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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불시착 9

 

 (세리)  사람이 참 한 치 앞을 몰라요

 

 암튼 인생은 뭘 장담하면 안 돼

 

 [긴장되는 음악]

 

 [총이 철컥 장전된다]

 

 [세리의 떨리는 숨소리]

 

 [세리의 겁먹은 신음]

 

 [떨리는 숨소리]

 

 [총을 철컥 장전한다]

 

 시키는 대로만 말하라

 

 [통화 연결음]

 

 [떨리는 숨소리]

 

 (정혁)  여보시오  [무거운 음악]

 

 나예요

 

 (정혁)  어디요, 지금

 

 왜 안 들어오고 전화를...

 

 긴데 이건 누구 손전화요?

 

 나 가요, 리정혁 씨

 

 (정혁)  어디를?

 

 뭐가 어디야?

 

 다 얘기했잖아, 구승준이랑 갈 거라고

 

 (정혁)  지금 간다고?

 

 어, 갑자기 일이 그렇게 됐어요

 

 일정이 당겨졌네?

 

 (정혁)  [힘주며]  어디요, 지금, 내가 가갔소

 

 어, 아니에요

 

 차 타고 벌써 멀리 떠났어요

 

 (세리)  미안해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왔네

 

 근데 우리 벌써  인사 여러 번 했잖아

 

 새삼스럽게 안 해도 될 거 같아

 

 (정혁)  아니오

 

 벌써 했어도  여러 번 했어도 해야 하오

 

 그, 새삼스럽게 해야 하니까  지금 어디인지만 말하시오

 

 [다급한 목소리로]  끊지 말고

 

 내 말 들으시오

 

 보이는 걸 말해 보시오  내가 다 찾아갈 수 있으니까

 

 [흐느낀다]

 

 리정혁 씨

 

 사랑해요

 

 [세리의 힘주는 신음]

 

 [총성]

 

 (괴한)  출발하라!  [자동차 엔진음]

 

 [차분한 음악]

 

 [통화 연결음]

 

 [안내 음성]  지금 찾고 있는 가입자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통화 종료음]  [떨리는 숨소리]

 

 [통화 연결음]

 

 [안내 음성]  이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거나

 

 봉사 구역 밖에 있으므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통화 종료음]

 

 [망연자실한 숨소리]

 

 [거친 숨소리]  [휴대전화 벨 소리]

 

 (영애)  정혁 동무?

 

 지금 집에 좀 빨리 와 봐야갔어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옥금)  어, 옵네다, 옵네다

 

 - (옥금) 어, 정혁 동지  - (영애) 어, 정혁 동무

 

 (영애)  아니, 지금 보위부에서 동무네 집을  수색한다고 난리가 났어

 

 저기, 삼숙 동무를 찾는 거 같은데

 

 다들 같은 생각인 거가?

 

 사람이 성이 잔뜩 났는데  더 멋집니다

 

 - (명순) 옳습니다  - (영애) 기렇지?

 

 [우당탕 소리가 들린다]

 

 (철강)  왔구먼, 리정혁이

 

 위에서 지령이 떨어져서 말이야

 

 우리 11과 특별 대상께선  어디로 가셨나?

 

 좀 모셔 가야갔는데 말이디

 

 무슨 이유입니까?

 

 난 다 알디

 

 그년은 11과도 특별 대상도  뭣도 아닌 거

 

 (철강)  너, 네 아비

 

 네 가족들을 개박살 내 줄  살아 있는 증거일 뿐이디

 

 그년 입 열게 하는 건  내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말라

 

 죽기 직전까지 패든

 

 전기로 살을 태우든  한 사나흘만 고문하면...

 

 [철강의 신음]

 

 [정혁의 힘주는 신음]  [긴장되는 음악]

 

 [정혁의 신음]

 

 [정혁이 기침한다]

 

 [정혁의 신음]

 

 [철강이 침을 퉤 뱉는다]

 

 [정혁의 힘겨운 신음]

 

 [철강의 힘주는 신음]

 

 [거친 숨소리]

 

 (철강)  내가 말했디?

 

 작년 고랑이 금년 이랑 된다고

 

 넌 새끼야

 

 끝났어

 

 끌고 가라

 

 [사람들이 놀란다]

 

 (옥금)  리정혁 동지, 괜찮습니까?

 

 (영애)  잘생긴 얼굴 다 망가졌다, 야

 

 - (월숙) 정혁 동지!  - (옥금) 리정혁 동지

 

 (월숙)  어캅니까, 이거!

 

 정혁 동지! 이거 어떡합니까  [옥금의 놀란 신음]

 

 - (옥금) 영애 동지  - (월숙)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옥금)  대좌 동지한테  알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명순)  저거 저렇게 끌고 가게 냅둬도 됩니까?

 

 (옥금)  어캅니까!

 

 어유, 정혁 동지!

 

 [거친 숨소리]

 

 (세리)  정신 똑바로 차려, 윤세리

 

 생각하자, 뭐라도

 

 그래, 좋은 거 생각하자

 

 기분 좋아지는 거

 

 어...

 

 [아련한 음악]

 

 (세리)  국수 삶는 리정혁

 

 향초랑 양초도 구분 못 하던 리정혁

 

 이젠 구분할 수 있게 된 리정혁

 

 ♪ 아니라도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말 ♪

 

 ♪ 우리 처음 만난 그날엔  어색해 웃어도 보고 ♪

 

 ♪ 지금의 나는 그리운 눈물  애써 참아봐요 ♪

 

 (세리)  물 마시러 가다가  이불 덮어 주는 리정혁

 

 (세리)  배웅해 줄게요, 집 앞까지만

 

 일없소

 

 아무 일 없소

 

 약 먹고 한숨 자면 일없소

 

 [철컥]

 

 일없소

 

 (세리)  별의별 일들이 많은데도

 

 자꾸만 일없다고 뻥치는 리정혁

 

 (정혁)  안전할 거요  내 눈에 보이는 데만 있으면

 

 보이는 걸 말해 보시오  내가 다 찾아갈 수 있으니까

 

 (세리)  자기가 무슨 진짜 어벤져스도 아니면서

 

 뭐든 다 할 수 있고  다 찾아갈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허세 쩌는 리정혁

 

 [흐느낀다]

 

 보고 싶어

 

 ♪ 내 모든 이유도 그대라고 ♪

 

 ♪ 햇살이 좋은 날 ♪

 

 [문이 철컥 열린다]

 

 [정혁의 신음]

 

 ♪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난 행복했어 ♪

 

 [문이 철컥 닫힌다]

 

 ♪ 이게 사랑인가 봐 ♪

 

 [힘겨운 숨소리]

 

 ♪ 그대라는 선물을 만난 건 ♪

 

 [한숨]

 

 ♪ 내 모든 순간이  전부 그대로 다 물들어 ♪

 

 ♪ 그대가 내 맘에 온 날부터 ♪

 

 [울먹인다]

 

 ♪ 사랑이라는 말론 모자란  맘으로 말할게요 ♪

 

 ♪ 꼭 안아줄게요  내 모든 순간은 ♪

 

 ♪ 그대니까 ♪

 

 [새가 짹짹 지저귄다]  [옅은 신음]

 

 [놀란 숨소리]

 

 [아파하는 신음]

 

 여기가 어디야?

 

 [긴장되는 음악]

 

 [힘주는 신음]

 

 여기요, 여기요!

 

 (세리)  [문을 연신 쿵쿵 치며]  아무도 없어요?

 

 여기요!

 

 그래

 

 두드린다고 열어 줄 거였으면  왜 가뒀겠어

 

 어떤 놈이 날 납치해서 가뒀어

 

 왜 안 죽이고?

 

 뭘 원해서?

 

 혹시 지금 날 보고 있나?

 

 당신 누구야?

 

 [문이 철컥 잠긴다]

 

 (치수)  씁, 거, 아시갔지만

 

 저희 같은 일반 군인들이  여기 이케 들어오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딱 마침 제 짜개바지친구가  여기 검찰 구류장에

 

 계호원들 사관장으로 근무 중이라

 

 (광범)  상사 동지가 생색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먹)  맞습니다, 이거이 다 누구 때문인데

 

 일전에 서단 동무 오마니가 오셨습니다

 

 긴데 표치수 동지가

 

 그날 술 먹고 세리 동무에 대해서  막 다 떠벌려 가지고...

 

 어... 막 다 떠벌린 것까진 아니고...

 

 (주먹)  그 오마니가 평양서 백화점 하는  엄청 큰 돈주라고 하던데

 

 사람 풀어서 세리 동무 잡아가  어케 했을 수도...

 

 (치수)  야, 서, 서, 설마...

 

 남조선 드라마에  이런 거 엄청 많이 나옵니다

 

 자기 자식 혼사에 제삼자가 껴들면

 

 (주먹)  남조선 돈주들은 주로 낯짝에

 

 물 싸대기를 날리거나  돈 봉투를 날립니다

 

 하...

 

 긴데 우리 공화국 돈주는  강단 있는 만큼

 

 [의미심장한 음악]  납치로 본때기를 보여 준 것이 아닌가

 

 (치수)  중대장 동지, 그 아주마니가  기럴 분 같지는 않았는데요

 

 (단)  경고했습니다

 

 후회할 짓 하지 마십시오

 

 동무들

 

 나가서 내가 시키는 일들을  좀 해 줘야갔어

 

 처음으로

 

 날 보고 싶다고 부른 곳이 영창이군요

 

 그 여자가 사라졌소

 

 기래서요?

 

 거기에 대해  동무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누구 짓인지, 어디로 데려갔는지

 

 지금 무사한지

 

 참 볼만합니다

 

 결혼 며칠 앞둔 남자가  다른 여자 무사한지 걱정돼서

 

 기케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라니

 

 (단)  차라리 잘됐군요

 

 결혼식 전까지 여기 두 손 두 발  꽁꽁 묶인 채 갇혀 있다가

 

 결혼식 때 나오십시오

 

 그때 보자요

 

 내 아버지요?

 

 나더러 후회할 짓 말라고 했지

 

 날 후회하게 만들려고  누굴 찾아간 거요?

 

 (정혁)  보위부를 찾아간 것 같진 않고

 

 동무 어머니가 그랬을 리도 없고

 

 설마 내 아버지를 만난 거요?

 

 [긴장되는 음악]

 

 내 아버지가 그 여잘...

 

 데리고 간 거요? 그 여잘...

 

 예, 죽였습니다

 

 (단)  이제 어디 가도 없습니다

 

 그러니 포기하는 편이 좋습니다

 

 (정혁)  내 아버지에게 전하시오

 

 만에 하나  그 여자 털끝이라도 다쳤다면

 

 아버지는 하나 남은 아들  잃어버리시는 거라고

 

 꼭 전하시오

 

 [문이 쾅 닫힌다]

 

 나도 같이 들어가 볼 걸 기랬나?

 

 정혁인 어케 하고 있대?

 

 (명석)  구, 국장 동지가 아직 정혁이 소식을  모르시는 거디?

 

 아, 어카다가 영창에 다 온 거가?

 

 - 알면 아주 난리가 나실 텐데  - (단) 두시라요

 

 [차분한 음악]  어?

 

 (명석)  야, 곧 결혼식인데!

 

 그이를 저 안에 둬야

 

 내가 결혼을 합니다  [명석의 한숨]

 

 알아듣게 말을 좀 하라!

 

 [속상한 숨소리]

 

 [명석의 답답한 한숨]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만복)  우필아!

 

 - 아바지!  - (만복) 아니...

 

 (만복)  아, 네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가?

 

 어제 어떤 사람들이

 

 고, 남조선 말 쓰는  예쁜 누나 잡아갔습니다

 

 (우필)  기러고 그 누나가  이걸 떨어트리고 갔습니다

 

 [긴장되는 음악]

 

 [세리의 겁먹은 신음]

 

 [당황한 신음]

 

 [놀란 숨소리]

 

 [겁먹은 숨소리]

 

 [째깍거리는 효과음]

 

 [놀란 숨소리]

 

 [긴장감이 고조되는 음악]

 

 (만복)  우필아

 

 너 이거 누구 보여 준 적 있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어?

 

 예, 아버지

 

 긴데 그 누나 일없갔습니까?

 

 (치수)  이야, 열 길 물속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모른다더니

 

 한솥밥 먹은 지가 얼마인데  여태 우릴 속인 거란 말이가?

 

 중대장 동지도 참...

 

 (광범)  우리 리정혁 중대장 동지가

 

 어디 자기 출신 자랑할 사람입니까?

 

 - 맞습니다  - (치수) 기래도 그렇지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숨긴 게  말이 되냐 말이야

 

 와, 우리 대위 동지가  총정치국장 아들이라니

 

 (치수)  와,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 야, 내가

 

 (주먹)  자기 금쪽같은 아들이  영창 가 있는 거 알면

 

 총정치국장께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어케든 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일단 중대장 동지가  우리끼리만 알고 있으라 했으니까

 

 입 다물라우들

 

 (함께)  예

 

 [치수의 한숨]

 

 [문이 달칵 열린다]

 

 [의미심장한 음악]

 

 충분히 다들 들었갔지요?

 

 (치수)  동무 목소리 좀 작았던 거 아니가?

 

 너무 대놓고 떠들면 더 수상합니다

 

 [치수의 깨닫는 신음]  (은동)  긴데 이 정도로 소문나갔습니까?

 

 씁, 야, 야

 

 (치수)  꽃 100 송이 피우는 데  벌 100 마리가 필요한 거이 아니야

 

 이 소문을 동네 지나가는  똥개까지 다 아는 데 반나절이면 된다

 

 씁, 이, 문제는

 

 이거이 진실이냐 기건데...

 

 나가서 해 줄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내 출신에 대해서  소문을 좀 내 줘야갔어

 

 내 아바지가...

 

 총정치국장이다

 

 [치수가 풋 웃는다]  [익살스러운 음악]

 

 [한숨 쉬며]  내 아바지가 지금 사정을 알아도

 

 날 여기서 내보내 줄 것 같지 않거든

 

 소문을 내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니  동무들이 좀 도와줘야갔어

 

 [치수의 한숨]

 

 (치수)  [작은 소리로]  내가 말했디?

 

 총 맞을 때 대가리 다친 거 같다고

 

 걱정 말라, 표치수 동무

 

 다 사실이니까

 

 시간이 없다

 

 (정혁)  되도록 빨리 소문이

 

 대좌 동지 귀에까지  들어가게 해야 한다

 

 씁, 자기 아버지가  총정치국장이라니...

 

 (치수)  이런 되지도 않는 후라이에  괜히 우리만 놀아난 건 아니갔지?

 

 아직도 우리 중대장 동지를 모릅니까?  기럴 분 아닙니다

 

 총정치국장... 아들?

 

 (금순)  예, 우리 집 세대주가

 

 그, 부대원들 말하는 걸  직접 들었다지 뭡니까

 

 [월숙의 놀란 숨소리]

 

 (월숙)  기러고 보니까

 

 뭔가 달랐어  [익살스러운 음악]

 

 벌써 이, 외모가 혁명적이었지 않아?

 

 말투, 걸음걸이도

 

 그, 일개 중대장치고는  너무 당당했거든

 

 - 옳습니다  - (옥금) 어, 기래기래

 

 (옥금)  사실 나도

 

 그, 어깨 떡 벌어진 거 봤을 때  뭔가 심상치 않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명순) 어깨 말입니까?  - (옥금) 어

 

 생각해 보시라요

 

 (옥금)  그 어깨가 어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 놓고 떡 벌어진 거지

 

 성장기 때부터 어디 가서 기가 죽거나

 

 오그라들 일 있었으면

 

 그렇게 태평양처럼 마음 놓고 드넓게  떡 하고 벌어질 수 있었갔습니까?

 

 - (명순) 아...  - (월숙) 일리가 있어

 

 - (옥금) 응  - (월숙) 그럴듯해

 

 - (옥금) 기렇지요?  - (월숙) 일리가 있어  [황당한 숨소리]

 

 [사이렌이 울린다]

 

 (군인)  31호 잠복 초소에서 놀가지 발생

 

 31호 잠복 초소에서 놀가지 발생

 

 (지휘관)  중대 비상! 중대 비상!

 

 (군인)  31호 잠복 초소에서 놀가지 발생

 

 31호 잠복 초소에서 놀가지 발생

 

 (대좌)  뭐? 아, 또 놀가지야?

 

 에이, 쯧

 

 전 중대 비상 대기 하라우

 

 조철강 소좌는?

 

 평양?

 

 아니, 그자는 이 시국에  무슨 반탐강습이야

 

 에이, 알갔어

 

 [수화기를 달칵 내려놓는다]

 

 나 밥 좀 빨리 줘

 

 얘기 들었습니까?

 

 뭐?

 

 리정혁 중대장

 

 아, 거, 영창 갔다며?

 

 [대좌의 웃음]

 

 (대좌)  그, 요즘 젊은것들은  위아래도 없는지 말이야

 

 아니, 자기 상관을 치받으면  어카자는 거야

 

 그 자식 당분간 햇빛 볼 일 없어

 

 당신은 기런 생각은 안 합니까?

 

 리정혁이는 왜 위아래가 없었을까

 

 그, 도덕이 없으니까 기렇지

 

 (대좌)  지난번에도 그놈이 예심국에 찔러서

 

 그, 조철강이랑 내가 조사받고 온 거야

 

 아, 자꾸 여기저기 캐고 다녀서  골 아프다고

 

 왜 그 동무는 겁대가리 없이

 

 (영애)  찌르고 캐고 쑤시고 다녔을까

 

 아이, 또 왜 빙빙 돌리고 난리야

 

 에두르지 말고 그냥 직진하라우

 

 당신 태어나서  총정치국장 만나 본 적 있습니까?

 

 아이, 내가 기런 높은 양반을  어케 만나

 

 왜, 그, 누구 줄 있대?

 

 아, 있었지

 

 긴데 누가 싹 잘라 버려서

 

 아, 누가, 어떤 미친놈이!

 

 (영애)  네가!  [대좌의 아파하는 탄성]

 

 와 기래!

 

 리정혁이가 쥐고 태어났단다

 

 그 총정치국장 수저를

 

 응?  [익살스러운 음악]

 

 (대좌)  아니, 그 집 수저를 왜?  [영애의 한숨]

 

 아들이라고!  리정혁이가 총정치국장의 아들!

 

 어?

 

 [대좌의 아파하는 탄성]  그때 내가 리정혁이한테  배려별 주자고 했지? 응?

 

 (영애)  말 안 듣고 애먼 놈한테 주더니  뭐? 햇빛을 못 봐?

 

 당신 인생이 햇빛 못 보게 생겼다

 

 어? 어? 어칼 거야, 어?  어칼 거냐고!

 

 어디 도망가니! 쯧  [문이 탁 열린다]

 

 [문이 달칵 열린다]

 

 [긴장되는 음악]  [놀란 신음]

 

 (세리)  누구세요?

 

 [세리의 겁먹은 신음]

 

 왜 이러세요?  [세리의 겁먹은 신음]

 

 차 들지 기러나

 

 송이버섯차네요

 

 (세리)  향도 좋고 감사하지만

 

 마시지 않겠습니다

 

 제가 뭐, 여기 손님으로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납치당해 와서 먹으란다고 먹을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여기가 어디인 거 같네?

 

 아버님 되시는 거죠?

 

 놀라실 거 없으세요

 

 똑같이 생기셨는데요, 서단 씨랑

 

 [의미심장한 음악]

 

 입매며 콧대며

 

 (세리)  특히 사람 째려볼 때 그 눈매가  아주 똑 닮으셨습니다

 

 - 기래 보이나?  - (세리) 네

 

 제가 이런 거엔  좀 남들보다 빠르고 예민한 편입니다

 

 기렇군

 

 솔직히 처음에 끌려올 땐  누가 이런 짓까지 하나

 

 막 열받고  또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이해가 된다?

 

 제가 따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세리)  두 사람 사이에 제가 껴서  방해하는 거 같고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충렬의 한숨]

 

 기래, 말해 보라

 

 무슨 목적을 가지고  리정혁이에게 접근을 하고

 

 그의 곁에 붙어 있었는지

 

 목적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세리)  저는 그러니까...

 

 그, 예기치 못한 강력한 돌풍으로 생긴

 

 남북 상호 방어 시스템의  한시적 오류로  [익살스러운 음악]

 

 찰나의 군사적 공백기가 만들어 낸  순수한 피해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뭐라?

 

 사고였다는 거죠

 

 아버님, 생각해 보십시오

 

 (세리)  저는 남한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뭐, 그냥 구멍가게 정도가 아니라  엄청 큰 패션 회사요

 

 [웃으며]  뭐, 제 자랑 같지만

 

 뭐, 해외 스토어도  한 14 군데나 되고요

 

 그런 제가 무슨 목적이 있다고  여길 일부러 와서

 

 이렇게 생고생을 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이 돈을 다 어디다 쓸까  죽기 전에 다 쓸 수는 있을까, 뭐...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온  선량한 서울 시민일 뿐입니다

 

 리정혁 씨는 그런 저를

 

 그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도와준 거고요

 

 기럼 이 모든 건 다  리정혁 때문이다?

 

 네? 아니요?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죠?

 

 아니요, 그 사람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세리)  정말이에요,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그것만은 정말  확실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충렬)  죄가 없다니

 

 남조선에서 넘어온  정체불명자를 숨겨 주지 않았니

 

 아니, 처음에는  그 사람이 신고를 하려고 했습니다

 

 근데 제가 협박했어요

 

 (세리)  '너 신고하기만 해라'

 

 '너랑 너희 부하들  그거 근무 잘못 선 거'

 

 '내가 확 다 불어 버릴 거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부하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죠

 

 기래서 둘 사이는  그거이 전부라는 거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리정혁 씨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씁!

 

 (세리)  어쩌다 보니까 좋아하게 됐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그 사람은 아니었어요  저만 그런 거였습니다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 사람은 지금쯤  제가 돌아갔다고 생각할 거예요

 

 신경도 안 쓸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님

 

 저 좀 도와주세요

 

 내가?

 

 [긴장되는 음악]  사람 써서 납치도 하시고

 

 딱 봐도 그 정도 힘은  있으신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충렬의 헛기침]

 

 제가 무사 귀환할 수 있도록

 

 통 크게 힘 한번 써 주십시오

 

 (세리)  사실 리정혁 씨는, 아시잖아요

 

 일개 대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 정말 아무런 힘이 없어요

 

 [헛기침]

 

 아버님께서 저 한번 딱 도와주시면

 

 틀림없는 보상과 보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세리)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문이 달칵 열린다]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  [문이 달칵 닫힌다]

 

 뭐야

 

 간헐적 단식으로 다져진 나야

 

 [꼬르륵 소리가 난다]

 

 [한숨]

 

 [문이 달칵 열린다]

 

 (세리)  저는 여기서 쌀 한 톨도  삼키지 않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

 

 위험할까 봐 그러면  내가 먼저 먹어 볼까요?

 

 누구세요?

 

 아니...

 

 (세리)  아니, 그거보다

 

 저를 왜 여기 데려오신 거예요?

 

 미안하게 됐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음식은 안전하니 먹어도 됩니다

 

 (세리)  저기...

 

 혹시 리정혁 씨...

 

 지금 잘 있는지

 

 그 사람이 저 때문에  여기서 난처해지거나

 

 뭐, 어떤 처벌 같은 걸 받거나  그런 일은 없어야 되거든요, 절대로

 

 리정혁이 기케 좋습니까?

 

 아니, 그...

 

 꼭 그렇다기보다는

 

 [한숨]

 

 여자가 이케 찬 데서 자면  몸에 안 좋습니다

 

 [차분한 음악]

 

 (윤희)  오늘은 여기서 자는 게 좋갔시요

 

 근데 여기 방 주인이 누군지...

 

 (세리)  저는 원래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 성품, 취향

 

 뭐, 이런 것들이  두루두루 다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아는 누군가랑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명은)  단아, 그, 정혁이가 몇 호실이라고?

 

 [세리의 다급한 숨소리]

 

 [명은의 거친 숨소리]

 

 서단 씨 어머니 아니시죠?

 

 혹시 리정혁 씨 어머니세요?

 

 [충렬의 한숨]

 

 남조선에선 사망 신고까지 된  재벌 딸이

 

 씁, 아이, 대체 왜 여기 와서  내 아들을 만난 건지

 

 (참모)  절대로 돌려보내시면 안 됩니다

 

 저대로 남조선에 돌아가면  파장이 커질 겁네다

 

 반드시 국장 동지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생길 거라고 봅네다

 

 군사부장 쪽 움직임도 심상치가 않고  한시가 급합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오늘 밤이라도 데리고 나가

 

 제 선에서 조용히 처리하갔습니다

 

 [헛기침]

 

 오늘 밤은 좀 늦었고

 

 예?

 

 내 마누라가 말이야

 

 잠은 재워 보내자고 자꾸...

 

 에이, 쯧

 

 일단 오늘 밤은 좀 두고 보자우

 

 [스위치를 달칵 누른다]

 

 [세리의 한숨]

 

 (세리)  아, 진짜 미치겠다, 리정혁

 

 [잔잔한 음악]  하, 아역 배우야?

 

 하...

 

 혼자 이렇게 튀게 잘생길 일이냐고

 

 [세리의 귀여워하는 신음]

 

 이 글씨를 어쩔 거야

 

 너무 귀여워

 

 [세리의 웃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거야?  리정혁 씨?

 

 근데...

 

 군인이 됐네?

 

 [잔잔한 연주]

 

 [잔잔한 음악]

 

 [떨리는 숨소리]

 

 [한숨]

 

 [새가 짹짹 지저귄다]  [정혁의 한숨]

 

 (소장)  대좌 동지

 

 면회 정도야 제 손에서 가능하지만  보석은 다릅니다

 

 (대좌)  [잔을 잘그락 내려놓으며]  검찰소 구류소장이

 

 보석 정도로 절절맬 일이오?

 

 상관을 폭행한 사건입니다

 

 그것도 대대 보위 지도원을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다고

 

 보위 사령부에선 아주 아래턱들을  덜덜 떨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 소장 동무  이케 소식에 늦어 가지고

 

 중앙 진출 하갔어?

 

 [소장의 헛기침]

 

 [대좌가 소곤거린다]

 

 나도 아직까지  그, 다리가 후들거려서

 

 어케 여기까지 왔나 모르갔다

 

 아...

 

 사실 저는 사단 검찰 구류소장으로서

 

 이 사건이 과연  구타 사건이 맞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은 있었습니다

 

 - 기렇지?  - (소장) 구타라는 건  [익살스러운 음악]

 

 이게 구타거든요

 

 (소장)  '주먹 구'에 '때릴 타'

 

 '칠 구'에 '때릴 타' 아니고?

 

 아니고요

 

 자고로 주먹으로 때려야 구타디요

 

 (대좌)  어, 긴데?

 

 우리 리정혁 중대장 동무는

 

 손바닥을 쫙 펴고  때렸다는 것 같았습니다

 

 얼핏 기케 들은 것 같습니다

 

 - 기럼 구타가 아니구먼  - (소장) 아니디요

 

 그, 억울하게 영창살이하고 있는  리정혁이 어디 있나

 

 내가 데리고 나가야갔어

 

 (대좌)  이번 일로 배운 게 있을 거야

 

 첫째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

 

 둘째

 

 기럴 땐 항상

 

 이 형을 찾는다

 

 기런 일이 있었으면  이 형부터 찾았어야지

 

 그 점 반성하라우

 

 예

 

 자, 자

 

 (대좌)  큰 경험했으니까 며칠 푹 쉬고

 

 뭐, 우리 안사람이  뭘 상다리 부러지게 준비했다니까

 

 일단은 우리 집으로 가자우

 

 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 기래  [긴장되는 음악]

 

 뭔데?

 

 (대좌)  아, 뭔데

 

 (옥금)  자, 리정혁 동지가 좋아하는  무생채를 여기다가

 

 - (월숙) 아이고, 참...  - (옥금) 아, 중앙에 놔야지 이쁜데

 

 - (월숙) 어! 대좌 동지 오셨습니까  - (옥금) 아이고, 오셨습니까

 

 (영애)  아이고! 오셨시라요

 

 아니, 왜 당신 혼자야?  우리 리정혁 동무는?

 

 (대좌)  몰라, 뭐, 어디를 급히 가야 한다고

 

 씁, 긴데 이상한 부탁을 하네

 

 무슨 부탁?

 

 [긴장감이 고조되는 음악]

 

 리정혁 씨가 어머니 닮아서  요리를 잘하나 봐요

 

 우리 정혁이가 국수를 삶아 줬나?

 

 네, 국수도 잘 만들어 주고  커피도 맛있게 내려 주고요

 

 [세리의 탄성]

 

 어머니 닮아서 따뜻한가 봐요  리정혁 씨

 

 [잔잔한 음악]

 

 (윤희)  정혁이 네 생각은 어떠니?

 

 너무 서두르는 거 같으면...

 

 오래된 약속 아닙니까, 지켜야지요

 

 원랜 우리 정혁이가 따뜻한 아이였는데

 

 언젠가부터 기렇지가 않았거든

 

 (윤희)  아무한테도 곁을 안 주고 차갑고

 

 긴데 따뜻하다니

 

 다행이네

 

 [거친 숨소리]

 

 어디 있습니까?

 

 누구 말이니?

 

 아시지 않습니까!

 

 (정혁)  아바지가 그 여자 데려가신 거  다 알고 왔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저 어디 숨을까요?

 

 (세리)  걱정 마시고 딱 잡아떼세요

 

 저 사람 인생이...

 

 저 때문에 너무 멀리 와 버렸네요

 

 저도 더 이상은 안 보고 싶거든요

 

 봐 봤자 울기나 하지

 

 어디...

 

 지하실 같은 데 없어요?

 

 (정혁)  설마...

 

 죽었습니까?

 

 주, 죽였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충렬)  넌 네 앞날에 대해서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거네?

 

 아니요, 생각해서 이럽니다

 

 [무거운 음악]

 

 앞날의 제가 오늘을 끝없이 되돌아보고

 

 후회하면서 사는 게 싫어서 이럽니다

 

 (정혁)  내가 좀 빨랐다면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더 잘했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자책  더는 하고 싶지 않아서 이럽니다

 

 기케 사는 게 얼마나 지옥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바지도!

 

 [충렬이 흐느낀다]

 

 무혁아

 

 [힘겨운 신음]

 

 집까지 오는 내내  숨도 잘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정혁)  나 때문에 그 사람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봐

 

 그 사람이 잘못됐다면

 

 전 죽는 날까지  지옥에서 살게 될 겁니다

 

 숨 쉬어라, 정혁아

 

 (윤희)  왜 숨을 못 쉬니

 

 내 새끼 지옥에서 살게 할 순  없지 않습니까?

 

 [부드러운 음악]  [슬픈 숨소리]

 

 리정혁 씨 말 잘하네

 

 그렇게 말 길게 하는 거 처음 봤어

 

 ♪ 지나가는 길에 보인 ♪

 

 ♪ 나의 한 뼘보다 작은 꽃에 ♪

 

 ♪ 눈이 가듯 너의 작은 ♪

 

 얼굴은 또 왜 이래요

 

 (세리)  또 다친 거예요?

 

 일없소

 

 맨날 일이 없대

 

 누가 이런 거예요, 진짜

 

 늦어서 미안하오

 

 (세리)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나 때문에...

 

 항상 내가 문제야

 

 문제 아니오

 

 나만 여기 안 왔어도

 

 아니오

 

 아니오

 

 ♪ 잊지 마요 내가 있다는 걸 ♪

 

 (충렬)  음, 기래

 

 아버지 면전에 큰소리 실컷 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하네?

 

 아버님께 사과드려요

 

 (세리)  사고는 자기가 쳐 놓고

 

 불효 자식처럼  막 그렇게 화를 내면 어떡해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요?

 

 (충렬)  잘했다는 거네?

 

 아니, 기, 기건 아니지만...

 

 (정혁)  사실을 아셨을 때  차라리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다면...

 

 말했으면 순순히 내줬을 거고?

 

 네가 숨겨 둔 여자 하나로

 

 우리 집안이  끝장날 수도 있는 상황이야!

 

 기렇지만 기건 다 제 잘못이지  이 여잔 잘못 없습니다

 

 (충렬)  에?

 

 아, 저 동무 말로는  다 본인의 잘못이라던데

 

 본인이 널 협박했고

 

 기래서 넌 어쩔 수 없이  보위부에 신고를 못 한 거고

 

 무슨...

 

 (정혁)  아닙니다, 저는 기딴 협박 따위  개의치도 않았고

 

 제 자의로 신고를 안 한 겁니다

 

 와?

 

 다칠까 봐서

 

 뭐...

 

 [따뜻한 음악]

 

 보위부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어떤 일 당할지도 모르고

 

 (정혁)  다칠 수도, 이용당할 수도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기래서 보낼 수 없었습니다

 

 리정혁 씨...

 

 (충렬)  이야, 이거, 이거

 

 야, 야, 야, 야  거,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지라

 

 예

 

 우리 밥 먹던 중이었는데 가서 먹자

 

 이야, 이거, 이거

 

 [승준의 헛기침]

 

 아, 이거? 괜찮아요

 

 (승준)  보위부 애들이 들이닥쳐서  한바탕 뭐...

 

 [승준의 웃음]

 

 나 지금도 초대소 못 가고  호텔에 있잖아요, 응

 

 누가 물어봤습니까?

 

 뭐 시켰어요?

 

 (승준)  아,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었더니  배가 고프네

 

 [단이 입바람을 후 분다]  왜 그래요, 무섭게

 

 어어?

 

 (단)  내가 리정혁 동무  언제 처음 봤는지 압니까?

 

 모르지만 나 진짜 안 궁금한데

 

 진심이야, 안물안궁, 저...

 

 (단)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

 

 우린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말이지요

 

 [아련한 음악]

 

 (어린 단)  오른쪽은 초 칠이 덜 된 것 같구나

 

 좀 더 빡빡 문지르라

 

 (여학생들)  빡빡 문지르라

 

 (여학생1)  아니, 저거 리정혁 동무 아니네?

 

 (여학생2)  어데, 어데?

 

 [여학생들의 함성]

 

 (어린 단)  청소하다 말고 와 기래!

 

 (여학생3)  야, 저건 봐야 돼

 

 빨리 와 보라우

 

 리정혁 동무 농구하는 걸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네

 

 (어린 단)  리정혁이 누구인데?

 

 너 리정혁 몰라?

 

 전국 예술 경연 대회에서  최우수상 세 번 받고

 

 이번에 차이콥스키 콩쿠르  준비한다는 애

 

 - 멋지구나, 야  - (여학생3) 멋있다, 야  [여학생들이 소란스럽다]

 

 [여학생들의 환호]

 

 (단)  그때부터였습니다

 

 어디를 가도 정혁 동무만 보였던 게

 

 [부드러운 음악]

 

 [여학생들이 말한다]

 

 (단)  한 번도 말은 안 했지만

 

 난 우리가 서로를 안다고 믿었습니다

 

 [종소리가 울린다]

 

 (단)  기래서 집안끼리 정혼을 하고

 

 부푼 마음으로 정혁 동무가 유학하던  스위스까지 날아갔습니다

 

 [종소리가 울린다]

 

 [학생들이 시끌벅적하다]

 

 [함께 인사를 나눈다]

 

 하, 참...

 

 리정혁 동무

 

 아, 서단 동무?

 

 [호응한다]

 

 아바지께 얘기 들었습니다

 

 우리 금성중학교...

 

 처음 보갔습니다

 

 [차분한 음악]

 

 처음 보갔습니다

 

 [단의 헛웃음]

 

 (단)  처음 본다니...

 

 자기가 날 처음 봐?

 

 지나가는 똥개도  기케 자주 마주쳤으면 알아보갔다

 

 내가 먼저인데

 

 내가 그 여자보다 먼저 아닙니까?

 

 내가 먼저 보고 먼저 좋아했는데  기딴 거 소용없는 겁니까?

 

 바보네, 서단 씨

 

 원래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승준)  아, 그만 마셔요, 몇 잔째야

 

 내가 취한 것 같니?

 

 예

 

 [한숨]

 

 새끼 어케 알았지?

 

 (단)  이 새끼가 뭘 좀 아네

 

 [헛웃음 치며]  서단 씨

 

 반말까진 억셉트하겠는데  갑자기 욕은 좀...

 

 - 야!  - (승준) 예?

 

 내 마음이야

 

 아, 나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뭘?

 

 이렇게 매력적인데  왜 싫다는 거예요, 리정혁은?

 

 [익살스러운 음악]

 

 - 뭐?  - 다시는 그 입으로 욕하지 마요

 

 (승준)  볼수록 내 타입이야

 

 나 떨리니까 이제 그만

 

 쯧

 

 이런...

 

 사람 볼 줄 아는 새끼

 

 너 좀 괜찮다

 

 그렇죠? 나 괜찮죠?

 

 [혀를 쯧쯧 찬다]

 

 괜찮으면 뭐 하니

 

 그 에미나이한테 까여서

 

 (단)  아니, 네가 까이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이 됐갔니?

 

 뭐래, 내가 까인 게 아니고

 

 아이, 서단 씨가...

 

 (승준)  어어? 어?

 

 [단의 술 취한 신음]

 

 (명은)  아니, 동무는 누구야?

 

 - 죄송합니다  - (명은) 아니, 동무 누군데...

 

 [명은의 놀란 숨소리]

 

 (단)  야, 자고 가라

 

 (명은)  어머, 이 미친 에미나이 이거  셧업하지 못하갔니?

 

 동네 창피하게, 진짜, 아이!

 

 아, 진짜...  [익살스러운 음악]

 

 [멋쩍은 웃음]

 

 운전공 동무가 방금 뭘 봤을 거야

 

 예, 본 게 없지는 않습니...

 

 (운전공)  다만 뭘 봤는지 생각이 잘 안 납니다

 

 (명은)  기래기래, 계속 그렇게  생각이 안 나야 할 거야

 

 (운전공)  긴데 약혼자가  전방 부대 대위라고 들었는...

 

 기억이 전혀 나질 않습니다

 

 [거친 숨소리]

 

 자고 가라

 

 [어이없는 숨소리]

 

 아이고, 저, 저, 저, 저

 

 (명은)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어머!

 

 어머나, 어머나

 

 어머나, 이 종간나 새끼

 

 어디로 튄 거야?

 

 [거친 숨소리]

 

 운동 부족이야, 운동 부족  [휴대전화 벨 소리]

 

 아이, 씨

 

 네, 접니다

 

 예?

 

 [노크 소리가 들린다]

 

 네?  [문이 달칵 열린다]

 

 아, 난 또  [문이 달칵 닫힌다]

 

 누굴 기대했길래?

 

 아, 뭘 기대해요

 

 아무래도 남의 집에서, 남의 방에서

 

 혼자 좀 불안하고 불편하고 그래서  잠도 잘 안 오고

 

 불안하고 불편해서  어젯밤 밤새도록 피아노를 친 거요?

 

 어머니가 그러세요?

 

 아니...

 

 그냥 너무 좀 심란하고 그래서

 

 우울할 때는 어떤 뭐

 

 그런 예술로 마음을 좀 달래곤 하는 게  습관이야

 

 근데 우리 리정혁 씨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거예요?

 

 (세리)  본의 아니게 보게 됐네?  어린 시절의 꿈을

 

 다 지나간 일이오

 

 그럼 나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세리)  내가 어제 쳤던 건데

 

 혹시 이 곡 뭔지 알아요?

 

 [잔잔한 연주]

 

 [잔잔한 음악]

 

 내가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거든?

 

 음악 좀 안다는 사람들한테도

 

 근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잔잔한 피아노 연주]

 

 이 곡을 어케 알고 있는 거요?

 

 (세리)  스위스 갔을 때 누가 연주하는 거  우연히 들었어요

 

 근데 그때 내가 딱 듣고 너무 좋아서  외워 놨거든?

 

 근데 도무지 누구 곡인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거지

 

 [어이없는 숨소리]  거기가

 

 아, 눈 쌓인 진짜 예쁜 호숫가였어

 

 씁, 이름이 뭐였더라?

 

 (정혁)  이젤트발트

 

 어, 맞아요, 거기

 

 근데 리정혁 씨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정혁의 옅은 숨소리]

 

 [잔잔한 연주]

 

 [차분한 음악]  이거 맞아요

 

 아는구나

 

 이거 누구 곡이에요?  제목이 뭐예요?

 

 늦은 오후였고

 

 물안개가 자욱했고

 

 난 형의 부고를 듣고  스위스를 떠나던 길이었지

 

 그게 무슨...

 

 내 형을 위해 만든 이 곡을

 

 그 호숫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주했었소

 

 [세리의 놀란 숨소리]

 

 [잔잔한 피아노 연주]

 

 [잔잔한 음악]

 

 [놀란 숨소리]

 

 그날...

 

 거기서 연주한 사람이  리정혁 씨였다고요?

 

 [차분한 음악]

 

 하, 어떻게...

 

 [놀란 숨소리]

 

 말도 안 돼

 

 (세리)  나 그날 진짜 외로웠는데

 

 그때

 

 나 정말 죽고 싶었는데

 

 풍경이라도 예쁜 데 가서

 

 아무한테도 폐 끼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사라지자

 

 그러고 떠난 여행이었거든요

 

 근데 당신이...

 

 거기 있었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도

 

 날 살렸네

 

 잘 들으시오

 

 내일 당신은 집으로 돌아갈 거요

 

 [놀란 숨소리]

 

 [군사부장의 힘주는 신음]

 

 [거친 숨소리]  [의미심장한 음악]

 

 (철강)  부대 사택 마을에

 

 그 시간대에 드나든 외부 차량들 중에

 

 가번호를 쓰고 있는  수상한 차량이 있어서 추적을 해 보니

 

 평양 서재골 방향에서 사라졌습니다

 

 총정치국장의 자택이 있는 동네지요

 

 [한숨]

 

 그 에미나이가 그 차를 타고  거기로 갔다고 치자우

 

 (군사부장)  지금도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

 

 진작에 없애 버렸을 수도

 

 마침 서재골 초대소  담당 보위 지도원이

 

 (철강)  제 보위 대학 동기여서  은밀히 알아봤습니다

 

 들어온 차는 있었지만  아직 나간 차는 없었답니다

 

 [한숨]

 

 군사부장 동지

 

 지금 치면  굉장한 것을 잡을 수 있습니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음악]

 

 받들어총!

 

 (군사부장)  뒤에 따라오는 차도 동행이야  통과시키라

 

 예!

 

 [통화 연결음]

 

 예, 국장 동지

 

 제가 긴히 토의할 일이 있어서  지금 댁 앞에 와 있습니다

 

 잠깐 좀 뵐 수 있갔습니까?

 

 미안합니다, 총정치국장 동지

 

 군사부장 동무가 기랬으면  기럴 만한 긴급한 일이 있었갔지  [긴장되는 음악]

 

 음, 우린 구면이구먼

 

 예, 지난번 리정혁 동무 병실에서  잠깐 뵀습니다

 

 (충렬)  음, 기랬지

 

 긴데 어케 두 사람이 같이 왔네?

 

 [멋쩍게 웃으며]  이 동무가...

 

 좀 이상한 제보를 하나  제기해서 말입니다

 

 제보?

 

 보위 사령부에서 수배 중인 인물이  여기 숨어 있다고 하니

 

 이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기래서 지금 내 집을  가택 수색이라도 하겠다는 거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케 감히...

 

 (군사부장)  기렇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인물이 여기 숨어 있다가

 

 국장 동지에게 해라도 가하면

 

 기건 안 되는 일 아니갔습니까?

 

 나 생각해 주는 건  동무밖에 없구먼기래

 

 (철강)  보위 사령부에서 발급된  긴급 수사 협조 공문입니다

 

 잠시만 집 안을 좀 살피갔습니다  국장 동지

 

 (군사부장)  다 형식적인 거지요

 

 예를 갖춰서 하라

 

 (보위부원)  수색하라!  [보위부원들이 대답한다]

 

 하...

 

 기가 막힌다

 

 긴급 교방이라니

 

 (치수)  긴급 교방이라니!

 

 (주먹)  중대장 동지가 총정치국장 아들이면

 

 그 직속 부하인 우리들에게도  콩고물 정도는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케 살짝 기대도 했는데

 

 콩고물은 고사하고 날벼락이라니

 

 (은동)  원래대로라면 내년 봄에나  근무 서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야

 

 우린 다 중대장 후라이 깐 거에  뒤통수 맞은 거야

 

 (치수)  생각들 해 보라우

 

 자기가 진짜 총정치국장 아들이었으면

 

 길바닥에서 총은 왜 맞고  영창은 왜 끌려가갔어

 

 [은동의 깨닫는 숨소리]

 

 기냥 다음 세상이 있다믄

 

 총정치국장 아들 정도로는  태어나고 싶다

 

 뭐, 기런 개인적인 소망이 담긴  후라이를 깠는데

 

 우리 모두 놀아난 거라니까

 

 왜 한마디도 안 하고 있습니까?

 

 (주먹)  뭐, 혹시 중대장 동지한테  미리 들은 얘기라도 있습니까?

 

 [긴장되는 음악]

 

 (월숙)  기래서 우리 정혁 동지가  대좌 동지에게 뭘 부탁했다는 겁니까?

 

 (영애)  리정혁 동무가 글쎄 우리 세대주한테

 

 (정혁)  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 기래

 

 뭔데?

 

 (대좌)  아, 뭔데

 

 긴급 교방에  제 중대를 투입시켜 주십시오

 

 [여자들의 놀란 숨소리]

 

 (옥금)  이 엄동설한에

 

 전초선 긴급 교방을 시켜 달라  기랬다는 겁니까?

 

 [옥금의 놀란 숨소리]  (명순)  전초선?

 

 (월숙)  정혁 동무가 영창 들어갔다가  정신이 나간 겁니까?

 

 왜 기런 부탁을 합니까?  [옥금이 호응한다]

 

 [문이 탁 열린다]

 

 [보위부원들이 우당탕거리며 뒤진다]

 

 (광범)  중대장 동지는 세리 동무와  전초선으로 들어갑니다

 

 기래서 교방 근무를 신청한 겁니다

 

 뭐? 뭔 소린 거가, 거긴 왜!

 

 왔던 길로 들어가 다시 가는 겁니다

 

 아니, 기게 말이 되...

 

 (주먹)  어케든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말이 아주 안 되지는 않습니다

 

 기건 기렇지

 

 우리만큼 거길 잘 아는 사람들이 없지

 

 (치수)  막말로 초소도 우리가 지키는데

 

 (은동)  수색도 우리가 하고

 

 총책임자도 우리 중대장 동지고

 

 (주먹)  거기는 완전한 우리 구역이니까니

 

 [호응한다]

 

 [천둥이 콰르릉 친다]

 

 [무거운 음악]

 

 [충렬의 한숨]

 

 동무가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은  잘 알갔지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갔어?

 

 좀 있으면 날 저물갔구먼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제기된 제보가  오보였던 것 같습니다

 

 [군사부장의 힘주는 신음]  [철강의 신음]

 

 (군사부장)  이런 거랑말코 같은 새끼

 

 너 대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 지금 장난해?  - 어허

 

 (충렬)  그만하오

 

 (철강)  리정혁 동무가 여기 오지 않았습니까?

 

 와서 그 여성을 빼돌린 거 아닙니까?

 

 야!

 

 음...

 

 아직 소식 못 들었나 보구먼

 

 (충렬)  전방 부대에 놀가지가 나와서  긴급 중대 교방이 있었소

 

 [긴장되는 음악]  내 아들놈은  긴급 교방된 중대장으로서

 

 지금쯤 거기 있을 거요, 전초선에

 

 (군사부장)  기런 줄도 모르고

 

 정말 결례했습니다, 국장 동지

 

 거기입니다  기래서 전초선으로 간 겝니다

 

 그 여자를 남쪽으로  내려보내려고 말입니다

 

 (군사부장)  입 다물라

 

 제 말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그 둘이 비무장 지대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군사부장의 힘주는 신음]

 

 미안합니다, 국장 동지

 

 (군사부장)  이자는 제가 처리하갔습니다

 

 끌고 가라!

 

 (철강)  부장 동지

 

 [새가 지저귄다]

 

 [잔잔한 음악]

 

 (세리)  비무장 지대 안에도  이런 마을이 있구나

 

 전쟁 전엔 여기도  사람 사는 데였으니까요

 

 (치수)  주먹아

 

 이 집이 이 마을에선  그나마 상태가 제일 말짱한 집이야

 

 일단 여기 와서들 앉으라우, 응

 

 [치수의 힘주는 신음]

 

 (치수) 자...

 

 이거이 술이 아니야, 응? 약이야

 

 이, 적어도 1953년 이전에 담가진

 

 표치수 동무

 

 예

 

 (세리)  근데 왜 장독대 위에 물그릇이 있어?

 

 (은동)  아, 기거이 정한수 그릇입니다

 

 그, 물 떠 놓고 비는 그거?

 

 예

 

 [호응한다]

 

 (치수)  이 집에 전쟁 나간  아들이 있었던 거 같다

 

 [치수가 숨을 후 내뱉는다]

 

 방 안에 아직도 사진이 걸려 있거든

 

 우린 저 정한수 그릇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지

 

 우리도 다 오마니는 있으니까

 

 (주먹)  인차 돌아가믄 세리 동무 오마니도  참 좋아하시갔습니다

 

 얼마나 기다리셨갔습니까

 

 글쎄, 뭐...

 

 (주먹)  아! 여기서도 보입니다

 

 뭐가?

 

 저기 조그맣게 보이는 산 말입니다

 

 - (세리) 어  - (주먹) 북한산입니다

 

 (주먹)  서울에 있디요?

 

 진짜?

 

 [잔잔한 음악]  (세리)  저게 저렇게 가깝다고?

 

 (은동)  저게 저케 가깝게 있어도

 

 우린 이제 영영 못 보는 거지요?

 

 기래도 가믄  오마니도 만날 거 아입니까

 

 난 부럽습니다

 

 어...

 

 근데 막상 난 엄마랑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서

 

 은동이도 얼른 제대해서  엄마 만나면 되잖아

 

 (치수)  약 올리니?

 

 금은동이 제대하려면  9년 7개월 남았어

 

 뭐? 9년 7개월?

 

 [세리의 놀란 숨소리]

 

 (세리)  이야, 어마어마하다

 

 우리 은동이 엄마 많이 보고 싶겠네?

 

 (은동)  예

 

 보고 싶기도 하고 걱정도 됩니다

 

 우리 고향은 여기보다 추운데

 

 땔감은 넉넉한지

 

 동생들 밥은 잘 먹는지

 

 우리 막내가 몸이 많이 약해서  감기도 잘 걸리는데

 

 다들 잘 있을 거야

 

 (세리)  너희 다 여기서 다치지 말고

 

 뭐라도 악착같이 잘 챙겨 먹고

 

 그렇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란 말이야

 

 또 혹시 아니?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될 수도 있고

 

 (치수)  헷소리하지 말고 너나 가서 잘 살라우

 

 이번에 또 돌아오면 내 진짜 확...

 

 묻어 버릴 거니까

 

 - (세리) 치...  - (치수) 산이든 강이든

 

 그러든가

 

 산이든 강이든

 

 (치수)  거, 해가 왜 이케 안 떨어지는 거네?

 

 깜깜해져야 저 시끄러운 에미나이  어서 보내지

 

 [도어 록 조작음]

 

 [도어 록 오류음]

 

 어머니, 이거 사람 불러야 돼요  마스터키도 없고요

 

 엄마가 여기 웬일이세요?

 

 문이나 열어라

 

 [도어 록 조작음]

 

 (세리)  내 생일이에요

 

 죽다 살아난 날

 

 [도어 록 조작음]

 

 [도어 록 작동음]

 

 어머님, 비번 어떻게 아세요?

 

 와, 장난 아니다  어떻게 다 알지?

 

 (혜지)  우리 집 비번도 아시는 거 아니야?

 

 동서는 걱정 안 돼?

 

 (혜지)  어머, 어머

 

 이거 홍콩 옥션에서  누가 가져갔다 그래서 누군가 했더니  [혜지가 손가락을 탁 튀긴다]

 

 이게 바로 여기 있었네  [혜지가 손뼉을 탁 친다]

 

 [잔잔한 음악]

 

 [한숨]

 

 [한숨]

 

 (세리)  커피 드세요

 

 (정연)  그래, 고맙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너 상장한다며

 

 안 그래도 네 오빠들  일 잘 안 풀리는 거 너도 알 텐데

 

 꼭 그래야겠니?

 

 [한숨]

 

 오빠들, 아버지랑 아무 상관 없이  내가 만든 회사예요

 

 (세리)  내가 만들어서 내가 키워서  내가 상장하는 거예요

 

 엄마

 

 나 여기까지 혼자 오는 거 쉽지 않았어

 

 정말 힘들었어

 

 누가 그러라고 시켰니?

 

 [어두운 음악]

 

 네 속 모를 거 같니?

 

 (정연)  네 아버지 보시라 이거잖아

 

 오빠들보다 잘난 너 봐 달라는 거잖아

 

 너 뽑아 달라는 거잖아  네가 다 갖겠다는 거잖아

 

 - 엄마  - 허, 엄마?

 

 (정연)  네가 욕심만 안 내면

 

 너랑 내 관계도 훨씬 편해질 수 있어  진짜 엄마, 딸처럼

 

 욕심이 아니라

 

 내 꿈이에요

 

 넌 꿈까지 꾸게?

 

 [가슴을 탁탁 치며]  내 인생은

 

 너 때문에 이렇게 지옥인데

 

 [정연의 한숨]

 

 [한숨]

 

 (혜지)  어머

 

 어머니, 이 각인

 

 디자이너 장 마리트가 병상에서  직접 이 사인을 한 직후에 죽었잖아요

 

 이게 그 가방이에요, 어머니

 

 오, 세상에

 

 내려놔

 

 네

 

 - 나와  - (혜지) 지금요?

 

 (정연)  그래

 

 [카메라 셔터음]

 

 (정연)  뭐 하니?  [카메라 셔터음]

 

 아...

 

 어차피 세리스초이스  합병이든 인수든 해야 하는데

 

 참고가 될까 해서요

 

 [한숨]

 

 [차분한 음악]

 

 이거 어머니 아니세요?

 

 (상아)  맞는 거 같은데?

 

 [카메라 셔터음]

 

 [풀벌레 울음]

 

 (정혁)  잘 지내시오

 

 일상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해

 

 (세리)  내 걱정은 마요, 잘 지낼 거야

 

 지금 가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금방 적응하지

 

 늘 그랬듯이 돈도 잘 벌고 잘 쓰고

 

 일도 열심히

 

 남자도 만나고

 

 남자를 만난다고?

 

 그럼? 만나지 마?

 

 아니, 뭐...

 

 (정혁)  알아서 하는데...

 

 아니, 그러지 않았나?

 

 파혼 애도 기간을 갖자고

 

 6개월이라고 했던가?

 

 그건 리정혁 씨 그러란 거였고

 

 (세리)  뭐야, 일상으로 돌아가라면서요

 

 남자들에게 돌아가란 뜻은 아니었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라며

 

 (정혁)  남자들이랑 잘 지내란 얘긴 아니었소

 

 치...

 

 6개월이면 돼요?

 

 뭐, 쯧

 

 [잔잔한 음악]

 

 (세리)  알았어요  [한숨]

 

 그럼 나 6개월만

 

 우리의 이별을 애도해 보지, 뭐

 

 우린 운명이잖아

 

 생각해 봐요

 

 어떻게 스위스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나고

 

 북한에서 또 이렇게 만나고

 

 왜요?

 

 ♪ 두렸웠던 나의 맘에  하얀 눈이 내려와 ♪

 

 남자를 만나도 되고

 

 다른 이들과 아무 일 없었듯이  잘 지내도 되오

 

 대신

 

 다신 외롭진 마시오

 

 (정혁)  혼자 풍경 좋은 곳 가서

 

 조용히 사라지겠다는 마음 따위  먹지 마시오

 

 내가 있으니

 

 옆에도 없을 거면서

 

 (정혁)  옆엔 없어도

 

 당신이 외롭지 않길 바라는

 

 내가 항상 있소

 

 사는 내내 행복하시오

 

 기래 주면 고맙갔소

 

 ♪ And I'm still, I'm here ♪

 

 [밤새 울음]

 

 (은동)  씁, 여기서 남쪽 철책선까지  어케 갑니까?

 

 (치수)  저리로 쭉 가면 역곡천이 나오지

 

 [긴장되는 음악]

 

 (치수)  거기 매생이 뗏목이 있거든

 

 물 불어나문 수류탄 몇 방 터트려서  물고기 잡을 때 쓰려고 숨겨 둔 거

 

 (치수)  그다음이 밀로야

 

 높이 40cm 정도의

 

 사각형 모양의  화강석으로 표시가 된 길이디

 

 그 돌이 있는 곳에서 반경 10m 내엔  지뢰가 없다고 보면 돼

 

 그 길을 쭉 가다 보문  남방 한계선이지

 

 (은동)  아, 생각보다 멀지 않구먼요

 

 (치수)  응, 기렇지, 뭐

 

 여기서야 뭐, 왔다 갔다 해도  뭐, 한두 시간이문...

 

 (주먹)  긴, 긴데 지금 시간이...

 

 (광범)  곧 새벽인데

 

 와 안 오지?

 

 길 헤매시는 거 아닙니까?

 

 (치수)  기럴 리가...

 

 [차분한 음악]

 

 (세리)  왜요?

 

 (정혁)  이 길이 아닌가 보오

 

 (세리)  또?

 

 왜 자꾸 아니지?

 

 근데 나 저기 아까 본 거 같은...

 

 [세리의 당황한 신음]

 

 [정혁의 난감한 신음]

 

 여기가 워낙 그 길이 그 길 같고...

 

 리정혁 씨

 

 솔직히 말해 봐요

 

 뭐를?

 

 길치죠?

 

 (치수)  중대장 동지는  우리 중 누구보다 밤눈이 밝고

 

 길을 잘 찾는 사람이거든

 

 응

 

 [한숨]

 

 내가 밤눈이 워낙 어둡고

 

 길도 잘 못 찾아서

 

 미안하오

 

 기러니까 지금까지  안 오고 있다는 것은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났거나

 

 - (은동) 예?  - (주먹) 예?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거지

 

 - (주먹) 아...  - (은동) 아...

 

 [한숨]

 

 다 왔소

 

 드디어 왔네요

 

 (정혁)  저쪽에 나무 보이시오?

 

 저 독립수 앞으로 걸어가시오

 

 그곳이 남측 수색조가 나오는 출입구요

 

 곧 새벽 수색조가 도착할 시간이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시오

 

 혹시...

 

 (세리)  저, 저기까지만 같이 가는 건 안 되고?

 

 (정혁)  여기선 한 걸음도 넘어갈 수 없소

 

 저 돌만 보면서 걷는 거 잊지 말고

 

 리정혁 씨도 나 아주 잊지는 말고

 

 못 잊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여자를  무슨 수로 잊갔소

 

 [피식한다]

 

 떨어진 게 아니고 강림

 

 기렇다 칩시다

 

 갈게요

 

 [차분한 음악]

 

 [슬픈 숨소리]

 

 [울먹인다]

 

 [세리의 놀란 숨소리]

 

 한 걸음 정돈...

 

 괜찮갔지

 

 [애절한 음악]

 

 ♪ 어떤 날엔 그대를 ♪

 

 ♪ 어떤 날엔 그려요 ♪

 

 ♪ 모른 체 참아내는 일  너무 힘에 겨워 난 ♪

 

 ♪ 맘이 가는 대로 ♪

 

 ♪ 그렇게 맘껏 슬퍼져요 ♪

 

 ♪ 어떤 날엔 그대를 ♪

 

 ♪ 어떤 날엔 빌어요 ♪

 

 ♪ 혼자서 사랑하는 일  조금 서러워져 난 ♪

 

 ♪ 흐르는 눈물 ♪

 

 ♪ 닦아 주러 와줘요 ♪

 

 [문이 달칵 열린다]

 

 [세리의 한숨]

 

 참, 사람이

 

 책들이 다 이렇게  어둡고 어렵고 말이지

 

 아휴...

 

 [부드러운 음악]

 

 ♪ 나의 마음이 움직여  그냥 길을 따라 걸어가도 ♪

 

 ♪ 다시 여기 너의 앞에 ♪

 

 ♪ 따뜻한 어깨에 기대어 ♪

 

 ♪ 이렇게 다시 너를 느껴 ♪

 

 ♪ I’m still and I’m here  이렇게라도 널 담을게 ♪

 

 ♪ 우리 서로 밀어내더라도 ♪

 

 ♪ 그 때문에 더 깊이 새겨져  여기 또 거기 ♪

 

 ♪ 다른 하늘이라도 ♪

 

 ♪ 너의 맘을 기억해  and I'm still, I'm here ♪


.사랑의 불시착 

.영화 & 드라마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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