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스물하나 2
[새가 지저귄다] [매미 울음]
[밝은 음악]
(재경) 어제 밤늦게까지 안 자고 뭐 했어?
방에 불이 계속 켜져 있던데
(민채) 아, 그…
그냥 뭐 좀 봤어, 잠이 안 와서
(재경) 어린잎은 두고 다 큰 것만 따
(민채) 응
[물소리가 후드득 난다]
근데 할머니랑 텃밭이랑 안 어울려
평생 제대로 된 살림을 안 해 봐서 그런지
(재경) 뒤늦게 이런 게 재밌네
옛날엔 그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민채) 동상도 있었지?
(재경) 어떻게 알아?
(민채) 어?
아, 그, 엄마한테 들은 거 같아
- 근데 할머니 - (재경) 응?
할머니도 옛날에 금 모으기 운동 그런 거 했어?
IMF 시대 때 했다고 학교에서 배웠거든
이제 그런 게 교과서에 나오나 보네
할머니도 했지
막 예물 같은 것도 진짜 다 팔았어?
결혼반지 같은 것도?
결혼반지만 빼고 다 팔았지
[재경이 물뿌리개를 툭 놓는다] 어? 결혼반지는 안 팔았어?
[피식 웃는다]
[민채의 옅은 탄성]
(재경) 지금 보면 촌스러워도 그땐 최고로 세련된 거였어
안 촌스러워, 엄청 힙한데?
(재경) 할머니는 마트 갈 거야
따라갈 거면 준비해
네
[카메라 셔터음]
[휴대전화 진동음]
[문이 달칵 열린다] [휴대전화 조작음]
[문이 달칵 닫힌다]
(중년 희도)
[한숨]
치, 반지 안 팔았는데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어젯밤에 괜히 불쌍해했잖아
[한숨]
(민채) 할머니 결혼반지 보면서 놀고 있음
관심 노, 노
뭐야, 반지 판 거 아니었어?
[밝은 음악] (중년 희도) 아유, 지겨워 신재경 여사
안 팔았으면 안 팔았다고 말을 하지
[힘주며] 이제 와서 사람 뻘쭘하게
[재경의 웃음]
(재경) 갑시다
(민채) 가요
[재경의 웃음]
나 이제 발레 안 하니까 콜라 사 줘, 할머니
[민채와 재경의 웃음]
[신문이 툭 떨어진다]
[힘주는 신음]
백이진!
백이진!
나 오늘 드디어 전학 가!
심지어 태양고로!
(희도) 나 펜싱 계속할 수 있게 됐어!
[피식 웃는다]
뭐야, 갔냐?
못 들었냐?
그래도 괜찮아
오늘은 다 용서할 수 있어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피식 웃는다]
축하해
[벅찬 숨소리]
(재경) 너 누구한테 소리치는 거야?
(희도) 어? 아니야
[문이 탁 닫힌다] 벌써 출근해?
전학 첫날인데 같이 가야지
학교에? 됐어, 나 혼자 할 수 있어
네가 혼자 한 게 뭐가 있는데?
뭐, 나이트 간 거?
아이… [한숨]
(재경) 저 동상 왜 저렇게 됐니?
네가 만졌니?
뭘, 내가 뭘 만져, 미쳤나 봐!
[한숨]
집에 음기가 세대서 들여놓은 건데
음양의 조화가 무너졌네
엄만 앵커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고 싶어?
그럼 이런 말을 집에서 하지 뉴스에서 하니?
[재경의 한숨]
(재경) 빨리 와
[대문이 덜컥 열린다] (희도) 아…
아, 나 학교 혼자 갈 수 있다고!
아!
(재경) 빨리 와
(교사1) 실물이 훨씬 좋으십니다
(재경) 화면이 워낙 뚱뚱하게 나와서 많이 억울합니다
[교사들이 살짝 웃는다]
(교사2) 와 목소리 진짜 멋있으세요
(재경) 아니요
(교사3) 워낙 바쁘신 분이라
우리 나희도 학생 혼자 올 줄 알았는데
(재경) 하나밖에 없는 딸 전학 첫날인데
당연히 뵙고 인사드려야죠
부족한 게 많을 겁니다
[희도의 한숨]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
(교장) 아이고, 이게 누구야?
신재경 앵커?
[웃으며] 아, 예 태양고등학교 교장입니다
(재경) 반갑습니다, 교장 선생님 신재경입니다
(교장) 아이고, 알죠, 알죠
이렇게 귀한 분이 오셨으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교장실로 모시겠습니다
- 네 - (교장) 예, 예
[재경이 가방을 탁 집는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재경이 살짝 웃는다]
- (재경) 가시죠 - (교장) 예
너 3학년 여자애들 사이에서
7반 이쁜이로 소문난 거 알아?
[한숨 쉬며] 그 소문이 이제 나네 [흥미로운 음악]
(학생1) 난 너 그 훨씬 전부터 지켜봤던 것도 알지?
(희도) 참 자기가 전학 왔지, 아주
(학생1) 내가 수능이 코앞인데 너 때문에 공부가 안 되거든
그냥 나랑 사귀자
내가 잘할게
(지웅) 누나 그냥 전 지금이 좋아요
(학생1) 너 거절하는 거 혹시 지승완 때문이야?
[살짝 웃으며] 너 지승완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
불알친구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아, 그런가?
그럼 승완이는 친구 아니고 제 종교예요
(학생1) 야, 문지웅
(지웅) 누나 전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팬이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팬이랑은 안 사귀어요
(희도) 어, 남녀 공학 열라 좋아
(교사3)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 지낼 나희도 학생이다
펜싱부여서 수업은 잘 못 들어오겠지만
서로 인사하며 잘 지내도록
(학생들) 네
(교사3) 소개해
안녕하세요, 나희도라고 합니다
[희도의 헛기침]
(교사3) 저기 빈자리 가서 앉고
(희도) 네
[희도가 가방을 탁 집는다] (교사3) 반장 책임지고 학교 소개해 주고
(승완) 네
- (교사3) 오늘 주번 누구지? - (학생2) 네
(교사3과 학생2) - 어, 이따가 시험지 가지러 와 - 네
(교사3) 수업 잘 들어
(학생들) 네
[학생들이 시끌시끌하다]
[흥미로운 음악]
[지웅의 힘주는 숨소리]
(지웅) 안녕, 전학생
네가 반장이야?
아니, 나 일진
이 학교 일진은 주로 뭐 하는데?
주로 이런 거 하는 거야
어, 전학생한테 말 걸고
그다음은 뭔데?
왕따, 삥 뜯기, 뭐, 그런 거야?
뭔 소리야?
말 걸었으면 친하게 지내야지
너 펜싱부면 고유림이랑 친해?
나 방금 전학 왔는데?
그럼 고유림이랑 친해질 생각 없어?
나 고유림 좋아하거든
고유림은 내가 더 좋아해
(희도) 넌 고유림의 뭘 좋아하는데?
기술?
스피드?
아니면 정신력?
이미지
(지웅) 어, 예쁜 이미지
[발랄한 음악]
[피식 웃으며] 응
맞아
진짜 완벽해
[희도의 웃음]
(승완) 문지웅, 자리로 돌아가
(지웅) 어
학교 소개, 가자
네가 반장이야?
어, 난 지승완이라고 해, 반갑다 [흥미로운 음악]
아, 쟤 불알친구?
[피식 웃는다]
[학생들이 시끌시끌하다]
(희도) 너는 왜 반장이 된 거야?
(승완) 반장 하기 싫어해서
원래 반장은 하기 싫어하는 애들이 되는 거잖아
(희도) 싫은데 됐다고?
(승완) 하기 싫은 애 시키면 재밌으니까
반장은 애석하게도 투표로 뽑잖아
(희도) 아니 자기들 잠깐 재밌자고
하기 싫다는 애 반장 뽑아서 1년을 고생시킨다고?
(승완) 그게 어때서?
1년 고생해도 잠깐 재밌었으면 된 거 아니야?
(희도) 뭐야 너 그릇이 되게 크구나?
(승완) 어디부터 갈까?
과학실, 미술실 이런 건
어차피 수업 잘 안 들어와서 몰라도 될 거고
화장실, 양호실 정도만 알려 주면 되나?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겠고
양호실은 1층에 있겠지, 뭐
(희도) 내가 진짜 궁금한 건 체육관에 있어서 난 먼저 가 볼게
고마웠다
(승완) 제일 중요한 걸 안 물어봤잖아, 나희도
매점은 체육관 가는 길 왼쪽에 있어
[밝은 음악]
(희도) 고유림 여기가 너의 세계구나
[희도의 가쁜 숨소리] 그리고 이제 나의 세계기도 하지
[희도의 신난 탄성]
(찬미) 내가 어제 다 얘기했제?
이쪽은 오늘부터…
고유림 와 안 보이노?
(예지) 어, 협회에서 급히 불러서 갔어요
올 때 됐습니다
(찬미) 스타라서 역시 공사다망하시구먼
그러면 예지, 니부터 각자 소개
네, 1학년 이예지라고 합니다
(한솔) 저는 1학년 박한솔이라고 합니다
난 3학년 이다슬
3학년 강지수
여보세요
안 하나?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선중여고에서 전학 온 2학년 나희도라고 합니다
[문이 덜컥 열린다]
(유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찬미) 어, 그래
죄송하면은 연습 경기는 니가 하자이
무슨 연습 경기요?
여기 전학생하고
실력은 봐야지
이름도 모르는 애랑 무슨 경기를 해요?
희도야
내 이름
나희도
너한테만 소개를 안 한 거 같아서
됐제?
(찬미) 인자 이름 알았으니까 경기할 수 있겠제?
나희도, 니한테는 적응 기간 3일 준다
3일 뒤에 고유림하고 붙어 갖고 이기면은
이거 돌리줄게
그걸 신으셨네요?
메이커잖아
[발을 탁탁 구르는 소리]
[부원들의 가쁜 숨소리]
[게임기 조작음] [게임기 작동음]
예지, 중심 낮차라
[희도와 유림의 가쁜 숨소리] (찬미) 다슬
건들리면 니 다시 인터벌이다이
[잔잔한 음악]
(희도) 내가 고유림과 같이 연습하고 있다
진짜 너의 세계에 왔어, 고유림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달칵 닫힌다]
[멀어지는 발걸음]
(희도) 저…
그, 부상은 괜찮아?
그, 발목 부상 있다고 인터뷰에서 봤어
그래서 대표 팀 훈련에서 잠시 빠진 거라고
[한숨]
[살짝 웃는다]
좀 신기하다
나 너 팬이거든
네 경기 하나도 안 빼고 다 봤어
너처럼 되고 싶어서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등신 같은 소리로 들려
[어두운 음악]
내가 너 같은 애들 한두 명 보는 줄 알아?
양찬미, 고유림이랑 같이 운동하려고 들어온 애들만
1년에 서너 명이야
근데 반학기도 못 버티고 다 나가
실력 차를 못 견뎌서
그런데도 양찬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너 같은 걸 자꾸 받아
왜 그런 거 같아?
(유림) 네가 잘해서?
가능성이 보여서?
우리 펜싱부에 필요해서?
그런 착각은 하지 마
펜싱부 한 명 늘 때마다
학교에서 떨어지는 예산이 달라져서 그런 거니까
그냥 너는 1인분의 예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있지
할 수 있다고 믿고 될 수 있다고 믿는 거
(유림) 아까 내가 네 이름이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애라고 했겠어?
이 좁은 바닥에서 내가 네 이름을 모를 정도면
그게 네 성적표야
그 성적표에 그런 믿음은
믿음 자체가 잘못이지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탁 닫힌다]
[풀벌레 울음]
[멀리서 개가 짖는다]
뭐야?
야, 백이현, 너 언제 왔어?
아니, 뭐, 형 이사했대서 한번 와 봤지
아, 근데 이런 데 사는 거야?
[이현의 탄성]
(이진) 야, 왔으면 벨을 누르지 왜 그러고 서 있어?
(이현) 아, 벨이 두 개인데 난 어느 게 형 건지 모르니까
하나는 주인집일 거고
그거 누르면 형이 혼날 거고
[한숨]
왼쪽이야 다음엔 기다리지 말고 벨 눌러
(이현) 응
근데 너 이거, 네 꼬라지가…
[이현의 거부하는 소리] (이진) 야, 봐 봐, 와 봐, 너
(이현) 헤어피스 몰라?
그냥 붙이는 거, 헤어피스
왜?
[잔잔한 음악] 나 봤는데
(이현) 아, 그 새끼들이 먼저 시비 걸었어
엇나가지 마, 형 부탁이야
(이현) 엇나갔었으면은
걔네랑 같이 놀았겠지
안 싸우고
왜 싸웠는데?
아, 몰라, 뭐…
뭐랬더라?
(이현) 집 망한 주제에 부자 흉내를 낸다나, 뭐라나
아, 쯧, 몰라, 몰라, 몰라
[이진의 한숨]
(이진) 진짜 집 망한 애한테 말이 심하네
다음에도 이런 일 있으면…
(이현) 이제 없어, 걱정하지 마
알아서 잘해
(이진) 고모는 잘 지내시고?
(이현) 응
형이 돈 보냈지?
[웃으며] 형 칭찬하시던데
(이진) 아휴, 그건, 쯧
형 취직하면 금방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 고모 말씀 잘 듣고 있어
네
근데 어디 가던 길 아니었어?
어, 나 유림이네 분식집
(이현) 응
[달그락거리는 소리]
[한숨]
[물소리가 솨 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유림 모) 어서 오세요
어머, 이게 누구야?
(이진) 잘 지내셨어요?
[유림 모가 놀란다]
(유림 모) 너 어디 있었어?
어디 있다 이제 왔어?
사모님도 연락 안 되고 너도 없는 번호라 그러고
[울먹이며] 부도났다는 뉴스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회장님은 무탈하셔?
사모님은?
다들 뿔뿔이 흩어지셔 가지고 연락이 잘 안돼요
세상도 무심하지
(유림 모) 좋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
어떻게…
유림이 지원 끊겨서 어떡해요?
죄송해요
[이진을 탁 치며] 너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우리 유림이가 누구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에이, 누구 덕이긴요 유림이 덕이죠
[피식 웃는다]
"한국 펜싱의 기대주 고유림 펜싱 첫 금"
[풀벌레 울음] [학생들의 웃음]
[학생들의 야유]
- (학생3) 아까비죠 - (학생4) 까비
(학생5) 저기요 공 좀 던져 주세요
[학생5의 힘주는 숨소리]
(학생들) 감사합니다!
[피식 웃는다]
[코를 훌쩍인다]
(이진) 잘 지냈어?
[한숨]
진짜 갈 거야?
유림아
[한숨]
아유
[입소리를 쯧 낸다]
한 번만 봐줘
[떨리는 숨소리]
나는 오빠한테 다 말했어
국가 대표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선수촌 생활이 얼마나 외로웠고
(유림) 국제 대회 준비가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발목이 계속 나가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근데 오빤 뭐야?
아니, 오빠한테 나는 뭐야?
[피식 웃는다]
웃겨?
웃음이 나오냐, 지금?
야, 너는 왜 키가 안 크냐?
(이진) 엄청 커 있을 줄 알았는데
- 어, 어디 갔어? - (유림) 씨
[이진의 아파하는 신음] (유림) 네 걱정 하느라 성장판이 다쳤다, 왜!
(이진) 아휴 [이진이 피식 웃는다]
미안해
[잔잔한 음악]
힘들었어
무서웠고
두려웠어
[입소리를 쯧 낸다]
[숨을 들이켠다]
지금도 그래
(유림) [이진을 탁 치며] 씨
[유림의 못마땅한 소리] [이진의 아파하는 신음]
괜찮다고 해야지
이렇게 나타날 거면
다 괜찮아졌다고 해야지
[한숨]
야, 안 괜찮다는 사람을 이렇게 패, 운동선수가
짜증 나
백이진 앞에서 질질 짜기나 하고
[유림이 훌쩍인다] [이진이 피식 웃는다]
[발소리가 들린다]
[유림이 훌쩍인다]
[발소리가 들린다]
[이진의 헛기침]
[이진의 힘주는 숨소리]
[이진의 한숨]
(이진) 하루에 두 번 피하면 나 상처받아
두 번 피하면 나 상처받는다고
고유림이랑 아는 사이더라?
거리감 느껴져서
(이진) 그걸 뭐 지금 이렇게 뭐, 이렇게, 어?
몸으로 이렇게 표현해 본 거야?
(희도) 나도 오늘부터 고유림이랑 같은 팀이야
안 놀라?
(이진) 네가 아침에 얘기해 줬잖아
[발랄한 음악]
(희도) 들었어?
(이진) 응, 대답도 했어
축하해
(희도) 난 전혀 못 들었어
(이진) [피식 웃으며] 이제 들었네, 그럼
(희도) 고마워
[동전이 잘그랑 떨어진다]
(희도) 앉아, 노인 공경
(이진) 잘 배웠다
[힘주며] 아유, 잘 배웠어
(희도) 고유림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혹시 사귀어?
야, 고딩은 고딩끼리 사귀는 거야
어른은 어른끼리 사귀는 거고
(희도) 그럼 고유림 왜 울었는데?
울린 거 아니야?
쯧, 뭐, 울렸지
(희도) 우는 거 처음 봤어
금메달 딸 때도 안 울었는데
원래 잘 울어
울 일이 많아, 걘
근데 그간 못 울었을 거야 울 데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뭐 네 앞에서만 운다 그런 얘기야?
그렇지, 누구와는 다르게
넌 거리 한복판에서도 울잖아
아씨
(희도) [엉엉 울며] 쪽팔려!
(희도) 아, 그건 내가 진짜 쪽팔려서, 진짜, 씨
그래서 좋았어
숨어서 우는 애가 아니라서
[버스가 끼익 멈춘다] [저마다 놀란다]
(여자1) 기사님!
(버스 기사) 아유, 미안합니다
[승객들이 투덜거린다]
순발력 좋았다 운동선수 해도 되겠다
야, 운동선수 아닌 사람은 뭐가 좋은지 알아?
다쳐도 되는 거
(이진) 앉아, 선수 보호
앉아
[풀벌레 울음]
[멀리서 개가 짖는다]
(승완) 안녕하세요
옆방 사시는 분 맞죠?
저 이 집 딸인데요
(이진) 아, 그 전교 1등이시라는…
[승완의 한숨]
저희 엄마 취미 생활에 당하셨네요
(승완과 이진) - 어쨌든 궁금한 게 있는데요 - 네
(승완) 항상 매일 아침 6시 50분에 샤워하시던데
무슨 이유가 있나요?
저 신문 배달 마치고 와서 씻는 시간인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집 구조상 그 방에서 물을 틀면
저희 집 욕실 물이 찔끔찔끔 나와요
(승완) 저는 학교가 멀어서 항상 그 시간에 씻는데
이사 오신 후로부터 매일 아침이 물 부족 국가예요 [흥미로운 음악]
뒤에 다른 일정이 없으시다면
15분만 늦게 씻어 주실 수 있나요?
예
(승완) 그럼 서로 행복할 거 같은데
수압은 행복이잖아요
아…
그러죠
(승완) 주인집 딸이랍시고 유세 떤다고 느끼실까 봐
저도 많이 망설이다가 말씀드리는 거니까
꼭 좀 헤아려 주세요
- 감사합니다 - (이진) 예
[옅은 한숨]
똑똑한 후배님이네 [문이 덜컥 닫힌다]
[새가 지저귄다] [매미 울음]
[예지의 하품] (예지) 안녕하세요
어, 예지, 안녕
(예지) 어, 안녕하세요
[감성적인 음악]
[지퍼를 직 닫는다] (희도) 그 애는
(예지) 아, 밥을 이렇게 크게 먹어야죠
(희도) 내 상상과는 전혀 달랐어 [유림과 한솔의 웃음]
(유림) 나도 크게 먹을 거야
(희도)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원들이 화기애애하다]
허락되지 않았어
[문이 쾅 닫힌다]
(희도)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는 거 알아?
그 표정이 자꾸 날 다치게 했어
[탁 치는 소리]
[거친 숨소리]
[풀벌레 울음]
[발소리가 요란하다]
(다슬) 스톱
너희 지금 뭐 하냐?
[가쁜 숨소리]
누가 허락도 없이 야간 훈련 하래!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야간 훈련 하면 안 되는 거야?
(희도) 왜 안 되는데?
[문이 덜컥 열린다]
[문이 쾅 닫힌다]
(희도) '그 애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건'
'싸울 때뿐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오히려 멀리서 지켜볼 때가
더 가까웠던 거 같아
[키보드 조작음]
(희도) 그 애를 동경했던 내 마음이
조금 가여웠어
[채팅 알림음]
[한숨]
[숨을 들이켠다]
[한숨]
[키보드 조작음] (희도) 우리도 실제로 만나게 되면 관계가 변할까?
[채팅 알림음]
[새가 지저귄다]
[발랄한 음악]
(희도) 어?
[문고리를 달칵거린다]
아니…
아니, 이게…
이 무슨 헛소리야 이 미친 수학 학원아!
이 무슨 자물쇠고 무슨 수학 문제냐고!
어, 어떡해
(이진) 1340
(희도) 어?
1340이라고, 안 급해?
(희도) 어
[희도의 다급한 숨소리]
1, 3
4, 오!
[놀라며] 진짜네?
오, 이걸 암산으로 푼다고?
짱이다, 멋있어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문이 탁 닫힌다] [피식 웃는다]
[문이 덜컥 여닫힌다]
(희도) 뭐야,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이진) 여기 4층 인터넷 카페
- (희도) 어 - 프린트할 게 있어서
(희도) 쫙 빼입고 어디 가는데?
나이트?
지금 너무 아침인데
면접 보러 간다
오
(이진) 너 왜 남의 화장실에다 신경질을 내고 있어?
(희도) 아니, 여기 내가
급할 때마다 자주 들르는 단골 화장실이거든
갑자기 자물쇠 걸어 놓고 사람 똥줄 타게 만들잖아!
제정신인가, 이씨
(이진) 학생들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게 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희도) 와 운동부 서러워서 살겠나 [발랄한 음악]
공부 잘하는 운동부 애들도 많은데
너 수학 못한다고 왜 전체를 깎아내려?
운동부라서 공부 못하고 맞춤법 틀리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
그냥 네가 무식해서지
(희도) 와
진짜 맞는 말 더럽게 잘한다
이래서 고유림이랑 친한가 보네
뭔 소리야?
고유림이 딱 너같이 정떨어지게 행동하더라고
내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씨
유림이 그런 애 아닌데?
웃기지 마
너는 고유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희도) 어, 나 빨리 가야 돼
몸 풀어야 돼, 오늘 중요한 날이야
갈게
[옅은 한숨]
(찬미) 승부는 정식 경기하고 같다
15점을 먼저 내는 쪽이 승리를 거둔다이
연습 경기라고 대충 하지 말고
각자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한다
알겠나?
(희도와 유림) 예
자, 준비
[긴장되는 음악]
[버저가 삐 울린다]
[숨을 후 고른다]
[희도의 기합]
(찬미) 앙 가르드
프레, 알레
[버저가 삐 울린다] [흥미진진한 음악]
아타크, 투슈 [버저가 삐 울린다]
네 터치는 좀 늦었다
[희도의 기합]
프레, 알레
[버저가 삐 울린다] 파라드, 투슈
[탁탁 소리가 울린다]
[버저가 삐 울린다]
투슈 [버저가 삐 울린다]
프레, 알레
[버저가 삐 울린다] 네가 못 쳤다, 유림이 승
알레
[버저가 삐 울린다] [찬미가 말한다]
[버저가 삐 울린다] [희도의 환호]
[버저가 삐 울린다]
[버저가 삐 울린다] [탁탁 치는 소리]
(찬미) 프레, 알레
[버저가 삐 울린다]
[버저가 삐 울린다] 희도 승
[유림의 가쁜 숨소리]
프레
알레
[버저가 삐 울린다]
아타크, 투슈
[유림의 가쁜 숨소리]
[희도의 거친 숨소리]
[유림의 거친 숨소리]
(심판) 알레 [관중들이 시끌시끌하다]
[무거운 음악]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
[버저가 삐 울린다]
[관중들의 환호]
(여자2) 쟤가 나희도지?
[가쁜 숨소리] (여자3) 쟤가 펜싱 신동이래
[여자2의 탄성] 천재래, 천재
(여자2와 여자4) - 그래? - 오늘도 나희도가 우승하겠네
(여자4) 아유 어떻게 1점을 못 내, 1점을 [여자들이 구시렁거린다]
[관중들의 환호]
다음에 잘하면 돼, 유림아
(유림 모)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나 무서웠어
(유림 모) 응?
뭐가 무서웠어?
(어린 유림) 나희도
겁이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어두운 음악]
[가쁜 숨소리]
앙 가르드
(찬미) 프레
알레
[강조되는 효과음]
[버저가 삐 울린다]
아타크, 투슈
[환호]
[희도와 유림의 가쁜 숨소리]
앙 가르드
[유림이 숨을 후 고른다]
프레
알레
[탁 소리가 울린다] [버저가 삐 울린다]
[유림과 희도의 가쁜 숨소리]
나희도 승
[버저가 삐 울린다] [밝은 음악]
[가쁜 숨소리]
어텐션
설루트
(찬미) 나희도
고유림을 이긴 기분이 어떻노?
꼴랑 연습 경기 한 판 이겼다고
제가 고유림보다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꼴랑 연습 경기 한 판에 엄청 겸손 떠네
야, 솔직해 봐라
이겨서 기분 좋긴 한데요
(희도) 그걸 이렇게 다 있는 데서 물어보셔야겠어요?
(찬미) 어
스포츠의 짜릿한 묘미가 이런 거잖아
승자와 패자가 지금 나란히 같은 공간에 있다 아이가
마음껏 기뻐하고 마음껏 좌절해라
그래야 다음이 있다이
나희도, 니 고유림에 대해서 공부했나?
연습 경기 때문에 공부한 건 아니고
원래 좋아하던 선수라 잘 압니다
고유림, 니는 왜 졌는 줄 아나, 오늘?
[한숨 쉬며] 그냥 못했습니다
(찬미) 아인데? 안 못했는데?
나희도에 대해서 몰랐지, 니가
성인 선수들이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는 상대가 누구인 줄 아나?
느그 같은 고등학교 선수들이다
알려진 정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뭐, 어떤 상대인지 도통 알 수가 없거든
니가 지난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데는
그런 이유도 작용했다
그라고 오늘 나희도가 니를 이긴 이유도
똑같다
나희도는 니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는데
니는 나희도에 대해서 모르잖아
[부스럭거리며] 이게 오늘 내가 니를 굳이
신입하고 경기를 붙인 이유다
고유림
니는 앞으로 모든 대회들이 점점 더 힘들어질 기다
왜냐?
스타일이 이미 탄로 나 뿠거든
그라고 아무 정보도 없는 나희도 같은 아들이
줄줄이 나타날 기고
더 열심히 해라
그라고 니 신발 가지러 오고
[유림의 한숨] [쓸쓸한 음악]
[희도의 한숨]
내가 말 걸면 안 좋아하는 거 같지만
진심은 전하고 싶어
(희도) 금메달리스트랑 처음 경기해 봤어
영광이었다
[유림의 한숨]
(유림) 넌 내가 왜 좋니?
(희도) 발이 빨라서 기술이 섬세해서
거리 조절에 탁월해서 공간을 잘 봐서
음악처럼 리듬이 좋고 춤추는 것처럼 우아해서
그리고
늘 이겨서
대답이 됐어?
아니, 틀렸어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 알아?
(유림) 싫어하려면 네가 못하는 걸 인정해야 되잖아
그걸 인정하느니 좋아하는 게 마음 편하겠지
야
웃기지 마
널 좋아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 네가 뭘 알아?
헛소리하지 말고 발목 부상이나 조심해
너 그거 때문에 아까 몸 사린 거 알거든?
"호텔"
[남자1의 한숨]
(남자1) 여기 뭐 하는 데인지 제대로 알고 온 거 맞아요?
예, 저, 호텔 룸 청소하는 직원 뽑으신다고…
[남자1의 어이없는 숨소리] (남자1) 그렇게 쫙 빼입고?
아, 면접이잖아요, 네
아무리 취업난이라도
여기서 일할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혹시 여기 노동자들 선동해서 노조 만들려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 안 마주쳐도 되는 일이라 지원했습니다
저 체력도 좋고 눈치도 빠릅니다
- 시켜만 주시면… - (남자1) 아, 아이
(남자1) 무슨 사정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룸 청소 시키는 데 이런 고학력 필요 없어요
저, 학교는 딱 2년 다닌 거고 복학도 못 할 거 같아요
고졸이나 다름없는…
[남자1의 헛웃음]
연대 공대 다니면서 고졸은 무슨
(남자1) 에이, 우린 이런 학력 필요 없으니까 [잔잔한 음악]
딴 데 알아보세요
[풀벌레 울음]
[대문이 덜컥 닫힌다]
(승완) 아까 어떤 남자가 찾아왔었어요
저를요?
네
뭐, 여기 청년 하나 살지 않냐고요
어디 갔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했어요
(승완) 집에 혼자 있었는데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문 두드리고
무서웠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한숨]
[학생들이 시끌시끌하다]
(승완) 하이
(지웅) 하이
(승완) 울 엄마가 반찬 통 갖다 달래
(지웅) 응, 안 그래도 엄마가 갖다주라고 챙겨 줬는데
까먹었어
엄마들은 왜 반찬 통에 집착을 할까?
[캠코더 조작음]
(승완) 근데 아침부터 뭐 찍어?
(지웅) 아, 이거 우리 밴드부 뮤직비디오
(승완) 아, 그거 아직 안 끝났어?
지금 편집 중인데
내가 기깔나는 촬영 기법을 생각해 냈거든
씁, 어떤지 확인해 보려고
[흥미로운 음악]
(승완과 지웅) 가위바위보!
[지웅의 힘주는 신음] (승완) 가위바위보, 보!
나이스!
[승완의 기뻐하는 숨소리] [지웅의 한숨]
[한숨 쉬며] 맛있어?
맛있긴 뭘 맛있어
네가 아는 그 맛이지
[한숨]
(승완) [봉지를 탁 놓으며] 촬영 뭔데? 봐 줄게
[학생들이 시끌시끌하다]
[흥미로운 음악]
[큰 소리로] 얘들아! 10초만 지나갈게
(지웅) 길 좀 터 줘
[날렵한 효과음]
[피식 웃으며] 좋네
[끼익 멈추는 효과음]
[한숨 쉬며] 깜짝이야
우리 서로 민첩했다
(지웅) 역시 고수와 고수가 만나서 사고를 면할 수 있었네
우리 같은 반인 거 알아, 고유림?
모르는데?
우리 2학년 7반 같은 반이고
내 이름은 문지웅이야
아, 너구나, 7반 이쁜이가
그렇지
(유림) 근데 별로 안 예쁜 거 같은데
하는 짓이 예뻐
[황당한 웃음]
(유림) 아… [발랄한 음악]
차차 보여 줄게, 기대해
위험하니까 안쪽으로 걸어
[유림이 살짝 웃는다]
(학생6) 오, 문지웅이! [학생들의 탄성]
(학생7) 야, 뭐야, 문지웅 둘이 뭔데 [학생들이 웅성거린다]
- (학생6) 사귀는 거야? - (학생7) 둘이 뭔데? 어?
(찬미) 고유림 이깄으니까 이거, 올인한 거 찾아가야지
네
잘했다, 니
쌤 말씀대로 고유림을 잘 알아서 이긴 거예요
그것도 딱 한 번 우연히
우연히?
(찬미) [파일을 탁 닫으며] 하, 참, 야가요
고유림을 억수로 얕보네?
고유림을 우연히 이긴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도 무려 국제 대회에서
근데 니가 뭔데 고유림 이긴 걸 우연이라 하는데?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찬미) 니 스스로 후려치지 마
쪼까내 뿐다
나 그런 아 딱 질색이다
네, 알겠습니다
야, 완벽한 선수를 이깄다는 거는
그 선수보다 뭐 한 가지는 더 완벽했단 얘기 아이가?
뭐가 더 완벽했을꼬?
잘 모르겠습니다
힘
[밝은 음악]
밥 잘 묵고 다녀라, 계속
네
(찬미) 이거 심부름
방송실 좀 갖다주고
(희도) 네
(찬미) 밥 묵고이
네
[웃음]
[문이 달칵 열린다]
[피식 웃는다] [문이 달칵 닫힌다]
아이고
[희도가 똑똑 노크한다]
(희도) 저기 이거 펜싱부 코치 쌤이…
어? 너 방송부였어?
어
아, 펜싱부 연혁이지?
(희도) 어, 코치 쌤이 갖다주라고
(승완) 고마워
(희도) 나 방송실 처음 들어와 봐
(승완) 구경해
그래도 돼?
와, 이건 다 뭐야?
(승완) 아, 역대 점심 방송 녹음본
1991년 것까지 있네?
와, 이런 걸 다 모아 두다니 진짜 살아 있는 역사다
방송부가 원래 전통 같은 거에 목매는 걸 좋아해
(승완) 꼰대들이 많아서 군기도 세고
(희도) 어? '백이진'?
백이진 선배 알아?
어, 알긴 하는데
그 사람이 이 사람인진 모르겠어
들어 보면 되지
(승완) 나도 얼굴은 한 번도 못 봤는데
이 선배 되게 유명했대
잘살고 잘 놀고 잘생기고
그래서 인기 많고
[카세트 플레이어가 달칵 열린다]
"재생"
[카세트 플레이어 작동음]
[녹음 소리가 커진다] (녹음 속 이진) 푸르른 계절
5월은 청춘의 계절이라고 하죠
무성하게 우거질 준비를 하는 옅은 녹음들 [피식 웃는다]
내가 아는 백이진 맞네 [녹음 속 이진이 계속 말한다]
그래? 아는 사이구나
진짜 잘생겼어?
목소리는 잘생겼는데
(희도) 근데
지금이랑 목소리가 많이 다르다
(녹음 속 이진) 바로 중간고사가 끝났습니다
이때는 목소리가 엄청 밝다
(녹음 속 이진) 음 만족스러운 사람도 있고
낙담한 사람도 있겠지만 [잔잔한 음악]
중요한 건 우리의 인생이
이 중간고사 하나로 결정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죠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중간고사가 끝났고
드디어 축제가 다가온다는 거죠
(이진) 태양고, 이제 즐깁시다
좀 낭비합시다
우리에겐 낭비할 청춘이 너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첫 곡입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교내 밴드죠
밀림의 왕자가 부릅니다
'Starlight'
[밝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 소리가 커진다]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 [밝은 음악이 연주된다]
"음악 축제"
(학생8) ♪ 난 지금 ♪
♪ 널 향해 달려가고 있어 ♪
♪ 숨이 턱까지 차올라 ♪
♪ 괜찮아 ♪
♪ 잠시 후 널 마주할 생각에 ♪
♪ 가슴이 ♪
[밝은 음악]
[벅찬 탄성]
(이진 부) 자, 대학 입학 선물이다
(이진) 어휴
[이진 부의 웃음]
- (이진) 근데 아버지 - (이진 부) 응
(이진) 저 독일 차 사 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서울대 갔을 때지
못 갔잖아
응, 그렇지, 못 갔지
[이진 부의 웃음] 근데 그게 뭐 나 너무 행복해, 아빠!
[가족들의 웃음]
(이진 모)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어, 백이진
(이진) 감사합니다 [차 키가 달칵거린다]
[이진의 힘주는 신음] [이진의 벅찬 숨소리]
[이진의 탄성]
보자, 보자 [달그락]
어유, 어유
[이진과 이진 부의 웃음]
후, 보자, 시동을 한번…
[자동차 엔진음이 요란하다]
(여자5) 저기
전화받아
[헛웃음]
(앵커1) 정부는 어젯밤에 국제 통화 기금 IMF에 [어두운 음악]
200억 달러의 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 했습니다
[풀벌레 울음] (앵커1) 이에 따라서 국제 통화 기금 실사 팀이
내일 서울에 옵니다
(이진 모)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
아무리 그래도 이혼이라니요
[울먹이며] 전 못 해요!
(이진 부) 나 때문에
당신까지 빚더미에 앉게 할 순 없어요
말 그대로 위장 이혼이에요
(이진 모) [흐느끼며] 아이, 싫어 난 못 해, 안 해!
(이진 부) 여보 우리 조금만 버팁시다, 응?
내가, 내가 최선을 다해 볼게요
[이진 모가 흐느낀다]
이현아
우리 가족은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 할 거 같다
곧 고모가 데리러 올 거야
고모 집에서 잠깐만 지내고 있어, 알았지?
(이현) 네
(이진 부) 빚은 어떻게든 해결할 거니까 너무 걱정 마라
네
(이진 부) 네 엄마는 포항으로 갈 예정이고
나는 군산으로 갈 예정이다
저, 저는 어디로 갈 예정…
[비장한 음악] (군인) 하나, 둘, 하나, 둘
(군인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비장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하나, 둘, 셋, 넷
(군인) 제자리에서!
(중대장) 백이진
이병 백이진!
- (중대장) 열외 - (이진) 열외!
(군인) 구보 준비!
뛰어!
집에서 연락 왔다
아버지 회사
부도 처리 됐다는데…
[무거운 음악]
(앵커2)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한보철강이 그동안 얻어 쓴 빚은…
(앵커2) 우리나라 최대 여행사인 온누리여행사가
오늘 최종 부도 처리 됐습니다
(앵커2) 금융 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오늘 부도를 냈습니다
(대대장) 지금은 조국 말고 가서 네 가정을 지켜라
그게 조국의 명령이다
할 수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스위치 조작음]
[버튼 조작음]
(녹음 속 이진) 지금은 부재중입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삐 소리가 흘러나온다]
(녹음 속 여자6) 안녕하세요 태경물산입니다
저희 태경물산 신입 사원 채용에
응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백이진 씨는 아쉽게도 불합격하셨습니다
다음엔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삐 소리가 흘러나온다]
[스위치 조작음]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달칵 닫힌다]
[물소리가 솨 난다]
(희도) 사장님, 안녕하세요
(대여점 주인) 어
(희도) 아르바이트생은요?
(대여점 주인) 오늘 손님이 없어서 일찍 보냈지
- (희도) 어… - 왜?
줄 게 있어서요
(대여점 주인) 집으로 가 봐
아
가는 김에 이것도 좀 전해 주고
놓고 갔다고
집이 어딘데요?
[멀리서 개가 짖는다]
[종이가 바스락거린다]
(희도) 우회전해서 세 번째
(남자2) 네 아버지 어디 있어!
모른다고 잡아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지금!
[울먹이며] 네 아버지 때문에 집 팔고 전세 구할 돈도 없어서
월세로 나앉았어!
네 아버지가 조금만 해결해 줘도
[남자2가 가슴을 탁탁 친다]
숨통이라도 트일 수 있단 말이다
[떨리는 숨소리]
정말 저도 어디에 계신지 잘 모릅니다
(남자3) 우리 같은 사람들 찾아올까 봐 안 알려 준 거지
아휴, 젠장
여기도 답 없어요, 그냥 갑시다 [남자2의 한숨]
아, 가족들한테 피해 안 주려고 위장 이혼까지 한 양반인데
이 집도 풍비박산이지, 뭐
참
그렇게 아끼던 장남 단칸방에 넣어 놓고 [무거운 음악]
백 회장이라고 이러고 싶어 이러겠어요?
(남자2) 그럼 우린 어쩌라고?
- 우리 가족은 어쩌라고! - (남자3) 아휴, 참…
[남자3의 한숨]
제가 빨리 취업해서 월급 나오는 대로 조금씩…
(남자2) 월급쟁이가 어느 세월에 그 돈을 다 갚느냔 말이야!
[이진을 탁 잡으며] 내 자식새끼는 고3이라
대학 가겠다고 불철주야 공부하는데
난 등록금 내 줄 돈이 없어
걔 공부하는 모습만 보면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남자3의 한숨]
'수능 잘 못 봐서 1년만, 1년만 시간 주면은'
'어떻게든 해 볼 텐데!'
그런 생각 해
[흐느끼며] 자식새끼 실패를 바라고 앉은 아비라고
[탁탁 치는 소리] 내가 지금!
그런데 넌
두 다리 뻗고 지금 잠이 오냐? 어? 어?
[버럭 하며] 어? 잠이 와?
- (남자3) 아유, 아, 그만해 - (남자2) 야!
(남자3) 애한테 그러면 뭐 해요 그만해 [남자2가 흐느낀다]
정말 죄송, 죄송합니다
(남자2) 야! 죄송하면 다야? 어?
(남자3) 아이고, 좀
아유, 애한테 이래서 뭐 해 아, 좀
아유, 놔, 놓고, 놓고…
(남자2) 대체 이걸 어떻게 할 거야
[떨리는 숨소리]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죄, 죄송합니다
대신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게요
[울먹이며] 아저씨들 고통 늘 생각하면서 살겠습니다
[떨리는 숨소리]
정말, 정말 죄, 죄송합…
정말, 정말, 정말 제가
어떤 순간에도 정말
어떤 순간에도 정말 행복하지 않을게요
정, 정, 정말 죄송, 죄송합니다
[남자2가 흐느낀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2가 오열한다]
(남자3) 갑시다, 가, 가요
아, 됐어, 됐어
애한테 얘기해서 뭐 할 거야
가, 아유, 빨리
아, 여기서 이러면 답이 나와?
아유, 아유
아유, 괜찮아
[이진의 떨리는 숨소리]
[차분한 음악]
나는
돈
갚으러 왔어
만화책값 3천 원
[떨리는 숨을 고른다]
돈 말고 다른 걸로 해 줘라
보다시피 지금은 돈 얘기가 싫어서
[멀리서 개가 짖는다]
(슈퍼 주인) 야, 맛있게 먹어
- (희도) 감사합니다 - (슈퍼 주인) 응 [슈퍼 주인의 웃음]
(희도) 응
이제 2천 원 남았어
(이진) 다음에 또 사 줘
(희도) 그래
아, 이거
책 대여점 사장님이 놓고 갔다고 갖다주랬어
(이진) 그냥 버려 줘라
딱 세 글자 쓰여 있던데
'제 꿈은'
그다음은 뭐야?
(이진) 뭐라고 써야 될지 몰라서 버리려던 거야
꿈 얘기로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서
꿈이 없어?
네 꿈은 뭔데?
나?
엄청 큰 꿈이 있지
고유림 라이벌 되는 거
[한숨]
나도 꿈이 컸어
내 꿈은 심지어 저 위 우주에 있었어
(희도) 우주?
(이진) 응 나사에서 일하고 싶었어
(희도) 아
[멀리서 개가 짖는다]
(이진) 아휴, 뭔지 모르는데, 지금
[이진이 입소리를 쯧 낸다] (희도) 알거든?
막, 그, 우주선 만들고 우주 가고 막 그런 거잖아!
(이진) [한숨 쉬며] 그런 일도 하지, 쯧
근데 나사면은 미국에 있는 거 아니야?
영어도 잘했나 보다
진짜 공부 잘했나 보다
(희도) 막 수학 문제도 잘 풀고
훈계도 잘하고 똑똑하고
그래서 그렇게 인기가 많았나 보네
백이진 선배
(이진) 무슨 인기?
(희도) 태양고 나왔던데?
방송부 애가 그러더라
너 인기 많고 유명했다고
나 오늘 방송실 갔다가 너 옛날에 방송한 거 들었거든
[희도가 피식 웃는다] [희도가 코를 훌쩍인다]
(이진) 그걸 왜 들었어?
그 백이진이 내가 아는 이 백이진인가 싶어서
근데 다른 사람 같았어
[희도가 코를 훌쩍인다]
앞으로 어떤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백이진과는
다른 사람 같더라
[잔잔한 음악]
[이진의 한숨]
너무 함부로 말했나?
난 네가
뭘 함부로 해서 좋아
너 보면 내 생각이 나
열여덟의 나 같아
돌아가고 싶어?
절실히
뭐가 제일 그리운데?
그냥
그때의 걱정들이 그리워
(이진) 뭐, 숙제가 너무 많고
방송부 선배들이 너무 무섭고
축제 때 무대에서 실수할까 봐, 뭐
좋아하는 여자애가
나 안 좋아할까 봐
뭐, 그런 걱정들
[피식 웃는다]
[희도가 숨을 들이켠다]
(희도) 나랑 어디 좀 가자
늦었는데 어딜 가?
(희도) 빨리!
언젠 내가 뭘 함부로 해서 좋다며
가자
가자!
(이진) 여긴 왜?
이제 너희 학교도 아니잖아
(희도) 태양고는 안 되고 여기는 되는 게 있어
(이진) 뭔데?
(희도) 엄청 신나고 행복한 거
[희도의 웃음]
[희도가 코를 훌쩍인다]
[희도의 웃음]
잘 봐
[희도의 신난 탄성]
(희도) [웃으며] 어때? 신나지?
기분 엄청 좋아지지 않아?
나 이거 보고 있으면 행복해져
[아련한 음악]
왜? 별로야?
하나 갖곤 별로 안 행복한데?
[이진이 수도꼭지를 탁 돌린다]
[웃음]
[웃음]
(희도) 역시 어른은 스케일이 다르구나?
이걸 다 튼다고는 생각도 못 했어
[희도의 웃음] 이제 좀 신이 나네
좀 신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니까
너무 행복하지 않아?
[희도의 웃음]
[행복한 탄성]
[코를 훌쩍인다]
[이진의 힘주는 숨소리] [희도의 비명]
[희도의 웃음]
너, 씨!
(경비원) 거기, 뭐 하는 거예요!
[희도가 당황한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희도)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진) 야, 뭘 '죄송합니다'야
[웃으며] 이럴 땐 빨리 도망가야지 [희도가 당황한다]
(경비원) 아, 거기 서요!
거기 서라고!
[희도의 웃음]
[물소리가 울린다]
[희도의 웃음]
[이진의 가쁜 숨소리]
(이진) 아, 야, 그만…
[이진의 가쁜 숨소리]
[희도의 웃음]
(희도) 아, 이게 무슨 짓이야 웃겨 죽겠네
아, 그만 달리자는데 왜 자꾸 달려?
이게 뭐야, 다 젖고 숨차고
그래도 재밌었잖아
[희도의 가쁜 숨소리]
(희도) 우리 가끔 이렇게 놀자
(이진) 싫은데? [희도의 웃음]
싫어도 해
선택지 없어, 해야 돼
왜?
네가 그 아저씨들한테 그랬잖아
앞으로 어떤 순간도 행복하지 않겠다고
(희도) 난 그 말에 반대야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근데 너는 이미 그 아저씨들한테 약속했으니까
이렇게 하자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해지는 거야
둘이 있을 땐 아무도 몰래 잠깐만 행복하자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말소리가 울린다]
[바람이 솨 분다] [풀벌레 울음]
(희도)
(희도)
(희도)
[힘찬 음악]
(승완) 그 선배랑 무슨 사이야?
글쎄?
(이진) 네 첫사랑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건데
설레는 일 아니야?
(이진) 야, 야, 야, 힘 빼 봐
아이, 진짜, 야, 얘들아
야, 야, 진짜 부탁할게, 미안해
(찬미) 시대가 니를 돕는다 나희도
(희도) 카운터 내가 볼 테니까 나오지 말고 숨어 있어 [이진이 당황한다]
(유림) 나 걔 싫어
(이진) 그건 좀 유치한데?
(희도) 내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과
거리 조절에 실패했어
딱 그만큼 이제 미워할 수 있을 거 같아
(이진) 넘어져서 발목이라도 나가면 어떡할 뻔했어?
얼마나 뛰어다녔길래 이 동네까지 와서 이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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