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8
선재 집. 밤.
-선재, 계단에 걸터 앉아 손마디 뚝뚝 꺾으며 눈 앞을 쏘아본다.
-자판 치는 선재.
-책상 귀퉁이, 준형이 준 책들과 장학증서.
선재 소리 막귀형, 무지 오랜만이야.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는데, 없어서 쪽지 남겨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냥 지금 내 심정만 얘기할게.
한마디로 너무 비참해.
플래시 백.
-영우의 비아냥. 당혹감 스치는 혜원 표정.
-혜원 차 안. 곤히 잠든 혜원의 이마에 반창고, 손등의 멍자국.
혜원 사무실.
-책상 앞 혜원, 기운 없이 머리 빗다가 엎드리는데, 쪽지 도착. 눈물 말라붙은 얼굴.
선재 소리 내 여자가 이상한 사람한테 모욕을 당하고, 알 수 없는 일로, 얼굴 에, 손에 상처가 막 생겨 있는데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내가 사랑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혜원, 모로 엎드린 채 한손으로 툭툭 자판.
혜원 소리 여신에서 여인으로 추락했구나. 낮은 데로 임해 주셨네.
선재 소리 그건 모르겠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땜에 더 화가 났나봐. 이런 상 황인데, 지금 만나자고 하면 더 화낼까?
혜원 소리 나 너 좀 귀찮다. 니 맘대루 해.
선재집.
-선재, 팔짱 끼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핸드폰 집어든다.
혜원 사무실. 밤.
-혜원, 가방에 태블릿이며 이것저것 집어넣다가 핸드폰 다시 꺼내 본다.
선재 소리 저 선생님 만나야겠어요. 주말에 레슨 갈 거지만, 건데, 지금 이대로는 그때까지 못참겠어요.
-혜원, 새삼 눈물이 돈다. 널 만나 뭐라고 하겠니. 내 심중을 꿰뚫고야 말겠다는 듯, 그 여자 뭐냐고, 왜 그러냐고 묻는 애한테.
-삭제 누르고 핸드폰 다시 가방에 넣으려는데 또 문자.
선재 소리 아무 것도 묻지 않을게요. 그냥 옆에 있어 드릴게요. 모텔방도 안 잡 을게요. 저희 집으로 오시면 되잖아요. 선생님 저희 집 좋아하시지 않 나요?
-혜원, 픽 웃음.
선재 집 현관 앞.
-준형, 숨 죽이고 서 있다.
선재 집. 밤.
-선재, 핸드폰 집어 보고, 내려놓고, 엎드린다. 발을 달달 떨기도.
현관 앞.
-준형, 돌아선다. 조용한 걸 보니 혼자 있는 거 맞아.
2층 계단 굽이.
-준형, 나오고, 다미 올라온다.
-둘, 몸을 비껴 스친다.
다미 소리 나.
선재 집.
-선재, 문을 확 연다.
선재 전화 하구 오라 그랬잖아!
다미 (들어서며)교수 온대?
선재 어어? (어딜 들어와!)
다미 오믄 그 때 가지 뭐.
-화장실 들어가는 다미.
선재 (아, 미쳐. 핸드폰 본다. 답은 오지 않고)
다미 소리 라면 있냐?
선재 어,(아니지!)없어!
다미 소리 좀 사올래? 너 배 안고파?
선재 우리 나가서 먹자!
선재 집 앞. 밤.
-혜원의 차, 골목 들어와, 주차장으로. 후진하여 서는데,
-선재가 급히 나오고 그 뒤 다미.
-혜원, 헉, 납작 구겨지며 운전대 아래로 몸을 낮추는.
다미 뭘 나가...
선재 (떨린다)너 사주구 싶어서.
-계단 내려오는 선재와 다미. 선재는 경황없어 혜원의 차를 못봤다.
다미 집에서 해 먹으믄 되지.
선재 아, 진짜!
다미 깜짝야,
-선재, 다미 어깨 감아 안고 간다.
다미 오아 대박,(선재 허리에 팔 두른다)
-혜원, 간신히 고개 든다.
-선재와 다미의 뒷모습. 붙다시피 서로 안고서 가는.
-혜원, 저것들이!!!
영우 오피스텔.
-준형이 술을 따라 마시고, 영우 서서 짜증낸다. 야한 외출복 차림.
영우 왜 이래 진짜, 나 약속 있다니까?
준형 (힐끗)춤추러 가냐?
영우 뭐가 됐든!
준형 나가. 혼자 마시구 취하게.
-영우, 단축 번호 누른다.
영우 얘, 너 뭐니? 왜 니 남편 느닷없이 나한테 찾아오게 만들어? 너나 나나 다 쇼윈도 부부지만, 아무리 그래두 이건 좀 웃기지 않어?
선재 집 앞. 밤.
-혜원 차 안.
혜원 (전화)25년 우정에 그것두 못 받아 줘?!
-혜원, 전화 끊고 목을 뺀다. 골목 저쪽 기웃. 지금 준형은 안중에 없다. 다미랑 사라진 선재는 나타나지 않고.
포장마차.밤.
-선재와 다미, 국수 먹는다. 마냥 즐거운 다미, 고개 쳐박다시피 하고 정신없이 국수와 단무지 흡입하는 선재.
다미 단무지 하나 더 주세요...
-다미, 단무지 받아 선재 앞에 놓아주고 다시 먹는다.
다미 내가, 맘을 고쳐 먹었어...좀 제대로 해볼까 해. 너랑 끕을 맞춰서, 일단 전문대 미용학과 목표루...좀 천천히 먹어라.
선재 (먹기만. 땀난다)
다미 나만 고졸에, 맨날 너한테 키스나 구걸하구, 그건 영 아니지.
-선재, 국물 마시고 그릇 내려 놓는다. 기둥에 걸린 두루말이 화장지 두 칸 뜯어 입 닦고,
다미 우리 원장두 고졸 견습부터 시작했는데, 성공한 담에 전문대 가서 사년 제루 편입했대. 지금 미용과 교수야. 정식은 아니구 무슨, 겸임인가, 그
런 거...업계에서 그 정도는 아니더라두 너랑 끝까지 갈래믄 나두 발전 을 해야지.
선재 (눈 앞을 보며)어...(손으로는 주머니 속 핸드폰 만지작)
다미 (웃음)역시.
선재 박다미.
다미 (단무지 베며 본다)응?
선재 너, (외면하며 후)
다미 뭐...
선재 아냐.
선재 집 앞.밤.
-혜원,멍하니 앉아 있는데, 창문 톡톡. 화들짝 놀라 창문 조금 내린다. 50대 남자.
주민 여기 세우믄 안돼요. 지정 주차제라구 써 있잖아.
혜원 아아, 죄송합니다. 저 쪽으루 댈게요.
주민 댈 데 없어. 소방도로라.
혜원 왜 반말이세요?! (억, 내가 이런 말을!)
주민 어이구 미안해요, 얼른 가세요, 아줌마, 응?
혜원 네?!
주민 아, 가시라고.
혜원 비, 비켜줘야 가죠!!
-주민이 물러서서 저 쪽으로 나가라 손짓. 혜원, 거칠게 출발.
-혜원, 운전대 꽉 잡은 손, 파르르 떨리는 입술.
혜원집 침실. 주말 아침.
-찻잔을 들고 소파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혜원. 등 뒤로 커튼 틈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는데, 일부러 내다보지 않는 것 같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현관 벨소리.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내 구질스러운 입지를 다 내보였고, 바람까지 맞았는데, 기다림, 설레임, 다 웃기지’
거실.
-선재가 들어서며 꾸벅,
미순 어서 와요...
침실. 파우더 룸.
혜원 (내려선다. 담담히)내려 갈게요...
-잠시 후, 드레스 룸에서 머리 틀어 올리며 나오는 혜원. 옷이나 머리나, 의도적으로 강한 느낌을 주려는 것 같다. 화장까지 할 건 없겠지만,
-흐릿해진 상처에 분첩을 몇 번 눌러 가리고, 매무새 한번 살핀 뒤 나간다.
음악실.
-선재, 피아노 앞에 서 있고, 문을 확 열리면서 혜원이 들어온다.
혜원 왔니?! (뾰족하다)불타는 금요일, 재밌게 보냈어?
선재 (똑바로 본다. 무슨 말씀이신지)
혜운 넌 꿈두 없니? 야망 없어? 남들이 갖지 못한 재능을, 그렇게 희희낙락 막 써버려두 되는 거야?
선재 제가 어쨌길래요?
혜원 어쨌길래?!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더 잘 알지 않어? (선재의 어깨 거칠게 민다)
-선재, 그 서슬에 휘청, 건반에 손 집는다.굉음.
혜원 그럴 거믄 여긴 뭐하러 와?
-선재가 바로서자 혜원, 계속 밀어대며 왈왈. 선재. 소파 쪽으로 멈칫멈칫 밀려서고,
혜원 그냥 너 살던대루 살지, 엉? 날씨두 좋은데, 기집애랑 놀러나 다니지? (또 밀려는데)
선재 (혜원의 팔 잡는다)오셨네요, 맞죠?!
혜원 (뿌리치려)그래, 갔다. 갈래서 간 게 아니라, 지나가다 봤다! 둘이 아주 끌어 안구 나가더라?
선재 (혜원을 소파에 앉힌다)그럼 됐어요. 알았어요.
혜원 뭐가 돼! 뭘 알어!
선재 오셨으니까 됐구, 질투하시는 거 알았구,
혜원 (내심 흠칫.나 뭐란 거야?!)
선재 (스툴에 앉으며, 웃지 않고)그래서 좋아요. 대박이예요.
혜원 (내가 정신이 나갔구나)
선재 또 그래서, 안심하구 여쭤 볼게요.
혜원 (이미 속은 다 들켰지만)뭘!!!
선재 그 여자 도대체 뭔데 선생님 모욕하는지.
혜원 (휙 외면)그깟게 무슨 모욕이라구.
선재 (본다)
혜원 쳐다보지 마. (챙피해)
선재 (그러께요. 시선 돌리는)
혜원 (외면한 채 글썽)
선재 저 자신이 완전 등신 같았어요. 영화 같은 데서는 남자가 그럴 때 확 뒤엎잖아요.
혜원 후진 영화만 봤나부다. 그러는 게 더 등신이지.
선재 (본다)왜요?
혜원 말했잖아. 세상 이치 배운다 생각하라구.
선재 (허)무슨 이치가 그래요?
혜원 퀵 배달루 돈 벌어서 컵라면 사먹구 핸드폰 요금 내구, 전깃세 내구 수돗세 내구, 그러는 대신 피아노 잘 쳐서 장학금 받는 걸루 먹구 사는 게 훨씬 낫잖어.
선재 (얼결)그렇죠...
혜원 (화장지 뽑아 코끝을 닦고는)신경 쓰지마. 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으니까,
선재 선생님은요?
혜원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구, 그걸루 또 벌구,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선재 (멍해진다)
혜원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봤어?
선재 드, 들어는 봤죠...
혜원 책두 좀 읽구 그래라.
선재 그러게요(바보처럼 웃는데, 글썽)
혜원 나는 그 중간 어디쯤 되겠지. 우아한 노비.
선재 (또 꿀꺽)그 여자가, 젤 꼭대기예요?...
혜원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선재 (그렇구나...)
혜원 (자신에게 말하듯)아니구나...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혜원, 눈 앞을 보며 화장지를 꾹꾹 뭉쳐쥐고, 선재, 막막하고 슬프다. 무장 해제한 듯 한 혜원 모습. 내가 알 수 없는 거대한 배후. 아가리. 어둠. 절망감. 해질 녘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리를 건널 때나, 지하철 역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인파를 보면서도 이 비슷한 걸 느끼곤 했는데...
혜원 동네. 아침.
-준형 차 온다.
혜원 집 음악실.
-선재, 손등으로 코끝의 눈물 닦고, 혜원, 옷자락 말았다 폈다 하다가 힐끗 본다.
혜원 (짐짓 웃음)너 울어?
선재 (웃음)아,아니요...
혜원 몰라두 그만 알아두 그만이야.
선재 그르니까요...
-둘, 외면한 채 있는 힘을 다 해 참는다. 여기서 터지면, 안되는데.
차고.
-준형 차 들어온다.
-차에서 내리는 준형. 들어가려다 혜원 차 돌아본다.
-혜원의 차 문 열어본다. 열어진다.
-준형, 운전석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대시보드며 콘솔박스 열어본다. 주유소 영수증 클립. 하나씩 살핀다. 혹시 선재를 태우고 장거리 운전 했나 싶은. 하지만 다 한결같이 ‘사직동 주유소’
-차 문 닫고 들어가는 준형.
거실.
-현관, 선재의 신발.
-준형, 음악실로.
-문 손잡이 잡고 잠시 생각한다. 문 열고 못 볼 꼴을 볼 것인가, 그냥 올라갈 것인가.
-문 연다.
음악실.
-준형, 예상 밖의 정적에 멈칫.
-혜원과 선재, 엉거주춤 일어선다. 둘 다 조금씩 울어서 먹먹한 표정.
준형 뭐해, 연습 안하구.
혜원 야단 좀 쳤어. 애가 도대체가 야망두 뭐두 없어. 내가 왜 이런 애 땜에 기운을 빼야 하지?
선재 (혜원을 힐끗)
준형 (이건 뭔 국면?)
혜원 교수님 앞에서 말 좀 해 보시지? 넌 도대체 뭐가 될려 그러니?
준형 무턱대구 잡으믄 안되지. 우리가 먼저 구체적인 목표와 스케줄을 제시하구,
혜원 글쎄 입이 아프도록 얘길 했는데두 못알아 듣잖아.
선재 잘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안이했어요. 열심히 할게요.
-준형, 나간다.
-혜원, 탈진하여 털썩 앉고, 선재, 꿀꺽 삼킨다.
혜원 협주곡 준비하자...디브이디 예심에 낼 거.
선재 저기,
혜원 (본다)
선재 모차르트가요, 어느날 갑자기, 인제부턴 귀족들한테 주문 안 받는다, 내가 쓰구 싶은 곡을 쓴다, 그러다 일찍 죽은 거라면서요.
혜원 (픽 웃음)
선재 그게 힘들어서 병 나구, 빚지구,
혜원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마. 그래선지, 원래 성격이 지랄 맞아서 제 풀에 그런 건지, 어떻게 아니? 부자들 돈으루 먹구 살면서두 얼마든지 저 하구 싶은 거 할 수 있어.
선재 (삼킨다)아니잖아요.
혜원 (팩)넌 그럴 수 있다니까?!
선재 (본다. 아니잖아요)
혜원 (부러 선재 눈을 똑바로 보면서)내년도 부조니 콩쿨 신청 마감이 5월 31일이야. 레퍼토리 정해야겠지? 협주곡 중에서 피아노 파트 악보 외워둔 거 있니?
선재 (북받쳐서 간신히)슈만 협주곡,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변주곡.
혜원 뭘루 외웠어.
선재 들으면서 총보 삼십번 쯤 봤구, 피아노 파트 따루 출력해서, (꿀꺽. 시선 떨군 채 눈물 그렁)
혜원 엄살 피울래?
선재 ...
혜원 (홱 돌아서서 나간다)
선재 (눈물 후두둑)
-선재, 삼키려 애쓰는데 잘 안된다. 닦아도 계속 눈물 난다.
준형 서재.
-혜원, 거칠게 서가의 악보들 손끝으로 훑다가 두 권 빼내고, 씨디 꺼내고,
거실.
-혜원이 준형의 서재에서 나온다. 악보 네 권(연주용 총보와 피아노 악보 각각 두 권씩과 씨디 여러 장 들고 혜원 서재로.
-준형이 이층에서 내려오며 힐끗. 준형 서재로.
음악실.
-혜원, 오디오 세트 앞에 앉아 씨디 케이스 열며.
혜원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
선재 (본다. 눈물 흔적)
-혜원, 소파에, 선재, 스툴에 앉고,
-음악 시작.
-둘, 라흐마니노프야, 파가니니야, 빨리 나를 뺏어줘, 다 부질없어지게...그런 심정으로 듣지만, 감정이 가라앉지 앉는다.
준형 서재.
-준형, 인터넷 검색 중. 유명 역술인들 기사, 운세 고민 상담 등, 광고 등 훑다가 전화.
준형 어, 나...잘 놀았냐...니 집에서 대충 이거저거 꺼내 먹구, 좀 전에 왔어...어,뭐(혜원 서재 쪽 힐끗)...이런 걸루 뭐라지는 않지...너랑 뭔 짓을 하는 것두 아닌데....됐구, 너는 누구한테 다니냐,..역술인...나 소개 좀 해 줄래?...백선생은 안되지, 학부형인데...
-조금 후, 준형, 서성이며 전화기 귀에 대고 받기를 기다리다가.
준형 (선다)아, 네, 유심조 선생 댁인가요?...네, 저, 다름이 아니라 예약을 좀 하려구 하는데요...네, 월요일 가능할까요? 서영우 대표 소개루 알게 됐는데...아이고, 그렇구나. 허허허, 뭐 할 수 없죠. 제가 시간 맞추겠습니다...네...
음악실.
-변주곡 9번.
-둘, 물끄러미 눈 앞을 보며 듣는다.
-10번으로 넘어가자, 혜원, 발끝으로 조금씩 박자 맞추고, 피아노 파트 나오자, 선재의 손끝도 작게 움직인다.
-변주곡 18번을 거쳐,
-둘, 그 사이 앉은 자리가 바뀌었다. 혜원은 소파 앞 바닥에, 선재는 벽에 기대 앉아,
-피날레.
-정적.
-한참 말없는 둘. 다시금 현실의 울적함.
혜원 (냉정을 되찾아야지)넌 이게 왜 좋아?
선재 그냥, 뭔가 끝을 보여 주는 거 같아서요.
혜원 그럼 너두 그걸 보여주믄 돼. 부자들 돈은 그렇게 뺏는 거야.
선재 (손 끝 만지작)
혜원 (선다)학교 레슨은 언제야?
선재 (일어서며)월수금 한시요.
혜원 화 목 토 오전 열 시, 총보랑, 오케스트라 반주 피아노 편곡한 거, 악보 챙겨서 회사 연습실루 와.
선재 (본다)
혜원 뭐.
선재 제가 선생님 사랑한다구 하는 거, 다 같잖구 웃기실 거 같아요...진짜, 너무 무섭게 사시잖아요.
혜원 너나 잘 해, 아는 척 하지 말구. (돌아서며)시간 지켜라.
-혜원, 나간다. 소리나게 문 닫히고, 새삼 선재를 휘감는 혼란, 두려움, 슬픔.나는 얼마나 작고 가난한가.
거실.
-혜원, 입 꾹 다물고 계단 오른다.
선재집. 밤.
-헤드폰을 쓴 선재, 원곡 들으며 악보 출력한다.
음악실. 밤.
-혜원, 오케스트라 반주 악보 보면서 연습.
선재 집 밤.
-선재, 피아노 파트 연주.
-사이 사이, 혜원의 반주.
혜원 침실. 파우더 룸. 밤.
-혜원, 화장수 병 열다가 손목 찌르르. 떨어뜨린다.
준형 왜 그래.
혜원 갱년기가 오나봐.
준형 (힐끗 나가며)아직 이르지 않나?
혜원 그런가?
-약 바르는 혜원.
아트센터 혜원 사무실. 화요일 아침.
-세진, 책상 앞에 서서 문서 몇 개 스태플러로 찍는데, 노크 소리.
세진 네...
-선재가 조심스레 들어서고 세진이 손에 든 것들 내려놓으며 맞아준다.
세진 어, 왔어요?
선재 (꾸벅)안녕하세요.
세진 (소파 가리키며)잠깐 앉아서 기다릴래요? 실장님 회의 중이시라,
선재 네,
-조금 후, 세진은 통화 중이고,
-소파의 선재. 반쯤 남은 주스 잔을 들고 있다. 곁에 윗도리와 가방.
-행어에 걸린 혜원의 옷과 가방.
-선재, 주스잔 만지작. 혜원을 대할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협주곡이라니, 혜원의 반주라니. 꿈만 같은 일인데.
세진 네, 십분 쯤 전에요...네...네...알겠습니다...(끊고 선재에게)내려오라세요.
선재 아, 네, (잔 놓고 일어서서 황황히 가방을 집어든다. 가방만)
세진 연습실 알죠?
선재 네, 지하 1층.
-급히 나가는 선재.
연습실 앞 복도.
-선재, 바삐 왔으나 문 앞으로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어떤 표정으로 혜원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일 두루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나는 그 중간 어디 쯤이겠지’ ‘우아한 노비’...내가 그런 말을 하게 만든 것 같다.
연습실.
-선재가 들어서면, 혜원, 직원과 전화 중. 선재 한번 힐끗 보고는 눈길 주지 않는다. 선재, 소파에 가방을 놓고 악보 꺼낸다. 복사본 각 2부씩 네 권.총보와 피아노 반주. 단정히 제본도 했다.
-두 대의 피아노에 악보 세워 놓는 선재.
혜원 피아노 위치가 이렇게 돼 있음 안되죠...통상적인 레슨이 아니라 협주곡 연습인데...마주 놓을 공간이 안되면 2번 방으루...응?!...김인주 교수 제자들 대관 줬어요?...(쯧)알았어요. 암말 하지 마...네...수고.(끊으며 작게)그지 같애.
선재 저 그거 괜찮은데요.
혜원 (본다)뭐?
선재 나란히 놓여두 괜찮다구요.
혜원 니 귀가 무슨 나팔 귀야?
선재 어제, 그거 녹음해서 옆에 놓구 들어봤는데요, 나쁘지 않았어요. 총보랑 싱크로가.
혜원 (그랬다구?)
선재 (본다.네...)
혜원 (칭찬 없이)준비 운동 해.
선재 (본다)
혜원 뭐.
선재 좀 괜찮아 지셨는지.
혜원 내가 그랬지. 너나 잘 하라구.
선재 (좀 보다가 피아노 앞에 앉는다)
-혜원, 지켜보고, 선재, 피아노 앞에 앉아 어깨 젖히며 숨쉬기.
-혜원, 악보(혜원용)를 집어 후르륵 넘겨 보고 표지를 본다. 큼직한 인쇄체 곡명. 손글씨로 작게 ‘혜원’이라 적혀 있다. 혜원, 안 본 척, 다시 펼쳐 세워 놓는다.
혜원 됐어.시작하자. (앉는다) 우선 인트로. (메트로놈 켠다)오케스트라 있다 치구, 해봐.
선재 (황당하다)
혜원 뭐 해?
선재 네.
-선재, 손 올리고 메트로놈 소리 듣는다. 작게 고갯짓. 두 마디 지나고, 타건 시작.
-둘 만 있는 공간에 긴 박자 한번씩 울린다. 이윽고, 선재, 멈추면,
혜원 장음이 더 어려워. 지금 그대로 하면 오케스트라보다 32분의 1정도 빨리 나올 거야. 반주 넣을테니까 아까 그대로 해 봐.
선재 (네. 정자세)
-혜원, 인트로 시작. 선재, 박자 맞추다가, 연주 시작. 8,9초 가량의 긴장이 숨막히게 느껴진다.
-이윽고 둘 다 멈춘다.
혜원 어때, 내말 틀려?
선재 (인정해요)
혜원 첫단추를 잘못 꿰면 바로 잡기 힘들어. 다시 한 번.
-둘, 인트로 다시 치고나서,
혜원 쫌 낫네. 변주 2번 혼자 해봐.
선재 네.
-선재, 자세 바로 하고, 혜원, 앉은 채 지켜본다.
-선재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파가니니의 멜로디.
음대 학장실.
민학장 (통화)아유 아니지...개정 법안 올리기만 하믄 뭐해. 의원들 밥 먹구 하는 일이 그건데...지난 번 회기 중에 통과 안된 게 수십 건이야. 사학법 관련된 것만...
-준형이 들어온다.
민학장 (손을 들어보이고 다시 통화)내 다시 전화 할게...어...(끊고)부탁 하나 할려구.
준형 말씀하세요.
민학장 다음 주에 기독 기업인 조찬 기도회가 있어요.쫌 커.
준형 아아, 얘기 들었어요...
민학장 찬양대랑 반주 팀 좀 맞춰봐. 학부 애들 말구 원생급으루.
준형 애들이 시간이 될래나 모르겠네요.
민학장 그래두 어떡해, 해야지.
준형 방.
-준형, 부산하게 책상 위 치우고, 앞에 종수.
준형 현악 오중주, 성가대, 다음 주 월요일이라니까이번 주 금요일까지 모아 놔라.
종수 이번 주 금요일이믄 너무 촉박한데요.
준형 뭐가 촉박이야! 밥 먹구 늘 하는 건데. 오늘 중으루 연락 돌려서 맞춰 놔.
종수 저, 연주료는.
준형 뭐?!
종수 저번에 조청장님 혼사 때는 밥두 안주구 차비두 안줘서요. 악기들구 올 때 갈 때 다 택시 타야 하는데 배려가 너무 없으시믄 곤란하죠. 저희 아버지두 목사님이시지만 신도들 시간 뺏는 거 자제하시거든요.
준형 이건 봉사야! 돈받구 하믄 그게 찬양이냐? 영광으루 알구 기꺼이 해야지! 나 지금 나가서 볼일 보구 들어갈 거니까, 어레인지 해놓구 연락해.
-준형, 나가고, 종수, 보다가 잇사이로 나직히,
종수 저 띠발 새끼를 내가,
-문 벌컥 열림. 준형이 들여다본다.
준형 나 택시 타구 가니까, 차 좀 딲아놔.
종수 아, 네,
아트센터 연습실.
-함께 치는 둘. 변주 8번에서 9번으로 넘어간다.
-혜원, 갑자기 건반 쾅 치며 일어선다.
혜원 너 지금 손가락 운동하니?!
선재 ...(아직 화가 나 있구나)
혜원 사색두 감정두 없는 기교가 무슨 소용이야?
선재 (서툰 위로)선생님 지금 멋있었어요.
혜원 뭐?
선재 손열음, 카푸스틴 치구 그렇게 일어서는 거 좋았는데.
혜원 나가서 찬 물에 세수 하구 와!
선재 (안먹히는구나. 일어선다)
화장실.
-선재, 손 씻고, 세수하고...
동 일각.
-선재,구석에 기대 서서 와이파이 접속.
연습실.
-소파의 혜원, 태블릿으로 선재 쪽지 본다.
선재 소리 막귀형, 나 정말 죽을 거 같아. 계속 화를 내구 있어. 지금 협주곡 연습 하는데, 분명히 자기가 틀렸거든?
혜원 (픽 웃음.한 손으로 자판)
혜원 소리 복 터졌구나. 협주 반주두 해주구.
선재 소리 그건 나도 알아. 꿈만 같은 일이지. 근데 숨이 막혀. 내가 크게 잘못한 거 같애. 내가 너무 많은 얘길 하게 만든 거야. 먹이사슬, 우아한 노 비, 나두 그런 말이 콱 박혀서 아파 죽겠는데, 자기 입으루 직접 한 사 람은 어떻겠어.
혜원 (외면. 글썽. 입술 잘근. 무슨 꼴이람...다시 자판)
혜원 소리 화 낼 만 하네.
일각.
혜원 소리 니 앞에서 아웃팅 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냐. 니가 여신이라고 믿는 내가 실은 노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다 보여 준 거잖아.
-선재,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그렇지...망설이다 문자 찍는다.
연습실.
-자판 치는 혜원,
선재 소리 어떡하지?
혜원 소리 뭘 어떡해. 니가 진심을 다하면 전해지겠지.
선재 소리 아, 진짜, 그런 말 누가 못해. 심장 꺼내서 보여 줘?
일각.
-선재, 핸드폰 쥔 채 벽에 이마를 찧는다.
혜원 소리 너 혹시, 그런 거 생각해봤어? 연상 여인의 처절한 콤플렉스라던 가.
-돌아서서 문자하는 선재.
연습실.
선재 소리 확 업구 어디루 튀어버릴까?
-혜원, 쓴웃음.
-세진이 들여다본다.
세진 대표님이 찾으세요.
혜원 (당황)어어,(일어서며 접속 끊는다)도시락 하나 시켜 줘. 이선재.
세진 아, 네,(핸드폰 꺼내는).
일각.
-화면. 막귀님이 퇴장 하셨습니다.
-선재, 터덜터덜 간다.
영우 사무실.
-혜원이 생수병 들고 들어온다. 소파의 영우, 서류 파일 덮어 탁자에 던지듯 놓으며 비아냥.
영우 이건 무슨 경우냐?
혜원 또 뭐...
영우 앉어...
혜원 (앉는다)
영우 이선재 레코딩 한다며. 실황 수준으로.
혜원 (물 한모금 마시고는)신경 쓰지 마. 회사 일두 바쁘실텐데.
영우 머?
혜원 재단에서 매년 하는 거야.
연습실.
-선재가 들어온다. 도시락 한 개와 생수가 놓여 있다. 선재, 혜원에게 전화.
선재 전데요...네,여기 도시락,
영우 방.
혜원 니 점심이야. 먹구, 아까 지적한 대목 연습하구 있어.(끊으면)
영우 어이구야,..니가 가르쳐?
혜원 나두 힘들어.
영우 뭐가 힘들어? 풋풋한 사내애랑 밀폐된 공간에서 단 둘이...오오, 그게 숨막혀서?
혜원 (허허 웃지만)
영우 (미세한 당혹감을 놓치지 않는다)좋겠다 얘, 니 돈 한 푼 안들이구 젊은 애랑.
혜원 시끄러. (선다)갈게.
영우 (잡아 앉힌다)어쭈.
혜원 (다시 앉으며 영우 팔 떼내는)심심해서 시비 거는 걸, 내가 뭐하러 더 들어주니?
영우 넌 지금 날 도와줘야 하잖어, 기집애야. 그런 조건으로 부대표 자리 줬는데 왜 딴짓하냐고.
혜원 안되겠다, 진짜 가야지.(간다)
영우 한마담이 언제 그렇게 주식을 사 모았니?
혜원 (멈칫...웃으며 돌아본다)어머, 그래?
영우 허허허,
혜원 직접 물어 봐. (돌아선다)
영우 (서류철 던진다)저게 증말.
혜원 (집어서 탁자 위에 놓는다)아님 자세히 알아보던가. 머리는 뒀다 어디 쓸래?
영우 나 머리 쓰는 거 함 보여줘?!
혜원 기대할게.(나간다)
영우 (지그시 본다)
역술관.
-준형, 외경심 가득한 태도로 유심조 선생에게 쪽지 내민다.
-준형과 혜원, 선재의 생년월일 적혀 있다.
-선생이 찬찬히 본다.
준형 저희 부부랑, 제가 가르치는 학생입니다.
선생 학생이믄,
준형 네, 저, 남학생.
선생 그러니까, 이렇게 셋을 같이 보겠단 말씀이죠?
준형 네, 실은, 저희 집사람이 동종업계 종사자라 그 친구랑 이래저래 만날 일이 많거든요.
선생 왜, 정분 날까봐서요?
준형 아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재주가 많은데 워낙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놈이라 어떻게든 제가 한번 잘 키워 보구 싶거든요. 저나, 집사람이랑 합이 잘 맞는지, 좀,
-선생이 뭔가 적어나가는 동안, 준형, 책상 아래로 문자 본다.
영우 소리 3번 연습실. 이선재랑 혜원이랑 단둘이 있는데, 너 열 안받어?
준형 (찌푸린다)
연습실.
-18번 함께 치는 혜원과 선재.
역술관.
-준형, 문자. ‘할 일 없으믄 잠이나 자’ 보낸다.
선생 허허 참, 대단하네.
준형 (얼른 자세를 바로한다)네,
선생 이 청년이, 이게 보통이 아니예요.
준형 어, 어떤 쪽으루,
선생 교수님께는 귀인두 이런 귀인이 없단 말이지.
준형 어떻게요?
선생 민둥산에 나무고, 빈 곳간에 쌀이고, 마른 입에 여의주야.
준형 (무슨 소리야)
선생 (뭔가를 또 쓴다)
준형 저희 집사람은요?
선생 당신 와이프는 관이 무려 네 개, 다 벼슬이네. 남자보다는 일과 명예를 우선시 하는 타입이지. 한데 부부간에 정은 그닥,
준형 네, 뭐 동지애로 살아갑니다. 유별나게 좋은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구 이혼이나 뭐 그런 거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선생 하면 안돼요.
준형 아니 그보다두, 이 친구랑,
선생 왜 자꾸 엮으시나.
준형 그게 아니라,
선생 부인의 성정을 믿으세요. 남편이 좋아서라기보다, 성격상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관이 네 갠데, 다 벼슬 관이예요... 남자보다 일이 늘 우선이죠. 뭣보다 이 친구, 절대 어디 보내지 마세요. 여기 이 넘치는 기운이 모든 걸 다 막아 주구, 교수님께 아주 큰 도약의 발판이 돼요. 몇 계단 껑충 뛰는 거지.
준형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뷰티샵 라운지. 밤.
-다미가 조그만 파우치 백을 들고 급히 온다.
-백선생과 김인주가 얘기 중.
다미 (백선생에게)여기,
백선생 아유 고마워요. 내가 너무 자주 흘리구 다닌다 그치?
다미 괜찮습니다. (목례하고 돌아서는데)
김인주 솔직히 이선재는 강교수 제자라구 할 수두 없죠.
-다미, 멈칫.
백선생 맞아요. 그 와이프가 아주 끔찍이 아낀다죠?
-다미, 바닥에 티끌이라도 줍는 양 엎드려 살피며 더 듣는다.
-김인주와 백선생은 어느 새 말도 텄다. 학부형과 교수, 투자분석가와 고객. 가장 끈끈하고도 냉정한 유대.
백선생 이번에 아주 큰 기회를 주나봐요. 재단 지원 음악회던가?
김인주 그러게요. 올해는 거기 우리 애들 좀 세워 볼려구 했더니, 벌써 다 결정했다는 거야. 아주 보기 좋게 대관 연주회루 밀려났지 뭐.
백선생 이선재가 그렇게 잘 해요?
김인주 제법 하긴 하는 거 같은데, 뭐 꼭 그거 뿐이겠어?
-다미, 간다.
선재 소리 아니, 선생님...교수랑은 달라...(7부)
뷰티샵 일각. 밤.
-다미, 숨듯이 서서 통화. 장호와.
다미 너 정유라 언제 만나?...나 오늘 손님들이 하는 얘기 들었는데, 어째 촉이 좀 안좋게 서서...선재 얘기 하는데 기분이 확 쏠리잖아. 기분 나쁘게... 정유라한테 좀 알아볼래?...그 와이프 어떤 사람인지...내가 바보냐? 그걸 선재한테 물어보게?! (이미 불길한 예감)
연습실. 밤.
-선재와 혜원, 피날레.
-사이. 혜원, 일어서서 악보 덮고, 선재는 그대로.
혜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선재 (본다)
혜원 (악보를 선재 앞에 들어보이는)장난 하니?
-악보 하단 ‘혜원’
선재 싫으세요?
혜원 뭐?
선재 웃으시라구,
혜원 너 이러다 까딱하믄 나한테 반말 하겠다?
선재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혜원 (돌아선다)불끄구 나가.
선재 (선다)
혜원 (멈칫)
선재 제 맘두 쪼끔만 생각해 주실래요? (담담하지만 답답함, 일말의 분노가 담겨있는)
혜원 ...
선재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어떤 형이 그랬어요. 스펙 따위 필요없구, 그냥 음악 즐기면서 살라구.
혜원 (픽 웃음. 그게 나란다)
선재 저는 그게 사랑이라구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이 곡두 그렇게 하구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가면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구, 변주 8번 스타카토 더럽게 맘에 안들다가 어느날 갑자기 뻥 뚫려서 기분 째지구, 그게 최고로 사랑해주는 거죠...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구 노비구 뭐구.
혜원 (먹먹하지만)목요일에 보자.(나간다)
선재 (속수무책일까? 물끄러미 볼 뿐)
혜원 사무실. 밤.
-혜원이 들어온다. 잠시 서 있다. 힘들다. 이런 감정으로 연습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가방 챙겨 나가려다가 문득 돌아보면, 소파에 선재의 옷.
거리. 밤.
-선재, 헤드폰으로 음악 들으며 걷는다. 유일한 위안.
선재 집 식당 앞. 밤.
-골목 들어서는 선재, 헤드폰 벗어 목에 걸고,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멈칫. 아차, 옷을 또 깜박.
-선재, 전화기 꺼내들고 잠깐 망설. 이 상황에서 혜원에게 이런 일로 전화 하기 정말 싫은데...할 수 없지. 단축 번호 누른다.
선재 (조심스러운)전데요...제가 또 옷을 두고 왔어요, 열쇠랑...네?!...(올려다 보고는 다시 전화. 믿기지 않는)지금요?!!!
선재 집 층계참.
-선재, 숨가쁘게 뛰어 올라오다가 선다. 믿을 수 없어...
선재집 현관 앞.
-선재, 조심스레 다가선다. 낮은 불빛 비치는 문. 벅차게 따뜻하다. 숨을 좀 고르고, 자기 모습 한번 살핀 뒤, 문을 연다.
선재 집 안.
-문이 열리고, 선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혜원의 구두. 이거 실제 상황이야. 침착해. 따뜻한 혜원의 음성 들려온다.
혜원 소리 내 구두 돌려 놓지 마.
-얼른 신발 벗고 올라서는 선재.
혜원 오늘은 좀 놀다 갈 거야.
-침대 끝, 선재의 옷 입은 혜원이 걸터 앉아 있다. 리스트를 함께 듣던 날 선재가 입었던 티셔츠와 빨랫줄에 널어뒀던 헐렁한 바지까지. 맨발에, 아직 덜 마른 듯 한 머리. 투명한 낯. 한 손에 읽던 곳 손가락 끼워 접어 든 책까지. 한없이 편해 보인다.
-행어에 선재의 윗도리(혜원 사무실에 두고 왔던)와 혜원의 외투. 가방.
-선재, 꿈만 같아서 제대로 웃어지지 않는다. 오혜원이 저기 저러고 있다.
혜원 들어오면서 나 너희 어머니한테, 감사합니다, 그랬어.
선재 (잘 하셨어요...)
혜원 (손끝으로 티셔츠 어깨 찝어 보이는)어떠니? 여친 코스프레.
선재 (비로소 조금 웃음)전에 보니까 걘 저희 엄마 꺼 입던데요.
혜원 그럼 여친 아니구 가족이야. 내 말이 맞어. 토 달지 마.
선재 걸리믄 선생님이 져요.
혜원 도망갈 데 봐 놨어.
선재 (활짝 웃음)겁나 섹시해요.
혜원 근데 그러구 서 있어?
선재 나갔다 오면 양치하구 손부터 씻어야죠.
혜원 (하하하)
선재 (함께 웃음. 눈이 부셔요. 당신, 최고예요)
혜원 집. 준형 서재. 밤.
준형 (전화.잠옷차림)오실장 이선재, 연습 끝났나요?
통제실.
직원 아까 나가셨는데요...네...
준형 서재.
준형 아,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끊고 뭔가 찬찬히 짚어보는 듯)
-준형, 태블릿 집어 이어폰 연결.
-선재의 동영상(혜원 음악실).
-준형이 집중하여 보는 건 간간이 찍힌 혜원의 모습들. 확대해서 보기도 하고...
-미간 좁히며 정지 누르는 준형.
-혜원이 눈물 닦는 장면.
-준형, 한참 보다가 중얼.
준형 초장에 빠졌구만..
침실. 밤.
-준형, 들어와 파우더 룸으로.
-알약병(수면 유도제) 손바닥에 던다.두 알.
-선생 말씀 귓가에 쟁쟁.
-침대. 준형, 모로 누워 껌벅인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스르르 눈 감는.
선생 소리 부인의 성정을 믿으세요. 남편이 좋아서라기보다, 성격상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관이 네 갠데, 다 벼슬 관이예요... 남자보다 일이 늘 우 선이죠. 뭣보다 이 친구, 절대 어디 보내지 마세요. 여기 이 넘치는 기 운이 모든 걸 다 막아 주구, 교수님께 아주 큰 도약의 발판이 돼요. 몇 계단 껑충 뛰는 거지.
선재집.
-고즈넉한데, 뜨겁다. 어두워서 더더욱.
-벽, 천장, 책상, 악보, 옷가지 등, 방 안의 모든 가난들과, 혜원의 구두, 외투, 가방이 합심하여 이들 남녀를 슬쩍 눈 감아주고 있다.
-아마도, 거친 호흡을 조심하며 성실하게 서로 만지는 중이겠지.
-이하, 오디오만. 비디오는 형용 불가.
선재 저, 잘, 못 할 수두 있어요...
혜원 (나직히 웃음.놀려먹는)왜...최고루 즐겨주신다며...그게 사랑이라며...
선재 (멋쩍어)아...진짜...그런 말 괜히 해가지구...
혜원 너 진짜 첨이야?
선재 생각해보니까, 아닌 거 같아요.
혜원 그걸 생각해봐야 알어?
선재 저번날, 리스트 듣구 나서, 안아드렸을 때...죄송해요.
혜원 너 그때 눈치 챘지. 나 선수 아닌거.
선재 쪼끔이요...
혜원 내가 너보다 더 못할지두 몰라...
선재 그건 내가 판단해요...
혜원 (우는 것 같다)
선재 ...괜찮아요...
-아마도 선재가 눈물에 입맞추는 듯.
-혜원의 낮은 흐느낌.
-그래서 더 격정.
선재 불편하면, 말 하세요.
혜원 아니,
-숨가쁜 배려 끝에...
-시간 경과. 낮은 불빛. 혜원, 선재, 캔맥주 하나씩 들고 바닥에 마주 앉아 있다. (캔맥주는 방금 선재가 뛰어나가 사왔다)혜원은 침대에 기대어 무릎을 세운. 선재는 피아노 앞에 책상 다리.
혜원 너 술 안먹는다며.
선재 누가 그래요.
혜원 언제 배웠어?
선재 고2 때. 담임이 가르쳤죠. 저희 학교는 거친 애들이 많았어요. 저 같은 애 절대 안 봐줘요. 양쪽에서 한팔 씩 잡고 입에다 소주랑 맥주랑 막 부어요. 간만에 학교 갔다가 그렇게 당하구 쓰러졌더니, 담임이 고량주 사들구 집으로 찾아왔어요. 배워두라구.
혜원 화끈하네.
선재 선생님은요...
혜원 나야 뭐든 여우같이 다 적절히 했지...태어날 때부터 마흔 살이었나봐.
선재 (본다)
혜원 (맥주 한모금 마시고)너 마흔이믄 나 환갑이다.
선재 어, 환갑. 죽이죠.
-선재, 훌쩍 일어서서 악보 한권 빼낸다. 모차르트 소나타집. 혜원이 보이도록 표지 넘긴다. 마리아 호앙 피레스 사진이 붙어 있다.
선재 이렇게 되는 거예요.
혜원 (짐짓 웃음)와우 마리아 여사...모짜르트는 저 언니 께 교과서야?
선재 주로.(피아노 악보대에 얹는다)
혜원 (피아노에 얹힌 사진 본다)60에 표정이 저럴래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니?
선재 (다시 앉아 맥주 집어든다)선생님이 더 이쁠 거예요.
혜원 뭐, 그럴 수는 있겠지. 있는대루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가꾸믄...근데, 얼굴은 표정이 반이야...생각, 감수성, 그런 거.
선재 멋있을 거 같은데. 선생님은 머리두 섹시하시잖아요.
혜원 넌 그런 말 할 때 아무렇지두 않어? 막 굼실 거리지 않니?
선재 이상한가?
혜원 그짓말 같지...
선재 그럼 뭐가 정말 같은데요?
혜원 장땡이잖아요, 노비구 나발이구, 술두 안처먹구, 쌩까시나요, 그런 거.
선재 이건 어때요?
혜원 뭐.
선재 혜원아,
혜원 어쭈...(발 뻗어 선재 무릎 툭)
선재 (피하는)저 여자 발에 약한 거 아시면서,
혜원 (또 툭)여자 발?
선재 오혜원 발, (달려든다)
-다시 뜨거워 지는 둘. 아까와는 다르다. 침대 위의 즐거운 유희.
-시간 경과. 혜원은 침대에 누워 바라보고, 선재는 피아노 친다.
-시간 경과. 선재는 자고,
-시간 경과. 이른 아침. 욕실. 옷을 갈아 입은 혜원, 거울 앞에서 옷섶을 여민다.
-잠든 선재 보다가 돌아서는 혜원.
-신발 신는 혜원.
선재 집 앞.
-혜원, 나오며 조심스레 통화.
혜원 네, 이사장님,
선재 방.
-선재, 벌떡 일어나 내려서는데,
혜원 소리 네, 지금 출발합니다...
-선재, 슬프고 두려운 각성. 내가 사랑한다고 저 여인의 인생이 바뀔까?...
8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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