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8
(연경) 이거 지금 꿈이죠?
내가 헛거 보고 있는 거죠?
(허임) 실은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왜군1) [일본어] 저 두 사람 뭐야?
꼴이 왜 저래?
(왜군2) 처음 보는 옷차림인데
신발은 저게 또 뭐야?
(왜군1) 거기 당신들, 조선인들 맞아?
(연경) [한국어]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데
[연경이 살짝 웃는다]
[일본어] 저는 일본인입니다
[한국어] 거기까지만
어떻게 좀 해 봐요
다시 돌아가는 방법 몰라요?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여기 있겠소?
아니, 여태까지 뭐 했어요 그 방법도 모르고!
아니, 그럼 난 뭐, 놀았소?
[왜군2가 소리친다] [연경의 놀란 신음]
(왜군2) [일본어] 너희들 정체가 뭐냐고!
(왜군1) 정체가 뭐든
우리를 본 이상 살려 보낼 수 없다
[긴장되는 음악] 총을 쏘면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 칼을 써라
[허임의 놀란 신음]
[전기 충격기 작동음] [왜군들의 놀란 신음]
(연경) [한국어] 오지 마
어? 오면 다친다
(왜군2) [일본어] 뭐야, 저게?
(허임) [한국어] 이건 무엇이오?
이건 무엇이오?
[일본어] 저건 또 뭐야?
[리드미컬한 음악]
(왜군1) 시간 없다
빨리 끝내고 가자
(왜군2) 네
[왜군2의 기합]
[전기 충격기 작동음] [왜군2의 신음]
[연경의 거친 숨소리]
(연경) [한국어] 흔들고 눈 감고 뿌려요
(왜군1) [일본어] 빨리 죽여!
[왜군3의 기합] [웅장한 음악]
[왜군3의 신음]
[허임의 놀라는 신음]
[전기 충격기 작동음]
[왜군들의 괴로운 신음]
[한국어] 들어와, 어? 들어와
[전기 충격기 작동음]
[허임의 신음]
[놀란 신음]
[전기 충격기 작동음] [왜군4의 신음]
[왜군4의 신음]
[왜군들의 괴로운 신음]
[허임의 당황한 신음]
[연경의 기합] [왜군들의 괴로운 신음]
(허임) 아까 그건 무엇이오?
(연경) 전기 충격기랑 스프레이 파스요
(허임) [웃으며] 대박이오
[허임의 다급한 신음]
[연경의 거친 숨소리]
(연경) 아니, 조폭에 왜군
이게 말이 되나? 어?
(허임) 아니, 근데 호랑이보단 낫지 않소
[종이 울리는 효과음] (연경) 아니, 내가 왜 또 조선에...
이게 말이 되냐고요
아, 그게 글쎄 말로 따질 일이 아니라니까
(연경) 아니, 그러게 올 거면 혼자 오지 왜 나까지 데리고 와요
말은 바로 하시오!
[연경의 거친 숨소리] 내가 끌고 온 게 아니라 처자가 딸려 온 거요
[의미심장한 음악] 아니, 여기 어디야?
여기가 한양 근처인 건 맞는 거 같은데
왜군들이 벌써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척후병인 것 같소
왜군의 척후병이면
무슨 전쟁 났어요?
내가 그쪽 세상으로 가고 난 후에
전란이 터졌소
아니 [당황한 웃음]
아니, 임진년에 전란...
임진왜란요?
[놀란 신음]
금년이 임진년인 걸 어찌 아셨소?
[놀란 숨소리]
[연경의 놀란 신음]
[허임의 놀란 신음]
(허임) 처자, 처자!
[형사의 놀란 신음]
(형사) 혹시 전화하셨던?
- (재하) 어디 있습니까? - (형사) 아, 저짝에
(조폭1) 야, 야, 야, 뭐야, 씨 [조폭들이 웅성거린다]
어디 있어, 그 여자 어디 있냐고!
(조폭2) 아, 진짜 몰라요, 예?
아, 진짜 눈앞에서 뿅 하고 사라졌다니까?
우리가 또 그런 거로는 구라를 안 치지
- (경찰) CCTV 영상 가져왔습니다 - (형사) 어, 그래?
[어두운 음악]
(조폭1) 아이고, 이제 우리 억울함도 풀어지겄네, 씨
(조폭2) 봤죠, 봤죠, 예?
딱 이쪽이 저쪽에서 먼저 공격했다니까요, 이렇게
(조폭1) 맞는다니까요 [조폭들이 웅성거린다]
오메!
(형사) 어디 갔어?
(조폭2) 봤지요, 예? 봤지요
이렇게 딱 뿅 하고 사라졌다니까요 왜 사람 말을 안 믿고 진짜, 쯧
(형사) 아니, CCTV 고장 났나, 왜 이랴?
(천술) 자
[문이 달칵 열린다]
(성태) 천술 형님
그 친구, 여기 있습니까?
형님이 다시 불러들이셨어요?
아, 데려갈 땐 언제고 여기 와서 찾아?
(성태) 설마 조선으로 돌려보낸 건 아니죠?
아이고
(천술) 거, 이놈이 잠이 덜 깼나
아침부터 뭔 놈의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나가, 이놈아, 썩 나가!
[헛기침]
(성태) 아, 그, 연경이랑 함께 사라졌대요
[의미심장한 음악] 형님은 알고 계셔야 될 것 같아서
하나뿐인 손녀딸인데
[성태의 헛기침] (천술) 아니, 그, 그, 그, 그게 무슨...
[의아한 신음]
(수석) 마 원장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러면 박 회장한테 내 체면이 뭐가 돼!
[성태의 멋쩍은 신음]
(성태) 죄송합니다, 수석님
[통화 종료음] [성태의 한숨]
아직 못 찾았어?
네, 경찰서에서도 찾고 있다는데 워낙 행방이 묘연해서
아이, 이 친구 이것 참
지금 이게 어떤 기회인 줄 알고
(천술) 이, 이놈이!
이런 개차반 같은 놈을 봤나, 어?
아니, 가려면 제 놈 혼자 갈 것이지 천금 같은 내 손녀딸은 왜 데리고 가!
오기만 해 봐라!
내 다리몽둥이를 그냥, 아주 그냥
가만
안 오면?
못 오면?
아휴, 아!
[새가 지저귄다]
(연경) 무슨 생각 해요?
무슨 곡절이 있어 내게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헤아려 보는 중이오
그대와 거리에서 만난 날 [의미심장한 음악]
그날이 처음이었소이다
(허임) 그 전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소
내가 가진 건 침놓는 재주뿐인데
하, 없던 도술이 갑자기 생겨날 리도 없고
하필이면 그날
저랑 우연히 엮인 거네요
덕분에 덩달아
[한숨]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경험들을 하고
나 때문에 그대까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참으로 미안하오
매번 날 구하려다 그런 거잖아요
[허임의 한숨]
(허임) 이 무슨 해괴한 운명인지
어찌하면 이 일의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지 도통 모르겠소이다
다만...
다만 뭐요?
[푹 찔린다] [비명]
[조폭1의 힘주는 신음] [연경의 비명]
사즉생
사즉생
연유는 분명치 않으나
내 숨이 끊어지는 순간 옮겨 가는 건 맞는 것 같소
하필 그때마다 그대를 안고 있던 바람에
같이 붙어 오게 된 것이고
(허임) 오고 가는 길에 분명히 [익살스러운 음악]
[익살스러운 효과음] 몸 안에 있는 상처까지 깨끗하게 사라진 걸 보면
필시 그 시간 동안...
[한숨]
[긴장되는 효과음] 어떠한 연유인지는 잘...
[흥미로운 음악] [연경의 거친 숨소리]
[거친 숨소리]
뭐 하는 것이오?
죽어야 간다면서요
우연이든 운명이든
아유, 일단 복잡한 생각들은 안전한 곳으로 가서 하자고요
여긴 너무 위험하니까, 응?
[연경의 힘겨운 신음] [허임의 놀란 신음]
[경쾌한 음악] (허임) 서, 설마 그, 그걸로 날 치, 치려는...
어휴, 미쳤어요, 의사가 사람 죽이게?
직접 죽어요
나, 나도 의사인데?
아, 이게 한 번에 안 죽을 수도 있겠다
[헛웃음]
[연경이 살짝 웃는다]
(연경) 이걸로 찔러요
그쪽 심장
[놀란 신음]
[말을 더듬으며] 처자, 처자
[살짝 웃는다]
안 죽어요, 사즉생 [허임의 놀란 신음]
(연경) 찔러요, 얼른, 응? [난감한 웃음]
그래도 우리가 둘이 같이 안고 있어야
(연경) 아, 맞는다, 그러면 잠깐
내가
이렇, 이렇게 하면
[익살스러운 효과음] [허임의 헛기침]
아, 이건 너무 불편한가?
그럼 내가
[허임의 놀라는 신음] 이렇게 하면?
[익살스러운 효과음] 어?
[허임의 당황한 신음]
(연경) 아
손만 잡아도 되나? [익살스러운 효과음]
아, 아니야
이건 너무 불안해 [허임의 놀란 신음]
일단 처자, 그것 좀
[허임의 놀란 신음]
지, 진정하시오
[다가오는 발걸음]
[긴장되는 음악] [허임의 놀란 신음]
사, 살려 주시오
[사야가의 신음]
[사야가의 떨리는 숨소리] (허임) 왜군인 듯한데
어찌 조선말을 쓰시오?
본국에서 조선과의 교역 일을 한 적이 있어
(사야가) 조금 할 줄 압니다
어쩌다 다쳤어요?
동료들이랑 잠시 떨어져 있는 중에
산짐승을 만나 쫓기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을 아시오?
남의 나라를 함부로 짓밟은 죗값을 치렀다 생각하시오 [무거운 음악]
(허임) 뭐 하시오?
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합시다
이 사람
이대로 두면 죽을 거예요
(허임) 방금 뭐라 했소?
저자를 살리자고 했소?
그럼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를 눈앞에 보고도 그냥 가요?
아이, 저자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시오?
저 사람이 누구든
그냥 지금 내 눈앞엔 똑같은 환자일 뿐이죠
방금 전에 저자의 동료들이 우릴 죽이려 했소이다
그땐 일종의 전시 상황이었고
지금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우릴 안 만났으면 죽었을 목숨이오
당신 말대로
우리가 여기 온 게 일종의 어떤 운명이라면
저 사람이 우릴 만난 것도 운명이겠죠
[한숨]
의원의 도리와 선의가
오히려 해가 될 때도 있소
해가 될지 득이 될지 판단하는 건
의사의 몫이 아니에요
의사한테는 자격이 필요하지만
환자한테는 아니니까
[옅은 한숨]
그리 저자를 살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보시오
의원이
죽어 가는 목숨조차 함부로 살려서는 안 되는 곳
(허임) 이 땅은 그런 곳이란 말이오
(연경) 신기하고 궁금해할 거 아는데 입 다물어요
일일이 설명해 줄 기분 아니니까
[힘주는 신음]
[사야가의 신음]
[잔잔한 음악] [사야가의 떨리는 숨소리]
[아파하는 신음]
난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를 치료해요
(연경) 그 사람들이 다 선한 사람들이고
그 후에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면
의사로서 더 큰 보람은 없겠죠
하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난 그저 사람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후에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지는
그 사람 몫이니까
다 됐어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아, 네
[사야가의 아파하는 신음]
[일본어] 안 되겠어요
[아파하는 신음]
[아파하는 신음]
[한국어] 발목이랑 허리를 삔 거 같은데
(허임) 비켜 보시오
[사야가의 아파하는 신음]
[사야가의 아파하는 신음]
[의미심장한 음악]
(사야가) 두 분 모두 고맙습니다
[긴장되는 음악]
(왜군1) [일본어] 집합!
[한국어] 동료들이 오고 있소, 빨리 피하시오!
앞으로 보름 안에 우리 군대가 한양에 당도할 것입니다
빨리 가시오
(왜군1) [일본어] 어떻게 된 겁니까?
별일 아니야
정말 괜찮으십니까?
(사야가) 응, 괜찮아
[왜군1의 안도하는 한숨]
[연경의 가쁜 숨소리]
(사야가) [한국어] 앞으로 보름 안에
우리 군대가 한양에 당도할 것입니다
한양으로 들어가야겠소
서울로 안 가고요?
왜란인데?
꼭 구해야 할 사람이 있소
그게 누군데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를 믿고 따라 주는 아이오
그대에게 미안한 일이오만
내게 말미를 좀 주겠소?
아...
[막개의 아파하는 신음]
(두칠)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불고 가자!
우리가 쪼까 바쁘니께
바빠!
(딱새) 장작도 패야 쓰고 물지게도 져야 쓰고
어, 새 마님 심바람도 해야 쓰고
할 일이 산더미야, 우리가, 어
[딱새의 호응하는 신음] (두칠) 형, 좀! 씨
누가 노비 아니랄까 봐 티를 내고 있어, 씨
들어가 있어, 얼른 [막개의 힘주는 신음]
(막개) 아, 몇 번을 말해요!
의원님이 기별한다고 기다리라고만 했다니까요
아, 대체 우리 허 의원님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잘못?
혔지
내가 너한테까정 길게 얘기할 사연은 아닌 거 같고
(두칠) 그 개잡놈의 새끼 어디 갔는지 얘기만 혀
아야, 너 버리고 토낀 놈
뭔 의리를 지키겄다고 그렇게 주둥아리를 다물고 있냐?
우리 허 의원님 나 버린 거 아니거든요?
너 버린 거 맞거든?
급하니께 빨리 대! 이씨
(딱새) 급해, 응, 급해!
우리 대감마님이 조만간 어디 먼 길 간다 해 쌓아서
아우가 마음이 급해, 지금
내가 성 때문에 급해 죽겠다, 정말
(두칠) 저리 가! 절로, 씨
야, 긴말할 거 없고
사흘 내로 그 개잡놈의 새끼 내 눈앞에 안 띄면
(두칠) 대신 네가 뒈지는 거여
명심혀
뒈진다!
(두칠) 일로 와, 가, 빨리, 아, 빨리 와! [딱새의 호응하는 신음]
[애잔한 음악]
[한숨]
우리 허 의원님 그런 분 아니거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숨]
(허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소이다
한 번쯤은 그냥 나를 믿고
지켜봐 줄 수는 없는 것이오?
(허임) 위험하니 주막에서 기다리라 하지 않았소
당최 말을 안 듣고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아까 왜군 때랑 조폭 때 잊었어요?
어허, 참, 아무튼지 간에 예측을 불허하는 여인이오
역대급이오
[멋쩍은 숨소리]
[헛기침]
갑시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흐느낀다]
(허임) 조심하지 않고
괜찮느냐?
[흐느낀다]
[허임의 웃음]
(허임) 그래, 씩씩하니 좋구나
앞으로는 앞을 잘 보고 다녀야 한다
[흐느낀다] (허임) 응?
그래
(허임) [웃으며] 가 보거라
(남자1) 아이고, 아이고, 저, 아이고
어느 댁 나리인 줄 모르겠으나 고맙습니다요
고맙습니다요
아, 이놈아! 어서 이 양반 나리께 인사 올리지 않고 뭐 해?
- (허임) 그럴 필요 없다 - (남자1) 예?
이 아이는 내게 잘못한 것이 없소
잘못하지 않은 일까지 조아리게 하지 마시오
아, 아이고, 예
어르신도 일어나시오
(남자1) 아, 예?
아이고, 예, 예
아이고, 고맙습니다
[잔잔한 음악]
날이 더워서 치료해 주지 않으면 덧날 거예요
다 됐다
잘 참았으니까 상 줘야겠다
(아이) 와, 사탕이다
기억하네?
여기 말로 사당원
(남자2) 이건 조선말로 사당원이라는 건데
아저씨가 우리 경이 울지 말라고 주는 거야
(남자1) 번번이 고맙습니다요, 아씨
아,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남자1의 웃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 곧 왜군이 쳐들어온다는데 피난 안 가시오?
저희들 천한 것들이
어디인들 가 봐야 굶어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요
아, 저, 아래쪽 사람들이 걱정이지
우리가 뭔 걱정입니까요
나라님이 저기 계신데
[남자1의 웃음]
[남자1의 한숨]
[어두운 음악]
(진오) 주상 전하께서 도성을 버리고 떠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찬성) 충신들의 반대가 심해 거둬들이시긴 했으나
아무래도 마음을 굳히신 게지
그럼 저는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혀를 끌끌 찬다]
못난 놈
(찬성) 내 너를 어떻게든 빼내려고 애를 써 봤다마는
팔도 각지 군영에서
월령의를 보내 달라는 청이 빗발치고 있는 터에
누가 너한테 신경이나 제대로 쓰겠느냐? 쯧
하니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내일 내려갈 채비를 하거라
(진오) 숙부님, 숙부님!
"내의원"
[찬성의 헛기침]
(연경) 저기 혜민서
구해야 한다는 아이가 저기에 있어요?
(허임) 그렇소
[허임의 헛기침]
갑시다
[흥미진진한 음악]
이쪽으로
(연경) 여기가 어디예요?
여긴 내 거처요
(허임) 등잔 밑이 어둡다잖소
여긴 아무도 안 올 터이니 안심하고 잠시만 계시오
[연경의 불안한 신음]
내 10분 안에 다녀오리다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탁 닫힌다]
[한숨]
어허, 막개 이놈은 대체 어디 있는 게야?
(남자3) 약재를 내주기는커녕
있는 약재도 다 쓸어 갔으니 이거야, 원
아니, 왕만 목숨이고 백성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 이건가?
(남자4) 전란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약재가 다 떨어졌으니 참으로 큰일이네
(여자1) 의원님, 제발 진맥 한 번만 봐 주세요
- (여자1) 의원님 - (의원1) 아, 글쎄
- (의원1) 당분간 병자는 못 본다니까! - (여자1) 의원님
(의원1) 내 마음도 편치가 않아 다들 물러들 가게!
- (여자1) 아이고 - (의원1) 어서!
[의원1의 한숨]
(의원2) 그래서 자네는 어쩔 건가?
월령의로 나갈 건가?
(의원1) 미쳤나?
장수며 관리들도 죄 백성들 버리고 줄행랑치는 판에
가 봤자 개죽음당할 게 뻔한데
[의원1의 한숨]
오늘 밤 식솔들 데리고 떠날 걸세
[한숨]
[잔잔한 음악] 쌓아 둔 돈도 많더니
(연경) 소박하네
뉘시오?
어?
(진오) 허임 그자가 분명 이곳으로 들어가는 걸 봤단 말이냐?
[긴장되는 음악] (충호) 수하 중 하나가 우연히 거리에서 보고
뒤를 밟았답니다
[진오가 피식 웃는다]
아, 혹시 그 여인도 함께 왔다 하더냐?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하였으나 웬 여인과 함께 왔답니다
[진오의 흡족한 신음]
그거 우리 허 의원님의 소중한 구침들인디
[연경의 멋쩍은 웃음]
아, 뉘신데 함부로 들어와 만지시오?
아, 아니, 아니, 내가 이걸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의미심장한 음악] [놀란 숨소리]
아씨, 그때...
그때
[반가운 탄성] [연경의 웃음]
(막개) 전에 우리 허 의원님이랑 같이 오셨던 아씨 맞죠?
(연경) 네, 네
허 의원님 오셨어요? 지금 어디 계세요?
아, 그...
(허임) [작은 목소리로] 연경 쌤
나오시오
연경 쌤, 시간 없소, 빨리 나오시오
[막개의 반가운 신음] [허임의 놀란 신음]
(막개) 참봉 나리, 이리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저 안 버리실 줄 알았...
[막개의 답답한 신음]
어찌 된 일입니...
왜 이제 와...
- (허임) 조용, 조용 - (막개) 어? 조용히
(허임) 아, 연경 쌤
[문이 달칵 열린다]
피해야 돼
[긴장되는 음악] [진오의 탄성]
(진오) 이게 누구신가?
[웃음]
(허임) 아, 이리 반가울 때가
유 봉사 나리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긴장되는 음악]
[떨리는 숨소리]
(연경) 아휴, 왜 이래요?
[허임의 놀란 신음]
[연경의 비명]
제 발로 여길 걸어 들어오다니
(진오) 예나 지금이나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건 여전하구나
하긴, 그 천한 피가 어디 가겠느냐마는
노비 몸에서 태어난 천출이 참봉씩이나 달았으면
머리가 땅에 닳도록 감읍하며 살 것이지
제 분수도 모르고 궐 문턱을 넘보더니 꼴이 아주 볼만하구나
이놈을 당장 궐 의금부로 압송하고
- 아씨는 편히 뫼셔라 - (충호 부하) 네!
(연경) 이거 놔요
(막개) 의원님 [허임의 다급한 신음]
- (허임) 유 봉사 나리 - (막개) 허 의원님!
(허임) 유 봉사 나리! [막개가 소리친다]
잠시만!
막개야 [막개의 당황한 신음]
나리!
(막개) 허 의원님
(허임) 잠시만, 잠시만요!
[연경의 거친 숨소리]
(딱새) 어! 맞는다
[웃음]
아까참에 나리 마님 먹다 남긴 거
내가 너 주려고 꿍쳤어
[웃으며] 너 이거 좋아하잖아
[두칠의 한숨]
오메, 다 물러져 버렸네
성, 제발 이런 짓 좀 하지 말아
그러니까 남들이 성보고 바보라고 놀리는 거 아니여! 씨
(딱새) 나 바보 아닌데!
너 주려고 그랬는데
[딱새의 웃음]
너... [두칠의 한숨]
아기 때 이거 주면 좋아했는데
나가 아직까정 아기로 보여?
(두칠) 내가 아기여? 아, 하지 좀 말아
그러다가, 그러다 걸리면
또 피똥 싸게 얻어터지고 싶어서 그려?
내가 정말 성 때문에 못 살겄다, 정말
아휴, 손이 이게 뭐야, 이게, 아휴, 씨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허임) 잠깐만 놔 보시오
오해가 있으신 것...
오메, 저게 누구야?
[긴장되는 음악] (허임) 오해가 있으신가 보오, 잠시만!
(관군1) 무슨 말이 많아!
저거 허임인데?
(딱새) 허임이 맞는데?
(허임) 잠깐 기다려 보시오
내가 할 일만 하고 내 금방...
(딱새) 어?
(두칠) 성, 먼저 가 가지고 그, 새 마님 심바람이나 하고 있어
가다가 또 한눈팔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 할 수 있지?
할 수 있다, 아우야
[딱새의 웃음] 아, 그랴, 그랴, 그랴 그, 새 마님 성격 알지?
묻는 말에 대답 잘하고
(두칠) 괜시리 실실 웃지 말고
그거 은근히 사람 기분 나쁘게 해, 그거
그래도 계속 웃음 나올 거 같으면 차라리 고개를 이렇게 숙여, 알았어? [딱새가 대답한다]
할 수 있지?
[웃으며] 오야
걱정 말거라, 아우야
[딱새의 웃음] 아, 그렇게 웃지 말라고, 씨, 쯧
(두칠) 얼른 가
[딱새를 탁탁 토닥이며] 집으로 가, 얼른, 가, 얼른
빨리 가!
(허임)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기다려 보시오
[허임의 놀란 신음]
[관군2의 힘주는 신음]
[허임의 다급한 신음]
(허임) 아이고, 내 급한 일만 해결하고 다시 오리다
내 약조를 지킬 터이니 잠시...
이보시오!
아이, 이를 어쩐다
아이, 유진오 그자가 대관절 어쩌자고 그 처자를
아, 이 일을 어쩌지
(허준) 왜, 또 내빼려느냐?
[혀를 끌끌 찬다]
네놈은 늘 도망칠 궁리만 하는구나
아휴, 죄를 지어도 크게 지었는가 보네
궐 안까지 끌려가는 거 보니께
쯧, 하긴
임금님 능멸한 죄면 대역죄나 매한가지라던데
그럼 뭐여
곧 뒈지겄네?
아이씨, 허임 이 새끼 모가지는 내가 비틀어야 되는데
아휴, 씨
(노비1) 두칠아, 두칠아! [어두운 음악]
[노비1의 거친 숨소리]
(두칠) 아따, 숨넘어가겠네, 뭐 때문에 그려?
너, 너 얼른 집에, 집에 가야겄다
(노비1) 얼른!
(두칠) 이씨
[의미심장한 음악] 네놈 머리 꼴을 보아하니 제 발로 돌아왔을 리는 만무하고
또 무슨 사고를 친 게로구나
(허임) 의술로 얻은 알량한 권세를 그리 휘둘러 대시던 분이
어찌 그 꼴로 그곳에 계십니까?
깜냥도 안 되는 돌팔이 놈을 왕 앞에 데려갔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건 실수였습니다
[비웃음]
누가 그러더냐, 그 침통이 그러더냐?
(허준) 하면 실수라 치자
한 번 실수가 모든 것을 앗아 갈 수 있는 것이
궐 안 의관의 삶인 것을 몰랐더냐?
해서 내 미리 경고하지 않았더냐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엔 네놈 목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이제라도 그 목숨값을 치르게 됐으니 잘되었구나
참으로 원통하시겠습니다
근본도 모르는 이 천한 놈 하나 때문에
그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되셨으니
[혀를 끌끌 찬다]
그놈의 천출 타령 지겹지도 않으냐?
해서 양반들이 네놈 침통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을 보니
꺾인 자존심이 보상되더냐?
(허준) 쓰지도 못할 재물 쌓아 놓고 보면 울분이 삭여지더냐?
영감!
하면 천출이 없는 세상은 어떻더냐?
(허준) 이곳과 다르더냐?
거기선 이곳에서 갖지 못한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성싶더냐?
영감이 어찌 그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세상을 향한 비틀린 너의 마음이
의원으로서의 너의 삶 또한 그르치고 있음을
(찬성) 옥문을 열어라!
참으로 운도 좋으시오
[어두운 음악] 전하께서 한양을 떠나실 때 영감을 데려가고자
대신들 눈치를 보던 차에
허임 저자가 잡혀 줬으니
[찬성의 웃음]
지지리 운도 없는 놈
며칠 더 버티지 그랬더냐
저놈을 단단히 지키거라!
(관군3) 네!
[찬성의 헛기침]
침통만 흔들어 댄다고 다 의원인 줄 알았더냐
정작 자신이 지닌 재주의 가치를 모르는 한심한 놈
[문이 탁 닫힌다]
(막개) 아휴, 대관절 저 아씨가 누군데 허 의원님은 끌려가면서까지...
뭐야
[진오의 헛기침]
[막개의 의아한 신음]
[의미심장한 음악] 어? 저건 또 뭐야?
[한숨]
[짜증 내는 신음]
[지직거린다]
[지직거린다]
[한숨]
[문이 드르륵 열린다]
(여자2) 드셔요
[진오의 헛기침]
[문이 드르륵 닫힌다]
왜 서서 계시오? 편히 앉아 있지 않고
지금 뭐 하자는 것입니까?
뭘 하자는 게 아니라
저번의 결례에 대한 사과도 할 겸 잠시 담소라도 나누고자
이리 모시게 되었소
지금 이러는 것도 결례라는 걸 모르십니까?
[진오의 한숨]
그저 무뢰배 같은 놈에게 붙잡혀 계신 듯하여
어느 댁 아씨인지 알려 주시면
가마로 댁까지 편안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마는 됐고
그냥 나가는 문이나 알려 주세요
지금 바로 가겠...
[익살스러운 음악]
[연경의 한숨]
그럼 소녀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진오의 헛기침]
목도 마르실 텐데 감주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마시라면서요
따르세요
아, 네
[진오가 술병을 탁 내려놓는다]
감주가 식혜구나
아까 그 얘기는 무엇입니까?
그 허 의원이라는 사람
그 분수도 모르고 궐 문턱 어쩌고 그런 거
모르고 계시었소?
내 그럴 줄 알았소이다
(진오) 그 천한 놈이 재주 하나 믿고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는 놈인데
글쎄, 전하의 편두통을 치료하고자 대전에 들었다가
그 침 든 손을 용안 앞에서 벌벌 떨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진오의 웃음]
[흥미로운 음악]
[진오가 상을 탁 친다] (진오) 그뿐이겠소?
얌전히 처분을 기다려도 목숨을 부지할까 말까 하는 판국에
감히 관군을 공격하고 줄행랑까지 쳤으니
그놈이 실성을 해도 보통 실성한 게 아니지요 [한숨]
[진오의 웃음]
그럼 아까 의금부로 데려간다고 하던데
그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생각하는 신음]
당장 죽여도 시원찮은 놈인데
(진오) 하필 때가 때인지라
뭐, 운이 좋으면 살아 돌아오는 것이고
죽어서 나라에 보은하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진오의 웃음]
[한숨]
(진오) 아참
내 드릴 것이 있소이다
[진오의 힘주는 신음]
내 이리 다시 만나 뵈게 될 줄 알고 고이 모셔 놨습니다
한데
그것은 무엇으로 만든 것이옵니까?
한양 온갖 갖바치를 수소문해 봐도 아는 이가 없던데
합성 피혁?
하, 합성...
[멋쩍은 웃음]
(진오) 그, 처음 보는 모양새인데 비 올 때 신는 것이오?
이럴 때 쓰는 거다, 이 자식아
[경쾌한 음악]
(막개) 어! 나왔다
(진오) 밖에 누구 없느냐! 저 여인을 잡아라!
[의아한 신음]
[문이 달칵 열린다]
[아파하는 신음]
[놀란 숨소리]
오, 저 아씨 제법이네
[힘겨운 숨소리]
[진오의 아파하는 신음]
뭐야, 웃어? 씨
신 갖고 와, 내 신 갖고 와, 빨리!
[경쾌한 음악]
[아파하는 신음]
(연경) 아저씨, 나가는 문이 어느 쪽이에요?
(남자5) 응, 이쪽으로
의금부, 대궐 가는 쪽은요?
(남자5) 아, 나가서 우측으로 쭉 가시오
고맙습니다
(막개) 어, 어? 아씨!
아씨!
- 아씨, 이쪽입니다 - (연경) 어!
(막개) 빨리빨리
[연경의 한숨]
(막개)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유진오 나리는 아씨를 왜 쫓는 겁니까?
하, 모르겠어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연경) 근데 대궐, 대궐 가는 쪽이 어디예요?
그 사람 그쪽으로 끌려갔잖아요
예
아, 안 그래도 글로 가려던 참인데 따라오십시오
예
[무거운 음악]
이곳입니다
혹시 저를 보자고 하신 분이...
[잔잔한 음악]
누구세요?
아니
뉘십니까?
어서 와요, 최연경 선생
저를 아세요?
거기선 의사를 그리들 부르지요?
선생 혹은 선생님이라고
아니, 어떻게 그걸
아, 가방 속에 있던 사탕들은 허락도 없이 내가 먹었어요
오랜만에 그리운 맛을 보니 기분도 좋아지고
덕분에 옥사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대체 누구세요?
아니, 어떻게 그런 걸 다
때가 되면 우리 인연에 대해서도 얘기 나눌 기회가 오겠지요
내 예감이 맞는다면
씁, 아마도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성싶은데
아, 우선은 그, 허임 그 친구 일이 급한 거 아닌가요?
허임, 그 사람에 대해서도 아세요?
친구
그러고 보니 이 말 또한 오랜만에 써 보네요
그곳에선 벗이라는 뜻으로도 쓰이지요?
[당황한 숨소리]
(허준) 아직도 모르겠느냐
세상을 향한 비틀린 너의 마음이
의원으로서의 너의 삶 또한 그르치고 있음을
(허준) 허임
종구품 참봉, 혜민서
박진상
정구품 훈도
(허임) 아직 세상에 대한 믿음을 품고 있었던 때가 있었지요
(의원3) 내 이럴 줄 알았네
(의원4) 허임 저 친구는 이번에도 누락이네
(의관1) 혜민서 참봉만 몇 년인가?
(의관2) 쯧쯧, 출신이 그런 걸 어쩌겠나
애초부터 못 올라갈 나무지
(허임) 그 숱한 순간들에도
희망을 꺾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의관3) 궐에서 자네를 들이자는 논의를 한다 하네
[문이 달칵 열린다]
(허임) 어찌 됐습니까?
[헛기침]
(의관3) 천출에게 어찌 왕족의 안위를 맡기냐는 말이
또 나왔다네
(허임) 제 마음이 비틀린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하면
두 해 전 그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허준) 상처와 아픔이 많은 친구예요
이 땅의 누구도 그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주지 못했지요
그는 좋은 의원이었고 이 땅에 꼭 필요한 의원입니다
그를 다시 돌려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최연경 선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니
대체 저한테 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그의 운명에 이미 최연경 선생이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허준) 두 사람이 만나 이 먼 곳까지 함께 온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힘들겠지만 그 친구의 친구 벗이 되어 주었으면 해요
씁, 우린 다시 만나는 날 긴 얘기를 나누기로 하죠
[살짝 웃는다]
[산새 울음]
(허준) 누가 그러더냐, 그 침통이 그러더냐?
[의미심장한 음악] [침통을 달그락거린다]
이건 내 침통이 아닌데
[한숨]
[떨리는 숨소리]
[거친 숨소리]
너였구나
(관군4)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충청 군영으로 이송하라는 명이 내려왔소
[어두운 음악] [다급한 숨소리]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일대가 왜적들 공격에 쑥대밭이 됐다던데
(관군4) 부디 몸조심하시오
아이, 잠시, 나리
(허임) 나하고 같이 왔던 그 처자
그 처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오?
그걸 내가 어찌 아오?
(허임) 아이고, 나리, 나리!
(두칠) 아이고, 수고들 많으십니다요
[웃으며] 목이 칼칼할 텐데 술이나 한잔들 하십시오
[자물쇠가 달그락 열린다]
(관군4) 병판 대감의 명으로 하룻밤 방면하기로 했소
그게 무슨...
(관군4) 틀림없이 날이 밝기 전까지 돌려보내야 한다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웃음]
두칠아
얼른 나와
[긴장되는 음악]
빨리 나와
(허임) 정녕 병판 대감이 나를 부르신 게 맞느냐?
잔말 말고 따라와
[의미심장한 효과음]
살려 주십시오, 허 의원님
[막개의 답답한 신음]
(막개) 웬 말씀들이 그리 깁니까? 남은 속이 타들어 가는데
그, 대관절 허준 영감님과는 어찌 아는 사이십니까?
뭐라고요?
허준요?
[멋쩍은 웃음]
어의 어른 함자를 그리 막 부르면 안 될 텐데
아니, 그...
그 '동의보감' 허준?
뭔 보감요?
[놀란 숨소리]
말도 안 돼
저기요,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니고요
지금 빨리 우리 허 의원님 찾으러 가야 되는데
그 사람 어디 있어요?
(연경) 그 사람 어떻게 됐어요?
괜찮은 거죠?
무사한 거죠?
아, 그 사람 어디 있냐고요!
그...
따라오십시오
[어두운 음악]
[연경의 거친 숨소리]
(막개) 아, 웬 걸음이 그리 느리십니까? 빨리빨리 좀 오십시오!
(연경) 아, 이렇게 멀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좀 빌려 달라는 건데
[연경의 거친 숨소리]
아, 나 말 못 타지
저기요
미안한데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요, 응?
[연경의 거친 숨소리] [한숨]
[막개의 한숨] [연경의 힘겨운 숨소리]
(막개) 평소에 가마만 타고 다니셨나 봅니다
(연경) 그러게요
[다리를 탁탁 두드리며] 엄청 빠른 가마만 타고 다녔네요
근데 아까부터 궁금한 건데
그, 우리 허 의원님이랑은 무슨 사이십니까?
근데 아까부터 궁금하던 건데요
왜 남자 옷을 입고 다녀요?
[익살스러운 음악]
- 저 남자인데요 - 어이구?
[헛기침]
눈도 밝으십니다
허 의원님도 알아요?
그쪽 여자인 거?
허 의원님만 아십니다
[애잔한 음악]
[막개의 힘주는 신음]
주십시오
[어두운 음악] (두칠) 얼마 전에 대감마님이
어린 첩 하나를 들였는디
성질이, 성질이 아주 보통이 아니어유 [딱새의 신음]
우리 성이 아까 주전부리 심바람하면서
뭐 하나를 슬쩍 훔친 모양인디 [두칠이 코를 훌쩍인다]
그게 새 마님 심기를 건드렸는가
대감마님이 노발대발하셔 가지고
[한숨]
우리 성이, 이 바보 같은 성이
이거 하나 꿍쳐 두느라고
아이고
제발 우리 성 좀 살려 주십시오
허 의원님, 제가 이렇게 사정할 테니께
(두칠) [손을 싹싹 빌며] 우리 성 좀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허 의원님
[딱새의 신음]
내가 치료하면
네 형은 죽는다
[두칠의 한숨]
이 개잡놈의 새끼가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씨
치료하는데 왜 죽어?
너 또한
다칠 수 있다
내가 다치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우리 형 살려 내, 이 새끼야!
[두칠의 화난 신음]
[긴장되는 음악]
(두칠) 우리 형 죽으면 너 이번에 진짜 내 손에 뒈져
알아?
우리 엄니, 그날 네가 침놨어도 못 살았을 거 알아
(두칠) 그래도 그 엄니 한 풀어 주려고
[두칠의 한숨]
내가, 내가 네놈 잡겠다고
(두칠) 우리 형 혼자 보낸 것이
[울먹인다]
그것이 우리 형 내가 이렇게 만든 거여
우리 엄니 그렇게 보냈어도
반병신으로 태어난 우리 성
평생 사람대접 못 받고
그렇게 무시당한 우리 성
이렇게는 못 보내제
우리 엄니는 그렇게 보냈어도
우리 형은 이렇게 보내면 안 되잖아
[두칠이 흐느낀다]
(두칠) 제발 그러니께
허 의원님 우리 형 한 번만 살려 주셔요
내가 이렇게 빌 테니께
한 번만 살려 주셔요
허 의원님!
[두칠이 오열한다]
[하인1의 놀란 탄성]
(하인1) 그래서 시방 허 의원님이 딱새 치료해 주고 있는 거여?
(하인2) 아휴
(하인1) 대감마님 아시면 경을 칠 것인디
(막개) 안 되는데
[한숨]
안 되는데
우리 허 의원님 저 노비 치료하면 안 되는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데 치료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의원님이 저리 변하셨는데
그런 일 또 있으면 우리 의원님
(막개) 다시는
다시는...
[막개의 한숨]
(연경) 말해 봐요
대체 저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차분한 음악]
(연경) 그럼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를 눈앞에 보고도 그냥 가요?
의사의 도리와 선의가
오히려 해가 될 때도 있소
해가 될지 득이 될지 판단하는 건
(연경) 의사의 몫이 아니에요
의사한테는 자격이 필요하지만
환자한테는 아니니까
태백을 보하고 곡지를 사하는 침을 놓을 것이야
(허임) 맞아서 생긴 몸 안의 어혈을 풀어 주기 위함이다
그, 그, 그 말씀은 긍께 그 말은 우리 성을...
그 후에 몇 군데 더 침을 놓을 것이다
비록 침에 약효는 없으나
(허임) 경혈을 자극해 막힌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주면
몸이 스스로 치료할 힘이 생겨 상처가 더욱 빨리 낫는다
예, 예, 예, 의원님
또한 그 후에
(허임) 장기가 상해 배 속에 들어찬 농을 빼낼 것이야
넌 급히 가서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부레를 떼어 오고
오적골과 혈갈 가루를 구해 오너라 또한
참기름과 술을 섞어 달여 오고
아, 예, 알겠습니다요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가져오겠습니다요, 예
[문이 달칵 열린다]
[문이 탁 닫힌다]
(막개) 우리 허 의원님
본래 밤이면 몰래 병든 노비들을 찾아가 치료해 주는
마음 따듯한 의원이었습니다
양반가 청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거절하셔도
노비들 청은 거절하는 법이 없으셨죠
[입바람을 후 분다]
(막개) 두 해 전 그날도
주인어른 허락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죽어 가던 한 여종을
허 의원님이 몇 날 며칠 정성 들인 끝에
살려 내셨죠
[기쁜 신음]
[문이 달칵 열린다] 그런데 하필 그 댁 주인어른이
(허임) 왜들 이러시오?
(막개) 허 의원님에게 외진을 청했다 거절당한 [허임이 저항한다]
조정의 높은 대감이었습니다
[허임의 신음]
(막개) 그 일로 허 의원님은 국법을 어긴 죄로 의금부로 끌려가
겨우 목숨만 건져 나오시고
[막개가 흐느낀다] 허 의원님이 몇 날을 바쳐 살려 낸 그 늙은 여종은
성난 대감의 매질에
[흐느낀다]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어미의 복수를 하고 죽으려던 그 여종의 딸을
(막개) 허 의원님이 살렸습니다
[흐느낀다]
(허임) 인동초와 금은화를 삶아 아침저녁으로 먹이거라
상처가 낫고 통증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
우리 엄니 그렇게 보낸 거 잊은 거 아니어요
(두칠) 내 언젠가 허 의원님 꼭
꼭...
[잔잔한 음악] 이 은혜를
[한숨]
아이고, 참
[멋쩍은 웃음]
(딱새) [힘겨운 목소리로] 두칠아
(두칠) 성, 성, 깨어난 거여?
형, 괜찮아?
두칠아
어, 나 여기 있어, 왜?
나
산 거야?
[웃음]
살았어
(두칠) 살았어
형 이제 안 죽어, 살았어
(딱새) 응
살아 줘서 고맙네
[웃음]
내가 진짜 성 때문에 못 살겄다, 정말
(두칠) 아휴, 고마워
살아 줘서 고마워, 성
[두칠의 웃음]
[무거운 음악]
(병판) 저놈들을 당장 끌어내거라!
[문이 달칵 열린다]
[딱새의 괴로운 신음]
(병판) 네놈이 정녕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감히 내 집 안에서
내 허락도 없이 노비를 치료를 해?
하물며 임금을 능멸한 죄로 도주 중인 놈이 감히!
네놈이 근본 없는 천것인 줄은 내 진작에 알았다만
이리 어리석은 놈인 줄은 몰랐구나
뒷구멍으로 양반들이 '용하다, 장하다' 몇 마디 던져 주니
감히 네 분수를 잊은 것이냐?
그래 봤자 네놈이
먹이나 던져 주면 받아먹고 꼬리나 흔드는
개 새끼에 불과하다는 걸 몰랐더냐!
(병판) 천것이 객기를 부려도 유분수지
네놈이 재주 믿고 날뛴 결과가 어떤 것인지
내 깨닫게 해 주마
[떨리는 숨소리]
(병판) 여봐라!
딱새 저놈을 쳐 죽여라! [분위기가 고조되는 음악]
[두칠의 놀란 신음]
[두칠의 놀란 신음]
아니, 안 됩니다요!
(두칠) 형! 안 돼요, 아이고
성, 성!
아이고, 아이고, 마님
[딱새의 신음]
안 됩니다요, 대감마님!
[두칠의 다급한 신음]
[아파하는 신음]
[딱새의 신음]
(두칠) 아유, 대감마님, 대감마님, 잠시만요!
대감마님, 잠시만요
야, 이 새끼야, 하지 마!
하지 마, 이 새끼들아!
뭣들 하느냐!
아! 대감마님 잠시만요!
[딱새의 비명]
(두칠) 안 됩니다요 대감, 대감마님! 대감마님
[딱새가 퍽퍽 맞는다] 아우야!
(두칠) 날 때리라니까!
날 때려, 이 새끼들아!
두칠아!
제발, 제발 제발 저희 성님 살려 주십시오
(두칠) [손을 싹싹 빌며] 대감마님, 저희 형님 살려 주십시오
이씨, 대감마님!
[두칠의 성난 신음]
[딱새의 신음] [두칠의 성난 신음]
(두칠) [흐느끼며] 저희 성님 살려 주십시오
[아파하는 신음] 대감마님, 저희 형님 살려 주십시오
방금, 방금 죽다 살아났습니다요
이러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습니까요 대감마님
[손을 싹싹 빌며]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요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대감마님!
[딱새가 퍽퍽 맞는다] [괴로운 신음]
(두칠) 하지 마, 이 새끼들아!
아, 놔 봐, 이 새끼...
[괴로운 신음]
(두칠) [흐느끼며] 야, 야!
날 때려, 인마
날 때려, 이 자식들아
빨리! [놀란 숨소리]
성!
성, 성!
[딱새가 퍽퍽 맞는다]
[어두운 음악] (두칠) 성...
[놀란 숨소리]
성, 성
[두칠의 놀란 숨소리]
성!
성
성
눈 좀, 눈 좀 떠 봐
죽으면 안 되잖아
성, 눈 좀 떠 봐
에이씨
성, 죽지 말아
눈 떠, 이 등신아!
눈 떠!
[두칠이 울먹인다]
(두칠) 성, 미안혀, 내가 미안혀, 눈 좀 떠 봐
성, 성, 눈 떠 봐
[두칠이 오열한다] [연경의 놀란 숨소리]
(두칠) 죽지 말아
눈 좀 떠 봐, 이 등신아!
[흐느낀다]
[두칠의 성난 신음]
[노비2의 신음]
(두칠) 너, 이씨, 개새끼
[노비들의 힘주는 신음] [두칠의 아파하는 신음]
[두칠이 퍽퍽 맞는다] [허임의 놀란 숨소리]
(병판) 네놈이 아예 실성을 했구나 [두칠의 아파하는 신음]
오냐
죽는 게 네 원이라면
내 네 원대로 해 주마
여봐라, 두칠이 이놈도 제 형 따라 저승으로 보내 주거라!
(허임) 대감!
대감!
대감
소인이,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제도 모르는 천한 놈이
대감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요
대감의 말씀이 천 번, 만 번 지당하십니다요
[허임의 떨리는 숨소리]
이놈이야
대감의 말씀처럼
양반님들이 던져 주는 먹이나 받아먹고
꼬리나 흔드는
개 새끼임이 틀림없지요
[허임이 흐느낀다]
[병판의 웃음]
네놈이 이제야 정신이 드는 모양이로다
[허임의 떨리는 숨소리]
[두칠이 흐느낀다]
(두칠) 성
[두칠이 흐느낀다]
개, 돼지만도 못한 이놈들
대감의 노여움이 풀릴 수만 있다면야
천 번, 만 번 죽어 마땅하지요
하나!
(허임) 하나
저희같이
천하고 더러운 것들을 죽여 봐야
대감님의 귀한 손만 더러워질 터
부디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목숨만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대감!
대감
[두칠이 흐느낀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대감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대감
대감!
(허임)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대감
대감
제발...
(병판) 참으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광경이로다
네놈이 머리 좋고 약은 놈인 줄 알았더니
기껏 천것 하나 살리자고 [두칠이 흐느낀다]
[혀를 끌끌 찬다]
[울음 섞인 웃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요
암요, 암요
(병판) 여봐라
날이 밝는 대로 저놈을 의금부로 압송하고
[두칠이 흐느낀다] 두칠이 저놈은 광에 가두고 물 한 모금 들이지 말거라
며칠 후에도 숨이 붙어 있다면
그때 내가 다시 생각해 보마
그리고 딱새 저놈의 시신은
산 너머 저 멀리 내다 버리거라
(노비들) 예
두칠아 [두칠이 흐느낀다]
(두칠) 성
성
성
딱새 성
(두칠) 성, 성!
[놀라는 숨소리]
성!
[놀라는 숨소리]
(두칠) 성!
[감성적인 음악]
(허임) 정녕 제 비틀린 마음이 잘못인 것입니까?
아니면 비틀린 세상이 잘못된 것입니까?
(연경) 그쪽은 여기 아무도 없잖아요
나밖에
(허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재하) 그 여자 다치게 하면 누구도 용서 안 할 겁니다
(허임) 앞으로는 그 처자하고 엮일 일 없으니 신경 끄시고
(허임) 최연경 선생, 비키세요
툭하면 환자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이 누굴 치료하겠다는 겁니까?
그러고도 의사를 운운할 자격이 있어요?
(허임) 어차피 이젠 가는 길이 다른 사람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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