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관 구해령 4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이림) 길을 잃었느냐?
[흥미진진한 음악]
[이림의 놀란 숨소리] [해령의 놀란 신음]
(해령) 매, 매화?
(이림) 참새?
너, 네가 어떻게 여길...
여사?
[피식 웃는다]
여사가 되었느냐?
그러는 선비님은요?
대체 뭐 하시는 분이길래 지금 여기서, 지금 이렇게...
지금 나한테 그런 거 캐물을 신세가 아닐 텐데?
(이림) 한낱 관원 따위가 내전을 돌아다닌다
그것도
전하의 어명으로 출입이 금지된 이 녹서당을?
겁도 없이?
아, 돌아다니기는 무슨 뭐, 누가 돌아다닙니까?
그냥 가는 길목에 좀 스쳐 지나가는 거뿐입니다
그것도 죄입니까?
(이림) 그게 죄인지 아닌지는 의금부에서 판단해 주겠지
여기! [익살스러운 효과음]
여기! [해령의 당황한 신음]
[감미로운 음악]
[심장 박동 효과음]
원하시는 게 뭡니까?
(해령) 대체 뭘 어찌해야 절 보내 주시겠냐는 말입니다
[떨리는 숨소리]
아, 빤히 쳐다보지만 말고 말씀을 좀...
아... 해 보십시오
[긴장한 숨소리]
감히 어디다 손을...
[헛기침하며] (이림) 난...
난 그대를 보내 줄 생각이 없다
예?
그대가 내게 잘못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여야 말이지
독회에서 매화를 사칭한 것도
그날 날 잡혀가게 만든 것도 [해령의 한숨]
또 어젯밤 나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몇 시진이나 기다리게 한 것도
아니, 그날 일은 제가 정말 그렇게 될 줄 모르고...
어젯밤 약속요?
[익살스러운 음악] 설마 또 피치 못한 사정이 있었다
핑계를 대는 것이냐?
아니요, 아니, 그,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몰라서 묻습니다
(해령) 선비님과 제가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겁니까?
그날 이후로 서로 뒤통수도 본 적 없는 사이에?
내가 서신을 보냈지 않았느냐?
'초하룻날 유시, 광통교'
전 받은 적이 없는데요?
[익살스러운 효과음] [당황한 신음]
받은 적이 없어?
아, 설마
아니, 설마 지금...
혼자 약속하고 혼자 기다리다가 혼자 바람맞아 놓고
저한테 화내시는 겁니까?
[더듬거리며] 아니, 내가...
내가 서신을 보냈으니까 너도 당연히...
[어이없는 웃음]
아, 저, 선비님
선비님은 약속이 뭔지 모르십니까?
내가 무언가 제안을 했을 때
상대방이 그에 응하고 상호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약속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쩝, 대체 뭐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길래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아유
[해령이 혀를 쯧쯧 찬다]
(삼보) 게 누구냐?
(해령) 아...
(삼보) 예가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는 게야?
어디 소속 누구인지 당장...
구해령이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예문관 여사
구해령
구해령?
[작은 소리로] 가짜 매화
[삼보의 놀란 신음]
(박 나인) 대군마마!
[나인들의 다급한 숨소리]
지금 저하께서 대군마마...
대군마마는 주무시고 계신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흥미진진한 음악] 저 안에서
(최 나인) 예? 허 내관님, 노망나셨어요? 지금 여기...
(삼보) 서 산책을 하시다가
방금 전에 들어가서 주무신다고, 대군마마가
- 아니... - (삼보) 일단
(삼보) 우리 아리따운 낭자는 갈 길 마저 가십시다
예, 가십시다 [해령의 당황한 신음]
비켜
어,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거라
[삼보의 재촉하는 신음] 아니, 왜...
(삼보) 특히 너, 너!
너 입 다물고...
(이림) 쟤, 쟤 지금 나한테 반말했지?
저쪽에 저기, 보이지, 저기, 어?
- 절로 가시면 돼 - (해령) 네 [삼보의 옅은 웃음]
- 가셔 - (해령) 네
아니, 아니, 근데 그래서 매화는 뭐 하는 사람인 거야?
[웃으며] 저기로
(해령) 아, 예 [삼보의 재촉하는 신음]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어, 마침 저기 오네
허삼보
[이림의 옅은 한숨]
(이림) 여인 앞에서 의리도 충심도 없는 나약한 인간
[삼보의 기가 찬 웃음]
마마
제가 지금 마마를 살려 드린 겁니다
모르시겠습니까?
- 나를 살려? - (삼보) 예
그 여인이 어떤 작자입니까?
(삼보) 독회에서 마마를 만나자마자 사람들한테
'이자가 매화요' 풀어 버린
세상천지 최고로 입이 가벼운 여인이옵니다
한데 그 여인이
마마의 신분을 알아 보십시오
(삼보) 아마 하루아침에
매화가 도원 대군이라는 소문이
그, 조선 팔도, 아니, 아니
바다 건너 청국까지 그냥 쫙 퍼질 것이옵니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이림) 어차피 아바마마께서도 내가 매화라는 걸...
(삼보) 전하께서 혼자 조용히 알고 계시는 것과
온 세상이 다 같이 알게 되는 것하고는 다르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체통을 중요시하는 전하십니다
한 번만 더 마마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알게 되신다면
차마 제 입으로는 말씀드릴 수는 없었지마는
저런 결말이지 싶습니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익살스러운 음악]
(이림) 하면, 내 일생일대의 원수가 지척에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란 뜻이냐?
난 아직 사과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도원 대군마마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 매화는
매화는 많은 것을 할 수가 있지요
[종소리 효과음]
[삼보와 이림의 조용한 웃음]
[괴로운 신음]
[괴로운 신음]
(시행) 아이고, 죽겠다 [홍익의 힘겨운 숨소리]
아유, 나...
[한림들이 저마다 신음한다] 아이고, 죽겠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경묵) 쭉 들이켜십시오, 양 봉교님
(시행) 내 앞에서 뭐 마시란 소리 하지 마
저리 치워
(시행) 나 이렇게 만든 당사자 어디 갔어?
(시행) 아직이야?
(홍익) 아이, 수십 년간 폭음으로 단련된 양 봉교님도 이 지경인데
걔는 오죽하겠습니까?
분명 방구석에서 관 짜고 들어간 사람처럼 자빠져 있을걸요?
그건 모르는 거야
어제 봤지?
눈깔이 독기로 막 이글이글한 거
다리를 못 쓰면은 팔로 막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라도
출근을 할 인간이라고, 걔가!
(경묵) 글쎄요
고년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피식 웃는다] 오늘 궁문은 못 넘을 겁니다
뭔 소리야?
(경묵) 제가 수문장한테 아까 청을 넣어 놨거든요
예문관 권지 구해령이라는 계집이 오면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피식 웃으며] 아마 지금쯤이면
그 앞에서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재빠른 발소리] (해령) 안녕하십니까?
[해령의 가쁜 숨소리] (경묵) 구 서리, 너 어떻게 들어왔어?
아, 저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뭐, 문제 있습니까?
(시행) 문, '문제 있습니까?'
신입이 묘시 반 각 넘어서 설렁설렁 기어들어 오면서
'문제 있습니까?'
- (해령) 죄송합니다 - (시행) 됐고!
(시행) 빨리 가서 서고 청소나 해
(해령) 예
(경묵) 아, 대체 어떻게...
내가 목에 칼을 대서라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그랬는데
(시행) 쯧, 사내 자슥이 비겁하게 뒷구녕으로 수작이나 부리고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8품인 거야, 이 팔푼아!
- 아, 팔푼... - (시행) 뭐?
아, 팔푼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경쾌한 음악] [서고 안이 분주하다]
- (해령) 죄송합니다 - (아란) 어?
- (해령) 제가 좀 늦었습니다 - (아란) 구 권지님!
(은임) 오늘 못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몸은 괜찮으세요?
아, 머리가 조금 깨질 거 같기는 한데
뭐,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권지들의 옅은 웃음] (은임) 이건 우리 주세요
아, 구 권지님이 그 한 몸 바쳐서 우리를 구해 주셨는데
이렇게라도 갚아야지요
[은임과 해령의 웃음] (아란) 맞아요
구 권지님은 우리 은인이십니다 [해령의 민망한 웃음]
오늘은 눈치껏 쉬세요
아유, 뭘 또 은인이라고까지 하십니까
저, 그럼 저는 저기 앉아서 잠깐 눈 좀 붙이겠습니다
- (은임) 네, 네 - (아란) 빨리 가세요
(사희) 구 권지님
(사희) 어제 절 도와주신 것 말입니다
아...
아유, 고맙다는 말은 됐습니다
이, 같은 권지 신세에 서로 돕고 돕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숨]
불쾌했습니다
- (해령) 예? - 구 권지가 그리 나서지 않아도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원치 않는 도움은
받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 입장도 생각해 가며 행동하십시오
이건 구 권지를 위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예
송 권지 말 뜻 알겠습니다
[옅은 한숨]
[아란이 소곤거린다] [은임의 옅은 웃음]
(최 상궁) 자네들이 예문관 여사들인가?
(아란) 예
한데
누구세요?
(상궁) 대비전 최 상궁 마마님이시다
예를 갖춰라
(최 상궁) 따라들 오시게
(은임) 아니, 어딜 가시는지 말씀을 해 주...
(최 상궁) 따라오래도!
(대비 임씨) 귀한 손님들께만 대접하는 죽로차일세
천천히들 드시게
(대비 임씨) 그래, 궐 생활은 어떠하고?
(해령) 아...
[은임의 머뭇거리는 신음]
(은임) 소, 소신들은 그저...
하늘 같으신 주상 전하를
보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은이 망극하고, 또...
[대비 임씨의 웃음]
미안하네
어려운 것을 물은 내 잘못이네
(대비 임씨) 내 궐에서만 반백 년이네
어찌 자네들 사정을 모르겠는가?
무엇 하나 녹록한 것도 없고
녹록한 이도 없겠지
씁, 듣자 하니
예문관이 그...
신참들에게 아주 짓궂다지?
- (해령) 아닙니다 - (은임) 아닙니다
(아란) 네
[아란의 놀란 숨소리]
아니요 [아란의 당황한 신음]
못 할 말도 아닐세
(대비 임씨) 조선은 정도를 걷지 않는 이에게는
한없이 매정한 곳이니
(대비 임씨) 하물며 여인의 몸으로 관직에 오른 자네들에게야
오죽하겠는가?
[잔잔한 음악]
하나 누가 뭐래도 자네들은
사필을 잡은 사관일세
주상을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을 보살핀다는 생각으로 힘써 주시게
나도 도울 일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도울 터이니
황송하옵니다, 대비마마
(권지들) 황송하옵니다
(은임) 이래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
뭐, 그러나 봅니다
대비마마는 표정도 온화하시고
말투도 우아하시고
[감탄하며] 세상에, 세상에 그리 고울 수가 없는데
아, 우리 예문관 개나리들은
마음이 개떡 같으니 얼굴도
개떡 같지 않습니까? [아란과 해령의 웃음]
(생각시) 여사님들
[긴박한 음악]
[문이 덜그럭 잠긴다]
(은임) 어, 무슨 일이십니까?
[권지들의 당황한 신음] 어, 왜 이러세요? 놓으십시오
(아란) 아, 놓으세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최 상궁) 내 오늘 네년들에게
내명부의 법도를 가르쳐 주마
(시행) 홍문관도 아니라고?
(장군) 예, 아, 괜히 물어봤다가 핀잔만 들었습니다
자기네가 계집들 데려다 뭐에 쓰냐고요
(경묵) 아, 제가 말했잖습니까?
아, 이것들 어디서 농땡이 치고 있는 거라니까요?
면신례도 치렀겠다 이제 자기들 세상이라 이거죠
아, 나, 이것들이... [치국의 다급한 신음]
- (치국) 봉교님 - (홍익) 봉교님
- (치국) 봉교님, 큰일 났습니다 - (홍익) 봉교님, 큰일 났습니다
[홍익과 치국의 가쁜 숨소리]
(홍익) 아, 이거...
[권지들의 힘겨운 숨소리]
[해령의 가쁜 숨소리]
[인두가 지글거린다]
(최 상궁) 명심하거라
함부로 입을 놀리는 계집은 입이 지져지고
물건을 훔치는 계집은 손이 잘리고
정절을 지키지 못한 계집은
목이 날아간다
너희들이 보고 듣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해서는 안 되느니라
너희에게는 눈도 귀도 마음도 없음을 명심하고
그저 숨죽여서 계집답게 상전의 명을 따르며 지내면 된다
알겠느냐?
왜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게야?
알겠냐고 묻질 않느냐!
저희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저희는 사관입니다
한데 어찌하여 내명부의 법도를 따라야 하냐는 말입니다
맹랑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로구나
(최 상궁) 과거를 좀 쳤다 하여 사내라도 된 것 같으냐?
관복을 입었다 하여 네년이 정녕 관원이 됐다 생각하느냐?
계집이라면
누구나 궐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전하의 여인이 되고
내명부의 법도에 따라 살다가 내명부의 법도에 따라 죽는 것이야
그래도 네년의 주제를 모르겠다면
영영 잊지 못하도록 해 주마
[위태로운 음악]
[떨리는 숨소리]
[고조되는 음악]
(우원)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예문관 권지들입니다
여기서 지금 최 상궁님과 함께 있을 이유 없습니다
내명부의 일일세, 물러나게!
관원을 데려다 겁박하는 것이
언제부터 내명부의 일이었습니까?
(최 상궁) 뭬야?
- 데리고 나가 - (최 상궁) 민 봉교!
- 얼른! - (시행) 빨리 데리고 나가!
(치국) 아니,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쥐부리글려입니까?
내명부 신고식?
(장군) 내가 괜히 궁녀들 조심하라고 했겠냐?
내명부에 찍히면 뼈도 못 추리니까
웬만하면 눈 마주치지 말고 말도 걸지 말고, 알았어?
(해령) 저기
민 봉교님은 저렇게 혼자 두고 와도 괜찮습니까?
[시행의 한숨]
(시행) 야, 네가 지금
좌의정 아들 걱정할 처지야?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아, 거기가 어디라고 졸졸 따라가냐고
하다못해 우리 집 개도 낯선 사람 안 따라가는데
(은임) 저희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대비전에서 찾으신다기에...
(시행) 모르고 간 게 더 잘못이다, 어?
아무리 대비마마라 그래도
관원을 부를 때는 적법한 절차가 있고 원칙이 있는 거 몰라?
특히나 사관은
저승사자가 와서 데리고 가려고 해도
하던 업무 다 마치고
남은 입시는 언제인지 확인하고
예문관에 보고까지 다 하고 나서야
죽든지 말든지 하는 거라고 이 덜떨어진 것들아
(아란) 그걸 저희가 어찌 압니까?
뭘 알려 주셨어야 알죠
뭘 알려 주셨어야!
- (은임) 허 권지... - (아란) 그렇잖습니까?
(아란) 봉교님이 저희한테 뭘 가르쳐 주셨는데요?
다른 선진님들은
[울먹이며] 또 뭘 가르쳐 주셨는데요?
뭘 보고 배우려고 해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질 않는데
대체 저희더러 어떻게 알아서 알고
알아서 처신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저희 오늘 이런 꼴 당한 거
선진님들 책임도 있습니다
예문관에서 저희를
서리라 부르면서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고작 상궁 나인들이 저희 끌고 가서
궁녀 취급 하지는 못했을 거라고요
(경묵) 야, 데려가서 겁 좀 준 거 가지고 무슨 궁녀 취급?
(아란) 저희가 전하의 여인이랍니다
전하의 여인이니까
내명부 법도나 지키면서 조용히 지내랍니다
보고 들은 것 다 잊고
상전 말만 따르다 죽으랍니다
이래도 궁녀 취급이 아닙니까?
이래도!
저희가 원칙, 절차 따질 만한 주제가 되냐는 말입니다
[서글픈 음악]
(해령) 허 권지
(경묵) 저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야, 당장 안 돌아와, 씨!
(홍익) 양 봉교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쟤가 괜히 화풀이하느라...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아란이 서럽게 흐느낀다]
(아란) 제가 이딴 취급 받을 줄 알았으면
별시는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아, 대체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요
뭘 그리 잘못했다고
[해령의 안타까운 숨소리]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등을 토닥인다]
(경묵) 아무리 똥오줌을 못 가려도 품계는 가려야지
어디서 권지 찌꺼기들이, 씨...
[큰 목소리로] 아휴, 씨!
[경묵이 책장을 휙휙 넘긴다]
[경묵이 책상을 쾅 친다]
[입소리를 쩝 낸다]
너는 또 왜?
저 아이들
내일부터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경묵) [책상을 탁 치며] 민 봉교!
- (홍익) 민 봉교님 - (장군) 민 봉교님
(시행) 한번 해 봐, 그럼
아이, 뭐라도 가르쳐 놔야 부려 먹든 굴려 먹든 할 거 아니야?
난 신경 안 쓸 거니까 민 봉교가 알아서 해
네
(경묵) 양 봉교님
저 들어왔을 땐 석 달 동안 붓 한번 못 쥐게 하시더니
왜 저 계집들한테는 이리 관대하십니까?
(홍익) 맞습니다
저한테는 천 번을 흔들려야 사관이 된다면서
천 일 동안 욕먹을 준비 하라고 했잖습니까?
근데 그게 아직 500일이나 남았는데...
거, 참 시끄럽게 하네, 어?
아, 그대들은 일 안 해요?
여유가 막 넘쳐서 강물 되어 흐르네?
[경묵의 못마땅한 한숨]
[어두운 음악]
[방울이 짤랑거린다]
[긴장되는 음악]
[방울이 요란하게 짤랑거린다]
[소란스럽게 싸운다]
[다급한 신음]
(재경) 좌상 대감
자네가 이런 곳에 살고 있었군
사헌부 장령의 자리를 제안한 지 수일이 지났네
여태 받아들이지 않는 연유가 무언가?
백관을 감찰하는 직책 아닙니까?
제 것이 아니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남들 뒤나 캐고 다니며
명줄을 쥐고 흔드는 게 거북하다
그리 들리는군
내가 구 교리를 왜 아끼는지 아나?
자네 밑바닥을 봤기 때문이야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위인인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음악]
(익평) 하니, 내게 적임자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게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알고 있으니
저를 이리 급히 궐로 불러들이시는 연유가 무업니까?
'호담선생전'을 인쇄하던 서포를 찾았어
마지막 한 놈이 잡히기 전에 자결을 한 걸 보니
대비전에서 단단히 겁을 준 모양이야
내전에 처박힌 여인들의 솜씨라고 하기엔
너무 치밀하지 않나?
- 하면... - (익평) 궐 안팎을 잇는
대비전의 사람이 있다는 뜻일세
해서, 나도 대비가 모르는 나의 사람이 필요해
자네처럼
장령이 되어 그를 찾아 주게
이건 청이 아니라
명일세
(은임) 오늘은 들어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푹 쉬십시오
(해령) 기운 내세요, 허 권지
[아란의 속상한 숨소리]
녹서당?
"녹서당"
[익살스러운 효과음]
예?
제가
저, 저, 저 혼자요?
[익살스러운 효과음]
[옅은 한숨]
[코를 훌쩍인다]
[긴장한 숨소리]
저, 대, 대군마마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대군마마?
[문이 달칵 열린다]
[긴장한 숨소리]
마마
예문관 권지 구해령 들었습니다
저를 어찌하여 찾으시는지...
(이림)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놀란 숨소리]
라고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익살스러운 음악]
마마
제가 아침에 녹서당에 들어온 것은...
(이림) 곧, 어명을 어긴 것이다
라고 역시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당황한 숨소리]
마마
소신을 용서하여...
(이림) 받고 싶다면 [익살스러운 효과음]
(해령) [작은 소리로] 또 뭐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흥미진진한 음악]
도원 대군께서
마음으로
[이림이 휘파람을 분다]
(이림) 어, 여기
(이림) 그 안쪽도 [해령의 힘겨운 신음]
깨끗이 좀 해라, 깨끗이 좀
(해령) 예, 예, 하고 있습니다
[감미로운 음악]
그, 여기...
[해령의 힘겨운 한숨]
여기 말고 끝에, 끝에
[못마땅한 숨소리]
"녹서당"
[이림의 힘겨운 신음]
[해령의 힘겨운 숨소리]
[힘겨운 숨소리]
(이림) 얼른
[해령의 힘겨운 숨소리]
[해령의 힘겨운 신음]
- (해령) 아이, 씨... - (이림) 괜찮아?
이 귀한 것들을...
[해령의 지친 신음]
아이, 씨, 조심히 좀...
[해령의 힘겨운 숨소리]
(해령) 아휴...
(이림) 그, 저쪽, 저쪽
저쪽
(해령) 아유, 씨...
[해령의 힘주는 신음] [이림의 놀란 신음]
[갈퀴가 풍덩 빠진다]
[해령의 지친 숨소리]
[해령의 헛웃음]
[새가 지저귄다]
[흥미진진한 음악] [이림의 당황한 신음]
(해령) 오, 실수
아유, 일을 하도 했더니 손에 힘이 빠져서
[이림의 못마땅한 신음]
그렇다기엔
너무 정확히 떨어트린 거 같은데?
어, 저, 여긴 다 쓸었습니다
이제 또 뭐 어디 하면 됩니까?
[못마땅한 숨소리]
응?
오늘은 이만 가 보거라
- '오늘은'? - (이림) 하면?
어명을 어겨 놓고
하루 만에 용서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내일도 오고, 내일모레도 오고
또 그다음 날도 여길 와 [해령의 한숨]
이 도원 대군이 널 용서하는 그 날까지
매일매일 [해령의 한숨]
[기가 찬 웃음]
선비님
우리 제발 좀 솔직해집시다
어명이니 대군마마니 이런 거 다 핑계고
그동안 저한테 화난 거
지금 이때다 싶어 가지고 풀고 계신 거 아닙니까?
그리 날 못 믿겠다면
가서 대군마마를 불러오고
[이림의 여유로운 웃음]
[이림의 아파하는 신음] [흥미진진한 음악]
[이림의 아파하는 신음]
(이림) 무슨 여인이 이렇게...
이것도 실수냐?
아니요, 고의입니다
작작 좀 하시라는 뜻에서
(이림) '작작'?
마마께는 제가 성심성의껏 사죄하다 간다고 전해 주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이림의 못마땅한 신음]
[이림의 아파하는 신음]
(해령) 아참!
그동안 매화 소설을 욕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선비님의 깊은 아픔을 미처 몰랐습니다
- (이림) '깊은 아픔'? - (해령) 네
그땐 이 사지 멀쩡한 선비님이
염정 소설이나 쓰며 종이를 낭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해령) 한데 이제 보니
아이고, 그렇게라도 남녀의 정을
느껴 보고 싶었던 거구나, 쯧쯧 [익살스러운 효과음]
그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사지 멀쩡한 사내가 아니라
요 사지만 멀쩡한 사내라서
너 지금 그게...
하면 힘내십시오, 힘! [밝은 음악]
(이림) 야, 구해령, 나... [이림의 당황한 신음]
야, 구해령!
이건 그냥 아니고...
야, 어쨌든 아니야!
야!
[통쾌한 탄성]
[해령의 힘주는 신음]
- 뭐 하고 계세요? - (해령) 어?
씁, 드디어 실성하신 거예요?
[풋 웃으며] 아니, 그냥 즐거워서
내가 궐에서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거든
[설금의 놀란 신음] [해령의 피곤한 신음]
(설금) 사내요, 여인요?
- (해령) 뭐? - 아, 사내요, 여인요?
아, 그, 사내는 사내인데...
[익살스러운 효과음]
[흥미로운 음악] [해령의 놀라는 신음]
(설금) 저기, 그, 잘생겼어요?
[버벅대며] 어떤, 어떤 느낌이에요?
막 하얗고 말간 꽃선비?
아니면 다부진 육체
막, 돌쇠파? [설금의 힘주는 신음]
뭐? [설금의 신난 웃음]
(설금) 그래, 그래, 뭐
외모는 백번 양보해서 중상위권이다 치고
키는요? 집안은? 어, 품계는?
생시는 아세요? [설금의 놀란 신음]
저 궁합 보러 갈까요?
아,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는?
내가 미쳤다고 그 인간이랑...
야, 어차피 그 인간은
여인을 품을 수가 없는 그런 사내란 말이다
[설금이 폭소한다]
(설금) 아이고...
하여간, 요즘 남정네들
내숭은 무슨...
[해령의 답답한 한숨]
그 말을 믿으세요?
야,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사실이라니까?
(해령) 아, 그러니까, 그, 몸이...
이제 그, 신체적으로다가
이제 여인을 이렇게 저렇게 그게
될 수가 없는 그런...
응, 그게 다 내숭이라...
[익살스러운 효과음]
[설금의 당황한 숨소리]
아씨, 그 혹시...
[입소리를 쩝 낸다]
그러니까, 아예?
(설금) 요런, 요, 아니, 이렇게
요맨큼도?
[기가 찬 웃음]
[설금이 입소리를 쩝 낸다] [익살스러운 음악]
[해령의 옅은 한숨]
[설금의 힘겨운 신음]
어디 가, 얘기 듣다 말고?
물이 없는 바다를
어찌 바다라 하리오?
사내 아닌 사내 이야기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야, 그, 나도, 나도 그 사내로서 얘기하는 거 아니야
(해령) 그냥, 그냥 뭐, 있잖아, 좀
티격태격 재수는 없어도 이제
그냥 좀 친해질 수는 있을 거 같은 그런...
(설금) 아, 그러니까
그 양반하고 친구를 해 드시든
께벗고 목욕을 가시든
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요
으이구
(해령) '으이구'?
[문이 탁 닫힌다] 아유, 진짜, 쯧, 저게 진짜...
[옅은 한숨]
[새어 나오는 웃음]
[설레는 음악]
아휴
[풀벌레 울음]
[밤새 울음]
[어두운 음악]
[사내의 신음]
(삼보) 부인!
[삼보의 반가운 웃음]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오?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그 날이 그 날이지
부인은? 어,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아, 그래, 그래, 그래
아, 이게, 피곤한 사람 붙잡고 내가 괜히 그래...
일단 그, 잠부터 푹 주무시오, 어?
여독도 좀 풀고, 아, 들어가시오
예, 그럼
[삼보의 웃음]
[긴장되는 음악]
"호담과 영안 이곳에서 길을 내다"
[상자를 달칵 닫는다]
[홍익의 힘겨운 신음]
(은임) 이게 뭡니까?
(장군) 양 봉교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거다
'예문관 조직도'
(은임) 그러니까 이걸 왜...
(홍익) 왜긴 왜야?
너희들이 주제도 모르고 막 덤비니까
서열부터 확실히 하려고 그러시는 거지
[홍익의 못마땅한 신음]
(장군) 자, 봐
예문관 전임 사관 여덟 명을 두고
한림이라고 하는 건 알지?
- (은임) 네 - (해령) 네
그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분이
양시행 봉교다
[익살스러운 음악] 왜, 미친놈이 뭐 어쨌는데?
그다음이 민우원 봉교님이시다
너 면신례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는 있느냐?
대교 중에서는 손길승 대교님이 현경묵 대교님보다 먼저고
데려가서 겁 좀 준 거 가지고 무슨 궁녀 취급?
(아란) 음...
같은 품계 사이에도 서열이 있습니까?
(장군) 당연하지
들어온 시기가 다른데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넷이 다 같이 검열이어도
나는 얘네 셋한테
욕을 할 수가 있어
근데 얘네는 나한테 욕을 하면 안 돼
그리고 여기 성서권 검열은
안홍익, 김치국 검열한테
욕을 할 수가 있고
안홍익 검열은 김치국 검열한테
욕을 할 수가 있고, 김치국 검열은
없어
그냥 욕받이야
(치국) 황 검열님
저도 얘네한테는 선진 아닙니까?
(장군) 야, 아무리 그래도
구 서리가 스물여섯이고
네가 열아홉인데 욕을 하면...
'장유유서', 인마, '장유유서'
[권지들의 웃음]
(치국) 치... [문이 달칵 열린다]
(경묵) 야!
이것들을 확, 씨
검열이랑 서리가 싹 다 여기 있으면 어떡해?
내가 대교가 돼 가지고, 어?
심부름하러 다녀야겠어?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너희는 됐고
너희
뭐 해?
따라와
(은임) 어?
[은임의 작은 탄성]
[밝은 음악]
[해령의 벅찬 숨소리]
[당상관들의 놀란 신음] (당상관1) 아니, 이게 무슨...
예가 어디라고 계집들이 발을 디딘 것이야?
썩 물러가지 못할까?
이곳이
사관의 자리다
(은임) 민 봉교님, 저희 지금
지금 입시하는 겁니까?
자리하거라 [권지들의 놀란 숨소리]
(당상관2) 민 봉교
자네 이게 지금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국정을 논하는 곳에 여인이라니?
대전을 더럽혀도 유분수지
아니, 이런 고얀 인사를 봤나
어른이 면전에서 말을 하는데!
(당상관1) 그만하시게, 그만, 어
[대제학의 못마땅한 헛기침]
[대신들의 못마땅한 헛기침]
[대신들이 구시렁거린다]
(부제학) 어허, 이런...
[대신들의 못마땅한 헛기침]
[대신들이 구시렁거린다]
(당상관3)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김 내관) 세자 저하 납시오
[엄숙한 음악]
[이진의 헛기침]
[권지들이 사책을 사락 펼친다]
[삼보의 옅은 웃음]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달칵 닫힌다]
왜 너희들뿐이야?
데려오라는 사람은 어디 가고?
(박 나인) 듣자 하니 대전 입시를 갔다고 합니다
대전 입시?
여사들이 대전 회의에 들었단 말이냐?
(나인들) 예
하이고, 또 민우원 봉교가 또 일냈구먼, 일냈어
민우원이라면
형님의 예동이던?
세자 저하 예동 출신인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요
그 대단한 좌상 아드님인데다가
인물 좋아, 인품 좋아
학문은 또 어찌나 뛰어난지
열다섯에 성균관 입학
열여덟에 장원 급제
남들이 맨발로 달려가는 인생
자기 혼자 말 타고 질주한다고
시기, 질투, 중상모략
가담항설에 시달리는 위인일진대
딱 하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요
사람이
[댕 울리는 효과음] 돌이야
[혀를 쯧쯧 차며] 융통성이 없어서 돌
마음이 없어서 돌
주변 사람들을 아주 그냥
[익살스러운 효과음] 돌게 만드는 돌아이라서 돌
하면
그런 자 밑에서 일하는 구해령은
순탄한 인생이여, 안녕 [익살스러운 음악]
(삼보) 쯧쯧, 작별 인사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고생길이 훤합니다
[삼보의 고소한 신음]
그래? 쓰읍...
이 부채질은 됐다
[이림의 후련한 신음]
(이림) 내 속에서부터, 쓰읍
아주아주 상쾌한 바람이 부는구나
[이림의 후련한 웃음]
[후련한 웃음]
[파발꾼이 소리친다]
(주서) 저하, 급발이 올라왔사옵니다
(도승지) 들라
[도승지가 종이를 쓱 꺼낸다]
(도승지) 경상도 하동부사가 보낸 장계이옵니다
[문이 달칵 닫힌다] 계속된 장마로 강이 범람하여
침수된 마을이 수십에 달하고
물에 빠져 죽거나
산사태에 파묻혀 죽는 백성들이
수백에 달한다고 하옵니다
[대신들의 놀란 숨소리]
(이진) 비가 그토록 내리는 동안
하동부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백성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그것이,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군역을 피해
지리산 계곡에서 숨어 살던 자들이라...
우선 진휼청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위로하라 명하세요
(이진) 피해를 복구할 때까지는 시일이 걸릴 터이니
당분간 백성들에겐 군포를 탕감하겠습니다, 또한...
(대제학) 아니 되옵니다, 저하
홍수로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군역을 피해 도망간 죄인들이옵니다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리진 못할망정
어찌하여 군역을 더 면해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하면, 하루아침에 부모 자식을 잃고 갈 곳 없는 백성들에게
세금부터 걷으란 얘기입니까?
(우의정)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마시옵소서, 저하
애초에 그자들이 변고를 당하게 된 경위가 무엇입니까?
군포를 내지 않으려 집을 버리고
위험한 산속에 숨어 살다가 자초한 일이 아닙니까?
(익평) 저하
요즘 들어 양인들이 군포를 내지 않고 도망가는 일이 잦아
각 지방 선혜청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옵니다
군역은 백성이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요
군역을 저버린 자는 나라를 저버린 것과 같으니
이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세우시옵소서, 저하
(대신들) 바로 세우시옵소서, 저하
(대사헌)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하
(대신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하
(대사헌)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하
(대신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저하
군역이 백성의 의무라...
하면 경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어 본 적 있습니까?
[위태로운 음악]
경들의 아비는, 경들의 아들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어 본 적 있습니까?
(대사헌) 저하
군역은 양민들에게만 주어지는...
(이진) 언제부터요?
대체 언제부터 군역이
힘없고 가난한 양민들의 몫이 되었냐는 말입니다
(이진) 조선에 두 차례 전란이 있기 전에는
종1품 이하 모든 이가 군포를 냈습니다
한데 시간이 흐르면서
힘 있는 관리들이 빠지고
지방의 양반 토호들이 서원으로 숨어들고
어느새 중인들까지 군포 내기를 거부하니
그 모든 것이 양민들의 몫이 된 거 아닙니까?
(이진) 백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내어 주는 것과
하나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내어 주는 것은
그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한데 이 땅의 모든 부를 독식하고 있는 경들은
의무를 지기는커녕 그 책임을 양민들에게 미루고
하나를 가진 사람에게 둘을 내놓으라 요구하니
백성들이 집과 고향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산속으로 숨어드는 겁니다
(이진) 그자들이 나라를 저버렸다 하셨습니까?
그래요, 백성들이 나라를 저버려도
나는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게 국가입니다
그게 국왕입니다
[문이 덜컥 열린다]
(이태) 건방진 놈
[문이 끽 닫힌다]
(이태) 내 너의 열의를 믿고 국정을 맡겨 놓았더니
감히 과인을 지척에 두고 국왕의 도리를 논하고 있는 게냐?
아바마마, 소자는...
세자는 나가 보거라
[애절한 음악] 아, 아바마마...
(이태) 두 필짜리 군포를 한 필로 줄여 줘도 내지를 못하니, 원...
하동부사는 당장에 파직하고
경상감사는 관직을 내려놓고 대기토록 하라
[문이 끽 열린다]
(은임) 어휴, 전 정말 숨도 못 쉬는 줄 알았습니다
[아란의 한숨] 아, 저기 있는 당상관들은
최소 정3품
조정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한데 어찌 세자 저하 하는 말끝마다
'아니 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하나같이 다 쌈닭들 같습니다
(서권) '쌈닭'
대간들의 존재 이유를 참으로 명쾌하게 설명하십니다
'대간'요?
(서권) 사헌부와 사간원 두 곳의 관원들을 대간이라 일컫습니다
맡은 역할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거나 임금의 과오와 독단을 막고
간쟁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오늘처럼요
독단이 아니었습니다
(해령) 그렇지 않습니까?
저하께서 백성들을 돕고자 하는 것은 독단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행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잔잔한 음악]
사관은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우원) 생각을 하면 생각대로 치우치기 마련이고
생각대로 치우쳐 기록하면
그건 역사가 아니라
일기에 불과해
[우의정이 혀를 쯧 찬다]
(대제학)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집니다
저하께서는 입만 열었다 하면 저희 사대부들을
오랑캐 취급이니, 원...
(대사헌) 국본이라 불리니
정녕 이 나라의 뿌리가 자신이라 착각하시는 게지요
[비웃으며] 언젠가 깨달으실 겁니다
진정한 국본이 누구인지
(우의정) 그 언젠가가 대체 언제냐는 말입니다
요즘 대전 회의만 들어가게 되면
내가 세자를 마주하고 있는 건지
폐주를 마주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
[무거운 음악]
[우의정의 헛기침]
[예문관 관원들이 폭소한다]
이야, 이렇게 못 쓰는 것도 재주다, 재주
[홍익의 웃음]
(장군) 너희는 왜 글을 쓰랬더니 난을 쳐 왔어?
내일부터 도화서로 출근할래?
입시가 처음이라 그렇죠
뭘 그렇게까지 놀리십니까?
(서권) 연습 좀 많이 해야겠습니다
[홍익의 웃음] [장군의 헛기침]
(홍익) 아, 민 봉교님
여기 와서 얘네 적은 것 좀 보십시오
[홍익의 웃음]
[익살스러운 음악]
(치국) 봉교님은 그게 읽히십니까? [우원의 한숨]
(우원) 아니
쓰읍, 쉽지 않네 [사희의 한숨]
한 글자라도 알아볼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아, 어
[한림들의 새어 나오는 웃음]
(우원) 씁, 그래, 입시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어려웠습니다
말로 듣고 언문으로 옮기는 것도 시간이 걸리는데
말씀들은 또 왜 그렇게 빠르신지
(은임) [한숨 쉬며] 저는 도통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힘들었습니다
음, 일단 '눈썹이 짙은 관원'
'머리가 큰 관원'
'목이 짧은 관원'
이리 쓰긴 했는데
선진님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어찌 구별하십니까?
(우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아란) 이게 뭡니까?
'용모비록'?
[잔잔한 음악]
(아란) 어?
- (아란) 이분은 아까... - (서권) 맞습니다
(서권) 정1품 좌의정 민익평
(은임) 어?
이건 아까 그 머리가 큰 관원입니다
'정7품 승정원 주서 제갈탁'
(우원) 그래, 맞다
삼정승은 물론
사헌부, 사간원의 대간들
우리가 함께 일해야 할 승정원, 춘추관
오며 가며 마주칠 홍문관, 경연청 등등
궐내 각사 주요 인물들의 용모파기와
직책이 담긴 사관들의 비기다
검열들이 매달 갱신하며 가지고 있다가
후임 사관이 오면 물려주는 것이 전통이니
[한숨]
이제 너희가 가질 차례고
하면, 저희를 사관으로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홍익) 야, 김칫국 마시지 마
손에 물집 한 번 잡혀 본 적 없는 것들이 무슨 사관이라고...
[홍익의 멋쩍은 헛기침]
[헛기침]
틈틈이 보고 모두 외우도록 해라
도움이 될 것이다
(해령) 민 봉교님
감사합니다
[밝은 음악]
(이진) 아이고...
[이진의 지친 신음]
(이림) 형님도 그 버릇 좀 고치셔야 됩니다
(이진) [한숨 쉬며] 무엇을?
(이림) 시간 날 때마다 여기를 찾는 버릇요
그러니 궁인들이
뭐, '세자가 세자빈 만나는 걸 싫어한다더라'
수군거리질 않습니까?
(이진) 사실인 걸 어쩌란 말이냐?
세자빈이라고 해 봤자
나에게는
좌상의 눈이 되고 귀가 되는 그 여식일 뿐인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 없으십니다
[이진이 피식 웃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알려고 하지 마
너까지 심란할 필요는 없으니까
형님이 아직 저를 잘 모르시나 봅니다
(이림) 전 이 평생을 헤아릴 수가 없는 그런
이 심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인데요
[이진의 어이없는 웃음] [이림의 옅은 웃음]
또 까분다
난 잠시 눈 좀 붙일 테니까
한 식경 후에 깨워다오 [이진의 피곤한 신음]
예
(김 내관) 저하
홍문관 부제학이옵니다
[이진의 헛기침]
(이진) 어, 들라 하라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녹서당"
(부제학) 송구하옵니다, 저하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야겠기에...
이해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말산 기슭 폐가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옅은 한숨]
'사내 여섯이 죽고'
'하나가 기이한 의술로 살아남았다'
이 '기이한 의술'이라는 게 뭡니까?
이자들은 폐가에서 또 뭘 하고 있었고요?
거기까진 알지 못하오나
그자가 잠시 의식을 차렸을 때 종사관이 문초를 하였는데
서책 이름 하나를 댔다고 하옵니다
- 금서로군요 - (부제학) 예
(이진) 그 서책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부제학) '호담선생전'이라 하옵니다
[긴장되는 음악]
'호담선생전'
[문이 벌컥 열린다]
호담이라 하셨습니까?
(이조 정랑) 네놈은 대체 일을 어찌 하는 게야?
구렁이 새끼도 아니고
왜 지나간 자리에 허물을 벗어 남기냐는 말이야!
(익평) 귀재야
분명 조선에선 볼 수 없는 기이한 의술로
그자가 살아났다 했느냐?
(귀재) 예, 대감
(이조 정랑) 지금 어찌 살아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놈이 깨어나 무슨 말을 지껄일지 모르니
속히 조치를 취해야지요
(우의정) 그래요
우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습니다, 대감
[긴장되는 음악]
(이조 정랑) 아휴, 참
[깊은 한숨]
(홍익) 어허, 이것들 표정 보게나?
꼴에 계집이라고 시체 보러 가는 건 무섭나 봐?
(은임) [한숨 쉬며] 죽은 사람보다 야근이 더 무섭습니다
아, 퇴궐할 시간에 갑자기 외사를 나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란) 맞아요
가뜩이나 대전 입시 다녀와서
온몸의 정기란 정기는 다 털렸는데
[못마땅한 신음]
하필 또 시신 검시라니...
(시행) 그걸 왜 나한테 따져? 내가 죽였냐?
전국의 살인범들한테
'아, 오늘은 예문관 서리들이 피곤하니까'
'사람을 좀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사정이라도 하고 다녀?
시신 검시에 참관하는 것도 엄연히 사관의 업무야
잔말 말고 따라와, 쯧
해라도 떠 있어야 덜 무서울 거 아니야?
(홍익) 어휴, 이...
(검관) 복부 자상 크기는 약 이 촌
깊이는 [검관의 헛기침]
[홍익이 구역질한다]
약 오 촌 [문이 달칵 열린다]
[다가오는 발걸음] [권지들의 힘겨운 숨소리]
(시행) 아직이냐?
- (해령) 저, 그자는 좀 어떻습니까? - (시행) 누구?
그 기이한 의술로 살아났다는 자 말입니다
그, 상처는 직접 보셨습니까?
(해령) 그 기이한 의술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그래, 사람을 갖다가 이불 홑청처럼 실로 막 툭툭툭툭툭 꿰매 놨더라
됐냐? [은임의 놀란 숨소리]
(은임) 사람을 꿰매 놔요?
(시행) 서걱, 서걱, 서걱... [은임의 비명]
[홍익이 구역질한다]
저, 그 사람 제가 좀 봐도 됩니까?
(해령) 아유, 저...
아니, 저, 왜, 왜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저 진짜 잠깐이면 됩니다
이거 일각도 아니고 딱 반 각만...
(시행) 아, 그러니까 그 흉측한 꼴이 왜 보고 싶냐고
너 무슨 마음의 병 있니?
아이, 흉측한 게 아니라...
아무래도 봉합술 같아서 그럽니다
뭐?
제가 청나라 살 때 들어 본 적 있거든요
이게 서양에서 쓰는 의술인데
자상이나 절상을 이렇게 실로 꿰매 놓으면 상처가 낫는다고요
이거 진짜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딱 한 번만 실제로 보고 싶었던 건데
저, 그러니까 이렇게 쑥 들어가서
빨리 이렇게 삭삭 보고 나오면 안 되겠습니까?
어, 안 돼
의금부에서 안 된다고 했으니까 안 되고
내가 집에 빨리 가고 싶으니까 또 안 돼
- 아, 그러면 저만... - (시행) 너 한 마디만 더 하면
(시행) [작은 소리로] 검시소에서 시체들이랑 밤새우게 한다
(해령) 아, 양 봉교님
[시행의 놀래는 신음] [권지들의 놀란 신음]
[권지들의 못마땅한 숨소리] [시행이 괴성을 낸다]
[홍익의 한숨]
[아란의 못마땅한 한숨]
[은임의 옅은 한숨]
[해령의 아쉬운 한숨]
[긴장되는 음악]
"의금부"
[거리가 시끌벅적하다]
[아란의 탄성] (은임) 어머, 이거 진짜 예쁘다
[아란이 말한다] [은임의 호응하는 신음]
(해령) 저 의금부 좀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사책을 놓고 와서요
(은임) 예?
그럼...
구 권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사, 사책인데?
[거리가 시끌벅적하다]
[위태로운 음악]
[당황한 신음]
[이림의 답답한 한숨]
[긴장되는 음악]
(귀재) 넌 누구냐?
매화?
[놀란 신음]
나는
이 나라 조선의 왕자
도원 대군이다
뭐?
진정
나를 벨 수 있겠느냐?
[흥미진진한 음악]
[밝은 음악]
(이태) 그 계집이 살아 있다는 뜻인가?
어찌 과인의 나라, 과인의 땅에 서래원 역당이!
(이림) 무슨 내용의 서책인지 알아야겠습니다
너는 알려고 하지 말거라
형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은임) 명색이 대군인데
왜 그 나이 먹도록 혼인도 못 하고 궐에 붙어살겠습니까?
(해령) 피부도 하얗고 뭐, 보기에 좋기만 합니다
(우원) 사관은 사사로이 다른 이들과 연을 쌓으면 안 돼
훗날 너에게 큰 허물이 되어 돌아갈 수도 있다
벗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림)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것도 적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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