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처음이라 10
(호랑) 안녕
(지호) 어
(호랑) 나 양호랑, 우리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2학년
(지호) 응, 안다
나 안 그래도 너랑 같은 반 하고 싶었는데
너 전교 1등이잖아
오늘부터 너 짝꿍 할게, 나 좀 도와줘 나 인서울 하게, 알았지?
(지호) 근데 니
와 서울말 쓰는데?
(호랑) 응?
나 서울에서 전학 왔잖아, 몰랐어?
아는데 유치원 때 왔잖아
[학교 종이 울린다]
(학생1) 야, 쌤, 쌤, 쌤, 쌤 왔어, 야, 쌤, 쌤 [학생들이 소란스럽다]
(교사1) 자, 자, 이 가시나들아 정신 좀 챙기자, 정신
이제 느그 18세다, 18세, 어? 고2
그리고 보다시피 전학생 우수지다
[학생2의 놀라는 신음] 진주에서 오늘 전학 왔다, 인사해라
끝이가?
네
[흥미진진한 음악]
(교사1) 저 빈자리에 들어가서 앉아라
뭐야, 배구 선수야?
(교사1) 성적표에 사인 단디 받아 온나
[학생들의 탄식]
[학생들이 시끌벅적하다] [호랑의 한숨]
(호랑) 지호, 역시 전교 1등?
[호랑의 놀라는 신음]
2등?
아니, 네가 2등이면 누가?
(학생3) 전교 1등?
- (학생4) 뭔데? - (학생3) 진짜가?
[저마다 놀란다] (학생3) 니 범생이였나?
(학생5) 수지야, 내 공부 좀 가르쳐 줘라
- (학생3) 야, 내도, 내도 - (학생5) 나 엄마한테 죽었다
- (학생3) 내도 가르쳐 줘 - (학생5) 줄 서라, 내가 먼저 말했다
(학생3) 야, 뭔 줄을 서나? 그냥 같이 하면 되지, 그냥
[흥미진진한 음악] 야, 같이 하자, 어?
(호랑) 뭐야, 저 배구가 전교 1등이야?
(호랑) 배구만 잘하게 생겨서 웬 전교 1등?
(지호) 진주에서도 매 1등만 했는가 보더라
(호랑) 그 배구 왜 남해로 전학 왔는지 알아?
몰라, 왜 왔는데?
(호랑) 걔네 엄마가 진주에서 방석집 했는데 유부남이랑
걔 아빠도 없다나 봐
있는데 누군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고
어디 가서 하지 마라, 그런 얘기
안 해, 내가 왜?
[잔잔한 음악]
[파도가 철썩인다]
(수지) 아이씨, 별 봐라
개떼같이 많네
엿같네, 이놈의 촌 동네, 아휴
[호랑과 지호가 대화한다]
(호랑) 뭐, 뭐야?
니 죽고 싶나?
아니, 내가 왜!
(지호) 와 그라노?
니가 울 엄마 방석집 했다 캤다매?
(호랑) 나도 그냥 들은 거거든!
아, 맞나? 그러면 [흥미진진한 음악]
[호랑의 비명] (수지) 유부남이랑 바람나서
도망 왔다 카는 것도 그냥 들은 기가, 어?
[호랑의 비명] 가자, 누가 씨불이는지, 씨
[학생들의 말리는 신음]
- (호랑) 지호야! - (지호) 이, 이것 좀 놓고 얘기해라
(지호) 잠깐만, 잠깐... [호랑의 비명]
(호랑) 아, 신고해라, 신고!
- (수지) 놔라! - (지호) 놓고 얘기해...
(호랑) 아! 안 된다, 지...
[문이 달칵 열린다]
(교사1) 아따, 전교 1, 2등이 우리 반에서 나왔다고
어? 자랑자랑 했더니만 어휴, 쪽팔리구로
정신 챙겨라, 정신
(호랑) 씨
(교사2) 아이고, 이게 뭔 일이고, 지호야?
야, 야, 니가 시비 걸었제?
으이구, 쯧
[발랄한 음악]
(교사3) 잘한다, 으이구
- (교사4) 잘 좀 해라, 잘 좀 - (교사3) 어휴, 어휴
[교사5의 못마땅한 신음] (교사6) 야, 야, 아이고
[씩씩댄다]
(호랑) 아이씨!
씨, 왜 나만 때려? 왜 나만!
공부 못하는 년은 사람도 아니야?
[헛웃음]
느그가 뭐 그리 잘났는데?
문디 호떡같이 생긴 것들이
몬생긴 것들이!
[호랑이 오열한다]
(지호) 호랑아, 울지 마라, 어?
뭐고? [호랑의 거친 숨소리]
사투리 겁나 잘 쓰네
그게 그렇게 억울하면 공부를 좀 잘해 뿌든가
공부를 잘해 뿌고 싶다고 잘해 뿔 수 있는 거면
(호랑) 내가 잘해 뿌고 말지!
[호랑이 씩씩댄다]
(수지) 돌았네
잘난 척 좀 하지 마, 재수 없으니까!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다]
(수지) 양호랭이
니 우리 집 왔었다매?
유치하구로 이게 뭐고, 어?
사과 잘 받았다
[밝은 음악]
빨간 동그라미 쳐 놓은 거 세 번씩 풀어라
중간고사 나온다
그라고 니
내 앞에서 서울말 쓰지 마라 재수 없으니까
치, 웃겨, 정말
(지호)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지호가 살짝 웃는다]
(호랑) 야! 이거 봐, 나 70점 맞았어
[지호의 탄성]
어때? [호랑의 웃음]
(지호) 진짜 잘했다, 진짜 많이 올렸다
잘했네
[웃음]
(지호) 세 개밖에 안 틀렸네?
[호랑의 행복한 신음]
(교사1) 잡으러 간다! [함께 소리친다]
이것들이 진짜
(지호) 어, 야, 내 걸렸다, 걸렸다!
- (수지) 뭔데? - (지호) 걸렸다!
뭔데?
야, 대따 크다, 돔, 돔, 돔!
[호랑의 탄성]
[지호의 웃음] (호랑) 야, 엄청 크다!
[함께 환호한다]
[함께 환호한다] [아름다운 음악]
[함께 웃는다]
[탄성]
[함께 웃는다]
(수지) 내는 사장님, 사장 할 기다
(호랑) 너는 공부도 잘하면서 무슨 장사를 해?
차라리 교수를 하든가
아님 대기업 들어가서 커리어 우먼 하면 되지
(수지) 야, 그런 거 백날 해 봤자 월급쟁이밖에 더 되겠나?
한 번 사는 인생 남 밑에서 어찌 백 년 만년 일하노?
나는 내 돈 마음껏 만지고 살 기다
하긴 저 성질에 누구 밑에서 일하겠어?
[수지가 혀를 쯧 찬다]
(호랑) 나는 자수성가형 성공남이랑 결혼해서 전업주부 할 거야
자수성가형 성공남?
(지호) 와? 부잣집으로 시집가는 게 아이고?
어, 안 돼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재산에는 시집살이가 다 포함돼 있는 거라고
(호랑) 남자가 스스로 성공해야 그게 다 우리 거지
(수지) 그라면 우리 중에도 '사' 자 사모님 생기는 기가?
의사, 변호사 사모님?
으음, 이제 대세는 공대야
(호랑) 공대 나온 벤처 사업가
그게 딱 내가 그리는 자수성가형 성공남이야
에이
[픽 웃는다]
지호, 너는?
(수지) 뭐긴, 당연히 작가지, 맞제?
(지호) 음, 아이다
그라믄 뭔데?
글 쓰는 기 좋아서 작가가 되고 싶은 거는 맞는데
(지호) 그기 꿈은 아이고 내 꿈은
사랑
[잔잔한 음악] - 사랑? - (호랑) 에?
사랑이 뭔 꿈이고?
(수지) 느그 옆집에 민구가 니 좋아한다 아이가
이참에 한번 사귀어 뿌든가
(호랑) 에이, 무슨, 걔 못생겼어 차라리 그, 승훈이를 만나
아이, 그런 거 말고
(지호) 인생의 단 한 번뿐인 사랑
운명 같은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내 꿈이다
(지호)
(수지) 뭔 소리야?
(호랑) 에, 누구?
(지호)
(수지) 야, 장난해?
(호랑) 뭐야, 지호, 지금 혹시 염장질?
그럼 나도 우리 원석이 사랑한다고 여기 고백한다
(수지) 이것들이, 씨, 잠이나 자!
(지호) 사실 결혼이라는 게 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세희) 인생에서 사랑은 한 번이면
충분하죠
(지호) 그 사람의 한마디가
[웃음] 온 마음에 맴돌고
[반짝이는 효과음]
(지호) 그 사람의 뒤통수마저
멋있어 보이는 것
아, 일어나셨어요?
네
(지호) 아, 고양이는 좀 괜찮아요?
(세희) 네, 병원에서 말한 것처럼 그냥 일시적인 거였나 봐요
[밝은 음악]
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지호) 네, 잘생김요
(지호) 창문에 뭐가 묻었나?
청소를 해야 하나?
[익살스러운 효과음]
(지호) 좋아하는 사람이랑 매일 볼 수 있다니
결혼이라는 거 참
좋다
[도어 록 조작음]
[도어 록 작동음]
[문이 달칵 열린다]
(명자) 집에들 있었구나?
(지호) 응?
어머니 [문이 달칵 닫힌다]
[웃음]
[천둥이 콰르릉 치는 효과음]
[밝은 음악] [노크 소리 효과음]
[오싹한 효과음]
(명자) 이건 더덕장아찌고 이건 고등어조림
얘가 생선조림을 엄청 좋아하거든
(지호) 네
(세희)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어유, 아들 집에 오면서 연락은 무슨?
(명자) 주말이니까 당연히 집에 있겠다 싶어서 왔지
이거 냉장고에 좀 넣자
아, 네
(세희) 주세요, 제가 할게요
(명자) 아유, 됐어, 네가 무슨 부엌살림을 안다고 그래?
살림은 전문가가 하는 거야
그렇지, 지호야?
네 [명자의 웃음]
- (명자) 이거 - (지호) 아, 네, 주세요
[세희의 한숨]
[다가오는 발걸음]
[명자의 힘주는 신음]
(명자) 황 교감 선생님 알지?
사과 한 박스 보내오셔서
아버지랑 먹어 봤는데 아주 맛있어
네
우리 며늘아기도 사과 좋아하니?
네, 좋아해요
뭐, 저는 사실 가리는 게 잘 없어서
잘됐네
[명자의 웃음]
[익살스러운 효과음]
(지호) 아...
(세희) 이리 주십시...
이리 줘, 내가 할게
[명자의 어색한 웃음]
(명자) 우리 지호 카페에서 일한다며?
네, 일을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오빠 혼자 힘들까 봐?
[지호가 살짝 웃는다] (명자) 아유, 이뻐라, 응?
어디서 이렇게 착한 아기 데리고 왔을까?
[명자의 웃음]
참, 내일 제사인 거 알지?
일찍 퇴근하면...
일찍 퇴근 안 해요
(세희) 그리고 제가 언제 제사 간 적 있어요?
갑자기 왜
그래, 바쁜 거 알아
뭐, 시간 되면 겸사겸사 오라는 거지
[익살스러운 효과음]
(명자) 아유, 이리 줘 네가 무슨 사과를 깎는다고
이것도 하던 사람이나 하지 안 그러니?
네 [명자가 살짝 웃는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지호) 아, 주세요, 제가 할게요
- (명자) 그럴래? - (지호) 네 [명자의 웃음]
[휴대전화 진동음]
(수지) 지호, 우리 벌써 도착했어 너 언제 나와?
약속 있다 그랬지, 친구랑?
(지호) 아...
응
가 봐, 얼른, 늦겠다
(명자) 아, 그랬어? 얼른 가 봐
- 그럼 - (명자) 응
[익살스러운 음악] [명자의 멋쩍은 신음]
(명자) [살짝 웃으며] 응
내가 깎지, 뭐
[문이 달칵 열린다] [한숨]
[가게 안이 시끌벅적하다]
(지호) 미안, 미안
- (수지) 왔어? - (지호) 많이 기다렸지?
(호랑) 아니야, 괜찮아
(지호) 아니, 시어머니가 갑자기 오셔 가지고
아이, 괜찮다니까
(호랑) 아, 근데 나 갑자기 왜 아, 막 두통이 오지?
[수지의 어이없는 웃음] 아, 머리야
(지호) 머리 아파? 갑자기 왜? [흥미진진한 음악]
[호랑의 힘겨운 신음]
웬 반지?
원석이가 준 거야?
결혼?
어, 지호, 나 결혼해!
[지호가 소리친다] 나 결혼해!
(수지) 야, 조... [지호와 호랑이 소리친다]
(지호) 아, 어떡해!
[지호와 호랑이 소리친다]
- (호랑) 나 결혼해! - (수지) 야, 야!
- (지호)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 (호랑) 어떡해, 지호, 나 결혼해
[호랑과 지호의 웃음]
(명자) 집에는 한번 안 올 거야?
(세희) 봐서요
(명자) 저기, 아버지가 대출금 갚아 주신대
됐어요
[답답한 한숨]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거야, 아버지랑?
(명자) 결혼도 했는데 이제 좀 덮고 잊을 때도 됐잖아
덮고 잊어요?
뭘요? 뭘 덮고 뭘 잊으라는 말씀이세요?
그리고 이 결혼이랑 아버지가 무슨 상관인데요?
세희야, 아버지도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
네 아버지도 늙는다, 이제
가세요, 저 볼일이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 연락도 없이 이렇게 오늘처럼 찾아오지 마세요
(세희) 같이 살고 있는 사람한테 예의가 아니니까요
택시 타고 가시고요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라니?
[익살스러운 음악]
와이프를 무슨 세 들어 사는 사람처럼 말하네, 쟤가
(호랑) 아니, 그래서 내가 '야, 손톱에 때가 어디 있냐?' 하면서
손을 딱 봤는데
때 대신 이게 샤랄라 [반짝이는 효과음]
(호랑) 야, 원석도 갈고닦으면 보석이 되는구나
7년을 공들인 보람이 있네, 양호랭이
(지호) 그러니까, 7년 전만 해도 호랑이가 밤길 무섭다 그러면
플래시 사 주는 애였는데, 원석이
[웃음]
내가 뭐랬어, 우리 원석이 내가 마크 주크박스로 만들 거라 그랬지?
(호랑) 형부 회사 들어갔으니까 이제 잘될 일만 남았다고
야, 마크 주크박스가 아니라 마...
(수지) 근데 넌 어머니가 오셨다니? 갑자기 왜?
[밝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지호) 응, 반찬 갖다주시러
신혼부부 집에 주말 아침에?
(지호) 응? 응
(수지) 야, 설마 뭐, 비번 누르고
띠디디디 '서프라이즈' 막 이런 건 아니지?
[웃으며] 설마
지호도 이제 시월드 시작인 건가?
에이, 뭐, 집에 한 번 오신 거 가지고, 뭐
(호랑) 그래, 뭐,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걸 수도 있어
자기 아들이 산 집이니까
자기가 출입할 권리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지
야, 아들이 산 집에 어떻게 자기 권리가 있어?
(수지) 성인이 되면 독립된 가정이자 인격체인 건데
만약 그 권리가 있다면
아들이 스스로 선택한 동반자에게 그 권리가 있는 거지
그래, 맞아, 맞아
근데 그건 톰이나 제임스 이야기고요, 언니
(호랑) 여긴 미국이 아니잖아요
한국 어머니께서 자기 아들 돈이 다 들어간 그 집에
지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겠어?
지호가 그 집에 월세 내고 사는 것도 아니고
[지호가 캑 기침한다]
(수지) 그러게, 부인이 월세 내고 살면 아무 말 못 하긴 하겠네
[어색한 웃음]
월세는 무슨
과하다, 야
(지호) 아, 그리고 그 어머니 그렇게 무서운 분 아니셔
나한테도 잘해 주시고
그래서 나도 잘해 드리고 또 잘 보이고도 싶고
여기 또 신입 며느리 하나가 병에 걸릴 판이네
무슨 병?
착한 며느리병
[밝은 음악]
[익살스러운 효과음]
(세희) 씁, 이것 때문인가?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미용사) [웃으며] 평소 스타일대로 다듬으면 되죠?
(세희) 네
저기, 근데 제가 어디가 좀 이상합니까?
(미용사) 어디요?
[살짝 웃으며] 아니, 뭐, 그대로신데?
(세희) 흠, 쯧
아...
이 할인 쿠폰 아직 사용 가능합니까?
(미용사) 네
[새가 짹짹 지저귄다]
(지호) 착한 며느리병?
[흥미로운 음악] 결혼하면 신입 며느리들이 잘 걸리는 병
(수지) 시댁에 착하고 싹싹하고
말 잘 듣는 며느리가 돼야 할 것 같아서 무리하는 병
(호랑) 근데 뭐, 나는 이해해
시댁한테도 남편한테도 예쁨 받고 싶잖아
결혼하면 많이들 걸려, 착한 며느리병
[한숨]
(여자) 착한 며느리병 초기인가요?
저 왜 이렇게 시댁 일을 거절 못 할까요?
에이, 이건 아니다
아니, 거절을 왜 못 해?
나는 그냥...
[반짝이는 효과음]
[밝은 음악]
(지호) 저 남자를
거절하지 못할 뿐
머리 바뀌셨네요?
아, 네
이리저리 신경이 좀 쓰여서
이상한가요?
아니요, 좋아요
머리, 머리가
머리 스타일 좋다고요, 좋아요
(세희) 아...
네
(지호) 어머니는 잘 가셨어요?
네
어머니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강경하게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아니에요, 부모님이 자식 집에 오시는 건데요, 뭐
아니요, 그래도 그건 아니죠, 불시에
(세희) 아무래도 비밀번호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지호) 아, 뭘 그렇게까지
저 때문이라면 저는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아, 네
[안내 음성] 완료되었습니다
[잔잔한 음악]
(복남) 그래도 그 가짜 남편이 멋있어서 봐준 줄 알아요
내가 그딴 말에 넘어갈 줄이야
집주인 하나는 잘 만났더라, 누나
무슨 말?
(복남) 내가 물어봤거든 백미러값 합의하러 왔을 때
누나랑 왜 결혼했냐고
그랬더니? 뭐랬는데?
뭐라고 하긴, 월세 받으려고 했다 하지
(지호) [픽 웃으며] 그랬겠지
그리고 존경한대, 누나를
뭘 해?
누나를 수비수로서 존경한대
나를 뭐로...
수비수로서 존경을 한다고?
[복남이 픽 웃는다]
[중계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비수로서 존경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고양이 울음]
[문이 달칵 닫힌다]
[세희가 캔을 달칵 딴다]
(세희) 재방인가요?
(지호) 아, 네, 그런가 봐요
[TV에서 중계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호가 숨을 씁 들이켠다]
아스널의 철벽은 역시 코시엘니죠?
네, 훌륭한 수비수죠
(세희) 아, 그럼 저는 주말이라 마트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 저도 같이 가요
저도 장을 좀 봐야 돼서
네, 그러시죠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지호)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복남이한테 들었는데요
저를 수비수로서 존경한다고 그러셨다던데
(세희) 아, 네
지호 씨랑 왜 결혼했냐고 묻길래
(지호)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뭐, 단어 그대로입니다
함께 살면서 존경한 세입자는 지호 씨가 처음이니까요
(세희) 분리수거를 한 번도 밀린 적이 없고 고양이 사료도 물론이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수비를 할 줄 아는 분이시니까
확, 마, 쓸어 뿌까! 응? [지석의 말리는 신음]
[밝은 음악]
[익살스러운 효과음]
(지호) 오, 오빠를
[긴장되는 효과음]
사...
[익살스러운 효과음]
사랑합니다
아, 그런 의미의 수비수요?
결혼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세희) 둘의 감정보다는 주변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한 제도니까
오늘 아침 같은 경우에도 저희 어머니를 적절히 수비해 주셔서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지호 씨 덕을 많이 보네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음, 저는 고양이 간식을 사러 가야 해서
네, 저는 쌀을
네
[잔잔한 음악]
(호랑) 지호, 너 회사에서 형부 별명이 뭔지 알아?
(지호) 아니, 뭔데?
좌 대출 우 고양
(호랑) 형부 좌뇌에는 대출 우뇌에는 고양이밖에 없어서
[웃으며] 진짜?
[웃으며] 야, 이게 지금 웃을 일이야?
- 그럼 넌 어디 있어? - (지호) 어?
(호랑) 아니, 좌뇌에는 대출 우뇌에는 고양이밖에 없으면
넌 형부 어디에 있는 거냐고
뭐, 그거야 뭐...
(호랑) 응, 마음?
[살짝 웃는다]
[호랑의 웃음]
- (세희) 네, 감사합니다 - (마트 직원) 고맙습니다, 예
(지호)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저 남자의 마음엔
내가 없다는 것을 안다
(세희) 아, 적립을 안 했네요
(마트 직원) 아, 예, 적립해 드리겠습니다
(지호) 나는 그냥 월세 수익을 보장해 주는
안전한 세입자
나는 그냥
자신의 비혼을 유지시켜 주는
훌륭한 수비수
[풀벌레 울음]
(지호) 이 남자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지호) 저...
세희 씨는
꿈 같은 게 있으세요?
네?
그러니까, 어, 인생의 목표 같은 거
목표요?
음
저는
그냥 제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
아무 일도요?
네
그냥 이대로 하루하루가 똑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잔잔한 음악] (세희) 출근해서 대출금 갚고
퇴근해서 맥주 마시며 축구를 보다 잠드는 것
그게 꿈이에요?
네
그렇게 살다가 제 집에서 죽는 게 목표니까
꿈
이겠네요, 그게
(지호) 저 남자의 마음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게
있기는
있을까?
[새가 짹짹 지저귄다]
[원석이 피식 웃는다]
(원석) 아, 무슨 넥타이까지 해?
거기 자율 복장이야 이런 거 안 해도 돼
그래도 첫 출근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첫인상이 반인 거 몰라? [함께 살짝 웃는다]
(호랑) 자, 됐다
[호랑의 웃음]
아, 근데 상훈이 나랑 페북 친구 끊었더라?
아, 그래?
(호랑) 혹시 깨울람 정리 안 좋게 끝난 거야?
[원석의 힘주는 신음]
아니야, 잘 정리됐어
진짜?
그럼, 상훈이랑 애들이 축하까지 해 줬는데, 취직했다고
- 그래? - (원석) 응
(호랑) 쯧, 아휴, 우리 석 이렇게 입혀 놓으니까
진짜 마크 주크박스 같다
- 랑아 - (호랑) 응?
행복해?
응, 너무너무 행복해
[호랑의 웃음]
그럼 됐어, 너만 행복하면
- (원석) 나 출근할게요 - (호랑) 갔다 와, 잘 갔다 와
(원석) 그거 해 줘야지, 뽀뽀
[잔잔한 음악] (호랑) 안녕
- (원석) 갈게 - (호랑) 갔다 와
[문이 달칵 열린다] [웃음]
[한숨]
[상구의 떨리는 숨소리]
나 회사 안 팔아도 되는 거야?
그럼 우리 이제 연애하는 거야?
응, 해
몇 가지 조건들만 지킨다면
조건?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이게 뭐야?
(상구) '비밀 유지 조항, 계...'
이게 제정신인가?
뭐냐고, 이게
뭐긴, 계약서지, 우리 연애에 대한
[흥미진진한 음악]
계약을 한다고? 뭘, 우리의 연애를?
(수지) 응
오케이, 진단 나왔어
그러니까 우리 수지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거야
(상구) 이런 계약 연애라는 거는 뭐냐면 아주 한가한 재벌 3세나
아니면 한류 스타 애들 있지? 그런 애들이 하는 거야
우리 같은 직딩들이 무슨 계약 연애람?
우리니까 더더욱 계약이 필요한 거지
(수지) 우리처럼 피폐하게 시간에 쫓기는 직딩들이야말로
서로의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상호 합의가 필요한 거 아니야?
아, 그렇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상구) 이 연애라는 게 무슨 돈 버는 사업도 아니고 계약서를 써?
그래서? 하기 싫어?
뭘?
아니, 누가 뭐, 하기 싫댔나?
그래, 그럼 봐 봐
(수지) 첫 번째, 집 밖에서만 만난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아, 나는 오케이 나도 원래 밖에 돌아다니는 거 좋아해
그리고 비타민 D를 생성하기 위해서는 광합성이 최고지
(수지) 두 번째, 사생활에 대해 절대 묻지 않는다
(상구) 사생활? 아니, 어떻게 사생활을 안, 안 물어?
우리가 사귀는 거 자체가 사생활이야
글쎄? 난 사귀는 사이라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공유하고 간섭하는 건
좀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마 대표님은 안 그래?
그냥 사귀기 싫으면 사귀기 싫다 그래
(상구) 왜 자꾸 사람을 빙빙 돌려 까는 거야? 시방, 어이구, 씨
[달콤한 음악] (수지) 아니야
나 마 대표님 좋아, 연애하고 싶어
그래서 이런 얘기도 하는 거야
원래 일하는 남자랑은 잠도 안 자는 게 내 룰인데
연애까지 생각하는 건 나한테 나름 큰 사건이거든
아, 그랬구나
아니, 내가 충분히 충분히 모든 걸 이해하지
근데 연인 사이에 정이 없잖아, 정이
마지막, 한 번 만나면
두 번 한다
[익살스러운 음악]
(상구) 야, 이게 아주 정이 넘치는 계약서였네, 이게
두 번, 세 번, 네 번, 나는 다
♪ 나는 할 수 있어 ♪
(수지) 그리고 100일마다 계약 갱신에 합의하는 걸로
아니, 왜 100일마다?
왜? 어렵나?
[야릇한 효과음]
[한숨]
(상구) 완전 나빠
진짜 상여우야
[한숨]
그래, 여기까지 했으면 됐어 여기서 끝내는 거야, 어?
마상구, 어머니가 예전부터 뭐라고 말씀하셨어?
'나쁜 여자는 절대 만나는 게 아니다'
더 이상 모양 빠지기 전에 여기서 끝, 스톱하자
(수지) 키스해도 돼?
[익살스러운 음악]
(상구)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우뇌에 렉이 걸린 거야? 왜 안 돌아?
지우라고, 지워! 좀 지워, 씨
하, 신이시여
자, 삭제, 삭제해야 돼
(수지) 마지막, 한 번 만나면
[야릇한 효과음]
두 번 한다
[놀라는 숨소리]
마상구, 너 지금 정신이 육체에 지배당하고 있는 거야?
네가 무슨 금수야?
정신 차려, 새끼야, 맞자!
아유, 아파, 아이고, 너무 셌잖아
[원석이 인사한다] (상구) 신이시여, 저에게...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요즘 세상 얼마나 무서운 세상...
아니야, 그래도 안 돼, 그러면 안 돼!
아,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렇게
(원석) 왜, 왜 저래요?
(상구) 어려운 질문을 던지시며...
(세희) 모르죠 [상구가 계속 중얼거린다]
이 회사 온 거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구)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정신 차려, 마상구!
어머니 말을 들어야지!
아, 아유, 싯 더...
[상구의 힘주는 신음]
[상구의 답답한 한숨]
(세희) 여기가 회의실이고 저기가 대표 방
그리고 저쪽이 직원들 휴게 공간입니다
(원석) 아, 예
(세희) 그리고 여기가 원석 님이 일하실 자리입니다
아, 예
(원석) 그럼 형님이 앞으로 제 사수신 거죠?
아니요
우선 저는 형님이 아니라 세희 님이고요
아, 예
(세희) 그리고 원석 님의 사수는
저분이십니다
[흥미진진한 음악]
[익살스러운 효과음]
(보미) 우선 기본적으로 데스크 세팅은 됐는데 그게 없네
혹시 쓰시던 테스트용 폰 있으세요?
네
그럼 기계식 키보드도 있어요?
네, 그것도 있어요
(보미) 음, 그럼 여자 친구는요?
네?
어, 여자 친구도 있어요
아, 있구나
(보미) 슬랙은 언제부터 썼어요?
뭐, 슬랙은 출시됐을 때부터 썼으니까 4년 정도 됐죠, 아마?
그럼 여친이랑은 얼마나 됐어요?
여친이랑은 7년 정도 만났는데...
아니, 근데 왜 계속 그런 걸 물어보세요?
업무상 필요해서요
궁금한 거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시고요
그럼 전 이만
[원석이 키보드를 탁탁 친다]
[의미심장한 효과음]
[한숨]
에이, 진짜 삭...
아휴, 흠, 씨, 쯧
아, 밥 먹은 거 얹혔나?
아, 죽겠네, 이거 그냥, 아휴
[안마기 작동음]
(상구) 아, 시원하다
원석아, 잠깐 좀 볼까?
[안마기 종료음]
(원석) 네
그, 네 친구 중에 그, 누구더라?
우지수? 우수수? 누구지?
수지요?
아, 수지, 그 친구 이름이 수지였구나
네 대학 동기랬나?
네, 뭐, 따지고 보면 수지랑 지호 때문에 랑이도 만났죠
(원석) 랑이가 걔네 보러 자기 학교보다 우리 학교를 더 자주 왔으니까
아, 그랬구나
걔가 뭐, 학교 다닐 때 뭐, 인기 많고 막 그랬나, 좀? 쯧
뭐, 들이대는 애들은 많았어요
아, 그래?
너는? 너는 뭐, 한번 악 안 들이댔어?
- 예? 제가요? - (상구) 어
아니, 뭐, 걔랑 저를 엮어요, 아니에요
아니, 왜? 너랑 대학교 동기고 네 여친보다 먼저 만났다며
(상구) 아니, 보니까 뭐, 이쁘장하니 뭐, 시원시원하던데?
뭐, 그렇긴 한데
[웃으며] 아유, 저는 그렇게 무서운 프로그램은 못 다뤄요
어?
(원석) 걔는 저 같은 똥멍청이 너드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소스 코드가 아니에요
수준이 달라요
씁, 그러면 나는 어때?
나 정도면 되려나? 어울려?
형이랑 수지요?
응
(원석) 어, 그러면 뭐, 바로 랜섬웨어 감염되는 수준?
완전 복구 불가능에다가 그냥 인생 망하는 느낌 좀 나는데요?
[오싹한 음악]
그래, 고마워, 어, 일 봐, 어, 일 봐
[원석이 픽 웃는다]
인생이 망한다고?
[우아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킥킥 웃는다]
[포크를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손님) 여기요
[호랑이 살짝 웃는다]
(호랑) 네, 손님
(손님) 씁, 이거 너무 싱거워요
그냥 아무런 맛이 안 나
[살짝 웃는다]
제가 맛을 한번 봐도 될까요?
(손님) 응
[살짝 웃으며] 저는 괜찮은 거 같은데
[헛웃음]
그러니까 뭔 말인지를 잘 못 알아듣네
(손님)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내가 맛이 없다고요, 어?
그러니까 이거 새로 만들어 주든가 아니면 환불해 주든가, 어? 쯧
(호랑) 네, 해 드릴 수는 있는데요, 손님
[손님의 헛웃음] 제 생각에는 손님이 좀 짜게 드시는 거 같은데?
어?
(손님) 아니, 이게 어디 터진 주둥아리라고 나불나불대고 앉아 있어?
(점장) 양 매니저 손님한테 그게 무슨 태도야?
(호랑) 죄송합니다
(점장)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래?
그날이야?
[한숨]
점장님
(점장) 뭐?
(호랑) 제가 한 번은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왜 맨날 뭐만 잘못하면 '그날, 그날' 하면서
제 죄 없는 자궁을 디스하세요?
[어이없는 숨소리]
뭐?
아니, 잘못은 제가 한 거지 제 자궁은 죄가 없거든요
딴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점장의 어이없는 한숨]
(점장) 양 매니저, 낮술 먹었어?
아니요, 안 먹었는데요 그날도 끝났고요
(호랑) 브레이크 타임도 끝나 가는데 저 가서 좀 쉴게요
하, 나 저...
[호랑의 한숨]
(호랑) 아이고
[호랑의 힘겨운 신음] (직원1) 매니저님, 왜 그러세요, 점장님한테?
그러다 잘리면 어쩌시려고
괜찮아, 잘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둘 거니까
네? 어, 혹시 어디 딴 데 가세요?
응, 조만간 이직하려고
[저마다 놀란다] - (직원2) 진짜로요? - (직원1) 어디로요?
현모양처로
[발랄한 음악] (직원3) 현모양처요?
(직원2) 아, 뭐, 어디 한정식 레스토랑으로 옮기시게요?
[픽 웃는다]
[문이 달칵 여닫힌다]
어머, 이거 이쁘다
[문이 스르륵 열린다] (원석) 랑아, 나 왔어요
(호랑) 어머, 오셨어요, 여보, 주세요
(원석) 어?
아, 그게 뭐야, 이상해
뭐가? 지금부터 연습해야지 결혼하고 안 어색하려면
[호랑이 살짝 웃는다]
이거 다 뭐야?
아, 나 오늘 반차 쓰고 웨딩 박람회 갔다 왔어
(호랑) 혼수랑 예식장이랑 스드메랑 할 거 엄청 많아, 엄청 많아
앉아 봐, 내가 설명해 줄게
- (호랑) 일로 와 봐, 앉아 봐 - (원석) 어, 어
아! 우리 웨딩 마일리지 가입해야 돼
웨딩 마일리지?
응, 혼수랑 예물이랑 다 하려면 큰돈 나가는데 가입해야지
(호랑) 씁, 아, 근데 그거 예식장 계약서 있어야 만들어 준다 그랬는데
예식장?
그러려면 예식장부터 얼른 잡아야겠다, 그렇지?
(호랑) 괜찮은 데는 벌써 내년까지 다 차 있을 거 아니야
씁, 아, 큰일이네, 이거
내년?
뭐, 내년 아니면 내후년에 하더라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잖아
[호랑이 살짝 웃는다]
랑아, 무슨 내후년이야?
(원석) 내후년에 우리가 어떻게 결혼을 해?
응?
[엘리베이터 도착음]
[비장한 음악]
[상구의 한숨]
[똑똑 두드린다]
(수지) 열렸어, 들어와
[비장한 숨소리]
(수지) 뭐지, 이 반응은?
거절인가?
이거 오다가 하나 샀어
블링블링 신상이래
(상구) 너처럼
나 핸드폰 멀쩡한데?
(상구) 그건 공적인 일에 쓰고 이거는
나랑만 통화할 때 쓰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아, 연애하자고 [흥미진진한 음악]
내가 네 조건 첫째, 둘째, 셋째 내가 다 들어줄게!
아휴
[픽 웃는다]
그 대신 너 이 번호는 아무한테도 알려 주면 안 돼
이 폰은 나하고만 연락하는 거야
이게 내 조건이야
(수지) 역시 협상할 줄 아네
[픽 웃는다]
번호는? 저장해 놨어?
[익살스러운 효과음]
[한숨]
이거는 너야
[아기 웃음 효과음]
[폭소한다]
뭐야, 그 웃음은?
상구 오빠
어?
뭐 해, 안 씻고? 시간 아깝게
우리 할 거 많잖아
[야릇한 효과음]
너, 이놈의 자식 오늘 제대로 혼나야 되겠어
내가 어른으로서 너를 아주 오늘 훈육시키겠어, 기다려!
(상구) 내가 10분 안에 씻고 올게, 아니, 5분
[수지의 웃음]
[포스기 조작음] (지호) 예가체프 두 잔
[밝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복남) 응
짝사랑 힘들지?
뭐?
결혼하고 남편 짝사랑하는 거 그것도 쉽지 않겠다, 누나
(지호) 뭔 소리야, 누가 짝사랑을 해?
티가 나?
(복남) [픽 웃으며] 나지, 그럼
누나 눈빛하고 남편 눈빛하고 다른데
내 눈빛은 어떻고 그 사람 눈빛은 어떤데?
누나 눈빛은
'제가 뭐든 해 드릴게요' 하는 눈빛이고
남편 눈빛은
'그냥' [지호의 놀라는 숨소리]
[웃으며] 똑같지?
너무 그러지 마
(복남) 혼자 용쓰다가 혼자 지쳐
마음은 주고받는 거지 퍼다 주는 게 아니야
[휴대전화 진동음]
여보세요?
아, 네
네, 어머니
[풀벌레 울음]
[심호흡한다]
[초인종이 딩동 울린다]
(명자) 어, 어, 어서 와
오느라 힘들었지?
(지호) 아유, 아니에요
(명자) 아, 그래도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전화했어
둘 다 못 오면 좀 그렇잖니
그래도 결혼하고 첫 제사인데
[명자의 웃음] (지호) 네
아버님은요?
(명자) 어, 곧 들어오실 거야, 들어가자
(지호) 네 [명자의 웃음]
(명자) 이리 와
[익살스러운 음악] (지호) 이걸 어떻게 혼자 다 하세요?
아유, 난 선수지
맏며느리 40년 차인데
와, 진짜 대단하세요
(명자) 아유, 우리 며늘아기 아까워서 어떻게 일 시키니?
아, 완전 소원이었는데
딸하고 같이 커플 룩 입는 거
[명자의 웃음]
딸요?
아, 그럼, 며느리도 자식인데 딸이지
(명자) 무뚝뚝한 남자들만 보다가
지호 네가 들어와서 내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웃음]
제가 뭐부터 하면 될까요, 어머니?
(명자) 어, 이거 다
[웃음]
[가방을 툭 내려놓는다]
(세희)
[휴대전화 진동음]
(지호)
[TV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희봉) 나는 저런 걸 왜 내보내는지 모르겠어 [남자1의 웃음]
(세희 고모) 아유, 참, 그냥 보면 되지 오빠는 꼭 트집 잡더라
(희봉) 내년에 제사 지내러 또 와라
[세희 고모의 웃음] - (아이1) 네 - (희봉) 응
[희봉의 웃음]
[희봉이 중얼거린다]
(세희 고모) [웃으며] 아유, 참, 오빠도 참
(명자) 고모, 사과 더 드려요?
(세희 고모) 어, 맛있네, 사과가 [명자의 웃음]
[익살스러운 효과음]
아, 네
[세희 고모의 웃음]
(세희 고모) 응, 우리 성미 일로 와
아이고
어유, 우리 성미 진짜 많이 컸죠?
응, 아유 [세희 고모의 웃음]
(세희 고모) 아유, 손이 진짜 야무지네
우리 성미, 숙모 하는 거 잘 봐
숙모 S대 나왔대
너도 이렇게 똑똑하고 야무지게 커야지, 그렇지?
(아이1) 네
아이고, 말도 잘하네 [명자와 세희 고모의 웃음]
(세희 고모) 아유, 이제야 진짜 친정 온 거 같다
맨날 나만 부려 먹더니
고모는, 제가 언제 부려 먹었다고, 참 [세희 고모의 웃음]
(세희 고모) 농담이에요, 언니
아휴, 나도 아들 있었으면 이렇게 며느리 들이는 재미 봤을 텐데
너무 부럽다
(지호) 재미?
(명자) 아유, 난 고모가 딸 있어서 얼마나 부러웠는데
근데 이젠 안 부럽지요
나도 딸 같은 며느리 있다
[명자의 웃음]
(세희 고모) [웃으며] 아유, 참
아유, 너희 어머니 진짜 좋은가 보다 [지호의 멋쩍은 웃음]
(명자) 아유, 그럼 좋죠 공짜로 딸이 생겼는데
아가, 이것도 부탁해
- 아, 네 - (명자) 응
아, 맞다, 제기도 닦아야지, 응?
(세희 고모) 제기 어디다 뒀어요?
제기 찾으러 가자 [명자의 힘주는 신음]
[잔잔한 음악]
[문이 달칵 여닫힌다]
[문이 스르륵 열린다]
(세희 고모) 어머, 세희야, 너 어떻게 왔어?
[세희를 툭 치며] 어머, 세희야 나 너 못 보는 줄 알았잖아
근데 어디서 저런 아내를 얻었어, 어? [명자의 웃음]
아유, 진짜 [세희의 한숨]
(희봉) 절들 해
[희봉의 한숨]
(세희 고모) 아버지, 오늘은 제삿밥이 더 맛있죠?
손주며느리가 손이 참 야무져요, 아버지
(희봉) 이제 당신도 절하지, 며늘아기도
네
(세희 고모) 어, 성미야, 그거 손 조심해
지헌이, 동생 잘 데리고 놀아
(아이2) 네
[한숨]
이건 제가 할게요
(명자) 어머, 얘
아유, 일 만들지 말고 나가 있어
제가 해요, 이건
(명자) 그래, 알았어
네가 네 색시 예뻐하는 거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어
도우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일만 더 만듭니다, 아저씨
(세희 고모) 그래, 얘, 네가 그러면 지호가 더 민망해져
그게 무슨...
나가 계세요
[옅은 한숨]
[풀벌레 울음]
[세희의 한숨] [고양이들의 울음]
(희봉) 아이고, 맛있게 먹어라
[희봉의 웃음]
그래, 그래, 그래, 옳지
[희봉의 멋쩍은 신음]
집은
대출금은 다 갚았냐?
갚고 있어요
(희봉) 나머지는 약속대로
내가 다 갚아 주마
그걸 왜요? 제 대출금을
네 집사람 알바 나간다면서
(희봉) 그것도 처갓집에 보기 안 좋고
약속대로 결혼하면 내가 집 해 주기로 한 거니까
[헛웃음]
약속
약속은 서로가 하는 거고요
(세희) 그렇게 한쪽에서 하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통보죠
착각이거나
아비가 결혼한 아들 집 좀 해 준다는데
(희봉) 그게 무슨 통보고 착각이냐?
(세희) 저희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나요?
[잔잔한 음악]
저는 저희가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인 줄 알았는데요
12년 전에 그러셨잖아요
'내 집에서 나가라'
'두 번 다시 내 집에 발도 들이지 마라'
제가 누구 때문에 집을 샀는데요?
그건
부모니까
너도 부모 돼 봐
그때는 부모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아니요
그때 아버지는 부모가 아니라 집주인이셨죠
'내 집'이라고 하셨잖아요
너한테는 이제
부모도 없는 거냐?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집주인 행세를 하면 집주인 대접밖에 못 받는 겁니다
(세희 고모) 우리 강아지들 많이 먹었어? [세희 고모의 웃음]
아유, 어이구, 어이구
[가족들의 웃음]
(명자) 고모, 이거
(세희 고모) [놀라며] 어유, 뭘 이렇게 많이 쌌어요, 언니?
[명자와 세희 고모의 웃음]
(명자) 우리는 식구도 없잖아요
(세희 고모) 아휴, 잘 먹을게요
[명자가 말한다]
(세희) 오늘
왜 오신 겁니까?
왜 오다니요?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간 거죠
그럼 저한테 먼저 전화를 하셨어야죠
아니
세희 씨는 바쁘니까 저라도 오라는데
(지호) 어떻게 전화를 해요?
그럼 적당히 자르시든가요
일이 있다고 하시든가
수비 잘하시는 분이 왜...
[잔잔한 음악]
(지호) 착한 며느리병
나는 아닌 줄 알았다
나는 이러지 않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왜 그랬을까?
[고양이 울음] [세희의 한숨]
[도어 록 작동음]
(지호) 착한 며느리병
이라는 말
아세요?
네? 무슨 병요?
결혼하고 나면 여자들이
시댁에 착하고 싹싹하고
말 잘 듣는 며느리가 돼야 할 것 같아서
무리하는 걸
그렇게 부른대요
착한
며느리병
일종의 인정 욕구네요
제가 전에 말했던 매슬로의 욕구 단계요
(세희)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다음 단계의 욕구들이 나타나기 마련이죠
결혼을 통해 소속감의 욕구가 충족되었으니
그다음 단계인 인정 욕구가 나타나는 건
뭐,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입니다
특히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기도 하고요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세요?
네?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 단계가 아니라
마음일 수도 있다고요
[잔잔한 음악]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들이니까
잘해 주고 싶은 마음
좋아하는 사람을
기쁘게,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오늘은 저 먼저 씻을게요
저기
지호 씨
저희 계약서에는 없었지만
오늘 겪은 부당 노동에 대해서는
(세희) 이걸로 갈음했으면 합니다
세입자분께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쓸쓸한 음악]
[고양이 울음]
[문이 달칵 여닫힌다]
(지호)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호) 저 남자의 마음엔
내가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냥 월세 수익을 보장해 주는
안전한 세입자
나는 그냥
자신의 비혼을 유지시켜 주는
훌륭한 수비수
(명자) 고모, 우리 딸 예쁘죠?
(세희 고모) 아유, 그러게
우리가 봐도 저렇게 이쁜데 세희가 보면 얼마나 이쁠까?
저렇게 싹싹한 아내를 얻어서 [명자의 웃음]
(명자) 그러니까요
[명자와 세희 고모의 웃음]
- (세희 고모) 언니는 정말 좋겠어요 - (명자) 아유 [명자와 세희 고모의 웃음]
(지호) 하지만 내 노동은
이런 뜻이 아니었다
내 수비는
이런 뜻이 아니었다
[휴대전화 조작음]
[통화 연결음]
저예요
네
(지호) 주신 이 갈음은
어떤 계산법인 거죠?
(세희) 아, 혹시 모자라십니까?
제가 카페 알바 시급이랑 초과 노동비까지 고려한 건데
네
모자라요, 아주 많이
아, 네
(세희) 그럼 얼마나 더...
(지호) 돈은 됐고요, 다른 걸로요
(세희) 다른 거라 함은...
똑같이 노동으로 갚으세요
네?
저희 집에 가서
똑같이 노동으로 갚으세요
(지호) 저희 집 이번 주에
김장해요 [밝은 음악]
[통화 종료음]
(지호) 더 이상 내 인생에
수비는 없다
(지호) 적어도 내 마음만큼은
공격수로 지킨다
[발랄한 음악]
(상구) 좌 대출 우 고양이인 놈이 그런 불합리한 제도를 왜 선택했을까?
예뻐
(세희) 그 예쁜 여자를 매일 볼 수 있다면?
무조건 한다
(지호) 너 사고 쳤구나? [고양이 울음]
(원석) 근데 지금은 안 싸워요, 싸우면...
(세희) 돌이킬 수 없을까 봐
(현자) 누가 온단 말이고?
(남자2) 어이, 추워, 문 닫아
[창문을 탁 닫는다]
(세희) 이제 시작합니다, 김장
[세희의 힘겨운 신음]
(종수) 희한하네
(세희) 마음에도 공간이 생긴다는 걸 이 결혼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세희) 지호 씨!
(지호) 그의 마음이 내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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