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관 구해령 7
[사람들의 다급한 숨소리]
[긴박한 음악]
(관군1) 멈춰라!
[여인의 다급한 숨소리]
[여인의 힘겨운 신음]
(이진) 어디까지 넘어왔답니까?
(도승지) 황해도 북쪽입니다, 저하
사망자는요?
(도승지) 평안도에서만 어림잡아 200명이 넘는다 하옵니다
[이태의 답답한 신음]
(이태) 그놈의 두창은 어찌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지, 원...
(대사헌) 전하, 너무 염려치 마시옵소서
아직까진 역병의 기세가 미미하다지 않습니까?
(부제학) 미미하다고는 하나 언제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모릅니다
역병이 황해도를 지나 남쪽으로 퍼진다면은
도성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선 전의감과 혜민서에 명해 쓸 수 있는 약물을 모두 보내고
의원들을 준비시키도록 하세요
환자를 구호하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익평) 송구하오나, 저하
병자 구호보다 시급한 것이 민심을 수습하는 일입니다
- 뭐라고요? - (익평) 이날 이때껏
(익평) 소신이 지켜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두창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그라들기 마련이지만
성난 민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지기만 합니다
서둘러 민심을 잡지 못하면
종국엔 민란으로 번질 것입니다
기우이십니다, 대감
(대제학) 제관을 보내 별려제를 행하고
전하께서 윤음을 지어 내려보내시면
백성들도 보고 감동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익평) 수천의 피병 행렬이 이어지고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가 벌어지고 있는데
천 리 밖 궁궐에서 쓰인 글자 몇 개로 입을 막으려는 겐가?
전하께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보살피시고자 한들
미천한 백성들은 미처 그 고심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태) 해서 좌상은 뭘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야?
왕실의 누군가를 위무사로 내려보내시옵소서
[의미심장한 음악]
[대신의 헛기침]
[대신들의 당황한 숨소리]
(부제학) 좌상 대감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까?
왕실이라니요?
지금 세자 저하를 역병이 창궐한 곳으로 보내시려 하는 겁니까?
이 나라 왕실이 백성들과 고초를 함께하고 있단 걸 보여 주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상 전하의 위엄을 바로 세우고
(익평)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부제학) 아니 되옵니다, 전하
세자 저하께서는 이 나라의 국본이십니다
그 본분은 예체를 길이 보전하시어 국맥을 이어 가는 것이지
허무맹랑한 주장에 휘둘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헌)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니요?
민란이 일어나 종묘사직에 해가 갈까 염려하는 마음을
어찌 허무맹랑하다 하십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민란을 핑계로
(부제학) 국본을 위태롭게 만드는 경들이야말로
종묘사직에 해를 끼치는 자들입니다
(우의정) 어허, 말씀을 삼가시게
주상 전하 앞에서 그 무슨 불손한 언행인가?
다들 그 입을 다물라!
[이태의 답답한 한숨]
(이진) 아바마마
소자를 위무사로 보내 주십시오
(부제학) 아니 되옵니다, 저하
(이진) 소자 효심으로써 국본의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소자가 평양에서 역병을 막고 민심을 수습할 테니
아바마마께서는 조정에서 백성들을 살펴 주시옵소서
[대신들이 웅성거린다]
[무거운 음악]
[문이 달칵 닫힌다]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삼보) 마마, 마마
"녹서당"
마마, 아이...
[삼보의 다급한 신음]
마마
(삼보) 마마 [삼보의 다급한 숨소리]
지금, 지금 주상 전하께서...
[긴박한 음악]
[해령의 놀란 신음]
[문이 달칵 닫힌다] [이태의 한숨]
아바마마, 어쩐 일로 제 처소에...
다과상을 내오라 할까요?
내 먹을 것이 없어 예까지 왔겠느냐?
앉거라
[옅은 한숨]
[이태의 헛기침]
평양에 좀 다녀오너라
평양...
평안도에 있는 그 평양 말씀이십니까?
하면 조선에 평양이 또 있더냐?
평안도 감영이 있는 평양 말이다
지금 그곳에 두창이 돌아 민심이 아주 흉흉해
네가 가서 백성들도 위무하고
왕실의 체면도 좀 살리고 와야겠다
[위태로운 음악] [삼보와 해령의 놀란 숨소리]
[삼보의 당황한 숨소리]
(삼보) 전하, 도원 대군마마께서는
두창을 앓으신 적이 없사옵니다
평양에 가셨다가는...
(이태) [분노하며] 어디서 감히 내관이 끼어들어?
[삼보의 송구스러운 숨소리]
너무 막중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역병의 기세가 미약해 조만간 사그라들 것이야
내가 널 보내는 건 그저 민심을 달래기 위함이니
넌 가서 서책이나 읽다가
여기저기 얼굴이나 좀 비추고 오면 돼
예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바마마
군말이 없어 좋군
[이태의 헛기침]
(삼보) 마마...
[삼보의 애타는 숨소리]
(해령) 회식은 어쩌고 여기 계십니까?
(경묵) 회식은 개뿔
갑자기 명이 떨어져서 입술만 적시고 달려왔다, 입술만!
(장군) 아니, 올해 예문관에 마가 꼈나?
무슨 사건 사고가 이리 많아?
(홍익) 부정 탄 거 아닐까요?
신성한 조정에 음기가 들었으니
(시행) 헛소리들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평양 감영 외사 나갈 사람?
진짜 없어?
하, 하여튼 이 좀팽이 같은 것들
사관이 말이야
제 손으로 역사를 남길 생각을 해야지
그깟 두창이 무서워서 몸을 사리냐? 아이고, 진짜, 쯧
(은임) 그럼 양 봉교님이 다녀오세요
가서 역사를 남기시든
관에 누워서 돌아오시든
야, 나는 그...
[익살스러운 효과음]
[익살스러운 효과음]
(시행) 나는 처자식이 있잖아
아, 혹시라도 나 저세상 가면 내 새끼들은?
내 새끼들...
뭐 먹고 사니?
(경묵) 그러네
야, 우리 인간적으로
자식 있는 사람들은 보내지 말자
(시행) 그래 [길승의 헛기침]
(길승) 전 손주가...
(홍익) 와, 그럼 우리 마누라는 뭐 평생 과부로 살아도 된다는 뜻입니까?
비빌 자식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아란) 억울하긴 제가 더 억울합니다
저 죽으면 처녀 귀신 돼서
양 봉교님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 거예요
(은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제비를 만들어 뽑으십시오
(치국) 안 됩니다
전 삼대독자란 말입니다
[한림들의 답답한 신음]
저기...
제가 두창을 앓은 적이 있습니다
[옅은 웃음]
(지밀상궁) 대비마마
고하거라
(이태) 어마마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대비 임씨) 예
주상도 정사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이태) 과업을 어찌 고생이라 여기겠습니까?
앉으시지요
내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주상
도원이 역병이 돌고 있는 평양으로 위무를 가게 됐다는...
[기가 찬 웃음]
참으로 불경스러운 망발이지요?
이 나라 대군이 어찌 그리 위험한 곳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주상
(대비 임씨) 어서 아니라고 대답을 하세요
그래야 이 어미가 안심을 할 것이 아닙니까?
[옅은 한숨]
사실입니다, 어마마마
그렇지 않아도 지금
도원에게 막 '평양으로 가라' 명을 내리고 온 참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그 명을 거두세요
도원은 주상의 적자이자 세자의 동생이 아닙니까?
그리 귀한 아이를 어찌
사지로 내몬다는 말입니까?
전 아비이기 전 이 나라의 국왕입니다
종사를 위한 일에 어찌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겠습니까?
아비가 아니라서는 아니고요?
[위태로운 음악]
(이태)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듣는 귀가 많습니다
내 말 명심하세요, 주상
도원에겐 아무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무탈하게 생채기 하나 없이 궐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달칵 닫힌다]
(최 상궁) 너무 염려치 마시옵소서, 마마
대군마마께서는 분명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강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당장 모화에게 연통을 넣거라
지금 도원을 지킬 수 있는 건 그 아이밖에 없어
(최 상궁) 너희들은 무얼 하고 있던 게야?
빈 처소에 왜 바깥사람을 들여?
(나인들) 송구합니다, 최 상궁 마마님
(최 상궁) 썩 물리거라
[옅은 한숨]
과분한 서책을 골랐구나
(이진) 네게 맞는 서책이라면
내 어릴 때 보던 '소학' 정도가 적당할 듯한데, 응?
[이림과 이진의 옅은 웃음] [애틋한 음악]
[이림의 옅은 웃음]
옷가지는 단단히 챙겼느냐?
평안도는 밤이 꽤 쌀쌀할 텐데
예
(이진) [한숨 쉬며] 말은?
아, 그, 내사복시에 사람을 잘 따르는 준마가 있다
- (이진) 그걸 타고 가서... - 형님
전 기쁩니다
아바마마께서 제게 처음으로 시키신 일 아닙니까?
기꺼이 황송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두렵지 않으냐?
그래도 아바마마십니다
그리 위험한 곳이라면 절 보내지 않으시겠지요
(이진) 넌 세자인 나를 대신해서 위무를 가는 것이다
누구 앞에서든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잃지 말거라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거라
예, 세자 저하
[이진과 이림의 옅은 웃음]
[풀벌레 울음] (우의정) 대감, 오늘은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세자가 아무리 눈엣가시라 해도
대감의 사위 아닙니까?
혹 세자에게 변고라도 생겨 세자빈께서 혼자라도 되시면...
[우의정의 한숨]
전하께서 도원 대군을 선택하길 천만다행이지요
내가 왜 세자를 보내려 했다 생각하십니까?
주상이 세자에게 엄격하기는 해도
후사를 포기할 만큼 대담한 위인은 아닙니다
(이조 정랑) 하면 처음부터 도원 대군을...
[비밀스러운 음악] [한숨]
(익평) 모화라
분명 대비가 모화라 했는가?
(사희) 예
도원을 지킬 수 있는 건
그 아이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감께서도 아시는 자입니까?
(삼보) 부인
[삼보의 반기는 웃음]
아이, 그새 야윈 것 같소
지금 지내는 거처가 영 불편한 거요?
아닙니다
서신은요?
[삼보의 걱정스러운 신음]
(삼보) 자
대비마마께 서신은 잘 받았다 전해 주십시오
(모화) 그리고 먼 길 가시나 본데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아련한 음악] 하면...
(삼보) 부인도
부인도 몸조심하시오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응?
[설금의 힘주는 신음]
야
(해령) 아, 너 자꾸 그럴래?
아, 이러다 내일 아침까지 짐만 싸겠다
(설금) 아, 그거 좋네요
내내 짐만 싸다 평양은 안 가시면 되니까
[설금의 속상한 한숨]
그리 보지 마십시오
지금 죽으러 가겠다고 똥고집 부리고 있는 건 아씨입니다
아, 하여간에 이 조선 팔도에서 호들갑은 네가 으뜸이다
야, 죽긴 누가 죽니?
내 앞날이 얼마나 창창한데
(설금) 그러니까
그 창창한 앞날 계속 살고 싶으시면
가지 마시라고요, 제발 좀, 좀!
마마를 앓아 보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 보신 적 없으면서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평양행을 자처하신 겁니까?
아씨 혼자서만 뭐, 조상신의 뭐, 수호라도 받는답니까?
(재경) [헛기침하며] 해령이 있느냐?
예, 오라버니
(설금) 마침 잘 오셨습니다
나리가 아씨 좀 말려 주십시오
자꾸 자기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역병에 안 걸릴 거라고 헛소리를 하십니다
해령이는 괜찮을 것이다, 나가 보거라
- (설금) 네? - (재경) 어서 [해령의 비웃음]
[재경의 헛기침]
아,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문이 달칵 닫힌다]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아휴
너무 안심하지 말거라
역병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야
더구나 넌 여사관이니 보는 시선도 많을 거고
사소한 행동도 입에 오르내리기 쉬워
그러니까 공연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사책만 쓰다가 와라
이 말씀이시죠?
그리 들렸느냐?
예, 그리 들렸습니다
한데 제가 무서운 건 역병도 사람도 아닙니다
오라버니랑 떨어지는 겁니다
(재경) [작게 웃으며] 원, 녀석...
제가 맨날 맨날 서신 하겠습니다, 오라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나도 매일매일 답신을 쓰마
[잔잔한 음악]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삼보의 당황한 신음]
아이, 부제학 영감
명색이 대군마마 행차신데
(삼보) 이 소박한 인파는 다 뭡니까?
(부제학) 듣지 못했는가?
혜민서 의원들이 역병 무섭다고 다들 사직서를...
[부제학의 깊은 한숨]
이것도 겨우겨우 끌어다 모은 걸세
(삼보) 아이고, 참 [부제학의 헛기침]
(관리1) 어이구, 시원하다 [관리들의 개운한 신음]
(관리2) 아유, 물맛 좋다
[관리들이 시끌벅적 떠든다]
(관리3) 아, 배부르다
(관리1) 아이고, 살 거 같네, 진짜 [관리들의 개운한 신음]
(우원) 이럴 땐 좀 쉬어도 된다
받거라
[우원이 숨을 하 내뱉는다]
(우원) 쓸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적어도 늦지 않아
(해령) 민 봉교님 의외로 되게 다정한 거 아십니까?
- (우원) 나? - (해령) 아, 그렇잖아요
(해령) 이 까마득한 신진한테 물도 떠다 줘, 조언도 해 줘
그리고 혼자서 먼 길 갈까 봐 불쑥 따라가 주기까지 하고
- (우원) 아, 그거는... - (해령) 압니다
'정식 사관도 없이 권지만 외사를 내보낼 수는 없소이다'
(해령) 뭐, 이런 책임감인 거
뭐, 그래도 한 2할 정도는 제 걱정이 포함됐다고 치자고요
그래야 인간적으로다 기분이 좋으니까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삼보) 마마!
마마, 여기 찬물입니다요, 찬물
[삼보의 가쁜 숨소리]
제가 저 뒤쪽에 있는 동굴에 가서
직, 직...
[수레가 요란하게 지나간다]
(사희) 멈추거라
무엇을 이리 나르는 것이냐?
(노비) 쇤네들도 잘 모릅니다요
영감마님이 시키신 일이라...
녹두?
(집사) 음, 안쪽부터 차곡차곡 쌓아라
[노비들이 대답한다]
서둘러
(집사) 음, 조심조심
귀한 재료다
[콩이 우수수 쏟아진다] (집사) 어?
(이조 정랑) 어, 조심해, 이 자식아
이게 곧 네놈 몸뚱어리보다 더 귀해질 거란 말이다!
이놈이...
야, 주워, 어
[다급하게] 이 콩을...
어, 이제 오냐?
(이조 정랑) 사희야
너 다른 건 몰라도
이 아비 돈 불리는 수완 하나는 배워야 한다
이게 그냥 타고나는 게 아니야
그, 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읽어야 하고
사람 다루는 법도 알아야 하고 [이조 정랑의 옅은 웃음]
(사희) 해서 삼두음 재료를 사 모으신 겁니까?
[신난 웃음]
(이조 정랑) 그래, 그래, 하하하
기가 막히지 않냐, 어?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보름만 지나면
도성 안에 역병이 코앞에 밀려왔다는 소리가 쫙 퍼질 테고
그땐 녹두며 팥이며 콩이며
지금보다 열 배
아, 아니, 아니
스무 배는 더 쳐서 팔 수 있을 게다
[이조 정랑의 신난 웃음]
대체 무슨 욕심이 그리 많으십니까?
- 뭐? - (사희) 하, 돈이라면
이미 100년을 쓰고도 차고 넘치게 모으셨습니다
한데 또 뭐가 부족해서
이리 졸렬한 방법으로 돈을 버시냐는 말입니다 [이조 정랑의 당황한 신음]
(이조 정랑) 졸렬하다니?
너 아비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의돈이 창고 속에 감춰 둔 재물은 지금 흔적도 없지만
범중엄이 친구에게 보리를 나눠 준 이야기는
아직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희) 때가 되면 관아에 삼두음 재료를 나눠 주십시오
한때의 사욕이 아니라 [이조 정랑의 한숨]
길이 남을 덕망을 택하십시오
너 아무 때나 사서 줄줄 읊고 그러는 거 하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이 아비가 덕망 같은 거 신경 썼으면 [사희의 한숨]
네가 이런 집에 살면서 호의호식하는 게 가당키나 해?
[슬픈 음악] 네가 한가롭게 서책 읽고 여사 일로 싸돌아다니는 것도
다 이 아비가 만들어 준 팔자에 호강하는 거야
(이조 정랑) 에이그
딸자식이라고 있는 게 사근사근한 맛도 없고
쳇, 매사 훈장질에 훈수질에
징그럽다, 징그러워, 에이그!
[이조 정랑의 못마땅한 신음]
[이조 정랑의 못마땅한 신음] [사희의 괴로운 한숨]
[문이 드르륵 열린다]
[문이 쾅 닫힌다]
[경쾌한 음악]
(군관) 길을 비켜라
대군마마 행차시다
[말이 히힝 운다] [부제학의 달래는 신음]
(관찰사들) 대군마마!
(황해 관찰사) 이 먼 곳까지 귀한 걸음을 해 주시니
소신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림) 응당 해야 할 일인걸요
(황해 관찰사) 처소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황해도 관찰사 윤대읍
대군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평안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장석형
대군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삼보) [작은 소리로] 앉으시라...
(이림) 어, 앉으십시오
[관찰사들의 호응하는 웃음]
이곳 상황은 어떻습니까?
(황해 관찰사) 나날이 역병의 기세가 사그라들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약재도 모두 잘 도착했고
병자들 구호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평안 관찰사) 평안도 상황도 좋아지고 있습니다
병자들을 철통같이 격리시킨 덕분에 더 이상 병이 퍼지지도 않고
대군마마께서 이렇게 위무하러 오신다는 소식에
백성들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황해 관찰사) 예, 이 모든 게
주상 전하의 하해와도 같은 은혜 덕분입니다
(평안 관찰사) 마마께서 신경 쓰시는 일 없도록 저희가 성심을 다하고 있으니
그저 해주에서 편히 머물다 가십시오, 대군마마
(평안 관찰사) 아, 자네도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그래, 민익평 대감의 영식이라고?
(우원) 예
(평안 관찰사) 아, 듣던 대로 신수가 아주 훤하구먼
[평안 관찰사의 웃음]
그, 한양 가면 대감께 내 안부나 전해 주시게
[평안 관찰사의 웃음] [황해 관찰사의 호응하는 신음]
(우원) 한데 장 영감님께서는
쓰읍, 평양 감영에 계셔야 될 평안도 관찰사께서
왜 여기 해주에 내려와 계신 겁니까?
(평안 관찰사) 아, 그거야... [황해 관찰사의 불편한 숨소리]
이, 대군마마께서 이 평안도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행차해 주신다는데
한걸음에 달려와 인사드리는 게 도리이지 않겠는가?
[평안 관찰사의 웃음] [황해 관찰사의 한숨]
그,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쉬시게
곧 식사가 준비될 걸세
[헛기침하며] 갑시다, 윤 영감
[우원의 한숨]
[문이 달칵 닫힌다]
(삼보) 좀 전까지만 해도 황천길을 건너는 기분이었는데
막상 와 보니까 휴가가 따로 없습니다요
감사들이 여기도 척, 저기도 척
아주 알아서들 그냥 척척 [삼보의 신난 웃음]
(이림) 해주에는 무엇이 유명한지 아느냐?
[삼보의 신난 신음]
해주 하면은 해주 비빔밥 아입니까?
[삼보의 즐거운 웃음]
(삼보) 황해도에 왔으니까
호박 만두도 먹어 봐야 되고 연안 식해도 먹어 봐야 되고
또, 아이...
음식을 물어본 게 아니셨는데...
(삼보) 해주 하면은 예로부터
날씨도 따땃하고 공기도 맑아서
많이들 쉬러 왔지요
산도 있겠다, 바다도 있겠다
휴양하기 딱 좋은 곳 아닙니까?
- 바다? - (삼보) 참!
마마는 바다를 한 번도 가 보신 적이 없으시지요?
(삼보) [손뼉을 딱 치며] 어떻게, 이번 기회에 저 허삼보랑 함께
오붓한 바닷가 산책이라도?
(이림) 아니다 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으니
세숫물을 좀 가져와라
(삼보) 아니,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무슨...
(이림) 여, 여독 때문에 피곤한가 봐
- (이림) 어서 - 많이 피곤하셨습니까?
(삼보) 아이, 참...
(이림) 이게 더 나은가?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해령) 마마
어디 가십니까?
(삼보) 마마
응?
[익살스러운 음악]
응?
아, 옷까지 벗어 놓고 어딜 가셨...
[익살스러운 효과음]
마마가 또?
[절규하며] 마마가 또?
[갈매기가 끼룩거린다]
(해령) 잠행을 나가신다면서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슨 잠행을 하신다는 겁니까?
뭐, 용왕님 뵈러 가는 것도 아니고
몰래 나왔으니 잠행인 것도 맞지
굳이 따지자면
아, 그럴 거면 여사는 뭐 하러 데리고 나오셨습니까?
뭘 적으라고요?
(이림) 뭐, '대군이 이리 걸었다' 또 '저리 걸었다'
뭐, 이런 걸 적으면...
(해령) 저, 송구하오나, 대군마마
마마께서 말 타고 편히 행차하시는 동안
저는 한양에서부터 2박 3일을 걸어오느라고
지금 이 심신이 매우 지쳐 있습니다
한가로운 잠행은 혼자서 실컷 하십시오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림) 잠깐만
실은...
실은 내가
바닷가를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
해서
오랫동안 바다를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 좋은 순간에
곁에 누군가 있어 줬으면 해서
[아름다운 음악]
(해령) 벗으십시오
어?
처음이시라면서요?
(해령) 눈으로만 보지 말고
손끝으로, 발끝으로 전부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령) 자, 이게 바로 모래를 밟는 기분입니다
한번 걸어 보십시오
(해령) 어떻습니까?
(이림) [작게 웃으며] 이상해
참으로 이상해
한번 달려 보십시오
그럼 더 이상해질 겁니다
달려? 여기서?
네
아, 오십시오
[해령의 즐거운 웃음]
(해령) 발이라도 한번 담가 보십시오
- 발? - (해령) 무서우십니까?
(이림) 발을 물에?
(해령) 괜찮습니다, 저만 믿고 들어오십시오
(이림) 그, 잠, 잠깐만, 잠깐만
(해령) 괜찮습니다, 오십시오
[갈매기가 끼룩거린다]
(해령) 제가 가 보고 싶은 곳요?
[해령의 고민하는 숨소리]
너무너무 많습니다
왜, 그 이태리아에 가면은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높은 탑이 있거든요?
그것도 너무 보고 싶고
(이림) 어찌? 어찌 탑이 기울어진 채로 서 있을 수가 있단 말이냐?
무너지지도 않고?
(해령) 그러니까 보고 싶은 거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왜, 그 애급에 가면은 몇천 년 된 무덤이 있거든요?
근데 그 크기가 산채만 하답니다
그래서 요 아래에 서서 보면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고요
더 얘기해다오 바다 건너엔 또 무엇이 있느냐?
아, 이번에는 마마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해령) 마마께서는 어디 가 보고 싶은 곳 있으십니까?
[잔잔한 음악] (이림) 난 아직
조선 팔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몰라서...
아, 동해
(이림) 그, 동해 저 멀리에 가지도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그곳엔 강치라고 아주 희한하게 생긴 동물이 몰려 산다더구나
누구의 참견도 없이 바다며 육지를 자유롭게 누비면서
외롭지는 않게
해서 내 가지도를 꼭 한번 가 봐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강치를 보러
다음에 그곳에 가게 되면 저도 꼭 데려가 주십시오
저도 궁금합니다
그래
[함께 살짝 웃는다]
[해령과 이림의 편안한 숨소리]
해령 낭자?
선비님?
(승훈) 저희가 인연이기는 한가 봅니다
한양도 아닌 해주에서 재회를 하다니요
(해령)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승훈)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낭자가 여사관이 됐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리 보니 실감이 나네요
장하십니다 [해령의 쑥스러운 웃음]
다 선비님 덕분입니다 [승훈의 멋쩍은 신음]
(해령) 그날은...
그날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승훈) 아...
[멋쩍게 웃으며] 아, 아닙니다
저도 그 일 이후로 부모님이 더 이상 혼인을 재촉하시지 않거든요
[함께 살짝 웃는다]
한데 해주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내들의 힘겨운 신음]
(승훈) 이런 곳으로 모시게 되어 송구하옵니다
감영 안에서는 제가 마마를 독대하기가 어려운지라...
(이림) 아닙니다
송화현의 현감이라 들었는데
무슨 일로 날 찾으셨습니까?
(승훈) 대군마마, 간절히 청하옵니다
저희 백성들을 살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정으로 올라간 장계는 모두 거짓입니다
[어두운 음악] (승훈) 이번 두창으로
황해도에서 죽은 사람이 오백이 넘고
평안도는...
그 수가 너무 많아 채 헤아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승훈) 그뿐만이 아닙니다
병자들은 약재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고
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조차
마을에 갇혀 굶어 죽어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조정에서는 일찍이 구휼미와 약재를 내려보냈습니다
(이림) 게다가 평안 관찰사도 황해 관찰사도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그자들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병자들이 있는 마을에서 곡식을 빼 오라 명한 것이
황해 관찰사 윤대읍이고
(승훈) 평양에 두창이 발병하자마자 백성을 버리고 해주로 피병을 온 것이
평안 관찰사
장석형입니다
(승훈) 관리들은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려고만 하고
백성들은 발이 묶여 있으니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대군마마
부디 이자들을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승훈) 간청드립니다
[밤새 울음]
[해령의 옅은 한숨]
[해령의 한숨]
(승훈) 대군마마, 간절히 청하옵니다
저희 백성을 살려 주십시오
그자들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미안해
잠깐만 신세 좀 질게
언니 그렇게 안 무겁단 말이야, 응?
(해령) 마마
여태 안 주무셨습니까?
그러는 넌...
(이림) 이 시간에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해령) 저는...
송화현에 좀 가 보려고요
마마께서도 같은 생각으로 여기 오신 거 아닙니까?
[이림의 옅은 한숨]
아니라면 못 본 척해 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이림) 나도 모르겠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곳 상황이 그리 나쁘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해서
차라리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겠다
이런 생각마저 들어서 [해령의 한숨]
정말 나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마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알고자 하는 거뿐입니다
[긴박한 음악]
[이림의 재촉하는 신음]
[이림의 모는 신음]
(관군2) 멈추시오!
(해령) 저, 송화현으로 가는 길입니다
길을 좀 내어 주십시오
(관군2)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이 있었소이다
돌아가시오!
(해령) 저, 하나...
(이림) 다른 길 찾아보자
어이
(관군3) 멈추시오!
[옅은 한숨]
이랴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해령의 힘겨운 신음]
[해령과 이림의 가쁜 숨소리]
[힘겨운 숨소리]
(해령) 힘드시면 잠깐 쉬었다 갈까요?
(이림) 힘들다니?
내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해서
이 정도는 그냥 산책 수준이니라, 산책
네, 그럼 계속 가시죠
(이림) 한데 네가 정 쉬어야겠다면, 뭐...
함께 쉬어 주지 [이림의 옅은 웃음]
어, 이쪽
[이림의 힘겨운 숨소리]
[해령의 후련한 한숨] [이림의 힘겨운 숨소리]
(해령) 씁, 한 요 정도 온 거 같은데... [이림의 힘겨운 숨소리]
씁, 음...
(보부상1) 저, 저, 저, 저, 천천히 천천히
조심조심
[보부상2의 기합]
[보부상2가 손을 탁탁 턴다]
[보부상2의 놀란 신음] [익살스러운 효과음]
[보부상2의 놀란 신음] [익살스러운 효과음]
(보부상2) 송화현?
그러니까 그대들은 역병이 난 곳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역병이 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거꾸로?
(해령) 저희가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 혹시 송화현으로 갈 수 있는 샛길이 있습니까?
(보부상1) 아휴, 그, 샛길이고 자시고
살고 싶으면은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쇼
뭐, 젊은 나이에 황천길 건널 일 있소?
(이림) 상황이 그리 심각하느냐?
(보부상1) 아이고, 뭐, 심각하다마다요
아, 내가 살다 살다 뭐, 그렇게 쑥대밭은 또 처음 보오
이건 뭐 마을에 역병 좀 돈다 싶으면은
금줄을 쫙 쳐 놓고 사람들을 가둬 버리니
이건 뭐, 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 죽거나
아무튼 죽으라는 소리지
씁, 한데 그리 위험한 곳을
어찌 다녀오는 거요?
(보부상1) [당황하며] 뭐, 우리라고 뭐...
뭐,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
아이, 우리가 장사치긴 해도
아, 그,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데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소?
(이림) 해서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좀 나눠 주고 온 것이냐?
(보부상2) 아이, 저, 생각은 그랬습죠
좁쌀이며 보리며 챙겨 가지고 가서 살짝만
평소보다 살짝만 더 받고 팔아 주자 그랬는데
들어가니까 서로 자기한테 팔아 달라고 울고불고 빌고
그러다 보니까 가격은 두 배, 세 배, 열 배!
[보부상2의 감탄하는 신음]
내가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졸지에 돈을 왕창 벌었지 뭐요?
그것도 1년 치를 단 사흘 만에
[보부상들의 신난 웃음]
- 아니... - (이림) 몹쓸 놈
천하의 몹쓸 놈이로구나
(보부상2) 뭐요?
백성들끼리 서로 돕고 살지는 못할망정
이런 판국에 돈 벌 생각을 해?
(이림) 넌 양심도 없느냐?
그게 수치라는 걸 몰라?
(보부상2) 이 양반들이 이거 말씀을 막 하시네
내가 관리 놈들처럼 구휼미를 빼돌리기를 했소?
사람을 가둬 두기를 했소?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 몇 명인데?
구휼미를 빼돌린 탐관오리들이나
죽어 가는 사람들을 등쳐 먹은 네놈들이나 똑같다
(이림) 강도나 진배없어!
(보부상2) 뭐, 강도?
우리처럼 선량한 백성한테 강도?
그래, 강도, 강도, 날강도!
(보부상2)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어린놈의 새끼가 [해령의 놀란 신음]
너 쌍놈의 주먹 무서운 줄 모르지, 어?
무슨 상스러운 짓이냐, 놓거라!
(보부상2) 이 자식을 내가... [해령의 비명]
너, 어린놈의 새끼가 뭘 안다고, 어?
[흥미진진한 음악] [보부상2의 비명]
[보부상2의 비명] (보부상1) 아유, 형님!
[보부상2의 괴로운 신음] [해령의 말리는 신음]
(해령) 오십시오, 오십시오, 가셔요, 빨리
(이림) 아니...
야, 야! [해령의 재촉하는 신음]
(보부상1) 저놈들, 저...
[해령의 힘겨운 신음]
[해령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해령) 아마 여기까지 쫓아오진 못할 겁니다 [이림의 분한 숨소리]
[이림의 분한 숨소리] [해령이 피식 웃는다]
(해령) 아이, 그렇게 분하십니까?
(이림) 그래, 분하다
네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내 아주 혼쭐을 내 줬을 터인데
[이림이 씩씩거린다]
(해령) 그렇다기엔 너무 열심히 도망치시던데요?
[이림의 멋쩍은 헛기침]
잘하셨습니다
그 몹쓸 놈들도 그게 창피한 일인 줄은 알아야 하니까요
[아름다운 음악]
(해령) 자, 좀만 더 힘내십시오
송화현이 멀지 않습니다
(이림) 맞다, 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 송화현의 현감이란 사람 말이다
무슨 사이냐? 퍽 가까워 보이던데
(해령) 아, 그분 그...
제 지아비셨습니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이림) 지아비라니? 하면 네가 혼인을 했었단 말이냐?
(해령) 예, 뭐, 어느 정도는요
(이림)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또 언제 어디서 왜 헤어졌...
아니지, 분명 그 작자가 너한테 매달렸을 거다
자기도 눈이 있으니까, 그렇지?
[못마땅한 한숨]
저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으십니까?
제가 흠이 너무 많은 여인이라 파혼당했습니다
(해령) 그러니까 이제 그만 추궁하십시오
(이림) 파혼? [해령의 불쾌한 한숨]
아니, 자기가 뭔데 구해령을...
그러니까 어쨌든 좋아한 적은 없다는 거지?
[호미질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1이 호미질을 달그락 한다]
[아이1이 호미를 달그락 놓는다]
(해령) 계십니까?
(이림) 계십니까?
[해령의 놀란 숨소리]
[아이1과 여인의 놀란 숨소리]
(여인) 과, 관아에서 나오셨습니까?
(해령) 아니요, 아, 그...
저희도 관군을 피해 다니는 신세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여인과 아이1의 안도하는 숨소리]
[여인의 겁먹은 숨소리]
잠시 나가서 기다리십시오
[잔잔한 음악]
[이림의 답답한 한숨]
(해령) 어쩌다 이런 곳에 숨게 되신 겁니까?
마을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시고요
(여인) 마을에 약재는 떨어진 지 오래고
의원들도 발걸음을 끊었습니다
거기 갇혀서 병이 낫길 기다리다가는
이 아이마저 잃겠다 싶어서...
(여인) 아씨
염치없는 부탁 하나만 해도 될는지요?
이 아이를 데려가 주세요
예?
남쪽에선 아직 병이 퍼지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아이만은 살리고 싶었는데
(여인) 아비는 관군 손에 죽고
[울먹이며] 이대로 저마저 떠나 버리면...
이 어린것은 살 방도가 없습니다
[여인이 흐느낀다]
죽어서도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
제 아이를 살려 주세요
(여인) [오열하며] 부탁합니다
[여인이 오열한다]
[여인이 연신 오열한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여인이 연신 오열한다]
(이림) 데려갈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해령의 옅은 한숨]
(해령) 말 그대로입니다
저 아이
데려갈 수 없습, 아니...
데려가면 안 됩니다
(이림) 대체 왜? 어미가 저리 부탁을 하는데?
(해령) 그 부탁 하나에 몇 명의 목숨이 걸린지 아십니까?
역병이 돌던 마을에서 온 아이입니다
여태까지 병자와 함께 지냈고요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이미 병에 걸려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가 무턱대고 해주로 데리고 갔다가 두창이 발병하기라도 하면요?
(이림)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니더냐?
우선 격리해 두고 지켜보면...
(해령) 두창이 벽 하나로 막을 수 있는 병이었으면
이만큼 퍼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저 아이 존재를 알게 되면
아마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마 이곳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지 모릅니다
하면 이대로
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냐?
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봇짐에 있는 음식과 약재들이 꽤 됩니다
아마 여기 두고 가면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슬픈 음악]
(평안 관찰사) 아니, 별려제 준비가 끝난 지가 언젠데
아, 마마께선 여태 뭘 하고 계신 게야?
(삼보) 아이, 저 행차를 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셨는지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평안 관찰사의 황당한 신음]
저, 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응?
한 시진 전에도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나?
이, 마마께서 객사에 계시기는 한 게인가?
하면 마마께서 언질도 없이 멋대로 뭐, 외출을 나갔다
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내 직접 마마를 뵈어야겠네
(삼보) 아이, 저기, 저기, 윤 영감님!
대군마마
[삼보의 난처한 신음]
(평안 관찰사) 마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별려제 장소로 출발하시지요
별려제는 하지 않을 겁니다
[의미심장한 음악]
(평안 관찰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짓 장계를 올리다니요?
어디서 그런 낭설을 들으셨는지 몰라도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내 직접 백성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이림) 한데도 끝까지
낭설이라 치부하실 겁니까?
[평안 관찰사의 난처한 신음]
(평안 관찰사) 백성들이야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
입만 열면 관리들 욕하느라 바쁜 자들 아닙니까?
푸념처럼 늘어놓은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시면 아니 되지요
(부제학) 마마, 이 일은 소신이
어찌 된 영문인지 소상히 알아보겠습니다
(황해 관찰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거짓으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평안 관찰사) [당황하며] 윤 영감
(황해 관찰사) 하나 백성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습니다
주상 전하께 거짓을 고해 놓고
어찌 백성을 변명으로 삼으십니까?
(황해 관찰사) 변명요?
[황해 관찰사의 헛기침]
평안도에서 역병이 창궐하고 달포 동안
이 병으로 죽은 사람들보다
약탈, 방화, 도적질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갑절은 더 많았습니다
만약에 제가 이곳의 실정을 그대로 고했더라면
해서 도성에 역병이 다가온다는 소식이 퍼졌더라면
한양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황해 관찰사) 그곳에 살고 있는 20만의 백성들은 또 어찌 되었겠습니까?
하면 아바마마께서 하사하신 구휼미를 빼돌리고
멀쩡한 사람들마저 마을에 가둬 죽게 한 것도
백성들을 위해서입니까?
수백을 죽이면 수천을 살릴 수 있습니다
(황해 관찰사) 소신은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이림) 아니요, 그대는 선택이 아니라 포기를 한 겁니다
[긴장되는 음악]
약재와 구휼미를 준비하세요
지금 당장 평안도로 가 봐야겠습니다
[문이 달칵 열린다]
[평안 관찰사의 한숨] [문이 달칵 닫힌다]
(평안 관찰사) 백면서생인 줄만 알았더니
어떻게 저런 걸 알아 와서는...
이보게, 민 봉교, 저기...
우리 좀 살려 주시게
그, 자네 아버지께 그, 서신 한 통만 넣어 주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한번 찾아보겠네
[황해 관찰사의 헛기침]
[우원의 한숨]
(평안 관찰사) 지금 뭐 하는 게인가?
'평안 관찰사 장석형이'
(우원) '사관에게'
'목숨을 구걸하다'
그리 적었습니다
(평안 관찰사) 뭐, 뭐야?
[관찰사들의 당황한 숨소리]
(황해 관찰사) 이, 이보게
[새들이 짹짹 지저귄다] (시행) 평안도?
대군마마가 평안도로 가셨단 말이야?
예, 해주에서 올라온 장계에 그리 쓰여 있다니까요?
(경묵) 돌아가시려고 환장을 했나?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가?
(시행) 그래
(은임) 씁, 처음부터 평안도 위무사로 가신 거 아닙니까?
뭘 그리들 놀라세요?
(장군) 그거야 상황 좋을 때 얘기고
지금 거기 완전 쑥대밭이라며?
그럼 대충 별려제 지내고 한양으로 돌아와야지
'도원 대군 왔다 간다' 생색만 내고
[걱정스러운 신음]
어, 민 봉교님은 어떡합니까?
두창에 걸리신 적도 없다면서요?
(홍익) 야, 민우원 봉교님 딱 보면 몰라?
얼굴, 머리, 핏줄
그분은 천지 만물의 운발을 다 타고났어
전쟁을 나가도 화살이 그냥 알아서 피해 갈 팔자인데
두창은 무슨...
하, 언제 두창이 잘난 놈, 못난 놈 가려 찾아온답니까?
그렇게 따지면 안 검열님은 진작에...
[익살스러운 효과음]
[함께 폭소한다]
(아란) 승정원 갔다 올게요 [아란의 어색한 웃음]
(홍익) 야, 나는 보면 볼수록 멋있는 얼굴이거든
3년 정도 꾸준히 보면...
야, 허 서리!
(시행) 아니, 3년이나 살겠나, 어?
[함께 폭소한다]
[힘겨운 신음]
[이진의 힘겨운 신음]
[화살이 똑 떨어진다] [이진의 거친 숨소리]
[이진의 힘겨운 숨소리] [화살이 팍 꽂힌다]
(김 내관) 저하, 벌써 반 시진째입니다
이러다 예체가 상하실까 저어되옵니다
(이진) 화살을 더 가져오라
저하...
[이진이 활시위를 쭉 당긴다]
[힘겨운 신음] [화살이 팍 꽂힌다]
[괴로운 신음]
[이진의 한숨]
[애잔한 음악]
자책하지 마십시오
대군마마를 보낸 건
저하가 아니십니다
[가쁜 숨소리]
무엄하다
[이진이 활을 툭 떨어트린다]
(익평) 그 계집이 살아 있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익평) 해서 요즘 내게 발길이 뜸했나 보군
(재경) 그 계집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비밀스러운 음악]
평안도입니다
[백성들의 괴로운 신음이 들려온다] (백성1) 나 좀 살려 주시오
[백성들의 괴로운 신음이 들려온다]
[백성들이 저마다 신음한다]
(백성2) [힘겨운 목소리로] 살려 주시오
(부제학) 마마
더 이상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삼보) 이만큼 보셨으면 되셨습니다
이제 감영으로 돌아가시지요
- (삼보) 마마! - (부제학) 마마!
[잔잔한 음악]
[백성들이 힘겹게 신음한다]
[백성들의 힘겨운 기침]
[백성3이 콜록거린다]
[백성4의 괴로운 비명]
(백성5) 살려 주시오
[백성6의 괴로운 신음]
[부제학이 콜록댄다]
[우원이 콜록댄다]
[부제학과 이림의 힘겨운 기침]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의 웃음이 들린다]
[아이2가 조잘거린다]
[아이들의 웃음]
[아이들이 저마다 말한다]
[아이3의 신난 웃음]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흥미진진한 음악]
[애잔한 음악]
(해령) 20년 전쯤일 겁니다
팔에 무언가 넣고서 막 아팠던 기억이 있거든요
[매미가 요란하게 운다] (모화) 접니다, 그 서책에 나온 의녀가
(해령)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도입니다
읽어 봐 주십시오, 마마
(우원)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겠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부터
역사를 쓰는 소설가에 불과하게 된다
(익평) 평안도다 내 그 계집에게 물을 것이 많으니
(이림)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려 합니다
내게 우두즙을 놓아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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