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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남녀의 사랑법 14

 

 어,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다가오는 발걸음]

 

 [흥미진진한 음악]

 

 (건)  야, 이은오

 

 어? 린이다

 

 (린이)  응?

 

 뭐야, 왜 둘이 같이 있어?

 

 (은오)  어?

 

 (린이)  아, 미팅한다더니  그게 오빠네 회사였구나?

 

 (은오)  어, 어  [건의 호응하는 신음]

 

 (건)  어? 어제 형님이 들고 온 서류  다 집에 있던데, 식탁 위에

 

 (재원)  아

 

 갑자기 막 일이 급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은오)  굳이 여기까지  데려다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데려다주시고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나 먼저 들어갈게

 

 (린이)  아, 오빠, 라면 먹고 갈래?

 

 - (재원) 라면?  - (린이) 응

 

 (은오)  아이, 무슨 소리야, 바쁘신 분한테

 

 배 안 고프시죠?

 

 (재원)  고픈데요

 

 그래도 라면은  안 먹고 싶잖아요, 그렇죠?

 

 먹고 싶은데요

 

 [흥미로운 음악]  (재원)  먹자, 라면, 나 시간 있어

 

 (린이)  응  [못마땅한 숨소리]

 

 (재원)  먼저 들어가

 

 난 주차만 하고 들어갈게

 

 (재원)  씨

 

 (건과 린이)  이은오 특제 꼬막라면!

 

 - (린이) 두구, 두구, 두구, 두구…  - (건)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린이의 놀라는 신음]

 

 - (린이) 하, 진짜 맛있겠다  - (건) 맛있겠다

 

 (건)  이은오 씨, 꼬막습니다

 

 (린이)  음! 진짜 맛있어  [은오가 살짝 웃는다]

 

 - (린이) 오빠, 이거 은오가 만든 거다  - (재원) 어?

 

 (건)  이야, 내가 진짜  꼬막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왜 이 라면에 넣을 생각을 못 했을까?

 

 이은오  [건이 입소리를 끽 낸다]

 

 [은오의 어색한 웃음]  (린이)  나 꼬막 진짜 많이 들었어

 

 [린이의 옅은 웃음]

 

 (재원)  야, 이게…

 

 (건)  그럼 일은 언제부터 하는 건데?

 

 (은오)  안 할 거야, 오늘 얘기 들어 보니까  [흥미로운 음악]

 

 조건이 별로 안 좋아  [재원의 호응하는 신음]

 

 (재원)  아, 그,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 회사는 업체 선정 함부로 안 해요

 

 아, 갑질하는 회사인가 봐요?

 

 (재원)  아, 그, 제안 요청서  제대로 못 보셨나 보다

 

 거기 보면

 

 '여러 업체가 경쟁하는 형식으로  기획안을 평가하여'

 

 '직원 투표로 결정한다'라고 이렇게

 

 딱 명시가 돼 있는데

 

 [건의 한숨]

 

 - 그럼 그게 떨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 (재원) 응

 

 (은오)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야, 뭔 소리야, 떨어지긴 누가 떨어져

 

 (재원)  아, 그리고 참고로

 

 O3가 제일 작은 회사예요  [은오의 어이없는 숨소리]

 

 [린이와 건의 한숨]

 

 (은오)  그, '작은 회사가 맵다'  뭐, 이런 말 몰라요?

 

 아무튼 시간도 안 맞고

 

 내 포트폴리오랑도 안 맞아서  안 할 거야

 

 (건)  은오야

 

 네가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은오)  왜 못 따져?

 

 야, O3 지금 완전 잘나가

 

 내가 뿌려 놓은 것들  이제 다 거둬들일 차례고

 

 이제 일이 막 밀려들어 오고 있는데…

 

 (린이)  경준이가 다 얘기했을 거야

 

 너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거

 

 (은오)  뭘 굶어, 굶기는

 

 (건)  너 형님네 일 따내야 돼

 

 비딩인지 뭔지 그거 꼭 붙어

 

 집주인한테 전화 왔다

 

 임대료 올린다고

 

 (은오)  뭐?

 

 너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아침에 전화가 왔으니까

 

 (건)  내가 엄청 빨리 전달하는 건데, 지금?

 

 (은오)  야, 얼마나, 얼마나 올린대?

 

 (건)  20%

 

 20…

 

 (은오)  젠장!  누구 마음대로 그걸 그렇게 올려!

 

 이 엄동설한에  나가 뒈지라는 거야, 뭐야!

 

 이게 말이야, 방귀야?

 

 전월세 상한제라는 법이 있어

 

 이게 세입자랑 상의를 해도  5%밖에 못 올려!

 

 [흥미진진한 음악]  넌 바보야? 넌 바보야?

 

 너 왜 아무 말도 못 했어!

 

 야, 이거 5% 말도 안 돼

 

 [테이블을 탁 치며]  무슨, 하늘에서 돈이 5%가 뚝 떨어져?

 

 야, 이거 한 푼도 못 올려 줘  [은오의 분노에 찬 숨소리]

 

 (재원)  경준이는 그 옛날의 이은오는  착하고 얌전했다고 말했어

 

 [거친 숨을 내쉬며]  와, 진짜 어이가 없네?

 

 (재원)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내가 사랑했던 윤선아도 아니고

 

 착한 이은오도 아닌

 

 이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는…

 

 집주인한테 전화해, 나 간다고

 

 (건)  네가 해

 

 (린이)  네가 계약했잖아

 

 (재원)  아, 그리고 이 와중에

 

 비딩 날짜가 얼마 안 남았어요  이은오 씨

 

 [건의 한숨]

 

 (건)  그래, 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경준)  한결 씨, 보니까 지금 건축물 관리비랑

 

 장비 관리비랑…

 

 (재원)  아, 최 대리, 잠깐 얘기 좀 해요

 

 [스위치를 탁 켠다]

 

 [한숨]

 

 (경준)  왜, 왜?

 

 (재원)  부암동 주택 있잖아

 

 그거 건축주랑 통화했다

 

 이번 달 말까지만 더 기다려 달라고

 

 (경준)  아니, 설계 바꾸는 거  왜 포기를 안 해?

 

 [경준의 한숨]

 

 아, 그러다가  입주 시기를 못 맞춘다니까?

 

 그분들 밖에 나앉게 할 거야?

 

 형이 지난번에 뭐라 그랬어?

 

 포기한다며, 수정이 안 된다며?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아

 

 그래, 방법이야 나오겠지

 

 (경준)  1층까지 설계 다 뜯어고친 다음에

 

 형, 상하수도 위치랑  기초 공사 다 바꿔야 되는 거 알면서…

 

 아, 초짜야? 왜 그래?

 

 왜 말을 못 해, 대답을 해 봐

 

 네 말이 다 맞아서

 

 [기가 찬 숨소리]

 

 [경준의 한숨]  (재원)  야, 경준아, 네 말이 다 맞는데

 

 야, 너 서울에

 

 100년 넘은 건물이 몇 채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냐?

 

 다들 2, 30년도 못 가서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사라져

 

 이왕 온갖 자재들 다 모아서

 

 세상에 점 하나 찍을 거면

 

 만든 사람이 후회 없게

 

 사는 사람이 대를 이어서 살 수 있게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

 

 자기 혼자만 졸라 멋있네

 

 (경준)  기다려 봐

 

 [한숨]

 

 그러면 딱 열흘 더 줄게

 

 현실적으로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진짜

 

 (재원)  [경준을 툭 치며]  야, 자재 미팅은 잘했냐?

 

 아, 몰라

 

 (경준)  왜 늦었어?

 

 아, 아침부터 이은오 씨하고 미팅했어

 

 서류 다 전달된 거 아니었어?

 

 응, 다 된 줄 알았는데  까먹고 못 준 게 있더라고

 

 그래서, 응

 

 [한숨]

 

 [힘주는 신음]

 

 [한숨]

 

 (재원)  뭐야?

 

 [한숨]

 

 [차분한 음악]  (재원)  이 텅 빈 가방을 들고 이은오는

 

 어디를 가려고 했을까?

 

 [옅은 한숨]

 

 [재원의 한숨]

 

 (건)  맞는다, 너 목걸이

 

 (린이)  어? 맞아

 

 (경준)  그래, 너 목걸이 있다며, 목걸이

 

 (린이)  너 커플 링 뭐야? 남자 친구 생겼어?

 

 [입소리를 쩝 낸다]

 

 [한숨]

 

 [통화 연결음]

 

 아, 여보세요?

 

 (은오)  아, 선배, 바빠요?

 

 저, 그, 전에  하우스 오픈 파티 했던 거

 

 네, 네, 그거  참고 자료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전에 선배 회사에서 했던 영상 봤는데  그거 참고 좀 하려고요

 

 아참, 공연은  어쿠스틱 쪽으로 하려고 하는데

 

 아티스트 리스트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웃음]

 

 아, 그럼요, 이게 다 투자입니다, 투자

 

 기다리세요  O3가 쑥쑥 자라서 도와드릴 테니까

 

 네, 감사해요

 

 [휴대전화 조작음]  그러면 요거는 됐고

 

 보자

 

 [중얼거린다]

 

 (직원1)  린이 누나 만나러 왔어요?

 

 - (경준) 네  - 아…

 

 누나가 얘기 안 했구나

 

 누나 오늘 잘렸어요

 

 (직원1)  사장님 처제가 일하러 온다고 해서

 

 아니, 무슨 이, 경우 없는 일이…

 

 와

 

 아, 그래서 우리 린이는요?

 

 (건)  린이 여기 안 왔는데?

 

 (경준)  아, 그럼 얘는 어디 간 거야  집에도 없던데

 

 린이가 애냐?

 

 (건)  어디 길이라도 잃어버렸을까 봐?

 

 너 이거 진짜 35만 원에 사기로 했냐?

 

 (건)  응

 

 린이가 하도 귀찮게 굴어 가지고  사긴 샀는데

 

 이거 알아보니까 진짜 120짜리더라

 

 그것도 엄청 유명한 브랜드던데?

 

 그래, 그리고 이거 있잖아

 

 (경준)  완전 새 가구야

 

 아무도 안 쓰고 어디 전시된 적도 없는

 

 그냥 새 가구라고, 이 새끼야

 

 (건)  근데 이걸 왜 그냥 얻었다고…  [경준의 한숨]

 

 너 설마 또 린이한테 뻥쳤냐?

 

 비싸게 주고 샀다고 하면 화낼까 봐?

 

 진작에 좀 알아주지 그랬냐?

 

 (경준)  내가 그렇게 뒤에서  사인을 이렇게 보냈는데

 

 (건)  그랬어?

 

 (경준)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도움이

 

 (건)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

 

 무슨 연애를 그렇게 어렵게 하냐?

 

 연애 안 한 지 2년 넘은 놈한테

 

 (경준)  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하, 얘 진짜 어디 갔지?

 

 야, 그 사장 그거 진짜 또라이 아니냐?

 

 그냥 노동청에  내가 그냥 신고를 그냥 해?

 

 - 해  - (경준) 진짜 해?

 

 하, 얘 진짜 어디 가서  울고 있으면 어떡하지?

 

 [건의 한숨]  (경준)  얼마나 열받고 억울하겠어

 

 아, 안 그래도 알바 하나  더 구해야 된다 그랬었는데

 

 아, 이렇게 잘리면 어떡해  [경준의 한숨]

 

 (건)  경준아

 

 너는 린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걱정하지 마  너희 린이 하나도 안 힘들 테니까

 

 (경준)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아는데?

 

 네가 린이 아빠야?

 

 내가 걔 아비일세, 최 서방

 

 [구시렁거린다]  (건)  얼른 집에 들어가시게

 

 [밝은 음악]  [기분 좋은 숨소리]

 

 [린이가 중얼거린다]

 

 (린이)  아유, 잘하네

 

 산책도 잘해요

 

 [린이가 흥얼거린다]  [문이 탁 열린다]

 

 [경준이 피식한다]

 

 [도어 록 작동음]  (린이)  어!

 

 [린이의 기분 좋은 신음]

 

 아, 뭐야!

 

 마침 내가 딱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참인데

 

 어떻게 이렇게 딱 와 있지?

 

 (경준)  다 알지, 나는  [경준의 옅은 웃음]

 

 (린이)  그럼 오늘 내가 스파게티  먹고 싶었던 것도 알았구나?

 

 (경준)  당연하지, 내가 뭐, 서린이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겠어?

 

 (린이)  어유, 없지, 없지, 없지!  [경준의 웃음]

 

 으, 너무 맛있겠다!

 

 - (경준) 다 됐어, 손 씻고 와  - (린이) 아

 

 [경준이 포크를 달그락 집는다]

 

 - (경준) '아'  - (린이) 아

 

 (린이)  음!

 

 (경준)  아니…  [경준의 당황한 숨소리]

 

 아, 이거 갖다 버려야겠다, 이거

 

 [린이의 부정하는 신음]

 

 (린이)  본드 붙여서 쓰면 돼, 거기 놔둬  손 씻고 올게

 

 [린이가 스위치를 탁 켠다]

 

 [문이 탁 닫힌다]  아니, 이걸 본드로…

 

 [한숨]  [애잔한 음악]

 

 [깊은 한숨]

 

 (경준)  린이야, 가스 이거 좀 위험할 텐데

 

 (린이)  아, 인덕션 금방 수리된대

 

 [린이의 기분 좋은 숨소리]  (경준)  내가 싼 걸로 하나 사 줄까?

 

 (린이)  잘 먹겠습니다

 

 [경준의 한숨]

 

 음, 너무 맛있어

 

 나 진짜 배고파 죽는 줄 알았거든

 

 (경준)  많이 먹어, 저기 엄청 많아

 

 (린이)  어, 너도 먹어

 

 [린이의 만족스러운 신음]  (경준)  린이야

 

 너 화장품 가게 잘렸다며

 

 어떻게 알았어?

 

 (린이)  아, 나 보러 왔었구나?

 

 에이, 전화를 하지

 

 응, 나 새 알바 구했다?

 

 (경준)  무슨 알바?

 

 (린이)  도그 워커

 

 저쪽 놀이터 옆에 주택 있잖아

 

 거기서 큰 개 키우거든?

 

 내가 그 개 하루 두 시간씩  산책시켜 주기로 했어

 

 시급이 얼마인 줄 알아?

 

 한 시간에 만 오천 원  하루 두 시간이면 삼만 원

 

 (경준)  춥지 않을까?

 

 요즘 같은 날씨에  어떻게 두 시간씩 걸어 다녀

 

 [부정하는 신음]  산책하는 거 재밌어

 

 (린이)  운동도 하고 돈도 벌고

 

 음, 맛있어

 

 린이야

 

 너는 뭐, 따로 공부하고 싶거나  그런 건 없어?

 

 나 공부하잖아

 

 환경 관련 세미나 맨날 챙겨서 다니고

 

 (경준)  아니, 그런 공부 말고

 

 너 예전에 선생님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린이)  어릴 때야 뭐, 대통령도 되고 싶고  다 그런 거지

 

 아니야, 나는 네가  그런 쪽이랑 좀 맞는 거 같아

 

 (경준)  애들도 좋아하잖아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거 하면  되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공부해서 교대 가는 건 어때?

 

 [차분한 음악]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봐

 

 뒤늦게 공부해서  교대 가는 사람들도 좀 많다고 하더라

 

 (린이)  경준아

 

 난 아니야

 

 내가 너한테 저번에도 얘기했잖아

 

 난 그냥 지금 내 생활이 너무 좋아

 

 그리고 그런 데 학비도 비싸

 

 (경준)  내가 있잖아

 

 필요하면 내가 학비 대 줄게

 

 생각해 봐

 

 [경준의 옅은 웃음]

 

 어, 야, 맞아

 

 (린이)  나 너한테 보여 줄 거 있다?

 

 짠!

 

 35만 원

 

 건이한테 협탁 판 돈 받아 왔지!

 

 [돈을 탁 내려놓는다]

 

 내가 이걸로 너 머플러 사 줄게

 

 [웃으며]  와

 

 먹자, 이제 진짜 먹자

 

 [린이의 탄성]

 

 (경준)  여기 있는 아랫집이 56-9번지인데  [재원이 호응한다]

 

 여기 있는 우리 주택하고  [재원이 호응한다]

 

 여기 있는 경계 담장을  다시 해 달라는 거야

 

 (재원)  줘 봐

 

 아, 이거를?

 

 아, 여기를?  [노크 소리가 들린다]

 

 [문이 탁 열린다]  어

 

 아, 그러네

 

 (직원2)  복합 문화 공간 오픈 파티  비딩 결과 나왔어요

 

 O3요

 

 (경준)  [웃으며]  거봐, 내가 은오가 된다고 했지?

 

 어, 후속 작업 진행해요

 

 네

 

 그렇게만 해 주면  다른 민원은 제기 않겠대?  [문이 탁 여닫힌다]

 

 (경준)  잠시만  은오한테 비딩 결과 좀 알려 주고

 

 (재원)  그래그래

 

 [은오의 한숨]

 

 [차분한 음악]

 

 (재원)  너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1년 동안 너 찾아 헤맨 거

 

 린이랑 경준이한테  다 들어서 알고 있었잖아

 

 근데 구경만 했어?

 

 [한숨]

 

 [은오의 한숨]

 

 [재원이 종이를 사락 넘긴다]

 

 [연필을 사각거린다]

 

 [연필을 탁 내려놓는다]

 

 [재원의 한숨]

 

 [한숨]

 

 (재원)  이야

 

 아니, 윤선아로 찾을 때는  그렇게 안 나오더니…

 

 (은오)  어떤 사람이 읽던 책을 서점에서 봤다

 

 [감성적인 음악]

 

 브라티슬라바, 포즈난  트리에스테, 리가

 

 이름부터 낯선

 

 그래서 더 낭만적인 도시들

 

 유럽의 작은 골목들을  함께 걸어 보자고 했던 사람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냅니다

 

 뭐야, 이거

 

 (재원)  다 잊었다면서

 

 (은오)  눈부시게 시작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련하게 흩어진  어느 시간들이 떠오르는 밤

 

 (은오)  기획안은 거절당하고  일은 들어오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문 걱정으로

 

 축 처지기만 하는 나를  버틸 수 있게 하는 건

 

 빗속을 아이처럼  자유롭게 뛰어놀았던 추억이다

 

 그 추억의 힘으로 오늘도 나는 웃는다

 

 이은오, 파이팅

 

 [가쁜 숨소리]

 

 [가쁜 숨소리]

 

 (재원)  나 원래 엄청 까칠해, 근데

 

 [비가 쏴 내린다]  사랑에 빠지면 부드러워지는 편이야

 

 넌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데?

 

 [숨을 후 내뱉는다]

 

 [한숨]

 

 [은오의 가쁜 숨소리]  [반지가 찰랑거린다]

 

 (은오)  다들 여행지에서 만나면

 

 돌아와서 잊고 잘만 살더라

 

 (재원)  그래서 너는 다 잊었어?

 

 그냥 추억으로만 남았어?

 

 (은오)  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내 마음, 내 성격, 내 생각, 내 취향

 

 아무것도 모르잖아

 

 [은오의 가쁜 숨소리]

 

 [건의 가쁜 숨소리]

 

 줄넘기 뭐냐? 달밤에 체조하냐?

 

 사돈 남 말 하지 말고 들어가라

 

 (건)  계단 밑에 네 택배 왔더라

 

 (은오)  근데 왜 안 가져왔어?

 

 (건)  아, 그게

 

 네 거라서  [건의 웃음]

 

 (은오)  아…  [건이 연신 웃는다]

 

 [도어 록 작동음]  와, 진짜 확 그냥

 

 [문이 탁 열린다]

 

 [문이 탁 닫힌다]  [도어 록 작동음]

 

 [은오가 줄넘기를 툭 내려놓는다]

 

 [한숨]

 

 [퍽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타이어 마찰음]

 

 뭐야?

 

 뭐야, 아씨

 

 (재원)  아씨, 뭐야

 

 뭐야, 이게! O3면…

 

 아, 이거 윤선아  아니, 이거 이은오 차잖아, 아…

 

 야, 미치겠네  [은오의 놀라는 신음]

 

 아니, 재원아, 하필

 

 아, 차를 박아도 왜  아, 이은오 차를…

 

 와, 진짜  이야, 재원아, 너 이 미친놈아

 

 [사이드 미러를 달그락거리며]  야, 너

 

 아니, 이게…

 

 아유, 이걸, 아, 뭐라고 하지?

 

 일단 전화…

 

 아, 전화해서 뭐라고 하냐, 이거  아, 미치겠네

 

 [통화 연결음]  [휴대전화 진동음]

 

 [은오가 택배를 탁 내려놓는다]  [재원의 난감한 신음]

 

 [재원이 사이드 미러를 달그락거린다]

 

 (은오)  여보세요?

 

 (재원)  어, 여보세요?

 

 아니, 진짜 미안한데

 

 내가 있잖아, 잠깐 여기, 아니

 

 나 박재원인데

 

 내가 이 앞에 주차를 하다가 네 차를

 

 살짝 박은 거 같은데

 

 네가 좀 나와서  확인을 해 봐야 될 거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세게 박은 건 아니고

 

 살짝, 그러니까 진짜 아주 살짝

 

 아주 살짝…

 

 (은오)  아니, 이게 지금 살짝이야, 지금?

 

 (재원)  어?

 

 [은오의 기가 찬 숨소리]  [재원의 당황한 신음]

 

 (은오)  잠깐 나와 봐 봐  아니, 이게 살짝이냐고

 

 (재원)  아니, 이게 멀리서 보면  티도 안 나, 이거

 

 - (은오) 아, 일단 끊어 봐  - (재원) 끄, 끊…

 

 (은오)  야, 지금 네 차는 멀쩡하네  남의 차는 박살을 내 놓고!

 

 (재원)  아, 무슨 박살이야, 박살은  이게 무슨 박살이야

 

 [은오의 한숨]  야, 그리고 네가 주차를 조금 이렇게  좀 가장자리로 잘했어야…

 

 - 여기 우리 집 앞이야!  - (재원) 그래, 네 집 앞 맞아

 

 (재원)  네 집 앞이니까 집주인이 좀 이렇게

 

 옆으로 좀 이렇게 붙여서  주차를 해 줬으면…

 

 (은오)  아니, 내가 지금 뭘 잘못했다 그러지?

 

 나 지금 파킹  너무 완벽하게 했는데, 지금?

 

 그래, 맞아, 내가 다 잘못했어

 

 (재원)  네가 뭘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희 집 찾아온 것도 잘못했고  네 차 박은 것도 잘못했어

 

 그리고 내가 박재원인 것도  내가 잘못했고

 

 그냥 네가 엑스와이프인 것도  내가 다 잘못했어

 

 (은오)  [어이없어하며]  무슨 엑스와이프야

 

 너, 너 그 말 하지 마

 

 왜, 엑스와이프, 맞잖아

 

 뭐, 언제는 결혼하자니까

 

 프러포즈까지 해 달라면서  엄청 좋아해 놓고

 

 (재원)  왜, 듣기 불편해?

 

 - (은오) 지겨워서 그렇다, 지겨워서  - (재원) 지겨…

 

 [흥미진진한 음악]  (재원)  와, 지겹다고…

 

 이야, 야, 너 나 왜 꼬셨냐?

 

 너 아주 처음부터  작정하고 꼬신 거지, 나?

 

 무슨 저 들판에 뭐, 비가 올 때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나한테 운전면허 따라고 하면서

 

 (은오)  내가 뭐, 저기 들판에  어쩌고저쩌고했어도

 

 네가 안 넘어왔으면 됐을 거 아니야

 

 그럼 너는 뭐, 너는 뭐, 나 안 꼬셨어?  너도 나 꼬셨잖아!

 

 네가 더 훨씬 나보다 열심히 꼬셨거든?

 

 (은오)  어머, 내가 언제?  그리고 너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 손목 왜 잡았어?

 

 나 그냥 이렇게 서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잡아끌었잖아

 

 (재원)  야, 그거는 그냥 게임이었잖아

 

 나 상품 타려고 그랬어

 

 [은오의 기가 찬 신음]  그리고 공교롭게도  네가 내 앞에 서 있었어!

 

 그냥 이렇게 딱 손 뻗으면  닿을 그 공간에!

 

 (은오)  와, 그러면 다른 여자가  그 앞에 서 있었으면

 

 다른 여자 손을 끌었겠다, 그렇지?

 

 (재원)  어어? 너 뭐야? 질투하냐? 질투지?

 

 됐고, 저거 변상해

 

 (재원)  야, 내가 변상한다, 야, 보험…

 

 아니다, 됐다

 

 야, 얼마인데? 얼마인데?

 

 너 지금 돈 자랑 하니?

 

 야, 이게 무슨 돈…

 

 와

 

 야, 너 옛날에 엄청 착했다며?

 

 (재원)  어? 얘 진짜 이상하네, 지금

 

 (은오)  너는 뭐, 멀쩡한 줄 알아?

 

 아주 세상 멋진 척은 다 하더니  지금 아주 집착의 끝판왕이면서

 

 (재원)  집…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옛날의 그 착했다던 이은오 어디 갔어?

 

 윤선아는 됐고 그 이은오 어디 갔냐고!

 

 (은오)  여기 있다, 여기 있다, 어쩔래?

 

 (재원)  아니야, 아니야, 너는 안 착해, 하나도

 

 너는 옛날부터  아주 못돼 처먹었을 거야

 

 그냥 경준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은오)  야, 빨리 차 빼!

 

 (재원)  그래, 야, 뺀다, 뺀다!

 

 아유, 이 나쁜 년아

 

 (은오)  그래, 빼라, 이 미친놈아

 

 [쨍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재원)  야, 그걸 왜 차…

 

 [쨍그랑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음악]

 

 (재원)  야

 

 야, 이거…

 

 야, 이거 우리 결혼반지잖아  내가 이거

 

 청계천에서 버…

 

 버렸…

 

 (은오)  [작은 목소리로]  내 반지 어디 갔지

 

 너 이거 뭐야?

 

 이거 우리 결혼반지지?

 

 (은오)  아니야, 아니야

 

 (재원)  야, 너  네 목에 걸려 있다던 그 커플 링

 

 우리 결혼반지 맞지?

 

 - 아니라니까?  - (재원) 아니긴 뭘 아니야, 맞는구먼

 

 (재원)  그럼 나와 봐, 확인해 보게

 

 - (은오) 아니야, 아니라고  - (재원) 나와 봐

 

 (은오)  아니라니까? 응?

 

 [재원의 힘주는 신음]  [은오의 놀란 신음]

 

 [은오의 다급한 신음]

 

 (재원)  맞네

 

 아, 이거 맞네  [가쁜 숨소리]

 

 맞잖아

 

 [무거운 음악]  (은오)  내놔, 내 거야

 

 (재원)  이거 내가 청계천에서 갖다 버린 걸  네가 왜 들고 있는 건데

 

 - (은오) 내놓으라고, 내 거라고  - (재원) 야

 

 (재원)  너 진짜 뭐야?

 

 야, 너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

 

 어?

 

 이거 우리 결혼반지 맞잖아

 

 반지 안 버렸잖아, 너

 

 너 나 다 잊었다는 거  그거 거짓말이지?

 

 내가 다 확인하고 왔거든?

 

 뭘 확인했다는 건데?

 

 너 카메라도 갖고 있었고  사진도 다 찾아갔어

 

 (재원)  그리고 이 반지

 

 이거 우리 결혼반지 맞잖아  너 반지 안 버리고 갖고 있었던 거잖아

 

 이은오, 너 뭐야, 어?

 

 진짜 네 마음이 뭐냐고  말 좀 해 봐, 좀!

 

 그냥 좀 모른 척해 주면 안 돼?

 

 [은오의 울먹이는 숨소리]

 

 (은오)  나는…

 

 나는 내 친구들이 알게 되는 게  진짜 너무 싫단 말이야

 

 [한숨]

 

 양양에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산 게  그렇게 부끄러워?

 

 그게 하필이면 경준이 사촌 형이잖아

 

 그래, 맞아, 내가 경준이 사촌 형이야

 

 근데 그게 뭐? 어?

 

 (재원)  그것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되는 게  그게 말이 돼?

 

 (은오)  그냥 좀 헤어져 주면 안 돼?

 

 [한숨]

 

 그게 네 진심이야?

 

 (재원)  아니잖아

 

 아니잖아

 

 말해 봐

 

 나 봐 봐

 

 어?

 

 이은오

 

 야, 은오야

 

 너 청계천에서 내가 버린 반지  주우면서 무슨 생각 했어?

 

 내 생각 했잖아

 

 너

 

 나 아직 좋아하잖…

 

 [재원의 한숨]

 

 [아련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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