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타자기 3
#1 국도 + 세주의 차 안 (2부 75씬 편집)
눈 내리는 국도 위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세주의 차.
세주 (E) 죽자.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면 죽은 목숨과 다름없다.
세주 (E) 아니. 내가 왜 죽어야 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여기서 추락할 순 없어.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세주 (알 수 없는 화가 치미는, 한손으로 핸들을 내리치며 버럭)
젠장!!!! 세상에서 줬다가 뺏는 게 제일 나빠!!!!
순간, 불시에 차 앞으로 튀어나오는 고라니 한 마리!
놀라 핸들을 확 꺾는 세주! 저 멀리 있던 벼랑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고! 하얗게 질리는 세주!
세주 자, 자, 잠깐, 잠깐만! 나 아직 죽을지 말지 결정하지 않았다고!!!!
절박한 세주의 외침과 함께 벼랑 위를 나는 세주의 차!
이내 다이빙 선수처럼 유려한 자세로 눈밭으로 떨어지고!
S#2 설산 눈밭 (2부 76씬)
그대로 눈밭에 거꾸로 처박히는 세주의 차!
유리창이 날아가고, 차문이 찌그러지고, 에어쿠션이 펴지고,
길게 이어지는 클랙슨 소리. 운전석에 거꾸로 매달린 채 피를 흘리며
까무룩 의식을 잃어가는 세주. 그 위로...
왕방울 (E-2부 56씬의) 죽음이 자주 찾아들 팔자네. 그때마다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옥석을 가리기가 힘들어.
S#3 세주의 저택 / 집필실 (2부 77씬)
창밖으로 아침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둠을 지워나가듯 난장판이 된 세주의 집필실을 천천히 훑어
지나가는 아침 햇살. 그 빛이 마침내 타자기에 가 멎는다.
이때 타자기를 향해 조용히 다가가는 누군가의 발! 그 위로,
왕방울 (E) 조만간 특이한 인연 둘을 만날지도 모르겠어.
S#4 설산 눈밭 (2부 78씬+80씬)
뽀드득 뽀드득....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희미하게 눈을 뜨는 세주.
세주의 흐릿한 시선에 들어오는 사람의 실루엣.
방한용 모자와 목도리로 얼굴을 꽁꽁 싸맨 여자 한 명이 커다란
삽자루를 쥐고 설원 위를 걸어오고 있다.
왕방울 (E) 잘해. 그래야 살아....
살려주세요...여기 사람이 있어요...말해보려 하지만 입만 달싹여질
뿐 소리가 나오지 않는 세주. 어떻게든 제 의지로 탈출해보고자
몸을 움직였다가 밀려드는 극심한 고통에 두 눈을 질끈 감는데.
탕! 무언가 차창에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번뜩 뜨는 세주,
양손으로 턱! 창문을 짚은 채 차 안을 살피고 있던 여자의
대문짝만한 얼굴과 마주친다. 헉! 놀라는 세주.
양손으로 창을 짚은 채 운전석의 세주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얼굴의 반 이상을 감싸고 있던 목도리를 천천히 내리는데. 설이다!
세주 (알아보는) !!!
설 (E-2부 47씬) 만일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그땐 그냥 죽게
내버려둘 거야. 절대 안 도와줘.
설 (의미심장하게 씨익...웃는)
세주 (어쩐지 불안해지는데)
세주를 향해 삽을 치켜드는 설!
태양광을 받아 챙--! 살벌하게 번뜩이는 삽자루!
세주 (순간, 득음이라도 한 듯 터지는 비명) 아아아아아악----!!
끊일 줄 모르고 설산에 울려 퍼지는 세주의 비명!
설의 삽자루가 푹! 눈 위에 꽂히는 순간
그대로 기절해버리는 세주에서(2부 엔딩점),
S#5 성수청 마당 (아침)
마당 한가운데 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는 왕방울.
맑은 하늘 위로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흘러가는 먹구름.
왕방울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고)
방진 (목에 수건 걸고 하품하며 나오다가) 뭐 하셔? 천기의 흐름을 읽고
있는 중이신가?
왕방울 ......(시선 하늘에 둔 채) 설이가 눈 설 자를 쓰지?
방진 (무심히) 그치. 눈처럼 차가운 이성, 깨끗한 감성을 지니고 살라고
아버지가 지어줬다던데? 근데 그건 갑자기 왜, (하다가 덜컹해서
달려와) 왜 그래 왕방울 선녀. 혹시 설이한테 뭔 일 생겼어?
왕방울 .....(하늘 보는 채로) 눈 오시겠어. 빨래 걷어. (하며 돌아서는)
방진 (김 빠져서) 아씨, 기상청 예보 들으면 될 걸 왜 걸핏하면 고수 흉내
내고 난리야. 킹벨 여사 신빨 떨어진 거 무속계가 다 아는구만.
왕방울 (상관없이 들어가며 혼잣말로) 좋은 인연인지...나쁜 인연인지...
(다시 돌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괜히 얽혀들어 녹지나
말아야 할 텐데...
하는데 내리기 시작하는 눈.
S#6 설산 눈밭 (아침)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묵묵히 제설작업을 하고 있는 설.
조용한 설원 위로 설의 우직한 삽질 소리만 들려오고...
S#7 세주의 저택 / 집필실 (아침)
완전히 몰입한 표정으로 타자를 치고 있는 진오.
생각을 놓칠 새라 시선은 여전히 타이핑 중인 종이 위에 둔 채
담배를 입에 무는 진오. 잠시 그대로 뚫어져라 종이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치익--성냥을 켜는 진오. 불빛 속에 일렁이는 진오의 얼굴.
S#8 설산 일각 (아침)
간이 썰매(비닐포대와 모포, 나무막대를 엮어 만든) 위에 실려 있는
세주. 그 썰매를 질질 끌며 힘겹게 어딘가로 이동하는 설.
이때 설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빠져나와 눈 위로 툭 떨어지고.
보면, 아주 오래된 회중시계. 그 사실 모른 채 묵묵히 썰매를
끌고 가는 설. 설의 뒤로 썰매가 끌린 흔적이 길게 이어지고...
설원의 정경이 부감으로 잡히며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화면이
하얗게 변하는데서.
S#9 타이틀
-빠른 손놀림으로 총을 조립하는 누군가의 손.
-타자기에 종이를 넣고 레버를 젖힌 뒤 자판을 치기 시작하는 손.
-조립한 총에 총알을 장전하는 누군가의 손.
-빠른 타이핑 소리와 함께, 무작위로 종이에 찍혀 나오는 활자들.
-장전된 총을 들어 자세를 잡더니 어딘가 목표물을 향해 조준하는
손. 계속되는 타이핑 소리. 마침내 방아쇠 당기는 순간,
타이핑 소리 멎음과 동시에 탕탕탕! 세 번의 총성과 함께 종이
위에 찍히는 세 개의 총알자국! 마치 스모킹건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이어 어지럽게 타이핑된 글자들이 반짝 빛을 발하며 떠올라 재조합되면,
타이틀 <시카고 타자기>
S#10 산장 외경 (낮)
설산의 외딴 곳. 흰 눈이 쌓인 고즈넉한 산장의 풍경.
조용히 눈이 내리고. 연통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S#11 산장 안 (낮)
머리에 피가 배어든 광목천을 칭칭 감은 채 누워있는 세주.
그 위로, 영화 <미저리>의 애니의 대사가 설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설 (울리는, E) 난 작가님의 열렬한 팬이에요.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회복될 거예요. 내가 잘 돌봐줄게요.
들려오는 환청에 가물가물 눈을 뜨는 세주.
희미한 시선으로 보이는 낡은 나무 천장...낯선 침대...
난로 위에 뜨거운 김을 피어 올리며 끓고 있는 낡은 주전자...
세주 (마음의 소리,E) 어디지 여긴....? 대체 누가 나를 여기로....
(F.C) 세주를 향해 삽자루를 치켜 올리던 설이의 모습.
세주 ! (떠올리고는 얼른 눈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
두둥!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세주의 소설, ‘스토커’(낡은)!
두둥! 식탁 앞에 서서 뭔가 열심히 조제 중인 설이의 뒷모습!
세주 (등골이 오싹해지며, E) 이 시추에이션은...
때마침 한 손에 대따 큰 주사기를 들고 세주를 향해 돌아서는 설.
세주 (공포에 질리며, E) 미저리.....!
설 (무표정한 얼굴, 무뚝뚝한 말투) 정신이 드셨어요?
세주 (E) 쟤...뭐야 대체...삽자루랑 주사기 아니면 손에 들게 없어?
주사기를 들고 표정 없는 얼굴로 세주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설.
겁먹은 표정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세주.
설 운이 좋으셨어요. 눈이 깊이 쌓여있어서 쿠션 역할을 해준데다
비싼 차에 돈을 쏟아 부은 보람도 있으셨죠. 마침 제설작업에
나섰던 제가 작가님 앞을 지나간 것도 행운이었구요.
어때요? 이 정도면 기적이란 말이 아깝지 않죠?
평소의 밝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설.
(*2부에서 지은 죄가 있기에 세주의 눈에만 과장되게 보이는)
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세주.
그러나 불행히도 꼼짝을 할 수가 없는. 그제야 제 몸을 내려다보면,
세주의 팔과 다리는 각각 침대에 묶인 채로 고정되어 있고
목에는 대형견용 깔때기가 씌워져 있는!
세주 (쪽팔리고, 어이없는, E) 아놔, 이게 뭐야. 내가 개새끼야?
설 (마치 듣기라도 한 듯) 딱 아니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네요.
세주 (헉, E) 뭐야. 독심술이야? 쟤 진짜 사이코패스 아니야?
설 (듣기라도 한 듯, 차갑게) 아니에요.
세주 (움찔 보는)
설 불행히도 어제 내린 폭설 때문에 구조대가 바로 못 온다네요.
급한 대로 제가 산장에 있는 구급약품과 대용품으로 응급처치를
했어요. 자 이제, (하며 주사기를 들어올리는)
세주 !! (순간 약 먹기 싫어 떼쓰는 아이처럼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젓는)
설 (강하고, 엄하게) 움직이지 마세욧!
세주 (움찔, 저도 모르게 동작 그만 상태가 되고)
설 (살벌한 표정으로) 계속 그렇게 움직이면!
세주 (겁먹었지만, E) 우...움직이면 뭐...어,어,어쩔 건데? 총으로 쏠 거야?
망치로 다리를 부술 거야?
대답 대신 한 손으로 턱! 세주의 턱을 잡더니 입안으로 주사기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설. 헉! 해서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반항의
의미로 고개를 마구 흔드는 세주.
설 움직이지 말라니까! 나도 사람한테는 처음 해보는 거라 떨린다니까!
그 말에 더더욱 새파랗게 질리며 어금니를 바싹 무는 세주.
성가신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한 손으로 세주의 코를 움켜쥐는 설.
호흡곤란을 느낀 세주가 최불암씨처럼 파~~하고 입을 벌리는 순간,
빛의 속도로 주사기를 세주의 입안으로 밀어 넣는 설.
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다가 말고, 멈칫, 어떤 느낌에 쩝쩝
입맛을 다셔보는 세주.
세주 (E) 이게...뭐임?
설 유동식 죽이에요. 떠먹이려고 했는데 산장에 수저가 없네요.
세주 (그제야 말문이 트이며) 아씨,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해주면 되잖아!
설 (상관 않고) 죽 다 먹고 나서 약을,
세주 (OL,버럭) 안 먹어! 무슨 약인 줄 알고 먹어!
설 먹이려고 했는데 힘드실 거 같아서 미리 죽에 갈아 넣었어요.
세주 (환장하겠는) 젠장! 그러니까 미리 말을 해달라고!!!
설 제법 강한 진통제라 잠이 좀 올 거예요. 걱정 말고 푹 주무세요.
세주 걱정을 말긴 개뿔! 내가 잠든 사이에 그쪽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푹 주무....(눈이 가물가물 감기는)시면....안되는데.....
그런 세주를 바라보며 그로테스크하게 미소 짓는 설.
(*세주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세주 (쏟아지는 졸음에 눈을 가물가물 떴다 감았다하며) 잠들면 안 돼.
죽든지...원고를 쓰든지 해야 되는데....이대로 자면 안 되는데...
(의식이 멀어지는데)
S#12 황금거위 출판사 사무실 (낮)
초조한 표정으로 일제히 벽시계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지석과
출판사 직원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째깍 째깍 째깍...시계바늘
소리만 크게 들리는데. 시침과 분침이 10시 정각에 딱 멈추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직원들.
지석 (괴로운 표정으로 정봉에게) 한작가는.
정봉 계속 연락두절 상탭니다.
지석 (돌아버리겠는데)
이때 팩스가 들어오는 소리 들려오고. 심란한 표정으로 일어나
무심히 팩스 용지를 들여다보다 보던 두엽, 두 눈이 커진다.
두엽 (!!) 한작가님 연재소설 1주차 원고에요!
일동 !! (순간 일제히 팩스를 향해 달려가고)
정봉 타자기로 작업하셨는데요.
지석 (눈에 활기가 확 돌며) 미영씨 컴퓨터 작업 시작하고!
정봉씨는 웹사이트 측에, (하다가 미영에게) 1회분 타이핑에
몇 분 걸려?
미영 (이미 타이핑 모드) 10분에 끊어보겠습니다.
지석 오케이! 정봉씨는 웹사이트 측에 전화 걸어 10분만 달라고 해.
나머지는 SNS 돌려. 뭐해, 움직이지들 않고. 무브! 무브!!!
S#13 세주의 저택 / 집필실 (낮)
진오 앤티크 축음기에 LP판을 걸고 바늘을 올리고 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음에 이어 1930년대 풍의 재즈음악이
흘러나온다. 마치 제 것인 양 세주의 책상 앞으로 가 앉는 진오.
양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갖다 대고는(1부 8씬에서의 세주처럼),
원고를 끝낸 홀가분함과 여유를 즐기다가, 문득 호기심에 서랍을
열어본다. 성수청 명함과 모든 지혜 명함(1부 37씬에서 설이 주고 간)
을 발견한 진오.
진오 (명함에 박힌 설의 이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로) 전...설...?
S#14 눈밭 (낮)
두꺼운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맨 설이 하얀 눈밭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그렇게 하염없이 가다가 저 멀리 산이 보이는
곳에 멈춰서는 설(*영화 러브레터처럼).
설 (입가에 양손을 대고 크고 씩씩한 목소리로) 아빠---!
잘 지내고 계세요----?
메아리 아빠---! 잘 지내고 계세요----?
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메아리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설 아빠---! 아빠---! 아빠---! 보고 싶어요----!
되돌아오는 메아리. 밝게 웃는 설. 그 위로,
설이부 (E) 설아, 설아. 아빠의 전설! 이리 와보라니까!
S#15 플래시백 (설이의 옛집)
집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린 설(10살)을 우-몰며 나오는
설이부. 마당의 나무그네(막 만들어진 새것) 앞으로 데리고 간다.
얼결에 끌려나온 설은 낯설고 어색한 듯, 새침한 표정을 하고 있다.
설이부 이거 봐봐. 아빠가 너 타라고 직접 만든 그네다.
어린 설 ......(뚱하니 보고만 있는)
설이부 임마, 왜 그러고 섰어? 안 타 볼 거야?
어린 설 ......(반응 없이 시무룩한)
설이부 (잠시 어쩔 줄 모르듯 난감한 표정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엄마랑 살다가...얼굴도 모르는 아빠랑 사는 거 낯설어?
어린 설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는. 엄마가 그리운 것)
설이부 (안쓰럽기도, 안타깝기도 한 눈빛으로 보다가, 다시 용기내어)
참, 아빠가 설이한테 줄 선물이 있어. 이리 앉아봐.
설이를 번쩍 들어 나무 그네에 태우고는 자신도 비집고 들어가
그 옆에 낑겨앉는 설이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바로 예의 그 회중시계다.
설이부 짠, 아빠가 산에 갔다가 눈 속에서 발견한 거다. 이거 엄청 오래된
거야. 적어도 70년은 됐을 걸? 아빠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다는
거지. 어때? 멋있지? 고장나긴 했는데, 이거 왠지 사연 있어
보이지 않냐?
어린 설 (뭔지는 궁금한지 슬쩍 보면)
설이부 (관심 끄는 데 성공하자 신나서) 보통 시침에 금을, 초침엔 동을
쓰거든. (멈춰진 회중시계 위로, E) 근데 봐라, 이건 시침 대신
초침이 금으로 되어 있잖냐.
어린 설 (알 수 없는 끌림에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위로)
설이부 (E) 이 시계 주인은 분명, 작은 게 제대로 되어 있어야 큰 게
제대로 움직인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설이부 (설의 손에 쥐어주며) 자, 너 해라. 너도 이제부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지도 말고,
현재의 일분, 일초를 성실하게 살아가란 뜻이다. 알아 몰라. (하는데)
어린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빤히 보는)
설이부 내 말이 너무 어렵나? (머리 긁적긁적하더니) 그러니까, 내 말은....
(씨익 웃으며) 그냥 설이 니가 하고 싶은 거 열심히 하면서
매일매일 즐겁게 살란 얘기야. 알아 몰라.
어린 설 (그제야 좀 웃으며) 알아.
S#16 현재 (눈밭/ 낮)
설 (떠올리고 웃으며) 알아. 아빠 말 문신처럼 가슴에 새겨놓고 늘
즐겁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하며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려는데, 없다.
당황하는 설. ‘어? 내 시계, 어디 갔지?’ 창백해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찾기 시작하는 모습 위로,
대한 (E) 아버지 기일?
S#17 리까르도 (낮)
브레이크타임. 테이블에 커피잔 놓고 마주 앉아있는 대한과 방진.
방진 (끄덕) 응. 조난당한 사람 구하다 돌아가신 건 알지?
대한 알지 그럼. 나 유학가기 전 일이니까.
방진 그 산에 아버지 뿌려드렸거든.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혼자 조용히
찾아가서 며칠씩 있다 오곤 했어. 심란한 일 있을 때도 그렇고.
대한 (휴우 안심하며) 그런 거였어? 난 또, 한 달이나 연락이 안 돼서
뭔 일 생긴 줄 알았네. (커피 잔 들며) 그럼 나쁜 소식은 뭔데?
방진 그 지역이 몽땅 폭설로 고립 됐다는 거지.
대한 (마시던 커피 푸욱 내뿜으며) 뭐? (불안했다가, 이내 떨쳐버리듯
호기롭게) 괜찮아. 우리 씨뇨리나는 어릴 때부터 등산으로 단련된
몸이잖아. 혼자서도 잘 있을 거야.
방진 왜 꼭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해?
대한 (예민하게 보며) 무슨 뜻이야?
방진 설이는 명예 구조요원이었어. 거기서 산장지기 대신 한 달간
머물면서 사람도 구하고, 야생동물 구조 활동도 하거든.
대한 그런데?
방진 오가다 섹시한 남자를 구했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고립된 산장에 섹시한 남자와 단 둘이 있다면 어떻겠어?
대한 ! (잠시 심각하게 생각해보다가, 착 팔짱끼며) 흥! 상관없어.
방진 오올~ 남자다. 니가 웬일?
대한 (씨익) 우리 씨뇨리나는 한세주 외엔 남자한테 별 관심 없거든.
방진 (끄응...한심한)
대한 (눈 부릅) 한세주만 아니면 돼.
S#18 산장 안 (낮)
약기운이 깨는 듯 천천히 눈을 뜨는 세주.
잠시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어느 순간 퍼뜩 놀라 일어나 앉는다.
극심한 통증에 찌푸리는 세주. 그러고 보니 사지를 묶어놨던
결박이 풀려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설이도 없다. 탈.출.본.능!
몸을 움직여본다. 통증이 느껴지지만 부러진 데는 없는 거 같다.
눈빛 매서워지는 세주. 테이블 위에 놓인 설의 핸드폰을 집어 들어
119를 누르는데, 통화 불가 표시 뜬다. 이런 씨...주변을 둘러보다
유선 전화를 발견하고는 다급히 집어 드는데, 전화선이 끊겨있다.
끊긴 전화선을 들고 덜컹, 공포감을 느끼는 세주인데,
설 (E) 탈출하시려고요?
헉! 해서 돌아보면, 언제 왔는지 문가에 무뚝뚝한 표정의 설이
서있다. 세주의 심리를 반영하듯 음산한 스릴러 음악이 깔린다.
설 (천천히 다가오며) 눈 때문에 고립돼서 당분간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세주 (피하며) 가, 가까이 오지 마.
설 (다가오며) 몸도 안 좋은데 왜 자꾸 그러세요.
세주 (겁먹은 채로 도망치듯 싱크대 쪽으로 기어가 더듬더듬 서랍을 연다)
설 사람이 좋은 말로 하면 좀 알아들으셔야죠. (하며 한쪽에 세워뒀던
삽자루에 손을 갖다 댄다)
세주 아악! 비명을 지르며 서랍에서 아무 거나 무기 대용으로
꺼내 홱 치켜드는데, 보면 숟가락이다. 몹시 당황스러운 세주.
긴장감 넘치던 스릴러 음악이 부끄러운 듯 찌그러든다.
세주 뭐...뭐야. 숟가락 있었잖아.
세주 싱크대 서랍을 보면 한 칸 가득 차있는 숟가락과 젓가락들!
세주 (이런 씨, 설을 홱 노려보며) 웬만한 식당 뺨치게 수저가 많은데
굳이 주사기를 사용한 이유가 뭐야!
설 (피식) 어떻게 감히 작가님한테 흙수저를 물리겠어요.
불특정 다수가 사용했던 건데.
세주 그럼, 내 몸도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거라 결박시켰나?
설 (정색) 혹시 골절이 있나 해서 깁스하기 전에 고정시켰던 거예요.
괜찮은 거 같아서 풀었을 뿐이구요.
세주 너 이거 골탕이지. 뒤끝이지, 이거!
설 (차갑게) 전자는 맞고, 후자는 아니에요.
세주 (기막힌) 허! 뒤끝으로 만리장성을 세울 기세네 얘가.
설 (비식) 좋은 자재를 제공해준 작가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하고는, 삽 들고 나가는)
세주 야! 대화하다 말고 어디가! 야! (쩔뚝거리며 쫓아나가고)
S#19 산장 앞 (낮)
삽을 들고 나서는 설의 뒤를 쩔뚝거리며 쫓아 나오는 세주.
세주 사람 말이 안 들려? 삽자루 들고 어디 가냐고 묻잖아.
설 삽 쓸 일이 있나보죠.
세주 뭐, 나 묻을 땅자리 보러 가?
설 어머나, 창의력도 풍부하셔라. 그 생각은 못 했네.
세주 (잡아서 돌려세우며) 자꾸 비아냥거릴래?
설 (보며) 알고 싶은 게 뭔데요 대체.
세주 니가 왜 여기 있어.
설 (눈만 내려 세주의 손 보며, 도도하게) 작가님이 붙잡았으니까요.
세주 내가 사고 당할지 어떻게 알고 때맞춰 딱 나타났냔 말이야 내 말은.
설 (질리는) 왜요 이것도 설계 같아요? 내가 작가님 차에 미리 손을 쓰기라도 했단 말이에요?
세주 그렇잖아. 이런 우연이 연속된다는 건,
설 (OL, 터지며) 대체 그 놈의 의심은 뭘로 어떻게 해야 풀려!
세주 (엄맛! 화들짝 놀랐고)
설 여긴 우리 아빠 산장이야, 됐어? 그쪽 옮기다가 잃어버린 아버지
유품 찾으러 가는 길이고! 눈에 파묻혔을까봐 삽자루 들고 가는 거고!
그쪽이 왜 여기 나타났는지는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야, 됐어?
(꽥) 됐냐고 이제!
세주 (찔끔해서) 아 왜 돼지 멱따는 소릴 내고 난리야!
설 내가 미쳤지. 또 살려놓는 게 아니었는데.
세주 이봐, 공치사는 그야말로 치사한 짓(이야),
설 (OL) 조금 달라졌겠지, 이번에 살려놓으면 느끼는 바가 있겠지, 의식 찾고 말문이 트이면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저번 일은 미안했다,
이번 일은 고맙다, 딱 두 마디면 용서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미친년이라고.
세주 (좀 미안해져서)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자학을...
설 (눈 사납) 명심해. 우린 고립됐고, 온몸의 뼈가 재조립된 그쪽을
보호해줄 사람은 여기 나밖에 없어. 살고 싶으면 버럭질을 할 게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라고! (홱 돌아서며) 도움이 필요할 일을
만들지 않기는 개뿔.
세주 (이런 씨지만, 소심하게) 저게 걸핏하면 말을 까구 난리야...
S#20 설산 눈밭 (낮)
사고 현장. 세주의 차가 거꾸로 처박힌 채 방치되어 있고,
그 근처를 샅샅이 뒤지며 회중시계를 찾기 시작하는 설.
눈에 파묻힌 부분은 삽으로 퍼내가며 열심이고.
S#21 산장 안 (해질녘 쯤)
침대 위에 앉아있는 세주. 한 손에 설의 핸드폰 치켜들고
안테나 잡히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안 잡히자
침대 위로 휙 던져버린다. 직장 잃은 노숙자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세주. 그 위로,
지석 (E) 써. 파리약 맞은 놈처럼 비실거리고 있지 말고 일단 써보라고.
# 인서트 (2부 66씬)
/지석 벌써 한 달 째야. 너 제정신 아냐. 뭔가 대책이 필요해.
/지석 100억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데미지가 너무 커!
# 현재
떠올리고는, 괴로운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선 드는데,
문득 나무 기둥에 적힌 낙서가 눈에 띄는. 호기심에 다가가 보면,
나무에 파인 여러 개의 홈 옆에 설의 이름과 숫자가 적혀있는.
해마다 설의 키를 잰 것. 피식 웃는 세주. 이번엔 테이블 위에
놓인 액자에 시선이 가는. 집어 들고 보면, 사진 속 어린 설과
설이부가 환하게 웃고 있는. 잠시 보다가....내려놓는데,
옆에 놓인 자신의 책 <스토커>가 보인다. 얼마나 읽었는지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책을 드르륵 넘겨보면,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고,
책갈피 사이에 꽂혀있던 사진 한 장이 튀어나온다.
보면, 십년 전 세주의 사진이다.
세주 ...! (보는 표정 위로)
세주 (E-2부 22씬의) 예전에 우리...만난 적이 있었다고 했지?
그게...언제야?
S#22 회상 / 패스트푸드점 (1부 60씬 이후 상황)
세주 싸구려 만년필로 노트에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햄버거 껍데기와 빈 커피 잔.
이때 누군가의 손이 가만히 다가와 빈 잔 대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새 코코아 잔으로 바꾸어 놓고 간다.
그 사실 모른 채 글쓰기에만 완전히 몰입해있던 세주, 무심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다가 멈칫, 다시 한 번 컵을 보면,
컵 위에 펜으로 쓰인 글씨. ‘당 보충! 나는 당신의 첫 번째 팬입니다’
누구지? 주위를 둘러보는 세주.
모른 척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대딩 설.
세주 잠시 망설이다 한 모금 마셔보고는 맛있는지 미소가 생긴다.
그런 세주를 슬쩍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대딩 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찰칵, 사진을 찍는데서,
S#23 산장 안 (해질녘)
그 모습이 찍힌 사진을 들고 서있는 세주.
세주 (정말 만난 적이 있었구나...조금 미안해지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면
어둑어둑해지고 있고) ......(어쩐지 걱정되는데)
S#24 설산 눈밭 (밤)
깜깜한 밤. 헤드 랜턴까지 쓰고 회중시계를 찾고 있는 설.
사고 지점부터 반경을 넓혀가며 찾는 중인데, 문득 남은 곳을
바라보면 까마득하다. 한숨 쉬며 고개 돌리다가 눈밭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다. 눈빛이 환해져서 그쪽으로 달려가다
눈에 덮여있던 돌부리에 발이 걸려 휘청하는 설!
순간, 그런 설의 허리를 감싸안듯 붙들어주는 누군가의 손!
놀라서 보면, 설의 눈앞에 서있는 세주!
설 !!! (심장이 쿵)
세주 봤지? 니가 내 목숨을 구하면 나도 반드시 널 구해.
(여기까지는 대따 멋있었다가, 이내 허세) 내가 그런 사람,
설 얼굴이 벌개져서 세주를 홱 밀치고는 혼자 가려는데,
발목을 삐었는지 채 걷기도 전에 아악! 만세를 부르며
그대로 눈밭에 넘어지고. 한심한 듯 바라보는 세주.
S#25 산장으로 가는 길 (밤)
쩔뚝이는 설을 부축해서 데리고 오는 세주.
세주 너무 바싹 붙는 경향이 있다?
설 ! (조금 떨어지고)
세주 너 이것도 설계면 죽는다.
설 (내 참 드러워서. 세주 홱 밀치고 혼자 가려는데)
세주 (다시 끌어당겨 부축한다)
설 (세주 품에 당겨진 채) !!!
세주 (앞만 보는 채로) 저번 일은 미안했고...이번 일은 고마웠다...
설 !!! (보는)
세주 아우 씨, 닭살 돋아. 뭐 오해하지는 마. 내가 이런 말을 잘 못해.
그래서 되도록 그럴 일을 안 만들어. 뭐...그렇다는 말이야.
설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요? 유명인 코스프렌가?
세주 사람들한테 뒤통수를 많이 맞아 그런가보다 생각해.
설 안 맞고 사는 사람도 있나.
세주 나도 뭐 하나 물어보자.
설 하문하세요.
세주 왜 안 웃어? 잘 웃었잖아 원래.
설 (도도) 미저리 같다고 해서 안 웃기로 했어요. 스토커 같다고 해서
팬질도 깔끔하게 접었고.
세주 근데 심장은 왜 뛰어.
설 (보며) 누가?
세주 (보며) 니가. 몰랐어? 니 심장 지금 엄청 뛰어.
설 !! (얼굴 빨개져서 세주 홱 밀치고는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세주 (재밌어서 피식 웃는)
S#26 산장 외경 (밤)
아오오~ 어디선가 늑대울음 소리(응?)가 들려오고.
S#27 산장 안 (밤)
환자인 세주는 침대에, 설은 맞은 편 바닥 침낭 안에 들어가 있다.
잠 못 이루는 밤. 뒤척이는 두 사람인데, 동시에 몸을 돌리다가
시선이 마주친다. 헉...해서 조용히 침낭의 지퍼를 머리끝까지
올리는 설. 애벌레가 되어 돌아눕는다.
세주 (피식 웃고는 돌아누우며) 알아, 알아. 잠이 안 오겠지.
지금 이 상황...모든 팬들이 꿈꾸는 상황이니까.
설 ......
세주 마음을 숨기느라 애쓸 필요 없어. 이제 와서 숨겨봐야 본인만
힘들 테고, 너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창피해 할 필요도 없어.
원래 나란 사람이 입구는 있어도 출구가 없다고들 해.
설 ......
세주 (많이 봐준다는 투로) 뭐 스토커 아닌 거 알았고, 미저리가 아니라
머저리에 가깝다는 것도 알았고...그렇게 오해도 풀렸으니까 굳이
탈덕하지 않아도,
설 (OL, 크허허허헉—코 골며 잠든)
세주 ! (이불을 획 걷고 일어나 보는, 기막힌) 쟤 정체가 뭐니 진짜.
(에잇, 이불을 덮어쓰고 잠들어버리는데서)
S#28 밤하늘 인서트
달빛...그 위로...서서히 다가오는 불길한 기운처럼,
검은 구름을 흘리고 있는 밤하늘...
S#29 세주의 저택 / 집필실 (밤)
창가에 서서 그런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는 진오.
진오 한세주. 돌아오지 못하는 거냐, 아니면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거냐.
S#30 산장 안 (밤)
침낭을 조용히 내리는 설(실은 잠 못 들고 숨죽이고 있었다).
설 (조용히 일어나 앉아 세주 쪽 기척 살피고는) 아우,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하며 손 부채질하는데)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설 조심히 세주에게 다가가보면,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세주.
설 !!! (덜컹해서) 작가님, 작가님, 괜찮으세요, 작가님?
세주 땀으로 범벅된 채 앓기만 할 뿐 반응 없고.
이마의 열을 짚어보면 불처럼 뜨겁다.
하얗게 질리는 설. 서둘러 핸드폰을 집어 들고 보면,
여전히 통화불능 신호 떠있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설.
설 어떡하지?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심한 듯) 잠깐만
기다리세요, 작가님. (얼른 겉옷 껴입으며) 제가 가서 의사든
구급대든 불러올게요. 헬기를 띄우든 업고오든 어떻게든 할 테니까
조금만 버티고 계세요! (하며 다급히 돌아서는데)
누운 채로 설의 손을 탁 잡는 세주.
놀라 돌아보는 설.
세주 가지마...
설 (잡힌 채로) !
세주 (거의 혼수상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돌아가면...
지옥이 펼쳐져 있을 거거든. 나는 그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할 테고...
좀 무서워. 아직은 나락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
지금은...이대로 죽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 느낌이야.
설 작가님. (정신 차리라고)
세주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십년 전 그때가...너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추억일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악몽이었어...
지옥이었어...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그러니까...
설 ......!
세주 가만있어. 이대로 죽거나.. 살아서 지옥을 맛보거나...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니까...지금 필사적으로 생각을 모으는
중이니까...가지 마....기다려줘.
설 (무슨 일이 있었구나...안타까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강단 있는 말투와 표정으로) 돌아가야 돼요.
S#31 산길 (밤)
헤드 랜턴 불빛에 의지한 채 달리고 있는 설.
설 (E) 이겨내지 못하면 신은 그 능력을 거둬간대요.
S#32 산장 안 (밤)
혼수상태에 빠져 혼자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세주.
설 (E) 저는...작가님이 신에게 능력을 뺏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S#33 산길 (밤)
필사의 힘으로 달리고 있는 설.
설 (E) 십년 전 그때 작가님의 글이 저를 살렸어요. 그러니까 부디
신에게 뺏기지 말아주세요. 작가님을 위해서...그리고 저를 위해서...
미친 듯이 달리다 눈길에 미끄러지며 크게 넘어지는 설에서.
S#34 세주의 저택 / 침실 (밤)
헉! 소리와 함께 땀범벅이 된 채 잠에서 깨어나는 세주.
잠시 거친 호흡을 내쉬며 앉아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침실이고!
세주 (멍한 채로) 어떻게 된 거야...내가 어떻게 여길...
이때 열린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과
그릇들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 누군가 있다...!
멈칫 문 쪽을 바라보는 세주에서.
S#35 세주의 저택 / 주방 (밤)
소심한 목소리로 ‘지석이 형....?’ 부르며 안으로 들어서는 세주.
그러나 아무도 없는 주방. 식탁 위에는 스프와 샐러드가 깔끔하게
차려져 있고. 스프에선 아직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데
사람은 없는. 세주 의아하게 보는데, 이번엔 2층 쪽에서 들리는
인기척. 돌아보는 세주.
S#36 세주의 저택 / 집필실 (밤)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세주. 그러나 역시 아무도 없는.
깔끔하게 정리된 실내. 책상 위에는 예의 그 타자기가 놓여있고,
타자기 옆에는 원고뭉치가, 그 옆에는 예의 그 성냥갑이,
그 옆 재떨이에는 채 끄지 못한 담배가 연기를 피어 올리며
저 홀로 타고 있는...!
세주 ......! (방금 전까지 분명 누군가 있었다)
어쩐지 불안하고 께름칙한 표정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가는 세주.
타자기 옆에 놓인 원고를 집어서 보면, 전부 타자기로 타이핑된
원고 표지에 적힌 ‘연재소설 <시카고 타자기> 1주차 원고’.
세주 (E) 뭐야 이건...? 누가 내 대신 원고를, (순간 떠오르는)
# 인서트 (2부 66씬의)
/지석 유령작가를 고용하자.
/지석 슬럼프를 극복할 때까지 만이야. 아무도 모르게 진행할 거야.
세주, !!!, 떠올리고는 표정 서늘해지는데,
현관문 비밀번호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는.
서늘한 표정으로 확 돌아보는 세주.
S#37 세주의 저택 / 거실 (밤)
막 현관문으로 들어서다가, 집필실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표정의 세주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는 지석.
지석 어? 한작가! 정신 들었냐? (달려와, 보며) 괜찮아? 이제 괜찮은 거야?
세주 (서늘하게 굳은 채로) 형이야?
지석 (울컥해서, 와락 안으며) 그래, 나다, 인마. 나 알아보겠어?
(몸 떼고 보며) 닥터 박이 매일 왕진 왔었어. 그 여자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은 목숨이었대. 응급처치를 제대로 한 모양이더라.
세주 (관찰하듯 서늘하게 보기만)
지석 너 이틀 동안 완전 기절했었던 거 아냐? 과로랑 숙취가 겹쳤대.
안정제도 너무 많이 복용했고. 다행히 타박상이랑 찰과상 외엔
별 문제없다니까 천만다행이지 뭐냐. 나 심장 쫄려 쫀드기 될 뻔
했어 야.
세주 다시 한 번 물을 테니까 제대로 대답해.
지석 뭐를.
세주 형이, 그랬어?
지석 설마 내가 그랬겠냐?
세주 (버럭) 그럼 누구야? 누가 그랬어, 대체!
지석 (버럭) 아, 니가 그랬지 누가 그래? 안정제도 니가 처먹고!
술도 니가 처먹었잖아!
세주 그거 말고 연재소설 말이야!
지석 연재소설이 뭐! 너 사고 나던 날 아침에 니가 직접 팩스로 보냈잖아!
세주 ! (멍....한) 내가 팩스로 보냈다고?
지석 그래 너님이! 집필실 팩스번호로! 올리라고 보낸 거 아니야?
조회 수도, 댓글 반응도 폭발적이구만 뭐가 또 뒤틀려서 까탈이야,
까탈이!!
세주 정말...이야? (정말 자신이 보냈냐고 묻는 말인데)
지석 (그제야 표정 환해져서 안기라는 듯 양팔 쫙 벌리며) 그래 인마,
조회수, 댓글수, 화제성지수, 완전 대폭발이야. (와락 안으며)
투자자들 입이 조커처럼 귀에 걸렸어.
세주 ! (멍할 따름이고)
지석 (몸 떼고, 예뻐 죽겠다는 듯이 세주의 양 볼을 쭈욱 잡아 늘리며)
아우, 요 이쁜 자식! 괴물 같은 자식! 다음 주도 잘 부탁한다.
세주 (혼란스러움에 눈빛이 흔들리는데)
S#38 세주의 저택 앞 (밤)
나오는 지석, 주차해 놓은 차를 향해가고,
대문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진오가 지석 옆에 따라붙는다.
비밀 접선을 하듯 정면을 바라본 채 대화하는 두 사람.
지석 아, 차식 눈치 하나는 빨라가지고. 하마터면 들킬 뻔 했네.
진오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 어쨌든 들키진 않았으니 아무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지석 뭐 원고가 나왔으니 아무 문제없으려나.
진오 근데 너무 잔인하시다. 그 동안 낳아준 황금알이 얼만데,
끙 소리 한 번 냈다고, 바로 멱을 잡으려 드시나.
지석 좀 잔인하긴 했지만 그게 나랑 한작가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못 갈 것도 없지 뭐. (하며 차에 오르고, 출발시키는)
진오 이러니 전생에 죄 많은 인간이 작가로 태어난다는 말이 생기지.
(피식 웃고는, 저택 쪽을 바라보면)
S#39 세주의 저택 / 집필실 (밤)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로 타이핑된 <시카고 타자기> 1주차 원고를
읽고 있는 세주. 다음 장...또 다음 장...뭔가에 이끌리듯 미친 듯이
원고를 넘겨가는 세주. 두 눈에 어리는 충격과 혼란.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멍..해지는 세주.
세주 (혼란에 빠진 채, E) 이걸...정말 내가 썼다고? 분명 내가 쓰려고 했던
내용이긴 한데...대체 내가 언제.....
# 인서트 (새로운 컷/ 2부 70씬 이전 상황)
-집필실. 초조함에 신경안정제를 먹는 세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세주의 모습.
세주 (떠올리려 애쓰는, E) 맞아. 그날 밤 신경안정제와 술을 마셨어.
그 다음에...
# 인서트 (2부 74씬)
타자기를 들고 와 자판 위에 손을 올려놓는 데까지.
세주 (떠올리고는, E) 그때 무의식중에 원고를 쓴 건가? 쓰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린 건가? 아니면...지석이 형의 거짓말에
내가 놀아나고 있는 걸까?
모르겠는. 양 손을 머리칼 속에 쑤셔 박고 고개 숙이는데서......F.O
S#40 세주의 저택 외경 (아침)
새소리가 들려오고.
S#41 세주의 저택 / 집필실 (아침)
그대로 밤을 샌 듯, 그 자세 그대로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세주.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타자기 원고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때 핸드폰이 울리고. 보면, 지석이다.
세주 (받자마자) 형, 솔직히 대답해봐, 정말 형이 유령작,
지석 (F) 한작가! 완전 잭팟 터졌어! 조회수 2600만 돌파!
세주 !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S#42 황금거위 출판사 복도 + 세주의 집필실 (아침)
지석 (기분 완전 좋다) 해외에서도 벌써 판권문의가 쇄도하고 있어!
사랑한다. 온 몸 바쳐 사랑한다, 한세주. 하하하하!!
세주 (충격으로 멍해지는데서)
S#43 몽타주 (낮)
-피씨방, 카페, 사무실, 학교 등 곳곳에서 핸드폰 혹은 컴퓨터로
연재 사이트에서 ‘시카고 타자기’를 클릭하는 손. 손. 손들.
-사람들,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 공항에 대기하면서, 혹은
버스, 지하철 타고 가며 핸드폰으로 소설 읽는 모습들.
-방송국 대기실에서 인터뷰 중인 아이돌.
아이돌 (한 손에 든 핸드폰 흔들며) 저는 요즘 한세주 작가님 연재소설
기다리는 재미에 살아요. 이제 겨우 5회 연재했는데, 뒤가 궁금해서
미치겠어요. 작가님~ 수현이랑 휘영이 서로 사랑하게 해주세요~
(양 손으로 크게 하트 그리며) 사랑합니다~
-집필실. 인터넷 연재소설 사이트 열어놓고 연재분 밑에 주르르
달려있는 엄청난 양의 댓글들을 보고 있는 세주. 그 모습 위로,
자막으로 쏟아지는 댓글 자막들.
/댓글1 한세주 새 연재소설 읽어본 게이들 손.
/댓글2 액션 로맨스 시대물인데 영혼을 갈아 넣은 듯. 약간의 병맛은 덤.
/댓글3 스토커사건 이후로 펜 꺾을 줄 알았는데 한세주 살아있네.
세주 (댓글을 읽어 내려가며, E) 내가 썼어. 내가 쓴 게 분명해...
내 머리를 쪼개보지 않은 이상 내가 한 발상을 이렇게 정확히
문장으로 옮길 순 없어. 그러니까...(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내가 쓴 게 분명해. (그래야만 해, 하는 느낌)
사회자 (E) 원쏘스 멀티유즈 프로젝트 <시카고 타자기>의 제작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S#44 호텔 연회장 (낮)
<시카고 타자기> 제작 발표회와 기자 간담회를 겸한 행사장.
단상 위에는 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는 프로젝트 관계자들.
그 중 한가운데 세주가 앉아 있고.
사회자 (E) 내년 초 크랭크인하게 될 영화의 연출을 맡으신 구본희 감독님,
그리고 주연 배우 이미라씨, 뮤지컬 연출을 맡으신 강호수 감독님,
웹툰 연재를 맡으신 린지 작가님...
사회자의 소개 멘트에 따라 한 사람씩 일어나 인사하고.
사회자 마지막으로 이번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시죠.
한국의 스티븐 킹, 문단의 아이돌, <시카고 타자기>의 원작자
한세주 작가님을 소개해드립니다.
최고급 수트 차림의 세주 여유로운 미소 지으며 일어나 인사하면,
좀 전과 확연히 차별되게 크게 터져 나오는 함성과 박수소리!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 모든 이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세주.
조명이 닿지 않는 외진 객석 테이블에 앉아 화려한 세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바로 진오다!
진오 ......(세주를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데)
이때, 누군가 진오 옆에 와 털썩 앉는다. 송기자다!
(*이하, 시선은 무대 위의 세주에게 둔 채 대화하는 두 사람)
송기자 차식, 욕 나오게 잘생겼네.
진오 (피식) 내 말이.
송기자 나 같음 배우하지 글 안 쓴다.
진오 내 말이. 얼굴 저렇게 낭비할 거면 나나 주지.
작업실에만 가둬두기 아까워.
송기자 (비식) 그래서 유령작가를 쓰나?
진오 (피식) 설마 또 카더라 기사 쓰려고?
송기자 (여전히 시선 세주에게 둔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수병
들어 마시는데,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의 눈빛)
S#45 호텔 로비 (낮)
제작 발표회를 마친 세주, 다음 일정을 위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고, 강비서, 그 뒤를 따라붙으며, 오늘의 스케줄을 읊고 있는,
강비서 (태블릿 PC보며) 오후 3시에 공익광고 촬영 스케줄, 오후 7시에는
투자자들과의 만찬이 잡혀있습니다.
세주 광고 내용은요?
강비서 독서 장려 캠페인 공익광고인데, 백태민 작가님과 함께,
세주 (걸음 딱 멈추고, 보며) 누구요?
강비서 (싫어하는 거 알기에) 백태민 작가님....
세주 (돌겠는) 갈지석 이 인간이 진짜!!! (터지는데)
송기자 (E) 여어~ 한세주 작가님~
세주 ! (보면)
송기자 (느물느물 다가오며)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주 (표정 서늘해지는)
송기자 (앞에 와 서며) 이거 너무 완벽한 부활 아닙니까?
세주 (표정 서늘한 채로 피식) 부활은 무슨. 언제 죽었던 적이 있어야
그 명예를 누려보지. 무덤 파느라 고생했을 텐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송기자의 옷깃을 탁탁 정리해주고는 가려는데)
송기자 (OL) 경찰 출입기자한테 흥미로운 얘길 하나 들었는데,
세주 (멈칫 서고, 보는)
송기자 저번 스토커 사건 때도 그렇고, 이번 교통사고 때도 그렇고,
두 번 다 웬 묘령의 여성과 함께 있었다면서요?
세주 (피식) 스캔들이 터질 때가 됐죠, 제가? 한 삼 년 됐나?
송기자 우리 한 작가님이 차암~프로는 프로야. 두 번 다 만만치 않은
사고였을 텐데,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상황에서도 원고는 늘
제때 나오더라고. 대체 어느 틈에 원고를 써내쓰까(써냈을까)?
세주 (표 안 나게 굳는)
강비서 (싸움 붙을까봐, 얼른 나서며) 일정을 서둘러야 합니다, 작가님.
세주 (말리기엔 이미 늦은, 비식 웃으며) 알려줘?
강비서 작가님...(상대하지 마 제발)
세주 (말리는 강비서를 한 손 들어 막고는, 송기자에게 다가더니,
귀에 대고 작게) 유령작가들이 써줘. 내 집필실에 공장이 있거든.
언제 한 번 놀러와. 사진 찍게 해줄게. (웃어주고는 돌아서는)
송기자 (만만치 않은 놈이다 싶어 피식 웃는)
S#46 호텔 정문 앞 (낮)
서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세주.
넥타이 느슨하게 풀며 문 앞에 대지는 차를 향해 걸어가고.
세주를 태운 차가 떠나고 나면, 호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언제부턴가 세주를 지켜보고 있던 진오의 모습!
진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길래,
주변 인물들이 죄다 그 모양인 거냐, 한세주...지뢰밭이 따로 없네.
(심란함과 어이없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위로)
지석 (E) 하하하, 내 덕분은 무슨!
S#47 황금거위 출판사 / 지석의 사무실 (낮)
지석 (신나서 동료 출판사 사장과 통화 중) 한작가의 공이 제일 크지!
만! 거기에 내 사업수완이 더해져 시너지를 만들어낸 거지.
두고 봐. 앞으로 우리 백태민 작가도 제2의 한세주로 키워내고
말 테니까. 한작가 후광 마사지 받으면 금방이라니까, 하하하!!!
S#48 광고 촬영장 (낮)
숲과 서가가 함께 어우러진 듯 배경을 꾸며놓은 스튜디오에서
세주와 태민이 ‘독서 장려’ 공익광고를 촬영하고 있는 중.
마치 광고처럼 카메라 뷰파인더 시점으로,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서 읽고 있는 세주의 모습 위로,
세주 (E) 나는 방금 한 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세주, 다시 서가에 책을 꽂아 놓는 모습 위로,
세주 (E)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세주 (카메라를 바라보며)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앙드레 지드의 말입니다.
/숲 배경 앞 나무에 기대앉아 책을 읽는 태민의 모습 위로,
태민 (E) 독서할 때 당신은 항상 가장 좋은 친구와 함께 있다.
태민 (카메라 보며) 시드니 스미스의 말입니다.
/태민, 일어나 세주에게로 다가오고, 역시 태민에게 향해 오는 세주.
태민 한 그루의 나무가, 한 권의 책이 되듯이,
세주 당신의 독서가, 당신의 인생을 바꿉니다.
세,태 (나란히 서서 동시에 화사한 미소로) 책을 읽읍시다.
컷, 사인 떨어지자마자 태민에게서 떨어지는 세주.
피식 웃고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태민에서.
S#49 광고 촬영장 일각 (낮)
광고 촬영을 마치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세주.
태민 (뒤이어 나오며) 한작가.
세주 (걷는 채로) 커피 안 마셔.
태민 (옆으로 와 나란히 걸으며) 마시자고 안 해.
세주 한 지붕 어쩌고 하는 재미없는 연재소설 얘기도 안 들어.
태민 니 연재소설 재밌드라.
세주 (멈칫, 표정)
태민 구성도 신선하고, 소재에 맞게 문체를 바꾼 시도도 좋았고,
그래서 그런가? 처음엔 한세주 소설 같지 않아 좀 낯설더라구.
세주 (멈추고, 탁 보며, 예민하게) 무슨 뜻이야 그게.
태민 ? (과한 반응에) 뭘 정색씩이나 하고 그래 인마.
세주 (버럭) 왜 머리 나쁜 척 해. 저의가 뭐냐고 묻는 거잖아!
태민 (의아해서) 저의는 무슨. 연애 혐오론자에 가까운 한세주가
로맨스 소설을 썼다는 게 신선하달까, 의외랄까 그래서 한 말 가지고.
세주 ......(자신이 너무 과민했다싶은, 들킬 새라 홱 돌아서 가고)
태민 (그런 세주 관찰하듯이 바라보며, 뭔가 이상한)
S#50 백도하의 집 / 거실 (낮)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들어오는 태민인데,
주방 쪽에서 나오는 도우미.
도우미 오셨어요?
태민 (퍼뜩 보며, 이내 사람 좋은 미소로) 네. 어머닌 어디 가셨어요?
도우미 사모님은 모임 있어 나가셨구요. 큰작가님께서 찾으셨어요.
태민 ? (서재 쪽을 보는데서)
S#51 백도하의 집 / 서재 (낮)
백도하, A4 용지에 출력된 태민의 원고를 읽고 있다.
여기저기 붉은 펜으로 첨삭하고, 코멘트 끄적거린 프린트 물.
다음 장 넘겨서 보다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페이지 전체에 크게 X자를 치던 백도하, 결국 펜을 탁 내려놓는데,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부르셨어요, 아버지?’ 하며 들어오는 태민.
책상위에 놓인 자신의 원고에 시선이 멈춘다.
태민 ! (긴장되는, 살피듯) 제 원고....읽어보셨어요?
백도하 (말없이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다) ......
태민 (긴장감 감추며) 어떠셨어요? 아버지 조언대로 고쳐봤는데,
백도하 (OL) (점잖지만 어딘지 위압적인) 백태민 작가님.
태민 ....네.
백도하 설마 이대로 출판사에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요?
태민 (짐짓 의연한 미소로) 물론 아직 손볼 데는 좀 있지만,
그래도 초고보다는 훨씬 더 나아진 것,
백도하 (OL) 처음부터 새로 쓰세요.
태민 ......! (굳는)
백도하 작가의 혼이 담기지 않은 문장은, 쓰레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한세주 작가를 의식한 글을 쓸 겁니까?
태민 (표정 식어 내리는) 의식한 적 없습니다.
백도하 모방할 대상을 넘어설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시도하지 마세요.
이따위 쓰레기를 밖에 내놓을 생각이라면, 대단히 실망입니다.
(원고 밀어놓으며) 갖고 나가세요. (하고는, 책을 읽기 시작)
수치심으로 원고 뭉치 집어 들다가 멈칫 보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자료들 틈에 끼어 있는 세주의 책!
표정 굳어지며 애써 시선 거두고 돌아서는 태민.
S#52 백도하의 집 / 태민의 방 (낮)
들어오는 태민. 백도하가 첨삭한 자신의 원고를 넘겨보면,
여기저기 빈틈없이 체크되어 있고, 페이지 전체에 X표 된 곳도 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에 원고를 와락 움켜쥐는 태민.
서늘한 표정으로 원고를 휴지통에 확 구겨 넣는데서.
S#53 고급 일식집 룸 (낮)
회를 비롯한 고급스러운 음식이 한상 차려져 있고.
홍소희 (물잔 들며) 저번에 한세주 스토커 기사 잘 봤어.
(마시고 잔 내려놓으며) 좋던데? (하며 앞을 보면)
열심히 회를 먹고 있는 남자, 송기자다!
송기자 (먹으며) 맘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나름 야심작이었거든요.
홍소희 (백에서 돈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지는)
송기자 ? (보며) 그건 사모님 의뢰가 아니라, 제 작품인데요.
홍소희 (미소) 야심작을 사들이는 게 취미야. 재능 있는 예술가 후원에도
뜻이 있고. 눈먼 돈이 싫으면 작품 의뢰 선수금쯤으로 생각해.
송기자 어떤 작품을 원하시려나? 역시 한세주가 주인공인 작품이려나?
홍소희 (회를 한 점 집어 자신의 앞 접시에 옮기며) 소재는 있고?
송기자 스캔들 어떠세요.
홍소희 스캔들은 유명인의 훈장이야. 난 한세주의 완전한 몰락을 원해.
문단에 발도 못 붙일 정도의.
송기자 스토리는 구성의 힘이죠.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홍소희 가르쳐? 소설가의 아내야. 아들 역시 소설가고. 어디서 훈장질이야.
송기자 유령 작가설은 어떠세요.
홍소희 ! (그제야 흥미롭게 본다)
송기자 뭐 데뷔 초부터 따라붙던 쾨쾨묵은 이야기지만,
홍소희 스캔들과 같이 엮으면 새로운 이야기가 되지. 작품 마음에 드네.
사지. (미소 짓는데서)
S#54 성수청 앞 (밤)
두둥! 떠났던 그날처럼, 배낭을 등에 맨 설이 화면 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돌아왔다! 하는 느낌으로 씩 웃으며 성수청을 향해 가려는데,
왕방울 (E) 너 거기 안서, 이년아!
설 ? (소리에 보면)
쥐어 터져서 산발을 한 방진이 대문을 박차며 튀어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빗자루를 쥔 왕방울이 사나운 기세로 쫓아 나온다.
왕방울 (달아나는 방진을 빗자루로 두들겨 패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귀에
딱정이가 앉게 얘기했구만, 이년이 또 지랄이야 또!
설 (피식) 방진이가 또 뭘 어쨌는데?
왕방울 (무심코 대답) 정화수 떠놓고 글발신 내려달라 치성 올리고 있더라!
저번에도 그 지랄을 떨다가 글발신 대신 지름신이 내려가지고서는,
상에 뿌릴 쌀도 없이 싹 쓸어간 년이야 이게.
방진 (홱 돌아보며) 아, 그래서 서점 알바하면서 갚고 있잖아!!!
왕방울 (다시 패며) 이년이 뭘 잘했다고, 그러다 진짜 신 내리면 어쩔라구!
설 (E) 아이구 염려 마. 방진이 쟨 애가 하도 산만해서 신도 못 버텨.
왕방울 ?!!! (빗자루 확 치켜든 상태에서 멈칫)
방진 ?!!! (두 손으로 막던 상태에서, 역시 멈칫)
설 (검지 왔다갔다) 들락날락하다....결국은 날락하고 말 걸.
왕방울, 방진 !!! (그제야 돌아보고, 동시에) 설아....!!!
설 쌍방울 모녀는 여전~하시구만! (씨익 웃고는, 두 팔 번쩍)
여러분, 나 컴백했어!!!
와아악, 소리 지르며 달려가 설을 끌어안는 방진. 재회의 기쁨에
방방 뛰는 두 사람. 그제야 빗자루 내리며 피식, 웃는 왕방울.
방진 (E) 전설의 무사귀환을 축하하며, 위하여~!
S#55 성수청 / 왕방울의 방 (밤)
김치, 나물류의 간단 안주 곁들인 상에 둘러앉은 설, 방진, 왕방울.
각자 앞에 놓인 소주잔을 동시에 들어서 원샷 하고는,
동시에 캬~ 소리내며 머리 위로 잔 탈탈 털어 확인한 다음,
마지막으로 동시에 잔을 탁! 내려놓는 환상의 합!
왕방울 (안주 먹으며) 한 달 내내 산에 틀어박혀 뭐하다 내려왔어, 그래?
설 그냥, 겨울 산의 정기를 받으며 힐링도 하고, 아빠한테 인사도 하고,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동물 구조도 하고, 사람도 구하, (하다가
아차 멈추고) 뭐 그렇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왔지.
왕방울 (그런 설을 관찰하듯 보다가) 뭔 일이 있었구만.
설 일은 무슨. 폭설로 고립된 거 말곤 딱히...
왕방울 손에 방울 쥐고 흔든 세월이 삼십 년이야. 귀신을 속여.
혹시 남자랑 같이 있었냐?
설 (무심코 잔 들어 마시려다가 풋 뿜고) 아줌마느은.
방진 아, 드럽게....(휴지 뽑아서 닦고는) 야, 그러고 보니 한세주
이제 슬럼프 극복한 거 같더라.
설 (보면)
방진 스토커가 이상한 유서 써놓고 자살하는 바람에 타격이 컸는지,
한동안 잠적설이 돌았거든. 근데 며칠 전에 새 연재 시작했는데
완전 대박났어.
설 (환해져서) 새 연재를 시작했다고?
방진 어. 한 5일 됐나? (소주병 들어 자기 잔 채우려는데)
왕방울 (한 손 들어 막으며, 엄하게) 그만. 가볍게 이 정도만 해.
방진 아, 엄마 혼자 여덟 병 마시고, 우린 이제 겨우 세 잔째잖아!
(보면, 상 아래엔 이미 여덟 개의 빈 소주병 놓여있고)
왕방울 시끄러! 몸주가 주신인데 어째 그럼. 마셔야 신빨이 사는데!
방진 어차피 신빨 다 떨어진 주제에, 술 마실 핑계 찾는 거 누가 몰라!
설 ......(두 모녀 싸우는 것과 상관없이 잔 들어 입가에 대며, 혼잣말)
무사히 재기에 성공했구나...(기분 좋아 잔 비우는데서)
S#56 세주의 저택 / 거실 (밤)
스케줄을 마치고 거실로 들어오는 중인 세주.
그 뒤를 따르는 강비서.
강비서 내일 오전 열 시까지 연재소설 마감만 마치시면 당분간
공식 스케줄은 없습니다. 원고 마감 시간은 변동 없으십니까?
(의중을 떠보듯, 조심히) 조정을.....할까요?
세주 (의지로) 아니오, 예정대로 나옵니다.
강비서 (안심, 미소로) 알겠습니다.
세주 (2층으로 향하는데)
강비서 (보다가) 작가님.
세주 (보면)
강비서 (미소로) 작가님이 슬럼프를 극복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세주 ......!
강비서 그럼. (목례하고, 나가는)
세주 .....(선 채로, 마음이 무거워지는데서)
S#57 세주의 저택 / 집필실 (밤)
노트북 앞에 앉아 계속해서 빈 화면만 노려보고 있는 세주.
안 써진다. 식은땀을 흘리며 점점 초조해지는 표정 위로 떠오르는,
송기자 (E)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상황에서도 원고는 늘
제때 나오더라고. 대체 어느 틈에 원고를 써내쓰까?
태민 (E) 처음엔 한세주 소설 같지 않아 좀 낯설더라구.
강비서 (E) 작가님이 슬럼프를 극복하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세주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 쑤셔 넣고, 고개를 숙이는데,
끼이익---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멈칫 고개를 드는 세주.
S#58 세주의 저택 / 정원 (밤)
세주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몽환적인 느낌. 안개 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언젠가 꿈에서 들었던 스윙재즈 음이다...!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사내의 실루엣.
세주 누....누구야....?
순간 휘파람 멈춘다. 잠시 정적. 몽환적인 안개만...
세주 거기 누구냐고.
진오 (안개 속에서) 어이, 서휘영.
세주 (목소리에 움찔) 서...휘영....?
안개 속 사내의 실루엣이 칙—성냥불을 붙인다.
따라오라는 듯 자욱한 안개 너머로 사라져가는 불빛.
세주 사내의 뒤를 쫓아 안개를 헤치며 나아간다.
끝없이 안개가 펼쳐진 몽환적인 공간 속을 헤매는데....
안개 너머에서 ‘비켜요, 비켜!’ 소리와 함께 인력거 한 대가
질주해온다. 세주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서면,
달려온 인력거, 세주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인력거 안에서 세주를 돌아보며 픽 웃는 사내(진오).
세주 ......!
사내를 태운 인력거가 안개를 몰아내며 지나간 듯,
어느새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며 나타나는 거리. 경성이다!
S#59 1930년대 경성 거리 (밤)
현대 복장 그대로 경성거리에 서있는 세주.
마치 타임슬립을 해왔거나, 소설 속 세상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당황스럽기만 한 세주인데,
일경 (E) 저쪽이다, 잡아!
소리에 돌아보면, 어디선가 뛰어나와 세주의 손을 탁 낚아채며
달려가는 사람. 바로 1930년대의 설이다!
세주 ! (놀라고)
설 아, 뭐해요, 빨리 뛰지 않고! 죽고 싶어요?
하며 세주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다.
세주 얼떨결에 설과 함께 뛰기 시작한다.
이때 세주의 호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보면, 예의 그 회중시계다! 멈칫 뒤를 돌아보는 세주.
설 아씨, 진짜. (얼른 되돌아가 회중시계를 주워 들고 와서는)
뛰어! 죽고 싶지 않으면 빛의 속도로 뛰라고!
설 다시 세주의 손을 잡아채서는 뛰기 시작한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두 사람! 옆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고 나면,
뒤이어 두 사람의 뒤를 쫓아 어디선가 달려 나오는 일경들!
S#60 1930년대 경성 거리 / 골목 일각 (밤)
세주의 손을 잡고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 숨어든 설,
긴장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더 달아날 곳이 없나 살펴보는데,
막힌 골목이다. 멀리서 달려오는 일경들의 발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에이씨, 낭패한 표정이 되는 설, 갑자기 세주를 벽에 확 밀어붙인다.
세주 (납작 벽에 붙여진 채 당황해서) 뭐...뭐야?
설 (강단 있는 눈빛과 말투로) 조국에 터럭만큼도 도움 안 되는
쓰레기 연애 소설을 계속 쓸 거면, 이렇게라도 조국에 도움이
될 일을 해봐.
하더니 갑자기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다.
숨어있던 설의 긴 머리칼이 흘러내린다.
그대로 세주의 목을 확 끌어당겨 입을 맞추는 설!
세주 ......! (심장이 쿵하며 그대로 얼어붙고)
입을 맞춘 채 계속 골목 입구를 주시하고 있는 설.
그때 골목 옆으로 달려 지나가는 일경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 중 한 명이 멈칫 서더니 다시 골목 안을 들여다본다.
키스 중인 두 사람을 발견하고 비식 웃고는 다시 달려가는 일경.
일경이 다 지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세주를 놓아주는 설.
설 (사심 없이 씩 웃으며) 조국을 위해 큰일 했네, 오늘.
세주 (당황스러운) 너....뭐....뭐야 대체.
설 (모자 쓰며) 뭘 또 순진한 척 수줍어하고 그래.
주색잡기에 이골이 난 양반이.
세주 (멍할 따름이고)
설 (호주머니에서 자신이 챙겼던 회중시계를 세주 손에 탁 쥐어주며)
이거나 챙겨요. 아버지 유품이라며.
세주 아버지 유품? (손에 쥐어진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며) 이게...
내 거라고?
설 뭔 헛소리야. 몰래 살림 차려준 애첩 다루듯 애지중지, 난 손도
못 대게 했잖아. 어쨌든 나 이걸로 목숨 구해준 값 했다?
(하며 뒤돌아서는데)
문득 설의 소매 끝으로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발견한 세주.
설을 잡아채서 돌려세운다. 놀라 안 그래도 큰 눈망울이
더욱 커지는 설.
세주 너...뭐 때문에 쫓기고 있었던 거야?
설 (세주의 손잡아 내리며) 무심하려면 끝까지 무심해. 괜히 몰라도
될 거 알아서 다치지 말고. (뒤 돌아가고)
세주 이봐! 잠깐만! 잠깐만!
설 (가다가, 뒤돌아보며) 오늘 일로 괜히 촌스럽게 사심 갖고 그러지
마요. 이건 그냥 혁명적 전술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적의 없이 밝게 웃으며 돌아서는 설의 모습이 슬로우 된다.
바라보는 세주의 심장이 쿵쿵 뛴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서,
S#61 세주의 저택 / 집필실 (아침)
집필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었던 세주가 번쩍 눈을 뜬다.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벽시계를 보면, 오전 9시 50분.
원고 마감 10분 전이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는 세주.
서둘러 노트북을 끌어당기다가 멈칫, 책상 위에 놓인 원고를
발견한다. 역시 타자기로 타이핑된 원고다.
세주 ......!
어떤 느낌에 떨리는 손으로 원고를 집어 들고 보면,
겉표지에 적힌 ‘연재소설 <시카고 타자기> 2주차 원고’.
천천히 원고를 넘겨보다가, 충격과 혼란으로 두 눈이 커지는 세주.
세주 (E) 이건...방금 내가 꿨던 꿈 내용이잖아...!
빠른 속도로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세주.
충격과 혼란이 점점 더 커진다.
세주 (다 읽은 원고를 멍...하니 내려놓으며, E) 대체...
뭐가...어떻게 된 거야 이게...
하는데 노크소리. 강비서가 들어온다.
강비서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작가님, 연재소설 원고, (하다가,
책상 위에 놓인 원고를 발견한다, 안심하며) 아, 이번에도
타자기로 작업하셨군요. 그럼 바로 타이핑을 해서 전송,
(하며 원고를 가져가려는데)
세주 (저도 모르게 원고 위에 탁 손을 올려 막는다)
강비서 (멈칫, 보는) 작가님?
세주 (멍한 채로, E) 내가 쓴 게 아니야...
강비서 작가님 뭐 수정하실 거라도....
세주 (E) 이건 내가 쓴 게.....
하며 천천히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보면,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빈 화면.
세주 (빈 화면 보며 눈앞이 아득해지는, E) 아니야....
강비서 (불안해서) 작가님.....?
세주 (흔들리는 눈빛으로 천천히....원고에서 손을 뗀다)
강비서 (이상하지만) 그럼 바로 타이핑해서 전송하겠습니다. (나가고)
알 수 없는 열패감과 자괴감에 두 눈을 질끈 감는 세주.
어느 순간 눈빛 매섭게 돌아오더니 벌떡 일어나 나간다.
S#62 황금거위 출판사 / 사무실 (아침)
지석 책상 앞에 앉아 지금 막 사온 테이크아웃 커피의 뚜껑을
열고 향을 음미하고 있다. 흡족한 표정으로 한 모금 마시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무서운 표정으로 들어서는 세주.
앗 뜨뜨뜨! 덴 입을 잡고 방정을 떠는 지석의 멱살을 다짜고짜
잡아채서 일으켜 세우는 세주.
세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형이지! 형이 그랬지!
지석 (켁켁대며) 뭐, 뭐가 인마!
세주 나 없는 사이에 유령작가 고용했잖아!
지석 (헉!) 그, 그거, 어떻게 알았어?
세주 !!! (절망했다가, 분노로) 하지 말랬지! 내가 쓴댔지! 어떻게든 내가
쓰겠다고 했잖아, 새끼야!!!
지석 (쩔쩔매는) 세, 세주야, 진정 해.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세주 누구야, 누구냐고 그게! 대답해!
지석 다 아,아, 알고 왔겠지만, 그래, 유작가한테 전화 한 번 했었어.
스페어타이어 하나쯤 대비해두자 싶은 심정으루다가. 근데 니가
원고를 이렇게 쑥쑥 잘 뽑아내는데 스페어타이어가 뭔 소용이야.
그래서 접었어. 진즉에 제안 철회했다고.
세주 (더욱 사납게 움켜쥐며, 무섭게) 접기는 개뿔!
지석 (울고 싶은) 진짜야아아--안 그래도 유작가, 지를 뭘로 만들었네,
사람을 가지고 놀았네, 길길이 날뛰는 거 돈으로 겨우 막아놨는데,
너까지 왜 이러냐 진짜. 너까지 이럼 나 정말 힘들다?
세주 (매섭게 노려보는)
지석 (거의 운다) 진짜야 세주야, 원한다면 유작가랑 삼자대면할 수도
있어. 지금 당장 전화해서 만날까? 응?
세주 (노려보다가, 멱살을 확 놓고 나가버리고)
지석 (켁켁켁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괴롭고)
S#63 달리는 세주의 차 안 (낮)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운전해 가고 있는 세주.
# 인서트 (37씬)
/지석 너 사고 나던 날 아침에 니가 직접 팩스로 보냈잖아!
/지석 그래 너님이! 집필실 팩스번호로! 올리라고 보낸 거 아니야?
거짓말은 아닌 거 같아 혼란스러운데, 언젠가부터 끼기 시작한
안개로 운전석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세주.
세주 (어쩐지 불안해지며, E) 또 안개다....
결국 위험을 느끼고 도로 일각에 차를 세우는 세주.
S#64 설산 앞 도로 (낮)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는 세주.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드러나는 설산의 풍경.
바로 자신이 사고를 당했던 곳이다.
세주 (E) 여긴 내가 사고가 났던 곳이잖아....내가 왜 여길....
하다가 멈칫 눈밭 위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는 세주.
방진 (E) 그 고장 난 회중시계?
S#65 대형서점 (낮)
신간 코너에서 건성으로 책을 고르고 있는 설이고.
책들을 정리하고 있는 알바생 방진.
설 (속상한) 어. 그걸 못 찾고 돌아온 게 영 마음에 걸리네.
방진 사막에서 바늘 찾기지, 눈 속에서 그걸 어떻게 찾아.
설 그니까. 사흘 내내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안 보이드라구.
방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주 오래된 물건엔 가끔 집념이 실리기도
한대. 일종의 자유의지가 생긴다는 거지.
설 아우 야, 무섭게 왜 그래.
방진 그 시계, 니네 아빠가 설산에서 주워 오신 거라며.
설 (끄덕끄덕) 응.
방진 거봐. 시계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 거야. 원래 있던 지 자리로.
설 (아아...) 너 다단계하면 디게 잘하겠다. 묘하게 납득이 되네.
방진 (응원에 힘 받아) 어쩜 원래 주인을 만나러 간 걸지도 모르고.
S#66 설산 눈밭 (낮)
눈 속에 파묻혀있던 회중시계를 꺼내들고 있는 세주.
설 (E) 원래 주인이 누군데?
S#67 대형서점 (낮)
설 그거 팔십 년도 더 된 물건이야. 원래 주인이 있다면,
가만 있어봐라, (손가락 꼽아가며) 십..이십..삼십...사십,,.
적어도 구십 다 된 노인이겠네. 노인이 어떻게 겨울산 등반을,
방진 (짜증) 아, 리얼리티 따지지 마. 원래 무속의 세계는 개연성으로
따질 수 없는 뭔가 그런 게 있는 거야. 암튼 포기하고 잊어버려.
어차피 그 고물 고장나서 가지도 않잖아.
설 (발끈) 그래도 하루에 두 번은 맞아.
방진 좋기도 하겠다. 그게 바로 니가 그 시계의 주인이 아니라는
증거야. 안돌잖아! 시계의 역할을 못 하잖아!
설 (발끈) 지금 이 시대의 흐름과 안 맞아서 그럴 수도 있지.
S#68 설산 눈밭 (낮)
회중시계를 들고 서있는 세주, 딸깍 뚜껑을 열어본다.
바늘이 멈춰있는 시계. 그 위로,
# 인서트
/설 이거나 챙겨요. 아버지 유품이라며. (60씬)
/설 여긴 우리 아빠 산장이야, 됐어? 그쪽 옮기다가 잃어버린 아버지
유품 찾으러 가는 길이고! (19씬)
세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위로)
# 인서트
/세주의 목을 확 끌어당겨 입을 맞추던 설! (60씬)
/돌부리에 걸려 휘청이던 설을 뒤에서 안듯이 잡아주던 세주.
그런 세주를 바라보던 설. (24씬)
과거의 설과 현재의 설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계바늘....!
멈칫해서 바라보는 세주. 그 위로 떠오르는,
설 (E)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돌아가야 돼요.
세주 (순간 회중시계를 와락 움켜쥔다)
S#69 세주의 달리는 차 안 (밤)
담담해진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 세주.
설 (E) 이겨내지 못하면 신은 그 능력을 거둬간대요.
S#70 세주의 저택 / 거실 (밤)
캄캄한 거실 안으로 들어서는 세주. 2층 계단으로 향하고.
설 (E) 저는 작가님이 신에게 능력을 뺏기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S#71 세주의 저택 / 2층 거실 (밤)
계단을 올라온 세주, 집필실의 문을 열려다가 멈칫 정지된다.
타닥...타닥...타다다닥...! 누군가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
순간 눈빛이 매서워지는 세주. 소리 죽여 천천히...작업실 문을
열어본다. 한 뼘만큼 열린 작업실 문틈으로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진오의 모습이 보인다.
세주 !!!
S#72 세주의 저택 / 집필실 (밤)
진오 어두운 공간에 촛불 하나만을 켜놓은 채 열심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다. 완전 몰입된 표정이다. 문틈으로 지켜보고 있던
세주, 조용히 집필실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몰입감이 깊어질수록
리턴 레버를 당기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빨라지는 진오.
그 소리를 긴장음 삼아 진오에게 접근해가는 세주.
마침내 타이핑을 마친 진오의 오른손이 마치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의 손처럼 허공으로 들어올려지는 순간,
세주, 진오의 어깨를 확 잡아 돌린다!
놀란 진오의 눈과 서늘한 세주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세주 (서늘한 표정과 위압적인 말투로) 누구야 너.
진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로 보기만)
세주 (잡아먹을 듯이 살벌하게) 너 누구냐고 새끼야!!!
진오 ......(여전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보시다시피....
한세주 작가님의 이름 뒤에 숨어 대필을 해주고 있는 유령작가,
(세주 너머 벽에 걸린 뭔가에 시선 잠깐 뒀다가) 유진오입니다.
인사를 마친 진오 여유롭게 씩 웃는다.
그런 진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세주에서.
-<시카고 타자기> 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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