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세라세라 2
모텔 룸 (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은수.
침대에는 혜린이가 정신없이 잠들어 있다.
욕실 쪽 문이 열려있고 그곳에서 인기척과 물소리가 난다.
은수 (욕실 향해) 저...., 계신가요?
태주(e) 거기 시트 좀 갈아주고 여자분도 대강 닦아 주세요.
은수 네.....
은수, 시트를 보자 확 인상이 찌푸려지지만 곧 야무지게 일을 시작한다.
한창 일을 하느라 태주가 욕실에서 나온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재킷의 오물을 대강 닦고 욕실에서 나오는 태주. 젖은 재킷을 입으며 일을 하는 은수를 본다.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은수에게 내미는 태주.
태주 수고 좀 해주세요.
은수, 고개 들어 태주를 올려다보는데 순간 동시에 놀라는 두 사람 얼굴.
두 사람 잠시 멀뚱하게 쳐다본다.
태주, 만원을 내밀었던 손을 저도 모르게 내린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 포기하고 어색한 포즈로 도망치듯 방을 나가는 태주.
은수, 황당한 얼굴로 태주가 나간 쪽을 돌아본다.
은수 뭐야...
은수, 이해 안 간다는 듯 잠들어 있는 혜린을 본다.
동, 복도 / 룸
룸에서 나오는 태주. 몇 걸음 가다가 걸음을 멈춘다. 찜찜하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돌아가 똑똑 형식적인 노크를 하고 문을 연다.
태주 저기.....
은수 ?
태주 여기서 일하냐?
은수 ....보면 몰라요?
태주 (끄덕끄덕) .....그럼 네 가방, 일루 보낸다...
태주, 은수의 대답 들을 사이도 없이 도망치듯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간다.
은수(e) 이봐요!
태주 (멈춘다.)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태주. 은수, 기세등등하게 태주에게 다가온다.
은수 없다고 했잖아요?
태주 ....그게...., 없는 줄 알았는데... 있더라구. (내뱉듯) 낼 택배로 보내줄께. (돌아서려는 데)
은수 (태주를 붙잡는다.) 사과 하세요.
태주 뭘?
은수 사람 말 믿지도 않고 이상한 여자 취급했잖아요. 경찰에 신고까지 하려 그러구.
태주 그거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야!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 화장실에 들이닥친 게 그 럼 정상이냐?
은수 그렇다고 욕까지 할 건 없잖아요!
태주 내가 언제 욕을 했다 그래?
은수 했어요! 미친 엑스....,! 기억 안나요?
태주 ......?!
은수 얼마나 기분 나빴는데요!
태주 (인정 안돼는) 그게 어떻게..... (더 따지기도 귀찮다) 아, 미안해, 미안, 됐지? (돌아서 려는데)
은수 두 시간 쯤 있다가 집으로 갈께요.
태주 !? 뭐?
은수 여기 일 끝내고 가면 그 쯤 걸릴 거예요.
태주 (시계 보고 기가 막힌) 밤 열두시 넘어서 우리 집에 오겠다구?
은수 그 가방 오늘 꼭 받아야 된단 말예요. 아저씨 땜에 삼일동안 속옷도 못 갈아입고., 그게 얼마나 찝찝한 건지 알아요!
태주 !!! (아무렇지 않게 속옷 얘기를 하는 은수의 뻔뻔함에 기가 질린다.)
삼일... 그래..., 참 찝찝하겠다...! 와라.., 줄께.
태주,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은수가 또 쫓아와 붙잡는다.
태주 (짜증 치미는) 아, 또 왜?
은수 (손 내밀며) 아까 수고비요.
태주 ?!
은수 주려다가 안주는 게 어딨어요? 진짜로 수고하고 있는데.
태주, 도저히 상대 못하겠다 싶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보란 듯이 은수 손바닥 위에 놓고 돌아서 간다.
은수, 기분 좋게 만원을 주머니에 넣는다.
모텔 룸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혜린.
은수, 잠든 혜린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새삼 혜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은수 되게 이쁘네..... 애인인가......, 근데...., 왜 혼자 두고 갔지?
태주의 오피스텔
은수의 가방 문을 여는 태주. 내용물이 지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다.
태주, 난감하다.
태주 아이 참..., 괜히 뒤져 가지고....
자리에 앉아 가방 정리를 시작한다.
처음에 어떤 식으로 정리되어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려보며 열심히 맞춰보려 애쓰지만 쉽지가 않다.
정리하던 중 세 개의 액자가 연결되어 있는 사진액자가 눈에 띈다.
맨 위에 <은수♡지수>라고 써 있고, 그 밑으로 자매로 보이는 여자애들 사진이 연령별로 있다. 8살쯤 된 은수와 3살 정도의 지수, 고등학생 은수와 초등학생 지수, 최근의 은수와 지수 모습이다.
태주, 다정한 자매의 사진을 꽤 유심히 본다.
버스 정류장 / 포장마차
늦은 밤의 한산한 버스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는 은수,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군밤을 팔고 있는 포장마차를 발견한다.
은수 이거, 한 봉지만 주세요.
은수, 군밤을 담는 상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은수 저기요...., 한 봉지 더 주세요.
태주의 오피스텔
지친 듯 대자로 누워 TV를 보고 있는 태주.
초인종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난다.
태주의 오피스텔 앞 복도
은수, 군밤 봉지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다.
잠시 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기대하듯 보는데, 문이 반 틈만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그 사이로 은수의 가방만 쑥 빠져 나올 뿐 태주는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문이 막 닫히려는데
은수 저...저기..
태주 (겨우 문틈으로 얼굴 내밀며 귀찮은 듯) 또 뭐?
은수 (군밤 봉지를 다시 꼭 잡으며) 아..아니요....
태주, 문을 닫으려는데, 그 순간 용기를 내어 문을 잡는 은수.
짜증이 치민 험악한 얼굴의 태주에게 재빨리 군밤 봉투를 내민다.
태주 ! 뭐야?
은수 고맙다구요. 어쨌든 신세를 졌으니까.....
태주, 약간 수그러진 표정으로 봉투를 홱 채가고는 곧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린다.
은수,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싶다.
태주의 오피스텔
문을 닫고 봉투 안을 쓱 보는 태주.
태주 꼭 지 같은 것만...
군밤을 하나 꺼내고 봉투를 아무데나 쓱 밀어 놓는다.
오물오물 군밤을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 봉투를 가져다가 본격적으로 먹는다.
지수의 오피스텔
바닥에 놓여있는 대 여섯장의 은수 이력서.
지수, 엎드려 누운 채 군밤을 까먹으며 은수 이력서를 들어 사진을 보고 있다.
지수 너무 맹하게 나온 거 아냐.... 이력서는 사진이 중요한데.....
은수를 보고 말을 멈추는 지수.
은수는 여행가방을 활짝 열어놓고 그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지수 뭐해, 아까부터? ....(대답 없자) 야, 한은수!
지수, 은수에게 다가가서 은수가 보고 있는 가방 안을 본다.
은수 토요일이 없어졌어.
지수 ? (본다)
은수 네가 선물해준 요일팬티...., (팬티 가리키며) 월화수목금...일...., 토요일만 없어진 거 있지....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지수 .....(심드렁한) 그 남자 페티쉰가 보지.
은수 엉?
지수 여자 속옷이나 스타킹 보고 좋아하는 남자들 있잖아. 그런 사람들 툭하면 여자 물건 훔친다던데.
은수 으흐.... 설마... (소름 끼친다.)
지수 가방 뒤지다가 그 토요팬티에 필이 쫙 꽂힌 거야..... 취향도 참 독특하시지.
은수 야...., 나 구역질 날 거 같아.
지수 기분 더럽긴 하겠다. (안됐다는 눈으로 은수를 보며) 생긴 건 멀쩡해?
은수 (끄덕인다.)
지수 겉은 멀쩡한 거, 그게 더 무섭다니까.
은수 ......
지수 그나저나 참 궁금하네.
은수 ?
지수 그 남자 지금 뭐하고 있을까? 언니 팬티 가지구.
은수 (순간 구역질이 난다.) 웩!!
**모텔, 룸 (이른 아침)
잠이 깨는 혜린, 곧 낯선 공간임을 인식하고는 깜짝 놀란다.
의아한 눈길로 방 내부를 돌아보다가 블라우스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속옷 차림의 자신을 보고 불안해지는 혜린, 블라우스를 입고 욕실까지 샅샅이 살펴보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때, 어딘가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소리.
허둥지둥 찾다가 겨우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고, 액정에는 열통이 넘는 부재중 통화가 떠 있다.
확인해보면 대부분 집에서 온 전화다. 난감하다.
새삼 침대를 돌아보는데
<인터컷 - 혜린을 침대에 눕히는 남자(태주)의 뒷모습>
놀라는 혜린, 설마 싶다.
<인터컷 - 태주의 얼굴에 술잔을 쏟아 붓는 모습, 거리에서 쓰러진 혜린을 업는 태주>
간밤의 일이 단편적으로 떠오르자 당혹스럽다.
태주 오피스텔 근처 지하철상가통로
태주, 산뜻한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하고 있다.
오피스텔 로비/ 엘리베이터
로비에 들어선 태주,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좁은 문틈 사이로 들이밀어지는 커다란 대파 다발.
문이 다시 열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은수가 서 있다.
장을 봤는지 식품이 한가득 든 봉지와 대파를 들고 있다.
은수 앗싸, 잡았다!
황당한 듯 은수를 보는 태주. 은수도 그제서야 태주를 보고 얼어붙는다.
태주 ...너....! 너 또 아침부터 여기 왜 왔어!
은수 .....
태주 이번엔 진짜 경찰에다 확....
지수(e) 왜 안타고 있어?
이때, 뒤늦게 다가온 지수(역시 장가방을 든)가 은수를 끌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다.
지수를 보고 입을 다무는 태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지수를 가운데 두고 태주와 은수가 양 옆에 서 있다. 태주, 지수를 힐끔 쳐다보고 은수 쪽을 본다. 은수, 태주의 시선 느끼자 자꾸만 고개를 벽 쪽으로 기울인다.
아는 척도 않고 외면하는 은수의 반응에 태주도 멀뚱하게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선 지수는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내고 태주를 힐끗 본다. 다들 꽤 어색한 분위기다.
동,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은수, 서둘러 내리며 오피스텔로 향한다.
그런 은수를 열심히 쫓아가는 지수.
태주도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하지만 은수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 돌아본다.
은수가 열쇠로 문을 여는 모습을 관심 있게 보던 태주, 하지만 때마침 돌아보던 지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시선 돌리고 냉큼 집으로 들어간다.
지수 오피스텔
익숙한 솜씨로 대파 등의 채소를 써는 은수. 찌개거리를 정리하는 중이다.
지수 정말 얘기 안할 거야? 그 남자지? 맞지?
은수 .....(못 들은 척)
지수 어울리지 않게 웬 비밀주의? (일어나며) 가서 직접 물어봐야지.
은수 (정색하는) 야! .....쓸데없는 짓 했다가 죽을 줄 알어!
지수 맞구나! ......(은수 안색 살피고) 근데 너..., 수상하다?
은수 (무시하고 화제 돌리는) 그냥 당일치기로 갔다 오면 안돼니? 인터넷 소설 동호회면 인터넷만 할 것이지...MT는 무슨 MT야.... 쬐끄만 것들이 외박까지 할려 그러구 말 야..
지수 거기에 언니보다 나이 많은 대학생들도 많거든?
은수 하여간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번만 더 해봐, 니네 엄만테 확 일러버릴 거니까. (찌개 재료를 담은 플라스틱 용기를 지수에게 내민다.) 이대로 냄비에 넣고 물만 붓고 끓이면 돼. 밥 절대 거르지 말고 제때 챙겨 먹어, 알았지?
지수 (잔소리가 듣기 싫은 듯 받은 용기를 거칠게 가방에 쑤셔 넣는다.)
은수 야, 한지수, 대답 안해?
지수 그 남자가 계속 언니 쳐다보더라?
은수 !? 뭐?
지수 엘리베이터에서도 흘끔흘끔 보고, 문 앞에서도 계속 보고 있던 걸?
은수 저....정말?
지수 응.... 꽤 관심 있는 눈치였어.
은수 (내심 나쁘지 않은) 서..설마....
지수 (떠보는) 생긴 건 진짜 멀쩡하던데.., 귀엽기까지 하잖아. 절대 이상한 짓 하게는 안생겼어, 그치?
은수 내 말이! (진지한) 내 생각엔 그럴 사람으론 안보여. 대따 이쁜 애인도 있는 거 같구.., ...우리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닐까?
지수 (비웃듯 보다가) 그 남자한테 반했지?
은수 (발끈) 야, 미쳤어?
지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은수 이게 진짜 왜 엄한 사람 잡고 난리야?
지수 남잔 다 늑대라는데 변태는 오죽하겠어? 취향이 독특한 거 보면...., 언니가 타겟이 될 수도 있어.
은수 (옷을 갈아입으며) 야, 나 오늘 면접 봐야 되거든. 정신 산란하게 하지 마라.
지수 같은 오피스텔에 사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엘리베이터 탈 때나 밤 늦게 들어올 때..... 언니랑 그 변태랑 단 둘이 마주치면 어떡하냐...
은수 한지수! 약은 챙겼냐?
지수 .....(깜빡 잊었다는 듯 약을 찾는다.)
은수 덜렁덜렁덜렁..., 입만 살아 가지구.
지수 금방 챙길려구 했거든. (꽤 많은 양의 약봉지 중에서 하루치를 꺼낸다.)
은수 열쇠 두고 가는 거 절대 잊지 마. 나 또 한데서 밤새게 하지 말구.
지수 알았어! (가방에 약을 챙겨 넣으며 은수를 째려본다.) 어휴, 저 잔소리!
거울 앞의 은수는 열심히 머리를 다듬고 있다.
혜린의 부띠끄
부띠끄에 들어서는 혜린.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김실장에게 눈짓하자, 김실장, 혜린을 따라 사장실로 간다.
동, 사장실
자리에 앉는 혜린.
혜린 자금 회수 문제는 해결 됐어요.
김실장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혜린 (쓴웃음) 최후의 방법 썼죠, 뭐.
김실장 .....(짐작한다.) 괜찮으시겠어요?
혜린 이제 우리 진짜 맨땅에 헤딩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번 패션쇼, 좀 더 신경 써서 준비 해야겠어요.
김실장 예. 선생님.
혜린 그리고 집에 전화 좀 해줄래요? 나, 밤샘 작업하고 지금 자고 있다고.
김실장 네?
혜린 어젯밤 과음 땜에 외박했거든요. 우리 엄마 지금쯤 난리 났을 거야.
김실장 (알아들은 듯) 예, 말씀 잘 드리겠습니다.
김실장, 목례하고 나간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혜린, 결심한 듯 전화기를 든다.
모델에이전시 주차장 / 1층 입구
차에서 막 나오는 나경, 핸드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는다.
액정의 ‘혜린’을 확인하고
나경 아침부터 웬일이니?
혜린의 부띠끄, 사장실
통화중인 혜린
혜린 그 때 그 남자 있지...., 언니가 소개해줬던.....
나경(e) 누구..., 아.., 강태주? 강태주가 왜?
혜린 그 사람 이름이 강태주야? .....저....연락처 좀 알려줄래?
모델에이전시 사무실 입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나경, 호기심으로 빛나는. 걸음을 멈춘다.
나경 뭐야..., 관심 있는 거야? 야...., 강태주가 킹카는 킹칸가 보네..., 그 잘난 차혜린이 연 락처를 다 물어보고..... 이럴 걸 그 땐 왜 그렇게 뻣댔니? 강태주 걔, 봐서 알겠지만 자존심 빡세기로 아주 유명하단 말야.., 뭐, 그게 걔 매력이긴 하지만.
혜린의 부띠끄, 사장실
난감한 혜린.
혜린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그냥 좀 물어볼 말이 있어서 그래...., 글쎄, 그런 거 정말 아니라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얘기해 줄께..., 응., 번호 문자로 찍어줘. 부탁해. 언니.
전화 끊는다.
태주의 사무실
태주의 책상 위에 던져지는 기획안. 겉표지에 <châchâ 자선바자패션쇼>라는 글자가 써 있다. 태주, 고개를 들어보면 호영이다.
태주 뭐야, 이건?
호영 이제부터 네 담당이다.
태주 이거 경훈 선배가 진행하던 거 아냐?
호영 그 놈 파주 전시회 맡았잖아. 워낙 큰 행사라 이런 짜잘한 거에 신경 쓸 여유 없댄다.
태주 그렇다고 중간에 담당자를 바꿔?
호영 .....그러게 누가 미움 받으래냐?
태주 (짐작 가는) 또 이부장이냐.
호영 너 땜에 우리 회사 이미지 급물살 타고 내려갔는데, 그 쫀쫀한 부장이 가만히 있겠어? 내일이 미팅이라니까 밤새서라도 연구해.
태주 굿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아, 누가 날 그 자리에 부르랬냐구!
호영 (못마땅한 듯 보며) 이제 나도 네 놈이 싫다. 이부장 맘에 공감 200이다.
태주 !?
호영 너 진짜 꾼이지?
태주 뭐?
호영 그게 아니고서야 바로 전날 길에서 스친 여자를 어떻게 하루만에....
태주 또 그 얘기야? 몇 번 말해, 그냥 재수 없게 엮였을 뿐이라니까. 나도 미치겠다구!
이때, 태주의 핸드폰이 울린다.
태주 (액정보고 모르는 번호인 듯) 여보세요.
혜린(f) (여전히 도도한) 나, 차혜린이에요.
태주 누구요?
혜린(f) 얼마 전, 이나경씨 소개로 만난 사람이요.
태주 !
호영을 힐끗 보고는 일어나 나가며
태주 (달갑지 않은) 왜 전화 했어요?
혜린의 부띠끄, 사장실
태주의 반응에 기분이 약간 상한다.
혜린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 혹시 우리 어제.., 만났나요?
태주(f) 그런데요.
혜린 !....그럼 댁이 날..., 모텔로 데리고 갔어요?
태주(f) 그거 물어보러 전화했어요?
혜린 .....혹시 무슨 일 있었나 해서요..., 특별한 일은 없었죠?
태주 사무실 복도
귀찮은 얼굴로 통화하고 있는 태주.
태주 참 나!
혜린(f) .... 있었나요?
태주 기억하기도 싫으니까 다 없었던 걸로 합시다.
혜린(f) 네?
태주 글쎄, 기억하기 싫다니까, 입에 담기도 싫고! 다신 이런 전화하지 말아요! 당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 싹 잡치니까.
전화 끊는다.
혜린의 부띠끄, 사장실
전화를 들고 황당해 하는 혜린. 자존심 상하고 화도 치민다.
중소업체 사무실
작은 규모의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은수가 정장차림을 하고 면접을 보고 있다. 은수의 하이힐이 유난히 눈에 띈다.
하이힐이 불편한 듯 하이힐 속의 발가락을 오물오물하고 있다.
중년남자가 은수의 이력서를 살펴보고 있다. 경력난이 꽤 길다.
남자 고등학교 때 1년간 휴학을 했었네요.
은수 네, 병간호 땜에요.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었거든요....
남자 전문대 중퇴에, 제일 오래 근무한 직장이 7개월..., 졸업 후 3년간 직장을 총 다섯 번이나 옮겼는데,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은수 직장을 옮겼다기 보단...., 사정이 생겨서 그만 둔 겁니다.
남자 사정이라니, 무슨?
은수 그러니까..., 개인적인... 집안 사정인데요....., 갑자기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거나...., 가족이 아프다거나..., 뭐 그런 일들이 좀 있었거든요.
남자 (건성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일들이 꽤 자주 있었네요.
은수 (불안한) 이제 앞으로는 없을 거예요.
남자 (건성으로 고개 끄덕인다.) 알았어요. 결과는 담에 연락드리죠.
은수 예...
은수, 불안한 시선으로 이력서를 한 켠에 내려놓는 남자의 손을 바라본다.
동, 건물 앞
건물에서 나오는 은수. 발이 몹시 불편한 듯 절뚝거리며 건물을 쳐다본다.
은수 경력이 너무 화려한 게 탈이야......! (머리치며) 바보 같은 솔직함! 딱 절반으로 줄일걸!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은수.
은행 현금인출기
5-6만원 정도의 돈을 인출하는 은수. 통장 잔액을 보면 거의 바닥이다.
통장을 확인하는 은수의 얼굴이 어둡다.
**모텔, 세탁실 (밤)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다.
작업복 차림의 은수, 세탁실 구석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전화를 하고 있다.
은수 엄마? .....별 일 없으시죠? ......저흰 잘 있어요. 지수는 다음 주부터 학원 나갈 거구 요. 예....... (망설이다가) 근데..., 보내준다는 생활비 아직 안 들어왔던데..... ....아.., 그렇구나....., 예....., 직장은 구하고 있어요. 서울이라 좀 까다로운 거 같긴 한데, 뭐 금방 구하겠죠......, 그럼 생활빈 언제쯤......? (실망한) 아르바이트라도 구해봐야죠, 뭐. .....예.., 지수 걱정은 하지 마세요. 예....
전화를 끊고 맥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는다.
혜린의 집 현관/ 거실
현관에 들어서는 혜린, 그런 혜린을 보자마자 윤여사 잔소리를 퍼붓는다.
윤여사 어떻게 된 거야? 기집애가 연락도 없이 외박이나 하고.
혜린 김실장이 전화 했잖아. 일이 바빴다니까.
윤여사 (못마땅한 눈으로 본다.)
혜린 (윤여사 눈치를 보고) 왜요, 나이 먹은 딸 탈선이라도 하고 왔을까봐?
윤여사 (듣기 싫다는 듯) 아빠가 좀 보자셔. 서재에 계신다.
혜린 .....
윤여사 (가는 혜린 잡으며) 솔직히 말해봐. 아빠랑 너, 무슨 일 있는 거지?
혜린 .....무슨 일은..., 부녀사이 이제 신경 안 쓴다며?
혜린, 서재로 향해 간다. 윤여사 그런 혜린을 괘씸한 듯 본다.
동, 서재
신문을 읽고 있는 차회장.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혜린이 들어선다.
혜린 저 왔어요.
차회장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혜린을 본다.)
혜린 보자고 하셨다면서요?
차회장 황변호사한테 들었다. 부채금 전액 상환했다고.
혜린 .....
차회장 하루 만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닌데..., 어떻게 된 거냐?
혜린 그거까지 설명 드려야 하나요?
차회장 애비로서 그 정돈 물을 수 있어.
혜린 .....팔레스 백화점의 제 지분, 최영준이사한테 양도하기로 했어요.
차회장 !!
혜린 어차피 그거 저한테 의미 없는 거잖아요. 전 제 회사 일에만 전념할 거니까요.
차회장 (분노에 찬 눈으로 혜린을 본다.)
윤여사(e) 뭐라구? 네 지분을 누구한테 양도해?
혜린, 돌아보면 다과를 갖고 들어온 윤여사가 격앙된 얼굴로 혜린을 본다.
윤여사 (차회장과 혜린을 번갈아보며) 최이사이라면 그렇잖아도 사사건건 아빠 일에 토달고 나서는데, 그런 사람한테 네 지분을 양도해? 아예 날개를 달아주지 그러니, 응?
혜린 엄마.....
윤여사 너 왜이래? 왜 하루에 한 건씩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 이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 정말?
혜린 내 지분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그까짓 걸로 최이사한테 경영권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차회장을 본다.) 아빤 이미 짐작하고 계셨을 거 아니예요. 저한테 다른 방법 없다는 거.
차회장 .....(화가 난 듯 시선을 돌린다.)
혜린 저로선 이게 최선이었어요. 아빠 회사에 들어갈 맘은 전혀 없었으니까.
차회장 .....꼴보기 싫다. 나가라. .......당장 나가라니까!
혜린 ..... 그럼.., 쉬세요.
혜린, 방을 나간다.
윤여사 (머리를 만지며) 아...., 내가 쟤 땜에 정말.....
차회장 빨리 치워버려.
윤여사 ! 치우다뇨....뭘, 어디로?
차회장 (못마땅한 눈으로 윤여사를 본다.)
윤여사 아니...., 남자랑 동거했다고 소문이 자자할텐데 어따가 명함을 내밀어요?
차회장 좀 기우는 데라도 찾아. 딸년이 저 모양이면 고분고분하고 똑똑한 사위놈이라도 있어야할 거 아냐!
차회장, 일어서서 나간다. 윤여사, 머리 복잡해 죽겠다.
동, 혜린의 집 2층 복도
혜린, 자기 방에 들어가려다가 멈칫한다.
준혁의 방 쪽으로 가는 혜린. 준혁의 방 문을 연다.
동, 준혁의 방
오랜 동안 비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휑한 분위기다.
준혁이 직접 만든 모형 비행기가 몇 대 보인다. 꽤 수준급의 솜씨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상 위에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혜린과, 혜린의 부모, 그리고 준혁의 모습이다. 환한 표정의 사람들 사이로 준혁만 유독 동떨어진 분위기다. 준혁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혜린.
문득 손가락을 본다. 먼지가 묻어 있다.
책상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는 혜린,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듯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
가정부(e) 정말 몰랐다니까. 알았으면 미리 청소를 했지.
동, 주방
화가 난 듯한 혜린 앞에서 가정부가 꽤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다.
혜린 꼭 온다는 걸 알아야 청소하세요? 아무리 빈방이라도 적어도 1주일에 한번은 청소했어야죠!
가정부 계속 그렇게 했어...., 그러다 요즘에 잠깐 뜸했던 건데..... 이렇게 갑자기 올 줄 알았나, ....., 지금 당장 할께, 응?
가정부, 주방을 나간다. 혜린, 속상한 얼굴이다. 이때 주방에 들어서는 윤여사.
윤여사 무슨 일이니? 왜 아줌마한테 큰 소리야?
혜린 준혁이 오빠 방, 얼마나 청소를 안했는지 완전히 먼지 구덩이잖아. 엄마도 그렇지, 당장 내일 준혁 오빠 오는데 아줌만 그것도 모르고 있더라? 내가 안 봤으면 어떡할 뻔 했어?
윤여사 지가 와서 하면 돼지 뭐. 준혁이 걔, 남이 자기 방 청소해주는 거 좋아하지도 않아. 좀 까탈스럽니, 걔가?
혜린 엄마! 오빠 2년 만에 오는 거야.
윤여사 2년만에 오는 게 뭐? 그게 별일이라도 돼?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쓰잘 데 없는 데나 신경 쓰고......, 뭘 잘했다고 집안에서 큰 소리야, 뻔뻔스럽게! 아유, 자식 잘못 키웠어. 요즘 같아선 진짜 너 내 딸 하기 싫어!
윤여사, 짜증내며 주방을 나간다. 혜린, 착잡하다.
도로 / 버스 안
한적한 도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막차인 듯 거의 텅 빈 버스에 앉아 졸고 있는 은수.
잠시 후, 잠이 깨어 창 밖을 바라본다.
은수 (한숨) 비까지 오냐.....
은수의 옆자리에 놓인 신문이 눈에 띈다. 신문을 집어 들고 하차 버튼을 누른다.
버스 정류장
버스에서 내리는 은수. 신문지로 머리를 가리고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발이 몹시 아픈 듯 걷는 것이 불안정하다.
편의점 앞 길
침울한 얼굴로 가던 은수가 멈칫한다.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태주를 발견한 것.
라면을 다 먹고 일어서는 태주를 보자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후, 편의점에서 나오는 태주. 우산을 펴들고 은수가 지나간 길을 걸어간다.
골목길
한적한 골목길.
길을 걷던 태주, 저 앞에 발을 절뚝거리고 가는 은수를 발견한다.
처음엔 누군지 모르다가 혹시나 하며 유심히 보는 태주.
긴가 민가 잘 모르겠다. 걸음을 조금 빨리 한다.
은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고 두려워진다.
지수(e) 남잔 다 늑대라는데 변태는 오죽하겠냐? 취향이 독특한 거 보면...., 언니가 타겟이 될 수도 있어.
은수를 따라잡은 태주, 은수의 얼굴을 확인하자
태주 어라.., 맞잖아? ......꼴이 그게 뭐냐?
은수, 태주 얼굴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앞서 걸어간다.
태주 (황당한) 야.., 나 몰라?
급히 걸어가던 은수, 발이 너무 아픈지 걸음을 멈추고 아예 구두 뒤축을 접는다.
신발을 끌며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은수.
태주, 은수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 안 간다.
태주 쟤, 뭐야?
오피스텔 로비
로비에 들어서는 은수. 젖은 머리를 후루룩 털며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은수. 발뒤꿈치를 보면 완전히 까져서 피가 나고 있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수가 타는데 이때, 로비에 들어서며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
태주(e) 잠깐, 잠깐만.
겨우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태주, 여유잡고 타려는 순간 은수가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문은 태주 눈앞에서 닫히고 만다. 태주, 기가 막힐 뿐이다.
태주 저거 싸이코야?
오피스텔 복도 / 엘리베이터 앞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은수.
오피스텔 우유투입구에 손을 내밀어 열쇠를 찾는다. 열쇠가 잡히지 않는다.
투입구에 머리를 박고 안을 들여다본다. 열쇠는 없다.
뒤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주, 바닥에 엎드려 투입구에 머리를 박고 있는 은수를 본다.
은수, 일어나서 문턱 여기저기 열쇠를 찾아본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열쇠는 없다.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는데 마침 오피스텔 문을 열며 은수를 노려보고 있던 태주와 눈이 마주친다. 태주,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곧 시선 돌리며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은수, 비 맞은 꼴로 또다시 밖에서 밤을 새워야 할 판이다. 미치겠다.
은수 지수 이 기집애, 진짜......!
태주의 오피스텔
침대에 걸터앉아 낮에 호영에게 받은 기획서를 검토하고 있는 태주.
하품하며 기획서를 내려놓고 TV를 켠다.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냉장고에 다가가 생수를 꺼내 마시는 태주.
TV에서는 이번 비가 내리면서 밤새 기온이 뚝 떨어지겠다는 예보가 나오고 있다.
동, 복도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은수. 비 맞은 뒤라 추위가 더 사무친다.
까진 발도 아파 죽겠다.
버스에서 들고 온 신문지를 펴서 덮는데 태주의 오피스텔 문이 열린다.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숙이는 은수. 태주, 쓰레기봉투를 들고 슬리퍼를 끌며 나온다.
은수를 보는 둥 마는 둥 엘리베이터를 타는 태주.
은수, 창피해 죽겠다.
은수 아...., 추워...., 이 기집애 오기만 해봐...
이때, 덮고 있던 신문의 광고면이 은수의 눈길을 끈다.
<세일 기간 판매직 급구 - 팔레스 백화점, 일정과 근무 시간 등등...> 눈이 떨어져라 열심히 보는데
태주(e) 네 동생 또 가출했냐? 열쇠까지 가지구?
은수, 고개 들어 보면 언제 올라왔는지 태주가 자기 오피스텔 앞에서 은수를 보고 있다.
은수, 시선을 돌린다.
태주 오늘 밤 비온 다음에 기온 뚝 떨어진다던데, 차라리 너 일하는 모텔에라도 가지 그래?
은수 .....버스 끊겼어요.
태주 택시 타면 되잖아.
은수 .....
태주 열쇠집 부르든가. 한 2,3만원이면 문 따줄텐데.
은수 .....뭐..뭣하러 돈을 써요? ...하룻밤만 참으면 되는데.....
태주 참..., 알뜰도 하다.
태주, 집으로 들어간다.
은수, 스스로가 처량해서 눈물이 핑 도는데, 잠시 후 다시 열리는 태주의 오피스텔.
태주 (얼굴만 쑥 내밀고) 들어와 있을래? 네 동생 올 때까지.
은수 !!!
태주의 오피스텔
문을 닫지 않은 채 현관 쪽에 뻘쭘하게 서 있는 은수.
태주 (은수를 돌아보고) 뭐해, 안 들어와?
은수 ..... 저기... 왜 갑자기 잘해주세요?
태주 뭐?
은수 이상하잖아요. 엄청 쌀쌀맞더니...
태주 너라면, 바로 옆에서 얼어 죽은 여자 시체가 실려 나가면 기분 좋겠냐?
은수 아니요.
태주 예방차원이야. 나 공포영화, 처녀귀신, 그런 거 생각만 해도 딱 질색이거든.
은수 (고개 끄덕이는) 아아.......근데요, 정말 괜찮을까요? 제가 여기 있어두?
태주 할 수 없잖아, 인심 좋은 내가 참아주는 수밖에.
은수 아저씨 말고 저요. 제가 괜찮겠냐구요, .....저..전.., 여자잖아요!
태주 여자?
은수 그러니까....., 여자가.....남자 혼자 있는 집에.....
태주 너 진짜로 가지가지 한다. (은수를 밀며) 나가, 나가!
은수 (태주를 제지하는) 아..아저씨, 그게 아니라요.
태주 (거의 문 밖으로 밀어내며) 나가! 얼어 죽든 말든 나가라니까! 나가. 안나가!
은수 (필사적으로 벽을 잡고 버티며 절박하게) 아저씨 정말 나쁜 사람 아니죠?
태주 이게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은수 따뜻한 물 좀 주세요!
태주 !
<시간 경과>
구석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찻잔을 두 손으로 맞잡고 물을 마시는 은수. 이제 좀 살 거 같은 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어딘가에 잃어버린 팬티가 있을까하는 얼굴이다.
가구의 틈 사이로 헝겊이 보이는 듯 하다. 혹시나 싶어 손을 뻗어본다.
힘들게 꺼내보면, 먼지투성이의 양말 한 짝이다.
태주(e) 내 양말 가지고 뭐하냐?
은수,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다가 발뒤꿈치의 상처가 쓸린다.
은수 아.....아야! (태주에게 양말 보이며) ...구석에 끼어 있어서....
태주, 은수의 손에서 양말을 채가고, 담요를 던져준다.
태주 나 잠귀 엄청 밝으니까 바스락거리거나 코골거나 그러면 당장 아웃이다. 잠잘 때 소리 나는 거 딱 질색이거든, 나.
은수 네..
이때, 핸드폰 메시지도착 알람이 울린다. 화들짝 놀라는 은수, 확인해보면 광고메일이다.
태주 눈치를 보며 재빨리 밧데리를 뺀다.
태주 (고갯짓 하며) 거기 서랍 열어봐.
은수 예, 왜요?
태주 열어.
서랍을 열면 약상자가 있다. 은수, 돌아보면 태주는 이미 침대 쪽으로 가서 기획서를 보고 있다.
은수 이게 뭐예요?
태주 (서류에 시선 둔 채 귀찮다는 듯) 필요 없으면 그냥 냅두던가.
은수, 연고와 반창고를 꺼내 발에 바르며 태주를 힐끔힐끔 본다.
기획서에 몰두하고 있는 태주의 모습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계속 태주를 훔쳐보다가 순간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찔끔해서 시선 피하는 은수.
태주 (기획서에 시선 둔 채) 너 왜 나 모른 척 했냐?
은수 네?
태주 아침에랑... 그리고 아까 골목길에서.
은수 .....아, 그건..., 아저씨가 저 싫어하는 거 같아서.
태주 사람이 사람한테 그렇게 생 까는 거 아니다. 인간이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고 살아야지.
은수 예..., 죄송합니다.
태주 알면 됐고. (서류 내려놓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은수 저, 아저씨!
태주 (돌아본다.)
은수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잠시 망설이지만 마음 단단히 먹고) 제 가방은 왜 뒤지셨어요?
태주 !(찔끔하는) ......뒤져? 네 가방을?
은수 보니까 내가 정리한 거랑 많이 다르고, 없어진....(아차 싶다.) 그..그냥 많이 달라서요.
태주 네 연락처 찾느라 열어봤는데, 실수로 엎었어. 그거 다시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어?
은수 연락처요?
태주 네가 옆집에 사는 줄 몰랐잖아. 연락처 보고 가방 찾아줄라 그랬지. 넌 수첩에 그런 것도 안 적어놓더라.
은수 (이해 가는) 예...., (그래도 팬티가 걸린다.) 근데 왜...?
태주 ?
은수 아..아니예요..,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봐요. ....아저씨 생각보다 착한 사람인 거 같은데...., 가방도 찾아줄라 그러구.
태주 나 원래 착하고 선량해. 첫판부터 네가 날 이상하게 건드려서 그러지.
은수 .....죄송합니다.
태주 (은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이내 거두고) 어쨌든 바스락거리면서 사람 신경쓰게 하지마라. 나 엄청 예민하거든.
태주, 말 끝내는 것과 동시에 불을 끈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화들짝 놀라는 은수. 막 마시던 물을 소리 안 나게 삼킨다.
침대에 편안히 누운 태주는 곧 잠이 들고, 은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불안한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물을 소리 안 나게 마시고 컵을 조심히 내려놓는다.
청량리 역 (이른 아침)
달리는 열차 인서트.
역사에서 바쁜 걸음으로 나오는 지수. 걱정 가득한 얼굴이다.
태주의 오피스텔
알람이 울리자마자 버튼을 누르는 태주. 침대에서 일어나 언제나 처럼 냉장고로 향한다.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다가 은수에게 시선이 가는데, 은수는 어젯밤 그 자세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다.
꽤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모습이 처량 맞다.
태주, 다가가 은수를 깨워보지만 일어나기는커녕 태주에게 고개를 기댄다.
태주, 은수의 고개를 밀어놓고 일어서는데 저 곤한 얼굴을 보니 맘에 걸린다.
다시 돌아가 은수를 안아들고 침대에 눕히는 태주.
<시간 경과>
출근 준비를 마친 태주, 거울 앞에서 마지막 스타일 점검을 한다.
세상 모르고 잠든 은수를 보고 메모와 열쇠를 침대 협탁 위에 놓고 방을 나서는 태주.
메모지엔 ‘열쇠는 우편함에’라고 써 있다.
동, 로비 엘리베이터 앞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내리는 태주.
이때, 급히 들어서던 지수와 마주친다. 깜짝 놀라는 두 사람.
태주의 오피스텔
잠든 은수를 흔들어 깨우는 태주. 은수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태주 야, 야, 일어나! 네 동생 왔어!
태주가 세게 흔들자 그제서야 잠이 깨는 은수.
눈 앞에는 지수가 무표정한 내려다보고 있고, 옆에는 태주가 있다.
은수, 현재 상황이 접수되지 않아 멍청히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지수 두 사람...., 잤니?
은수 !!! 엉?
은수, 놀란 눈으로 태주를 본다.
지수(e) 그 남자 침대에서 잤잖아.
지수 오피스텔
은수, 감은 머리를 닦고 있고, 지수는 계속 은수 옆에서 알짱거린다.
지수 핸드폰 밧데리까지 빼놓고.
은수 .....
지수 근데 진짜 아무 일 없었다구?
은수 .....
지수 야! 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새벽기차까지 타고 왔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거 아냐!
은수 어따 대고 큰 소리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지수 ....(풀이 죽는다.) 미....미안해...., 나도 밤새 한숨도 못 잤어. 전화도 안받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은수 어휴, 저것도 동생이라구. 절루 가, 꼴 보기 싫으니까.
지수 그 변태가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지?
은수 뭐?
지수 그 남자. 토요팬티...
은수 착한 사람이야, 그 아저씨.
지수 엥?
은수 변태 아니라구, 착한 사람이라니까!
인천공항 입국장
입국장으로 나오는 사람들과 그들을 맞는 사람들로 꽤 붐비는 풍경.
나오는 사람들을 찬찬히 보는 혜린, 초조한 듯 시계를 확인한다.
사람들이 한산해질 무렵 입국장으로 나오는 준혁이 보인다.
준혁을 발견하자 혜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생기가 돈다.
준혁, 누군가 마중 나올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은 듯 무표정하게 걸어가다가 눈 앞의 혜린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혜린, 준혁이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다가가 그를 포옹한다.
처음의 당혹스런 표정 사라지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준혁.
준혁 안본 사이 세졌는데? 이거 너무 도발적이다.
혜린, 팔을 풀고 곱게 눈을 흘긴다.
혜린 첫인사가 겨우 그거야?
준혁 (손가락으로 혜린의 코를 치며) 네가 먼저 이 오빠 놀래켰잖아.
준혁, 앞장서 걸어간다. 혜린의 얼굴에 잠깐 서운한 기색이 스치지만 다시 밝은 표정으로 준혁을 따라잡으며 팔짱을 낀다.
혜린 조금 전까지 미국에 있던 사람이 그 정도로 놀래냐?
준혁 (가볍게 혜린의 팔을 빼며) 여긴 한국이야. 난 한국 사람이구.
혜린 (기분 상한 듯 준혁을 본다.)
준혁 (혜린의 시선에 무심한 채) 뭣하러 마중 나왔니, 바쁠텐데.
혜린 (약간 날선) 당연하잖아.
준혁 (그제서야 혜린을 본다.)
혜린 (공항의 사람들 가리키며) 봐, 다들 마중 나오고, 다들 배웅 나와! 저 사람들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 했어. 그게 그렇게 이상해?
준혁 .....
혜린, 준혁에게 야속한 시선을 던지고는 화가 난 듯 발걸음을 재촉해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는 준혁도 마음이 착잡하다.
도로 / 혜린의 차 안
혜린과 준혁, 약간 어색한 분위기다. 준혁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혜린, 마음이 불편한 듯 준혁을 힐끗 본다.
혜린 미안해. 만나자마자 신경질내서.
준혁 .....
혜린 사실 조금 화가 나 있었어. .
준혁 (혜린을 본다.)
혜린 김비서 아저씨 통해 알았거든. 오빠 귀국 앞당겨졌다는 거.
준혁 .....
혜린 그 정도는 나한테 직접 알려줄 수 있었잖아.
준혁 (애써 아무렇지 않게) 미안해. 워낙 갑자기 결정된 거라 경황이 없었어. (피식) 그것 때문에 화났던 거야?
혜린 (준혁의 가벼운 태도에 다시 화가 치밀지만 꾹 참는다.) 그만 하자..... 나 사무실 들어가 봐야해. 미팅 있거든. 집에다 내려주면 돼지?
팔레스 백화점 앞 도로 / 혜린의 차 안
백화점 앞 횡단보도 앞에 차를 멈추는 혜린.
혜린 골프회동 땜에 아빠도 안계시다니까...., 굳이 여기부터 오는 이유가 뭐야?
준혁 (백화점 보며) 그동안 얼마나 변했나 궁금해서... 내 밥그릇이잖냐. (차에서 내린다.)
혜린 (따라 내린다.) 오빠 갑자기 나타나면 직원들만 불편해해.
준혁 매장만 돌아 볼 거야. 거기 직원들은 내 얼굴 잘 몰라.
혜린 (포기하는) 저녁 시간 맞춰 들어와. 다같이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준혁 (끄덕이며) 이따 보자.
혜린, 백화점으로 향하는 준혁을 보고 차에 올라탄다.
막 출발하려는데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지는 바람에 그대로 멈추는 혜린.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한 얼굴로 본다. 그 사람들 사이로 은수가 걸어가고 있다.
혜린, 초조한 듯 시계를 확인한다.
신호가 바뀌자 혜린의 차 출발하고, 두리번거리며 백화점으로 향하는 은수의 모습이 보인다.
백화점 스탭 사무실
서류들을 정리하고 체크하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인력부 직원.
그 옆에 은수가 학생부에 끌려온 여학생처럼 어색하게 서 있다.
직원, 시선은 계속 서류들에 둔 채 기계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직원 기간은 수요일부터 이주일 간, 근무시간은 오전 아홉시 삼십분에서 오후 일곱시. 이벤트 행사장 판촉인 건 알고 있죠? 보수는 시급 3500원, 질문 사항 있어요?
은수 아니요.
직원 (종이 한 장을 툭 던져 준다.) 기입하고 서명하세요.
은수 네. ......(눈치 보다가) 저...,이걸로 된건가요?
직원 ? (의아한 듯 본다.)
은수 (어색한 웃음) 너..., 너무 쉬워서....조..좋아서요!
은수, 재빨리 서류를 기입하기 시작한다. 신이 났는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백화점 매장 - 몽타쥬
매장을 돌아보는 준혁.
지하매장부터 행사장, 명품관 등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준혁의 모습 먼 발치로 은수의 모습이 엇갈려 보인다.
은수도 역시 백화점 구경 중이다. 곧 일하게 될 곳이란 생각 때문인지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이다.
동, 핸드폰 매장
핸펀직원1(이하 핸펀1)과 은수
은수 뭐가 그렇게 비싸요? .....별루 이쁘지도 않은데.
핸펀1 그 정도면 꽤 저렴한 편인데요, 손님. 무이자 할부구입도 가능합니다.
은수 .....이렇게 많은 기능은 필요 없는데.. 간단한 기능으로 좀 더 싼 거 없을까요?
핸펀1 부모님이 쓰실 건가요?
은수 아뇨, 제 동생이요.
핸펀1 동생분이라면....
은수 걔 복잡한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무조건 잘 터지고 싸면 돼요.
핸펀1 .....(생각하더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은수,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때 옆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돌아보면 핸펀직원2가 준혁에게 핸드폰을 선보이고 있다.
핸펀2 소리부터 전혀 다르죠? 바로 어제 출시된 제품인데, 벌써부터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핸펀2가 준혁에게 최신 핸드폰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은수의 관심도 그 핸드폰으로 쏠린다.
핸드폰을 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점점 준혁 쪽으로 머리를 디밀게 된 은수.
어느 덧 준혁이 들고 있는 핸드폰에 거의 얼굴을 쳐박고 보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핸펀2, 말을 멈추고, 준혁도 황당한 듯 자기 눈 앞에 디밀어진 은수의 뒤통수를 본다.
은수, 아무것도 의식 못하고 열심히 핸드폰을 보며
은수 와, 별게 다 된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술은 진짜 짱인 거 같아요!
은수, 동의를 구하듯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다가 준혁과 눈이 마주친다.
그제서야 상황을 의식하고 당황하는 은수. 어색한 미소로 목례하며 처음의 자리로 간다.
핸펀1이 은수에게 가지고 온 구모델 핸드폰을 내민다. 마음에 안드는 듯 그 핸드폰을 보다가 다시 준혁 쪽을 보는 은수.
고객카드 기입 중인 준혁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다.
은수 그 핸드폰 정말 잘 사셨어요. 대따 이뻐요!
준혁, 무표정하게 대꾸 없이 시선 돌린다. 은수, 무안하다.
혜린의 부띠끄 앞
급하게 들어서서 정지하는 혜린의 차.
혜린,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부띠끄로 들어간다.
동, 회의실
김실장, 마주 앉은 상대에게 한창 설명 중이다.
김실장 지금 기획안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 회사에서 현재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것이.....
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혜린이 들어선다.
혜린 죄송합니다. 초면부터 지각이나 하고...,
혜린, 테이블에 다가와 일어서 있는 상대방 남자를 보고 얼굴이 굳어버린다.
바로 태주인 것. 혜린을 본 태주도 꽤 놀란 눈치다.
두 사람, 잠시 그렇게 보다가
혜린 샤샤 책임자 차혜린이예요.
태주 박경훈 선배 후임으로 담당하게 된 강태줍니다.
두 사람, 자리에 앉는다.
김실장 저희 입장에 대해선 이미 설명 드렸습니다.
혜린 그렇다면 잘 아시겠네요. 이번 패션쇼를 통해 우리 브랜드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어요. 전임자이신....박...
태주 박경훈 대립니다.
혜린 박경훈 대리의 기획안은..... 뭐, 훌륭하긴 하지만, 브랜드 홍보 효과는 완전히 제로거든요. (기획안을 내려놓으며) 이래서야 다 소용없는 거죠.
태주 소용없는 일을 왜 한달 동안이나 진행시킨 겁니까?
혜린 소용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브랜드 홍보를 절박하게 내세운 건 최근에 생긴 방침이거든요.
태주 .....뭐요?
혜린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저희 입장이 그래요.
태주 .....아무리 저희가 일을 받아서 하는 거지만,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닙니까.
혜린 (잠시 태주를 보다가) 정 안된다면, 할 수 없죠. 업체를 바꾸는 수 밖에.
태주 (혜린을 본다.)
혜린 (앞에 놓인 기획안 서류 정리하며) 이 일에 대한 소정의 기획료는 지불하겠습니다. 어쨌든 그 쪽 업체에서 수고해 주신 대가는 치러야 하니까.
태주 하겠습니다.
혜린 (태주를 본다.)
태주 오늘 여기서 잘리고 들어가면 윗분들이 절 가만두지 않겠죠.
혜린 (미소 짓는다.) 다행이네요.
태주 우선 좀 둘러볼 수 있을까요?
혜린 ?
태주 뭘 알아야 전략을 짤 거 아닙니까.
혜린 아아..., 그렇겠네요. 김실장님. 우리 의상들 견학 좀 시켜드리세요.
김실장 네. 선생님.
혜린, 태주를 본다. 태주는 혜린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가방에 서류를 챙긴다.
동, 사장실
디자인철을 보고 있는 혜린.
몇가지 디자인을 스케치해보다가 집중이 안 되는지 책상에 내려놓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초조한 모습이다. 결국 전화기를 들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혜린 (잡던 전화기 내려놓으며) 네.
문이 열리고 태주가 들어선다.
태주 다시 보자고 하셨다구요.
혜린 네. 구경은 잘 하셨나요?
태주 덕분에요.
혜린 소감은요?
태주 아직 모르겠습니다. 여자 옷 쪽은 아무래도 둔해서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혜린 .....이렇게 또 만나네요.
태주 .....그러게 말입니다.
혜린 멀쩡한 직장인인 거 맞네요. 믿지 않았었는데.
태주 (불쾌한 시선으로 혜린을 본다.)
혜린 시비 거는 거 아니니까 오해 하지 말아요.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하려구요.
태주 .....
혜린 그 날 많이 취했던 거 같은데...., 그 쪽이 모텔까지 데려다 줬죠?
태주 그 인사 하려고 부른 겁니까?
혜린 어차피 이렇게 싫어도 얼굴 마주할 사이가 됐는데, 정리할 건 깨끗이 해야죠.
혜린, 지갑에서 만원짜리 지폐를 여러장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혜린 그거면 될까요?
태주 ?
혜린 모텔비요, 그 쪽에서 부담했을 거 아니예요.
태주, 잠시 그 돈을 바라보다 피식 웃는다. 돈을 집어 대강 얼만지 훑어보더니
태주 이 정돈 아닌데..., 호텔도 아니잖아요.
혜린 .....
태주, 탁자에 만 원짜리 지폐 여섯장을 한 장씩 내려놓는다.
태주 방값은 이거면 됐고... (혜린을 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 안 아팠죠?
혜린 .....??
태주 속에 있는 걸 몽땅 다 게워냈으니 아주 속 편하게 잘 잤겠죠. 전혀 부대끼지 않고.
혜린 !!! 뭐요?
태주 당신 입에서 나온 오물 닦아내느라 거기 메이드가 고생 좀 했습니다. 그게 걔네들 직업이긴 하지만 워낙 불쾌한 작업이잖아요. 냄새도 나고. (만원 내려놓으며) 그래서 이 건 메이드 수고비! 술 취하니까 힘도 아주 셉디다? 날 붙잡고 해대는 바람에 그 오물이 내 옷에까지 튀었거든요.
혜린 ......(부끄러워 미치겠다.)
태주 (만원 내려놓으며) 그거에 대한 정신적인 피해와 세탁비! .....좀 싼가?.... (나머지 만원 두장 내려놓고) 그리고 이건....., 한밤중에 당신 업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내 노동에 대한 수고비...., (혜린 보며) 술잔세례 받은 건 지난 번 내가 한 짓도 있으니까 셈 셈으로 치죠.
혜린 .....
태주 (탁자에 늘어놓은 돈 챙기며) 따져보니까..., 좀 적은 거 같네.....
혜린 얼마면 되죠?
태주 (혜린을 본다.)
혜린 얼마면 되겠어요?
태주 (잠시 혜린 보다가 피식 웃으며) 관둡시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혜린 (따라 일어나며) 폐를 많이 끼친 거 같은데, 얼마든지 요구하세요. 보상해 드릴께요.
태주 난 그냥 잊고 싶거든!
혜린 !
태주 (혜린을 돌아본다.) 생각만 하면 재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냥..., 우리 아까 회의실에서 처음 만난 걸로 하죠, 사장님. 피차 좋지 않은 기억은 버리는 게 낫잖습니까.
혜린 .....
태주 OK?
혜린 .....
태주 (피식 웃으며 만원 지폐들을 흔들며) 어쨌든 깨끗한 빚 청산은 맘에 드네요!
태주, 목례하고 나간다. 혜린, 황당하고 기가 막힌다.
미용실
호영, 꽤 세련된 스타일로 머리를 자르고 있다. 마지막 마무리를 해주는 미용사.
호영, 만족한 얼굴로 일어선다. 뒤편 소파에 앉아 있던 태주가 호영에게 다가온다.
호영 이 정도면 되겠냐?
태주, 호영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셔츠의 단추를 열고 깃을 흐트러뜨린다.
태주의 약간의 손놀림으로 호영의 모습은 좀 더 세련되어진 느낌이다.
태주 큰 기대는 하지 마.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시내 모처의 클럽 앞 / 호영의 차 안 (밤)
번화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 겉보기엔 수수한 건물 앞에 최고급 승용차들이 속속들이 멈추어 선다. 승용차에서 나오는 사람들 모습이 연예인 못지않게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좀 떨어진 곳에 호영의 낡은 승용차가 서 있다.
호영,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다.
호영 쟤네들 뭐야? 연예인이야?
태주 진짜 알짜배기들이야.
호영 ?
태주 그냥 노는 애들이 아니라구. 대한민국 상위 몇프로에 드는 애들..., 겉은 허술해보여도 저 클럽, 꽤 철저한 회원제거든.
호영 회원제...? 그럼 우린 못 들어가잖아.
태주 특별 게스트라는 게 있지.
태주, 차에서 내려 당당한 걸음으로 클럽을 향해 간다.
뒤늦게 차에서 내려 태주를 쫓아가는 호영.
태주, 입구에 있는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친분이 있는 듯한 분위기다.
호영, 긴장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 보는데, 잠시 후 태주가 윙크하며 고갯짓을 한다.
한시름 놓이는 호영, 태주를 따라 입구를 향해 간다.
고급 클럽
꽤 넓은 홀에 아주 시끄럽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 흐른다.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나른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남녀간의 탐색의 눈길도 심심찮게 오고가고 있고, 몇몇 테이블은 모임인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연출한다. 테이블 사이 곳곳에 마련된 공간에는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여유와 자유로움이 넘쳐나는 그 분위기에 호영은 꽤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다.
태주 이게 첫 번째 단계야.
호영 ??
태주 돈 많은 여자랑 사귀고 싶으면 걔네들 있는 곳으로 가라. 즉, 물을 타는 거지. 노는 물에 따라 사람 인생도, 격도 달라지거든.
호영 .....
태주 그냥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랑, 여기서 만난 여자랑....., 확률적으로 천지 차잖아.
태주에게 호감의 눈길을 보내는 여자들에게 태주도 자연스러운 미소와 눈길로 대응한다.
잠시 눈길을 교환하더니 그 중 꽤 예쁘장한 여자 한명이 태주에게 다가온다.
태주(e) 일단 못생긴 추녀를 만날 염려가 없어. 요즘은 경제력만 있으면 웬만한 미모는 확보되는 세상이니까.
자연스럽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태주와 여자1, 그들 모습을 호영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잠시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여자1이 춤을 추자는 듯 태주를 이끈다.
태주(e) 머리도 꽤 알차서 어쩔 땐 내 쪽이 열등감을 느낄 정도야..., 세상사 별 걱정 없는 애들이라 만날 때마다 유쾌하고 즐겁고.....
태주가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거절의 제스쳐를 하자 여자1은 이내 미소 짓고는 플로어의 일행들에게 간다.
태주(e) 찐덕찐덕 달라붙는 일도 없어서 헤어질 때도 산뜻하지....
태주, 조금 전의 여자1이 플로어에서 춤추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태주 제일 맘에 드는 게 뭔지 알아?
호영 (태주를 본다.)
태주 ......
<인터컷>
고급 스포츠카가 도로를 질주한다. 태주는 운전석에, 여자2는 보조석에 있다.
신나게 속력을 높이는 태주.
태주(e) 평생 벌어도 꿈도 못 꿔볼 차! 그걸 내 손으로 만지고 밟을 수 있다는 거야, 그 기분..., 정말 죽이지!
멍하니 태주를 보는 호영.
호영 데이트 비용은? 네 월급으론 감당 안될 거 아냐.
태주 (답답하다는 듯 호영을 본다.) 돈은 있는 사람이 써야지.
호영 여자가 데이트 비용까지 다 댄다구?
태주 뱁새가 황새 흉내 내다간 망신살만 뻗쳐. 촌스런 자존심은 버리는 게 나아. 솔직하고 떳떳하게 있는 그대로! 막말로 없는 게 죄냐?
호영 그래도 여자들이 좋다고 달려든다, 그거 아냐?
태주 그들이 원하는 걸 주니까.
호영 그게 뭔데?
태주 달콤하고 짜릿한 연애.
호영 !!! (감명 받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태주 쟤네들의 화려한 생활을 풀옵션으로 즐길 수도 있어. 외제 스포츠카니 호텔 스위트룸이니 우리 능력으로 구경이나 할 수 있겠어? 기왕이면 다홍치마, 기왕이면 부자 애인 을 갖는 묘미가 바로 그거야.
호영 .....너 진짜 꾼 맞구나.
태주 딱 한 가지만 주의하면 돼.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호영 (기대의 시선으로 태주를 본다.)
태주 기대는 하지 마.
호영 뭘?
태주 미래.
호영 미래?
태주 잠깐 연애하는 것뿐이야. 그 이상은 없어. 팔자 고쳐보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란 얘기야.
호영 왜?
태주 쟤네들 보기보다 꽤 보수적이거든. 외도는 허용하지만, 결혼은 불가. 자기네 세계에 외부인은 절대 들이지 않아. 무서운 족속들이지.
호영 불같은 사랑에 빠져도?
태주 난 항상 불같은 사랑에 빠져.
호영 (기가 막힌 듯 태주를 본다.)
태주 (호영의 반응에 진지하고 단호한 눈길로) 정말이야.
호영 아니..., 미래도 없이 연애를 왜 하냐? 그냥 삽질만 하다가 늙어죽을라고?
태주 형은 내일이 온다는 걸 얼마나 확신해?
호영 ! 오늘밤 자고 나면 내일이잖아. 100 프로 확신하지.
태주 (호영은 찬찬히 본다.) 다 판타지야! 내일이 온다는 100프로 확신, 재벌과 결혼하는 신데렐라. 세상에 그런 건 없어!
호영 설마.
태주 진짜. (호영의 어깨 툭툭 치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현재만 생각해. 그게 재력가 여자와 연애하는 비법이야!
혜린의 집 앞
혜린의 차가 다가와 멈춘다. 차에서 내리는 혜린.
인터폰을 누르고
혜린 저예요.
혜린의 집, 식당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인 차회장과 윤여사, 준혁.
준혁 할인체인점의 저가 공세 때문에 시장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는 건 미국의 백화점들도 마찬가집니다.
차회장 거기도 대형할인매장이 말썽이구만.
준혁 더 심각하다고 봐야죠. 할인매장 역사가 우리보다 훨씬 오래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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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 들어서며
혜린 좀 늦었어요.
차회장, 혜린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윤여사도 시무룩한 반응이다. 준혁, 혜린에게 눈으로만 인사를 하고.
준혁 현재로선 백화점도 전문화 되는 수 밖에 없다, 그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백화점 형태가 변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혜린 아, 너무한다! 아빠, 준혁오빠, 왜 이렇게 일중독으로 만든 거예요? 한국 땅 밟자마자 백화점부터 둘러보질 않나...., 밥 먹을 땐 그만 좀 하자, 오빠.
준혁 .....
혜린 나 결혼할 뻔한 얘기 들었어?
준혁 ! 결혼?
윤여사 그만해라. 뭔 좋은 얘기라구....
차회장 (날카로운 눈길로 혜린을 본다.)
혜린 왜, 준혁오빠도 알아야지. (준혁에게) 신원그룹 셋째아들이랑! 상견례 자리에서 이태리 유학 때 남자랑 동거했다고 해버렸어.
준혁 ! 무슨 소리야?
차회장 (시끄럽게 숟가락을 놓으며 혜린을 노려본다.)
윤여사 (차회장 눈치 보며) 아우! 난 요즘 쟤가 정상으로 안 보여! 지 부모 얼굴에 지 얼굴에 먹칠을 하고도 저렇게 희희낙락.... 준혁아, 네가 봐도 실성한 거 같지 않니?
준혁 (답을 구하듯 혜린을 본다.)
혜린 심한 건 알지만 방법이 없잖아. 그 거짓말 아니었으면 나 지금쯤 눈물의 웨딩드레스 짓고 있었을 걸? (차회장과 윤여사에게) 실성 안했어요. 얼마나 심각한 일 저지른 건 지 알아요, 저도. (준혁 보며 쓴웃음) 신원그룹 셋째아들 피하려다가 내 혼사길 완전히 막혀버린 거지 뭐.
준혁 .....
혜린 그래서 말인데, 어쩔 수 없게 됐어, 오빠.
준혁 ?
혜린 오빠가 나 책임져주는 수 밖에.
순간, 싸늘해지는 공기. 당황한 윤여사 이해 못하겠다는 듯
윤여사 무....무슨....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니?
혜린 (윤여사 말 무시하고 또박또박) 이제 나 데려갈 남자, 오빠 밖에 없어. 그러니까 오빠가 나 책임져.
놀란 눈으로 혜린을 보는 윤여사, 차회장은 싸늘한 시선으로 혜린을 노려본다.
준혁과 혜린 역시 얼굴이 굳어 있다.
준혁 .....당연히 내가 책임 져야지.
혜린 (순간 얼굴에 긴장이 풀리려는데)
준혁 단, 장가가기 전까지만. 결혼하고 나면 네 올케가 싫어할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너무 가까우면 마누라가 질투한다더라.
혜린, 야속하다는 시선으로 준혁을 본다.
준혁, 혜린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국을 한차례 떠먹고 혜린을 본다.
혜린에게 희미한 미소를 짓는데, 혜린,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식당을 나간다.
윤여사 이....이게 무슨 일이야?.....무....무슨 일이에요, 여보?
차회장, 여전히 준혁을 본다. 준혁, 식사하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역시 긴장한 얼굴이다.
차회장(e)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던 거냐.
동, 서재
긴장한 시선으로 고개를 드는 준혁.
차회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준혁을 바라보고 있다.
차회장 혜린이 말이다.
준혁 .....(옅은 미소 지으며)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차회장 어릴 땐 어려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가 먹어도 변하질 않아. 도무지 고분고분해지지가 않는다, 혜린이 그 놈.
준혁 .....
차회장 똑똑한 딸내미, 좋기도 하지만 이제 좀 버거워. 나도 이제 늙은 건지....
준혁 혜린이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님. 그냥 짓궂은 장난 좀 친 거 뿐입니다.
차회장 그 아이가 너한테 정이 깊다는 거 안다. 어려서부터 친오래비 이상으로 따랐잖니.
준혁 .....
차회장 그렇게 오래 정을 쏟았으니 널 이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혜린이가 잠깐 혼동하고 있는 거야.
준혁 !
차회장 2년 전에도 내 경고 했다만, 너까지 휘둘리면 안된다. 가족끼리 못 볼 꼴 생겨서야 되겠니?
준혁 염려하지 마십쇼.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차회장 넌 내 아들이다.
준혁 .....
차회장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들이 사위가 될 순 없는 법 아니냐?
준혁 .....
차회장 내 너만 믿는다.
동, 준혁의 방
어두운 방.
불을 밝히자 바닥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여행용 가방이 눈에 띈다.
착잡한 얼굴로 가방에 다가서다가 옆에 걸린 모형 비행기에 눈길을 돌리는 준혁.
손가락으로 툭 치자 비행기가 흔들거린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곧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여행용 가방을 연다.
차분한 손길로 가방 속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한뭉치의 책을 책상 쪽으로 옮기려는데, 이때 어느 책에선가 뭔가 와르르 쏟아진다.
당황해서 보면 대여섯장의 폴라로이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는 준혁. 조종사 차림의 준혁이 경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밝게 웃고 있다.
(e) 비행기 엔진 소리
비행장 몽타쥬 (회상) / 석양
- 조종석에 앉은 준혁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는 혜린.
비행기가 출발하고, 혜린 준혁을 향해 손을 흔든다.
- 이륙하는 비행기를 불안한 듯 바라보는 혜린.
- 하늘을 나는 비행기, 준혁, 땅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혜린을 본다.
- 준혁의 비행기를 사진 찍는 혜린.
- 착륙하는 준혁,
- 비행기에서 내린 준혁과 다정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혜린,
서로 얼굴만 들이대기도 하고, 비행기를 배경으로 찍기도 한다. 행복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동, 준혁의 방
준혁, 혜린과 준혁이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을 아픈 시선으로 보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 라이터로 그 사진에 불을 붙인다. 나머지 사진들도 차례로.
타들어가는 사진들을 보는 준혁.
동, 혜린의 방
생각에 잠겨 있는 혜린. 마음이 산란한 듯 안정이 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 준혁의 방
가방 정리는 모두 끝난 듯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준혁.
이때, 노크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들어서는 혜린. 준혁, 말없이 바라본다.
혜린 방해한 건 아니지?
준혁 (피식 웃고) 한잔 할래?
혜린 (고개 젓는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준혁 ?
혜린 2년 전...., 왜 갑자기 미국 연수 떠났던 거야?
준혁 ..., 이 밤에 그거 물어보러 왔어? 너도 알잖아, 회사에서...
혜린 그거 말고 진짜 이유.
준혁 ??
혜린 아빠 때문이지?
준혁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혜린 오빠 출장에 내가 몰래 따라간 적 있었잖아. 그 사실 알고 아빠 굉장히 화내셨어. 얼마 안 있어 오빤 예정에도 없던 미국 연수 떠나고..., 그 후론 내가 메일을 보내도 무 소식, 어쩌다 전화 연결이 되도 겨우 몇 마디..... 완전히 딴 사람이 되버렸어.
준혁 혜린아....,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혜린 화 많이 났지만 참았어. 아빠 때문인 거 다 아니까. 참고 또 참으면서 오늘만 기다렸어, 그런데...
준혁 오해야! 너 생각하는 거 다 오해야. 미국 연수는 회사 일 때문에 가게 된 거구, 너한테 연락 뜸했던 건....(혜린을 보고 말을 멈춘다.)
혜린, 탁자 위에 타다만 사진들을 보고 있다. 준혁, 당황스럽다.
혜린 그 때 사진이구나. 오빠 첫 단독 비행하던 날.
혜린, 반 이상이 그을린 준혁과 혜린의 웃는 사진을 들어 본다. 준혁, 괴로운 듯 혜린을 외면한다.
혜린 하늘에 떠 있는 오빠 보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저러다 실수라도 하면.....
준혁 .....
혜린 그래도 기뻤어. 오빠 꿈을 이룬 날이니까. 큰 비행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원하던 비행기 조종사가 됐으니까.
준혁 .....
혜린 환하게 웃는 오빠 모습이 너무 좋아서..., 나, 이 날을 가장 행복한 날로 정했었는데...
준혁 (괴로운 듯 다가서며) 혜린아.....
그 순간 준혁의 뺨을 치는 혜린.
혜린 비겁해....., 정말 비겁하다, 오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준혁 (혜린의 말과 눈빛에 가슴이 무너진다.)
혜린, 다시 한번 준혁의 뺨을 친다. 그대로 뺨을 맞고 서 있는 준혁.
혜린, 절규라도 하듯이 세 번째 준혁의 뺨을 친다. 준혁, 그대로 있을 뿐이다.
다시 한번 올리는 혜린의 손을 낚아채듯이 잡는 준혁.
그대로 혜린을 포옹하며 입을 맞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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