘 (넌지시) 어멍 보고 싶으냐?
어린혜지 ……응.
계춘 (섭섭한) ……어멍이랑 살고 싶어?
어린혜지 (단호한) 아니! 그건 아니야. 나는 여기서 할망이랑 평생 살 거야.
할망이랑 바다도 나가야 하구, 할망이 캐온 봄나물도 팔아야 하구,
바다 용왕님께 할아버지랑 아버지 안부도 물어야 하구…… 그렇지?
계춘 오냐.
애틋한 표정으로 어린 혜지의 배를 토닥거리는 계춘.
부산 국제시장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른 손으로 어린 혜지의 손을 잡은 계춘.
시장 구경에 정신이 팔린 어린 혜지, 계춘이 이끄는 대로 졸졸 따라가는 뒷모습의 시야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계춘은 한복 차림, 어린 혜지는 금색 크레파스가 들어 있는 분홍색 가방을 메고 있다.
옷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계춘, 혜지의 손을 놓고 빨간 원피스를 만져본다.
옷가게주인 손녀 입힐 옷 찾는교? 싸게 드릴게. 아가 몇 살인데요?
계춘 싼 게 얼만데?
옷가게주인 단돈 5천원.
계춘이 원피스를 탁 놓자 옷가게 주인이 옆에 놓여있는 예쁜 팔찌 하나를 얼른 쥐어주며
옷가게주인 4천원! 할매만 특별히 4천원!
계춘 (씩 웃는) 혜지야. 요거 한 번 입어 보자.
CUT TO
빨간 원피스를 입고 손목에 팔찌를 찬 혜지가 계춘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걷는다.
주위를 둘러보다가도 문득 팔찌를 보며 배시시 웃는 혜지.
계춘은 양손에 짐을 들고 인파를 헤쳐 나가느라 진땀을 흘린다.
계춘 조금만 더 걷자, 응? 할망 꼭 붙들어라.
몇 걸음 더 걷다가 찜찜한 얼굴로 멈칫하는 계춘.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혜지가 보이지 않는다.
황급히 양 옆, 뒤를 돌아보지만 사라지고 없는 혜지.
계춘 (불안한) 혜지야.
허둥지둥 사람을 밀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계춘.
계춘 (처절하게) 혜지야! 우리 손지 못 봤우과? 혜지야!
혜지를 놓쳤다는 것을 절감한 계춘, 짐을 툭 떨어뜨린다.
계춘 (망연자실한) 혜지야…
초점을 잃고 한 점을 멍하니 보는 계춘의 얼굴에 12년의 세월이 쌓인다.
같은 장소에 우뚝 서 있는 71세의 계춘.
그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은 사람처럼 얼굴이 굳어 있다.
12년 뒤, 같은 장소.
깊어진 주름, 푸석해진 피부,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버린 71세 계춘.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던 계춘이 갑자기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 혜지
또래 아이를 쫓아간다.
허둥지둥 뛰어가더니 아이 어깨를 움켜잡고 홱 돌려세우는 계춘.
낯선 여자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잡은 손을 놓는다.
아이엄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계춘 (성마른) 무슨 짓은! 애 얼굴 좀 봤다.
아이엄마 남의 딸 얼굴은 왜요.
계춘 좀 본다고 느 새끼 얼굴 안 닳는다.
아이엄마 (황당한) 네? 이 할머니가……
그 때 전단지 뭉치를 든 석호가 다급하게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선다.
전단지 한 장을 아이 엄마에게 내밀며 눈빛으로 호소하는 석호.
12년 전 실종 어린이 이혜지(당시 6세)를 찾습니다.
어린 혜지의 사진과 착용 옷차림, 사례금 1000만원 등등이 적힌 전단지.
아이 엄마가 이미 멀찌감치 가고 있는 계춘의 뒷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석호가 재빨리 뛰어가 계춘을 따라잡는다.
석호 사례금을 천으로 올리니까 시선이 확 쏠리는 게 잘한 것 같네요, 누님.
계춘 ……
석호 그런데 인쇄 기사 하는 말이, 요샌 컴퓨터로다가 애 커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네요. 돈도 들고 시간도 걸리지만 맡겨보면……
계춘 헛지랄 말어! 노망이 나질 않고서야 내가 우리 혜지를 못 알아볼까!
석호 당연히 알아보죠. 저도 한눈에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요 사진 속 애기가 지금 어떻게 컸는지 모르니 찾아줄 수가 없잖아요.
계춘 (회한) ……앳된 모습이 다 사라질 만치 긴 세월이지.
석호 (애석한) 너무 걱정 말아요. 혜지, 똑부러지게 키웠잖아요.
어디서든 예쁨 받고 제 앞가림하며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깊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재촉하는 계춘.
화장품 매장 - 현재, 서울
최신 유행하는 클럽음악이 신나게 흐르는 매장 안
18세 혜지, 눈두덩에 까만 아이라이너를 거침없이 칠하는 중이다.
앳되고 창백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또렷하고 성숙해 보인다.
민희가 괜스레 화장품들을 툭툭 건드리며 혜지에게 다가온다.
그러다 점원의 눈을 피해 재빨리 화장품을 주머니에 넣는 민희.
민희 (태연하게) 남혜지! 가자.
혜지가 거울 속 제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샘플 아이라이너를 내려놓는다.
맥도날드
휴대폰 조건만남 어플을 보며 남자들의 메시지를 확인 중인 혜지.
같은 테이블, 민희는 작은 눈에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하고 있다.
흘깃 민희를 보는 혜지, 판다 같은 눈두덩에 인상을 찌푸린다.
혜지 (한심한) 아예 눈깔을 새로 하나 파지?
민희 80만 더 모으면 쌍수 할 수 있어. 코볼 줄이고 광대 살짝 치고
윤곽 좀 가다듬으면 나 당장 데뷔할 수 있을걸?
나중에 나 걸 그룹에서 날릴 때 과사 풀면 디질 줄 알아.
픽 웃는 혜지, 영수증 종이에 민희의 화장품으로 그림을 그린다.
파란색 아이섀도를 문질러 하늘을 그리고, 회색 아이섀도로 땅과 건물,
전봇대를 그리고, 아이라이너와 붉은 립스틱으로 피투성이 동물들을 그려 넣는다.
뺨에 파우더 퍼프를 두드리던 민희가 혜지의 그림을 흘깃거린다.
찜찜한 표정,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눈빛으로 혜지를 보는 민희.
그 때 요란하게 햄버거를 쟁반에 받아들고 오는 철헌과 충희.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자마자 급하게 햄버거 포장을 벗긴다.
철헌 시-작!
철헌과 충희가 경쟁적으로 햄버거를 입 안에 우겨넣는다.
소스가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걸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혜지.
민희 (건성으로) 아무나! 이겨라!
먼저 햄버거를 다 먹고 입을 크게 벌려 보이는 철헌.
철헌 너 오늘밤 쏘는거야!
간발의 차로 진 충희가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매장 한가운데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충희.
민희가 쪼르르 달려가 충희의 허리에 걸터앉는다.
그 때 혜지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린다.
조건만남 어플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을 보내는 혜지.
김킹 : 예쁜아~ 몇 살?
소녀 : 18. 오빤?
김킹 : 오빠도 18. 20년 전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상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썅- 욕을 하는 혜지.
소녀 : 오빠 개잼 ㅎㅎ
김킹 : 가슴 보여줘.
소녀 : 만나서.
김킹 : 보여줘야 만나지.
웃옷을 들추고 휴대폰을 넣어 대충 가슴 사진을 찍는 혜지.
소녀 : 소녀님이 사진을 전송하였습니다.
김킹 : 요즘 애들은 발육이 좋아~ 몇 시? 어디?
철헌이 혜지의 휴대폰을 기웃거린다.
철헌 낚았냐? 역시 떡밥이 좋으니까.
혜지 (휴대폰 액정을 가리며)왜 이러는 거야 정말...
철헌 (비아냥 거리며) 혜지씨 오늘 잘 좀 부탁해요.
나 돈 떨어지면 미치는거 알지!
모텔방 입구, 방안
입구, 혜지가 문을 열어주는 조건남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혜지 오빠, 안녕?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는 혜지.
조건남 콜라 마실래?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혜지, 조건남이 냉장고에서 콜라 한 캔을 꺼낸다.
콜라를 받아 한 모금 마시며 방 안을 휘 둘러보는 혜지.
혜지 오빠, 돈 많아?
조건남 뭐? 너 10만원 아냐?
혜지 맞아. 그런데 10만원 밖에 없는 새끼는 싫거든.
난 돈 많은 남자가 좋아. 거지새끼들이랑은 애티튜드가 다르니까.
혜지가 콜라를 마시는 것을 빤히 보는 조건남.
혜지 (신경 쓰이는) …왜요?
조건남 귀여워서.
혜지 (캔을 내려놓는) 샤워하세요.
조건남 같이 할래?
혜지 싫은데요.
조건남 너 먼저 해.
혜지 싫어요.
조건남 귀찮은데 그냥 하자.
혜지 …그렇게 귀찮으면 아예 하지 말죠?
벌떡 일어나는 혜지의 손목을 꽉 잡아채는 조건남.
강한 악력에 혜지의 눈빛이 불안으로 일렁인다.
조건남 (비열하게) 내가 먼저 하지 뭐
조건남이 바지를 벗어던지며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자 혜지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혜지 (나지막하게) 병신.
휴대폰을 꺼내 철헌에게 <출동, 3분> 메시지를 보내는 혜지.
조건남의 재킷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확인한 뒤 절반만 챙긴다.
노크소리가 들리자 지갑을 침대로 던진 뒤 문을 열어주는 혜지.
철헌과 카메라를 목에 건 충희가 안으로 들어온다.
철헌 (속삭이는) 오빠왔다~!
침대 위 지갑에서 현금을 챙기고 신용카드를 꺼내는 철헌.
그 때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오던 조건남, 깜짝 놀란다.
카메라를 켜서 조건남 사진을 찍는 충희.
조건남 뭐야…… 니들 누구야?
철헌 우린 얘 오빤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조건남 ……
충희 얘 미자거든요. 형은 몇짤? 서른 여섯짤?
조건남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혜지를 쏘아 본다.
조건남 어린 게 벌써부터 기둥서방 끼고 조건 뛰냐?
혜지 조건!? (건성으로) 아저씨 오늘 재수 졸라 털리는 날이지 뭐.
조건남 씨발년이!
혜지에게 와락 달려드는 조건남을 철헌이 몸으로 막아낸다.
철헌 어이, 아저씨. 지금 몸싸움이나 할 시추에이션이 아니야.
지금 미성년자 따먹으려다 걸렸잖아. 되게 좆같은 상황이라고.
조건남 씨발, 그래서 어쩌라고?
철헌 천.
조건남 뭐?
철헌 오빠들 멘붕온 거 위자료는 주셔야지.
조건남 미친…
충희가 야비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흔들어 보인다.
충희 싫으면 와이프한테 사진 값 좀 받아볼까?
조건남이 카메라를 빼앗으려고 충희에게 덤벼든다.
철헌이 잽싸게 조건남의 머리채를 잡아 가슴팍을 몇 대 후려친다.
조건남 씨발, 양아치 새끼들 가만 안 둬.
몸부림치는 조건남을 발로 콱콱 밟는 충희.
불안해진 혜지가 다급하게 충희를 떼어낸다.
혜지 살살해!
비틀거리던 조건남이 콜라 캔을 밟고 넘어진다.
뒤통수를 테이블에 찧은 뒤 바닥에 쓰러지는 조건남.
조건남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하게 바닥에 번진다.
미동도 없이 시뻘건 피를 응시하는 혜지, 철헌, 충희.
충희 (중얼거리는) 씨발, 좆됐네.
멍한 눈으로 핏물을 보며 뒷걸음질 치는 혜지.
주위를 둘러보던 철헌이 조건남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반 지하 원룸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들,
구석에는 술병이 줄지어 있고 곳곳에 쓰레기가 가득한 난장판 같은 방 안.
혜지, 민희, 철헌, 충희가 서둘러 각자의 짐을 싸고 있다.
드로잉북 몇 권과 옷가지, 화장품들을 가방에 챙겨 넣는 혜지.
철헌 별 거 아냐. 관할 넘어가면 못 찾아.
민희 혼자 넘어진 거라며! 그냥 경찰서 가서…
충희 너 병신이냐? 경찰서 문 넘어가는 순간 빵으로 직행이야.
철헌 다 됐으면 빨리 뜨자.
혜지, 민희, 충희가 각각 가방을 들고 모인다.
철헌이 혜지에게 손바닥을 내민다.
철헌 휴대폰. 그 새끼 폰이랑 같이 처리하게.
혜지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준다.
철헌 열흘 정도 잠적했다가 연락해. 알았어?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혜지.
버스 안 (밤)
짐 가방을 끌어안은 채 기진맥진한 얼굴로 앉아 있는 혜지.
간판 불빛들이 스쳐지나가는 창문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찜질방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혜지.
멀리 둘러앉아 있던 여자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번뜩 잠에서 깨어난 혜지가 엉거주춤 앉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던 아줌마가 혜지를 빤히 본다.
아줌마 여기서 잤어? 몇 살이야?
흘깃 아줌마를 본 뒤 못들은 척하는 혜지.
아줌마 어려 보이는데… 고딩 아냐?
혜지 신경 끄시죠?
아줌마 봐, 목소리가 벌써 어리잖아. 너 부모님한테 허락은 받았어?
혜지 못 받았어요. 제가 고아라서요.
멈칫하는 아줌마, 주머니에서 삶은 달걀을 꺼낸다.
아줌마 먹을래?
무시하며 벌떡 일어서서 걸어 나가는 혜지.
아줌마 (중얼거리는)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까.
리모컨으로 다른 채널을 트는 아줌마, 아침방송이 나온다.
텔레비전 화면에 경직된 자세로 우뚝 서 있는 계춘이 있다.
계춘 E 제 친손녀 이혜지는 00년 5월 12일, 당시 여섯 살의 나이로
결혼식을 다녀오던 길에 들렀던 부산 국제시장에서 실종되었고…
우뚝 멈춰서는 혜지, 스르르 돌아서서 텔레비전을 본다.
계춘 E 빨간 원피스에 분홍색 가방과
팔목에 은빛 플라스틱 팔찌를 차고 있었습니다.
쌍꺼풀 진 큰 눈에, 오른쪽 팔목에 동전만한 반점이 있으며…
혜지가 멍하니 텔레비전을 응시하는데, 채널이 휙 바뀐다.
다급하게 아줌마의 리모컨을 빼앗아 이전의 채널을 트는 혜지.
이미 계춘은 사라지고 다른 실종자 가족이 설명 중이다.
넋이 나간 표정인 혜지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는 아줌마.
하늬복이 오름
묵묵히 산을 오르다 기막히게 고사리가 나는 곳을 감지해내는 계춘.
마른 억새를 걷어낸 뒤 꼿꼿하게 자란 고사리들을 툭툭 잘라 소쿠리에 넣는다.
무심하게 고사리를 꺾다가 문득 시름에 찬 한숨을 내쉬는 계춘.
계춘 니들 있는 곳은 이리도 척척 알겠는데……
이러다 이번 생애 영 못 보고 가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힘겹게 일어서서 소쿠리를 챙겨드는 계춘.
그 때 두런두런 수다 소리와 함께 명옥과 마을 여자들이 나타난다.
계춘을 보자 아는 체를 하며 소쿠리를 힐끔거리는 여자들.
명옥 올 봄 첫 고사리도 계춘 성이 끊었네!
여자1 노상 계춘 성 소쿠리가 제일 두둑해요.
여자2 달래도 1등, 전호도 1등, 갯방풍도 1등, 대단하세요.
명옥 어디 나물뿐인가? 아직 전복도 한 망사리 거뜬하잖아.
계춘 일 나와 노닥거리지 말고 발밑이라도 한 번 더 살펴보게.
냉랭한 기운을 풍기며 휙 돌아서서 산을 오르는 계춘.
여자1 (중얼거리는) 해가 갈수록 고약해지시네.
명옥 그래도 계춘성이 중심을 딱 잡고 있으니 마을에 말썽이 없잖아.
여자2 그건 그래. 어른들끼리 싸움 없고, 애들 깍듯하고, 다 계춘성 덕이지.
여자1 어린 것 잃고 마음이 오죽할까.
명옥과 여자들이 측은한 표정으로 계춘의 뒷모습을 본다.
길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계춘.
마을의 집 대부분이 빈집이고, 집집마다 철거 예정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계춘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옆의 벽을 본다.
어린 혜지 실종 전단지가 반쯤 떨어져 팔랑거리고 있다.
소쿠리를 내려놓고 벽 가까이 다가가는 계춘.
쪼글쪼글하고 거친 손으로 전단지를 쓸어서 다시 벽에 붙이려 한다.
마치 계춘의 손이 전단지 속 어린 혜지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다.
계춘의 집 마루, 마당
테마파크 건설업체 직원 변 과장이 손을 흔들며 들어오고 있다.
변과장 할머니, 저 왔습……
방에서 몸을 빼고 밖을 내다보던 계춘이 도로 들어가며 안방 문을 탁 닫는다.
마루에 질펀하게 앉아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변 과장.
변과장 왜 자꾸 저하고 내외를 하세요. 제가 할머님 스타일인가?
낄낄거리는 변 과장, 방안에서 대꾸가 없자 잠자코 마당을 둘러본다.
빨랫줄에 걸린 잠수복, 지저분한 마당, 잡초가 무성한 화단……
변과장 집이 꼭 이사 전날처럼 쑥대밭이네요.
짐 몇 가지 챙겨서 몸만 쏙 빠져나가면 되겠어요.
……할머니, 꼬맹이 찾았을 때 생각을 해보세요.
걔가 여태 여섯 살도 아니고…… 요즘 애들 이런 집 보면 기절초풍해요.
안방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변 과장.
계춘 (버럭) 기절초풍하는 것 좀 보게 당장 데려와 봐라!
걸어 나오는 계춘의 기세에 밀려 슬금슬금 마당으로 내려서는 변 과장.
변과장 (우물쭈물) 그게 가능하면야 제가 진작 데려왔죠.
계춘이 오줌이 가득한 요강을 들고 맨발로 마당에 내려선다.
계춘 (호통) 집 넘길 일 없으니 다시는 얼씬도 말랬지!
후다닥 뒷걸음질 치는 변 과장을 향해 힘차게 오줌을 뿌리는 계춘.
잽싸게 피한 변 과장 대신 때마침 들어오던 석호가 오줌세례를 당한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얼굴의 오줌을 훔쳐내는 석호.
석호 ……누님, 양이 넉넉한 것이, 신장 기능은 여전히 정정하신가 봐요.
변과장 (우물거리며) 신장만 정정한가요. 성격도……
계춘 (미안한 듯 딴청을 핀다)
석호 (투덜거리며)뱃물질 나가자고 당장 오라시더니, 오줌질을 하시네요.
변 과장이 측은한 듯 땀을 닦던 손수건을 석호에게 내민다.
석호의 배
계춘이 갑판에 주저앉아 끙끙거리며 잠수모를 벗는다.
도와주려는 석호를 뿌리치고 혼자 힘으로 간신히 잠수모를 벗는 계춘.
석호 물속에서 거뜬하니 뭍에서도 청춘인 줄 아슈?
누님 힘쓰는 거, 그거 기운이 아니라 악이고 깡이에요.
이만 집이랑 땅 넘겨버리고 그 돈 노후자금 삼아 편히……
계춘 (한숨) 집 허물면 우리 혜지는 어디로 돌아오나……
석호 여태는 집에 없어 못 돌아왔수?
다시 기운을 모아 잠수복 상의를 벗으려는 계춘.
석호 이제와 말이지만, 그 때 혜지 엄마 줘버렸으면 차라리 좋았을 뻔 했어요.
힘에 부쳐 잠수복 상의를 벗지 못하는 계춘, 먼 바다를 본다.
플래시백
-제주항 여객 터미널 근처
#1에서 연결, 어린 혜지가 호객 중인 틈을 타 대화를 나누는 계춘과 혜지 친모.
혜지친모 저 재혼해요. 그이도 애가 있어요. 저도 혜지 데려간댔어요.
계춘 (달래듯) 애랑 너랑 쌍으로 눈칫밥 먹을 생각 말고,
그 남자 새끼 낳아서 전실 자식이랑 층하 없이 잘 키워.
혜지는 내가 키우면 된다. 판사님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냐.
혜지친모 어머님, 너무하세요. 저 혜지 엄마에요. 제가 낳았어요.
계춘 남편 죽고 한 달도 안 돼 젖도 못 뗀 애 버리고 간 게 누구냐.
혜지친모 그 땐……
계춘 난 그래도 너 원망 안 한다. 너도 네 살 길 찾은 게지.
혜지친모 (눈물을 떨군다)……
계춘 (긴 한숨과 함께)너 사는 데 몰래 몇 번 가봤다.
갈 때마다 남자가 바뀌고……
그것도 하나 같이 술 마시고 주먹질이나 하는 변변찮은 놈들을……
혜지친모 이번엔 달라요. 그 이는……
계춘 그렇다면 잘 된 일이지. 그래도 혜지는 못 준다. 잘 살고 다신 오지 마라.
악에 받혀 이를 악 문 혜지 친모를 두고 힘차게 걸어가는 계춘.
계춘이 다시 힘을 모아서 잠수복 상의를 훌렁 벗어버린다.
자글자글 구겨지고 여기저기 헤진 낡은 꽃무늬 상의가 나온다.
석호가 따뜻한 커피를 건네고, 그걸 받아 훌훌 마시는 계춘.
이때 배안 스피커에서 패티김의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 흘러나온다.
석호 혜지 어멍도 조실부모하고 애 낳자마자 서방 죽고…… 팔자가 기구해요.
지금도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알 길이 없고……
계춘 ……그 애나 나나 복이 없어 곁의 사람들을 다 놓치고 마는 게지.
석호 누님껜 제가 있잖아요.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저희 부부는 누님을……
마침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받는 석호.
석호 당신도 양반은 못되겠…… (놀란) 뭐라고? (사이) 그게 정말인가?
석호가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계춘과 눈을 맞춘다.
석호 (얼떨떨한) 누님!
계춘 (의아한) ……?
석호 (활짝 웃는) 누님……
눈이 휘둥그레지는 계춘, 컵을 툭 떨어뜨린다.
텔레비전 화면 (방송국 카페)
혜지의 얼굴은 희미하게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다.
석호의 부축을 받아 혜지와 마주서는 계춘.
쭈뼛거리는 혜지를 계춘이 와락 끌어안는다.
리포터 E 12년간 포기하지 않고 손녀딸을 찾아온 계춘 할머니,
꿈에 그리던 손녀딸을 드디어 품에 안았는데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혜지의 뺨이며, 어깨며, 팔을 쓰다듬어보는 계춘.
그러다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혜지의 오른쪽 소매를 걷는다.
동전만한 반점이 보이지 않는 깨끗한 혜지의 피부.
혜지 E 지웠어요. 레이저로…
계춘 E 잘 했다. 다 내가 해줬어야 하는 일인데…
혜지가 분홍색 크로스가방과 주머니에서 12년 전 국제시장에서 샀던 팔찌를 꺼낸다.
계춘 여태까지 이걸…
고개를 끄덕이며 회한에 찬 눈빛으로 팔찌를 어루만지는 계춘.
리포터 E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남혜지로 불려왔던 소녀,
곧장 고아원에 맡겨져 오랫동안 혼자였던 소녀도
12년 만에 유일한 핏줄인 할머니를 찾게 되었습니다.
리포터가 슬그머니 마이크를 계춘에게 들이댄다.
리포터 E 계춘 할머니, 많이 좋으시죠?
계춘 E (무뚝뚝한) 당연한걸 뭐 하러 입 아프게 물어.
석호가 얼른 리포터와 계춘 사이에 끼어든다.
석호 너무 좋다는 뜻이고요.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저도 이렇게 좋은데…
카메라를 향해 과장되게 눈물을 훔쳐 보이는 석호.
계춘의 집 마당
명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혜지를 에워싸고 있다.
명옥 느 친어멍이 감쪽같이 널 안고 시장을 빠져나간 게로구나.
혹시나 해서 친어멍집을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그 긴 세월동안 계춘성님은 널 찾아 전국을……
(한숨) 그래, 느 어멍은 지금 어디서 뭘 하냐.
혜지 ……죽었어요. 바로 다음해 교통사고로.
명옥과 마을 사람들 일제히 ‘세상에나-’ 한탄을 한다.
명옥 (넌지시) 그럼 새아버지 되는 양반은……?
혜지 폐인 되서 몇 년 고생하다가 간암으로 죽었어요.
명옥 그럼 넌 여태 어디서 지냈냐?
혜지 ……고아원이요.
명옥 세상에, 할망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고아원이라니……
혜지 죽었댔어요.
명옥 느 할망이 돌아가셨다고? 어멍이 그랬냐?
혜지 네.
명옥 세상에 독하다 독해. 그 사람 참 너한테나 계춘성한테나 못할 짓 하고 갔네.
명옥과 마을 사람들이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워한다.
변과장 E 혜지야!!!!!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혜지를 와락 끌어안는 변 과장.
변과장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혜지 (당황한) ……누, 누구세요?
변과장 아!
변 과장이 명함을 꺼내 혜지에게 준다.
OO건설 개발 사업부 변태철 과장.
명함을 건성으로 확인하는 혜지.
변과장 당장 할머니한테 이 집 팔고 아파트로……
명옥 (버럭)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변 과장을 멀찌감치 떠다미는 명옥.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명옥 자네는 고기를 삶고, 자네는 나물 몇 가지 무쳐. 자네는 술을 받아오고……
혜지가 소란스러운 마당에서 벗어나 슬그머니 마루로 올라간다.
계춘의 집 안방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서는 혜지.
벽에 걸린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진, 어린 혜지의 그림을 물끄러미 본다.
플래시백
-다른 마루
어린 혜지가 엎드려서 스케치북에 보석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랍을 열어보는 혜지, 어린 혜지의 옷가지들이 보인다.
크레파스 통을 발견하고는 뚜껑을 열어보는 혜지.
고만고만한 몽당 크레파스들, 맨 마지막 칸이 비어있다.
혜지가 배낭에서 어린 혜지의 분홍색 가방을 꺼낸다.
낡았지만 닳지는 않은 금색 크레파스를 꺼내 제자리에 놓는 혜지.
그 때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나서 보면, 계춘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만 줄줄 흘리며 말을 못 잇는 계춘.
이리오라는 손짓을 해 보이는 것에 혜지가 쭈뼛거리며 다가간다.
계춘이 혜지의 얼굴이며 다리며 등과 팔을 쓰다듬는다.
계춘 혜지 맞구나. 내 새끼…… 우리 혜지……
계춘이 혜지를 꽉 끌어안는다.
계춘 할망이 네 손을 놨어. 다 내 잘못이다. 다 내 탓이야.
세상 하나 남은 핏줄이 너무 귀해서 욕심내다 천벌 받았지.
세상 탓 말고, 느 어멍 탓도 말고……
한이 되거들랑 할망을 탓해라. 내 새끼……
바다 용왕님, 용왕 할망님, 우리 손지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혜지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마당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과 변 과장이 훌쩍훌쩍 울고 있다.
계춘의 집 마당 (오후)
푸짐한 잔칫상에 둘러앉아 있는 석호, 명옥 등의 마을 사람들.
계춘은 혜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손을 꼭 붙들고 있다.
명옥 혜지 너 어릴 적에 참 착하고 똘똘하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기억나?
혜지 (어색한) ……
석호 섬에 인물 났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마을사람1 계춘 성이랑 둘이 환상의 콤비마냥 붙어 다니던 게 참 보기 좋았어요.
명옥 성님이 새삼스레 갓난쟁이 키우느라 고생 많이 했죠.
석호 애 보기 부끄럽다고 쉰 넘어 글자를 다 배우고……
계춘 거 참 쓸데없는 소리!
뺨이 붉어진 계춘, 슬쩍 혜지의 눈치를 본다.
석호 없는 얘길 지어낸 것도 아닌데요, 뭘. 혜지 얘도 알아야죠.
저 심심할까봐 대학 나와 유치원 선생 하는 김 선장 둘째한테
EQ인지 뭔지 그거 발달시킨다는 놀이도 배워오고……
누님 정말 애 많이 쓰셨어요. 우리 다 압니다. 다 알죠.
명옥 ……세월이 참 야속하네요.
순간 착잡해진 분위기, 혜지가 슬그머니 일어선다.
계춘 (흠칫) 어딜 가게!
혜지 바람 좀 쐬려고……
계춘 할망이랑 같이 가자.
계춘이 따라 일어서려는 것을 명옥이 붙든다.
명옥 저도 혼자서 맘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죠. 나둬요.
혜지야, 다녀와. 멀리 가지 말고.
혜지가 나가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계춘.
계춘의 집 앞, 길 (오후)
돌을 쌓아 만든 계춘의 집 담장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는 혜지.
자전거 한 대가 빠르게 달려와 혜지 앞에 멈춰 선다.
이한 이혜지! 보고 싶었어!
혜지 (황당한) 넌 뭐냐?
이한 (당황) 나 모르겠어? 아~ 내가 좀 잘생겨졌지? 나 이한이야. 최이한.
혜지 (갸웃) ……
이한 몰라? 날 몰라?
혜지 내가 널 알아야 되냐?
이한 당연하지! 서방님인데!
혜지 뭐? 서방님?
이한 너 이럴 줄 알고 증거를 남겨놨지. 타! 빨리!
자전거 뒷좌석에 혜지를 반강제로 앉히고 자신도 안장에 앉는 이한.
자전거가 갑자기 출발하자 깜짝 놀라서 이한의 허리를 감싸 안는 혜지.
씩 웃는 이한, 혜지는 얼른 이한의 허리를 놓고 안장 부분을 잡는다.
비자림 (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난 흙길을 걷는 혜지와 이한.
이한이 손전등으로 발밑과 숲을 비춰준다.
혜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신 나무들을 둘러본다.
이한 너 어릴 때도 여기 좋아했잖아. 이름 지어줄 나무 많다고.
혜지 ……
이한 요새도 나무 이름 지어줘?
혜지 돌았냐?
이한 …… (반색하는) 저기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하나로 엮인 연리목이 나타난다.
키가 매우 큰 연리목을 뿌리부터 찬찬히 올려다보는 혜지.
열심히 땅을 파던 이한이 작은 철 상자를 꺼낸다.
이한 이제 기억나? 우리 결혼 징표?
혜지 …… (스르르 웃는) 반지…… 종이반지……
이한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철 상자 뚜껑을 연다.
크레파스로 색칠한 종이를 감아 풀로 붙여 링을 만든 종이반지 두 개가 들어 있다.
플래시백
-다른 마루
어린 혜지가 #18 플래시백의 보석 그림을 가위로 길게 잘라낸다.
그림을 말아서 풀로 붙여 동그란 반지를 만드는 어린 혜지.
슬그머니 혜지의 새끼손가락에 종이 반지를 끼워주려는 이한.
생각에 잠겨 있던 혜지가 짜증스럽게 진저리를 치며 손을 털어낸다.
혜지 종이 반지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꿈 깨.
이미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종이반지를 끼고 있던 이한, 섭섭한 표정이다.
길 (밤)
이한이 끄는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걷는 혜지와 이한.
몇몇 집들에 철거 예정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혜지가 유심히 본다.
이한 할머니 고생 많이 하셨어.
혜지 ……
이한 너도 고생했어.
혜지 …… (뭉클한)
이한 여기서 예전처럼 행복하게 지내. 할머니랑…… (넌지시) 나랑……
혜지 ……상습적으로 껄떡댄다, 너? 그만해라?
계춘 E (처절한) 혜지야!!!! 혜지야!!!!
흠칫 놀라 걸음을 재촉하는 혜지와 이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계춘, 혜지를 발견하고 급하게 뛰어온다.
계춘 어디 갔었어! 할망 손 놓지 말랬지.
혜지 (당황한) ……
이한 할머니, 저희 나무 보러 갔었어요.
계춘 할망 손 꼭 잡아. 어이 집에 가자.
혜지의 손을 꼭 붙잡고 걷는 계춘.
계춘의 집 안방
혜지 옆에 낮은 코골이를 하며 잠든 계춘.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던 혜지가 조용히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계춘의 집 마당 (밤)
신발을 꿰신고 화장실로 향하던 혜지가 화단 앞에서 우뚝 멈춰 선다.
플래시백
-다른 화단
어린 혜지가 꽃들이 활짝 핀 화단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있다.
어린혜지 천지왕의 둘째 아들 소별왕처럼 우리 사는 세상을 잘 다스리려면……
화단의 잡초를 만지작거리다가 쑥 당겨 뽑으며 중얼거리는 혜지.
혜지 사람을 다스리는 양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잘 가꿔야 하느니라……
잡초를 버리고 손을 터는 혜지, 화장실 문을 벌컥 연다.
난생 처음 보는 재래식 화장실에 혜지의 입이 떡 벌어진다.
거기다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불이 켜지지 않는 화장실.
꾸르륵-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혜지.
계춘의 집 화장실
라이터로 불을 밝히며 쪼그리고 앉아있는 혜지.
갑자기 얼굴로 날아드는 벌레를 손을 휘저어 쫓아낸다.
그 바람에 꺼져버린 라이터를 다시 켜려는데 잘 안 된다.
그 때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에서 환한 손전등이 켜진다.
화들짝 놀라 라이터를 떨어뜨리는 혜지.
계춘 E 똥이 매려우면 할망을 부르지 그랬어.
숨을 죽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알만 굴리는 혜지.
계춘 E (중얼거리는) 이참에 다른 집들 모냥 뜯어고쳐야겠네.
혜지가 굳은 얼굴로 살그머니 두루마리 휴지를 뜯는다.
계춘 E (흥얼거리는) 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애기 잘도 잔다.
구슬픈 계춘의 노랫소리에 씁쓸한 미소를 짓는 혜지.
계춘 E 자는 것은 잠이로다 노는 것은 놂이로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으로 가사를 함께 읊조리는 혜지.
계춘의 집 마루
보말 미역국, 달래전, 갯방풍무침, 고사리 무침 등등 풍성한 밥상.
혜지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말 미역국을 한 숟갈 떠먹는다.
계춘이 기대어린 눈빛으로 혜지의 반응을 살핀다.
계춘 어떠냐? 너 어릴 적에 좋아했잖어.
혜지가 억지로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인다.
계춘 (흐뭇한) 팍팍 퍼먹어. 삐쩍 말라가지구는.
(한숨) 철근도 씹어 먹을 나이에 얼마나 배를 곯았을꼬.
한숨을 쉬는 계춘과 꾸역꾸역 밥을 입에 밀어 넣는 혜지.
갑자기 역한 냄새가 나서 보면, 분뇨차가 집 앞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직원이 활짝 웃으며 마당으로 들어온다.
직원 손녀딸 덕에 큰 결심 하셨네요. 그러게 진작 바꾸랄 때 말 들으시지,
암만 촌구석이라도 저런 똥간을 여즉 쓰는 사람이 어딨대요.
계춘 (손사래) 똥차는 우리 손지 밥 다 먹거들랑 끌고 오게.
직원 (나가며) 네, 네! 있다 다시 올게요.
변과장 에헤이! 어차피 헐릴 집 괜한 돈 쓰신다, 할머니!
변 과장이 성큼성큼 마루로 오더니 남은 달래전을 한 입에 구겨 넣는다.
입이 터지도록 달래전을 씹는 변 과장에 인상을 팍 찌푸리는 혜지.
계춘 어디 우리 손지 반찬을!
계춘이 변 과장의 등짝을 때리고, 그 바람에 씹던 것들을 뿜어내는 변 과장.
달래전 잔해가 마루에 넓게 흩어지고, 혜지가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변 과장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 마루를 훔쳐낸다.
변과장 여기 테마파크가 들어서면 한중일 관광객들이 바글거릴 거예요.
그럼 마을 경제 살고, 제주도 경기 좋아지고…… 애국이 별겁니까?
그러니 이 집은 저희한테 맡기시고 손녀딸이랑 아파트서 편히 사세요.
계춘 (내키지 않는) ……
변과장 혜지 넌 어떠냐.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혜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딴 짓을 하고 있다)
변과장 아이구~ 할머님 손녀가 아파트에서 살고……
계춘 (버럭) 알았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보게.
변과장 (분위기 파악) 당장 가보겠습니다.
변 과장이 90도로 인사를 한 뒤 마당을 사뿐히 걸어 나간다.
계춘 밥마저 먹어.
하는 수 없이 다시 숟가락을 드는 혜지.
계춘 변호사 선생한테 호적 정리를 맡겼으니 곧 처리가 될 거다.
이씨 자손이 남의 성씨를 달고 살 순 없지.
혜지 ……
계춘 너 다닐 고등학교도 알아보고 있으니……
혜지 학교 꼭 다녀야 돼요?
계춘 (당황한) ……다니기 싫으냐?
혜지 ......
계춘 (역정을 참으며) 오냐, 알았다.
답답한 듯 계춘이 보말 미역국을 그릇째 훌훌 마신다.
동사무소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지문 날인을 앞둔 혜지.
계춘과 직원들 모두가 혜지만을 주시하고 있다.
직원이 혜지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까만 잉크를 바른다.
잠깐 망설이던 혜지가 서류에 엄지 지장을 꾹 찍는다.
와- 직원들과 계춘이 박수를 치자 황당한 혜지.
<몽타주>
-길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걷는 혜지.
광주리를 끼고 지나가던 할머니가 아는 체를 한다.
할머니 너 계춘네 혜지로구나! 예쁘게 잘 컸네.
혜지의 등을 토닥거린 뒤 가던 길을 가는 할머니.
한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명옥이 나타나 아는 체를 한다.
명옥 어디 가니?
혜지 그냥……
명옥 할머니 집에 계셔?
혜지 그럴걸요.
명옥 그래. 조심해라.
그 때 명옥, 모퉁이에서 고개를 삐죽 내미는 계춘을 발견한다.
명옥 어? (반갑게) 계……
인상을 쓰고 팔을 휘저어 명옥의 입을 막는 계춘.
혜지가 무슨 일인가 돌아보자 계춘이 얼른 몸을 숨긴다.
명옥 개, 개새끼 밥 주는 걸 깜빡했네. 아하하……
-비자림 입구
흙에 퍼질러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혜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더니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린다.
혜지 (중얼거리는) 상관없어.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림을 대충 신발로 문질러 지운 뒤 가버리는 혜지.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계춘이 얼른 다가가 그림을 본다.
반쯤 지워진 그림은 눈앞의 거대한 나무를 생동감 있게 그린 것.
담배꽁초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혜지를 쫓아가는 계춘.
-피씨방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30대 남자’, ‘모텔’, ‘살인사건’을 타이핑하는 혜지.
망설이다가 ‘살인사건’을 지우고 ‘폭행’을 대신 적어 넣는다.
검색 버튼을 클릭한 뒤 스크롤을 내려 뉴스 기사들 제목을 확인하는 혜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 뒤 인터넷 창을 꺼버리고 피씨방을 나간다.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던 계춘이 혜지의 모니터를 기웃거리다가 얼른 쫓아나간다.
-휴대폰 판매 부스
최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혜지의 모습.
-서점
두툼한 화집을 팔랑팔랑 넘겨보던 혜지가 동작을 멈춘다.
그림 하나를 가만히 보던 혜지, 화집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서점을 나간다.
슬그머니 나타나 원래 자리에 화집을 정리하던 계춘, 방금 혜지가 보던 장을 펼쳐본다.
아우구스트 마케의 ‘히아신스가 놓인 양탄자’
구도가 단정하고 색감이 화사한 마케의 그림을 물끄러미 보는 계춘.
서점 앞, 길
허둥지둥 서점에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계춘.
혜지가 보이지 않자 낭패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그 때 서점 문 옆에 납작 붙어 있던 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혜지 저 찾으세요?
계춘 (움찔하는) ……
혜지 저 이제 길 잃을 나이 아니잖아요.
계춘 아니지……
혜지 그럼 왜 따라다니세요? 완전 감시당하는 거 같거든요.
계춘 (한숨) ……담배 하나 다오.
흠칫하는 혜지, 쭈뼛거리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다.
해수욕장 모래사장
계춘과 혜지가 나란히 모래사장에 앉아있고 계춘은 담배를 피우고 있다.
파도가 와르르 밀려왔다가 쓸려나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는 두 사람.
계춘 어릴 땐 한시도 안 떨어지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바다에도 데려가고, 산으로 밭으로 옆구리에 끼고 다녔지.
나는 열두 살적부터 물질 나가느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결국 못하고 살았거든...
그래서 너는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켜 갑갑한 섬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혜지 ……
계춘 학교는 가. 물질할 거 아닌 바에야 고등학교까진 나와야지.
혜지 ……
계춘 또 잃어버릴까 싶어 마음이 안 놓여 그랬다.
혜지 ……
계춘 더는 여섯 살이 아니니 그럴 일도 없겠지…
계춘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휘청휘청 걸어간다.
착잡한 심정으로 먼 바다를 향해 시선을 보내는 혜지.
불현듯 강렬한 붉은 빛이 온 해변을 에워싸고,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진다.
하늘, 바다, 모래, 해안절벽까지도 온통 붉게, 노랗게 물들이는 태양……
넋을 잃고 주위를 둘러보는 혜지의 눈에 멀리 걸어가는 계춘이 보인다.
작고 고집스러운, 태양도 비껴가는 계춘의 빛바랜 뒷모습……
계춘의 집 마루
마루에 앉아 혜지의 배낭을 열어본 계춘이 기함을 한다.
더러운 옷들, 스케치 노트, 지폐뭉치 등을 마루에 꺼내놓는 계춘.
혜지 방에서 걸레를 들고 나오던 명옥이 혀를 끌끌 찬다.
명옥 친구 집 전전하면서 살았다니까 오죽했겠어요.
계춘이 깊은 한숨을 쉬며 옷가지들만 따로 골라낸다.
계춘 내 눈엔 아직도 어릴 적 모습이 어른어른한데……
놓친 새 훌쩍 커버려서 더는 내가 할 일이 없네.
명옥 그 나이에 애 키울 작정이셨어요?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고……
이제 혜지도 찾았겠다, 성님도 속편하게 살아야죠.
저랑 다음 주부터 저기 요양병원서 하는 청춘체조나 갑시다.
계춘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청춘이 아닌데 무슨 청춘 체조를 해!
명옥 그렇다고 노땅 체조라면 듣기가 좋수?
계춘 자네나 신명나게 하게.
명옥 서울서 온 의사영감이 이한이 외할아버지라던가..?
참말로 훈훈하던데…… 같이 안 가실래요?
계춘 (딴생각) 저기, 그림…… 재주로도 대학을 갈 수가 있나?
명옥 그럼요. 그림 하나만 기똥차게 잘 그리면 공부 못해도 대학 가죠.
계춘 대학가는 그림은 어디 가면 배워주나?
명옥 저기 OO여고에 미술 선생님이 화가라던데……
얼굴은 영 못쓰게 생겼던데, 신문에도 여러 번 났대요.
계춘이 솔깃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cut to)
터덜터덜 마당으로 들어서던 혜지가 깜짝 놀란다.
빨랫줄에 자신의 모든 옷들, 배낭, 속옷까지도 세탁되어 널려있다.
씩씩거리며 브래지어와 팬티를 걷어내는 혜지.
혜지 (짜증) 할머니!
혜지가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뛰어올라가 계춘의 방문을 벌컥 연다.
계춘이 없자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로 옆 방문을 벌컥 여는 혜지.
뜻밖인 얼굴로 마당을 향해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간다.
계춘의 집 혜지방
튼튼한 나무 책상과 의자, 분홍빛 새 옷장, 잘 개켜놓은 솜이불이 보인다.
벽에 걸려 있는 빳빳한 새 교복을 슬쩍 만져보는 혜지.
그러다 책상 위 가지런한 스케치 노트와 돈뭉치를 보고 후다닥 다가간다.
스케치 노트를 넘겨보고 돈을 세어보는데, 옆에 서점에서 봤던 화집과 최신 휴대폰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혜지 기쁜 얼굴로 휴대폰에 몇 번씩 입맞춤 하다가
슬그머니 의자에 앉아 화집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혜지.
이윽고 무언가 생각 난 듯 벽에 걸려있는 그림 속에 계춘할망의 모습을 금색 크레파스로 수려하게 채색하는 혜지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여고 복도
담임선생인 여신의 뒤를 따라가는 교복 차림의 혜지.
체육복을 입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여신은 굵은 대금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여신이 지나갈 때마다 복도에서 장난을 치던 학생들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꾸벅꾸벅 인사를 하는 학생들에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여신.
2학년 3반의 문을 벌컥 여는데, 학생들이 아무도 없다.
여신 참, 1교시가 미술이었지? 가자, 미술실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 여신을 혜지가 건들건들 따라간다.
여고 미술실
여신과 혜지가 교단에 나란히 서 있다.
각자의 이젤 앞에 앉은 여고생들, 호기심어린 눈빛이다.
여신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자기소개-!
혜지 ……
여신 실시!
혜지 싫은데요.
여신 싫어도 해.
혜지 ……
흥미진진한 표정의 여고생들, 여신이 굵은 대금을 만지작거린다.
혜지 왜요? 그걸로 때리게요?
깜짝 놀라는 여신과 여고생들, 혜지는 어리둥절하다.
여신 얘의 이름은 남신이다. 나는 여신, 얘는 남신. 나의 분신 같은 아이지.
나의 소중한 아이로 다른 이의 소중한 아이인 너를 때릴 리가 없잖아.
혜지 (퉁명스럽게) 뭐래?
여신 소중한 열여덟 살을 함께 보낼 친구들에게 네 이름 정도는 알려줘.
혜지 내 이름은 남혜……, 아니 이혜지.
내가 학교를 오랜만에 다녀...
조용히 다니게 좀 도와주라 빈자리 앉을 게요.
여고생들 ......
여신 인상적인 인사네...그리고 방과 후 호신술 특강에 많이들 참석하도록.
여신이 절도 있는 무술 동작을 선보인다.
마침 들어오던 충섭이 깜짝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는다.
충섭의 팔을 붙잡아 단숨에 일으켜 세우는 여신.
여신 괜찮으십니까, 양 선생님?
충섭 ……네, 네! 오, 오여신 선생님.
여신 그럼!
미술실을 나가는 여신과 맨 끝 비어있는 이젤 앞에 앉는 혜지.
충섭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여신이 나간 문을 하염없이 본다.
경례를 하기 위해 일어서 있던 반장이 충섭을 기웃거린다.
반장 쌤, 인사해요?
충섭 ……됐어. 넣어둬.
충섭이 비틀거리더니 의자에 몸을 맡긴다.
충섭 아무거나 그려라. 너희들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뭐 그런거......내가 아직 술이 덜 깨서,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절대 떠들지 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여고생들, 혜지도 물끄러미 빈 종이를 들여다본다.
(cut to)
끔찍하게 일그러진 피투성이 남자 얼굴을 스케치한 혜지.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수채물감과 붓을 사용해 채색 중이다.
혜지가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내 립스틱과 아이섀도, 블러셔를 늘어놓는다.
화장품으로 거침없이 채색을 하는 혜지, 그림이 한층 더 생생해진다.
언제부터인가 혜지 뒤에서 물끄러미 그림을 보고 있던 충섭.
충섭 어이, 전학생.
움찔해서 뒤를 돌아보는, 반항적인 눈빛의 혜지.
충섭 너 자율학습 하기 싫지?
혜지 ……안 할 건데요.
충섭 별관 내 작업실로 와. 야자 당당하게 재끼게 해줄 테니까.
코웃음을 치며 다시 그림에 몰두하는 혜지.
혜지의 방
insert) 12시를 넘기는 시계
깔깔대며 민희와 통화를 하는 혜지
혜지 그 사람은 어떻게 됐데?
민희E 병원에 있데 .... 오빠말로는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다는데
야 그 사람 입장에서도 법에 걸려서 얘기 못 할 거래....
그래도 잘 짱 박혀 있어
계춘의 방에서 마루
밤 자리에 깔깔대는 소리 때문에 깬 계춘.
일어나 마루로 나가본다. 그러자 혜지의 방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문창 너머로 들려온다.
혜지(OS) 야 졸라 황당하다니까 사사건건 시비야
미술선생 얼굴 어떻게 생긴 줄 아냐! 완전 쩔어!
할머니? 방에서 냄새가....
난 솔직히 할머니들 냄새가 진짜 싫거든?
그 알지 막 누렁 내 같은 거....
어... 어.... 막 내 연습장이랑 뒤 진거야
졸라 짜증나서 상관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알았다고 그러더라
아무 생각 없이 주절대는 혜지의 통화를 쓸쓸히 듣고 있는 계춘.
그러다 조용히 들리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는 계춘.
화장품 가게
낯선 듯 향수를 이리저리 만져보는 계춘.
점원 할머니~ 선물하시게요?
계춘 내가 뿌릴 라고 그러는데, 뭐가 좋것어?
점원 (의아한) 아..! 할머니요?
계춘 싼 놈으로 하나 골라 줘봐. 그리고 방에 뿌릴 것도 하나 주고...
요양병원 체육실
의사 항복과 간호사의 시범을 보며 체조를 따라하는 할머니들.
명옥은 열심히 따라하지만 계춘은 건성으로 흉내만 낸다.
계춘 (중얼거리는) 따라잡을만 해야 공부에 재미를 붙일 텐데……
점심 같이 먹을 동무는 만들었나 몰라.
명옥 (속삭이는) 혜지 걱정 그만하고 체조나 따라 해요.
한숨을 쉬며 대충 동작을 따라하는 계춘, 잘 안 된다.
항복이 다가와서 슬그머니 계춘의 자세를 교정해준다.
항복 몸이 많이 굳으셨네요. 꾸준히 운동을 하셔야겠어요.
계춘 내가 돌고래마냥 펄떡펄떡 물속에서 운동을 얼마나 하는데……
항복 (단호한) 일은 운동이 아닙니다. 일은 노동이고 생산이죠.
운동은 단련이고 적립이에요. 일을 하느라 소모된 기운을,
운동을 통해서 보충을 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요. 아셨죠?
마지못해 간호사의 동작을 힘껏 따라해 보는 계춘.
그러다 문득 창밖을 보는데, 멀리 보이는 바다가 고요하다.
계춘 (중얼거리는) 바람이 멎었구나. (큰소리로) 물질 가자!
명옥을 비롯한 할머니들이 체조를 멈추고 창밖을 본다.
명옥 이왕 체조하러 왔는데 물질은 내일……
계춘 용왕 할망 바다 허락하는 날이 일 년에 반절도 안 되는 마당에!
이 좋은 날 물질 떼먹겠단 소리가 해녀 계장 입에서 나올 소린가?
할머니1 그건 계춘성 말이 맞네. 여름 전에 하루라도 더 나가야지.
할머니2 계춘성 계장할 적에도 바다 기운 하나는 기똥차게 읽었잖어.
명옥 (울컥하는) 갑시다! 물질하러!
명옥이 씩씩하게 걸어 나가자 씩 웃으며 따라나서는 계춘.
거의 모든 할머니들이 우르르 따라가자 당황한 항복과 간호사.
충섭의 작업실
각종 석고상들, 미술 도구들, 자료들이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벽에는 다소 추상적인 화풍의 풍경화들이 여러 점 걸려 있다.
혜지가 바다로 추정되는 푸른색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충섭 OFF 어떠냐?
혜지가 휙 돌아보면, 충섭이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혜지 ……그럭저럭.
충섭 내 필생의 역작이 그럭저럭 이라니…… 솜씨 좀 볼까?
충섭이 책상 위 너저분한 물건들을 이리저리 재배치한다.
충섭 스케치만.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내미는 충섭.
혜지 (빤히 보는) 자율학습 아녔어요?
충섭 (픽 웃는) 좋아. 그럼 자율적으로 골라. 학습은 해야지.
주위를 휘 둘러보는 혜지, 충섭의 얼굴에 시선이 꽂힌다.
쩝쩝거리면서 추접스럽게 샌드위치를 먹는 충섭.
혜지가 씩 웃으며 연필을 받아들고 이젤 앞에 앉는다.
(cut to)
충섭이 막대 사탕을 쪽쪽 빨면서 혜지의 그림을 힐긋 본다.
충섭 (경쾌하게) 한 장 더~!
혜지가 짜증스럽게 연필을 집어던진다.
충섭 (태연한) 주워.
이젤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혜지.
충섭 아~ 지금 나 보라고 하는 행동 이었구나~ 그랬구나~
말로 해. 말로. 짜증나면 짜증난다, 싫으면 싫다, 미치겠으면 미치겠다.
혜지 ……지금 똥개 훈련시켜요?
충섭 똥개 훈련시켜 봤어? 걔 너보다 똑똑해.
혜지 썅!
혜지가 막무가내로 이젤을 밟으며 문으로 향한다.
충섭 (무섭게) 거기 서.
혜지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멈춰 선다.
충섭 이리 와. 아직 안 끝났어.
나지막하게 욕을 읊조리면서 건들건들 돌아오는 혜지.
충섭이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내민다.
충섭 우쭈쭈- 잘 왔어.
무심코 막대 사탕을 받은 혜지, 냅다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충섭 먹기 싫으면 먹기 싫다고 해. 왜 자꾸 힘을 써? 에너지가 남아 도냐?
충섭이 방금까지 혜지가 그린 세 장의 그림을 나란히 모아 놓는다.
음식을 씹을 때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충섭의 얼굴 스케치 세 장.
하지만 화풍의 차이로 각각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은 그림.
충섭 어때?
혜지 ……못생겼는데요.
충섭 (인내) 내 얼굴 말고, 네 그림이 어떠냐고.
혜지 거울을 보세요.
충섭 어떤 그림이 너야.
혜지 (멈칫) ……
충섭 너 혼자 고호도 됐다, 에곤 쉴레도 됐다, 그래? 너 따라쟁이냐?
혜지 (울컥) ……자긴 파란 물감 막 뭉개놓고 바다라고 우기면서!
충섭 그럼 너도 우겨!
혜지 ……
충섭 죽은 화가 흉내 그만내고 지금 살아있는 너 자신을 주장하라고.
당황한 혜지, 눈을 급하게 깜빡이며 입술을 깨문다.
충섭이 물감과 붓을 챙겨 혜지에게 떠안긴다.
충섭 숙제. 바다. 채색도.
하굣길
-화장품 가게
계산대에 까만 염색약과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을 툭 던지는 혜지.
직원이 불쾌한 표정으로 봉투에 염색약을 담는다.
명옥 OFF 혜지야!
흠칫 놀라 돌아보는 혜지, 명옥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혜지 (해사하게) 안녕하세요!
명옥 너 집에 없다고 성님이 걱정하던데…… (기웃) 뭐 샀어?
혜지 별 거 아니에요.
혜지가 직원 손에서 봉투를 낚아채 허둥지둥 가게를 나간다.
명옥 (수상한) 뭐지……
-공중 화장실
염색의 흔적으로 검은 물이 들어 지저분한 세면대.
혜지가 핸드 드라이어에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다.
까맣게 염색된 머리카락들이 이리저리 너울거린다.
마침 들어오던 마을 사람2가 그 기괴한 모습에 깜짝 놀란다.
계춘의 집 마루
손으로 비틀어 짠 혜지의 옷가지들이 고무 대야에 가득 쌓여 있다.
티셔츠, 원피스, 바지, 속옷 등을 하나씩 탈탈 털어서 빨랫줄에 너는 계춘.
석호, 명옥, 마을 사람1, 2가 마당에 서서 계춘을 보고 있다.
석호 ……누님.
계춘 얘기들 끝났으면 거 섰지 말고 가보게.
석호 누님! 애가 대낮에 버젓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다니는데 어떡하실 거예요.
명옥 집 놔두고 공중변소서 염색을 하질 않나……
계춘 ……
마을사람1 암만해도 보통 애가 아닌 듯싶네요.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계춘 (왈칵) 아무렴 보통 애가 아니지!
움찔하는 마을 사람1에게 석호가 매섭게 눈총을 준다.
계춘 자네 밭 귤나무 300그루 이름을 한 개도 겹침 없이 지어줬던 애야.
다시 물어봐도 헷갈리지도 않고 이름 300개를 기억하던 애였어.
그런 애가 어디 보통 앤가!
석호 누님, 최 사장 말은 그게 아니라……
계춘 애 없을 땐 어디서 잘 살고 있을 거라 장담들을 해대더니,
간신히 찾은 애 잘 좀 살게 도와줄 생각은 않고 뭣들 하는 짓인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석호, 명옥, 마을 사람1, 2.
그 때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명랑하게 들어오는 검은 머리 혜지.
혜지 염색약 좀 남았는데 하실래요?
순식간에 계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빨랫줄에 널린 자신의 속옷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혜지.
혜지 (짜증) 할머니!
혜지가 팬티와 브래지어를 얼른 걷어서 안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귀여운 듯 픽 웃으며 혜지가 벗어던진 신발을 정리해주는 계춘.
계춘 (찌릿) 정말 여기서 눌러 살 참인가!
석호와 명옥, 마을 사람1, 2가 허둥대며 대문을 빠져나간다.
계춘의 집 욕실
재래식 화장실이 있던 자리에 새로 만든 욕실.
하얀 변기와 세면대, 샤워기가 갖춰져 있다.
혜지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변기에 걸터앉아 손톱을 살펴보는 혜지.
그 때 밖에서 잠긴 문을 당기는 기척이 느껴진다.
혜지 저 있어요!
계춘 E 응, 그래. (중얼) 문이 왜 안 열리냐.
계속 밖에서 문을 이리 당기고 저리 밀고 하는 계춘.
혜지 (황당한) 저 있다니까요!
계춘 E 알았다니까! (중얼) 벌써 고장이 났나? 공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혜지가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일어서는데, 욕실 바닥에 쥐가 있다.
혜지 (비명) 할머니!
곧장 문이 부서질 듯 세차게 열리며 계춘이 들이닥친다.
계춘 (다급하게) 왜, 뭔 일이야!
혜지 저기, 저기 쥐, 쥐, 쥐!
혜지가 호들갑스럽게 가리키는 쪽을 보면 회색 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계춘 (안도한) 난 또……
계춘이 뚫어뻥을 들고 쫓으려 하자 잽싸게 도망치는 쥐.
쥐가 달려오자 혜지가 비명을 지르며 변기 위로 올라간다.
좁은 욕실을 뱅뱅 돌며 쥐와 사투를 벌이는 계춘과, 발을 동동 구르는 혜지.
마침내 계춘이 뚫어뻥 고무 안에 쥐를 가두는 데 성공한다.
혜지가 박수를 치며 좋아하자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계춘.
그 때 혜지가 자신의 손등에서 기어가는 거미를 발견한다.
으아아- 비명을 지르고 손을 털며 욕실을 뛰쳐나가는 혜지.
PC방 앞 (오후)
배낭을 멘 교복차림의 혜지가 초조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
철헌 E (경계하는) 누구야.
혜지 나.
철헌 E 오, 남혜지! 너 지금 어디야?
혜지 제주도. 어떻게 됐어?
철헌 E (낄낄거리는) 존나 멀리 텼네?
혜지 어떻게 됐냐니까!
철헌 E 자빠진 새끼가 혼수상태래. 씨발, 이러다 확 뒤지는 거 아냐?
크게 동요하는 혜지.
철헌 E 넌 거기 짱박혀 있어. 또 연락하고.
통화를 마친 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는 혜지.
스르르 돌아서는데 자전거를 탄 이한이 PC방 입구에 버티고 있다.
이한 누구야?
흠칫 놀란 혜지가 자전거를 걷어찬다.
길
자전거를 끌며 혜지를 졸졸 따라가는 이한.
이한 어디 가는데? 집? 시내? 내가 데려다줄게.
혜지 ……제일 가까운 바다가 어디냐?
이한 바다? 타!
혜지 됐고, 어떻게 가는데?
이한 코너 돌아서 곧장 20분쯤 달리면 돼.
혜지가 대뜸 자전거 안장에 앉더니 빠르게 페달을 밟는다.
졸지에 자전거를 뺏긴 이한, 소리를 지르며 혜지를 쫓는다.
이한 야! 내 마음 훔쳐간 걸로도 모자라서 자전거까지 훔치냐!
바닷가
자전거를 세워놓고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혜지.
뛰어온 이한, 가쁜 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혜지 저게 뭐야?
이한 헉헉- 뭐, 뭐가?
혜지 저기 주황색.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일어서서 바다를 보는 이한.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주황색 부표들, 해녀들의 태왁이다.
이한 너희 할머니잖아.
혜지 (짜증) 장난해?
이한 (움찔) 장난 아닌데……
그 때 태왁 옆으로 해녀의 머리가 튀어나오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난다.
혜지 (어리둥절한) 무슨 소리야?
이한 숨비소리.
혜지 뭐?
이한 바닷속에서 3분간 참았던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잖아.
혜지 (놀란) ……
이한 다 까먹었어? 옛날에 넌 너희 할머니 매니저 같았는데……
그 때 두둑한 망사리를 끌고 물에서 나오던 계춘.
혜지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해수욕장, 해녀 판매장 (해질녘)
간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혜지.
계춘이 전복, 소라, 해삼 등을 접시 가득 썰어준다.
꿈틀거리는 해산물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혜지.
계춘이 손으로 전복 한 점을 집어 혜지 입에 쏙 넣어준다.
엉겁결에 받아먹고는 인상을 찌푸리던 혜지, 우물거린다.
혜지 (감탄) 우와~ 소주 한 잔 했으면 좋겠다!
흠칫 놀라는 계춘과 혜지가 겸연쩍게 웃는다.
(cut to)
계춘과 혜지가 일몰을 배경으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종이컵 소주잔으로 건배를 하는 계춘과 혜지, 원샷을 한다.
계춘이 혜지 입에 먼저 소라를 넣어준 뒤, 자신도 한 점 먹는다.
회한을 삭이듯, 붉은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계춘.
혜지 ……어떻게 참아요?
계춘 뭘.
혜지 숨이요.
계춘 꾹 참지.
혜지 안 힘들어요?
계춘 힘이 들지. 머릿속이 벌떡벌떡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고
숨통이 쪼그라드는 것이 눈앞이 자글자글하지. 그래도 참아야지.
혜지 왜요.
계춘 먹고 살아야 하니까.
혜지 ……먹고 살만 해요?
계춘 (낄낄 웃는) 너한테 보태주면 보태줬지 신세는 안지니 걱정 마라.
혜지 ……몇 살까지 할 수 있어요?
계춘 죽을 때까지 해야지. 물질을 칠성판 등에 지고 하는 일이라지 않냐.
혜지 칠성판이 뭔데요?
계춘 관.
혜지 ……
계춘 팔자가 사나워 서방, 아들을 한날한시에 물에 묻었으니,
나도 용왕 할망 손에 발목이 잡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혜지 ……왜 분위기 좋은데 죽는 소릴 해요. 술 맛 떨어지게!
계춘 (픽 웃는) 술 맛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어디 보자.
계춘이 소주병을 잡으려하자 혜지가 먼저 낚아채 소주를 따라준다.
건배를 한 뒤 소주를 원샷하는 계춘과 혜지.
계춘 그렇게 쉽게 안 간다. 12년 만에 겨우 살만해졌는데……
10월엔 집을 비워줘야 하니……
이번 용왕제 때 용왕님께 우리 살 곳 점지해 달라고 빌어보자
혜지 용왕제요??
항구(용왕제)
형형색색으로 만장을 한 용왕제 화려한 모습이 부감으로 보여진다.
용왕님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계춘을 비롯한 석호, 명옥 내외, 마을 사람들, 관광객
충섭 과 혜지의 학교 선생님들도 함께 참여한 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건하게 치러지고 있는 해녀들의 제. 충섭은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고 있다.
관광객들 좋은 구경 난 듯 사진도 찍고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혜지와 한.
혜지 뭐 하는 거냐?
한 용왕제라고 해녀들이 용왕님한테 제사 지내는 거야
너희 할머니가 해녀 대장이라 저렇게 앞장서서 하시는 거야
혜지 해녀대장?
혜지가 계춘을 바라보면, 무엇을 그리 간절하게 비는지
두 손을 모아 비벼가며 바다를 향해 기도를 하고 있다.
(cut to)
제사가 슬슬 마무리 되어가고 카메라를 만지던 충섭.
충섭 어른신들 단체사진 한 장 찍으시죠. 다들 모여보세요.
마을회관
용왕제를 마치고 해녀들과 그녀들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모습.
명옥이 돌아다니며 음식을 나르고, 한 쪽 노래방기계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또 한편에서는 술에 기분 좋게 취한 계춘이 손지 자랑을 한창 하고 있다.
걸쭉하게 취한 석호가 돌아다니며 어른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혜지는 시키는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
이때 석호, 노래방 마이크를 집어 들고 일어선다.
석호 자~ 자~ 오늘 용왕제 하시느라고 다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여기 오늘 모이신 분들 중에 최고 어르신이시고 해녀대장
홍계춘 여사의 노래 한 자락 들어보겠습니다.
계춘 야이~ 썩을 놈아 뭔 노래야.. 하지 말어.
사람들 일제히 홍계춘을 외친다.
사람들 홍계춘! 홍계춘!!
혜지도 이 광경이 재미 난는 듯 피식~ 하며 작음 웃음을 보인다.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석호의 손에 이끌려 노래방 기계 앞으로 간 계춘.
계춘 알았어. 알았어. 한 소절 할 라니까, 흉들 보지 말어.
떠밀리듯 마이크를 잡는 계춘. 사람들 박수 환호 터지고 계춘이 선택한 곡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전주가 흘러나온다.
계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일순간 조용해지는 마을회관.... 깊은 목소리와 기막힌 음정과 감정에 모두 반전이라는 듯
놀라서 바라보고 있다. 누구보다 혜지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충격이다.
명옥 (혜지에게)왕년에 너 할멍 악극단 생활 좀 하셨지...
노래가 서서히 달아오르면 계춘의 깊은 눈에 눈물이 고이고, 옛날 어린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계춘의 얼굴이 앳딘 10대처럼 홍조를 띄고 있다.
(cut to)
노래가 끝날 무렵, 다시 할머니로 돌아온 계춘의 얼굴....
그런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혜지.....
충섭이 할머니의 진짜 얼굴을 그려 오라 했던 것을 떠올리는 혜지.
그리고 바닷가에서 '난 물질하느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했다'는 계춘의 모습이
플래시백으로 스쳐간다.
노래 끝나자 일제히 충격이라는 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수줍어하는 계춘, 자리로 돌아가 막걸리 한잔 들이킨다.
계춘의 방
방으로 계춘을 부축해서 들어가는 혜지. 고단했던 하루에 술기운 까지 올라 힘겨웠던
계춘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잠이 든다.
혜지는 등 돌려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멈칫 하고는
계춘의 이불을 잘 만져서 따뜻하게 해준다.
이때 경대위에 놓인 못 보던 향수병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잠든 계춘을 뒤로 한 채 마루에 걸쳐 앉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충섭의 작업실
혜지가 그려온 바다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는 충섭.
주황색 태왁들이 넘실대는 푸른 바다를 거친 붓 터치로 표현했다.
짐짓 기대하는 눈빛으로 충섭의 표정을 살피는 혜지.
충섭 주제는?
혜지 (머뭇거리는) ……바다?
충섭 그건 소재고. 바다를 통해 니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혜지 별로 그런 거 없는데요.
충섭 그럼 왜 그렸어.
혜지 그려오라면서요!
충섭 ……바다를 물감 팍팍 써가며 거칠게 그린 이유는?
혜지 걔가 원래 거칠잖아요.
충섭 태왁이 열 한 개니까 해녀 열 한 명이 바닷속에 있겠네?
고통스럽게 숨을 참으며 맨몸으로 거친 바다와 사투를 벌이는 해녀들이?
혜지 (깨닫는) ……
충섭 물론 계산하고 그린 건 아닐 테지.
혜지 ……
충섭 넌 별 생각 없이 그렸을지도 모르지만, 너의 감각은 달라.
이미 너의 그림은 세상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거다.
충섭이 혜지에게 그림을 돌려준다.
충섭 그럼 좀 더 본격적으로 말을 걸어볼까?
돌돌 말려있던 브로마이드를 펼쳐 보이는 충섭.
서울 경복궁에서 개최되는 <고교 미술 경연대회> 포스터다.
충섭 입상자 열 명은 미대 수시 지원도 가능하고, 전시회도……
혜지 싫어요.
충섭 이유는?
혜지 남한테 검사받고 등수 매기고 그런 거 완전 병 맛이거든요?
충섭 왜? 질까봐? 심사위원에 대한 불신? 경쟁사회에 대한 불만?
혜지 암튼 싫어요.
충섭 왜 싫어?
혜지 싫으니까 싫죠. 제 맘이에요.
충섭 그 마음이란 게 뭔데?
혜지 참나, 마음이 마음이죠!
충섭 그럼 이런 마음은 어때?
캐비닛 문을 여는 충섭, 말린 나물들, 각종 술, 음료수, 말린 해산물 등이 가득하다.
충섭 자격이 안돼는 손녀딸을 받아달라고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마음?
그림 좀 가르쳐 달라고 어깨가 빠지도록 조공을 나르는 마음?
혜지 (놀란) ……
충섭 이 세상에 널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혜지 (퉁명스럽게) 위해 달라고 한 적 없거든요.
그림을 휙 집어던지고 작업실을 나가는 혜지.
충섭이 한숨을 쉬며 그림을 주워든다.
충섭 애가 던지는 걸 좋아하네. 야구를 시켜야 하나.
계춘의 집 마당 (오후)
교복을 입고 배낭을 멘 혜지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온다.
고개를 들어 마당 풍경을 살펴보는 혜지.
화단의 꽃들, 겹겹이 쌓아둔 소쿠리, 빨래판과 비누……
큰 달력 한 장을 찢고 굴러다니던 연필을 쥐는 혜지.
달력 뒷면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기교 없이 단순하게 그려본다.
마침 잠수복과 태왁, 망사리를 들고 들어오던 계춘이 우뚝 멈춰 선다.
엎드린 채 다리를 달랑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혜지의 모습에 과거를 회상하는 계춘.
시선을 느낀 혜지가 고개를 돌려 계춘을 발견하고,
계춘이 헛기침을 하며 태왁과 망사리를 부려놓은 뒤 잠수복을 빨랫줄에 넌다.
고무 호수로 잠수복에 물을 끼얹어 소금기를 씻어내는 계춘.
뚫어져라 계춘을 바라보던 혜지, 무심코 계춘의 모습을 그린다.
고무 호수를 놓고 슬그머니 마루로 다가와 혜지의 그림을 보는 계춘.
물뿌리개, 세숫대야, 빨래 방망이 등등과 어깨가 굽은 계춘의 옆모습……
계춘 (괜히) 이제 뭘 그린 건지 좀 분간이 되네.
혜지 (발끈) 좀, 된다구요?
계춘 어릴 적엔 사람 얼굴도 죄다 찌그러진 감자처럼 그리더니만.
이젠 참말로 보기 좋게 잘 그린다. 어디서 이런 재주가 나왔을꼬.
혜지 (뭉클한) ……
계춘 나한테 팔아라.
혜지 (반색) 얼마 주시게요?
계춘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몽땅 꺼내 놓는다.
얼른 돈을 세어보는 혜지와 그림을 멀찍이 들고 샅샅이 살피는 계춘.
그러다 문득 종이를 뒤집어보고는 달력이란 걸 알게 되는 계춘.
계춘 요런 쉬멩이 같은 것! 날 남은 달력은 찢지 말랬지!
혜지 (움찔) 스케치북 꺼낼 틈이 없었어요!
쯧쯧- 혀를 차면서도 흐뭇한 눈빛으로 그림을 보는 계춘이다.
돈을 가지런하게 정리한 혜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돈 냄새를 맡아본다.
혜지 어? 바다냄새다!
계춘 (픽 웃는) 그 돈이 다 바다에서 온 건데 그럼.
계춘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마당을 휘 둘러본다.
계춘 (아쉬운) 떠난다 생각하니 이 집 하나하나가 눈에 밟히네.
여고 앞 (오후)
배낭을 메고 줄리앙을 끌어안고 나오는 혜지.
철헌 OFF 남혜지!
깜짝 놀라며 돌아보는 혜지, 벽에 기대있던 철헌이 씩 웃는다.
철헌 이제 이혜지라고 불러야 하나?
혜지 뭐야!! 왜 왔어? 나 어떻게 찾았어?
철헌 너 여기서 나름 유명하더라. 할머니, 안녕하시냐?
혜지 (움찔) 원하는 게 뭐야?
철헌 그 새끼가 깨어났어.
혜지 (철렁한) ……
철헌 나랑 충희는 출석요구서 받았다. 넌 아직 경찰이 못 찾은 것 같더라.
혜지 ……어쩔 건데.
철헌 합의금 구해야지.
혜지 (코웃음) 그냥 경찰서 가서 사실대로……
철헌 대가리가 있으면 좀 굴려라. 경찰이 네 말을 믿겠냐?
그 새끼가 돈 내놓으면 진술 바꿔주겠다니까……
혜지 (피곤한) 얼마.
철헌 오천.
혜지 (어이없는) 미친.
단호하게 돌아서는 혜지, 빠르게 걷는다.
철헌 은주라고 알지?
마치 비틀거리듯 걸음을 멈추는 혜지.
철헌 니가 예전에 술 만땅되서 재밌는 얘길 했거든. 할머니도 아시냐?
혜지야!! 난 혼자 안 죽는다!!
절망스러운 표정의 혜지, 숨이 가빠진다.
계춘의 집 안방
혜지가 몹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방 안을 휘 둘러본다.
옷장 위아래를 체크한 뒤 이불장 문을 여는 혜지.
켜켜이 쌓인 이불 틈으로 팔을 쑥쑥 집어넣어본다.
이불장 문을 닫은 뒤 옷 서랍을 하나하나 빼보는 혜지.
대충 옷 속을 뒤져본 뒤 서랍을 닫고 자개장을 연다.
앨범과 가계부, 장부들 틈에 통장과 도장, 계춘의 주민등록증이 있다.
통장 마지막 장을 펼쳐 입금 내역을 확인하는 혜지.
혜지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혜지가 통장을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는다.
은행 ATM 코너
머플러를 둘러 얼굴 반을 가린 혜지, ATM 기계에 계춘의 통장을 넣는다.
출금 버튼을 터치하자, 비밀번호를 누르라는 음성과 함께 숫자패드가 화면에 뜬다.
계춘의 주민등록증을 보며 생일 네 자리를 누르지만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음성.
혜지 내…… 생일.
자신의 생일 네 자리도 틀렸다는 음성이 나오자 취소 버튼을 눌러 통장을 회수한다.
혜지 그래... 이건 아냐...
요양병원 체육실
간호사가 앞에서 노래에 맞춰 팔 동작을 선보인다.
활짝 웃으며 따라하는 계춘을 명옥과 할머니들이 자꾸 흘깃거린다.
항복이 다가와 흐뭇한 표정으로 계춘을 본다.
항복 보기 좋습니다. 옷차림에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어리둥절한 계춘이 자신의 차림새를 확인한다.
혜지의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에 흠칫 놀라는 계춘.
몸빼바지와 꽃무늬티를 입은 할머니들 틈에서 계춘은 단연 눈에 띈다.
동네 어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통화 중인 혜지.
혜지 할머니에겐 절대 안돼!
비번 알아내자마자 뜰 거야. (사이) 대타 구해놔.
대충 느낌만 비슷하게.
(사이) 알았어,(사이) 또 연락할게.
통화를 마치고 다시 주위를 살피며 긴 한숨을 내 쉰다.
계춘의 집 앞, 마당 (저녁)
마당으로 들어서려다 흠칫 놀라서 담에 몸을 숨기는 혜지.
슬쩍 마당을 보면, 계춘, 석호, 유니폼 차림의 경찰이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염탐하던 혜지, 계춘의 빨간 원피스 차림에 경악한다.
경찰 도둑이 든 것 같진 않은데 말입니다.
계춘 도둑놈이 아니면, 발이 달려 도망을 갔나?
석호 거기 놔둔 건 확실해요? 난 육십 넘고부터 기억이 영 띄엄띄엄한데……
계춘 (역정) 누굴 바보 천치로 알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언제 어디라도 우리 혜지 나타났다하면 당장의 여비로 둔 돈인데……
경찰 (숙연) 제가 조사를 해볼 테니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안도를 하는 것과 동시에 씁쓸한 혜지, 슬그머니 마당으로 들어선다.
계춘 혜지 왔냐?
혜지 ……그 옷 잘 어울리네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표정으로 움찔하는 석호와 경찰.
계춘 (쑥스러운) 그러냐.
혜지 할머니 입으세요.
계춘 무슨! 그냥 한 번 입어봤다. 젊은 너나 입어라.
석호가 찜찜한 표정으로 혜지를 유심히 뜯어본다.
계춘의 집 혜지방
창문 옆 벽에 몸을 붙이고 마당의 계춘과 석호의 대화를 훔쳐 듣는 혜지.
석호 E (소곤거리는) 비밀번호를 통장에 적어두면 큰일 나요.
집 열쇠에 주소 써놓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알죠?
계춘 E 그걸 모를까!
석호 E (귀를 갖다 대며) 저만 알고 있을 테니까 슬쩍 불러줘 봐요.
계춘 E 됐네! 잊어버릴 숫자가 아니니까 걱정마라.
자네 안 가나? 우리 혜지 저녁 먹여야 된다.
석호 E 갑니다, 가요. 이제 대문 잠그고 살아요. 애도 왔는데……
대문이 닫히는 소리, 잠그는 소리, 계춘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책상 서랍을 열어 이혜지 실종 전단지를 꺼내보는 혜지.
실종날짜 00년 05월 12일을 확인한다.
혜지 (중얼거리는) 공, 오, 일, 이.
혜지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배낭에 옷과 화장품, 돈뭉치 등등 자신의 짐을 쑤셔
넣었다, 뺐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인 후 다시 넣는다.
충섭의 미술실
심각한 표정으로 대금을 어루만지는 여신과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충섭.
여신 그러니까 어제의 자율학습 땡땡이가 오늘의 결석으로 이어졌군요.
충섭 죄송합니다, 오 선생님. 제가 어제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여신 아닙니다. 아끼는 제자의 탈선을 한 번은 봐주는 것이 스승의 마음이죠.
충섭 (감동) 오, 오 선생님……
충섭이 허둥지둥 책상 서랍에서 그림을 한 장 꺼내온다.
충섭이 공손하게 건네는 그림을 받아 유심히 보는 여신.
충섭의 스타일로 그린 여신의 초상화, 마치 불타는 모닥불 같다.
여신 캠프파이어입니까?
충섭 (충격) ……오 선생님 초상화입니다.
여신 (흠칫)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충섭 (우물쭈물) ……제 마음입니다.
여신 (눈치 챈) 아! 그럼 답을 드려야죠.
여신이 대금으로 태평가 한 소절을 짧게 연주한다.
여신 그럼 전 이만……
작업실을 나가며 휴대폰 통화를 하는 여신.
여신 김 순경님? 학생 위치만 좀 파악해주세요. 사진 보내겠습니다.
황홀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던 충섭이 태평가 가사를 흥얼거린다.
충섭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하나……?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는 충섭.
석호의 배
서울 소인이 찍힌 서류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보는 석호.
어린 혜지와 얼핏 닮아 보이는 18세 여자 그래픽 사진이다.
석호 암만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여보!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잠수복 차림으로 성게를 손질하고 있던 명옥, 손을 닦으며 온다.
명옥 뭔데요?
사진을 보여주는 석호와 유심히 들여다보는 명옥.
석호 ……누구랑 닮았지?
명옥 (갸우뚱) 글쎄…… (놀란) 혜지 어릴 적 얼굴이 보이네!
석호 그렇지? 컴퓨터는 혜지가 요렇게 큰다고 하는데,
지금 혜지 얼굴이랑은 영 딴 판이잖어!
명옥 어린 것이 부모 잃고 고생을 해서 그런 갑네. 쯧쯧, 불쌍한 것.
다시 돌아가 성게 손질을 하는 명옥.
석호 (중얼거리는) 아니, 고생이랑 얼굴뼈랑 뭔 상관이 있다고……
(한숨) 그나저나 누님한테 보여주기도 그렇고 영 찜찜하네……
명옥 OFF 여보, 계춘성 나올 때 안 됐나?
석호가 벌떡 일어나 바다를 살핀다.
석호 (불안) 태왁이 안 보이네?
제주공항 티켓 창구
혜지가 비행기 티켓을 발권하고 돌아서는데, 여신이 서 있다.
재빨리 등 뒤로 티켓을 감추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혜지.
여신 넌 뭐든 잘 던지지, 내가 잡는 건 좀 하거든! 어디 한번 뛰어봐.
혜지 제가 급하게 서울에 가야되거든요.
여신 ……
혜지 친구가 병원에 입원을 해서……
(체념한 표정으로) 저 그냥 보내 주시면 안돼요?
여신 할머니가 바다에서 실종되셨다.
혜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부둣가 (오후-밤)
헐레벌떡 뛰어오는 혜지, 마을 사람들이 해녀들의 태왁과 망사리를 에워싸고 있다.
털썩 주저앉아 망사리 속 소라와 전복 따위를 노려보는 혜지.
씩씩거리며 망사리에서 소라와 전복 따위를 꺼내 던져버린다.
혜지 이깟게 뭐라고 목숨을 걸어!
말리지 않고 침울한 얼굴로 혜지를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
(cut to)
부둣가에 앉아 시커먼 밤바다를 애타게 바라보는 혜지.
이한이 다가와 옆에 나란히 앉는다.
혜지 (힘없이) ……나 그만 따라다녀.
이한 ……
혜지 나랑 엮이는 사람들은 다 죽거든.
이한 ……
혜지 (픽 웃는) 존나 인간 살상 무기 같지 않냐?
이한 난 안 죽어. 할머니도 아직은 아니야.
혜지 ……어떻게 12년을 기다렸을까. 1분 1초도 미칠 것 같은데……
이한이 말없이 혜지의 어깨를 토닥거려준다.
그 때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오는 것에 벌떡 일어나는 혜지와 이한.
도착한 배에서 석호가 축 늘어진 계춘을 업고 달린다.
계춘의 집 안방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계춘.
혜지, 석호, 명옥, 마을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러 앉아 있다.
이불 속으로 청진기를 넣어 계춘의 가슴에 대 보는 항복.
항복 큰 이상은 없습니다.
석호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석호 누님 같은 상군 해녀가 파도에 휩쓸려 태왁을 놓치다니요.
명옥 (한숨) 마침 박 선장네가 늦지 않게 발견을 해 천만다행이에요.
석호 집에선 돈 백 만원이 없어지질 않나……
말끝을 흐리며 미심쩍은 눈으로 혜지를 흘깃 보는 석호.
마을사람 돈이 없어져?
석호 찬장에 비상금으로 넣어둔 돈이 홀랑 사라졌다네.
마을사람 계춘성, 각방네 급히 필요하대서 빌려준 돈이 그 돈 아녀?
내가 그 날 찬장서 꺼내는 걸 본 것 같은데……
계춘 (눈 을 감은 채) 그랬네, 참..
석호 누님…… 이젠 여기저기 마을 사정 다 봐주고 그러지 말아요.
혜지도 있는데 이제 누님 잇속도 차리고……
계춘 알았으니까 그만들 가 봐. 속 시끄럽다.
명옥 네. 주무세요. 좀 쉬시게 다들 나갑시다.
석호, 명옥, 항복,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방을 나간다.
석호가 혜지의 긴 머리카락이 매달려 있는 빗을 발견한다.
슬그머니 주머니에 빗을 숨겨 나가는 석호, 방문을 닫는다.
혜지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계춘 혜지야. 일루 들어와. 할망 춥다.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는 계춘, 혜지가 쭈뼛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이불 속에서 가만히 살을 붙이고 누워 있는 계춘과 혜지.
계춘 너 때문에 살았다.
혜지 ……
계춘 니 얼굴이 아른거려 죽을 동 살 동 발버둥 쳐서 살았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는 혜지.
계춘이 살며시 혜지의 등을 토닥거려준다.
충섭의 작업실
고교 미술 경연대회 포스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혜지.
다가온 충섭이 후루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컵라면을 먹는다.
충섭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라는 말이 있지
너와 할머니 인연도 참...
혜지 ……쌤, 그림으로 고백…… 같은 걸 할 수 있을까요?
충섭 ……못할 건 없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컵라면을 내려놓는 충섭.
충섭 책 한 권 읽는데 얼마나 걸리지? 3시간?
영화는 2시간을 봐야 하고, 음악도 5분은 들어야 하지.
그림은 1초면 볼 수 있어. 1초. 쉽고 또 어렵지. 할 수 있겠어?
혜지 (곰곰이) ……저기 나갈래요.
충섭 (씩 웃는) 나가.
혜지가 곧장 이젤 앞으로 가서 물감과 도구 등을 정리한다.
혜지 쌤, 스케치 안 하고 바로 채색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충섭 어쭈~ 색칠 좀 한다 이거지?
흐뭇하게 웃으며 혜지에게 다가가는 충섭.
거리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계춘. 머리위엔 큰 보따리 하나가 올려져있다.
길을 잃은 듯 허둥지둥 하는 모습. 때 마침 촌으로 가던 남경찰, 계춘을 발견한다.
남경찰 (차 창문내리며) 할머니! 여기서 뭐하세요?
계춘 (당황) 아... 집에 갈라는데 버스정류장 찾느라고
남경찰 타세요! 저도 가는 길이에요!
경찰차에 올라타는 계춘.
보따리를 꾹 쥐고선 창밖을 보는 계춘.
남경찰 (운전하며) 평생을 다니시던 길인데~
버스정류장 어디신지 잊어버리신 거예요?
계춘 잊기는 이 양반아 ....
계춘, 은근히 걱정되는 듯 다시 창문 응시.
동네 어귀
초조한 모습으로 철헌과 통화 중인 혜지.
혜지 5월 O일 오후, 경복궁. (사이, 짜증) 쪼지 마라.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거잖아!
이 동네는 얼씬도 않겠다는 약속만 지켜!
(사이) 알았어.
혜지가 돌아서는데, 이한이 바로 앞에 서 있다.
혜지 그만 따라다니랬지?
이한 나 안 죽는다니까.
혜지 내가 널 죽일 것 같거든.
이한 너 서울 갈 거지?
혜지 (움찔) ……뭐?
이한 미대 갈 거잖아.
혜지 (안도하는) 신경 꺼.
이한 너 가고 나면 할머니가 얼마나 적적하시겠어.
혜지 어쩌라고.
이한 할머니한테 남친을 만들어주는 거야.
시큰둥하던 혜지의 표정이 솔깃하게 바뀐다.
계춘의 집 마루
뽀얗게 피부화장을 하고 은은한 아이섀도를 바른 계춘.
혜지가 빨간 립스틱을 꺼내자 계춘이 손사래를 친다.
계춘 할망이 루즈를 발라 뭐해.
혜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립스틱을 내려놓으려하자 흠칫하는 계춘.
계춘 (황급히) 정 그러면 살짝만 발라보든가.
픽 웃는 혜지, 계춘의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발라 준다.
다 바른 뒤 손거울을 들어 계춘의 얼굴을 비춰주는 혜지.
혜지 우와~ 우리 할머니 까리한데? 내가 누구 닮아 예쁜가 했더니.
계춘이 흐뭇하게 웃으며 거울 속 낯선 자신의 모습을 요모조모 살펴본다.
그 때 빵빵- 클랙슨 소리가 나고, 항복과 이한이 탄 스포츠카가 와서 선다.
더블데이트 <몽타주>
-해안도로
스포츠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항복, 계춘, 혜지, 이한.
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 바람을 만끽하는 혜지.
조수석에 앉은 계춘은 겁먹은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부여잡고 있다.
-유채꽃밭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계춘과 항복 사진을 찍고 있는 혜지.
항복과 계춘은 어색한 표정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혜지 의사쌤 왼쪽으로 한 발작 만요. 할머니는 오른쪽으로 조금만.
쌤, 할머니 어깨동무! 할머닌 얼굴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여봐.
혜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가 다정한 포즈를 연출하게 된 계춘과 항복.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혜지가 찰칵 사진을 찍는다.
-쇠소깍
계춘과 항복, 혜지와 이한이 둘씩 짝지어 투명 카약을 탄다.
신기한 듯 카약을 만지작거리는 계춘, 혜지와 눈이 마주친다.
손짓발짓으로 패들을 잡으라고 시키는 혜지.
계춘이 엉거주춤 항복이 젓고 있던 패들을 같이 잡는다.
항복이 쑥스러운 듯 웃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 하는 혜지.
혼자 열심히 패들을 젓던 이한이 그런 혜지를 보며 피식 웃는다.
-미로공원
계춘이 돌담 미로 안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는다.
모퉁이를 돌다 항복과 맞닥뜨린 계춘, 두 사람이 어색하게 웃는다.
수목원 잔디밭
책을 베고 누워 곤히 잠든 이한.
혜지는 스케치 노트에 계춘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계춘과 항복을 흘깃거리는 혜지.
혜지 (혼잣말처럼) 죽어서 못 보는 것보단 살아서 못 보는 게 낫겠지?
이한 (잠을 깨며) 뭐?
혜지 됐다.
머리 위로 새들이 경쾌하게 지저귀며 날아다닌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스르르 미소를 짓는 혜지.
하루 종일 몹시 어색해하던 계춘의 얼굴을 다시 그려나간다.
계춘 E (날카로운) 왜 이러세요!
이한이 잠에서 깨어나고, 혜지가 얼른 계춘 쪽을 본다.
계춘의 손을 살포시 잡았던 항복, 얼른 손을 놓는다.
항복 미안합니다. 제가 실례를……
계춘이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갑자기 도망을 친다.
깜짝 놀라서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혜지와 이한.
항구 (해질녘)
다급한 걸음으로 정박해 있는 배들을 살피는 계춘.
허둥대던 계춘이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를 지른다.
계춘 우리 태윤이 아방이랑 태윤이 못 보셨소? 배가 아직 안 들어왔어요.
태윤이 아방 소식 모릅니까? 네? 우리 애 못 봤어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태윤이 아방, 태윤아-를 부르짖는 계춘.
혜지 E (멀리서) 할머니!
퍼뜩 정신이 돌아오는 계춘, 황급히 눈물을 닦는다.
후다닥 달려온 혜지가 계춘을 번쩍 일으켜 세운 뒤 옷을 털어준다.
혜지 튕기고 싶으면 왜 이러세욧! 정도로 끝내야지, 도망을 치면 어떡해요?
더구나 그 나이에 밀당이 왜 필요해? 만져주면 고마운 거죠!
계춘 수절한지 오래돼 그런다.
혜지 그러니까 하루라도 더 늙기 전에 남자를 낚아야죠!
계춘 남자는 무슨! 일없다. 이번 생엔 느 할아방 하나면 됐어.
나이 스물에 과부된 할망들이 수두룩한 섬에서,
그래두 난 열여덟에 시집와 30년 넘게 살았으니 이만하면 됐다.
혜지 그래도……
계춘 느 할아방이랑은 오순도순 잘 지냈지. 금실도 좋았고.
혜지 (소름) 으아아- 왜 나한테 할아버지랑 섹스한 얘길 해!
계춘 (태연한) 뭐 어떠냐. 너도 다 그렇게 태어난 걸.
혜지 (픽 웃는) …… (문득 씁쓸한)
계춘이 잔잔한 밤바다를 물끄러미 본다.
계춘 내일은 물질 나가야겠다.
혜지 의사쌤이 당분간 쉬랬잖아요.
계춘 끄떡없다. 놀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나.
혜지 그럼 나도 할래요.
계춘 (비웃듯) 네가 물질을?
혜지 할머니도 하는데 내가 왜 못해.
계춘 (버럭) 못 해. 안 돼! 죽으면 죽었지 너 물질하는 꼴은 못 본다!
혜지 (뭉클한) ……알았어요.
핏대를 올리던 계춘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
혜지 (씩 웃는) 다 방법이 있죠.
계춘 (의아한) ……?
석호의 배
힘겹게 잠수모를 쓰는 계춘과 강사의 도움을 받아 스킨스쿠버 슈트를 입는 혜지.
쑥을 뭉쳐 수경을 닦는 계춘과 서리 방지 스프레이를 칙칙 뿌리는 혜지.
납이 주렁주렁 매달린 허리띠를 차는 계춘과 산소통을 메는 혜지.
우아하게 바다로 뛰어드는 계춘과 엉거주춤한 자세로 떨어지는 혜지.
바닷속
계춘이 당황해서 버둥대는 혜지의 손을 꼭 잡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를 한다.
(cut to)
넋을 잃고 현란한 색깔 산호초와 귀여운 물고기들을 구경하던 혜지.
전복과 소라를 잡고 있는 계춘을 물끄러미 보다가 버둥거리며 다가간다.
우연히 전복을 발견한 혜지,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바다
계춘의 태왁을 끌어안은 혜지, 전복 하나를 자랑스럽게 흔든다.
배 위에서 내다보고 있던 석호가 픽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그 때 계춘이 물 위로 솟구치며 길고 힘찬 숨비소리를 낸다.
번쩍 치켜든 계춘의 손에는 꿈틀거리는 대왕 문어가 들려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는 석호.
석호의 배
스킨스쿠버 슈트를 벗으려던 혜지가 계춘에게 다가간다.
끙끙거리며 잠수복 상의를 벗는 계춘을 혜지가 도와준다.
계춘이 얌전히 혜지의 손길에 몸을 맡긴다.
이 모습을 석호가 흐뭇하면서도 어딘지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본다.
계춘의 집 혜지방
이불을 목까지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혜지.
얼굴에 분홍색 발진들이 우수수 솟아 있다.
계춘이 물수건을 꼭 짜서 혜지의 이마에 올려준다.
안쓰러운 눈으로 혜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계춘.
스르르 눈을 뜨던 혜지가 계춘을 보더니 흠칫 놀란다.
계춘 다 잤어? 죽 좀 줘?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진 혜지가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젓는다.
계춘 어릴 적 수두는 하면서 홍역을 떼어먹어 걱정했는데…… 잘 됐다.
슬금슬금 얼굴 쪽으로 향하는 혜지의 손을 급히 떼어내는 계춘.
혜지 (어리광) 간지러운데……
계춘 고운 피부 흠난다. 조금만 참아.
계춘이 혜지의 손을 이불 안에 단단히 집어넣는다.
수건을 물에 적신 뒤 꼭 짜서 혜지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는 계춘.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혜지가 눈물을 참으려고 두 눈을 꼭 감는다.
충섭의 작업실
혜지가 그린 계춘 초상화 일곱 장이 순서대로 놓여 있다.
건조하게 계춘의 생김새만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초반의 그림들.
후반의 그림들에선 계춘의 사랑스러움, 완고함, 의외의 귀여움 등이 드러난다.
그림을 보던 충섭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충섭 확실히……
혜지 (기대하는) ……
충섭 똥개보단 가르치는 재미가 있단 말야.
혜지 (짜증) 아이씨!
충섭이 혜지의 꿀밤을 딱 때린다.
충섭 훨씬 어렵지만.
혜지 아야……
충섭 처음 그림과 마지막 그림의 차이를 잘 기억해둬.
혜지 ……
충섭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또 보면, 더 알게 되는 거야. 잊지 마.
반항적이던 혜지의 눈빛이 스르르 아련해진다.
계춘의 집, 마루
제주도 특유의 조촐한 제사상이 차려져 있다.
태윤의 젊은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 혜지.
계춘이 앉은 채로 술을 따라 상에 놓는다.
옆으로 비켜 앉으며 혜지에게 눈짓을 하는 계춘.
쭈뼛거리며 상 앞에 서는 혜지, 어설프게 절을 두 번 한다.
계춘 자네 딸 혜지가 왔네.
어여쁜 새끼가 눈에 밟혀 그 먼 길을 어찌 갔는가.
계춘이 긴 한숨을 쉬며 제주를 마신다.
계춘의 손짓에 엉거주춤 앉는 혜지.
계춘이 잔에 술을 따라 혜지에게 건넨다.
술잔을 받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혜지.
계춘 괜찮다. 아방 보낸 날인데 너라고 속이 편할 리 없지.
꼴깍꼴깍 술을 마시는 혜지, 계춘이 기다렸다가 전을 입에 쏙 넣어준다.
익숙해진 듯 전을 받아먹는 혜지, 계춘은 잔을 가져가 술을 따른다.
계춘 (몇번을 망설이다가)느 어멍이 잘해주더냐.
혜지 (움찔하는) ……
계춘 ……못난 사람이지만 못된 여자는 아녔어.
혜지 ……잘해줬어요.
계춘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마신다.
계춘 12년 동안 너 찾아다니느라 내 속이 시커멓게 탔지만……
그래도 난 느 어멍 원망 안 한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다만 널 혼자 두고 먼저 간 게 야속할 뿐이지.
침울한 혜지, 계춘이 따라놓은 술을 마셔버린다.
계춘이 손으로 집어서 내미는 전을 잠자코 받아먹는 혜지.
계춘 (조심스럽게) 어멍 죽고선 어찌 지냈어.
혜지 아빠, 아버지 죽고 고아원에서 지냈어요.
거긴 어린이 동물원 같았어요.
술병을 쥐는 계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간신히 술을 따라 급하게 한 모금 마시는 계춘.
혜지 뭐 괜찮아요. 세상엔 이상한 일들이 진짜 많거든요. 그거 아세요?
좋은 일은 늘 불공평하지만,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일어나요.
계춘 ……내 새끼, 다 내 잘못이다. 모두 할망 잘못이야.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계춘의 눈이 촉촉하다.
계춘 이젠 할망이 있으니까, 할망이 뭐든 할 테니까, 할망이랑 잘 살자.
계춘이 혜지의 손을 꼭 쥐고 가만히 등을 쓰다듬는다.
안도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계춘의 어깨에 기대는 혜지.
제주공항
충섭에 이어 혜지가 출국장을 통과하려는 참이다.
계춘 E 혜지야!!!!
흠칫 놀라서 돌아보는 혜지, 계춘이 보따리를 안고 뛰어온다.
혜지 (투정부리듯) 왜 왔어요. 안 와도 된다니까.
계춘 요 앞에 지나가다 들렀어.
혜지 뻥이잖아. 여길 왜 지나가.
계춘 (발끈) 그래, 너 마중하러 일부러 왔다! 됐냐?
혜지 ……
계춘의 묵직한 보따리를 받아드는 혜지.
계춘 떡이랑 김밥이랑 넣었으니까 선생님도 드리고 너도 먹어. 응?
혜지 ……물질할 때 조심해요. 파도 심해지면 얼른 나오구요.
욕심내느라 숨 쉬는 거 미루지 말구요. 알았죠?
계춘 (픽 웃는) 아이구, 물질 50년 내가 하룻강아지한테 잔소릴 다 듣네.
혜지 나물 너무 많이 뜯지 마요. 허리 아프다며. 내리막길 조심하구요.
계춘 거 참, 알았다! 너도 차 조심, 사람 조심하거라. 어이 가.
혜지 (무언가 못 다한 말이 있는 듯)저..할머니, 할머니,
그러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출국장을 통과하는 혜지, 계춘이 끝까지 지켜본다.
경복궁 - 경연대회장
한산한 잔디밭, 혜지가 휴대용 이젤을 펼치고 도구들을 준비하고 있다.
뒤에 자리를 펴고 앉아 계춘이 싸준 도시락을 걸신들린 듯 먹는 충섭.
혜지가 찌릿 째려보자 충섭이 짐짓 미안한 척을 한다.
충섭 지도 교사가 도와주면 안 되잖니. 힘내. 원래 예술은 고독한 거다.
혜지가 이젤에 종이를 올려놓고 경연대회 과제 안내문을 들여다본다.
<문화예술위원회 주최 제 7회 고교 미술 경연대회 주제 : 나의 기원>
혜지 ……나의 기원? 나…… 쳇.
혜지가 신경질적으로 안내문을 구겨서 던져버린다.
골이 난 표정으로 빈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혜지.
그러다 #38의 미술 첫 수업시간 충섭이
"아무거나 그려라 너희들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하는 모습과 그때 자신이 그린 그림이 플래시백으로 떠오르며
눈 앞에 흰 종이가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것에 눈이 번쩍 뜨인다.
진지한 표정으로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혜지.
계춘의 집 마루, 마당
마루에 앉아 망사리를 손질 중인 계춘.
석호가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석호 뭐하세요?
계춘 보면 몰라?
석호 ……애는요?
계춘 서울에 그림 그리러 갔잖어. 등수에 들면 대학엘 수월히 간다는데……
하루 버티는 게 이리 힘들었나 싶네. (한숨) 이 섬에 한이 너무 많아.
석호 많죠. 그러니 구천에 사연 없는 혼이 있겠어요.
계춘 그래. 거기다 내 한은 댈 것도 아니지. 엄살 말아야지.
석호가 마루에 걸터앉아 손을 비비며 뜸을 들인다.
석호 ……누님.
계춘 왜.
석호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계춘 ……?
석호 저기, 그러니까…… 그게……
석호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계춘에게 내민다.
계춘이 받아서 보면, 홍계춘과 이혜지의 유전자 분석 결과 보고서다.
계춘 (심드렁한) 이게 뭔가?
석호 그게 뭐냐면…… 유전자 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건데요.
계춘 (어리둥절한) 유전자 검사?
석호 (불쑥) 그 애랑 누님이 영판 남이랍니다!
코웃음을 치는 계춘, 종이를 마당에 휙 날려버린다.
석호 누님……
마당으로 내려가 태왁 옆에 망사리를 두는 계춘.
계춘 암만 뜯어보고 만져 봐도 내 손지가 확실한데 이게 뭔 수작이여!
석호 걔는 혜지가 아니라니까요! 누님이랑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계춘 (버럭) 혜지가 아니면 누구냐! 혜지가 아닌데 뭣하러 혜지 흉내를 내!
석호 (착잡한) 저라고 알겠습니까. ……뭐 없어진 거 없어요?
씩씩대던 계춘, 대문을 기웃거리는 경찰을 발견한다.
경찰 혹시 이혜지양 할머니 되십니까?
계춘 (불안) ……
석호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찰 서울 OO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혜지 양이 모텔 폭행 사건의 용의자로 수배 중입니다.
석호 모, 모텔 폭행?
경악하는 석호, 계춘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경복궁
골똘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던 혜지, 붓을 내려놓는다.
그 때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서 보면, 멀리 철헌이 서 있다.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는 혜지, 철헌이 고개를 끄덕인다.
구겨버린 과제 안내문을 펴서 뒷면에 몇 자를 쓰고 쪽지를 접는 혜지.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충섭 옆에 쪽지를 내려놓는다.
그림을 흘깃 본 뒤 배낭을 메고 철헌에게로 뛰어가는 혜지.
(cut to)
파리가 얼굴에 앉아서 흠칫 잠에서 깨어나는 충섭.
쪽지를 발견하고는 비몽사몽 펼쳐보는데, 눈이 번쩍 뜨인다.
쌤, 미안해요. 고마웠어요. - 똥강아지가 -
허둥대며 일어나던 충섭이 이젤에 놓인 그림을 발견한다.
제목 '계춘할망'이라고 적혀있는 그림을 주시하며
뭐에 홀린 듯, 천천히 다가가는 충섭.
은행 창구
모자를 푹 눌러 쓴 혜지와 철헌, 계춘을 흉내 낸 대타 할머니가 앉아 있다.
은행원이 계춘의 통장과 도장, 주민등록증을 확인한다.
은행원 수표로 드릴까요?
철헌 현금으로 주세요. 바로 쓸 돈이라서…… 하하하.
은행원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은행원이 자리를 비우자 껌을 짝짝 씹으며 머리를 매만지는 대타 할머니.
대타할머니 사람 머릴 폭탄으로 만들어놓고 꼴랑 백? 백 더 줘.
철헌 씨발, 조용해요. 백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대타할머니 싸가지 없는 새끼……
한편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혜지.
은행원이 돌아와 5만원 지폐 100장 묶음 5개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은행원 나머지는 금고에서 가져 올 거에요. 바쁘세요?
철헌 (급하게) 아니요! 괜찮아요.
혜지 ……잠깐만. 잠깐만요.
은행원 (의아한) 네?
혜지 돈 통장에 도로 넣어주세요.
철헌 (이를 악물고) 야, 너 왜 그래.
혜지 다시 넣을 수 있죠? 네?
테이블에 위에 있는 돈을 급히 담아 넣으려는 철헌의 가방을 꽉 움켜잡는 혜지.
철헌 (나지막하게) 너 아주 미쳤구나!
혜지 내 놔. 그거 우리 할머니 전 재산이야.
철헌 (비웃는) 씨발, 효녀돋네. 할머니가 괜찮다는데 왜? 안 그래요, 할머니?
대타할머니 (눈치) 으응. 얘가 갑자기 왜 이럴까? 호호호-
혜지 (난감한) ……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돌아보면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느끼고 냅다 출구를 향해 달리는 철헌.
사복 경찰들이 일제히 철헌을 덮치고 대타 할머니를 붙잡는다.
깜짝 놀라 얼음이 된 혜지에게도 경찰이 다가온다.
경찰서 조사실
책상 하나가 전부인 방 안에 혜지가 홀로 앉아 있다.
초조한 듯 손을 꼼지락거리던 혜지, 물감 자국을 발견하고 문지른다.
문 열리는 소리에 흘깃 올려다봤다가 얼른 시선을 피하는 혜지.
계춘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와 혜지의 어깨를 붙잡는다.
계춘 혜지야.
혜지 ……
계춘 혜지야. (애절한) 혜지 맞지? 응?
혜지 ……
계춘 자꾸 니가 혜지가 아니라고 그러네…… 난 그깟 종이쪼가리 안 믿는다.
네가 혜지라면 혜진 거지. 난 니 말만 믿는다. 그러니 얼른 말해보아. 응?
맞지? 내 새끼 혜지 맞지? 응?
눈을 내리깔면서 입술을 앙 다무는 혜지.
계춘의 얼굴에 절망이 서리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계춘 ……넌 누구냐.
혜지 ……
계춘 (버럭) 넌 누구야!
혜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계춘의 눈을 애써 피한다.
혜지 (기어가는 목소리로)이혜지.
계춘 ……뭐?
혜지 (떨리는 소리로) 두 달 전까진 남혜지. 11년 전에는 남은주.
돌아가셨다는 할머니는 멀쩡히 살아 계시고
맘대로 부르세요. 나도 뭐가 뭔지, 진짜 내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으니까.
혜지의 말에 망연자실한 계춘.
계춘 그럼 우리 혜지는……
혜지 할머니, 진짜 혜지가 아니어서 죄송……
혜지의 뺨을 때리려던 계춘, 힘없이 팔을 내려놓는다.
계춘 (넋이 나간) 우리 혜지는…… 우리 혜지는……
바닥에 주저앉는 계춘과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혜지.
플래시백
-다른 마루, #21 플래시백에서 연결
종이 반지를 만든 어린 혜지, 옆에서 기다리던 어린 은주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어린혜지 어때? 근사하지? 우리 계춘이 할망이 가르쳐줬어.
황홀한 표정으로 종이 반지를 바라보던 어린 은주.
어린은주 저것도 나 줘!
다른 12색 크레파스 옆에 계춘이 사준 어린 혜지의 금색 크레파스가 놓여 있다.
어린 혜지, 잠깐 망설이더니 분홍색 가방에 금색 크레파스를 넣는다.
어린혜지 아끼느라고 할망 머리 색칠도 못하고 왔는데...
어린 은주의 어깨에 분홍색 가방을 걸어주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그림 열심히 그려서 하늘에 있는 계춘이 할망 보여줘야 해.
어린 은주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다른 화단, #24 플래시백에서 연결
어린 혜지가 꽃들이 활짝 핀 화단에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있다.
어린혜지 천지왕의 둘째 아들 소별왕처럼 우리 사는 세상을 잘 다스리려면……
마구잡이로 꺾은 꽃들을 손에 쥐고 의기소침하게 서 있는 어린 은주.
어린혜지 사람을 다스리는 양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잘 가꿔야 하느니라!
우리 계춘이 할망이 해준 얘기야.
그러니까 찰스랑 미미랑 뽀순이 꺾으면 안 돼. 알겠지?
어린 은주가 해맑게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동차 안 - 은주의 회상, 11년 전
안전벨트를 하고 얌전히 앉아 있는 어린 혜지와는 달리,
차 바닥에 앉아 의자에다 대고 종이인형 놀이를 하는 어린 은주.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려서 삐뚤삐뚤하게 오린 종이인형이다.
어깨엔 어린 혜지에게 받은 분홍색 크로스 가방을 메고 있다.
운전을 하던 은주 친부가 버럭 고함을 지른다.
은주친부 남은주, 똑바로 앉아!
혜지친모 왜 애한테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은주친부 우리 형편에 애 둘이 말이 돼!
혜지친모 친권을 가져 올수 없으니 이 방법밖에 뭐가 있어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혜지 친모가 혜지를 돌아본다.
혜지친모 혜지야, 동생 안전벨트 해줘.
어린은주 (바락) 동생 아냐! 나이도 똑같은데! 언니라고 안 불러! 혜지야, 혜지!
어린혜지 알았어. 위험하니까 올라와.
어린은주 싫어. 춥단 말야.
차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 어린 은주의 자리.
어린 혜지가 창문 닫으려고 애써보지만 닫히지 않는 창문. 바람이 세차다.
어린혜지 은주야 네가 안쪽으로 와! 나랑 자리 바꾸자!
어린 혜지가 안전벨트를 풀고 은주의 자리로 옮긴다.
냉큼 올라와 어린 혜지의 자리에 앉는 어린 은주.
어린 혜지가 어린 은주의 안전벨트를 매주려고 몸을 기울인다.
그 때 날카로운 혜지 친모의 비명, 거대한 트럭이 차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어린 혜지가 곧장 어린 은주를 꽉 끌어안는다.
응급실 - 은주의 회상, 11년 전 사고 직후
침대 위, 잠들어 있던 어린 은주가 스르르 눈을 뜬다.
팔에 깁스를 한 채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은주 친부.
어린은주 ……아빠.
은주친부 깼니.
어린은주 아빠, 새엄만?
은주친부 ……
어린은주 혜지는?
은주친부 ……죽었어. 새엄마도 죽고, 그 애도 죽었다.
어린은주 (충격) ……
은주친부 아빠 말 잘 들어. 이제부터 넌 혜지야.
어린은주 (어리둥절한) ……왜?
은주친부 넌 혜지고, 죽은 애가 은주야. 알았지?
안 그러면 아빠가 죽어!
어린 은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빠를 본다.
납골당
남은주, 혜지 친모, 은주 친부의 자리가 구석 맨 아래 나란히 붙어 있다.
<남은주> 자리엔 활짝 웃는 어린 혜지의 사진과 어린 은주의 종이 인형이 들어 있다.
납작 엎드려 혜지의 유골함과 사진을 보는 계춘, 투박한 손으로 유리문을 쓸어내린다.
경찰 E 은주양의 친부이자 혜지양의 계부인 남현철이……
제 친딸 은주양 앞으로 들어놓은 생명 보험금이 탐이나,
죽은 혜지양을 친딸인양 둔갑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희미하게 웃는 계춘.
계춘 E 아가…… 할망 많이 기다렸냐. 여기 있는 줄 모르고 딴 데서 찾았지 뭐냐.
내 새끼, 우리 혜지…… 그래, 됐다. 이승의 연이 이만큼인 걸 어쩌겠누.
할망도 오래 못 버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응?
하염없이 유리문을 쓰다듬던 계춘이 정신을 놓고 만다.
착잡한 얼굴로 벽에 기대서 있던 석호가 한달음에 달려온다.
석호 누님! 누님!
계춘을 흔들어 깨우던 석호가 급히 등에 업고 뛰기 시작한다.
검사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에 열중인 수사관들, 은주의 사건 파일을 넘겨보는 검사.
분홍색 수감복을 입고 수갑을 찬 은주가 검사 책상 옆에 멀뚱히 앉아 있다.
검사 남은주양.
은주 (낯선) ……
검사 남은주양?
은주 (흠칫) ……네.
검사 홍계춘씨와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소를 통해 호적 정정을 하였죠?
은주 ……네?
검사 이혜지, 남혜지가 아닌 남은주 본인 이름을 되찾았어요. 그렇죠?
은주 아…… 네.
검사가 짧게 메모를 한 뒤 다른 서류를 집어 든다.
검사 박철헌, 송충희와는 언제 어떻게 만났죠?
은주 ……
검사 00년 3월 29일 오후 10시, 00모텔 201호에 있었습니까?
은주 ……
검사 2인 이상이 저지른 상해죄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1500만 원 이하 또는 10년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어요.
은주 ……
검사 피해자는 은주양이 박철헌, 송충희와 함께 폭행에 가담했다고 진술했어요.
반면 박철헌과 송충희는 미성년자인 은주양의 조건만남을 말리다가 시비가
일어났고, 피해자가 도망을 치다가 넘어져서 다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은주 ……
검사 성매매가 목적이 아니었죠?
은주 ……
검사 금품 갈취를 위해 피해자를 모텔로 유인한 것이 사실입니까?
은주 ……
잠깐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던 은주,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구치소
수감복 차림으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은주.
흐리멍덩한 눈으로 맞은편 벽을 바라본다.
벽에 가느다란 선이 나타났다가 스르르 사라진다.
눈을 크게 뜨고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는 은주.
다시 벽에 생겨난 선, 은주가 눈빛으로 선을 움직여 그림을 그린다.
긴 선으로 이어진 길, 네모난 집들, 하늘에는 달과 별이 채워진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허리가 굽은 계춘의 모습,
스르르 그림이 사라지고, 이내 환하게 밝아오면 #34의 작고
고집스러운 태양도 비켜가는 계춘의 빛바랜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간다.
은주가 괴로워하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계춘의 집 마당
조금 열려있는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충섭과 여신.
곧장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며 산발한 계춘이 고개를 내민다.
크게 실망하는 계춘에게 충섭이 꾸벅 인사를 한다.
충섭 저 기억하시죠?
계춘 ……
충섭 그 때 어르신께서 주신 것들 아직까지 잘 먹고 있습니다.
그 동안 기운이 펄펄 나는데 마땅히 쓸 데가 없었는데..
이젠 조금씩(어색한) 하하하-
이때 뒤에 서 있던 여신
여신 (쑥스럽게 목례를 한다.)
계춘 ……
충섭이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마루에 내려놓는다.
충섭 혜지…… 아니 은주가 입상을 했어요.
알려드려야 될 것 같아서……
계춘이 노여움 가득한 눈빛으로 초대장을 노려본다.
계춘 (노한표정) 남의 손녀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내가 그 기집아 그림을 왜 봅니까..
충섭 은주는 어르신 덕분에 죽음이 아닌 생명을 그리게 되었어요.
계춘 ……
충섭 어르신 꼭 한번만 봐 주십시오. 그럼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가는 충섭과 여신.
계춘이 엉금엉금 마루로 나와 초대장을 펼쳐본다.
초대장에는 수상자 명단과 함께 전시회 일정이 적혀 있다.
<이혜지> 이름을 확인한 계춘, 초대장을 덮어 버린다.
전시회장
<이혜지, OO여고 2학년> 입상작이 걸려 있다.
할머니가 어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유영하는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
골똘히 그림을 지켜보는 관객들 틈에 왜소하고 초췌한 계춘이 있다.
화가 난 사람처럼 그림을 뚫어져라 보던 계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소년법정
수감복을 입고 피고인석에 앉은 은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판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은주의 사건 파일을 넘겨본다.
판사 남은주양은 왜 조사 내내 범행 일체를 함구하고 있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건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가?
은주 ……
판사 피해자는 7시간 동안 뇌수술을 받았고 한 달 동안 혼수상태였어요.
지금도 완전히 생업에 복귀하지 못하고 통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본인의 행동이 한 사람을 크나큰 위험으로 몰아넣은 것을 알고 있어요?
은주 ……
이때 부쩍 야윈 계춘이 석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다.
흘깃 계춘을 돌아본 은주, 고개를 한층 더 푹 숙인다.
판사 (의아한) 피고인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계춘 저는 저 아이의 할망 홍계춘입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서둘러 파일을 살펴보는 판사.
계춘 핏줄이 얽힌 사이는 아니지만 다만 몇 달이라도,
제가 저 아일 데리고 살며 밥 먹이고 학교 보냈으니 할망은 할망이지요.
판사 남은주양이 홍계춘씨의 돈을 훔치려다 검거된 것은 알고 계시죠?
계춘 훔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줬습니다.
석호 (놀란) 누님……
웅크리고 있던 은주의 등이 움찔한다.
판사 범죄를 은폐하는 것은 또 다른 심각한 범죄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계춘 틀림없이 제가 줬습니다. 학비며, 시집 갈 때 쓰라고 줘놓고
늙은이 머리가 고장 나 까맣게 잊어먹는 바람에 그 난리를 만들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판사가 크게 한숨을 쉬며 은주를 물끄러미 본다.
판사 은주양, 할머니 말이 사실입니까?
은주 ……
판사 남은주양.
은주 (담담하게) 아니요.
계춘 (버럭) 은주야!
은주가 스르르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 한다.
은주 제가 훔쳤어요.
휘청거리는 계춘을 석호가 의자에 앉힌다.
은주 정말 잘 못했어요. 하지만……
(처연한) 아무도…… 누구도 저한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빠가 절 죽은 언니로 둔갑시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애들이 왕따를 시키고 선생들이 무시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돈 몇 푼 뜯어내려다 사람이 다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열하는) 제가 혜지가 아니라는 걸 알리겠다고 협박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춘이 눈을 질끈 감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은주 ……진짜 혜지는 알았을 거예요. 혜지에겐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계춘이 스르르 눈을 떠서 은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판사 (고심하는) ……
계춘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 손을 모으고 판사를 우러러 본다.
계춘 제 잘못입니다. 제가 할망 노릇을 제대로 못한 탓입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저 아이를 잘 챙기지 못한 저에게 벌을 주시고,
부디 앞날이 창창한 저 아이에겐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판사 ……남은주양,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은주 (긴 한숨을 내쉬며)이젠 너무 늦어버려……
제 어떤 말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전 어렸을 때부터 저 대신 죽은 혜지를 키워주신 할머니를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그냥 한번만 정말 뵙고 싶었는데……
계춘과 은주를 번갈아 보며 고민을 하는 판사.
판사 …남은주양에게는 보호처분 4호인 보호관찰 1년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OO청소년 상담센터에서 20시간의 상담을 받으면서,
학업이나 장래 계획 등의 도움을 받도록 하세요. 알겠습니까?
은주 …네.
서류를 챙겨 법정을 나가는 판사.
계춘도 석호의 부축을 받아 문으로 향한다.
계춘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머뭇거리는 은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린다.
은주 우리 계춘 할망은, 고사리 머리가 흙을 밀어내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우리 계춘 할망은, 용왕 할망이 점지하신 해녀대장이야.
은주의 나지막한 소리에 계춘이 우뚝 멈춰 선다.
어린혜지 E 그림 열심히 그려서 하늘에 있는 계춘이 할망 보여줘야 해.
은주 우리가…… 우리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다 우리 계춘이 할망이 사준 금색 크레파스 때문이야.
부들부들 몸을 떠는 계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린혜지 E (같이 부른다) 윙이자랑 윙이자랑 우리애기 잘도 잔다.
은주 자는 것은 잠이로다. 노는 것은 놂이로다.
어린혜지와 은주로 시작한 자장가가 첼로의 애절한 선율과 함께 코러스로 울려 퍼진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미어지는 가슴을 문지르는 계춘.
은주 털석 무너지듯 의자에 앉는다.
-1년 뒤
편의점
카운터 너머에서 손님을 빤히 보고 있는 은주.
손님은 위쪽 담배 진열대를 응시하며 고심 중이다.
손님 던……
은주가 재빨리 던힐을 카운터에 내려놓는다.
손님 그냥 말보로.
은주가 던힐을 올려놓고 말보로 레드를 내려놓는다.
손님 아냐. 던힐.
은주 확실히 결정하셨어요?
손님 ……응?
그 때 사장이 음료수 박스를 들고 창고에서 나온다.
은주 후회 없으세요?
사장 야! 남은주!
사장이 박스를 내려놓고 허둥지둥 달려온다.
사장 죄송합니다. 얘가 일주일 밖에 안 돼서……
손님 요즘 애들 참……
은주 저는 후회 없는 선택을 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드린 건데요.
순간의 선택에 담배 한 갑, 스무 번의 기쁨이냐 후회냐가 걸려 있어요.
사장과 손님이 세뇌라도 된 양 멍하니 은주를 본다.
서점
두꺼운 화집을 찬찬히 넘겨보고 있는 은주.
책 가격을 확인하더니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다.
지갑을 열자 이름, 남은주인 주민등록증이 보인다.
딱 화집 가격만큼 들어 있는 현금.
고시원 방
침대와 책상, 작은 텔레비전이 전부인 좁은 방.
은주가 가방을 뒤집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는다.
삼각 김밥, 샌드위치, 우유 등이 와르르 떨어진다.
삼각 김밥을 먹으며 화집을 펼쳐보는 은주.
어떤 그림은 손가락으로 형태를 따라 그려보기도 한다.
고아원 운동장
은주가 예닐곱 살 정도의 아이들 몇 명과 축구를 하고 있다.
공을 따라 이쪽저쪽 우르르 뛰어다니며 낄낄거리는 은주와 아이들.
멀찌감치 나무 옆에 서서 구경중인 석호를 발견한 은주, 우뚝 멈춰 선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는 석호에게 다가가는 은주.
석호 오랜만이다.
은주 ……네.
석호 저기, 사회봉사명령 그게 아직 덜 끝났나?
은주 끝났어요. 그냥 심심해서 왔어요.
석호 그래.
은주 ……
석호 저기…… (망설이다가) 아니다. 잘 지내라.
돌아서서 가는 석호의 뒷모습을 은주가 물끄러미 본다.
은주 아저씨!
석호 (돌아보는) ……
은주 할머니는요?
석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깊은 한숨을 쉰다.
석호 말도 없이 사라진지가 사나흘이 넘었다.
정신도 온전치 않은 양반이 도대체 어딜 헤매고 있는 건지……
은주 (놀란) ……정신이 온전치 않아요?
석호 병원에선 오래 전에 머릿속에서 피가 나서 그게 치매가 됐다고 하네.
전부터 자꾸 돈이며 물건이며 없어졌다고 경찰 부르던 것도,
해 지면 부두 나가 서방 찾던 것도 다 치매 때문이라네.
그것도 그렇지만 나 보기엔 아예 넋을 놔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은주 ……
석호 너한테 할 얘긴 아니지. 잘 지내라.
멍하니 서 있던 은주, 나무 기둥에 이마를 쿵 쿵 박는다.
요양병원 계춘의 방
계춘의 남편과 아들 사진, 어린 혜지의 그림들이 고스란히 붙어 있다.
몇몇 낯익은 가구와 옷가지가 보이지만 생활의 흔적이 전혀 없다.
항복 E 오래 전부터 기억력 감퇴, 이상 행동, 망상 등의 증상이 있었을 거예요.
홍계춘씨 같은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최근의 기억부터 잊기 시작해요.
점점 과거 속에 함몰되다가 결국은 그것 또한 다 잊어버리게 되겠죠.
방을 둘러보던 은주가 책장에서 두툼한 노트를 꺼낸다.
계춘이 어린 혜지를 찾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둔 노트.
고아원 방문 기록, 경찰 수색 기록, 제보자와의 통화 및 만남 등등.
그 때 노트 사이에서 사진 몇 장이 툭 떨어진다.
계춘과 어린 혜지의 05.12 날짜가 찍힌 부산에서의 사진들.
은주 ……5월 12일.
서둘러 계춘의 기록 노트 맨 앞장을 보는 은주.
00년 5월 12일, 혜지가 실종된 날 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산 용궁사
12년 전 5월 12일, 계춘과 어린 혜지의 사진 속 배경인 황금돼지 앞.
은주가 사진과 실제 장소를 번갈아 살펴본다.
플래시백
황금돼지의 옆구리를 진지하게 쓰다듬는 어린 혜지.
어린혜지 우리 계춘이 할망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
계춘이 흐뭇하게 웃으며 어린 혜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산 골목길
휴대폰 지도를 보며 걷던 은주가 우뚝 멈춰 선다.
주위의 간판들을 살피는 은주, 옆을 지나던 아저씨를 가로막는다.
은주 여기 예전에 OO반점이 있지 않았나요?
아저씨 (가리키며) 저기였지. 없어진지 꽤 됐어.
가리키는 쪽을 보면, 커다란 카페가 들어서 있다.
플래시백
-OO반점
맛있게 자장면을 먹는 계춘과 어린 혜지.
볼에 검은 자장을 잔뜩 묻히고 환하게 웃는 어린 혜지.
계춘이 손바닥으로 어린 혜지의 뺨을 닦아준다.
부산 국제시장
미로 같은 시장 골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은주.
행인들을 막아서며 유채꽃밭에서 찍은 계춘 사진을 보여준다.
은주 못 보셨어요?
대충 사진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바쁘게 지나가는 행인들.
은주 잘 좀 봐주세요. 네?
사람들을 붙들고 애원하던 은주가 털썩 주저앉는다.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낯익은 바지 무늬가 얼핏 보인다.
신발을 한 짝만 신은 채 절뚝거리며 걷는 자그마한 뒷모습.
은주가 벌떡 일어서서 행인들을 마구 밀쳐내며 뛰어간다.
은주 할머니!
못들은 듯 계속해서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
은주 (망설이다) ……할망! 계춘이 할망!
우뚝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데, 계춘이다.
공허한 눈빛으로 은주를 응시하는 계춘.
은주 얼마나 걱정했는데!
계춘 ……
은주 할머니…… 할망.
계춘 ……
은주 ……나야.
계춘 우리 혜지 봤수과?
은주 할망. 안쪽으로 와 그쪽은 차 다니고 위험하잖아.
계춘 (눈이 뜨이는) 혜지……
은주 응. 혜지잖아.
계춘 우리 손지…… 내 새끼…… 혜지……
은주 (고개를 끄덕이는) 응. 할망 손녀 혜지.
계춘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뺨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는다.
계춘 할망이 얼마나 찾았는데……
계춘이 시커멓게 튼 손으로 은주의 뺨을 쓰다듬는다.
계춘 언제 이렇게나 컸어?
은주 할망 힘들까봐 빨리 컸지.
계춘 ……착하다, 내 새끼.
은주가 이끄는 대로 길가로 휘청휘청 이동하는 계춘.
은주 (투정부리듯) 내가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흐뭇하게 웃는 계춘.
은주가 눈물을 참으며 쪼그리고 앉아 계춘의 부르튼 발을 본다.
은주 (속상한) 신발은 어쨌어!
피가 나고 갈라진 발을 어루만지던 은주가 등을 내민다.
은주 업혀요.
계춘 (망설이는) ……
은주 얼른!
주춤거리며 기대는 계춘을 가뿐하게 업는 은주.
계춘 혜지야……
은주 응.
계춘 집에 가자.
은주 응. 집에 가요.
계춘 우리 집에 가고 싶어.
은주 응. 가고 있으니까 한숨 자.
계춘 ……
은주 (허밍)웡이자랑 웡이자랑 우리할망 잘도 잔다.
은주의 등에 얼굴을 묻고 스르르 눈을 감는 계춘.
은주 (허밍)자는 것은 잠이로다 노는 것은 놂이로다.
계춘의 집 앞, 마을 풍경
공사 일정 안내판이 보이고, 건축 자재가 길 여기저기에 쌓여 있다.
일찌감치 철거에 들어가 담 일부와 터만 남아 있는 이웃집들.
마지막 남은 계춘의 집 대문에 철거 예정 안내문이 붙어 있다.
씁쓸한 표정으로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는 은주.
계춘의 집 마당
돌담이 무너지고 자재가 마당에 쌓여있긴 해도 집은 멀쩡하다.
휘 둘러보던 은주가 구겨진 잠수복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넌다.
은주가 막막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이한이 마당으로 들어선다.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는 이한을 간절한 눈으로 보는 은주.
해녀 탈의실
역대 해녀 계장들 사진이 한쪽 벽에 쭉 걸려 있다.
그 사이 계춘의 40대 시절 사진을 발견하는 은주.
사진 속 젊고 생기 넘치는 계춘을 물끄러미 본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이한과 마을 사람들이 들어온다.
석호, 명옥, 충섭, 여신, 문방구 주인, 시청 직원, 마을 사람들……
멋쩍은 은주,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면면을 본다.
마을 입구 (저녁)
차가 와서 멈추고, 운전석에서 항복이 내려 빠르게 조수석으로 향한다.
항복의 도움을 뿌리치는 계춘, 다리를 절뚝거리며 천천히 이미 철거가
시작 된 마을로 들어선다.
어두운 길을 계춘이 한 발 한 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가로등과 집안의
전등들이 불꽃처럼 환하게 켜진다.
실은 크레인에 탄 석호가 공중에서 움직이며 가로등 불빛을 밝혀주고 있다.
무너졌던 돌담이 쌓여 있고, 허물어졌던 집들이 세워져 있다.
자세히 보면 돌담은 그림이고, 집은 큰 천에 사진을 인쇄한 것이다.
이한이 자전거를 타고 계춘 옆을 쌩 지나가며 아는 체를 한다.
이한 할머니, 안녕하세요!
계춘 (얼떨떨한) ……
뒤이어 명옥과 마을 여자들이 소쿠리를 들고 지나가며 아는 체를 한다.
명옥 계춘성, 어디 가요?
계춘 ……다 저녁에 가긴 어딜.
여자1 (웃는) 저녁 맛나게 잡숴요.
걷다가 벽에 붙어 있는 어린 혜지 실종 전단지를 발견하는 계춘.
전단지에 검은 매직으로 ‘돌아옴’이라 쓰인 것에 계춘의 눈이 크게 뜨인다.
가만히 벽을 어루만지는 계춘의 손길에 미세하게 벽이 출렁이는 것 같다.
벽 뒤를 보면 충섭, 여신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벽을 몸소 지탱하고 있다.
바닥 여기저기엔 충섭이 작업한 페인트와 붓 등의 도구들이 널려 있다.
벽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하는 것에 당황하는 사람들.
그 때 변 과장이 나타나 매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쏘아본다.
변과장 이런 일들을 꾸미고 있었군.
기울어지는 벽을 지탱하느라 끙끙대던 사람들이 변 과장의 눈치를 본다.
변과장 나만 빼놓고 말이지.
변 과장이 끼어들어 두툼한 손바닥으로 벽을 일으켜 세운다.
벽이 단숨에 균형을 찾을 때, 계춘은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하고 있다.
계춘의 집 마당 (늦은 저녁)
예전 계춘이 살던 때와 똑같은 집, 화단에는 조화까지 심어 놓았다.
빨랫줄에는 잠수복이 걸려 있고, 마루에는 요강이 놓여 있다.
공사 후 깨끗한 새 문으로 바뀌었던 화장실에도 예전의 재래식 문짝을 달아 놓았다.
집을 휘 둘러보던 계춘,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은주에게 시선이 머문다.
계춘 왜 거기 그러고 섰어!
은주 (감격) 내가 누군 줄 알아?
계춘이 은주의 꿀밤을 딱 때린다.
계춘 누구긴! 아직은 내 손지밖에 더 되냐. 학교 꼬박꼬박 다녀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누구라고 유세도 부리지!
할망 저녁 할 동안 책상 앞에 앉아서 낼 학교 갈 준비나 해.
은주 (발끈) 지금 방학이잖아!
계춘 …… (다정하게) 그럼 내일 할망 물질하는데 따라갈텨?
은주 (황급히) 안 돼! 내일, 내일은 귤 따기로 했잖아요!
계춘 ……그랬나?
고개를 갸웃하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계춘.
석호, 이한, 명옥, 충섭, 여신, 마을 사람들이 대문을 기웃거린다.
이들을 향해 새삼 고마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는 은주.
그 때 쌀바가지를 들고 부엌에서 나오던 계춘이 사람들을 발견한다.
계춘 뭔 일 났냐!
석호 (당황) 아뇨. 일은 무슨……
계춘 그럼 왜 야밤에 떼로 남의 집 마당을 기웃거려!
당황해서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왕좌왕하던 사람들,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진다.
귤 농장
맹렬한 기세로 귤을 따는 계춘을 살피며 게으름을 피우는 은주.
귤을 하나 까더니 슬그머니 계춘에게 다가가 조각을 입에 넣어준다.
은주 너무 전투적으로 따지 말고 쉬면서 해요!
계춘 딴만큼 돈인데 쉬려면 집에 대자로 누워있지 뭣하러 추운데 밭엘 나와!
은주 ……알았어요.
계춘 그런데 처자는 어느 집 새댁인가?
은주 ……저 아직 처녀거든요!
계춘 그래? 얼른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야지.
은주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잔데요?
계춘 처자는 할망이 없나?
은주 있어요. 할망 있어요!
계춘 그럼 고 놈이 처자 할망 맘에 찰까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은주 (아련한) ……
계춘 우리 신랑이 참 괜찮았어. 부지런하고 생활력 있고 밤일 잘하……
귤을 먹다 사례가 들린 은주가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쯧쯧 혀를 차며 은주의 등을 두드려주는 계춘.
은주 알거든요, 금실 좋았던 거! 그런데 아들 하나밖에 못 낳았죠?
계춘 (놀란) 그걸 처자가 어찌 알아?
은주 손녀도 하나 있잖아요.
계춘 흥, 아니야.
은주 (놀란) 손녀 없어요?
계춘 왜 없어. 둘이나 있는 걸.
은주 (머뭇거리는) ……둘이요?
계춘 하나는 내 살 물려받은 혜지, 하나는 용왕 할망이 보내준……
은주 ……
계춘 은주! 그래, 은주.
은주 (찡한) ……은주요?
계춘 고것은 날 닮아 얼굴이 말가니 이쁘고 배포도 두둑한 게 보통내기가 아녀.
은주 (웃는) ……
계춘 아이고, 노닥거리다 해 저물겠네!
계춘의 집
물을 팔팔 끓여 빨간 대야에 한가득 담아 목욕을 시키는 혜지...
앙상한 등을 밀어주는 내내 울컥울컥 눈물을 토해낸다.
머리를 곱게 빗어주는 혜지. 순한 아이마냥 다리 뻗고 손녀가 하는 대로
앉아있는 계춘. 혜지 넘어로 보이는 벽에 붙인 그림들.....
백운호
오랜만에 배에 시동을 거는 석호....
멀리 마라도가 보이는 곳까지 나간 석호.
이불로 꽁꽁 싸멘 계춘이 바다를 보며 알 수 없는 말을 궁시렁 거린다.
혜지는 할망 옆에 꼭 붙어 바다를 화폭에 담고,
석호는 멀리 낚시 대를 던져본다.
계춘의 집 마당 (밤)
계춘의 자리를 쓸고 닦는 혜지.....
그러는 동안 혜지의 신발을 죄다 어딘가에 숨겨버린 계춘....
혜지 또 신발 숨겼지...
계춘, 꺄르륵 꺄르륵 웃으며 도망친다. 웃으며 억지로 신나게 할머니랑 놀아주는 혜지.
그 때 느닷없이 먼지 같은 싸락눈이 흩날린다.
은주 눈 와요!
계춘 (잠시 정신을 차린 듯)겨울 바다는 눈이 오면 차라리 낫지.
물도 덜 차갑고, 해삼도 나고……
계춘과 은주가 고개를 들어 내리는 눈을 구경한다.
계춘의 집 마당 (밤)
눈이 쌓여 있는 마당, 눈사람 세 개가 손을 잡고 있다.
정성스럽게 마지막 눈사람의 눈, 코, 입을 장식하는 은주.
뿌듯한 표정으로 눈사람을 감상하는데 뭔가 아쉽다.
계춘의 수경을 가져와 가운데 눈사람에게 씌워주는 은주.
만족스러운 표정의 은주, 빙글빙글 돌면서 아이처럼 좋아한다.
계춘의 집 안방
옷에 눈이 잔뜩 묻은 은주가 계춘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계춘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
은주 할망 나랑 같이 눈 구경해요. 응?
계춘 (중얼거리는) ……추워. 춥다, 혜지야.
은주 추워?
은주가 얼른 이불을 끌어다 계춘의 목 아래까지 잘 덮어준다.
계춘 (횡설수설) 얼른 봄이 와야 하는데…… 혜지야, 할망이랑 꽃 보러 가자.
은주 알았어요. 눈 말고 꽃 보러 가요.
그 때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하는 계춘.
깜짝 놀란 은주가 계춘의 머리를 받쳐 안는다.
은주 할머니!
계속해서 숨이 끊어질 듯 기침을 하는 계춘.
은주가 계춘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더듬더듬 휴대폰을 집어 든다.
손을 덜덜 떨며 간신히 석호에게 전화를 거는 은주.
은주 아저씨! 할머니가 이상해요.
그 때 기침을 하다 말고 피를 왈칵 토하는 계춘.
은주 (비명) 할머니!
계춘의 집 마당 (밤)
활짝 열린 대문, 마당 안까지 들어와 있는 구급차.
눈사람들이 부서지고 깨진 채 마당에 널려 있다.
구조대원들이 정신을 잃은 계춘을 구급차에 싣는다.
이를 석호와 은주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본다.
석호 좀 괜찮으신가?
구조대원 (고개를 젓는) 뇌출혈 같아요.
은주 (가슴이 철렁) ……
석호 타라, 은주야.
은주 (머뭇거리는) ……
석호 ……옆에 있어 드려야지.
은주 집을 지켜야 되잖아요. 철거해버리면 어떡해요.
석호 (측은한) 그래. 알았다.
석호가 구급차에 올라타고, 문이 닫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마당을 빠져나간다.
계춘의 집 안방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은주.
한참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던 은주가 스르르 고개를 든다.
창문 밖으로 다시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이 보인다.
벽에 붙어 있는 어린 혜지의 유채꽃 그림을 물끄러미 보는 은주.
벌떡 일어나 가방을 꺼내 계춘의 옷가지를 챙기기 시작한다.
그 틈에서 못 보던 스케치북과 얇은 편지 봉투가 나와서 펼쳐보는 은주.
첫 장에 빛바랜 흑백 결혼사진이 붙어 있는 것에 은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사진 옆에는 엉성한 필체로 어멍, 아방 이라고 쓰여 있다.
다음 장에는 계춘의 악극단 시절 노래하는 사진이 붙어 있고 홍계춘 이라 쓰여 있다.
다음 장에는 계춘의 남편 사진이 붙어 있고 신랑 이정국 이라 쓰여 있다.
다음 장에는 계춘의 아들 사진이 붙어 있고 아들 태윤 이라 쓰여 있다.
다음 장에는 실종 전단지의 어린 혜지 사진이 붙어 있고 손지 혜지 라 쓰여 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은주, 무심코 다음 장을 넘겼는데 제 사진이 붙어 있다.
깜짝 놀라 다급하게 스케치북을 덮은 뒤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망설이는 은주.
살그머니 스케치북을 펼쳤다가 은주, 손지 라 쓰인 글자에 그만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그러다가 한참 후 마음을 진정하고 편지지를 펼쳐본다.
'부르면 눈물먼저 나는 나의 손지 혜지 은주에게’로 시작하는 계춘의 자필 편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은주.
길 (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묵직한 꾸러미를 안고 뛰는 은주.
그 위로 계춘의 음성이 흐른다.
계춘 E 은주야 밥은 잘 챙겨 먹냐. 방은 뜨뜻하냐. 그때 앓았던 홍역은...
할망은 잘 지낸다. 더는 남한테 몹쓸 짓 하지 마라.
너까지 잘못되면 내 억장이 무너진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 할망은 널 혜지가 하늘에서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 했구나...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구나...
그러니 어릴 적 일은 마음 쓸 것 없다.
너라도 살아 다행이지. 다행이고말고.
좋은 거 먹고, 따뜻하게 자고, 몸조심해라.
너 있었을 때가 꿈인가 싶다. ……그 꿈 한 번 더 꾸면 참 좋을 텐데.
힘에 부쳐서 와락 넘어지는 은주, 벌떡 일어나 다시 뛴다.
은주의 붉게 달아오른 뺨이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다.
병원 입원실
뇌수술 후, 계춘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잠들어 있다.
스르르 눈을 뜨는 계춘,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깜빡인다.
생생한 유채꽃들을 그린 그림이 병실 전체를 두르고 있다.
계춘이 노란 유채꽃을 향해 손을 뻗자 부드럽게 흔들리는 꽃잎들.
흐으- 신기한 듯 감탄을 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계춘.
유채꽃밭 - 계춘의 환상
샛노란 유채꽃들 사이에 서 있는 계춘.
계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 때 꽃들 사이에서 어린 혜지가 활짝 웃으며 뛰어나온다.
어린혜지 할망~ 계춘이 할망~
계춘 혜지야! 내 새끼……
계춘이 어린 혜지를 와락 끌어안는다.
계춘 할망 많이 기다렸지?
어린혜지 응.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어린 혜지가 계춘의 쪼글쪼글한 뺨에 볼을 비빈다.
행복한 얼굴로 어린 혜지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는 계춘.
병원 입원실
뇌수술 후, 잠들어 있던 계춘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스르르 눈을 뜨는 계춘, 유채꽃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은주가 침대 옆에 앉아 계춘의 손을 꼭 잡고 졸고 있다.
몸 여기저기 노란 물감을 묻히고 있는 은주.
계춘 (나지막한) ……할망 왔다.
퍼뜩 깨어난 은주가 계춘의 눈을 들여다본다.
은주 할머니! 괜찮아? (불안한) 나 알아보겠어?
계춘 그럼 손지 얼굴을 못 알아볼까.
은주 (칭얼거리는) 3일이나 못 깨어나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계춘 할망이 꽃구경에 정신이 팔려 늦었다.
계춘이 흐뭇하게 웃으며 유채꽃 그림을 바라본다.
계춘 뭐 하러 물감을 저리 허투루 써.
은주 (조금 섭섭한) ……꽃 보고 싶다며!
계춘 진짜 꽃보다 훨씬 좋다. 평생 본 꽃 중에 제일이야.
은주 (뭉클한) ……
계춘 은주야.
놀란 은주가 뿌리치듯 계춘의 손을 놓는다.
계춘 은주야.
계춘이 힘없이 손을 더듬거리며 은주의 손을 찾는다.
계춘 어이 할망 손 꼭 잡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은주, 계춘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계춘 고단한 세월에 할망 머리가 다 녹아서 너를 잘 새기질 못했다.
은주 ……할머니.
계춘 죽음이 지척인데 너한테 마음이 쓰여 어찌 눈을 감을꼬.
은주 싫어. 왜 그런 말을 해요!
계춘 은주야, 할망은 이만 느 언니 만나러 가야겠다.
어린 것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가서 내 새끼 꼭 안아 줘야겠다.
은주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해.
계춘 너는 살아야지. 울지 말고, 슬퍼 말고, 씩씩하게 살아야지.
은주 (흐느끼는) 할머니…… 죽지 마. 나랑 살아. 응?
계춘 할망이 대별왕 다스리는 저승에서 너 올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리마.
12년도 기다렸는데 50년, 100년 못 기다릴까.
은주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뺨을 타고 흐른다.
계춘 할망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천천히 오너라 아주 천천히……
응? 어이 대답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은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계춘 옳지. 착하다, 우리 손지. 우리 은주……
계춘이 바다 그림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본다.
계춘 사람은 가도 꽃은 피더라.
그 때 크레파스 사주길 참 잘했지.
흐뭇하게 웃던 계춘, 스르르 눈을 감는다.
은주의 손을 잡고 있던 계춘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대신 은주가 더 힘차게 계춘의 손을 잡는다.
은주 할머니, 전요. 혜지가 할머니 얘길 할 때마다 샘이 났어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대장 할망을 가진 언니가 너무 부러웠어요.
이제 괜찮아요. 나도 조금 가져봤으니까. 그렇죠?
은주가 계춘의 뺨에 제 볼을 부드럽게 비빈다.
-6년 후
갤러리
첫 프롤로그의 갤러리
전시 준비가 다 된 갤러리 에서 20대 중반이 된 혜지의 우수에 찬 모습.
올해의 작가 “이혜지 전” 큰 플랜카드도 걸린다.
수많은 손님들과 취재진들 규모가 엄청나다.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는 미술 선생 충섭과 여신...
둘의 손을 꼭 잡고, 꼬마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석호, 한, 항복, 변과장, 명옥등 제주도 이웃들이 죄다 갤러리로 모여든다.
세월의 흐름 탓에 조금씩 변한 사람들... 한껏 멋을 부리고 온 동네 주민들....
혜지 어떻게 같이 오시네요.
충섭 시간 맞춰서 버스 한 대 불러서 왔어.
우리 똥강아지 그림 좀 볼까?
혜지 왜요 또 관점타령 하시게.
충섭 (웃는)
석호 하~ 그림이 아주 좋아.
cut to
갤러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니며 인사하는 혜지의 모습 보인다.
안쪽 메인 월에 걸린 커다란 그림....
문득 그곳을 보는 혜지.... 드넓은 유채꽃밭에서 머리에 인 소쿠리를 한 손으로 잡고 굽은 허리지만 위풍당당하게 선 계춘. 그리움이 가득 담긴 애틋한 눈빛으로 그림을 응시하는
혜지. 그러자 이윽고 노란 유채꽃밭에서 계춘을 가운데 두고 어느새 나타난 어린시절 혜지와 지금의 혜지가 나란히 손잡고 화면 가득히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서서히 암전
엔딩 크레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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