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관 구해령 18
[풀벌레 울음]
(해령) 그럼
그동안 계속 폐주의 꿈을 꿔 오신 겁니까?
(이림) 어쩌면, 나도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서
넌 어찌 저 어진이 호담이란 걸 알아본 것이냐?
만난 적 있어?
[해령의 한숨]
(이림) 말하기 어려운 것이냐?
(해령) 누구한테도 해 본 적이 없는 얘기라서요
한데 저도 더 이상은 모르는 척 살고 싶지 않습니다
20년 전에 아버지께서
역모죄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두운 음악]
(해령) 그래서 아버지의 제자였던 오라버니가
절 살리기 위해 청나라에 데려갔고
그때부터 저는 구해령이란 이름으로 살게 됐습니다
(이림) 하면 넌...
예
20년째 도망 중인 신세입니다, 저
(이림) 어쩌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냐?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해령) 아버지께서 서래원이라는 곳의 학장이셨는데
역모에 휘말리셨다고 들었습니다
20여 년 전 서래원이라는 곳에서 의술을 배웠습니다
서래원이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 의녀가 의술을 배운 곳이라고 했어
거기서 스승과 함께 우두종법을 연구했다고
예
영안이
저희 아버지 별호였나 봅니다
[울먹이며] 저도 참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아버지 글도 몰라보고
[해령이 훌쩍인다]
[애틋한 음악]
힘들면
그만 말해도 괜찮다
(해령) 아니요
힘들어도 생각해야 됩니다
저는 여태
아버지께서 나쁜 사람들한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해령) 한데 호담이 당시의 주상 전하셨다면
왜 아버지께서 누명을 쓰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셨을까요?
서래원을 오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도
서래원이라는 이름도
가슴속에 묻어 둔 채 살아왔습니다
(해령)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가 모든 걸 다 잊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게
아버지의 소원이었다고 해서요
한데 더 이상은 싫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슨 누명을 쓰셨는지
서래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호담은 왜 폐주가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해령)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림) 나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싶어
(삼보) 마마!
[삼보의 걱정스러운 신음]
아유, 마마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놀랐잖습니까!
왜 나와 계십니까? 쉬어야 할 분이!
(이림) 지금 들어갈 참이었다
[애절한 음악]
(삼보) 아, 어서 오십시오
(삼보) 자, 들어오시지요
제가 얼른 이부자리 깔겠습니다
푹 쉬어야 상처도 빨리 낫는다고 했습니다
(이림) 허 내관
(삼보) 예
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궐에 있었다고 했지?
예, 예, 그, 그렇습죠, 한데 왜...
내가 태어나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느냐?
(삼보) [웃으며] 아유, 그럼요, 그럼요
왕자가 태어났다고 전하께서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시고
중전마마도 대비마마도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온 궁궐 안이 경사였습니다, 경사
[삼보의 웃음]
대비마마께서 기뻐하셨다
그날
친아들인 폐주가 죽었는데도?
[긴장되는 음악]
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이림)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것이냐?
- (삼보) 마마... - 환궁할 것이다, 따라오지 말거라
아니 되옵니다!
(삼보) 그 몸으로는 아직... 마마!
마마
[삼보의 다급한 숨소리]
[삼보의 다급한 숨소리]
(이태) 내 너 같은 것을 자식으로 둔 죄로
죽어서도 선대왕들을 뵐 면목이 없느니라
이날 이때껏 이 나라 이 왕실에!
너처럼 흉한 종자는 없었어!
[칼이 푹 꽂힌다] [이림의 힘겨운 신음]
림아
[이림의 기합]
[말발굽 소리가 멀어진다]
(삼보) 마마!
[이림의 기합]
[풀벌레 울음]
[무거운 음악]
(이겸) 네가 문직의 여식이냐? 희연?
예, 나리는 누구십니까?
나?
호담이라 부르거라, 호담 선생
(이겸) 자
(어린 해령) 음, 한데 소녀가 찾던 서책은
이게 아니라 다른 것인데요?
그래? 어...
- 하면 직접 꺼내 보겠느냐? - (어린 해령) 네
[이겸의 힘주는 신음]
- (어린 해령) 저것도 읽고 싶습니다 - 뭐?
(이겸) [웃으며] 어, 그래, 알겠다, 자
[이겸의 힘주는 신음]
- (문직) 주상 전하... - (이겸) 쉿
(이겸) 아, 영안, 오셨는가?
자, 아버지 오셨다 [문직의 어색한 웃음]
예, 호담 선생
아버지 오셨습니까?
[이겸의 웃음]
[웃음]
아버지
도원이 환궁을 해? 그 몸으로?
(삼보) 예, 뭘 알아내신 건지
갑자기 그, 경오년의 일을 여쭤보시다가... [무거운 음악]
[떨리는 숨소리]
[새가 지저귄다]
- 어서 치우거라 - (최 상궁) 예, 마마
(백선) 근처를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급습과 퇴각에 단련된 자들인 것 같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하
지금 군사들이 주변 민가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백선) 그자들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수색을 멈추세요
저하, 대군마마를 시해하려 한 자들입니다
(백선) 반드시 잡아서 그 배후를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진) 그건...
군사들이 민가를 돌아다니면
백성들에게 괜한 두려움만 심어 주게 됩니다
우선 군사를 철수하시고 환궁을 명하세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백선의 한숨]
[긴장되는 음악]
[이림의 기합]
[문이 탁 닫힌다]
[한숨]
[한숨]
(이림) 시정기라는 게 뭔데 이 사달인 것이냐?
이 서리는 정말 조정 일은 하나도 모르십니까?
(해령) 사초랑 승정원일기랑
이것저것 관청 기록들을 엮은 문서입니다
승정원일기
(주서) 아이, 뉘신데 승정원 주서를 찾으십니까?
도원 대군이다
(주서) 아유, 대군마마
너에게 하명할 것이 있다
[풀벌레 울음]
(이태) 마마
어디 상하신 곳은...
[문이 달칵 닫힌다] (이태)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어마마마의 아들로 근 50년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어느 자식이 부모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한데 왜 아직도 민익평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겁니까?
말씀해 보세요, 주상
이 나라에서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은 단 하나 좌상임이 분명한데도 왜!
아직도 그자를 살려 두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증좌도 없이 의심만으로 공신을 벌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요
주상은 그자와 뜻을 함께하기 때문에 눈감아 주고 계신 겁니다
(대비 임씨) 지금도 속으로는
왜 그 화살이 도원의 심장을 뚫지 못했을까
탄식하고 계시겠지요
[긴장되는 음악] 마마!
(대비 임씨) 나와의 약조를 잊지 마세요, 주상
말씀드렸습니다
도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주저 없이 목을 매달 것이고
주상은 어미를 죽인 임금으로 만세에 기록될 것입니다
[떨리는 숨소리]
(대비 임씨) 내 마음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모화) 마무리는 잘했느냐?
(각쇠) 예, 뒤를 쫓지는 못할 겁니다
- (상운) 대군마마는... - (모화) 걱정 말거라
(모화) 상처가 깊지 않다고 하니 금방 나으실 게야
(상운) 죄송합니다, 누이
(모화) 이만 가서 쉬거라, 고생 많았다
도성에 좌상이 기습을 주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지
예
예상대로 주상도 민익평을 의심하는 듯합니다
이제 둘의 관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모화) 조심하거라
네가 이쪽에 섰다는 걸 그자들이 알게 되면
당장에 목숨을 거두려고 할 것이야
살고자 하는 마음은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입니다
[한숨]
[한숨] [다가오는 발걸음]
(설금) 아씨, 여기서 뭐 하세요? 이부자리 다 깔아 놨는데
(해령) 오라버니 지방으로 공차 나가셨다고 했지?
(설금) 네
사흘 전에도 안 들어오시고
네, 근데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설금) 아유
아씨, 아이
빈방에 들어가서 도대체 뭘... [문이 달칵 열린다]
[해령의 한숨]
[해령의 한숨]
[한숨]
[서랍이 통통 울린다]
[서랍이 통통 울린다]
[서랍이 땅땅 울린다]
[비밀스러운 음악]
조보?
(해령) 사초 내기를 거부한 사관?
오라버니가 왜 이런 조보를 가지고 계시는 거지?
(해령) 경오년 정해월 신묘일
예문관 봉교 김일목
일기청에 가장사초 내기를 거부하다
경오년 정해월 신축일
예문관 봉교 김일목이
서대문 밖에서 참형을 당하다
(은임) 구 권지는 눈치껏 서고에 가서 좀 쉬세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왔는데 바로 출근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저 정말 괜찮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가 다 멀쩡하다니까요
[은임의 한숨]
저, 어제 녹서당 입시는 누가 하셨습니까?
아, 당분간 녹서당에 사관은 얼씬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란) 대군마마께서 회복하시는 데 방해만 된다고요
[한숨]
[문이 달칵 열린다]
(시행) 아이고, 드디어 오셨네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불운의 화신
야, 너는 이제 외사 나가지 말고 예문관에 꼭 붙어 있어라
불안해서 어디 보내겠냐?
- (해령) 예 - (시행) 욕봤다, 인마
[시행의 한숨]
- (해령) 저, 민 봉교님 - (우원) 응
(해령) 혹시 김일목 사관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김일목 선진?
(시행) 아니, 네가 김일목 선진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
(홍익) 김일목? 그게 누구인데요?
(시행) 아, 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잖아 그, 내 바로 윗대, 윗대 선진 중에
진짜 미친 호랑이 같은 분 하나 계셨다고
와, 어찌나 독종이었는지, 응?
하루 종일 입시하다가 별 보면서 퇴궐하고
또 별 보면서 입궐하고
[홍익의 탄성] (시행) 그, 경연 입시 한번 들어갔다 하면
막 사책 서너 권씩 쓰고 난리도 아니었대
그런 훌륭한 선진이 계셨는데
왜 저희는 모르고 있었습니까?
(아란) 진작에 찾아가서 사초 쓰는 법도 배우고 좀 올걸
[시행의 한숨] (은임) 응
(길승) 돌아가셨다
폐주 일기청 열렸을 때 [의미심장한 음악]
사초 안 내겠다고 버티다가 그, 참형으로...
(은임) 예? 사관이 사초를 왜 안 내요? 무슨 이유로?
(시행) 그걸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뭐, 애초에 가장사초를 안 썼다더라, 어?
얻다 숨겨 놓고 까먹었다더라
그런 소문만 무성했지, 응, 쯧
(시행) 근데 너는 갑자기 그 얘기를 왜 물어봐?
아, 어쩌다 들었는데 궁금해서요
(우원) 누구에게도 묻지 말거라
사초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국청에서 대역죄 판결을 받고 죽은 사람이다
너까지 괜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
(해령) 예
[이진의 한숨]
[무거운 음악]
(이림)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가
폐주의 무덤에 다녀왔다는 것
더군다나 폐주는 주상 전하께서 사사하신
대역죄인이 아닙니까?
(대비 임씨) 세자,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세상에 떠도는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닙니다
[다가오는 발걸음]
(김 내관) 저하
말씀하신 것을 받아 왔습니다
(이진) 그래, 수고했다
(김 내관) 한데 주서가 이르기를
도원 대군마마께서도 경오년의 승정원일기를
고출해 가셨다고 하옵니다
도원이?
[문이 달칵 닫힌다]
(이림) 형님
폐주의 일이다
네가 이리 나서서 관심 가질 필요는 없어
그래서도 아니 되고
폐주가 아니라 저에 대해 알고 싶은 겁니다
대체 너에 대해 뭘 그리 알고 싶은 것이냐?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제가 폐주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요
(이진) 림아!
(이림) 형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경오년 갑신월 무진일
제가 태어나던 날 전하께서
군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한숨]
그래, 그, 나중에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하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저, 그,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야
그저 우연이라면
왜 승정원일기에는
제가 태어난 것에 대한 기록이 한 줄도 없는 겁니까?
[무거운 음악]
(이림) 전하께서 교서를 내리시고
반정 공신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시고
어마마마와 형님이 사저에서 대내로 이거하는
이 몇 달간의 기록 속에서
제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습니다
[당황한 숨소리]
그게...
(이진) 전하께서 거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어마마마께서는 잠시 외가에 몸을 피해 계셨다
넌 그곳에서 태어나 뒤늦게 궐에 들어왔어
그래서 주서들이 적지 않은 걸 것이다 궐 밖의 일이라서
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어마마마께서
절 회임하셨을 때의 모습을 뵌 적이 있으십니까?
그래, 뵌 적이 있다
네게 입힐 작은 옷을 만들어 놓고
(이진) 너의 이름도 지어 놓고
나도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너를 만날 날만을 기다렸어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형님
그러니 다시는
다시는 의심하지 말거라
너는 우리 가족이고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
응?
(이진) 응?
림아
[문이 달칵 열린다]
"대조전"
- (상선) 대군마마 - (이림) 고하시게
(상선) 주상 전하
도원 대군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이태) 오늘은 몸이 좋질 않다
물러가라 전해라
(상선) 마마,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옵고...
아바마마!
소자를 만나 주십시오
(이림) 여쭐 것이 있습니다
[한숨]
소자
화살을 맞고 돌아왔습니다
괜찮은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무거운 음악]
[한숨]
(이림) 소자 오늘 꼭 아바마마를 뵈어야겠습니다
그때까지
[불편한 숨소리] (이림)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한숨]
[한숨]
(삼보) 대비마마
[한숨]
[풀벌레 울음]
(해령) 마마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으셨습니다
이만 일어나십시오
[한숨]
[삼보의 한숨]
(해령) 하면 저도 같이 입시를 기다리겠습니다
구 권지 [문이 달칵 열린다]
(상선) 주상 전하 납시오
[문이 달칵 닫힌다]
(이태) 네가 이제 여사까지 대동해서 고집을 부리는구나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달인 것이냐?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지 몰라도
과인은 네게 하고 싶은 말도 해 줄 말도 없다
- 도원! - (이림) 아바마마께서는 한순간이라도
소자를
사랑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무거운 음악]
(이태) 그게 무슨 말이냐?
단 한 번이라도
저를 떠올리거나 그리워하신 적은 있는지
저를 애틋하게 생각하신 적은 있는지
(이림) 아바마마의 마음속에
제가
아들이기는 한 건지를 여쭤보는 겁니다
[한숨]
(이태) 처소로 뫼시거라
아바마마
"녹서당"
[밤새 울음]
[애잔한 음악]
[흐느낀다]
[울먹이는 숨소리]
[이림이 계속 흐느낀다]
[한숨]
조보?
(우원) 누구에게도 묻지 말거라
사초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국청에서 대역죄 판결을 받고 죽은 사람이다
사초를 내지 않은 사관
(김 서방) 네? 민간 사서요?
(해령) 그래, 사관이 아니라 민간의 역사가들이 쓴 사서
(김 서방) 아니, 사관씩이나 되신 분이 왜 저잣거리에서 역사를 찾으십니까?
풍문이나 지껄여 적어 놓은 거를
풍문이든 쑥덕공론이든 좋네
그, 경오년의 일이 적힌 거로 어디 없겠나?
(김 서방) 가만있어 보자, 경오...
예? 경오?
이 아씨가 또 누구 바지춤을 적시려고 이러셔 그래?
그 시절에 나온 민간 사서들은 죄다 금서라고요, 금서!
그런 건 팔아서도 안 되고 찾아서도 안 돼요
(해령) 죄다 금서라고?
(김 서방) 아, 폐주에 대한 소문이 오죽 많았어야죠
서리원인지 서래원인지 하는 데서
사람을 잡아다가 막 배를 갈라 죽인다지를 않나
서양 오랑캐들하고 은밀히 내통을 한다지를 않나
여튼 그런 건 다른 세책방 가도 없을 테니까
아씨도 괜한 헛걸음 하고 다니지 마십시오
[김 서방의 헛기침]
[김 서방이 구시렁거린다]
[한숨]
[문이 달칵 열린다]
[이조 정랑의 한숨]
벌써 입궐할 준비를 하는 게냐?
이미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다
[이조 정랑의 한숨]
(이조 정랑) 너 그거, 그 여사 일 그만둬
이참에 때려치우고 좌상하고 연도 싹 끊으라는 말이다
(사희)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기는 왜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렇지
(이조 정랑) 널 예문관에 들일 때도 간택에 올릴 때도
그래, 다 생각이 있겠거니...
어이구
자기 자식, 마누라 죽게 만든 양반이
남의 딸 귀한 줄 알 리가 있겠냐고
하여튼 너 이제부터 민익평의 '민' 자도 모른 척하고 살아
수습은 이 아비가 어찌어찌해 볼 테니까
(사희) 아버지 [이조 정랑의 한숨]
저 자신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좌상이라고 해도
전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입을 열면 좌상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긴장되는 음악] [이조 정랑의 한숨]
이게 뭡니까?
금서다
[부제학의 놀란 신음]
[대신들이 수군거린다]
[긴장되는 음악] (대사헌) 대, 대감, 이건 대감께서 말씀하신...
(대제학) 당장 내려놓으시게, 금서일세, 금서!
[대신들이 웅성거린다]
[문이 달칵 열린다]
(상선) 주상 전하 납시오! [문이 달칵 닫힌다]
(이태) 이게 어찌...
어떤 놈의 짓이냐!
[분노에 찬 숨소리]
[시행의 의아한 숨소리]
(시행) '호담선생전'
(길승) 어, 거, 뭐래?
다른 각사들도 똑같대?
(치국) 네, 어, 승정원부터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아, 궐 밖에도 성균관이랑 육조까지 쫙 뿌려 놨다는데요?
(장군)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합니까?
그냥 언문 소설 같은데 궐에 뿌려서 뭘 하겠다고
(홍익) 그러게요, 대체 뭔 내용이길래 이거...
[홍익의 아파하는 신음]
(시행) 이거 금서 목록에 올랐던 서책인 거 몰라?
괜히 읽었다가 무슨 화를 당하려고, 쯧
(홍익) 벌써 다른 데서는 다 읽고 있다는데요, 아...
(시행) 야, 이거, 이거, 이거 보기만 해도 불안해서 안 되겠다
그냥, 그냥 승정원에 갖다주고 와
우리는 손도 안 댔다고 얘기하고, 응?
- (홍익) 예 - (해령)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시행) 응? 그래
[새가 지저귄다]
[비밀스러운 음악]
(이림) '호담선생전'이라는 서책을 쫓고 있었다
지금은 금서가 되어서 구할 수 없는데
[한숨]
- (이태) 모두 회수했느냐? - (상선) 예, 전하
(상선) 하오나 이미 서책을 읽은 관원들이 많아서...
(이태) 하면 그놈들도 잡아들여라!
금서를 입에 올리는 자는
내 친히 형틀에 묶어 혀를 뽑아 버릴 것이야!
(우의정)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익평) 전하, 진정 벌해야 할 것은 금서를 읽은 자들이 아니라
금서를 유포한 자들입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이미 그 범인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거운 음악]
좌상은 그게 무슨 망발인가?
과인이 범인을 알고 있다니?
(익평) '호담선생전'은 저잣거리에 나돌던 한낱 소설에 불과합니다
이깟 허무맹랑한 서책을 읽고 떠든 자가 있다면
그자의 아둔함의 잘못이겠지만
금서를 궐 안으로 끌고 들어와 용상을 범하고 조정을 능욕한 자는
마땅히 대역죄로 벌해야 하옵니다, 전하
[긴장되는 음악]
(익평) 부디 이 일을 냉정하고 올바르게 처리해 주시옵소서
(대사헌) 대감, 뭣 하러 대비 얘기는 꺼내셨습니까?
어차피 전하께서는 대비한테 아무것도 못 할 걸 아시면서
(익평) 그런 우유부단함 때문에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난 걸세
등 뒤에 칼을 들고 서 있어도 모른 척해 주니 말이야
(대제학) 한데 아까 저 서책을 읽어 보니 자세히 쓰여진 부분이 많았습니다
혹 대비께서 김일목 봉교의 사초를 찾아낸 건 아니겠지요?
(우의정) 우리가 20년 동안 팔도를 뒤졌지만 흔적 한 번 찾지 못했네
한데 이제 와서 대비가 무슨 수로 찾아냈겠나?
(이진) 내용으로 봐서는 별다를 게 없는데
왜 부왕께서 이리 열을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제학) 실은 거기 적힌 서래원이라는 학교가
20여 년 전 실제로 폐주가 세우고 이끌었던 곳입니다
(이진) 폐주가요?
하면 여기 이 호담 선생이 폐주라는 말입니까?
(부제학)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헛웃음]
하나 그 소설의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신도 그때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오나
폐주가 서래원이라는 학교를 만들어
천민과 계집에게 천주학을 섬기게 하고
기이한 의식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한 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진) 한데 그게 사실이기는 한 겁니까?
어찌 사실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부제학) 폐주가 패악을 저지를 때
전하께서 군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것이
명백한 역사이옵니다
(해령) '그리 멀지 않은 옛날'
'호담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아련한 음악]
'호담은 서책을 좋아했고'
'사람을 아꼈고'
'이 나라를 진정으로 섬겼다'
'하나 사해 건너의 세상은 무섭도록 격변하고 있었다'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은 점점 동쪽으로 마수를 뻗쳐 왔다'
'호담은 400년 동안 조선을 지탱해 온 성리학 질서만으로는'
'더 이상 조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 필요한 건 변화였다' [이겸의 한숨]
'그의 오랜 벗 영안과 뜻을 모았다'
"호담과 영안, 이곳에서 시작하다"
[문직의 힘주는 숨소리]
(해령) '그렇게 서래원이 시작되었다' [문직이 살짝 웃는다]
'새벽 서, 올 래'
"서래원"
'새벽이 오는 곳'
[학생들이 시끌벅적하다]
'조선의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며'
'젊음과 희망이 넘실대는 곳'
'서래원 담장 안에서는 천민도 양반도, 사내도 계집도 없었다'
[도미니크가 프랑스어로 말한다] '재능이 있는 사람 누구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밤낮으로 서책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겸) 뭐라는 게냐?
(어린 재경) 아, 오장육부 중 심장에 대해 강하고 계십니다
(학생1) 너만 계속 보고 있잖아
(해령) '서로가 서로에게 방향이고 미래였다'
[학생들의 탄성] '다 함께 같은 꿈을 꾸었다'
[어린 해령의 탄성] [학생들의 웃음]
'진실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서래원은'
'계집과 천것들이 어울리며'
'사교에 빠져 오랑캐의 글을 배우는 기이한 곳에 불과했다' [대신들이 말한다]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해는 소문이 되고 소문은 곧 진실이 되어 돌아왔다'
[대신들이 저마다 말한다]
'세상은 등을 돌렸다'
[애잔한 음악] [학생들의 비명]
[소란스럽다]
(해령) '서래원과 희망에 부풀었던 젊은이들은'
'칼날 앞에서 힘없이 쓰러져 갔다'
[군사1의 힘주는 신음] [학생2의 비명]
(문직) 안 돼!
[군사2의 힘겨운 신음]
[군사2의 기합] [학생2의 놀란 신음]
[문직이 칼에 푹 찔린다]
(해령) '호담과 영안도'
'그날 밤 목숨을 잃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우리가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
'자강이라는 그들의 꿈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흐느낀다]
'끝내 새로운 아침을 열지 못한 채'
[다가오는 발걸음]
아무리 생각해도
서래원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오라버니밖에 없습니다
이 서책
오라버니가 쓰신 거죠?
(해령)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입니까?
호담이 폐주고 영안이 저희 아버지라면
이 두 사람을 모함한 사람들이 혹시
지금의 주상 전하와 공신들입니까?
넌 이 일에 끼어들지 말거라
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것도 모르고
여태 매일매일 궐을 드나들면서...
[해령이 울먹인다]
행궁에서 의녀님과 나오시는 걸 봤습니다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신 겁니까?
내일 아침에 청나라로 가는 배편을 알아봐 주마, 잠시 떠나 있거라
아니요, 두 번 다신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 (재경) 해령아! - 20년 전 그날 아침에도
아버지는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곤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슬픈 음악]
오라버니마저 그렇게 잃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훌쩍인다]
그러니까 말씀을 해 주십시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는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오라버니!
(재경) 그게 스승님과 나와의 약조였다
널 살려 내는 것 그자들 손에서 지켜 내는 것
그러니 제발
더 이상 가까워지지 말거라
[울먹인다]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달칵 닫힌다]
[한숨]
"일기청도감"
"정안"
"용모비록"
정해월 신축일
[중얼거린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이림) 괜찮다
'호담선생전'은 읽어 보았느냐?
- (해령) 예 - 어찌 생각하느냐?
이 서책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어?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서래원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해령) 하나 이 서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전하께서
아무 죄 없는 너의 아비와 서래원 사람들을 죽이고
폐주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단 뜻이 되겠지
[한숨] [애잔한 음악]
(이림) 그래도 난 알고 싶다
승정원일기에 나에 대한 기록이 한 줄도 없고
전하도 형님도 삼보도 아무도 그날 얘기를 해 주질 않지만
난 알아야겠어
내가 태어나고 폐주가 죽던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
아무리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도
마주할 자신이 생겼어, 이젠
[한숨]
경오년에
김일목이라는 사관이
일기청에 사초를 내지 않은 죄로 처형당했습니다
(해령) 그리고 그 당시에
그 사관이 어딘가에 사초를 숨겨 두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면 20년 전에 쓰인 사초가 남아 있다는 뜻이냐?
예
가능성
있습니다
[새가 지저귄다]
- (이림) 이곳이냐? - (해령) 예
당시 여덟 명이었던 한림들 중에 김일목이 참형되고
관직을 버린 사관이 셋
그중 유일하게 살아 계신 한 분의 집입니다
(해령) 계십니까?
(학주) 뉘시오?
(해령) 예문관 여사입니다 여쭐 것이 있어서...
(학주) 그동안 그리 괴롭혔으면 됐지
아직도 내게 볼일이 남은 거요?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몇 번을 말해, 몇 번을!
좌의정인지 개의정인지한테 가서 전하시오
나는 김 봉교님 사초고 뭐고 본 적도 없고
맨날 술이나 처먹는 망나니라고!
때려죽여도 말할 것이 없다고
(해령) 서래원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서래원의 학장이셨던 서문직의 여식입니다
[잔잔한 음악]
[학주의 놀란 숨소리]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학주가 살짝 웃는다]
(학주) 어, 이거밖에 내어 줄 게 없어 미안하네
(해령) 아닙니다
(학주) [한숨 쉬며] 세월이 많이 흘렀구먼
스승님이 딸자식을 얻었다고
팔불출처럼 자랑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해령) 저희 아버지를 아십니까?
내가 성균관에 있을 때 자네 아버지께서 직강이셨네
(학주) [웃으며] 엉뚱하기는 해도 지혜로운 분이셨어
내가 많이 배웠고
한데 서래원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많이 없네
회의 중에 서래원의 '서' 자만 나와도 온 대신들이 물어뜯기 바쁘니
전하께서 말씀을 삼가셨어
서래원에 가실 땐 김 봉교님만 따랐고
김 봉교님이라면...
일기청에 사초 내기를 거부하다 돌아가신
김일목 선진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학주) 그래, 자네도 찾아봤겠지
승정원일기에는 뭐라 적혀 있던가?
(해령) 추국 과정은 나와 있지 않고
그저 사관이 사초를 내지 않고
역사를 욕되게 했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학주의 헛웃음]
(학주) 역사를 욕되게 해?
김 봉교님은 그런 분이 아닐세!
우린 비겁하게 물러섰지만
그분만은 마지막까지
사관이셨어 [무거운 음악]
(학주) 김 봉교님 해가 뜨면 이대로 참형입니다
고집은 그만 부리시고 사초를 어디에다 숨겨 놨는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만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 준다질 않습니까?
민익평이 측근들로 일기청을 꾸려 놨습니다
김 봉교님이라도 계셔야 저희가 직필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심 검열
아직도 모르겠는가?
(일목) 일기청은 주군을 배신한 자들과
권력에 붓을 꺾은 사관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자리가 될 거고
우리의 사초는 이리저리 고쳐질 게야
해서 난 이렇게라도 사초를 지켜야 하네
죽음으로써
마지막 직필을 하는 게야
김 봉교님... [다가오는 발걸음]
(옥졸) 이러다 들키겠소, 그만 나오시오
김 봉교님
(일목) [작은 소리로] 심 검열, 가까이
언젠가는 푸른 숲이 우거진 섬을 찾아가시게
그곳에 직필이 있네
[학주의 한숨]
'푸른 숲이 우거진 섬에 직필이 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학주) 나도 모르겠네
김 봉교님이 사초를 숨겨 놓은 곳 같기는 한데
어딜 말씀하시는 건지
[무거운 음악]
마마
(해령) 마마
뭣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혹시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녹서당이 무슨 뜻인지
녹서당의 뜻요?
'푸를 녹', '섬 서'
푸른 숲이 우거진 섬
녹서
[애절한 음악]
(이진) '호담선생전'을 유포한 곳이 대비전이란 말입니까?
(이림) 내가 네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데
(해령)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제가 생각하는 도원 대군입니다
(삼보) 희한하게 이게 썩지도 않고...
(해령) 언제 교체하신 겁니까?
김일목 선진의 사초를 찾았습니다
(우원) 안 된다
(이진) 윤허하지 않겠습니다
(해령) 좌상 대감이 관련된 사건이라 그런 건 아니고요?
어찌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사관들의 몫입니다
(사희) 반정이 아니라 역모였다는 얘기네요?
(해령) 누군가 이 서신의 내용을 바꿔치기한 겁니다
(우원) 사초가 조작되었다는 증언과 이를 입증할 사초가 발견되었습니다
예문관 권지 구해령이 올린 상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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