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처음이라 14
(세희) 지호 씨, 어디예요? 나 집 앞에 나왔는데
[정민의 개운한 신음]
안녕?
어, 안녕
[머뭇거리며] 여기 살아? 이 동네에?
어
넌 여기 어떻게...
난, 나는 그냥 여기 지나가는 길에...
그렇구나
며, 명함 줄까?
어?
아, 어
[멋쩍은 숨소리]
나, 나중에 차나 한잔하자
아, 내가 지금 겨, 경황이 없어 가지고
그래, 그러자
[차 문이 달칵 열린다]
[한숨]
[잔잔한 음악]
[한숨] [다가오는 발걸음]
(정민) 아, 작가님, 괜찮으세요?
어떻게, 화장실 잘 다녀오셨어요?
(지호) 네, 대표님은요?
속은 좀 괜찮으세요?
아...
저는 술이 다 깨 버렸네요
오늘 즐거웠어요, 대표님
저 가 볼게요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바로 앞이에요
저도 술 좀 깨게 걸어갈게요
아, 남편분이 데리러 나오시겠구나?
[픽 웃으며] 내가 눈치가 없었네
그럼 들어가세요
[통화 연결음]
(지호) 여보세요
(세희) 지호 씨, 어디예요?
(지호) 여기예요
네?
[통화 종료음] [세희의 한숨]
(세희)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경황이 좀 없었어요
미안해요, 전화하려고 했는데
들어가요
[물소리가 솨 난다]
[물소리가 멈춘다]
오늘 술이 좀 쑥쑥 들어가더라고요
(지호) 오래간만에 마셔서 그런가?
그러셨군요
(세희) 같이 드셨어요?
그 제작사...
네
대표님도 술을 잘하시더라고요
(세희) 아, 찬물 드시지 말고 이거 드세요 내일 속 쓰려요
[잔잔한 음악]
이거 침대 옆에 두고 주무세요
새벽에 숙취 때문에 깰 수도 있으니까
따뜻하네요
감사합니다
[고양이 울음] (지호) 주무세요
잘 자
[고양이 울음]
(세희) 지호 씨
네?
오늘도
같이 잘까요?
아...
아니요, 오늘은 좀...
아, 네
죄송합니다
아니, 아,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좀 피곤해서요
그런 날은 코를 더 심하게 골거든요
알겠습니다
차 더 끓여 놓을 테니까 필요하면 더 드시고요
네
[문이 달칵 열린다]
[한숨]
[잔잔한 음악]
근데 전 비혼입니다
했었어요, 한 번, 결혼 같은 거
(세희) 인생에서 이 집과 고양이, 저 자신
이 세 가지만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귀다가 아이가 생겼었어요
(세희) 결혼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둘의 감정보다는 주변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한 제도니까
아이가 잘못되면서 헤어졌어요
그 집안에서 반대하기도 했고
저는 그냥 제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호) 어떤 제작사 대표님을 만났어요
흔치 않은 분이셨어요, 그 대표님
단단한데 뭐랄까
그 단단함으로 주위를 해하는 게 아니라
품어 줄 것 같은
나무 같은 사람이랄까?
[휴대전화 진동음]
여보세요?
(세희) 접니다
네, 알아요
늦었는데 죄송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네
(세희) 글 다시 쓰게 되신 거
축하드려요
(지호) 이 사람 고민하고 있다
다시 시작하셔서
(지호) 두려워하고 있다
정말 다행입니다
(지호) 불안해하고 있다
고맙습니다
잘 자요, 지호 씨
네
세희 씨도요
[통화 종료음]
[세희의 한숨]
(미용사) 평소처럼 다듬어 드리면 되죠?
아니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출입문 종이 딸랑 울린다]
[호랑의 어색한 웃음]
(상구) 아, 오셨어요? [상구의 멋쩍은 웃음]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바쁘신데
아이, 뭐, 대표가 바쁠 게 뭐가 있어요
직원들이나 바쁜 거지
[상구가 살짝 웃는다]
와, 호랑 씨 커트하셨네요?
아...
네, 기분 전환 겸
되게 잘, 잘 어울리시네요
[상구의 멋쩍은 숨소리]
[출입문 종이 딸랑 울린다]
(호랑) 원석이요
진심인 거죠?
[상구의 난처한 숨소리]
말씀해 주세요
저도 마지막으로 정리를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근데 마 대표님밖에 여쭤볼 사람이 없어서
진심이죠, 원석이?
현재로서는
예, 그런 거 같아요
[잔잔한 음악]
그럼
제가 붙잡아도
안 돌아오겠네요, 그렇죠?
음...
원석이는
자기가 호랑 씨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래서 놔줘야 된다고 결정을 내린 거 같고요
자기가 놓고 싶은 건 아니고요?
(상구)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힘들게만 한다고 생각이 들면
자기 자신이 미워지나 봐요
비참하기도 하고
네
그냥 우리가 여기까지인 거죠
(영효) 대표님
[영효의 웃음] (상구) 아, 신 대리
- (영효) 아, 예, 네 - (상구) 어, 잘 지냈어요?
(상구) 아, 회사 들렀다 가는 길이에요?
(영효) 아, 네, 저 삼사분기 재무제표 건으로 미팅 있어서요
[상구의 옅은 탄성]
저 인사 안 시켜 주세요?
어, 혹시 대표님...
(상구)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저, 내 제일 친한 동생 여자 친구분이 아니고
아, 내 여자 친구의 그, 절친이셔
호랑 씨, 양호랑 씨
(영효) 아, 대표님 여자 친구분의 절친이시구나
[영효의 옅은 웃음]
안녕하세요
저는 마 대표님 회사 재무 쪽 맡고 있는 신영효라고 합니다
아, 네
저는 명함이 없어서
(호랑) 먼저 가 볼게요, 대표님
아, 그래요, 호랑 씨
연락할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네 - (상구) 네, 네
(영효) 네
[잔잔한 음악]
[한숨]
마 대표님한테 들었는데 신림동 가신다면서요?
- 네 - (영효) 태워 드릴게요
이 동네 버스 되게 늦게 와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안 그러셔도
(영효)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마 대표님이랑 오래 알고 지냈어요
[영효의 웃음]
[한숨]
(영효) 집이 그쪽이신가 봐요?
(호랑) 아, 아니요, 그냥
짐을 좀 가져와야 될 게 있어서요
(영효) 그러시구나
근데 호랑 씨 저 진짜 누군지 모르겠어요?
(호랑) 네?
결혼하고 싶어요
네? [영효의 웃음]
아이, 결말애요, 우리 채팅했었잖아요 제 호감 받아 주셔서
아...
(영효) 사실 저요, 아까 진짜 깜짝 놀랐었어요
저는 호랑 씨를 한눈에 보고 알아봤었거든요
[어색하게 웃으며] 네
(영효) 제가요, 그거 앱 깔고 처음으로 대화한 분이 호랑 씨였는데
아예 그 뒤로는 답문이 없으셔서
'이건 레알 빼박캔트 까였구나' 그러고 있었죠
[영효의 웃음]
저기...
그때는 저도 그냥 처음 가입해 본 거라서
별생각 없이 답문한 거였어요
(호랑) 마 대표님네 앱이라서
(영효) 어? [익살스러운 음악]
지금 이거 최소 선 긋기 각인 거 인정?
- (호랑) 네? - (영효) 뭐야?
(영효) 지금 그 당황하는 부분은 인정하는 부분?
레알 반박 불가인 부분?
[호랑이 벨트를 달칵 푼다]
(호랑)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영효) 아, 네, 조...
조심히 가요
[애잔한 음악]
[문이 달칵 여닫힌다]
[잔잔한 음악]
네 말이 맞아
나 이제 내 마음한테 솔직해져 보려고
[차 문이 달칵 열린다]
여긴 왜...
[영효의 멋쩍은 웃음] 안 가셨어요?
(영효) 아니, 짐을 가지러 가신다길래 무거우실 거 같아서요
아까 보니까 컨디션도 안 좋으신 거 같고
네? [영효가 살짝 웃는다]
(영효) 주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호랑) 아니요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럽죠
호랑 씨 지금 딱 봐도 몸살 각이에요
몸살인 거 좌로 인정 우로 인정 앞구르기 인정?
네? [영효의 웃음]
(영효) 아니, 곧 쓰러질 거 같은 얼굴인데 어떻게 제가 모른 체하고 그냥 갑니까
주세요, 호랑 씨
그럼 그럴까요?
[영효의 힘주는 신음]
[차 문이 달칵 여닫힌다]
(정민) 고소는 앞서 말씀드린 방식으로 진행될 거고요
그 조사 과정에서 작가님도 직접 그 피해자 조사를 받으셔야 될 거예요
그 점 괜찮으세요?
네, 이미 알고 있어요
다행히 조감독이랑 주고받은 문자 통화 내역이 있어서 도움이 될 거예요
(정민) 다만 저쪽이 언론 플레이를 시작하면 좀 시끄러워질 거예요
더군다나 이 방송계 쪽 사안이라
네, 시작하면 각오해야죠
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할게요
아, 그리고
(정민) 이건 계약서입니다
[살짝 웃으며] 아, 지금 당장 사인하실 필요 없고요
그냥 가져가서 꼼꼼히 살펴보시고
수정 요구 사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지호) 어, 근데
금액이...
아, 씁, 좀 더 협의가 필요할까요?
(정민) 아, 예상하신 금액보다 많이 모자라는구나
(지호) 아니요
너무 많은 거 같은데요?
[한숨]
작가님
그러시면 안 돼요
네?
놀라더라도 혼자 나가서 몰래 놀라셔야지
아니, 계약하는데 적군한테 그렇게 자기 수를 다 보이시면 어떡해요?
대표님은
적군이 아니잖아요
[잔잔한 음악]
[살짝 웃는다]
많은 거 아닙니다
(정민) 어, 저희 회사 기준 신인 작가 적정선이에요
사실 저희 회사는 그렇게 많이 작가들을 계약하지 않아요
대신 한번 하면
이렇게 제대로 합니다
오랫동안 함께하실 분이라는 생각이 들면요
대표님
네?
오늘
밥 먹을까요, 우리?
[살짝 웃으며] 좋아요
[잔잔한 음악]
(정민) 작가님, 아침에 해장은 하셨어요?
아...
따듯한 꿀물을 좀 마시고 잤더니 괜찮더라고요
아, 남편분이 타 주신 거예요?
[정민의 웃음]
네
남편이
타 줬어요
[픽 웃는다]
(지호) 계약 전에 궁금한 게 있어요, 대표님
[정민의 옅은 한숨]
(정민) 네, 작가님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분요
결혼할 뻔하셨다던
[한숨 쉬며] 네
다시 만난다면
어떠실 거 같아요?
다시 만나도
사랑
하실 거 같으세요?
아, 이게
계약이랑 관련된 질문인가요?
네
계약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이에요
[한숨]
사실은
만났었어요
그 친구를
[의미심장한 음악]
작가님 동네에 간 날
그날, 우연히
(정민) 그래서 지금 작가님 질문이 참
더 묘하게
느껴지네요
저도 그날
데리러 나왔어요
세희 씨가
(상구) 내가 볼 때 넌 세상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어
회사 핑계로 엄마 방패로
그렇게 세상을 비난만 하고 살았어
한 번쯤은 제대로 세상을 붙잡고 서서
얼굴 마주 보고 말해야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시작하면
난 네 옆에서 버틸 준비가 돼 있어
[자동차 엔진 가속음]
[타이어 마찰음]
(박 대리) 어
오늘도 케이 벤처스 갔다 오는 길이야?
네, 추가 투자 건으로 논의할 게 있어서요
(박 대리) 음, 그래, 수고
(수지) 아, 저, 박 대리님
저랑 담배 한 대 피우시겠어요?
- 지금? - (수지) 네
아니야, 난 괜찮아
[수지가 라이터를 탁 켠다]
[수지가 숨을 후 내쉰다]
할 말이 뭔데?
(수지) 제가 이 팀으로 온 게 15년도니까
대리님이랑 일한 지 벌써 3년이나 됐네요
근무 일수로 치면 800일이고 시간으로 치면 7,200시간이더라고요
- 그래? - (수지) 네
근데 그 긴 시간들이 저한테는 대체로 끔찍했어요, 대리님
- 끔찍? - (수지) 네
(수지) 회식이 있는 날이면
오늘은 대리님 섹드립을 또 어떻게 웃어야 할까?
휴가 다음 날이면
'남친이랑 어디 갔다 왔어?' 라고 묻겠지
그럼 또 뭐라고 답할까?
몸이 안 좋은 날이면
'또 그날이냐?'라고 하실까 봐 아픈 척도 못 했어요
이렇게 대리님을 생각하면 끔찍하고 아픈 기억들밖에 없네요
근데 7,200시간을 같이 일한 동료인데 너무 슬프지 않아요?
씁, 하
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제가 그동안 받았던 상처들에 대해서
사과해 주세요
[잔잔한 음악] 뭐?
사과를 받아야겠어요, 제가 대리님한테
(수지) 저희 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해 주세요
(박 대리) 사과?
저는 정말
대리님과의 이 끔찍한 관계를 이제 끝내고 싶어요
오늘 제가 제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했으니까
대리님도 진심을 보여 주세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상구) ♪ 낙엽이 우수수지 떨어지면 ♪
[상구가 흥얼거린다]
어?
[밝은 음악]
[상구의 행복한 신음]
[상구의 웃음]
- (상구) 수지야 - (수지) 응?
(상구)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수지) 아니
반가워서
[수지의 행복한 신음]
(상구) 왜 이렇게 귀여운데?
[함께 웃는다]
(수지) 마 대표 말이 맞았어
피하거나 욕하기만 했지
정작 박 대리 얼굴 보고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더라고
그 사람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한 가정의 가장인데
[수지가 살짝 웃는다]
(상구) 야, 우리 수지 진짜 멋있다
이놈의 자식, 일로 와 봐!
[상구의 힘주는 신음]
아, 왜 이래?
아, 이거 아니야?
어, 아니야
(상구) 아니구나, 아직 아니야
♪ 낙엽이 우수수지 떨어지면 ♪
[상구가 흥얼거린다]
고정민? [세희의 비명]
[세희의 놀란 숨소리]
[잔잔한 음악]
정민이?
[한숨]
[새가 짹짹 지저귄다]
[상구의 한숨]
(상구)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제수씨, 아니
지호 씨는 알고?
하긴 어떻게 알겠냐? 이 기가 막힌 상황을
그래서 뭐, 같이 일한대?
아마도
(상구) 네가 먼저 그, 얘기해야 되지 않을까?
그냥 오다가다 일하는 사이도 아니고
제작사 대표랑 작가면 서로 볼 일이 많을 텐데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하는 건지
예전에 만났던 사이였다고
아니면
내 오기와 치기로
얼룩진 시간들이었다고
뭐라고 얘기해도 상처받을 거야
지호 씨는
(세희) 투명한 사람이니까
그 투명함에 내 얼룩을 담기는
싫어
아니, 나 지호 씨 얘기한 거 아닌데
나 정민이 얘기한 거야
[잔잔한 음악]
(상구) 정민이한테 지호 씨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거 물어본 건데
너 정민이 못 잊은 거 아니었어?
그래서 결혼도 그렇게 계약으로 한 거고
어차피 지호 씨는
그냥 계약 관계잖아
너한테 그냥
세입자 아니었어?
[상구의 한숨]
정민이를 걱정한 게 아니었구나
(세희) 어쩌면 살면서 한 번쯤은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세희) 연습도 했었다
'잘 지냈니?'
'오랜만이네'
하지만 만난 순간부터
(세희) 내가 걱정했던 건
단 한 사람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세희) 내 인생에 남은 건 이제
마르고 마른 잎들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남은 시간은 그 잎들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혼자 조용히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세희)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었는데
(세희) 누군가를 울리는 일은
(세희)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비원) 어, 저기 오네, 401호!
[원석이 키보드를 탁탁 친다]
(보미) 세희 님은요?
아, 먼저 퇴근했어요
전 여친 때문에 회사 프로그램 다 날릴 생각이에요?
꼴랑 입사 2주 차에?
네?
(원석) [키보드를 탁탁 치며] 아, 죄송합니다
아니,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몰라요?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제 얼굴에요? 어디...
(보미) 연애하다 보면 언젠간 다 헤어지는 거지
뭘 그렇게 티를 내요?
연애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한 번 했는데요
아, 그래요?
그럼
그것도 처음이었겠네요?
[익살스러운 음악] 네? 뭐, 뭐가 처음...
뭐긴 뭐예요? 실연요
- (호랑) 수고했어 - (직원1) 가세요
(직원2) 매니저님, 안녕히 가세요
[메시지 알림음] (영효)
(영효) 호랑 씨, 그날 잘 들어가셨어요?
오늘 안 바쁘면 같이 저녁 식사 어떠실까요?
[고민하는 숨소리]
[휴대전화 조작음]
[잔잔한 음악]
호랑 씨
(영효) 저 안 늦었죠?
답문 주시자마자 바로 시동 걸었는데
(호랑) 네
배고프시겠다, 뭐 드실래요?
밥은 됐고요, 그냥 간단하게 맥주나 한잔하시죠
[당황하며] 맥주요?
[영효의 웃음]
(영효) 그건 저도 굉장히 동의하는 부분
[발랄한 음악] [영효의 웃음]
가요
[영효의 옅은 웃음]
[캔을 달칵 딴다] [영효의 탄성]
(영효) 자, 건배
와, 목이 되게 많이 마르셨나 보네
[영효의 시원한 숨소리]
그날은 잘 들어가셨죠?
저요
7년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호랑) 사실 태워 주신 날도
둘이
같이 살던 집에 짐 가지러 간 거였고요
아...
[영효가 살짝 웃는다]
(영효) 근데
어떻게 그렇게 짐이 없어요?
[캑캑거린다]
(호랑) 네?
(영효) [멋쩍게 웃으며] 하긴
오래 만났어도 막상 정리할 때 보면 짐이 얼마 없더라고요
아, 저도 첫 여자 친구랑 7년 사귀었었거든요
[영효가 살짝 웃는다] [잔잔한 음악]
[영효의 시원한 숨소리]
(호랑) 근데 왜 헤어지셨어요?
저희는 그냥 뭐 결혼 문제 때문에 많이 싸웠었어요
(영효) 이게 또 연애랑 결혼이랑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영효가 살짝 웃는다]
[영효가 혀를 쯧 찬다]
그래서 어떻게 극복할 계획이에요?
네?
실연요
어떻게 극복할지 계획은 세워 두셨어요?
아...
아직까지는 뭐, 계획이...
뭐, 시간이 약이겠죠
시간이 어떻게 약입니까?
시간은 그냥 시간이지
(영효)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에바 쎄바 참치 같은 문구예요
이런 관념적인 문구에 절대 속으시면 안 돼요, 호랑 씨
에...
에바 쎄바 뭐요? [영효의 한숨]
(영효) 사람은요, 어, 간절히 바라는 거는
입 밖으로 내뱉어야지 이루어진다 그랬거든요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거울 보면서 소리 내면서 얘기했었어요
뭐라고요?
'나는 잊을 수 있다'
(영효) '나는 실연 극복한다'
'존버 정신으로 영정각 탈주해서 최상타치한다'
[익살스러운 효과음]
저기, 제 앞에서 그런 사자성어 같은 거 쓰지 마세요
저 무식해서 잘 못 알아들어요
아, 이거, 이거 사자성어 아닌데 이거 급식체인데
네?
[함께 웃는다] [잔잔한 음악]
(호랑) 아니, 그런 말을 왜 써요?
기분 좋아지잖아요
음, 젊어지는 것도 같고
[영효의 웃음]
[픽 웃는다]
(용석) 그...
일전에도 온 적이 있었는데
(경비원) 이거 401호 거라고 웬 남자가 맡기고 가던데
(세희) 예
(용석)
네, 압니다
짐 놔두고 가신 거
(용석) 네
작가님이 결혼을 하신 줄은 몰랐네요
[용석의 떨리는 숨소리]
죄송합니다
제가 그날 진짜 너무 취해서 기억이 잘...
아, 진짜입니다, 믿어 주세요
제가 어떻게든 보상하겠습니다
합의금은 원하시는 대로...
아, 그러니까 일단 고소 취하부터 어떻게 좀...
아, 제가 지금 작품도 또 들어가야 되고
네? [의미심장한 음악]
(지호) 가도 가도 끝이 안 나는 터널을 혼자 걸어가는 꿈을 꿨어요
아, 저는, 그러니까
아시는 줄 알고...
(용석) 그, 작가님이랑 얘기해야 할 부분인 거 같네요
그,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작가님이랑 얘기할게요
[긴장되는 음악]
앉아
나랑 얘기해
똑바로, 다
(지호) 감사합니다
어려운 이야기 해 주셔서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세희
다시 만나도 사랑할 것 같냐는 질문
제 대답이 '그렇다'였으면
작가님의 결론은 뭐였죠?
그랬다면
대표님과 적군이 되었겠죠
음
그럼 우리 싸우는 거였나요?
(정민) 막 여기서 머리채 잡히고?
[함께 살짝 웃는다]
기다렸겠죠
세희 씨 마음을
음, 기다린다
왜요? 계약 결혼이라서요?
진짜 결혼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부부라고 해서
서로의 마음을
당연히 다 가져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음, 그래요?
근데 사실 결혼이라는 건 그런 거 아닌가요?
[잔잔한 음악]
(정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다 가진다는 걸 제도적으로 공식화해 놓는 거
그래서 마음이 변하더라도 떠나기 어렵게 묶어 두는 거
모르겠어요
제가 결혼은 처음이라
사랑도
그래서 모르는 게 많은데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
마음은 뺏고 잡는 게 아니잖아요
오는 거지
제가 아는 거
세희 씨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잔잔한 음악]
[정민이 흐느낀다]
(정민) 잘 있어
돌아가서 아무 일 없던 듯이 살아
대신 이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마
넌 그럴 자격 없으니까
그러게
마음은 뺏고 잡는 게 아니었는데
[살짝 웃으며] 그걸 벌써 알다니
부럽네, 작가님
[차 문이 달칵 열린다]
(정민) 통화가 길어지셨네요?
(비서) 아, 네, 변호사님인데요
윤 작가님 고소 건 관련해서 문제가 좀...
네? 무슨...
그게...
그 조감독이 고소 취하를 사정하러 갔다나 봐요
(비서) 근데 두들겨 맞았대요, 그것도 많이
누구한테요?
윤 작가님 남편분한테
네?
아, 걔가 사람을 때렸다고요?
[직원들이 시끌벅적하다]
- (팀장) 박 대리, 올해 선방했다 - (박 대리) 아유
- (팀장) 내년에도 잘하자, 응? - (박 대리) 알겠습니다
(팀장) 야, 자, 자, 우리 건배 한번 할까?
그, 잔들 채우고
어, 없는 사람은 채우고
그래, 박 대리가 건배사 한번 하자, 응?
알겠습니다 [박 대리의 힘주는 신음]
(박 대리) 자, 2017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 존경하는 팀장님 사랑합니다
[직원들의 웃음]
그리고 우리 사업 지원 팀 식구들도 올 한 해 너무 고생 많았습니다
우리 존경하는 팀장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팀장님' 하면
'사랑합니다', 어? 아셨죠? [직원들의 웃음]
어? [수지의 웃음]
아, 맞는다, 사과
우 대리, 미안해
그동안 내가 너무 짓궂었지?
한잔 탁 하고
[혀를 똑 튕기며] 응? 싹 잊자, 알았지?
- (직원3) 무슨 일 있어? - (직원4) 몰라 [의미심장한 음악]
자, 팀장님!
(직원들) 사랑합니다!
(팀장) 나도 사랑합니다!
[직원들이 시끌벅적하다] (직원5) 마셔, 마셔, 아이
아, 이거 마셔, 어?
야, 모자라? 2차? 2차 어디로 갈까, 어?
[시원한 숨소리] [직원들이 저마다 말한다]
(직원6) 두 분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박 대리) 아니, 아무 일 없었는데
먹어, 인마
음, 어유, 시원해
(직원5) 마셔, 마셔
(박 대리) 한잔 드시죠 [직원들이 저마다 말한다]
(팀장) 자, 난 먼저 갈게
[저마다 인사한다] (박 대리) 들어가십시오, 팀장님
(팀장) 내일 늦지들 말고
(박 대리) 알겠습니다!
- (직원7) 들어가세요, 내일 봐요 - (직원8) 어, 들어가, 어, 어
[박 대리의 나른한 신음]
(직원6) 대리님, 저희끼리 2차 어떠세요?
(박 대리) 콜!
[의미심장한 음악] 육회 먹고 노래방 3차 콜?
(직원6) 노래방 콜
(박 대리) 나 잠깐 사무실 좀 갔다 올게
어, 딱 기다려
- (직원6) 다녀오십시오 - (직원7) 아유, 갑시다
- (직원6) 육, 육횟집으로 오세요 - (직원7) 갑시다
(박 대리) 알았어, 알았어
[직원들의 탄식] (상구) 앗싸, 무인도
[휴대전화 진동음] (직원9) 야, 아, 아이...
다음 누구야? 보미 님 차례야?
빨리 보미 님 해
[속삭이며] 어, 아기야
[우아한 음악] 말은 사람한테 하라고 만든 거지?
그렇지
말이 안 통하면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그럼, 말이 안 통하면 그거 사람도 아니야
동물이나 뭐, 벌레나 물벼룩 같은 거야
(상구) 근데 갑자기 왜?
오빠
내가 시작하면 버텨 준다는 말 진심이야?
그럼, 진심이지
(직원9) 아, 대표님, 뭐 해요? 주사위 던지다 말고
(직원10) 대표님, 빨리 던지세요
(직원9) 아이, 대표님
(수지) 그래, 주사위 놀이 잘하고
사랑해
[통화 종료음]
[통화 종료음] 여보세요?
[속삭이며] 여보세요, 아기야
[숨을 씁 들이켠다]
뭐지, 이 유언 같은 말은?
[긴장되는 음악] (직원9) 대표님, 대표님 차례예요, 뭐 해요?
(직원10) 빨리하세요
[직원들의 놀라는 신음]
- (직원9) 서울이야? - (상구) 설마...
(직원9) 아, 망했네
(상구)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보미)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대표님, 지금 서울을 사야 된다니까요
[보미의 탄식] [문이 스르륵 열린다]
저 쫄보, 진짜
[우아한 음악]
[박 대리의 한숨]
아, 우 대리는 풀 숏을 올려야 되는데 [수지의 웃음]
(박 대리) B, B? 노, 노, 노
꽉 찬 A, 어? 꽉 찬 A [직원들의 웃음]
진짜 내가, 어? 결혼만 안 했으면 말이야
내가 우 대리랑, 어? 같이, 어? 할 거 하고 [직원들의 웃음]
(박 대리) 응? 우 대리, 왜 들어왔어?
해결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박 대리) 음, 그래?
[엘리베이터 도착음]
[엘리베이터가 스르륵 열린다]
진호야! [박진감 넘치는 음악]
(박 대리) 뭐?
[박 대리의 아파하는 신음]
[숨을 후 내뱉는다]
(원석) 음, 굴립니다
자
따따따따, 팍
자, 타이베이 삽니다
아, 그거 내가 사려 그랬는데
(직원9) 아, 진짜 호랑이 없는 굴에서 토끼가 왕 노릇 한다더니
(직원10) 뭐야, 이거 다 원석 님 땅이야?
(직원9) 어
이야, 우리가 진짜 호랑이 새끼를 키웠네
(보미) 그러니까 아까 그걸 딱 샀어야죠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고 하는데
(원석) 이거 그만해요, 이제 [익살스러운 음악]
(직원10) 아, 왜요? 한창 재밌는데
아, 이게 뭐가 재밌어요?
애들도 아니고 맨날 이런 거나 하고 있고
(원석) 우리 그냥 술 마시러 가요 내가 오늘 다 쏠게요
- (직원9) 아, 진짜요? - (직원10) 쏜다고요?
네, 제가 다 쏠게요 오늘 끝까지 한번 달려 봅시다
[직원10의 탄성] (보미)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원석) 아니, 보미 님도 같이 가시지
(보미) 됐어요,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아니, 이 시간에 무슨 약속이 있으시길래?
저와의 약속이랄까?
재밌게 노세요, 먼저 갈게요
[문이 스르륵 열린다] 아, 오늘 금요일이지?
(직원9) 아, 보미 님 또 이태원 가나 보네?
[문이 스르륵 닫힌다] (원석) 이태원요?
(직원10) 아, 거기 유명한 피규어 숍 있거든요
금요일마다 자기와의 약속이라면서 가서 덕질하나 봐요
아, 뭐, 잘 어울리기는 하네요
아, 그럼 우리 이태원 얘기 나온 김에 클럽이나 갈까요, 남자들끼리?
[흥미로운 음악] 크, 크, 크, 크, 클럽요
- (직원10) 클럽... - (원석) 예, 클럽
(원석) 아, 멀쩡한 몸뚱이 놔둬서 뭐 해요?
솔로일 때 원 없이 놀아야죠 안 그래요?
[직원10의 탄성]
원석 님은 클럽 많이 가 봤나 봐요?
아니요, 저도 아직 한 번도 안 가 봤는데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의 환호성]
(직원9) 아, 귀에서 피 날 것 같아요!
(원석) 나도 이런 분위기인 줄 몰랐어요!
아! 아, 나 눈에서 피 날 거 같아
[원석의 시원한 숨소리]
(원석) 우리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서 시원하게 한번 놀죠
[직원들의 당황한 신음]
(직원10) 아니요 [직원9의 거부하는 신음]
- (직원10) 먼저 가세요, 예 - (직원9) 먼저 가요, 금방 갈게요
(원석) 그럼 제가 밑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바로 오세요
[직원9가 호응한다] (직원10) 아, 예, 이거 마시고 갈게요
그럼 난 내려가 있을게요
(직원들) 네
[신나는 음악이 연신 흘러나온다] [사람들의 환호성]
(원석) 양호랑, 나 너 잊을 거야
양호랑, 나 너 잊을 거야!
너 잊을 거야!
가자, 오! [사람들의 환호성]
[원석의 거친 숨소리]
오!
[원석의 거친 숨소리]
[사람들의 환호성]
[원석의 거친 숨소리]
[반짝이는 효과음]
[원석의 거친 숨소리]
[원석의 놀라는 신음]
(남자1) 와, 쟤가?
(남자2) 아, 쟤 뭐야?
어, 보미 님!
[사람들의 탄성] (남자1) 내가 더 낫겠다, 내려와라!
야, 나 여기 너무 무서워!
그럼 우리 PC방 갈래?
가자
아니, 이...
약속 있으시다면서요
스테이지 위에서는 입 말고 몸으로 대화하는 겁니다
몸요?
[사람들의 환호성]
(현자) 세희 씨
내 부탁 딱 두 개만 해도 되겠습니까 [잔잔한 음악]
(현자) 지호가 나중에 글 쓰고 싶다 하면
글 쓰게 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나중에라도 다시 글 쓸 수 있게 [지호가 흐느낀다]
(현자) 지 꿈 포기 안 하고
엄마처럼 안 살구로 그리해 주소
[한숨]
[통화 연결음]
(정민) 여보세요
(지호) 아, 저기
혹시 이 책은 없나요?
(서점 직원) 아, 이거 오늘 하나 있던 거 나갔는데
아, 감사합니다
[휴대전화 진동음]
응?
네
안녕하세요, 아버님
[정민의 한숨]
(정민) 좀 많이 때렸더라?
피해가 갈까?
지호 씨한테
(정민) 괜찮을 거 같아
마침 그쪽 대표랑도 방금 만나고 왔고
친분이 좀 있어
일 더 크게 만들진 않을 거야
그래, 고맙다
저기...
내가 지호 씨 남편인 거
그게 너한테 영향이 있을까?
지호 씨 글 쓰는 일에
그래서 찾아온 거야?
내가 옛사랑의 앙금 때문에
혹시라도 작가님 일을 망칠까 봐?
해할까 봐?
어
[한숨]
[잔잔한 음악]
나 결혼할 때 지호 씨 어머니께서 부탁하신 게 있어
지호 씨가 다시 글 쓰고 싶다고 했을 때
글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해 달라고 그러셨어
[쓴웃음]
(세희) 근데 사실 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폐가 되지 않겠다고만 약속했어
근데
너는 알잖아
지호 씨가 꿈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구나
12년 만에 만난 옛 연인한테 한다는 말하고는
좀 밉다
미안해
(세희)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글 쓰는 걸 왜 그만두게 됐는지 오늘 알게 됐는데
휘두를 수 있는 게 주먹밖에 없더라고
좋은 제작자라고 들었어
정민아
내 아내가 아닌
작가로 봐 달라고
부탁할게
[잔잔한 음악]
[한숨]
(세희)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버스 엔진음]
(세희)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세희)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12년 동안 내 마음속에서 살아남았던 말들이
어느 순간 이렇게 없어졌을까?
그렇게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던
말들이었는데
[정민의 한숨]
(정민) 나도 물어볼 게 있어
너 작가님한테 고백해 본 적 있어?
어?
고백
'좋아한다', 아니면...
뭐, 그런 비슷한 고백 같은 거 해 본 적 있냐고
아니, 난 뭐, 굳이 그런 걸 말로...
없구나?
(정민) 그거 알아?
너 나한테도 한 번도 해 준 적 없다
고백
[엘리베이터 도착음]
가 볼게
(정민) 그래
말도
사람 마음에 가야 살아남는 거 알아?
입 밖으로 뱉어야만 마음에 가서 닿는다고
(세희) 우연이 아니었다
(지호) 그러니까 이제
일부러 선 긋는 거
하지 마세요
(세희) 그 말들 때문이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호) 저 중의 어떤 애는 그냥 흘러가고
또 어떤 애는 부서지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희) 그 사람의 따뜻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지호) 세희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를 살아 봤다고
오늘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세희) 내 죽은 마음에 대신
살아남았다
(희봉) 아직도 알바 계속하는 거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 네
근데 곧 그만둘 것 같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네
어, 그만두면 글을 다시 써 보려고요
글이라면 뭐?
그 드라마?
네
(희봉) 관뒀다고 하지 않았나? 살림에 집중한다고
네, 근데 어떻게 좋은 기회가 생겨서
다시 한번 시작해 보려고요
그럼 애는?
네?
아, 애는 언제 낳는 거냐?
[잔잔한 음악]
아, 그건 아직 잘...
(희봉) 아기 생각도 해야지, 일도 중요하지만
너야 아직 젊다마는 그, 세희는 나이도 있는데
그걸로 대출금 갚고 나중에 아기 태어나면 살림에 보태라
네?
(희봉) 내가 결혼하면 해 준다고 약속했었다
아...
(지호) 저, 제가 받을 건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럼 누가 받냐?
아, 당연히 세희 씨한테 직접 주시는 게...
(희봉) 걔랑 나랑 만나서 뭔 얘기를 하냐?
줘도 안 받을 거고 네가 받는 게 맞지
안사람이 중간에서 이런 조율 잘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만 가자
저기,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희봉) 날 추운데 조심히 가거라
[차 문이 달칵 여닫힌다]
[한숨]
[통화 연결음]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지) 너 어디야, 왜 안 와?
(호랑) 어, 좀 있다 들어갈 거야
시간이 몇 신데, 빨리 들어와!
(호랑) 야, 내가 애냐?
에바 쎄바 참치 하지 마, 너
[호랑의 웃음]
이따 봐 [통화 종료음]
에바 씨바?
뭔 참치?
[지호가 픽 웃는다]
그래도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수지가 픽 웃는다]
(수지) 음
짠
[지호의 시원한 숨소리]
수지야
너 영화 '졸업' 알지?
알지, 그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그거 내가 한 10번 넘게 봤거든
(지호) 처음 본 건 고1 때였는데
그때 벤저민이 엘레인 결혼식장에 쳐들어가서
손잡고 나오는 장면에 반했었거든
뭐랄까?
열일곱 눈에 그게 되게 낭만적으로 보였거든
그거 명장면이잖아 패러디도 많이 하고
근데
스무 살 넘어서 그 영화를 다시 봤는데
다른 게 보이더라
어떤 거?
그 후의 둘의 표정
[잔잔한 음악]
결혼식장에서 신나게 도망쳐서 버스를 탔는데
둘이 묘하게 말이 없어져
불안하고 허무해하면서
(지호)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언젠가부터 그 장면이 보이더라고
왜?
그 장면이 보여? 집주인하고 너하고 둘 사이에
힘들어?
응
[쓴웃음]
[수지의 추워하는 숨소리] [휴대전화 진동음]
(수지) 어
지금?
알았어
[통화 종료음]
아유, 날씨가 꽤 춥다
(지호) 어서 가 봐
아니야, 뭘
아, 어서 가 봐, 마 대표님 기다려
그럼 도착해서 연락해, 알았지?
[숨을 씁 들이켠다]
[잔잔한 음악]
(상구) 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어?
아, 무슨 일이냐고
너 박 대리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마 대표 방식이 안 통하길래 이번엔 내 방식대로 했어
아니, 네 방식 뭐?
아가리 죽통을 날렸어
뭐?
(상구) 잘했다, 잘했어, 일로 와!
[상구의 웃음]
[상구의 힘주는 신음]
[쪽 뽀뽀한다]
[함께 웃는다]
[상구의 힘주는 신음]
(지호) 사랑이 생기고서야 알았다
우리의 결혼이 편리했던 건
(지호)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세희) 지호 씨 예복 비용은 제가 절반 부담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얼마 들지도 않았는데요, 뭐
그래도 저랑 다르게 웨딩 슈즈와 부케값도 드셨으니
다음 달 월세에서 차감하겠습니다
(지호) 결혼은 원래 사랑해서 하는 건데
그런데 왜
그럼 애는? 아, 애는 언제 낳는 거냐?
(지호) 사랑이 생기고 나서부터 상처는 더 커져만 가는 걸까?
[고양이 울음]
작가님한테 고백해 본 적 있어?
(정민) 말도 사람 마음에 가야 살아남는 거 알아?
입 밖으로 뱉어야만 마음에 가서 닿는다고
[고양이 울음]
그래, 나도 알아, 엄청 어색한 거
[고양이 울음]
그래도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고양이 울음]
[세희의 힘주는 신음]
(세희) 오늘 한번
잘해 보자
[고양이 울음]
[잔잔한 음악]
[차 문이 달칵 열린다]
(세희) 수지 씨네 갔다 오신 거예요?
(지호) 네, 맥주 한잔했어요
(세희) 그러셨군요
[세희의 옅은 한숨]
오늘 계약은 잘하셨어요?
네
대표님이 워낙 좋은 분이시라
네
다행이네요
(세희) 피곤해 보이시네요
좀 지치네요
오늘따라
[고양이 울음]
(세희) 어? 고양이, 마중 나왔어?
[도어 록 작동음] [세희의 옅은 탄성]
[세희의 힘주는 신음]
(지호)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마침 저도 있습니다, 드릴 말씀
(세희) 이게 잘 안 보이나?
[고양이 울음]
[문이 달칵 열린다]
[지호의 한숨]
[고양이 울음]
- (지호) 저 이제... - (세희) 우리...
아...
먼저 말씀하세요
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아닙니다, 지호 씨 먼저 말씀하세요
이제 우리
계약을
그만 종료했으면 좋겠어요
[잔잔한 음악]
(세희) 말은 언제나
마음보다
늦다
(지호) 사랑이 더 깊어질수록 혼란이 커졌어요
(상구) 근데 저거 호랑 씨 아니야?
(수지) 아침엔 비 맞은 병아리 같더구먼
(세희) 고백할 때 어떤 문구가 덜 느끼해?
[호랑의 놀라는 신음]
(수지) 마 대표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누구겠냐?
(지호) 저예요, 저랑 데이트하실래요?
(지호) 결혼은 뭘까요?
아세요, 세희 씨는?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행복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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