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브 투 헤븐 3
(영순) 아이고
[가방을 툭 내려놓으며] 아이고
[순번 알림음]
(은행원1) 이영순 할머니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은행에 오셔서
날마다 5만 원 신권을 한 장씩 찾아가셨어요
통장이랑 신분증, 도장만 가지고
5만 원만 찾아 달라고 하셔서
창구 직원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몇 주 갑자기 안 보이셔서 [옅은 웃음]
어디 편찮으신가 보다 생각은 했지만 [힘주는 신음]
(은행원2) 저희끼리 얘기지만 치매신 거 같았어요
기억을 전혀 못 하시고 매번 같은 얘기를 하셨거든요
"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청원 경찰) 그리고 날마다 어디론가 전화 한 통 하셨어요
저기 뒤에 있는 전화기로 전화 한 통 쓰게 해 드렸거든요
근데 매번 말씀은 안 하시고 금방 끊고 가시더라고요
(상구) 야 [순번 알림음]
얀마, 너 또 뭐 하는 거야? 어?
[전화기 조작음]
- 이제 됐습니다 - (상구) 뭐가 돼?
(상구) 야, 씨, 어, 어?
이거 가져가도 됩니까?
(은행원1) 네, 가져가세요
(상구) 야, 아…
아이, 저…
뭐야?
응?
어디 갔어?
아나, 이 새끼 진짜, 이씨 [몽환적 음악]
아, 그렇다고 혼자만 오면 어떡해요?
아, 은행 근처에서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는데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상구) 아, 아무리 모자라도 집에는 잘 찾아올 거 아니야
아니, 모자라긴 누가?
그루는 모자란 게 아니라 특별한 거라니까요?
아, 모자란 거 아니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
(나무) 와, 나 진짜 모자란 사람 누구?
이 세상에서 특별한 건 위험한 거라고요
특별하게 착한 거 특별하게 순수한 거
특별하게 진실된 거 등등등
삼촌은 그것도 몰라요?
[상구가 코를 훌쩍인다]
아이고, 너 같은 친구 있으면 특별하게 무섭다는 건 알겠다
(상구) 아이, 몰라, 쯧
(나무) 아, 진짜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 (나무) 한그루! - (그루) 네 [문이 탁 닫힌다]
[도어 록 작동음] - 얀마! - (나무) 그루야
(상구) 너 아까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나무) 아, 너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어?
(그루)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됐습니다
지도 앱을 오래 켜면 배터리가 금방 방전됩니다
그래서 내일은 배터리를 더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내일? 내일 또 어디 가는데?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 가족분들이랑 다시 만나야 합니다
(상구) 아, 그 아들이라는 사람
아까도 전화 와 갖고 자기 돈 빨리 달라고 보채더라
(그루) 가족분들께 전해야 할 물건들이 있습니다
(상구) 아, 돈 말고 다른 건 필요 없다고 했다니까?
아, 그러지 말고 그냥 나한테 줘
그냥 내가 그냥 빨리 갖다주고 오게
직접 드릴 게 있습니다
아이참, 씨
아, 그러니까
돈 말고 유족들한테 직접 전해 드릴 물품이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건 직접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루) 유품은 직접 전달하는 것이 무브 투 헤븐의 원칙입니다
원칙은 지켜야 합니다
[문이 탁 닫힌다] (나무) 들었죠?
그루가 저러면 아무도 못 말려요
(상구)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무)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빨리 그쪽에 전화해서 어떻게든 나오게 해야 돼요
(상구) 아, 아, 몰라
아, 뭐, 그렇게 걱정되면 옆집 네가 직접 뭐, 전달하든지
(나무) 안 그래도
내일부터 무브 투 헤븐으로 출근하려고 했거든요?
[휴대전화 전원음]
[새가 짹짹 지저귄다]
(미란) 뭐 치우는 일을 한다고? 시체?
야, 네가 제정신이야? 시체를 치워?
(나무) 아, 유품 정리라고 몇 번을 말해? 시체는 있지도 않거든?
돌아가신 분이 살던 집 정리해 주는 거라고
- 시체 치우는 일이 아니라! - (미란) 그러니까 뭐든!
- (나무) 아! 아씨 - (미란) 뭐든, 뭐든!
그걸 네가 왜 치우는데? 그걸 네가 왜 하는데! 어?
(미란) 아니, 옆집도 아니고 뒷집도 아니고
어? 하필 앞집에서 그런 거 하는 거
가뜩이나 못마땅해 죽겠는 거 겨우 참고 살았는데 [나무가 씩씩거린다]
그리고 그루 걔는 이제 자기 아버지도 죽었는데
자기가 무슨 수로 그걸 혼자서 계속하겠다는 거야? [어이없는 숨소리]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그냥 조용히, 가만히 살라 그래!
아니, 그루가 무슨 죄지었어? 왜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왜?
여보!
(미란) 얘 봐, 얘 봐, 이놈의 계집애 봐
너 지금 그루 편 드는 거야? 지금 네가?
(영수) 자기야, 자기야, 내가 얘기할게
-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 (영수) 들어가 있어
(영수) 자기야, 들어가 있어 내가 얘기할게
- (미란) 아니, 누구 닮아서 저게 - (영수) 들어가세요
(미란) 아주 오늘 내가 시체 치울 거야, 내가!
- 치! - (미란) 아유! [문이 탁 닫힌다]
아니, 아빠, 아빠도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어?
하루아침에 아빠도 잃어 거기다가 듣보잡 삼촌까지 들어와
아빠 딸이 그런 처지라면 아빠 어떨 거 같아, 어?
알아, 네 맘 알긴 알겠는데
(나무) 아, 내가 뭐 취직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깐
아, 레알로다가 잠깐만 돕는 거야 딱 세 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달이면 돼, 어?
대신 너 엄마한테 비밀로 하고
(영수) 들통나면 아빠도 더 이상 책임 못 져
음, 걱정하지 마, 내가 잘할게
알았지? 아빠 최고!
[나무의 웃음]
(그루) 아! 없습니다, 없습니다!
- (그루) 어, 없습니다, 어, 어… - 어?
(그루) 여기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어, 없습니다
어, 여기도 없습니다
왜 그래? 어디 불났어?
(상구) 무슨 일이야?
(그루) 없습니다,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 뭐가? - (그루) 분명히 넣었습니다
그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아, 그러니까 뭐가 없어져서 이 난리냐고?
- 마음입니다 - (상구) 뭐?
(그루) 상자 안에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전해 줘야 하는데
상자가 없으면 마음을 못 전해 줍니다, 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상구가 만류한다]
(그루) 마음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상구) 이 새끼가 진짜, 내가…
[그루의 힘겨운 신음] 진짜 내가 하지 말라 그랬지
- (상구) 진짜, 씨, 진짜 - (그루) 아, 안 됩니다
[그루의 힘겨운 신음]
(상구) 야, 옆집, 빨리 와 봐 [놀란 숨소리]
이 새끼 좀 말려
아저씨야말로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 당장 그 손 안 놔요! - (상구) 왜, 왜?
- 이거 놔요! - (상구) 야, 옆집, 왜 그래? [그루의 괴로운 신음]
[나무가 상구를 콱 깨문다] [상구의 비명]
[그루의 가쁜 숨소리]
(나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
아니, 며칠이나 됐다고 애한테 손을 대요?
반항도 변명도 못 하는 애라고
둘이 있을 땐 이렇게 막 대했나 본데
아저씨가 뭔데 우리 그루한테 손을 대냐고요
거기 딱 있어요
폭행죄로 경찰에 당장 신고할 테니까, 어?
아, 손을 대긴 누가 손을 대?
(상구) 뭐, 폭행?
야, 야, 이거 봐, 이거 봐, 응? 이게 폭행이지, 누가 폭행인 거야?
- (상구) 씨, 아유, 진짜, 씨 - 그루야, 너 괜찮아, 어?
진짜 저 사람한테 맞은 거 아니야?
상자가 사라졌습니다 상자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무의 당황한 신음]
(그루) 상자가 없어졌습니다
(나무) 어, 어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 (나무) 하지 마, 어, 어 - (상구) 하, 이 또라이 새끼 [그루의 힘주는 신음]
아, 아침부터 뭐, 상자를 찾겠다고 이 난리를 피워 가지고, 진짜 [나무의 걱정하는 신음]
(상구) 그러니까 내가 말린 거 아니야
으이구, 왜 그러냐, 정말? 진짜 [나무의 놀란 신음]
- 아씨! - (상구) 아, 야, 야, 야
(상구) 하지 마, 하지 마! 진짜 [그루의 괴로운 신음]
상자? 무슨 상자?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
(그루)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 현장에서 가져온 노란 상자입니다
가로 35cm, 세로 25cm, 높이 20cm
아! 그, 겉에 '무브 투 헤븐'이라고 적혀 있는
노란 색깔 유품 상자 그거 말이야?
(그루) 현장에서 우리 트럭에 넣었는데 사라졌습니다
상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무의 놀란 신음]
(상구) 아이, 그걸 왜, 왜 찾는데?
그거 어차피 유족도 필요 없다고 한 쓰레기잖아
쓰레기 아닙니다 꼭 필요한 겁니다
- 어? 너 어디 가려고? - (상구) 아이
상자가 트럭에서 사라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트럭을 타고 오는 도중에 떨어트린 겁니다
(그루) 그러니까
할머니 집에서부터 트럭이 온 길을 다시 오면서 찾으면
떨어진 상자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상구) 아, 그래서 그거 지금 차, 찾으러 가겠다고?
당장 갈 겁니다
(상구) 야, 야, 야 너, 너 지금 제정신이냐?
그거 벌써 누가 가져가거나 버렸겠지
거기에 지금 가도 없어, 없어
그러니까 그냥 그, 포기해
(나무) 그루 사전에 포기란 없어요 아스퍼거 특성 중 하나예요
한번 꽂히면 지구 끝까지 간다고요
(상구)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무) 그루야, 같이 가자, 어? 나도 같이 가
스, 스톱!
(상구) 가지 마, 거기 가도 없어
(나무) 삼촌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걸 삼촌이 어떻게 아십니까?
- 아, 내가 알아 - (나무) 삼촌!
(그루) 삼촌
아, 내가 버렸으니까 알지
[흥미로운 음악] - 네? - (그루) 네?
[나무의 어이없는 신음] [멋쩍은 신음]
(나무) 와, 진짜 쳤다 하면 대박이네 [코를 훌쩍인다]
(상구) 아이, 난 그냥 유족들이 쓰레기라고 해서, 어?
그래서 내가 그냥
자연스럽게 폐기 처분을 한 건데
아이, 나 미치겠네, 진짜, 씨
(주택) 상자? 뭔 상…
아, 그 노란색 상자 말이네?
(나무) 네, 맞아요, 혹시 보셨어요?
(주택) 음, 기렇디 않아도
그거이 한 선생이 특별하게 취급하는 상자인데
어케 돼서 여길 따라왔나 했디
(나무) 그래서 안 버리셨죠?
안 됩니다, 버리시면 안 됩니다
(주택) 안 돼?
아, 야, 안 되면 어카니? 내래 지금 버리고 오는 길인데
- (상구) 안 돼! - (나무) 안 돼요! [그루가 놀란다]
[리드미컬한 음악] [타이어 마찰음]
[자동차 경고음]
(상구) 하, 씨
[상구의 골 아픈 신음]
아, 이거 완전 미친 짓이잖아
아, 쓰레기를 찾는다고 이 쓰레기를 뒤지는 게 말이 돼?
아이씨
쓰레기 아니라잖아요
저도 잘 모르지만 정우 아저씨가 유품 정리하면서
쓰레기로 버릴 수 없는 것들만 따로 챙기시는
특별한 상자 같았어요
(주택) 기래
한 선생도 그 상자는 나한테 안 버리고
꼭 챙겨서 따로 태운다 그랬디
그루가 저희 아바이처럼 하느라고 그러는 거 아니갔어?
아, 결국 태울 거면 쓰레기 맞네
그리고 아, 유족들이 필요 없다는데
왜 쓸데없이 이 고생을 사서 하냐고, 진짜, 아이씨
이야, 누구 때문인지 진짜 모르는 거?
레알 뻔뻔 갑이네, 진짜
아, 아, 아파
(주택) [웃으며] 야, 야
기래도 어제 바로 안 버리고 오늘 버리길
천만다행이지 뭐이갔네
안 기랬으면 이 산 천지를 3박 4일은 뒤져야 됐을 거다
이야 [주택의 웃음]
[주택의 힘겨운 신음]
아, 미치겠다, 진짜
아,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자동차 경고음]
아씨
한정우, 좋냐?
[쓰레기를 퍽 차며] 씨, 이, 씨발!
아유, 씨
[쓰레기를 연신 퍽 차며] 아유
[상구의 힘겨운 신음]
(상구) 아씨
[상구의 아파하는 신음]
[희망찬 음악]
찾았, 찾았다
찾았어!
여기, 여기!
(나무) 어?
(주택) 오, 오, 오
찾았다! [사람들의 놀란 신음]
찾았다!
[주택의 웃음]
(상구) 내가 들어 줄게
(철우) 아, 다 끝났으면 그냥 보내면 될 일이지
사람을 꼭 이렇게 오라 가라 해야 하는 거요?
이거요?
아니, 찾아 놓은 게 이 정도면
그동안 모르게 쓴 건 얼마나 많다는 얘기야?
뭐야, 이거?
(그루) 아닙니다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는 그 돈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뭐요?
(그루) 할머니는 돈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는 월, 화, 수, 목, 금요일 [차분한 음악]
매일 오후 2시에 새마을금고 상동 지점에 가셨습니다
(그루) 새마을금고 상동 지점은
할머니 댁에서 가장 가까운 은행입니다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는 은행에서 하루에 꼭 5만 원만 찾으셨습니다
2019년 10월 2일부터 2020년 3월 30일까지
매번 일금 5만 원씩 총 123회 인출하셨습니다
장판 밑에서 나온 지폐도 총 123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행 안내 데스크에서
010-8695-5267로 전화를 거셨습니다
(철우) 야, 너 누구야?
왜 맨날 이 시간에 장난 전화질이야!
누가 이런 거 알고 싶다고 했어?
(철우)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빨리 돈이나 내놔
- 안 됩니다 - (철우) 뭐야?
아직 전해 드릴 것이 남았습니다
이 영 자 순 자 할머니 아드님 박철우 님께선
이제부터 저랑 같이 가셔야 합니다
이것들이 진짜 뭐 하는 거야, 지금?
- (철우) 빨리 돈이나 내놔 - (그루) 꼭 같이 가셔야 합니다
- 내놓으라고! 진짜 - (그루) 아, 안 됩니다!
이제 그만하지?
(철우) 오라 가라 시키는 대로 해 주니까 아주 만만해 보이나 본데
어디서 이래라저래라 시건방이야? 어린놈의 새키가
- (상구) 진정하시죠? - (철우) 뭐야, 이거?
(상구) 야, 너도 이제 그만해 [흥미로운 음악]
다 큰 어른이
왜 애들한테 손찌검이나 하고 [그루의 다급한 신음]
(철우) 어?
야, 너 거기 안 서!
- (상구) 아나, 진짜 - (나무) 어?
아이씨
[다급한 숨소리]
(철우) 야, 너 거기 안 서!
야!
새끼!
[당황한 신음]
[가쁜 숨소리]
(철우) 야, 너 거기 안 서!
[신호등 알림음]
[그루의 당황한 신음]
[그루의 초조한 숨소리]
[그루의 불안한 신음]
[그루의 놀란 숨소리]
[철우의 한숨]
(상구) 야!
아이, 나 진짜, 씨
[그루의 가쁜 숨소리]
(나무) 어, 뭐야?
너 거기서 뭐 해?
아, 너 거기서 뭐 해!
[나무의 다급한 숨소리]
[나무의 놀란 숨소리]
(철우) 너 이 새끼 사람을 갖고 놀아도 분수가 있지
그 돈 빨리 안 내놔?
(나무) 손도 좀 놓으시고
[그루의 힘주는 신음] (상구) 빨리 드려, 안 드려?
- (철우) 내놔, 이 새끼야 - (상구) 빨리 내놔 [그루가 거부한다]
- 박철우 님 양복 살 돈입니다 - (상구) 아, 빨리 드리라고, 인마
- 안 됩니다 - (상구) 진짜 안 놓을래?
(그루) 박철우 님 양복 살 돈입니다 안 됩니다!
- (사장) 박철우 씨? - (상구) 아, 빨리 내놓으라고, 씨
(나무) 드리자
(사장) 성함이 박철우 씨 맞습니까?
그런데요?
어머님하고 눈매가 많이 닮으셨네요
[당황한 신음]
[잔잔한 음악]
(사장) 이게 마음에 드세요?
누구 입히시려고요? 할아버지?
우리 아들
철우, 박철우
(사장) 한번 데려오세요, 잘해 드릴게
저런 건 얼매나 가노?
(사장) 좋은 건 비싸고 덜 좋은 건 싸고 그렇죠
[함께 웃는다]
그래도 할머니한텐 좋은 거 싸게 해 드릴게요
난 이기 좋다
이걸로 할 기다
그럼 언제 아드님하고 같이 오세요
이거 팔면 안 된다, 아이?
내일 사러 올게, 내 돈 많다
은행에서 돈 찾아올게
예, 안 팔게요
약속했다이?
우리 아들
데려올게, 퍼뜩
(사장) 그렇게
월, 화 , 수, 목, 금요일
매일 와서 똑같은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사장) 어머님이 정말
아드님 양복을 해 주고 싶어 하셨는데
언제 한번 시간 나면 들르세요
제가 정말 잘해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양복 안 합니다
(철우) 노인네 돌아가셨으니
이제 이 돈으로 국을 끓이든 떡을 사 먹든
내 마음 아닙니까?
(나무) 그루야
이젠 정말 돈 돌려드려야 돼
[옅은 한숨]
너 이 새끼 대체 네가 뭐야?
(철우) 네가 뭔데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해!
이게 다 뭐야?
[상자를 퍽퍽 밟으며] 다 버리라고 했잖아 버리라고, 버리라고!
이제 와서 아들 노릇 할 생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한국말 못 알아먹어?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물건을 부스럭거린다]
[철우의 놀란 숨소리]
[떨리는 숨소리]
이게…
대체 이게
언제 적 거를 아직…
(그루) 주식회사 쌍방울 사이즈 90, 가격 7,900원
제조 연월 1988년 11월 23일
따뜻하고 폭신한 삼중 보온 메리 순면 100%
1988년 12월 28일 우리 아들 첫 월급 탄 날
[잔잔한 음악]
묵고 더 무으라
[젊은 영순이 그릇을 달각거린다]
[봉지를 툭 던지며] 입어라
[봉지를 부스럭 열며] 뭐꼬, 이게?
(젊은 영순) 허, 어머야
허, 어머야
이거 억수로 비싼 거 아이가?
야, 야 이런 걸 뭐 한다고 사 오노?
[상자를 부스럭 열며] 아이고, 참
아유, 억수로 보드랍네
참말로 따시겠다
마이 비싸게 줬제? 얼매나 줬노?
아휴, 이게 요새 선전 나오는 기라 참말로 비쌀 긴데, 응?
아휴, 이거 우예 입겠노, 아까버서
[젊은 영순의 한숨]
직장 나가는데 양복 한 벌도 못 해 주고
엄마가 돼가 염치가 없어서 이거 우예 입노
그 참 말 많네
우짜까, 그라믄 갖다 버릴까?
아, 아이다, 아이다
내 입는다
마르고 닳도록 평생 입을 기다
[옅은 웃음]
(젊은 영순) 아들, 니도 내년 봄에는 양복 한 벌 착 빼입자
아휴, 엄마가 땡빚을 내서라도 꼭 해 입힐 기다
[부드러운 음악] [웃음]
아이고
[감탄]
곱다
[옅은 웃음]
[철우가 훌쩍인다]
망할 노친네
빌어먹을
사람을 끝까지…
[흐느낀다]
[철우가 연신 흐느낀다]
(젊은 영순) 요게 앞에, 앞에 요래조래 요래 요래 주름이 착 져 갖고
가슴팍에는 실크 스카프가 탁 꽂히가 있고
그 해군들 제복 맹키로 생긴 거 안 있나?
우리 아들 그래 멋진 양복 입혀 놓으면
참말로 멋질 긴데
너무 멋지가 공장 가스나들 죄 쫓아오면 우짜노?
[젊은 영순의 웃음] [바람이 횡 분다]
(젊은 영순) 아이고, 곱다
마이 무으라잉
[젊은 영순의 감탄]
"수중 탐험"
[상구가 뚜껑을 달그락 닫는다]
(나무) 아, 도저히 모르겠네
그루야
은행에서 돈 찾은 거랑 전화 거신 건 알겠는데
할머니가 양복점에 가신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그루) 할머니가 마음을 적어 놓으셨습니다
마음을 적어?
어디에?
[차분한 음악]
[조명이 달칵 켜진다]
[흥미로운 음악]
(정우) 그래, 우리 그루는 정말 잘할 거야
(그루) 잘 풀면 상 받는 겁니까?
[휴대전화 조작음]
(정우) 그럼
그루가 잘 풀면 그분들이 엄청 고마워하실 거고
그분들 대신 아빠가 상 주면 되지
그루가 제일 좋아하는 '참 잘했어요' 상
[알림 효과음]
(사장) 마음에 들어요?
[주머니를 부스럭 뒤진다]
[차분한 음악]
그루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루) 참 잘했어요
받고 싶습니다
[상구의 가쁜 숨소리]
[입소리를 쉭쉭 낸다]
[여자의 다급한 숨소리]
[겁먹은 신음]
(여자) 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남자의 가쁜 숨소리]
(남자) 입, 입, 입! [여자의 겁먹은 신음]
입 닥치고 안 따라와 이 씨발 년아?
어딜 도망쳐! 씨발 [여자의 겁먹은 신음]
- 너 진짜 죽고 싶냐, 진짜? - (여자) 아니
[여자가 울먹인다] [멀리서 개가 왈왈 짖는다]
- 야, 뭘 봐? 어? - (여자) 어, 가요, 가요
- (여자)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 - (남자) 아유, 씨!
(남자) 따라와 [여자의 겁먹은 신음]
[혀를 쯧 찬다]
[가쁜 숨소리]
[코를 훌쩍인다]
[차 문이 달칵 열린다]
[차 문이 탁 닫힌다] [옅은 한숨]
(상구)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마담) 일단 타지 그래?
[흥미로운 음악]
[한숨]
[마담이 픽 웃는다]
[차 문이 달칵 열린다]
[자동차 시동음]
[놀란 숨소리]
뭐야, 뭐야? 지금 내가 본 거 뭐야?
[놀라며] 여자가 있어?
[무거운 음악]
[마담이 봉투를 부스럭 건넨다]
(마담) 가볍게 몸이나 한번 풀지?
수철이 살려만 놓으면
뭐든 다 한다며?
[긴장되는 음악]
[종이를 부스럭 구긴다]
[종이를 툭 던진다]
[퍽 소리가 울린다]
[쿵 소리가 울린다]
[쿵 소리가 울린다]
[상구의 놀란 숨소리]
[흐느낀다]
[한숨]
[관중들의 환호성과 박수]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철문이 쾅 닫힌다]
[관중들의 환호성]
[관중들의 야유]
[선수의 긴장한 숨소리]
[선수의 힘주는 신음]
[선수의 기합]
[상구의 힘겨운 신음]
[상구의 힘겨운 신음]
(관중1) 덤벼 봐! [관중들의 야유]
(관중2) 들어가 [선수의 힘주는 신음]
[힘겨운 신음]
[가쁜 숨소리]
[힘겨운 숨소리]
[지친 숨소리]
[지퍼가 직 열린다]
삼촌 안 계십니다
그럼 외박?
(그루) 언제 나가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야, 이 보호자답지 않은 문란한 사생활은
감점 몇 점일까나?
(그루) 삼촌의 사생활이 문란한 걸 나무는 어떻게 아는 겁니까?
[익살스러운 음악]
어유, 척 보면 딱이지
이, 컴컴한 어둠 속에서 둘이 만난 다음
서로를 끈적하게 바라보지
그다음 뭘 하겠어? 안부? 인사?
다 생략하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런 걸 바로 에로틱 느와르
[야릇한 음악]
[마담이 찰싹 채찍질한다]
[상구의 힘주는 신음]
[찰싹하는 효과음]
[손가락을 딱 튀기며] 고런 장르인 거지
[문이 달칵 열린다]
(그루) 삼촌이 영화를 찍으시는 줄 몰랐습니다
내가 뭘 찍어? [문이 탁 닫힌다]
[놀라는 숨소리]
아, 어, 얼굴…
사람 얼굴 처음 보냐?
사람 얼굴 같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야 합니다
119를 부르겠습니다
야, 조용히 해, 머리 울려
- (그루) 하지만… - (상구) 야, 옆집
(나무) 네?
[상구가 돈을 부스럭 꺼낸다]
라면 하나 끓여 봐라
[상구가 돈을 착 쥐여 준다]
계란 넣어서
네!
[상구의 힘주는 신음]
(상구) 어어? 아!
아, 하려면 좀 살살해
(그루) 이렇게 해야 합니다
(상구) 아이, 아파, 씨, 쯧, 아이
[의아한 숨소리]
[그루가 구급상자를 달그락 든다]
[전화벨이 울린다] 치
[버튼 조작음]
예, 무브 투 헤븐입니다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새가 짹짹 지저귄다]
(미란) 윤나무! 너 어디 가?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미란) 아침부터 뭔 볼일?
너 또 한그루네…
(나무)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 가방 - (나무) 왜?
왜? 왜긴?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바깥에서 뭔 짓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아야 되겠다
불심 검문, 내놔
아, 뭐, 딸년은 프라이버시도 없어?
없어 내 집에서 내 밥 먹는 동안은
[나무의 당황한 신음] (미란) 여긴 아무 때나 검문검색 가능한
오미란 독재 국가야, 알기나 해?
- 아이씨 - (미란) 놔 봐
- 아이고, 뭐 들었다고 - (나무) 아씨
(미란) [지퍼를 직 열며] 뭐 들었는데 이렇게 무거워?
[미란이 가방을 부스럭 뒤진다]
[흥미로운 음악]
너 이거
이거 정말이야?
아,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이거!
(나무) 아… [미란의 감격한 숨소리]
아, 알면 부담되잖아
경쟁률 장난 아니라서 다 떨어진다는데
[나무가 책을 부스럭 넣는다] 아유, 어떻게 이럴 생각을 했어?
(미란) 아이고, 기특해 아이고, 기특해, 아이고, 기특해
아이고, 장해, 우리 딸내미 [나무의 어색한 웃음]
아, 그래, 대학 나와도 요샌 그냥 결국엔 또 다 노량진으로 간다더라
바로 직진해! 대학 건너뛰고
[나무가 지퍼를 직 닫는다] 어, 남들보다 몇 년 일찍 시작하면 그게 더 낫지, 어
됐다, 엄마가 도시락 싸 줄게
어, 아, 아니야, 아니야 그냥 내가 사 먹을게
- 사, 사 먹어? - (나무) 어
(미란) 알았어, 그러면
길거리 음식 사 먹지 말고
어? 힘 나고 맛나는 거 어, 든든한 걸로 사 먹어
[미란이 중얼거린다] (영수)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딸내미 오늘 뭐 귀빠진 날인가?
(미란) [웃으며] 여보, 영수 씨
나무 아빠
우리 딸내미가 공무원 한대, 공무원
- (미란) 대한민국 철 밥통 - 아유, 그래?
(미란) 어, 그냥 월급쟁이가 아닌 [영수가 호응한다]
죽을 때까지 월급 주고 죽을 때까지 연금 주는
꿈의 직장, 어? [영수의 어색한 웃음]
[미란의 웃음] - 아, 이게 뭔 일이래? - (나무) 다녀오겠습니다
(미란) 어여 가, 윤나무, 공부 열심히 해! [영수가 호응한다]
파이팅! 응
[웃음] 아이고, 오, 잘해라
[타이어 마찰음] (나무) 어, 스톱!
(상구) 아이, 깜짝이야, 씨
[나무가 문손잡이를 달칵거린다]
[버튼 조작음]
아침부터 쳐 죽고 싶냐?
(나무) 5분도 안 기다리고 자기들끼리만 가냐?
의리 없이, 씨
(그루) 5분 아니고 11분 39초였습니다
(상구) 옆집 넌 공무원 시험 준비한대며?
여기가 노량진이냐? [그루가 안전벨트를 달칵 맨다]
(나무) 치
그루야, 오늘 현장이 어디야?
[나무가 안전벨트를 달칵 맨다] [기어 조작음]
[몽환적인 음악]
(준영) 윤나무!
(나무) 어? 준영 오빠
[차 문이 탁 닫힌다]
네가 여기 왜 왔어?
(나무) 아
[차 문이 탁 닫힌다] 나 그루랑 같이 일해
아, 그루
오랜만이다
(나무) 아참, 여기는 그루 삼촌이셔
이쪽은 아는 동네 오빠 겸 순경
현장에 올라가도 괜찮습니까?
(준영) 어, 어, 그래, 내가 안내할게
근데 나무 너 괜찮겠어?
뭐가?
[문이 달칵 열린다]
[준영이 신발을 탁탁 벗는다]
[준영이 코를 훌쩍인다]
(상구) 어유, 씨발
(준영) 살인 현장이야
[무거운 음악]
한 2주 전쯤?
여기 사는 20대 여자가 집 안에서 살해당했어
가, 강도입니까?
(준영) 아니요
헤어진 남자 친구가 찾아와서 다투다가
(나무) 어? 나 그 사건 알아
하, 여기가 거기였어?
그런 중요한 사건 현장인데 벌써 이렇게 정리해도 되는 거야?
범죄 피해자 현장 정리는
(그루) 사건 수사에 필요한 증거 수집이 모두 끝났다고 판단이 될 경우
피해자 가족이나 경찰의 요청에 의해
진행될 수 있습니다
(준영) 맞아, 현장 사진도 다 찍었고 채증도 여러 차례 했어
무엇보다 용의자가 현장에서 신고하고 자백한데다
흉기도 다 나와서
더 조사하고 말고 할 게 별로 없는 사건이야
(그루) 범죄 피해 현장
전에도 아빠랑 여러 번 갔었습니다
그럼 바로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 (준영) 나, 나무야 - (나무) 어?
잠깐 나 좀 볼래?
(준영) 어떻게 된 거야?
아니, 대학 그만뒀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루랑 같이 일을 한다고?
다른 것도 아니고 유품 정리를?
그루네 아저씨가 얼마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
아, 그렇구나
몰랐어
아, 그루가 혼자 일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고
혹시라도 현장에서 문제 생길 수 있으니까
내가 잠시만 돕는 거야
아, 이건 어디까지나 내 걱정일 뿐이고
그루는 일하는 데 문제 1도 없이 완전 잘하고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나무의 웃음]
왜 그렇게 봐?
[웃음]
하나도 안 변했구나 싶어서
- 뭐가? - (준영) 아니야, 아무것도
아, 뭐, 일하다가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나무) 올, 박 순경 그렇게 말하니까 좀 멋있는데
그럼 나 간다
[무거운 음악]
(앵커) 지난달 20일 서울의 한 빌라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이 씨가 칼에 찔려 숨진 사고에 대해
오늘 경찰은 김 씨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인정해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현장에서 자수한 김 씨가
숨진 이 씨의 전 약혼자임을 파악하고
두 사람이 다툼 중에 우발적으로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수사한 결과입니다
(그루) 이선영 님
2020년 4월 20일 사망하셨습니다
저는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러 온
무브 투 헤븐의 한그루입니다
이제부터
이선영 님의 마지막 이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영화 & 드라마 대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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