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관 구해령 15
[의미심장한 음악]
[문이 달칵 열린다]
(해령) 임오일, 도원 대군이 대조전에 들어 왕과 독대를 하다
(이림) 지금 의금부에서 찾고 있는 사람은
접니다
제가 이양인을 도왔습니다
그동안 제가 그자를 숨겨 주었고
제가 그자를 궐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니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어찌 이 나라의 대군이라는 놈이 서양 오랑캐와 붙어먹을 생각을 해?
[코웃음]
(이태) 역시 네놈은 태생부터 잘못되었어
아무리 대군 옷을 입고 대군인 양 살아가도
썩어 빠진 뿌리는 어쩔 수가 없는 게야
궁궐로 가야겠다, 채비하거라
(귀재) 예, 대감
[문이 달칵 여닫힌다] [옅은 한숨]
[풀벌레 울음]
(이태) 어째 날이 갈수록 고집만 더해져?
됐다는 사람을 기어코 술자리에 불러내니, 원...
(익평) 신이 박정한 탓에 벗이 많이 없습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태의 헛기침]
(익평) 한잔 올리겠습니다
(이태) 나는 됐네
오늘은 속이 영 편치가 않아
자네가 받지
(익평) 괜한 술기운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할까
저어하시는 건 아닙니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내가 자네에게 못 할 말이 무어가 있다고?
그렇다면 꺼리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혹 도원 대군에 대해 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으신지 여쭤봤습니다
[옅은 한숨]
취중에는 천자도 보이질 않는다더니
어디서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해?
(이태) 아직 부족하여 세상에 내놓지도 못한 자식일세
남들에게 흉을 잡힐까 염려하여 안으로 감추고 도는 아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곡해해서야 되겠는가?
[옅은 한숨]
(이태) 그렇지 않아도 그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면 근심뿐이야
자네까지 나서서 얹지 말게
괜한 걱정이십니다
신이 보기에 도원 대군마마는 가히 용종을 물려받은 장부이십니다
[흥미진진한 음악]
어명까지 거역해 가며 이양인을 비호하고 금군을 따돌리시니
어찌 그런 배포와 기질을 필부의 것이라 하겠습니까?
이제 그만 도원 대군을 품에서 놓아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긴 침묵이 소문을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
[한숨]
[매미 울음]
[새가 짹짹 지저귄다]
(설금) 아, 좀 이리 비켜 봐요, 좀
아, 좀 이거 아주... [설금의 못마땅한 신음]
- (해령) 설금아 - (설금) 네
(해령) 내 책 좀 한 장만 넘겨 줘
(설금) 아이고
아주 싸리 밭에 개, 어? 개 팔자가 따로 없네
정말 옷도 안 입고 계속 이렇게 누워만 계실 겁니까, 하루 종일?
야, 이 얼마 만의 휴일인데 이런, 이런,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니?
아무것도 시키지 마
나 오늘 사직동 한량 구해령으로 살 거니까
[답답한 신음]
(설금) 한량도, 응? 하루 한 번은 일어나서
마당을 걷거든요 [설금의 못마땅한 신음]
아, 좀 앉아서 보세요 [설금의 힘주는 신음]
아, 이따가 어깨 아프다고 주물러 달라고 하지 마시고
(해령) 아야,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설금의 힘주는 신음]
아, 아, 무슨 잔소리가 양 봉교님 급이야, 아... [설금의 한숨]
[해령의 한숨]
(설금) 눕지 마세요
[설금의 힘겨운 신음]
[해령의 지친 신음]
[돌멩이가 톡 날아온다]
[돌멩이가 톡 날아온다] [해령의 못마땅한 신음]
(해령) 아!
[화난 숨소리]
[설레는 음악]
[멋쩍은 신음]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쉬는 날이라며?
해서 오늘은 내가 입시를 왔다
안에 누구 없지?
[해령의 당황한 신음]
(해령) 여인의 방입니다 이 훤한 대낮에 어딜 들어오시려고요?
하면 밤에 다시 오라는 뜻인가?
[해령의 옅은 웃음]
오십시오
(해령) 저,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문이 달칵 열린다] [해령의 긴장한 헛기침]
(해령) [피식 웃으며] 아니,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
처음 오시는 것도 아니면서
(이림) 소감이 다르질 않으냐?
그때는 구 서리의 방이었고
지금은 내 여인의 방인데
- '내 여인'요? - (이림) 아니야?
넌 나한테, 난 너한테 뭐, 그런...
글쎄요
아직 서로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조금 시기상조 아닌가?
뭘 어떻게 해야
적당한 때가 되는데?
[헛기침]
이렇게 하면?
아니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음악]
(해령) 쓰읍, 오늘따라 태도가 상당히 불량하십니다
무슨 작정이라도 하고 오신 것처럼요
작정했다면 어쩔 것이냐?
어쩌긴 뭘 어찌합니까?
문 잠가야지
매일 만났으면 좋겠다, 이렇게
궐이 아닌 곳에서
사책도 관복도 없이
사관도 대군도 없이
그냥
이렇게
(해령) 여기 뒷산에 씁, 그 경치 좋은 곳에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전혀 다니질 않아서
호랑이가 나타나든 천둥이 치든
아무도 모르는 곳인데...
[옅은 웃음]
(은임) 성 검열님은 아직도 안 오신 겁니까?
벌써 사시가 다 돼 가는데
(시행) 있어 봐, 걔가 뭐, 누구처럼 술 처먹고 뻗었다고 지각할 애냐?
사정이 있나 보지
(아란)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길래 연통 하나 없냐는 말입니다
지난번엔 열이 펄펄 끓는데도
기어코 입궐해서 쓰러지셨잖습니까?
(시행) 쩝, 그건 또 그러네?
제가 댁에 좀 다녀와 볼까요?
(우원) 그럴 필요 없다
- (우원) 김 검열! - (치국) 예?
(치국) 아, 아, 예
쟤는 또 왜 저렇게 쌩하니 찬바람이야?
(이진) 조만간 그 처결에 대한 판부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형신을 멈추라 이르세요
(도승지) 예, 저하
이번엔 예문관 봉교 민우원이 올린 상소이옵니다
'신 예문관 봉교 민우원은'
'예문관 검열 성서권의 탄핵을 청합니다'
[어두운 음악]
'검열 성서권은 사사로이 사책의 내용을 발설하여'
'엄중한 사관의 신의를 저버리고'
'순숙한 예문관의 사명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 주십시오'
(우의정) [당황하며] 이, 이게 무슨...
아니, 어찌 사관이 사관을 탄핵해?
(부제학) 계속해서 읽어 보십시오 정확한 죄목이 뭡니까?
(도승지) 아, 이게 끝입니다
(우의정) 뭐?
(대제학) 민 봉교, 자네가 직접 말해 보시게
뭐가 어찌 된 일인지 알아야
탄핵을 하든 벌을 내리든 할 거 아닌가?
민 봉교의 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진) 검열 성서권의 직첩을 거두고
도성 밖 500리에 유배를 보내도록 하세요
(대제학) 하오나, 저하, 죄목도 모르고 어찌 탄핵 여부를 결정하신다는 말입니까?
적어도 누구한테 무슨 내용을 발설했는지는...
(이진) 하면 이 자리에서 민 봉교가
사책의 내용을 줄줄 읊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오?
[긴장되는 음악]
사책의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도
사책을 발설하는 것만큼이나 중한 죄입니다
하니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다음 상소를 읽으세요
[대제학의 다급한 숨소리]
- (대제학) 어, 어, 양 봉교 - (시행) 어, 문형 대감
(대제학) 아이, 인사는 됐고
그래, 어서 말해 보시게
성 검열이 발설했다는 사책의 내용이 뭔가?
(시행)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허, 같은 예문관 식구끼리 거, 모른 척은...
민 봉교가 올린 성 검열에 대한 탄핵 상소 말이야
(대제학) 자네는 죄목이 뭔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은임) [작은 소리로] 탄핵?
아니, 아,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가, 누가 뭐를 올려요? 탄핵 상소?
[문이 달칵 여닫힌다]
(시행) 야, 민 봉교!
너, 너 그게 사실이야?
네가 성 검열 탄핵 상소를 올렸다고?
다 듣고 오는 길이야 빨리 대답해, 인마!
(우원) 예
제가 성 검열의 탄핵을 청했습니다
[시행이 씩씩거린다]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장군) 이유가 뭡니까? 대체 성 검열이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논하는 것은 금하셨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장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멀쩡한 애 앞길 망쳐 놓고?
(길승) 일단 얘기 좀 들어 봐
민 봉교님이 아무 이유 없이 그랬겠어?
(홍익) 아무리 이유가 있어도 이건 아니죠
지난번 구 서리 잡혀갔을 때는
지부 상소에 파업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시더니
정작 성 검열 문제는 쪼르르 달려가 탄핵입니까?
같은 한림끼리 비겁하게...
(경묵)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다, 너는
탄핵 상소에 이름 오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뻔히 알면서!
(장군) 저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갑니다
대전 앞에 가서 시위라도 합시다!
소용없다
아무리 화를 내도
성 검열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 (장군) 민 봉교님! - (우원) 업무에 복귀하거라
(경묵) 저게 끝까지 혼자 꼿꼿한 척이야
[큰 소리로] 어디 무서워서 너랑 같이 일하겠냐?
[의미심장한 음악]
(해령) 저, 민 봉교님
[해령의 한숨]
녹서당 일 때문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밖에 없어서요
성 검열님이 녹서당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걸
누군가한테 발설하신 거죠?
그래서 천주학 죄인들이 풀려난 거죠?
듣지 못했느냐?
더 이상 저하께서 이 일을...
(해령) 그럼 저도 벌을 주십시오
성 검열님의 죄목이 어명을 거역하고 사람을 살린 잘못이라면
저도 같은 벌을 받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녹서당에 이양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입을 다문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다른 것이다
넌 사관으로서 책무에 충실했고
성 검열은 그 이상의 행동을 했어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뿐 어쨌거나 같은 목적이었습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 차이가 얼마나 중대한지?
사책은 양날의 검이다
사관이 사책을 이용해 무고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사책을 이용해 무고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원) 해서 그 어떤 선의로도 사책이 무기로 쓰여서는 안 돼
그것만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되는 원칙이야
내 말 이해하느냐?
[우원의 깊은 한숨]
아니요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원칙이 사람보다 우선일 수 있는지요
입시 다녀오겠습니다
[저마다 숨을 하 내뱉는다] (경묵) 어유, 불쌍한 놈
민 봉교 말이라면 공자, 맹자보다 더 따르더니
이렇게 뒤통수나 맞고 [홍익의 분한 신음]
(치국)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딱입니다요, 딱
(장군) 결국 민 봉교님도 좌상의 아들이었던 겁니다
우리 사관들은 잠깐 같이 일하는 관원1, 관원2, 관원3이고
[치국의 한숨] 한 5년 뒤면 우리 이름도 다 까먹을 거라고요
(시행) 그, 말로만 걱정하지들 말고
노잣돈이라도 좀 모아 봐, 어?
걔 부친 약값 대느라 녹봉도 빠듯하다며
[엽전이 절그럭거린다] 아휴, 그래 가지고
어디 유배 가서 지붕 있는 집이나 구하겠나 모르겠다, 쯧
(길승) 아이고, 그러게요
가는 길에 노비도 사고 돈 들 데도 많을 텐데
[홍익의 깊은 한숨]
[익살스러운 음악] [밤새 울음]
[홍익의 멋쩍은 헛기침]
[익살스러운 효과음]
[해령의 옅은 한숨]
(치국) 송 서리, 너는 왜 가만있냐, 어?
집에 돈도 많으면서
(홍익) 설마 '빈손으로 왔다' 이딴 핑계 대기만 해 봐!
(사희) 선진님들은 왜 하나만 알고 둘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성 검열님이 정말 큰 잘못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시행) 뭐야, 너, 너 뭐 알고 있구나?
아, 들으나마나죠
어디서 말실수한 거 가지고
사책을 발설했네 어쩌네 하면서 꼬투리 잡은 거라니까?
세자 저하를 겁박하셨습니다
[장군의 당황한 신음] (시행) 뭐?
사책의 내용을 빌미로
천주학 죄인들을 풀어 주지 않으면 세상에 폭로하겠다
저하를 겁박했습니다
(사희) 그것이 성 검열님의 죄목입니다
[한림들의 놀란 신음]
(장군)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해령의 놀란 숨소리]
그건 대역죄야, 대역죄
걔가 미쳤다고 고작 천주쟁이들 때문에...
(시행) 이유가 뭐겠냐?
자기도 천주쟁이인 거지
(경묵) 미친놈...
[한림들의 한숨]
야, 너 이거 어떻게 알고 있어?
(시행) 성 검열한테 직접 들은 거야?
(사희) 어제 퇴궐하기 전에
민 봉교님께서 동궁전에 오셨습니다
(사희) 저하께 성 검열님 대신 잘못을 빌고
목숨만은 살려 달라 간청하셨습니다
저하께서 그 간청을 받아들여
성 검열님의 처벌이 유배로 끝난 겁니다
극형을 면하고
[사관들의 한숨]
(경묵) 야, 송 권지, 넌 그런 걸 알고 있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내가 민 봉교한테 반말하기 전에!
아, 지금 반말이 대수입니까?
저는 막 소리 지르고 대들었습니다
그래도 두 분은 황장군님보다는 낫죠
아예 눈 뒤집고 막 달려들었는데...
(홍익) 맞아, 맞아 [장군의 한숨]
(시행) 아니, 민우원이는 도대체 성격이 왜 그래, 어?
그냥 말 몇 마디 하면 끝날 일을
쓸데없이 과묵해 가지고 주변 사람들 다 돌게 만들어, 쯧!
(길승) 민 봉교님 하루 이틀 보십니까?
남의 잘못 떠벌리느니 자기가 나쁜 놈 되고 만다 이거지
그러게 제가 이유가 있을 거랬잖습니까?
[길승의 한숨] [시행의 답답한 신음]
[옅은 한숨]
민 봉교님
[서권의 옅은 신음]
(서권) 죄송합니다, 차린 게 없어서
오실 줄 알았으면 고기라도 사다 놓는 건데요
[엽전이 절그럭거린다]
(우원) 받거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권) 제가 무슨 면목으로 이걸 받습니까?
성 검열
너 정말 끝까지 내 마음 이렇게 불편하게 할 거야?
감사합니다, 민 봉교님
(서권)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게 됐습니다 [우원의 한숨]
내가 아니라 저하의 결정이었다
[우원의 한숨]
귀양살이가 고단하더라도
조금만 버티거라
예문관이 아니더라도 네가 있을 곳은 많아
(우원) 곧 입조할 기회가 다시 생길 거야
(서권) 아니요
전 이제 벼슬은 그만하고 싶습니다
어려서는 급제할 생각에 서책만 봤고
사관이 되고 나서는 사책만 붙잡고 살았잖습니까?
이제는 책 속이 아니라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잔잔한 음악] 사람들에게 글도 가르쳐 주고
송사도 대신 봐 주고
하면 넉넉지는 않아도 식구들 밥벌이는 되겠지요
그리 대단한 것이냐?
천주학에 대한 너의 믿음 말이다
한평생 걸어온 길을 한순간에 버릴 수 있을 만큼
그게 너한테 그렇게 대단한 거야?
대단하지 않습니다
해서 온 힘을 다해 지키려는 겁니다
죄를 짓고 떠나는 몸이지만 허락만 해 주신다면
민 봉교님과 서신 정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
기다리마, 언제든
(우원) 받거라
자...
(우원) 나오지 마
(서권)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봉교님
[대문이 덜그럭 닫힌다]
[깊은 한숨]
(김 서방) 에이그, 오늘도 공쳤네, 그냥
[김 서방의 헛기침]
어서 오십시오!
아...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요?
- (우원) 쓰읍, 그, 내... - (김 서방) 어
[우원의 머뭇거리는 신음]
[옅은 신음]
조용히 구할 서책이 있네만
[김 서방의 탄성] [우원의 당황한 신음]
(김 서방) 그런 거는 또 쇤네 전문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여기 뒷방에 잔뜩 갖다 놨습니다
어허,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삽화가 아주 생생합니다
[김 서방의 웃음]
조용히 좀...
그런 서책이 아니네
[옅은 한숨]
[문이 달칵 열린다]
[김 서방의 겁먹은 숨소리]
(김 서방) 아니, 대체 이 판국에 이런 건 왜 찾으시는 겁니까요?
아유, 오금 저려, 오금 저려
여기...
[김 서방의 떨리는 신음]
- 수고했네 - (김 서방) 아, 예
아, 저, 나리... [김 서방의 난처한 신음]
이건 절대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요
나리나 저나 그냥 죽은 목숨입니다요
아셨죠?
[어두운 음악]
(경묵) 아니야, 아니야
이건 몇 마디 말 가지고는 안 돼
일단 황장군이 무릎을 꿇어
그런 다음에 화가 좀 풀렸다 싶으면
나랑 홍익이가...
(장군) 아이고, 어떻게 다짜고짜 저 혼자 무릎을 꿇습니까?
(경묵) 그럼 내가 꿇냐? 그래도 한때 내가 걔 선진이었는데?
아휴, 아, 차라리 그냥 엉엉 웁시다
아, 민 봉교님은 이런 거에 의외로 약하거든요
막둥이, '하나, 둘, 셋' 하면 울 수 있지?
(치국) 예, 예? 아, 아, 저 그런 거 잘 못하는데요?
(홍익) 야, 그래, 느낌 좋다
[흐느끼는 투로] 계속 유지,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장군) 자, 마누라 화났다
[익살스러운 음악] 마누라한테 맞았다
집에서 쫓겨났다 [홍익의 울먹이는 신음]
(홍익) 아휴...
(은임) [어깨를 탁 치며] 저기요
민 봉교님 벌써 오셨거든요? [홍익의 당황한 신음]
(장군) 미, 미, 민, 민 봉...
(홍익) 아유, 민 봉교님, 아유, 아유
- (홍익) 아유, 제가 잘못했습니다 - (우원) 왜...
제발 좌상 대감한테 이르지만 말아 주십시오
왜, 왜 이러는 거야?
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었습니다
아, 저도 성 검열님이 그렇게 미친 짓을 할 줄 몰랐다니까요?
(홍익) [흐느끼며] 아이고...
(시행) 너, 인마, 너는 사관이 자존심도 없이
민 봉교, 알지?
나는 처음부터 네 편이었어
아주 잠시 흥분을 했을 뿐이야, 응?
(경묵) 나도
한때 민 봉교님의 선진이었던 사람으로서
한마디 훈계를 했을 뿐이지
황장군이처럼 막 덤벼들지는 않았어!
요
[익살스러운 음악]
(우원) 그 신경 쓸 거 없다, 난 괜찮으니까
(홍익) 아이, 아니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럼 좌상 대감한테 안 이르시는 거죠?
(경묵)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쯧! [홍익의 아파하는 신음]
차라리 네가 한 대 맞고 끝내자, 어?
- (장군) 예? - 속 시원하게 기분 풀라고, 어?
(시행) 그래, 깔끔하게 한 대 맞고 끝내자
황장군 이름값 한번 가야지 [우원의 한숨]
(장군) 아, 이, 이름이 장군인 게 제 잘못입니까?
아, 저 평생 문과 길만 걸었습니다
(홍익) 아, 지금 민 봉교님 기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일단 좌상 대감한테 절대 안 이른다고 약조부터 받고
- (홍익) 우리 민... - (시행) 왜?
(홍익) 아이, 어디... [아란이 혀를 쯧쯧 찬다]
(아란) 다들 눈은 뒀다 뭐 하십니까?
진작에 나갔거든요?
(시행) 너는 입 뒀다 뭐 하니? 나가는 거 보면 얘기해 줘야지!
(홍익) 아, 그러게, 김 검열 네가 먼저 엉엉 울었어야지!
너, 인마 집중을 똑바로 했어야지, 인마!
- 울려 줘? - (시행) 너 때문이야, 인마!
[익살스러운 효과음]
[울먹이며] 아,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시행) 아까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해령) 민 봉교님!
[해령의 가쁜 숨소리] (우원) 왜?
(해령) 어제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제가 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화를 냈습니다 [우원의 한숨]
(우원) 사과할 필요 없어
네가 이해했으면 됐다
(해령) 저, 화를 내서 죄송하다는 거지
민 봉교님을 이해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야?
그 어떤 선의로도 사책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
전 아직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해령) 만약 제가 누군가를 살려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할 테니까요
[잔잔한 음악]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으냐?
그럼 그때 절 탄핵하시면 되겠네요
- (우원) 너 진짜... - (해령) 승정원이죠?
(우원) 그거 내...
[헛웃음]
아, 구해령 저거 진짜...
(재경) 먼저 가 계십시오
(모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했지?
- (재경) 누이... - 널 용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모화) 하나 너처럼
내게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은임의 지친 신음]
(은임) 어? 허 권지! [아란의 놀란 신음]
왜 벌써 나오셨습니까?
전 중전마마께서 가매에 드신다고 해서
오 권지는요?
저도 대비마마께서 출외를 나가셨습니다
그럼 우리... [은임의 장난스러운 신음]
[함께 웃는다]
- (은임) 가자 - (아란) 가자, 가자
[사랑스러운 음악]
(해령)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날벌레가 이렇게 많은데
(이림) 방 안에 있으면 네가 뭐든지 적으려 들지 않느냐?
해서 내 공과 사를 구분해 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적인 시간이라고
(해령) 궐 안에서 사관한테 사적인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주십시오
다 적어 버리기 전에
(이림) 뭐라고 적을 건데?
'도원 대군이 사관에게 흑심을 품고'
'인적 드문 곳에 데려가다'?
[해령과 이림의 옅은 웃음]
(은임) 이 서리?
(아란) 이 서리?
[해령의 당황한 숨소리]
[놀라며] 도원 대군마마?
[아란의 놀란 신음]
[아란의 놀란 숨소리] [해령의 좌절하는 숨소리]
[까마귀가 깍깍 운다]
[새가 짹짹 지저귄다]
(아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사관입니다, 구 권지
사관이면 사관답게 모든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저희도 모르게 이 둘이서만 꽁냥꽁냥... [해령의 난처한 신음]
이 배신감 어쩔 거야, 이거!
(은임) [한숨 쉬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둘이 언제부터 눈이 맞...
그러니까 이렇게 흑심 운운하는 사이가 된 건데요?
(해령) [헛기침하며] 오 권지, 그런 게 아니라...
(이림) 처음 만난 날
[익살스러운 음악] 부터였는데?
나는
(아란)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놀라며] 설마...
[익살스러운 효과음]
(아란) 그동안 둘이 막 손도 막 잡고
설마 뽀, 뽀뽀도 하고? [은임의 놀란 숨소리]
(해령)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유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은임의 놀란 숨소리] 마마!
[익살스러운 효과음]
(이림) 어차피 들킨 거 왜 거짓말을 하느냐?
그대들은 예문관에 가서 똑똑히 전하거라
구해령은 임자가 있으니
눈도 마주치지 말고
회식도 데려가지 말고 [해령의 한숨]
아주 곱게 일만 시키다가 정시에 칼같이 퇴궐시키라고
[헛웃음 치며] 남들한테 소문을 내라니
그건 또 무슨 심보입니까?
- 심보? - (은임) 예
(은임) 까놓고 말해서 마마께선 이렇게 불장난 치다 그만두면 땡이시죠?
우리 구 권지는 인생이 망하는 문제입니다
혼삿길도 막히고 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요
(아란) 맞아요, 구 권지 인생은 어떡하실 겁니까?
아, 마마께서 우리 순진한 구 권지 책임지실 거냐고요!
권지님들 일단은 좀 진정을 하시고...
(박 나인) 거, 듣자 듣자 하니까
이보시오들!
순진한 구 권지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우리 마마한테 먼저 꼬리 친 게 누구인데 책임을 지래?
[익살스러운 음악] - 꼬리? - (아란) 뭐? 꼬리를 쳐?
(최 나인) 그래, 너희 구 권지는 궐 밖에서 어떻게 살다 들어왔는지 몰라도
우리 마마는 20년 평생을 녹서당에서
여인의 '여' 자도 모르는 바보 천치로 살아오신 분이야, 이거 왜 이래?
(이림) 저기, 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
(은임)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그럼 우리 구 권지는 뭐, 어?
궐 밖에서 이놈, 저놈하고 막 붙어먹기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최 나인) 눈이 있으면 봐 봐
얼굴이 저렇게 예쁜데
남자들이 집을 팔아서라도 매달리지 그냥 지나쳤겠어?
(은임) 그건 댁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고
우리 구 권지는 성격이 지랄 맞아서 아무나 못 다가와요
26살 먹도록 반강제 노처녀로 산 사람한테 그게 무슨 모욕입니까?
(아란) 그리고 너희 마마도 얼굴로 할 말은 없거든?
쳇, 곁눈질로 봐도 절세 미남인데
아주 삼천 궁녀가 다 달려들었겠구먼!
(최 나인) 삼천 궁...
근데 이것들이 어디서 반말을!
(은임) 반말은 댁들이 먼저 했거든요?
(최 나인) 야, 우린 너희보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궁궐 생활 10년은 더 했다!
(아란) 어쩌라고! 우린 과거 보고 들어왔어!
[버럭대며] 이 궁녀 나부랭이야!
- (박 나인) 뭐, 나부랭이? - (은임) 그래, 나부랭이!
- (최 나인) 나부랭이? - (은임) 나부랭이!
- (아란) 야! - (최 나인) 야, 너 일로 와 봐
[저마다 소리친다]
[저마다 소란스럽게 몸싸움한다]
(박 나인) 놔!
[저마다 소란스럽게 몸싸움한다]
[저마다 소란스럽게 몸싸움한다]
[삼보의 놀란 신음]
[삼보의 말리는 외침]
(삼보) 아, 지금 뭣들 하는 짓이오, 지금, 어? [저마다 씩씩거린다]
안 비켜, 안 비켜? [나인들의 놀란 신음]
[삼보의 못마땅한 신음] 확, 씨!
내전 한복판에서 패싸움이라니, 어?
(삼보) 그러다 어디 입 싼 박 내관이 봤으면 어쩔 뻔했느냐?
도원 대군이랑 여사관이랑 눈 맞았다고
조선 팔도에다가 소문이라도 낼 작정이었어?
(박 나인) 아니, 걔네들이 자꾸 우리 마마를 무슨 짐승마냥 몰아가는데
그걸 어찌 참습니까? [삼보의 못마땅한 신음]
(최 나인) 이 세상에서 대군마마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딱 여섯 명밖에 없습니다
주상 전하, 세자 저하 중전마마, 대비마마
그리고 저희 두 명요
(삼보) 이것들이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이씨!
(이림) 그러게 내가 하지 말라 그랬잖아
(삼보) 마마께서는 뭐 잘하신 줄 아십니까?
녹서당에 벽이 없습니까 바닥이 없습니까?
왜! 이 멀쩡한 방 놔두고서
사방팔방 다 뚫린 데서 엉큼한 짓을 하시냐고요, 왜!
[삼보의 못마땅한 숨소리]
구 권지 동료들이 봤으니까 망정이지
그 꼬장꼬장한 최 상궁한테 걸렸으면은
구 권지 바로 대비전 불려 가 가지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삼보의 답답한 신음]
내가 내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애 셋을 키우고 있는 건지, 진짜
내가 제명에 못 살지, 못 살아!
(이림) 삼보야
나 그래도 싸움은 안 했어
[은임과 아란의 못마땅한 신음]
[홍익과 경묵의 한숨]
(홍익) 어? [아란의 헛기침]
너희는 표정이 왜 그러냐? 또 나인들이 괴롭혔냐?
(아란) 아니, 글쎄 구 권지가...
[발랄한 음악]
[아란의 당황한 신음]
[빈정대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날씨가 너무 좋아서 짜증이 나서요
(은임) 구 권지는
저희 좀 보시죠
(경묵) 씁, 어디서 주먹다짐의 향기가 나는데
(홍익) 한바탕한 거 같은데 그 한바탕이 아직 안 끝난 거 아닐까요?
[경묵과 홍익의 미심쩍은 신음]
[아란이 씩씩거린다]
[아란의 못마땅한 한숨] [은임의 옅은 한숨]
(아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안 듭니다
아, 자기가 대군이면 다야? 어디서 우리 구 권지를!
(은임) [한숨 쉬며]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구 권지, 협박당하셨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만나 주시는 거죠?
(아란) 설마 대군의 명이네 어쩌네 하면서
억지로 끌어안고 그런 거 아닙니까?
[은임과 아란의 놀란 숨소리] [해령이 피식 웃는다]
아이, 아닙니다
그런 건 다 제가 이렇게 먼저...
[익살스러운 음악]
저도 좋아서 만나는 겁니다
대체 대군마마 어디가 좋아서요?
(아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가 있다고
나인이란 것들 꼬라지를 보니까
아주 싸가지가 바가지입니다
그게 다 상전 하는 거 보고 배운 거 아니겠냐고요
(은임) 지난번에 이 서리 행세 할 때 보니까
말귀도 못 알아먹어, 힘도 못 써
멋있는 구석이라고는 개뿔도 없더니만
[어이없는 웃음]
아, 멋있는 구석이 왜 없습니까?
(해령) 다정하고 배려심도 넘치고
또 웃을 때는 요렇게 천진하고
책 읽을 때는 진지하고
또 잠잘 때는 얼마나 그윽한데요
(은임) 잠잘 때요?
구 권지가 대군마마가 잠든 얼굴을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아란의 탄성]
설마
벌써? [은임과 아란이 호들갑 떤다]
(해령)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우리 저번에 경신수야 할 때, 그때...
(은임) 어쩐지, 그날 밤 갑자기 사라지시더니 [아란의 놀란 숨소리]
그새, 그새 [은임과 아란의 웃음]
(해령) 그, 아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란의 다급한 숨소리]
빠져나갈 생각 마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 보십시오
눈빛, 손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다!
[은임과 아란의 웃음] (은임) 어떡해!
(아란) 오십시오, 오십시오, 오십시오
구 권지, 가면 안 돼요
빨리빨리, 빨리빨리
(해령) 아, 저 진짜 그냥 팔만 베고 잤습니다
- (아란) 뭐 했습니까, 뭐 했어요? - (은임) 무슨 소리입니까?
- (은임) 더 얘기해 보십시오 - (해령)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 (해령) 팔만 베고, 팔만... - (아란) 쓰읍, 팔만 벴다?
[은임과 아란의 장난스러운 웃음]
[걱정스러운 한숨]
어찌 되었느냐? 잘 풀렸어?
[한숨 쉬며] 말도 마십시오
여태까지 서고에서 문초당하다가 오는 길입니다
미안하다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헛웃음 치며] 미안한 걸 아시는 분이
'처음부터 만난 날부터 그랬다' 이렇게 넙죽 고개를 끄덕이십니까?
(이림) 그건...
네 주변에는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이 없지 않느냐?
내 존재가 늘 비밀인 거 같아서
그게 싫었다
뭐, 차라리 잘됐습니다
이젠 저에게도 마마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거 아닙니까?
(해령) 그러니까 저 속상하게 하시면
막 이렇게 실컷 흉도 보고 욕도 하고 그럴 겁니다
세상에 나처럼 지고지순한 사내가 어디 있다고?
[피식 웃으며] 아, 그거야 더 살아 봐야 아는 거죠
[설레는 음악]
이건 적지 말거라
[해령이 피식 웃는다]
[이림의 옅은 웃음]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모화) 대비마마
(대비 임씨) 오셨는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수심이 깊어 보이십니다
아니
내 이리 궐 밖을 나와 본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대비 임씨) 참 우스운 일이지?
내 지난 세월이 내게는 그토록 모질고 버거웠는데
세상은 이토록 평안하고 무사하니 말일세
(모화) 마마...
[옅은 웃음]
궐 밖에 나오더니 내가 별소리를 다 하는군
(대비 임씨) 그래, 그 물건은 가져왔는가?
(모화) 도미니크 의원님께서 아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곳에 서래원의 상황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음악]
(대비 임씨) 이것이 20년 전에 내 수중에만 들어왔어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마마께서 이리 강건하시질 않습니까?
(대비 임씨) 그래
그날이 멀지 않았네
수고했어
(모화) 아닙니다
[대비 임씨의 한숨] 한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번 사헌부 구 장령의 집에 갔다가 그의 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최 상궁) 마마
[다가오는 발걸음]
궐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지밀상궁) 전하, 대비마마 드셨사옵니다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달칵 닫힌다]
(이태) 대비마마
[옅은 한숨]
출외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궐이 답답하시면 잠시 행궁에 나가 계신 건...
(대비 임씨) 이 사람이 무슨 연유로 궐을 비운단 말입니까?
그럴 생각 추호도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지요
긴히 할 말씀이 있다 들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도원의 혼례 문제를 논할까 합니다
- 혼례요? - (이태) 예
(이태) 도원이 이제 약관의 나이입니다
세간의 시선도 있는데
언제까지 혼자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제 그만 혼례를 허락해 주십시오
예, 그리하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도원도 이제 어엿한 사내장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좋은 처가 있어야지요
[어두운 음악]
[옅은 한숨]
(최 상궁) 마마, 가례청이 설치되면
좌상이 끼어들어 농간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한데 어찌하여 대군마마의 혼례를 청허하셨습니까?
게다가 대군마마께서 사가로 나가시게 되면
안위를 장담할 수가 없사온데
내 그 뻔한 속셈을 모르겠는가?
도원의 혼례를 허한 것이지 간택까지 주상에게 맡긴 것이 아니네
소백선 영감에게 연통을 넣거라
(최 상궁) 예
[한숨]
[아란의 헛기침]
(아란) 전 지금 저 스스로가 굉장히 기특합니다
어제 하루 종일 입이 근질근질거리고 목구멍이 터질 것 같고
막 누구라도 붙잡고 '도원 대군이랑 구 권지랑 사귄다' [은임과 해령의 옅은 웃음]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니까요?
[한숨]
그래서 진짜 아무한테도 말씀 안 하셨다고요?
우리 집 강아지 붙잡고 [함께 작게 웃는다]
(아란) 아, 그 정도는 좀 봐주십시오
예, 장하십니다, 허 권지
근데 구 권지는 좋으시겠습니다?
하, 저는 아침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구 권지는 일이 아니라
(은임) 낭군님이랑 알콩달콩 정을 쌓으러 오시는 거 아닙니까?
아휴, 아이, 아닙니다 [은임과 아란의 옅은 웃음]
제가 얼마나 철저한데요?
입시할 때는 역사를 쓴다는 마음가짐으로...
(아란) 예, 역사를 쓰기는 하죠?
상중지희의 역사
[은임과 아란의 웃음]
[아란과 은임의 장난스러운 탄성] [해령의 옅은 웃음]
(해령) 아유... [종이 댕댕 울린다]
아이고, 입시할 시간이네?
저 다녀오겠습니다 [은임과 아란의 옅은 웃음]
- (아란) 부끄러운가 보다, 갑시다 - (은임) 우리도 얼른 갑시다
(삼보) 마마!
마마!
마마, 마마... [삼보의 힘겨운 신음]
[삼보의 가쁜 숨소리]
(이림) 너 그렇게 큰 소리로 나 막 찾으면서 달려오는 거
그거 좀 그만하면 안 되겠느냐?
거,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이번에는 진짜 진짜로 큰 소리 낼 만한 일입니다
가, 가, 가례청이 설치된답니다
(이림) 가례청? 누가 혼인하는데?
(삼보) 누구기는 누굽니까?
왕실에서 혼기 꽉 찬 미혼이 딱 한 사람이지!
[긴장되는 음악]
(이림) 나? 도원 대군?
(삼보) 예, 도원 대군마마요
전하께서 마마의 혼인을 명하신 겁니다
"녹서당"
구해령...
(해령) 감축드립니다
[이림의 다급한 숨소리]
(이림) 구해령!
구해령!
대체 뭘 감축한다는 것이냐? 난 이렇게 황당한데?
오랫동안
사가에 나가 살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까?
염원이 이루어졌으니 마땅히...
이렇게 나가 살길 바란 게 아니었다
난 너와...
[이림의 한숨]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난 다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을 생각이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같은 마음이면요?
저는 그 마음의 대가로
평생을 규문 안에서 부부인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애잔한 음악]
[옅은 한숨]
[깊은 한숨]
(이진) 가례청?
(김 내관) 예, 내일부로 가례청이 설치되고
봉단령이 내려진다 하옵니다
알겠다, 가 보거라
[깊은 한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사희) 들은 소식은 경축할 만한 일인데
표정은 근심이라서요
왕실의 혼례는 경사가 아니다
서로에게 뭘 얻어 낼 수 있는지 치밀하게 재고 따져서
수를 두는 정치의 연장일 뿐이야
[한숨 쉬며] 해서 누군가의 삶은 장기판 위의 말이 되고요
[피식 웃으며] 그래
너도 사대부의 여식이니 잘 알고 있겠지
여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같은 신세였을 테니까
(이진) 하나
네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좌상이 널 여사로 만들었다고 해서
네가 꼭 그자의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의미심장한 음악]
- (이조 정랑) 대감 - (대제학) 어, 오셨는가?
(이조 정랑) 갑자기 가례청이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제학) 주상 전하 변덕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해서 적당한 집안은 찾아보셨고?
(이조 정랑) 예, 생각나는 대로 연통을 넣고 있기는 한데
쉽지가 않을 거 같습니다
도원 대군은 말이 좋아 대군이지
전하께 골칫덩이인 백면서생인데
과연 어느 집안에서 딸을 내어놓을는지...
(대제학) [한숨 쉬며] 그렇긴 하지
대감, 이번에는 뭐, 대충 하자 없는 여식으로 골라다가
빨리 끝내 버립시다
(익평) 아니요,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난 이미 적임자를 골라 두었습니다
(이조 정랑) 아니, 대, 대감
서, 설, 설마...
(삼보) 마마?
응? 아이...
이 상황에서 어디를 가...
[놀란 숨소리]
마마!
(시행) 자, 그러면은
성 검열 마중 갔다가 바로 주막으로 가자고
오늘은 황장군이 쏜다니까
(홍익) 제가 이럴 줄 알고 점심도 적게 먹었다니까요
(시행) [헛웃음 치며] 잘했다
[문이 쾅 열린다]
(시행) 어, 이 서리 야, 네가 여기를 웬일로...
(은임과 아란) 대군마마!
[옅은 한숨]
(시행) 뭐, 뭔 마마?
[불편한 한숨]
따라오거라
오늘의 입시는 끝났습니다
손이라도 잡고 끌고 가야겠느냐?
[애잔한 음악]
(치국) 아, 이거,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시행의 당황한 신음]
(최 상궁) 마마, 도원 대군께서 드셨사옵니다
(대비 임씨) 드시라 하게
(대비 임씨) 어서 오세요, 도원
(이림)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늘 그날이 그날이지요
이리 가까이 앉으세요
(대비 임씨) 도원에게 이리 급한 성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가례청이 열린다는 소식에 이 늙은이를 재촉하러 오신 겝니까?
아닙니다
마마께 드릴 청이 있어 왔습니다
간택령을 거두시고
저의 혼사를 멈추어 주십시오
도원...
이미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습니다
[잔잔한 음악]
너무나도 깊이 연모하여
그 여인이 아닌 다른 누구도
원하지를 않습니다
[애잔한 음악]
[옅은 한숨]
"녹서당"
(상궁) 처녀단자를 넣었다 합니다
(대제학) 그런 집안에서 왜 도원 대군을 탐내?
(도승지) 필시 속셈이 있을 것입니다
(백선) 괜한 걱정은 마십시오
누구처럼 딸자식을 팔아 권세를 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시행) 여기 적힌 송사희가 우리 송사희야?
(경묵) 도원 대군 부부인 삼간택에 들었다는데?
(이진) 누군가가 외척이 될까
미리 짓밟아 두는 속셈을 내 모를 것 같습니까?
(익평) 영특하십니다
(사희) 그저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했습니다
(이진) 나도 마지막으로 너의 이야기를 들어 주마
(백선) 닮으셨습니다, 전하와
(모화) 해령이도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아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해령) 따르십시오, 어명입니다
(이림) 내가 다 버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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